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회수 : 339 등록일 : 2020-12-29 ]
공산성은 백제시대 웅진도읍기(475~538년)의 공주를 방어하기 위한 왕성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성곽이다. 금강변에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쌓아 천혜의 요새와 같다. 문주왕원년에 한강유역(한성)일대를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에게 빼앗긴 직후에 즉위한 문주왕이 공주(웅진)로 천도하였다.
공산성은 문주왕을 비롯해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년)에 부여(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 백제의 왕성이었다.
공산성은 백제 시대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이 성은 금강에 접한 해발 110m의 산에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형 산성으로 축조되었는데,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 선조, 인조 이후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현재는 동쪽의 735m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석성이다.
성의 길이는 총 2,660m(토성 735m, 성성 1,925m)이고, 동서남북 네 곳에서 문 터가 확인되었는데, 남문인 진남루(鎭南樓)와 북문인 공북루(洪北樓)가 남아있었고, 1993년에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여 각각 영동루(迎東樓)와 금서루(錦西樓)로 명명하였다.
성곽길을 따라 걷다보면 금강을 낀 공주시를 한눈에 볼 수가 있어 트래킹을 하기에도 최적의 장소이므로 백제의 숨결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2015년 7월에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출처 : 공주시
* 문주왕(文周王, ? ~ 477년) : 백제의 제22대 국왕으로 문원왕, 문연왕이라고도 한다. 재위 475년 ~ 477년
* 선조(宣祖, 1552년~1608년) : 조선의 제14대 임금. 재위 1567년~1608년
* 인조(仁祖, 1595년~1649년) : 조선의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1649년
공산성은 문주왕을 비롯해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년)에 부여(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 백제의 왕성이었다.
공산성은 백제 시대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이 성은 금강에 접한 해발 110m의 산에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형 산성으로 축조되었는데,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 선조, 인조 이후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현재는 동쪽의 735m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석성이다.
성의 길이는 총 2,660m(토성 735m, 성성 1,925m)이고, 동서남북 네 곳에서 문 터가 확인되었는데, 남문인 진남루(鎭南樓)와 북문인 공북루(洪北樓)가 남아있었고, 1993년에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여 각각 영동루(迎東樓)와 금서루(錦西樓)로 명명하였다.
성곽길을 따라 걷다보면 금강을 낀 공주시를 한눈에 볼 수가 있어 트래킹을 하기에도 최적의 장소이므로 백제의 숨결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2015년 7월에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출처 : 공주시
* 문주왕(文周王, ? ~ 477년) : 백제의 제22대 국왕으로 문원왕, 문연왕이라고도 한다. 재위 475년 ~ 477년
* 선조(宣祖, 1552년~1608년) : 조선의 제14대 임금. 재위 1567년~1608년
* 인조(仁祖, 1595년~1649년) : 조선의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1649년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금서루(公山城 錦西樓) 입구 비석군 :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들이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 등 47기가 있다. 대다수는 인물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새긴 송덕비인데, 여기에는 '영세불망비, 청간선정비, 거사비, 만세불망비, 유애불망비, 청덕선정비'등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우의정, 도순찰사, 관찰사, 암행어사, 목사, 판관, 군수, 우영장, 중군 등 주로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아에 배치되었던 관리의 송덕비가 많다(출처 : 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금서루(錦西樓) 1 : 공산성 4개 성문중 서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이다. 성 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문헌 기록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안에서 바라보는 금서루(錦西樓) : 공산성 4개 성문중 서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이다. 성 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문헌 기록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성벽에서 바라보는 공산성 금서루(錦西樓) : 공산성 4개 성문중 서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이다. 성 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문헌 기록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영동루(迎東樓) 1 : 공산성의 4개 성문중 동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로 백제시대 성벽이 축소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1980년 발굴 당시 문 터와 문 양옆에서 문을 지탱하고 있던 받침들을 확인하였다. 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1859년(철종10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에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문루의 이름을 알 수 없어서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영동루라고 지었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영동루(迎東樓) 2 : 공산성의 4개 성문중 동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로 백제시대 성벽이 축소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1980년 발굴 당시 문 터와 문 양옆에서 문을 지탱하고 있던 받침들을 확인하였다. 