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회수 : 832 등록일 : 2021-06-01 ]
종묘는 조선의 역대 국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왕실의 사당으로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正殿)을 종묘라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을 모두 합쳐 종묘라 부른다. 정전과 영녕전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 이는 왕실의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기에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태조 대에 종묘를 처음 건립했을 때 종묘 내 담장 안에는 종묘 정전과 공신당(功臣堂), 신문(神門), 동문, 서문이 있었다. 담장밖에는 신주(神廚)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 5칸이 있었다.
이후 정전은 신주 7칸이 명종 대에 4칸을 증축해 11칸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중건할 때 그대로 11칸으로 건립하였다. 그 뒤 영조 대에 4칸을 증축하여 15칸, 헌종 대에 4칸을 중축하여 오늘날과 같이 19칸이 되었다.
[1]친진(親盡)이 된 국왕은 후대의 국왕과 신하들이 공덕을 평가해 종묘 정전에 계속 봉안할지 여부를 결정하였다. 만약 영원히 봉안하고자 할 경우 그 신주는 [2]불천지주(不遷之主)가 되었다. 불천지주를 봉안한 신실을 [3]세실(世室)이라고 한다.
영녕전은 종묘정전에서 4대가 지나 [1]친진(親盡)이 된 신주를 옮겨와 봉안하는 사당이다. 태종이 지었으며 세종대에 태조의 추존 4대조만 봉안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추존 4대조는 [4]목조, 익조, 도조, 환조이다. 그 뒤 연산군 대에 이르러 조선의 2대,3대 국왕이었던 정종과 태종이 친진에 다다르자 태종은 [3]세실로 정하고 정종의 신주만 영녕전의 동협실에 봉안했다가 실이 다 차면 서협실로 옮겼다. 처음부터 서협실에 봉안한 것이 아니었다.
영녕전은 명종 대에 좌후 협실 각 3칸으로 1칸 더 증축하였으며 현종 대에 좌후 협실을 1칸 더 증수하여 정전 4칸, 좌우협실 각 4칸이 되었다. 헌종 대에 2칸을 증축하여 현재와 같이 정전4칸, 좌후협실 각 6칸이 되었다.
정전(正殿)에는 태조의 신주를 비롯하여 공덕이 있는 역대 왕과 왕비 49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고 영녕전(永寧殿)에는 태조의 4대조를 비롯하여 조선의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 34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종묘는 건물과 더불어 제례 및 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한국문화와 유물유적, 송찬섭외 14인, 2021, p.26~32
[1] 친진(親盡) : 제사 지내는 대의 수가 다 됨. 보통 4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다
[2] 불천지주(不遷之主) : 영원히 봉안하고자 할 경우의 신주.
[3] 세실(世室) : 불천지주를 봉안한 신실
[4] 목조(穆祖, ?~1274년) : 조선의 추존왕. 추존왕 익조의 아버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익조(翼祖, ?~?) : 조선의 추존왕. 추존왕 도조의 아버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
도조(度祖, ?~1342년) : 조선의 추존왕. 추존왕 환조의 아버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조부
환조(桓祖, 1315년~1360년) : 이자춘. 조선의 추존왕이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正殿)을 종묘라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을 모두 합쳐 종묘라 부른다. 정전과 영녕전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 이는 왕실의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기에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태조 대에 종묘를 처음 건립했을 때 종묘 내 담장 안에는 종묘 정전과 공신당(功臣堂), 신문(神門), 동문, 서문이 있었다. 담장밖에는 신주(神廚)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 5칸이 있었다.
이후 정전은 신주 7칸이 명종 대에 4칸을 증축해 11칸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중건할 때 그대로 11칸으로 건립하였다. 그 뒤 영조 대에 4칸을 증축하여 15칸, 헌종 대에 4칸을 중축하여 오늘날과 같이 19칸이 되었다.
[1]친진(親盡)이 된 국왕은 후대의 국왕과 신하들이 공덕을 평가해 종묘 정전에 계속 봉안할지 여부를 결정하였다. 만약 영원히 봉안하고자 할 경우 그 신주는 [2]불천지주(不遷之主)가 되었다. 불천지주를 봉안한 신실을 [3]세실(世室)이라고 한다.
