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건국
대한민국
사건기간 : 1392년 음력 7월 18일, 조회수 : 347, 등록일 : 2020-04-05
14세기 말 고려(高麗, 917-1392)는 내적으로는 권문세족들의 횡포로 사회 기강이 해이해지고 왕권이 약화되었고 외적으로는 원(元,1271~1368)에서 명(明, 1368~1644)으로 교체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1388년 신흥 무인세력인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 제32대 우왕과 최영장군등 반대파를 몰아 내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정권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정도전, 조준등)들은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새 나라 건설을 반대한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1392년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들어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을 건국하였다.
1393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정도전을 중심으로 기존 제도를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 우왕(1365년~1389년) : 고려 제32대 국왕. 재위 1374년~1388년
* 공양왕(1345년~1394년) : 고려의 제34대 국왕이자 마지막 임금. 재위 1389년~1392년
* 최영(1316년~1388년) :고려 말기의 장수이자 정치가
* 위화도회군 : 명나라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등이 위화도(압록강의 하중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위하도는 광복 당시 행정 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이며 현재 행정구역으로 신의주시에 속한다
* 하중도 : 강 한 가운데 있는 섬
1388년 신흥 무인세력인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 제32대 우왕과 최영장군등 반대파를 몰아 내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정권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정도전, 조준등)들은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새 나라 건설을 반대한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1392년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들어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을 건국하였다.
1393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정도전을 중심으로 기존 제도를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 우왕(1365년~1389년) : 고려 제32대 국왕. 재위 1374년~1388년
* 공양왕(1345년~1394년) : 고려의 제34대 국왕이자 마지막 임금. 재위 1389년~1392년
* 최영(1316년~1388년) :고려 말기의 장수이자 정치가
* 위화도회군 : 명나라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등이 위화도(압록강의 하중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위하도는 광복 당시 행정 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이며 현재 행정구역으로 신의주시에 속한다
* 하중도 : 강 한 가운데 있는 섬
- 사직단 - 경복궁 서쪽 등록일 : 2022-05-02
- 종묘 - 경복궁 동쪽 등록일 : 2021-06-01
- 조선 건국후 가장 먼저 지은 경복궁 등록일 : 2021-04-03
조선 태조 이성계(朝鮮 太祖, 1335년~1408년)는 고려 말의 무신이며 정치가이자,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1392년~1398년)이다.

[촬영일 :2020-01-26]
태조 이성계 어진(중앙국립박물관 소재)
[촬영일 :2020-06-18]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하면서 지어진 경복궁. 경복궁의 정문인 위풍당당한 광화문
정몽주와 정도전.
두 사람은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이색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며 마음을 같이 한 친구로 고려의 개혁을 함께 주진하였다. 그러나 역성혁명의 갈림길에서 정몽주는 정도전과 다른 길을 택함으로써 1392년 3월 죽음을 맞았고 지금까지도 충절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 반면 정도전은 이성계를 추대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정도전은 전라도 나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당시 백성들의 삶을 목격하면서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꿈꾸었고, 자신의 이상과 꿈을 이성계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다.
두 사람은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이색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며 마음을 같이 한 친구로 고려의 개혁을 함께 주진하였다. 그러나 역성혁명의 갈림길에서 정몽주는 정도전과 다른 길을 택함으로써 1392년 3월 죽음을 맞았고 지금까지도 충절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 반면 정도전은 이성계를 추대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정도전은 전라도 나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당시 백성들의 삶을 목격하면서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꿈꾸었고, 자신의 이상과 꿈을 이성계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다.

[촬영일 :2020-01-26]
고려의 충신 정몽주(1337년~1392년) - 국립중앙발물관 소재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1337~1453년(116년)동안 싸운 전쟁이다. 양국이 계속 싸운것은 아니었으며 중간에 몇 차례 휴전과 종전등이 있었다.
프랑스 [4]카페왕조의 왕인 [5]샤를 4세가 후사없이 1328년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5]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샤를 4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13]에드워드 3세, 사촌동생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결국 필리프가 [7]필리프 6세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여 [6]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잉글랜드는 1066년 [1]노르망디 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의 일부 영토를 소유하였는데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분쟁이 계속되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국왕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아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갖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13]에드워드 3세 시기에 [12]플랜태저넷가가 소유한 프랑스 내 [2]노르망디와 [3]아키텐 지역에 대한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등이 누적되면서 1337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운 잉글랜드가 연승했지만 [23]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프랑스내 영토를 상실하였다.
