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일본사건기간 : 1592년 11월 9일~1592년 11월 13일, 조회수 : 440, 등록일 : 2021-11-26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시 진주성에서 진주[2]목사 [1]김시민과 의병, 백성이 힘을 합쳐 왜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진주대첩으로 불린다.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을 침범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1592년 4월 14일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왜군은 연승을 거듭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의 의병들이 봉기하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에 의해 7월 이후로 해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히면서 기세가 꺾인 왜군은 병력을 집결시켜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고 의병들의 봉기를 막기 위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왜군은 경상도 진해, 고성을 점령하고 진주에 도착했다. 당시 진주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현재는 내성만 남아있다), 성의 앞에는 남강이 흐르고 후방에는 넓고 깊은 [4]해자가 있었다.
11월 7일, 3만의 왜군본대가 도착하면서 진주성을 쉽게 점령할 것이라 생각한 왜군은 진주성을 포위하면서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성내는 김시민을 위시한 관군 3천 8백여 명과 백성이 합세하면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성외로는 홍의장군 [3]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이 왜군의 배후에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고 피리를 불면서 위협하고 있었다.
이윽고 11월 9일 왜군은 진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왜군의 조총에 대항하여 조선군은 [5]승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써, 백성은 돌과 뜨거운 물을 성위에서 쏟아부으면서 항전하였다. 또한 의병 2천여 명은 왜군의 후방을 기습공격했고, 홍의장군 [3]곽재우도 유격전을 전개하여 혼란에 빠뜨렸다.
왜군은 공격 6일째 되는날 총공세에 들어갔고 양측은 사력을 다해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이 때 앞장서서 전투를 지휘하던 [1]김시민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계속되는 공방전끝에 조선군은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고 왜군은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부상당한 김시민은 며칠동안 사경을 헤매다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전투에서 왜군 사망자는 1만명에 달했으며 패배의 충격이 너무 커서 [1]김시민의 이름을 모쿠소(목사의 일본식 발음)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키 못했으나 계속되는 북진으로 평양성까지 점령하였으나 1593년 명나라의 참전으로 휴전기로 접어들었다. 왜군은 명나라와 강화회담을 통하여 남쪽으로 물러나는 과정에서 보복으로 진주성을 공격하는 데, 이를 2차 진주성 전투라 한다.
진주대첩은 한산대첩과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이며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만든 중요한 승리였다.
[1] 김시민(1554년~1592년) : 조선중기 무신, 임진왜란 때의 진주목사 [2] 목 :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부, 목, 군, 현의 체제)직으로 정3품에 해당하며 경상도에는 상주, 진주, 성주가 목체제였다. [3] 곽재우(1552년~1617년) :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의 장군이라는 뜻의 '천강홍의장군'으로 유명하다 [4] 해자 : 적의 접근,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의 둘레에 땅을 파 놓고 물을 채워 놓은 것 [5] 승자총통 : 조선 선조 8년부터 선조 11년까지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지낸 김지가 개발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휴대용 화기
1400년부터 1600년에 걸쳐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으로 파급된 문화, 예술 전반의 혁신 운동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중세의 기독교와 봉건 제도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의 자유, 개성의 존중을 강조한 인간 중심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였다.
영어: Renaissance
이탈리아어: Rinascimento
프랑스어: Renaissance
스페인어: Renacimiento
교회는 교황과 함께 계속되었는데 교황은 마치 황제와 같은 인물이었고, 대주교와 주교들은 옛 로마마제국의 행정관들과 똑같으며, 그들 밑으로는 지역마다 사제들이 있었다. 이 신성한 단체는 그 자체의 법률, 형벌, 교도소 그리고 조세제도를 지니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가 당시 위와 같은 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한다.