영녕전은 종묘정전에서 4대가 지나 [1]친진(親盡)이 된 신주를 옮겨와 봉안하는 사당이다. 태종이 지었으며 세종대에 태조의 추존 4대조만 봉안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추존 4대조는 [4]목조, 익조, 도조, 환조이다. 그 뒤 연산군 대에 이르러 조선의 2대,3대 국왕이었던 정종과 태종이 친진에 다다르자 태종은 [3]세실로 정하고 정종의 신주만 영녕전의 동협실에 봉안했다가 실이 다 차면 서협실로 옮겼다. 처음부터 서협실에 봉안한 것이 아니었다.
영녕전은 명종 대에 좌후 협실 각 3칸으로 1칸 더 증축하였으며 현종 대에 좌후 협실을 1칸 더 증수하여 정전 4칸, 좌우협실 각 4칸이 되었다. 헌종 대에 2칸을 증축하여 현재와 같이 정전4칸, 좌후협실 각 6칸이 되었다.
정전(正殿)에는 태조의 신주를 비롯하여 공덕이 있는 역대 왕과 왕비 49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고 영녕전(永寧殿)에는 태조의 4대조를 비롯하여 조선의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 34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종묘는 건물과 더불어 제례 및 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한국문화와 유물유적, 송찬섭외 14인, 2021, p.26~32
[1] 친진(親盡) : 제사 지내는 대의 수가 다 됨. 보통 4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다
[2] 불천지주(不遷之主) : 영원히 봉안하고자 할 경우의 신주.
[3] 세실(世室) : 불천지주를 봉안한 신실
[4] 목조(穆祖, ?~1274년) : 조선의 추존왕. 추존왕 익조의 아버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익조(翼祖, ?~?) : 조선의 추존왕. 추존왕 도조의 아버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
도조(度祖, ?~1342년) : 조선의 추존왕. 추존왕 환조의 아버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조부
환조(桓祖, 1315년~1360년) : 이자춘. 조선의 추존왕이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
[촬영일 : 2021-05-26]
종묘정문인 외대문을 지난 푸르른 5월의 종묘내 전경
[촬영일 : 2021-05-26]
종묘내 지당(연못)으로 중앙의 오래된 향나무와 어우러져 동양의 미를 한껏 뽐내고 있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 형태로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사상이 담겨있다
[촬영일 : 2021-05-26]
종묘 신로(神路) : 신로는 종묘제례 등 의식을 위해 만든 길이다. 가운데가 약간 높고 양옆이 약간 낮은 세길중 가운데 길은 신주와 향·축이 들어가는 신로, 동측의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 서측의 길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이다. 신로는 외대문 안에서 정정과 영녕전의 남신문 밖까지는 거칠고 널찍한 박석으로 남신문 안에서 상월대 아래까지는 전석으로 설치되었다. 어로와 세자로는 재궁으로 이어진 다음 정전과 영녕전 동문 안 상월대 아래까지 설치되었다[출처 : 종묘 신로 안내글]
[촬영일 : 2021-05-26]
정전 남신문(正殿 南神門) : 신로와 연결된 문으로 신주나 축함이 드는 남쪽 신문이다
[촬영일 : 2021-05-26]
종묘 정전(正殿) : 정전은 종묘의 중심 부분으로 긴 정전의 앞에는 넓은 월대(중요한 건물 앞의 넓은 대)를 두었고 사방으로 담장을 둘렀다. 남쪽 신문으로는 혼령이, 동문으로는 임금을 비롯한 제관들이, 서문으로는 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과 춤을 추는 일무원(종묘 제례 때 여러 줄로 서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 출입했다. 1395년에 신실 7칸의 규모로 처음 만들어 졌고 여러 차례 늘려지어 현재는 19칸에 이르는 매우 긴 목조 건물이 되었다. 거친 월대 바닥과 그 위로 육중한 지붕이 떠 있는 모습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종묘 정전은 현재 보수정비 공사중이다 (공사기간:2020.0622~2022.12.08) - 출처 : 종묘 안내글
[촬영일 : 2021-05-26]
종묘 정전(正殿)은 처음7칸에서 명종 대에 4칸을 증축해 11칸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려 중건할 때 그대로 11칸으로 건립하였다. 그 뒤 영조 대에 4칸을 증축하여 15칸, 헌종 대에 4칸을 중축하여 오늘날과 같이 19칸이 되었다. 태조(1실), 태종(2실), 세종(3실), 세조(4실), 성종(5실), 중종(6실), 선조(7실), 인조(8실), 효종(9실), 현종(10실), 숙종(11실), 영조(12실), 정조(13실), 순조(14실), 문조(15실), 헌종(16실), 철종(17실), 고종(18실), 순종(19실). 영원히 봉안하고자 할 경우 그 신주는 불천지주(不遷之主)가 되었다. 불천지주(2실~13실)
[촬영일 : 2021-05-26]
종묘 정전(正殿) 동문
[촬영일 : 2021-05-26]
공신당(功臣堂) : 역대 임금들을 보좌한 공신들의 사당으로서 총 16칸 규모이며 안에는 모두 83위의 공신 위패들이 모셔져 있다[출처 : 종묘 안내판]
[촬영일 : 2021-05-26]
