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진주성 전투(晋州大捷)

대한민국 일본 사건기간 : 1592년 11월 9일~1592년 11월 13일, 조회수 : 440,   등록일 : 2021-11-26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시 진주성에서 진주[2]목사 [1]김시민과 의병, 백성이 힘을 합쳐 왜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진주대첩으로 불린다.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을 침범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1592년 4월 14일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왜군은 연승을 거듭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의 의병들이 봉기하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에 의해 7월 이후로 해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히면서 기세가 꺾인 왜군은 병력을 집결시켜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고 의병들의 봉기를 막기 위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왜군은 경상도 진해, 고성을 점령하고 진주에 도착했다. 당시 진주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현재는 내성만 남아있다), 성의 앞에는 남강이 흐르고 후방에는 넓고 깊은 [4]해자가 있었다.
 
11월 7일, 3만의 왜군본대가 도착하면서 진주성을 쉽게 점령할 것이라 생각한 왜군은 진주성을 포위하면서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성내는 김시민을 위시한 관군 3천 8백여 명과 백성이 합세하면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성외로는 홍의장군 [3]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이 왜군의 배후에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고 피리를 불면서 위협하고 있었다.
 
이윽고 11월 9일 왜군은 진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왜군의 조총에 대항하여 조선군은 [5]승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써, 백성은 돌과 뜨거운 물을 성위에서 쏟아부으면서 항전하였다. 또한 의병 2천여 명은 왜군의 후방을 기습공격했고, 홍의장군 [3]곽재우도 유격전을 전개하여 혼란에 빠뜨렸다.
 
왜군은 공격 6일째 되는날 총공세에 들어갔고 양측은 사력을 다해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이 때 앞장서서 전투를 지휘하던 [1]김시민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계속되는 공방전끝에 조선군은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고 왜군은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부상당한 김시민은 며칠동안 사경을 헤매다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전투에서 왜군 사망자는 1만명에 달했으며 패배의 충격이 너무 커서 [1]김시민의 이름을 모쿠소(목사의 일본식 발음)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키 못했으나 계속되는 북진으로 평양성까지 점령하였으나 1593년 명나라의 참전으로 휴전기로 접어들었다. 왜군은 명나라와 강화회담을 통하여 남쪽으로 물러나는 과정에서 보복으로 진주성을 공격하는 데, 이를 2차 진주성 전투라 한다.
 
진주대첩은 한산대첩과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이며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만든 중요한 승리였다.

[1] 김시민(1554년~1592년) : 조선중기 무신, 임진왜란 때의 진주목사
[2] 목 :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부, 목, 군, 현의 체제)직으로 정3품에 해당하며 경상도에는 상주, 진주, 성주가 목체제였다.
[3] 곽재우(1552년~1617년) :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의 장군이라는 뜻의 '천강홍의장군'으로 유명하다
[4] 해자 : 적의 접근,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의 둘레에 땅을 파 놓고 물을 채워 놓은 것
[5] 승자총통 : 조선 선조 8년부터 선조 11년까지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지낸 김지가 개발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휴대용 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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