[ 조회수 : 488   등록일 : 2023-06-18 ]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서 본성동에 걸쳐 있는 둘레 1.7km의 석성(石城)으로 축조된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이다.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우왕 5년(1379)에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성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서장대, 호국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1]진주목사 [2]김시민 장군이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6]서예원 및 7만여명의 민관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국한 곳이다. 이때 전사한 [3]최경회의 후처이던,  [4]논개論介)는 왜장을 껴안고 [5]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충절을 다한 곳이다

진주성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1] 진주목사 : 진주목을 다스리는 책임관. 오늘날의 광역시장 급이다. 경기도(여주·파주·양주), 충청도(충주·청주·공주·홍주), 전라도(나주·광주·제주·능주), 경상도(상주·진주·성주), 강원도(원주), 황해도(황주·해주), 함경도(길주), 평안도(안주·정주)등이 있었다
[2] 김시민(金時敏, 1554년 ~ 1592년) :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
[3] 최경회(崔慶會, 1532년 ~ 1593년)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자살하였다
[4] 논개(論介, 1574년 ~ 1593년) : 주논개(朱論介)
[5] 남강 : 경남 진주시를 관통하는 낙동강의 지류
[6] 서예원(徐禮元, 1548년~1593년) : 김시민 진주목사의 후임. 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자 달아나 숨었으나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촉석문(矗石門) : 진주성의 동문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관문이다. 1972년에 복원하였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촉석문(矗石門) : 진주성의 동문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관문이다. 1972년에 복원하였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촉석문(矗石門) : 진주성의 동문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관문이다. 1972년에 복원하였다. 촉석문 정면으로 촉석루가 보이고 있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촉석문(矗石門) : 진주성의 동문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관문이다. 1972년에 복원하였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 촉석루(晋州 矗石樓) : 고려 고종 28년(1241) 진주목사 김지대(1190~1266)가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지었다. 전쟁때는 장수의 지휘소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 촉서루는 강가에 바위가 우뚝우뚝 솟아 있다고 하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일명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1618) 병사 남이흥이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고쳐 지어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불탔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에 진주고적보조회가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의 성금으로 고쳐지은 것으로 건물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있다.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 촉석루(晋州 矗石樓) : 고려 고종 28년(1241) 진주목사 김지대(1190~1266)가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지었다. 전쟁때는 장수의 지휘소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 촉서루는 강가에 바위가 우뚝우뚝 솟아 있다고 하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일명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1618) 병사 남이흥이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고쳐 지어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불탔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에 진주고적보조회가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의 성금으로 고쳐지은 것으로 건물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있다.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촬영일 : 2023-06-09]
신발을 벗고 촉성루에 올라갈 수 있으며 촉석루에서 남강과 진주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촬영일 : 2023-06-09]
촉성루에서 남강변으로 연결된 문
[촬영일 : 2023-06-09]
진주 의암(義巖) :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바위이다. 논개의 순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의로운 바위라는 뜻의 의암으로 부른다. 이전에는 주변에 물결이 거세어서 위험하다는 의미로 위암(危巖)이라는 별칭이 있었다고 한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 의암(義巖) :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바위이다. 논개의 순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의로운 바위라는 뜻의 의암으로 부른다. 이전에는 주변에 물결이 거세어서 위험하다는 의미로 위암(危巖)이라는 별칭이 있었다고 한다
[촬영일 : 2023-06-09]
남강변에서 바라본 진주성벽과 촉석루
[촬영일 : 2023-06-09]
진주의기사 : 의기사는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의기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 사당은 영조 16년(1740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처음 세운 뒤 수차례 고쳐지었다. 지금의 사당은 1956년 진주의기창렬회에서 힘을 모아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촬영일 : 2023-06-09]
호국종각 : 진주성 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문화재 육성기금으로 1980년에 제작한 범종이다. 종신에는 각종 문양이 부조되어 있고 이은상 시조 시인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종신은 2.7m, 지름은 1.7m이며 매년 연말에 제야의 종 타종 행사를 호국의 종각에서 시행하고 있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촉석문(矗石門)과 남강
[촬영일 : 2023-06-09]