죄 많고 타락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는 것이며, 믿음을 지닌다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는것을 주장(스스로 믿는 종교)하며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함으로써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던 개혁 운동이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 :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1]위그노 전쟁은 프랑스에서 발생한 종교 전쟁이다. 1562년 3월 1일 로마 가톨릭 세력이 프랑스내 [2]칼뱅파 개신교도인 [1]위그노들에게 자행한 학살인 [3]바시학살로 인해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하층민은 물론 상업과 금융 계통의 부르주아에게 [2]칼뱅의 교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다른나라보다 잔혹하게 박해를 받았다. 1562년 4월 2일 파리의 모든 [1]위그노들에 대한 감금, 추방 및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에 각지의 개신교도들이 들고 일어나 양 종교 간의 피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백년전쟁 이후 한세기만에 프랑스 전 국토가 전장이 되었다.
이러한 위그노 전쟁은 1598년 [6]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개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함으로써 36년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개신교도의 예배는 불가하였고 구교와 신교의 재판도 공정하지 못하는 등.. 탄압과 충돌이 계속되었고, 급기야 1686년 [7]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지하였다. 결국 1787년 [8]루이 16세에 의하여 관용칙령이 발표됨으로써 프랑스 개신교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위그노 전쟁으로 백년전쟁이후 프랑스를 이끈 [4]발루아 왕조가 무너지고, [5]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1] 위그노(Les Huguenot) :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칼뱅의 개혁을 지지하던 개신교 신자 [2] 장 칼뱅(Jean Calvin, 1509년~1564년) : 종교개혁가. 프랑스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 [3] 바시학살(Massacre of Vassy) : 1562년 3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시(Vassy)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측의 군대가 창고에 모여서 예배중인 개신교인들을 습격하여 학살한 사건 [4] 발루아 왕조(House of Valois) : 1328년에서 1589년까지의 프랑스 왕국의 왕조. 필리프 6세부터 앙리 3세까지의 왕조 [5] 부르봉 왕조(House of Bourbon) : 1589년부터 1791년까지 그리고 1814년부터 1830년까지 프랑스왕국의 왕조. 앙리4세(재임, 1589년~1610년)부터 앙리 5세(재임, 1830년)까지의 왕조 [6] 앙리 4세(프Henri IV de France,1553년~1610년) : 프랑스 카페 왕조의 분가인 부르봉 왕가 최초의 왕(재위 : 1589년 8월 2일-1610년 5월 14일) [7]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3대 국왕(재위,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태양왕으로 알려져 있다 [8]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네덜란드(혹은 저지대)는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즉 베네룩스 지역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릴까지 포함하여 총 17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는 무적함대를 이끌며 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합스부르크 왕국의 스페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네덜란드 17개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개신교의 교세가 확산되자 이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 1세는 반기를 들면서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라는 두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과 대립하여 1588년 무적함대를 구성하여 영국으로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대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로 해상권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1600년 스페인과 해전에서 승리를 하며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의 후반부에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종교개혁 이후 야기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30년간의 종교전쟁(1618~1648)에 휘말렸으나 1648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고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 Empire)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부르는 말이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전체와 루마니아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이탈리아, 폴란드의 남부 등이 포함된다.
*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1598년
* 오라녜 공(Prins van Oranje) : 네덜란드의 왕위 계승자의 칭호
* 빌럼 1세(William I, 1533년~1584년) :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스페인과 가톨릭에 저항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의 국부로 빌럼 1세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또한 침묵공(De Zwijger)이라고도 불린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과의 간헐적으로 벌어진 전쟁으로 공식적으로 선포된 전쟁이 아니었다.