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1859년(철종10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에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문루의 이름을 알 수 없어서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영동루라고 지었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영동루(迎東樓) 3 : 공산성의 4개 성문중 동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로 백제시대 성벽이 축소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1980년 발굴 당시 문 터와 문 양옆에서 문을 지탱하고 있던 받침들을 확인하였다. 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1859년(철종10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에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문루의 이름을 알 수 없어서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영동루라고 지었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공북루(洪北樓) 1 : 공산성의 북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로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주 출입문이다. 본래 공북루 자리에는 망북루(望北樓)가 있었는데 허물어져 터만 남아있었다.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1603년(선조36년)에 공산성을 크게 고쳐 쌓고, 이때 공북루와 그 옆에 월파당(月波當)을 함께 지었다.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월파당은 1954년에 철거되었다. 공북루의 아래쪽은 성으로 통하는 통로로 위쪽은 마루를 만들어 금강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문루 안에는 여러 편의 글과 시를 걸어두었다(출처 : 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공북루(洪北樓) 2 : 공산성의 북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로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주 출입문이다. 본래 공북루 자리에는 망북루(望北樓)가 있었는데 허물어져 터만 남아있었다.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1603년(선조36년)에 공산성을 크게 고쳐 쌓고, 이때 공북루와 그 옆에 월파당(月波當)을 함께 지었다.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월파당은 1954년에 철거되었다. 공북루의 아래쪽은 성으로 통하는 통로로 위쪽은 마루를 만들어 금강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문루 안에는 여러 편의 글과 시를 걸어두었다(출처 : 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공북루(洪北樓) 3 : 공산성의 북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로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주 출입문이다. 본래 공북루 자리에는 망북루(望北樓)가 있었는데 허물어져 터만 남아있었다.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1603년(선조36년)에 공산성을 크게 고쳐 쌓고, 이때 공북루와 그 옆에 월파당(月波當)을 함께 지었다.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월파당은 1954년에 철거되었다. 공북루의 아래쪽은 성으로 통하는 통로로 위쪽은 마루를 만들어 금강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문루 안에는 여러 편의 글과 시를 걸어두었다(출처 : 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진남루(鎭南樓) 1 : 공산성의 남문이자 정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남쪽의 3도, 즉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의 관문이었다. 공산성은 사방에서 문 터가 확인되는데 그중에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는 성문이 남아있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다. 이에 1993년 동문 터에는 영동루를, 서문 터에는 금서루를 다시 세웠다. 진남루는 여러 차례 고쳐 지었지만 그 위치와 모습은 본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있는 성문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고 다시 세운 것이다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진남루(鎭南樓) 2 : 공산성의 남문이자 정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남쪽의 3도, 즉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의 관문이었다. 공산성은 사방에서 문 터가 확인되는데 그중에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는 성문이 남아있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다. 이에 1993년 동문 터에는 영동루를, 서문 터에는 금서루를 다시 세웠다. 진남루는 여러 차례 고쳐 지었지만 그 위치와 모습은 본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있는 성문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고 다시 세운 것이다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진남루(鎭南樓) 3 : 공산성의 남문이자 정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남쪽의 3도, 즉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의 관문이었다. 공산성은 사방에서 문 터가 확인되는데 그중에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는 성문이 남아있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다. 이에 1993년 동문 터에는 영동루를, 서문 터에는 금서루를 다시 세웠다. 진남루는 여러 차례 고쳐 지었지만 그 위치와 모습은 본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있는 성문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고 다시 세운 것이다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에서 바라본 풍경 1 : 아래에는 공산성의 4개 성문중 공북루가 보인다. 공북루앞 남쪽의 넓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백제시대 대규모 왕궁관련유적지가 보이며 뒷편은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에서 바라본 풍경 2 : 아래에는 공산성의 4개 성문중 공북루가 보인다. 공북루앞 남쪽의 넓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백제시대 대규모 왕궁관련유적지가 보이며 뒷편은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에서 바라본 풍경 3 : 공산성의 성곽이 용의 형상과 같은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용의 순 우리말인 미르를 붙여 미르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에서 바라본 풍경 4 : 금강철교(금강교)는 산성동과 신관동을 연결하는 다리이며 금강을 붉게 물들이는 장엄한 일출을 볼 수 있고 미르섬은 공산성의 성곽이 용의 형상과 같은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용의 순 우리말인 미르를 붙여 미르섬이라 부르게 되었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공산정(公山亭) : 공산정은 공산성 서북쪽 정상에 있는 정자이다. 