종묘 악공청 : 종묘제례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과 무원들이 대기하는 장소이다[출처 : 종묘 안내판]
[촬영일 : 2021-05-26]
종묘 영녕전(永寧殿) 외부 전경 :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해 1421년에 지은 건물로 '영녕'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밀하게 지어졌다. 정전과 유사하게 2중으로 된 월대(중요한 건물 앞의 넓은 대)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쪽·남쪽·서쪽 세곳에 문을 두었다. 원래 6칸 규모였으나 여러 차례 좌우에 칸을 만들어 현재 신실은 모두 16칸이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조를 모신 곳으로 좌우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동쪽에는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를, 서남쪽 바깥에는 제례악을 준비하는 소악공청을 두었다[출처 : 종묘 안내판]
[촬영일 : 2021-05-26]
종묘 영녕전(永寧殿) 정문인 남문
[촬영일 : 2021-05-26]
종묘 영녕전(永寧殿)은 모두 16칸으로 중앙의 정전과 좌우협실로 되어있다. 정전(1실 목조, 2실 익조, 3실 도조, 4실 환조), 서협실(5실 정종, 6실 문종, 7실 단종, 8실 덕종, 9실 예종, 10실 인종), 동협실(11실 명종, 12실 원종, 13실 경종, 14실 진종, 15실 장조, 16실 영친왕)
[촬영일 : 2021-05-26]
종묘 영녕전(永寧殿) :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해 1421년에 지은 건물로 '영녕'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밀하게 지어졌다. 정전과 유사하게 2중으로 된 월대(중요한 건물 앞의 넓은 대)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쪽·남쪽·서쪽 세곳에 문을 두었다. 원래 6칸 규모였으나 여러 차례 좌우에 칸을 만들어 현재 신실은 모두 16칸이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조를 모신 곳으로 좌우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동쪽에는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를, 서남쪽 바깥에는 제례악을 준비하는 소악공청을 두었다[출처 : 종묘 안내판]
[촬영일 : 2021-05-26]
종묘 영녕전(永寧殿) :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해 1421년에 지은 건물로 '영녕'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밀하게 지어졌다. 정전과 유사하게 2중으로 된 월대(중요한 건물 앞의 넓은 대)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쪽·남쪽·서쪽 세곳에 문을 두었다. 원래 6칸 규모였으나 여러 차례 좌우에 칸을 만들어 현재 신실은 모두 16칸이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조를 모신 곳으로 좌우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동쪽에는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를, 서남쪽 바깥에는 제례악을 준비하는 소악공청을 두었다[출처 : 종묘 안내판]
[촬영일 : 2021-05-26]
종묘 영녕전(永寧殿) :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해 1421년에 지은 건물로 '영녕'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밀하게 지어졌다. 정전과 유사하게 2중으로 된 월대(중요한 건물 앞의 넓은 대)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쪽·남쪽·서쪽 세곳에 문을 두었다. 원래 6칸 규모였으나 여러 차례 좌우에 칸을 만들어 현재 신실은 모두 16칸이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조를 모신 곳으로 좌우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동쪽에는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를, 서남쪽 바깥에는 제례악을 준비하는 소악공청을 두었다[출처 : 종묘 안내판]
[촬영일 : 2021-05-26]
종묘 영녕전(永寧殿) 서문
[촬영일 : 2021-05-26]
종묘 영녕전(永寧殿) 동문
[촬영일 : 2021-05-26]
종묘 전사청(典祀廳) : 전사청은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으로,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에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으로 꾸몄다[출처 : 문화재청 종묘관리소]
[촬영일 : 2021-05-26]
종묘 전사청(典祀廳) : 전사청은 종묘제사에 사용하는 제수의 진찬 준비를 하던 곳으로, 뜰을 가운데 두고 그 주위로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에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으로 꾸몄다[출처 : 문화재청 종묘관리소]
[촬영일 : 2021-05-26]
종묘 전사청(典祀廳) 옆의 우물
[촬영일 : 2021-06-02]