[1]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등을 영유하고, 남미의 브라질과 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식민지를 개척하고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패자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스페인은 해외 식민지의 유지와 금과 은을 수송하는 상선을 보호하며, 동시에 지중해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세력을 막기 위해 그 유명한 무적함대를 건설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통치 아래 있던 네덜란드는 [1]펠리페 2세의 종교적인 탄압과 경제적 착취에 항거하여 1566년부터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당시 잉글랜드의 [4]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국의 안정과 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네덜란드에 잉글랜드 군사 원정으로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1587년 카디스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쳤지만, 이후 [5]드레이크-[6]호킨스의 원정(1595년), [7]에식스-롤리 원정(1597)에서 큰 실패를 겪었다. 1596년, 1597년, 1601년에 스페인 함대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상대로 추가로 파견되었으나, 이 역시 주로 악천후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전쟁은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네덜란드, 프랑스, 아일랜드 전역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1604년 스페인의 [2]펠리페 3세와 잉글랜드의 [3]제임스 1세가 맺은 런던 조약으로 종식되니다. 이 조약에서 영국과 스페인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군사 개입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무적함대가 잉글랜드에 대패하면서 스페인의 국위가 실추된 것은 물론 이 전쟁 이후로 스페인의 국력은 점차 내리막길을 걸어 이후 벌어진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사실상 몰락하게 된다. 또한 30년 전쟁 이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까지 완전히 독립하게 되면서 스페인은 유럽 최강국에서 유렵의 2등 국가로 내려앉게 된다. 반면에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후 대영제국까지 발전하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 펠리페 2세(Philip II, Felipe II, 1527년~1598년)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 1556년 1월 16일 ~ 1598년 9월 13일), 포르투갈 왕국의 왕(재위:1580년 9월 12일 ~ 1598년 9월 13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1554년 7월 25일 ~ 1558년 11월 17일).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을 건설한 왕
[2] 펠리페 3세(Felipe III, 1578년~1621년) :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제3대 국왕 겸 포르투갈의 국왕(재임 : 1598년 9월 13일~1621년 3월 31일)
[3] 제임스 1세(James I, 1566년~1625년) :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최초로 브리튼 제도 전체를 다스린 왕이자 최초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를 총괄해서 통치하게 된 영국의 국왕. 잉글랜드 국왕(재임 : 1603년 3월 24일 ~ 1625년 3월 27일), 스코틀랜드 국왕(재임 : 1567년 7월 24일~1625년 3월 27일)으로 '제임스 6세'라고 불리는데 제임스 1세로 유명하다.
[4]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5]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년~1596년) :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로 영국에서는 넬슨제독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6] 존 호킨스(John Hawkins,1532년~1595년) : 카비르해의 해적의 선구자. 영국의 노예상인이자 해군 사령관
[7] 에식스-롤리 원정(Essex-Raleigh, Islands Voyage) :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파견하고 네덜란드기 연합하여 지원하여 스페인 함대를 파괴하는 야심찬 작전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네덜란드 함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성공하지 못했다. 제독 겸 총사령관으로서 에식스 백작인 로버트 데버루 경, 중장으로서 서퍽 백작 토머스 하워드 경, 후방 제독으로서 월터 롤리 경이 이끌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그리고 명나라가 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동아시아는 7년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591년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려 하는 데 조선이 길을 인도하라는 문서를 조선에 보내면서 조선침략의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상황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으며 거절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1592년 4월 13일 약 20만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병하여 침략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 점령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북상하면서 17일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성이 함락시켰다. 이후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여 7월 9일 개성까지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이에 7월 19일 평양으로 피신했던 조선 왕인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신하였고 평양성은 60일만에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의주로 도망친 선조는 명나라에 계속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자국의 영토까지 전쟁이 번지는 형편을 막으려면 조선에서 적을 방어해야 상책이라는 판단하여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1593년 명나라가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가 대패하면서 주춤하기 시작하였다. 연속되는 전투에서 명나라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후 명나라는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일본과 협상을 하였다.
협상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고 결국은 1596년 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은 정유재란으로 재침하였다. 1년후인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기나긴 전쟁은 1598년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임진왜란은 7년전쟁으로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많은 문화재가 파손되었으며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또한 명나라군, 일본군이 조선땅에 주둔하면서 일반 백성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 전쟁을 한국은 임진왜란/정유재란, 일본은 풍신수길정벌, 중국은 항왜원조라 부른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년~1598년) :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시키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 선조(1552년~1608년) : 조선의 제14대 국왕. 재위 : 1567년~1608년
* 의주군 : 평안북도 북서쪽의 압록강에 접한 군. 임진왜란당시 선조의 피신처
* 명나라 :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이며 중국 최후의 한족 왕조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정발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하루만에 동래성에 도달했다.
부산진 전투에 이어 일어난 임진왜란 두 번째 전투로 동래 부사 송상현이 2시간을 버티며 일본군을 끝까지 막아냈으나 결국 전사하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임진왜란의 서막을 알리는 전투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자 전투를 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서 송상현에게 보여주었다.