공산성 안에 있는 백제 왕궁 관련 유적을 비롯하여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금강철교등 공주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금강의 낙조와 야경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공산정에 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으나 18세기 후반의 충청도읍지 공주목 지도를 보면 '후락정(後樂亭)'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공산정은 1970년대에 새롭게 만들 것으로 이전에는 유신각 또는 전망대 등으로 불렷다. '공산정'이란 이름은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지은 것이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영은사(靈隱寺) 1 : 1457년(세조4)에 세워진 공산성(公山城)내에 있는 사찰이다.묘은사로 불렸다가 이괄의 난(1624)때에 이 절에 피신한 인조가 은적사라 하였다가 다시 영은사로 고쳤다.1616년(광해군8년)에는 이곳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고, 여기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하였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영은사(靈隱寺) 2 : 1457년(세조4)에 세워진 공산성(公山城)내에 있는 사찰이다.묘은사로 불렸다가 이괄의 난(1624)때에 이 절에 피신한 인조가 은적사라 하였다가 다시 영은사로 고쳤다.1616년(광해군8년)에는 이곳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고, 여기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하였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공주 잠종냉장고 : 충청남도에 있는 잠업농가에 누에 씨를 보급하기 위해 만든 지하 저장시설이다. 1914년 충남잠업강습소가 공주에 생기면서 누에를 치는 보관소와 뽕밭이 새로 조성되었다. 누에의 먹이인 뽕잎이 나는 5월까지 누에의 부화를 늦추기위해 잠종냉장고가 공산성에 만들어졌다. 겨울철 금강의 얼음을 왕겨에 싸서 잠종냉장고에 넣어두면 여름내내 녹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를 이용하여 누에의 부화시기를 늦추었다. 공산성 내의 잠종냉장고가 있는 지역을 '빙고재'라고 하는데 [공산지]에는 공산성 안에 빙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조선시대 빙고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연지(蓮池) : 공산성 안에서 사용하는 물을 저장하던 연못이다. 발굴 조사결과 조선시대 기와와 자기조각등이 확인되었다. 백제시대에는 영은사 앞쪽에 연못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연지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모습이다. 윗부분은 길이 22m, 너비 11.5m이고 아랫부분은 길이 9m, 너비 4m이며 깊이는 10.2m이다. 동쪽과 서쪽벽에는 40cm 크기의 배수로가 있어 물이 쉽게 흐르도록하였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연지(蓮池)와 만하루(挽河樓) 1 : 만하루는 연못과 금강 사이에 있는 누각이다. 현재 만하루 앞쪽에 있는 성벽은 조선시대에 확장한 것으로 공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함께 경치를 감상하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수로 무너진 후 1982년 발굴 조사 과정에서 건물 터를 확인하였다. 연못과 함께 [여지도]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현재의 누각은 8각으로 다듬은 기둥 받침돌을 그대로 이용하여 다시 세운것이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연지(蓮池)와 만하루(挽河樓) 2 : 만하루는 연못과 금강 사이에 있는 누각이다. 현재 만하루 앞쪽에 있는 성벽은 조선시대에 확장한 것으로 공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함께 경치를 감상하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수로 무너진 후 1982년 발굴 조사 과정에서 건물 터를 확인하였다. 연못과 함께 [여지도]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현재의 누각은 8각으로 다듬은 기둥 받침돌을 그대로 이용하여 다시 세운것이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 정유재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8년(선조31)에 명나라의 세 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가 왜군에게 피해를 많이 받은 공주에 들어와 머물면서 주민들을 보호한 업적을 기린 송덕비이다. 명국삼장비는 1599년 금강변에 세웠으나 홍수로 매몰되자 1713년(숙종39)에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비석에 쓰여 있던 왜구라는 글자를 지우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묻어버렸지만 1945년 광복이 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세웠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광복루(光復樓) : 공산성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 2층 누각이다. 공산성안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위치롤 옮기고 웅심각(雄心閣)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이후 공주 시민들이 힘을 모아 보수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 4월에 김구, 이시영 등이 공주를 방문하여 이곳을 둘러본 후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광복루'로 고쳤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임류각(臨流閣) 1 :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500년)에 왕궁의 동쪽에 지은 누각이다. 높이가 15m에 이르는 건물로 왕과 신하들의 연회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공산성 발굴조사과정에서 고층 누각의 모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2층 누각으로 다시 세웠다. 현재의 임류각은 백제 건축 양식인 하앙식(下昻式)을 재현하여 세웠으며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와 무덤방의 벽돌에 남겨진 무늬를 활용하였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임류각(臨流閣) 2 :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500년)에 왕궁의 동쪽에 지은 누각이다. 높이가 15m에 이르는 건물로 왕과 신하들의 연회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공산성 발굴조사과정에서 고층 누각의 모습으로 확인되어 1993년에 2층 누각으로 다시 세웠다. 