김시민 전공비 : 임진왜란때 진주성에서 왜적을 물리쳐 공을 세웠으나 그 과정에서 사망한 김시민의 전공을 새긴 비석이다. 선주 25년(1592년) 진주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장수들과 의병, 백성들이 힘을 합쳐 3,800명의 군사로 2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치고 진주성을 온전히 지킨 과정을 기록 해 놓았다. 대략적인 내용은 김시민이 뛰어난 전략으로 왜적을 물리쳤으나 죽은 척 숨어있던 왜병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고, 드 뒤 나라에서 공훈을 인정하여 선무공신에 이름을 올린 사실을 밝힌 것이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 촉석 정충단비 : 선조 25년(1593년)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인물들의 충절과 전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정충단은 진주성의 함락과 함께 순국한 김천일 등 여러 장수와 병사, 백성 등 7만여 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제단으로 비석에는 그들의 장렬한 행적이 새겨져 있다. 현재 정충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비석만 남아있다. 이 비석은 숙종 12년(1686년)에 세워졌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 단 : 이 단은 진주성의 임진대첩과 계사순의 때에 순절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진주 시민의 소망을 담아 문화공보부와 진주시가 세운 제단이다. 1985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87년 12월에 마쳤다. 단의 크기는 가로 18m, 세로 24m, 높이 3.6m이고 3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단 위에 가로 9.7m, 높이 3.5m의 대첩비를 세웠다. 단의 왼쪽과 오른쪽 옆면에는 돋을새김으로 당시의 역사적 장면을 표현하였고, 앞뒤 면에는 임진대첩과 계사순의의 역사적 기록을 새겼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 단 : 이 단은 진주성의 임진대첩과 계사순의 때에 순절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진주 시민의 소망을 담아 문화공보부와 진주시가 세운 제단이다. 1985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87년 12월에 마쳤다. 단의 크기는 가로 18m, 세로 24m, 높이 3.6m이고 3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단 위에 가로 9.7m, 높이 3.5m의 대첩비를 세웠다. 단의 왼쪽과 오른쪽 옆면에는 돋을새김으로 당시의 역사적 장면을 표현하였고, 앞뒤 면에는 임진대첩과 계사순의의 역사적 기록을 새겼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 단 : 이 단은 진주성의 임진대첩과 계사순의 때에 순절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진주 시민의 소망을 담아 문화공보부와 진주시가 세운 제단이다. 1985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87년 12월에 마쳤다. 단의 크기는 가로 18m, 세로 24m, 높이 3.6m이고 3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단 위에 가로 9.7m, 높이 3.5m의 대첩비를 세웠다. 단의 왼쪽과 오른쪽 옆면에는 돋을새김으로 당시의 역사적 장면을 표현하였고, 앞뒤 면에는 임진대첩과 계사순의의 역사적 기록을 새겼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 쌍충 사적비 (晋州 雙忠 事蹟碑) :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을으켜 활동한 제말장군과 그의 조카인 제홍록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한 집안의 두 충신이라는 뜻에서 쌍충이라고 하였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 쌍충 사적비 (晋州 雙忠 事蹟碑) :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을으켜 활동한 제말장군과 그의 조카인 제홍록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한 집안의 두 충신이라는 뜻에서 쌍충이라고 하였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우물 : 진주성 내 우물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우물로서 2013년 9월에 복원되었다. 우물의 너비는 1.5m쯤이고 깊이는 8.4m인데 더로운 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둥근 모양의 둘레돌을 주변에 놓았다
[촬영일 : 2023-06-09]
충무공 김시민장군(忠武公 金時敏將軍) : 진주 목사 김시민을 위시한 관군 3천 8백여명의 병력으로 왜군 2만 대군을 6일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승리하였다
[촬영일 : 2023-06-09]
충무공 김시민장군(忠武公 金時敏將軍) : 진주 목사 김시민을 위시한 관군 3천 8백여명의 병력으로 왜군 2만 대군을 6일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승리하였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공북문(晋州城 拱北門) : 진주성의 북문으로 공(拱)은 두 손을 맞잡아 가슴까지 올려 공경한다는 뜻이고, 북(北)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 방향을 뜻한다. 즉, 북쪽에 계신는 임금을 두 손을 모아 경경의 뜻을 표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공북문(晋州城 拱北門) : 진주성의 북문으로 공(拱)은 두 손을 맞잡아 가슴까지 올려 공경한다는 뜻이고, 북(北)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 방향을 뜻한다. 즉, 북쪽에 계신는 임금을 두 손을 모아 경경의 뜻을 표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촬영일 : 2023-06-09]
영남포정사문루 (晉州 嶺南布政司 門樓) : 진주성에 현존하는 가장 오랜된 건물로 조선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이며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렸다. 진주목의 진주성 내성의 관문이었다. 1983년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고 2020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촬영일 : 2023-06-09]
영남포정사문루 (晉州 嶺南布政司 門樓) : 진주성에 현존하는 가장 오랜된 건물로 조선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이며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렸다. 진주목의 진주성 내성의 관문이었다. 1983년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호로 지정되었고 2020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비석군 : 조선 선조 37년(1604년)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 겸 목사 이수일의 유애비를 비롯하여 효종 10년(1656년) 목사 성이성의 청덕 유애비등 조선시대에 세워진 30여기의 비석군이다. 이 비석들은 진주성 또는 시내 각처에 있던 것을 1973년 문화재 보호협회 진주지부에서 모은것이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북장대(北將臺) : 장대는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높은 대를 가리킨다. 북장대는 진주성 서북쪽의 높은 언덕에 있으며, 이곳은 서쪽과 북쪽 일대를 한 눈에 내다볼 수 있는 요충지대이다. 마루 아래 기둥은 돌로 낮게 세웠고 누각은 난간을 둘렀으며 군사건물의 특성상 지붕을 낮게 설치하였다. 북장대의 누각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이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북장대(北將臺) : 장대는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높은 대를 가리킨다. 북장대는 진주성 서북쪽의 높은 언덕에 있으며, 이곳은 서쪽과 북쪽 일대를 한 눈에 내다볼 수 있는 요충지대이다. 마루 아래 기둥은 돌로 낮게 세웠고 누각은 난간을 둘렀으며 군사건물의 특성상 지붕을 낮게 설치하였다. 북장대의 누각 이름은 진남루(鎭南樓)이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경절사(擎節祠) : 고려의 무신 하공진(河拱辰: 미상 ~ 1011년)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향례를 받드는 사당이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경절사(擎節祠) : 고려의 무신 하공진(河拱辰: 미상 ~ 1011년)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향례를 받드는 사당이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경절사(擎節祠) : 고려의 무신 하공진(河拱辰: 미상 ~ 1011년)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향례를 받드는 사당이다. 경절사 입구의 중앙의 열일문(烈日門), 좌우측으로 충의당(忠義當)과 경충사(景忠祠)가 세워져 있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내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