종묘 정문 외대문(外大門) :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다. 정문밖에는 하마비(下馬碑)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御井)이 있다
[촬영일 : 2021-06-02]
종묘 정문 외대문(外大門) :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다. 정문밖에는 하마비(下馬碑)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御井)이 있다
[촬영일 : 2021-06-02]
종묘 정문 외대문(外大門) 앞 광장
[촬영일 : 2021-06-02]
세계유산 종묘(宗廟) : 1995년 12월 9일 종묘는 인류의 문화 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의거하여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촬영일 : 2021-06-02]
종묘 영녕전(永寧殿) 외부 전경 :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해 1421년에 지은 건물로 '영녕'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밀하게 지어졌다. 정전과 유사하게 2중으로 된 월대(중요한 건물 앞의 넓은 대)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쪽·남쪽·서쪽 세곳에 문을 두었다. 원래 6칸 규모였으나 여러 차례 좌우에 칸을 만들어 현재 신실은 모두 16칸이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조를 모신 곳으로 좌우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동쪽에는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를, 서남쪽 바깥에는 제례악을 준비하는 소악공청을 두었다[출처 : 종묘 안내판]
[촬영일 : 2021-06-02]
종묘 영녕전(永寧殿) 남문의 출입문을 통한 내부 전경
[촬영일 : 2021-06-02]
종묘 영녕전(永寧殿) 은 서쪽(서협실)으로 6실 중앙(정전) 4실, 동쪽(동협실) 6실로 봉안되어 있으며 위 그림은 중앙의 정전 4실(목조, 익조, 도조, 환조)이다
[촬영일 : 2021-06-02]
종묘 재궁(齋宮) 정문 :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임금이 세자와 함께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왕이 목욕하는 건물인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있다. 임금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문으로 나와서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촬영일 : 2021-06-02]
종묘 재궁(齋宮) 어재실(御齋室) 내부 :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임금이 세자와 함께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왕이 목욕하는 건물인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있다. 임금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문으로 나와서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촬영일 : 2021-06-02]
종묘 재궁(齋宮) 어재실(御齋室) :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임금이 세자와 함께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왕이 목욕하는 건물인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있다. 임금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문으로 나와서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촬영일 : 2021-06-02]
종묘 재궁(齋宮) 세자재실(世子齋室) :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임금이 세자와 함께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왕이 목욕하는 건물인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있다. 임금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문으로 나와서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촬영일 : 2021-06-02]
종묘 재궁(齋宮) 세자재실(世子齋室) 내부 :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임금이 세자와 함께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왕이 목욕하는 건물인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있다. 임금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문으로 나와서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촬영일 : 2021-06-02]