현재의 임류각은 백제 건축 양식인 하앙식(下昻式)을 재현하여 세웠으며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와 무덤방의 벽돌에 남겨진 무늬를 활용하였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쌍수정사적비(雙樹亭事蹟碑) 1 :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우 비이다. 비에는 이괄의 난과 인조가 공산성으로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등이 적혀있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민이 글씨를 썼다. 쌍수정 사적비는 1624년 인조가 공주를 떠난 직후 세우려고 했으나 84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에 지금의 비석이 세워졌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과 목조 지붕 모습의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쌍수정사적비(雙樹亭事蹟碑) 2 :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여 세우 비이다. 비에는 이괄의 난과 인조가 공산성으로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등이 적혀있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민이 글씨를 썼다. 쌍수정 사적비는 1624년 인조가 공주를 떠난 직후 세우려고 했으나 84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에 지금의 비석이 세워졌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과 목조 지붕 모습의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백제 왕궁지 :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475년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 터이다. 공주 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지대에 있는데 1935년에 기마병 훈련장으로 사용하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그 후로 1985년까지는 전국자전거대회를 여는 등 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 1985~1986년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왕궁 터 주변을 평평하게 만드는 큰 토목공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백제시대 기와와 토기, 청동거울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백제 연못 : 공산성 왕궁 터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인공 연못이다. 빗물을 받아 저장하여 연못으로 사용하기도 하였고 화재가 났을 때는 소방용으로도 사용하였다. 연못은 지름 약 0.5m 정도로 땅을 판 후 다듬지 않은 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바닥에는 너비가 40~50cm 정도되는 얇고 평평하게 다듬은 돌을 깔았다. 연못 벽 뒤에는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하여 1m너비로 점토를 두껍게 채웠다. 연못 안에서는 많은 양의 백제시대 토기와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었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쌍수정(雙樹亭) :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이 1734년(영조10)에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서 6일간 머물렀는데 당시 인조는 두 그루의 나무 아래에서 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인조는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자신이 기대었던 두 그루의 나무, 즉 쌍수에 정3품을 벼슬을 내렸다. 그 후로 공산성을 '쌍수산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있던 자리에 삼가정(三架亭)을 세웠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오늘날의 쌍수정은 1970년에 해체한 후 다시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의 쌍수정과 다소 차이가 있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쌍수정에서 바라본 백제 왕궁지이며 오른쪽으로 백제 연못이 보인다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산성길 1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산성길 2
[촬영일 : 2020-12-26]
공산성 왕궁관련 유적 : '공북루' 남쪽의 넓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백제시대 대규모 왕궁관련유적이다. 2011년~2017년까지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통하여 현재 지표면에서 약 300~700cm아래에서 백제가 웅진에 천도한 475년 이후부터 만들어진 약 70여 동의 기와건물지와 도로, 축대, 배수로, 저수시설, 석축 연못, 철기 공방지 등 다양한 시설이 확인되었다(출처:공주시)
![공산성 금서루(錦西樓) 2 : 공산성 4개 성문중 서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이다. 성 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문헌 기록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출처:공주시)](https://static.tmstory.com/repository/resizing/sm/city_story/202104/020B6935FD834B5D8E91EB2053BFA78B1619362521.jpg)
[촬영일 : 2021-04-24]
공산성 금서루(錦西樓) 2 : 공산성 4개 성문중 서쪽 문루(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이다. 성 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문헌 기록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출처:공주시)
[촬영일 : 2021-04-24]
공산성 금서루(錦西樓)의 웅진성 수문병 교대식 1
[촬영일 : 2021-04-24]
공산성 금서루(錦西樓)의 웅진성 수문병 교대식 2
[촬영일 : 2021-04-24]
공산성 금서루(錦西樓) 내부에서 바라본 성벽 전경
[촬영일 : 2021-04-24]
공산성 진남루(鎭南樓) 4 : 공산성의 남문이자 정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남쪽의 3도, 즉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의 관문이었다. 공산성은 사방에서 문 터가 확인되는데 그중에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는 성문이 남아있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다. 이에 1993년 동문 터에는 영동루를, 서문 터에는 금서루를 다시 세웠다. 진남루는 여러 차례 고쳐 지었지만 그 위치와 모습은 본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있는 성문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고 다시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