[촬영일 : 2023-06-09]
산청범학리삼층석탑(山淸泛鶴里 三層石塔) : 국보 제105호, 통일신라 9세기. 이충 기단에 삼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의 석탑이다. 꼭대기 장식과 하층 기단 덮개돌 아래는 남아 있지 않다. 석탑의 재질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섬장암(閃長岩, 반짝이는 창석으로 된 암석)으로 만들어 졌고 덮개돌 이하 부분 복원에도 동일한 섬장암을 사용하였다. 석탑 외면에는 부조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상층 기단에는 8구의 갑옷을 입은 신장상(무력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이 무기를 들고 있다. 1층 탑신은 공양하는 보살상 4구가 조각되어 있는데, 정면의 보살상만 앞을 바라보고 있다. 신장상과 보살상의 초합은 독특한 사례로 9세기 통일신라 석탑 양식의 중요한 지표가 되며, 당대의 뛰어난 조각기술과 불교미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 안내판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성곽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포루 :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 선조40년(1607) 병사 김태허 (1555~1620)에 의해 진주성 내, 외성에 포루 12좌가 설치되었는데, 「여지도서」의 「경상우도병마절도영」 조에 의하면 "내성의 포루는 3곳이니 삼가, 의령, 곤양 등 3읍의 소속" 이고 "외성의 포루는 9곳이니 진주, 단성 초계, 거창, 사천 - 함양, 남해, 합천 등 3읍 소속" 이라고 하였다. 1969년부터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하였다 - 안내판 참조
[촬영일 : 2023-06-09]
진주 창렬사(晉州 彰烈祠)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창렬사는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성을 지킨 인물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경상도 관찰사였던 정사호가 처음 세운 뒤 선조 40년(1607)에 사액(賜額,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는 일)을 받았으며, 고종 5년(1868)에 홍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충민사가 헐리면서 충민사에 모셨던 김시민을 비롯한 39명의 신위를 이곳에 모셨다. 이 사당은 정사(正祠), 동사(東祠), 서사(西祠), 경충당(景忠堂), 비각 (碑閣) 등 7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 안내판 참조
[촬영일 : 2023-06-09]
진주 창렬사(晉州 彰烈祠)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창렬사는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성을 지킨 인물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경상도 관찰사였던 정사호가 처음 세운 뒤 선조 40년(1607)에 사액(賜額,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는 일)을 받았으며, 고종 5년(1868)에 홍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충민사가 헐리면서 충민사에 모셨던 김시민을 비롯한 39명의 신위를 이곳에 모셨다. 이 사당은 정사(正祠), 동사(東祠), 서사(西祠), 경충당(景忠堂), 비각 (碑閣) 등 7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 안내판 참조
[촬영일 : 2023-06-09]
진주 창렬사(晉州 彰烈祠)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창렬사는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성을 지킨 인물들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경상도 관찰사였던 정사호가 처음 세운 뒤 선조 40년(1607)에 사액(賜額,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등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는 일)을 받았으며, 고종 5년(1868)에 홍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충민사가 헐리면서 충민사에 모셨던 김시민을 비롯한 39명의 신위를 이곳에 모셨다. 이 사당은 정사(正祠), 동사(東祠), 서사(西祠), 경충당(景忠堂), 비각 (碑閣) 등 7동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 안내판 참조
[촬영일 : 2023-06-09]
호국사(護國寺) :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이 절의 원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고 한다. 고려말기에 왜구를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고 승병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절은 임진왜란 때는 승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임금께서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으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조성된 것이다. 촬영일 당일 공사가 한창중이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입구인 서문에서 바라본 호국사(護國寺) :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는 이 절의 원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였다고 한다. 고려말기에 왜구를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고 승병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절은 임진왜란 때는 승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임금께서 호국사(護國寺)란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한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으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조성된 것이다. 촬영일 당일 공사가 한창중이다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 서장대(晉州城 西將臺)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서장대는 진주성 서쪽의 지휘 장대이다. 장대는 군대를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높은 대를 말한다. 「여지도서(興地圖書, 18세기 전국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위은 전국 지리지)」에는 '누의 이름은 회룡루(回龍樓)이고 다락집'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건물은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 있었는데 1934년 진주의 서상필이 다시 지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 안내판 참조
[촬영일 : 2023-06-09]
진주성에 설치된 대형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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