종묘 재궁(齋宮) 어목욕청(御沐浴廳) : 정전 동남쪽에 위치한 재궁은 임금이 세자와 함께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왕이 목욕하는 건물인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있다. 임금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문으로 나와서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촬영일 : 2021-06-02]
종묘 재궁(齋宮) 어목욕청내에 있는 소여(小輿) : 종묘대제때 임금께서 궁궐에서 종묘앞까지는 대여를 타고 오시며 소여는 종묘안에서 이동할 때 사용하던 가마이다
[촬영일 : 2021-06-02]
공민왕 신당 :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정식이름은 '고려 공민왕 영정봉안지당'이다. 공민왕은 밖으로 원나라를 물리쳐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고 안으로 개혁정치를 폈으며 개인으로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공민왕이 친히 그렸다고 전하는 말 그림도 사당 안에 있다. 조선왕조의 최고 사당인 종묘에 고려의 왕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출처 : 종묘 공민왕 신당 안내글)
[촬영일 : 2021-06-02]
공민왕 신당 :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정식이름은 '고려 공민왕 영정봉안지당'이다. 공민왕은 밖으로 원나라를 물리쳐 나라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고 안으로 개혁정치를 폈으며 개인으로서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공민왕이 친히 그렸다고 전하는 말 그림도 사당 안에 있다. 조선왕조의 최고 사당인 종묘에 고려의 왕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지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출처 : 종묘 공민왕 신당 안내글)
[촬영일 : 2021-06-02]
종묘 향대청 :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香祝幣)등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祭享)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촬영일 : 2021-06-02]
종묘 향대청 :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香祝幣)등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祭享)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촬영일 : 2021-06-02]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을 지나면 바로 왼쪽에 있는 작은 연못이며 종묘에는 2개의 연못이 있다.
[촬영일 : 2021-06-16]
종묘 하마비(下馬碑) :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놓아 누구나 이곳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리라는 명이 적힌 비석이다. 기록에 의하면 태종 13년(1413년) 2월에 처음으로 예조의 건의에 의하여 종묘와 궐문 앞에 설치하였던 것이 하마비 시원이 되었다. 처음에는 나무로 제작되었으나 현종 4년(1663년)에 종묘전교를 개수하면서 석비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하마비는 종묘 및 궁궐외에도 문묘, 명사, 고관의 출생지 등 여러 곳에 세워져 있는데, 이는 선열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종묘 하마비 안내글)
[촬영일 : 2021-06-16]
종묘전교(宗廟前橋) : 종묘로 들어가는 입구의 하천인 회동 제생동천(灰洞 濟生洞川)에 축조된 다리로, 대동지지에서 이 다리를 "종묘전교"라 하였다. 종묘전교는 처음에 나무다리였던 것을 세종 3년(1421) 돌다리로 개축하였고, 이후 현종 4년(1663)에 개수한 바 있었다. 역대 왕들이 종묘에서 행하는 종묘대제를 비롯한 각종 주요행사때에 이용하였던 중요한 다리였다. 이 다리는 널다리(평교)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규모인데 다리의 바닥 한 가운데가 좌우보다 한단 높다. 다리가 설치된 가장자리 네모서리에는 해태상을 새긴 화표주(기둥)가 마련되어 있다. 다리너머의 종묘 외삼문이 청명한 6월하늘과 어우러져 한국의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촬영일 : 2021-06-16]
종묘전교(宗廟前橋) : 종묘로 들어가는 입구의 하천인 회동 제생동천(灰洞 濟生洞川)에 축조된 다리로, 대동지지에서 이 다리를 "종묘전교"라 하였다. 종묘전교는 처음에 나무다리였던 것을 세종 3년(1421) 돌다리로 개축하였고, 이후 현종 4년(1663)에 개수한 바 있었다. 역대 왕들이 종묘에서 행하는 종묘대제를 비롯한 각종 주요행사때에 이용하였던 중요한 다리였다. 이 다리는 널다리(평교)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규모인데 다리의 바닥 한 가운데가 좌우보다 한단 높다. 다리가 설치된 가장자리 네모서리에는 해태상을 새긴 화표주(기둥)가 마련되어 있다 (출처 : 종묘전교 안내문)
[촬영일 : 2021-06-16]
종묘전교(宗廟前橋) 너머로 종로3가의 대표 주상복합상가인 세운상가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