"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이에 송상현은
"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라는 답을 했다. 이후 일본은 공격을 시작했다.
동래성의 조선군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성이 뚫리고 동래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이 비록 적장이긴 하나 그의 용기와 충절에 감탄했고,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송상현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했다.
전투 당시 동래성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다. 전투 중에도 일본군의 무차별 살육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며, 전투가 끝난 후에도 동래성의 백성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일본군한테 참혹하게 처형된 뒤 해자에 파묻혔다.
이는 2005년 5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동래성 외곽 해자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면서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 약 80여 구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 송상현(1551년~1592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의 장수. 부산 동래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에 맞서 성을 지키며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 정발(1553년~1592년) : 조선 중기의 무신. 부산진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부사 : 조선시대 지방의 장관직.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은 부, 목, 군, 현의 체제였다
* 고니시 유키나가 :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의 선봉장중의 한명
* 해자 : 적의 접근,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의 둘레에 땅을 파 놓고 물을 채워 놓은 것
1592년(선조 25년) 5월 부산 앞바다를 뒤덮었던 일본군은 불과 20일만에 무방비상태의 조선 국토의 절반을 휩쓸었다.
옥포 해전(玉浦海戰)은 거제시 동쪽에 위치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며 조선군의 최초승전이다
* 옥포 :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 도도 다카토라(1556년~1630년) : 센고쿠 시대 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활약한 다이묘(일본 지방의 영주)
* 센고쿠 시대 : 일본에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계속된 내란의 시기. 일본 전국 시대이라고 한다
* 에도 시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막부가 일본을 통치한 1603년부터 1868년까지의 시기
[1]사천해전은 일본수군 13척이 격침되었고 거북선이 최초로 실전에 투입되었던 해전이다.
일본 수군은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하는 등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을 기도하였다. 이순신은 7월 6일 거제를 출발하여 7월 8일 노량에 도착하여 경상우수사 [4]원균과 합류하여 사천으로 이동중 왜선 1척을 발견하여 격침시킨 뒤 사천 포구에 이르렀다.
해안가 선창에는 왜선 12척이 진을 치고 있었고,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으로 일본 수군이 먼 바다까지 좇아오자 조선 수군 함대는 뱃머리를 돌려 반격하였다.
최전방 돌격선으로 [2]이언량, [3]이기남이 지휘를 한 거북선이 맡았으며, 그 뒤를 이은 판옥선들이 화포공격을 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군 함대는 사천 포구쪽으로 도주하였고 10척이 격침되었다. 일본군이 내륙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기위하여 왜선 2척은 남겨 놓았다.
나머지 2척으로 도주하려던 일본군 패잔병은 조선군에 의해 격침되어 왜선 13척 모두 격침되었다.
이 전투에서 거북선은 최전방 돌격선으로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후 [5]한산도대첩을 비롯한 각종 해전에서 위용을 떨치게 된다.
[1] 사천시 : 경상남도 서남부에 있는 도시이 1995년 5월 10일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통합되었다
[2] 이언량(李彦良, ? ~ 1598년) :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의 군관으로서 최초의 거북선 돌격장. 1592년 6월 16일(5월 7일) 옥포해전에서 돌격장으로 참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당항포해전에서 거북선 우귀선 돌격장으로 출전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3] 이기남(李奇男) : 이순신 휘하의 군관으로 당포(唐浦)해전에 거북선 돌격장, 한산해전에선 좌귀선 돌격장으로 출전하였다. 우귀선 돌격장은 박이량이었다
[4] 원균(元均, 1540년~1597년) :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수
[5] 한산도대첩 :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일본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학익진 전술로 유명하다. 진주성대첩,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
임진왜란당시 이순신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가 출전하여 사천·당포 해전에 이어 왜군과 세 번째로 치른 해전이다.
1592년 7월 12일 조선수군은 앞서 승리로 이끌었던 당포해전 때 도주한 왜선이 당항포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그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여 총 51척의 연합함대를 구성하였다.
다음날 조선 연합함대는 당항포로 진격하여 왜선 26척을 격파하고 적수 50여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