100년 전쟁 결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100년 전쟁 연표
- 1337년 : 잉글랜드 선전포고
- 1338년 : 잉글랜드의 프랑스 상륙. [13]에드워드 3세
- 1340년 : [20]슬로이스 해전(Battle of Sluys) 잉글랜드의 승리로 해상권 장악
- 1346년 : 크레시 전투. 잉글랜드 승리. 영국의 에드워드 3세 vs 프랑스 [7]필리프 6세
- 1347년~1350년 : 흑사병 창궐, 휴전
- 1350년 : 프랑스 필리프 6세가 죽고 뒤를 이어 [8]장 2세 즉위
- 1356년 :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 잉글랜드 승리.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아들 [14]흑태자 에드워드 vs 장 2세. 장 2세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이송
- 1360년 : 브레티니-칼레 조약. 프랑스 브레티니(Brétigny) 지방에서 초안이 작성되어 같은 해 10월 24일에 칼레에서 비준
- 1364년 : 프랑스 [8]장 2세가 죽고 [9]샤를 5세 즉위
- 1364년 : 오레 전투(Bataille d'Auray) 프랑스 승리. 프랑스 [9]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 1369년~1389년 : 개롤라인 전쟁(Caroline War). 프랑스 승리. 프랑스 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프랑스는 잃었던 영토들을 회복
- 1377년 :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죽고 [15]리처드 2세 즉위
- 1380년 : 프랑스 샤를 5세가 죽고 [10]샤를 6세 즉위
- 1399년 : 잉글랜드 리처드 2세는 폐위되고 [16]랭커스터 가의 [17]헨리 4세 즉위
- 1413년 : 잉글랜드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18]헨리 5세 즉위
- 1415년 :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 잉글랜드 승리. 잉글랜드의 헨리 5세 vs 샤를 6세
- 1422년 :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19]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 프랑스는 [11]샤를 7세가 왕위 선언
- 1428년 : 잉글랜드의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 포위
- 1429년 : 오를레앙 전투(Orléans) 프랑스 승리. [23]잔 다르크 출현
- 1429년 : 프랑스 [11]샤를 7세 정식으로 즉위
- 1431년 : 잔 다르크 루앙에서 화형
- 1435년 : 1407년부터 시작된 [21]부르고뉴 공국과 프랑스 왕가의 내전. 아라스 조약으로 [22]부르고뉴 공작과 샤를 7세와 평화협정. 이로써 프랑스내에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1436년 파리 수복
- 1441년~1453년 : 프랑스의 영토수복
- 백년전쟁의 끝(1475): 잉글랜드의 [2]노르망디와 [3]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 노르망디 공국(Duchy of Normandy ) : 프랑스 왕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의 영지였으나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월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영지가 되었다.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1066년~1135년)가 시작되었다
[2] 노르망디(Normandy) : 프랑스 북서부 지방
[3] 아키텐(Aquitaine) :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심도시는 보르도이다. 서쪽으로 대서양과 접하며 남쪽으로 스페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4] 카페왕조(Capetian dynasty) : 프랑스의 왕가. 987년~1328년 존속. 14대
[5] 샤를 4세(Charles IV of France, 1294년~1328년) : 프랑스 카페 왕가의 제14대 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22년 1월 3일~1328년 2월 1일)
[6] 발루아가(House of Valois) : 프랑스 왕국의 왕조. 1328년에서 1589년까지 지속. 발루아가(1328년~1498년, 7대), 발루아 오를레앙가(1498년~1515년, 1대), 발루아 앙굴렘가(1515년~1589년, 5대)로 계승
[7] 필리프 6세(Philip VI, 1293년~1350년) :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재위 1328년 4월 1일~1350년 8월 22일)
[8] 장 2세(Jean II, 1319년~1364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1350년 8월 22일~1364년 4월 8일)
[9] 샤를 5세(Charles V, 1338년~1380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3대 국왕(재위: 1364년 ~ 1380년)
[10]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11] 샤를 7세(Charles Ⅶ, 1403년~1461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5대 국왕(재위 1422년 10월 21일~1461년 8월 16일). 샤를 6세의 5번째 아들
[12] 플랜태저넷가(House of Plantagenet) :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 성립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윌리엄 1세)이었고, 노르망디 왕조의 뒤를 이어 헨리2세가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2세는 프랑스 앙주 백작의 직위를 계승하여 프랑스의 아키텐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13] 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년~1377년) : 잉글랜드의 국왕.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외손자(1325년–1360년). 100년 전쟁을 일으켰다
[14]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1376년) :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왕위 계승자였으나 아버지 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왕위는 그의 아들 리처드 2세에게 돌아갔다.
[15] 리처드 2세(Richard II, 1367년~1400년) : 잉글랜드 플랜태저넷가의 제8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77년 6월 21일-1399년 9월 30일)
[16] 랭커스터 가(House of Lancaster) :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3명의 잉글랜드 국왕 배출
[17] 헨리 4세(Henry Ⅳ, 1366년~1413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초대 국왕이며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손자(재위 1399년 9월 30일-1413년 3월 20일)
[18]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19] 헨리 6세(Henry VI, 1421년~1471년) : 생후 9개월만에 즉위.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3대 국왕(재위 1422년 8월 31일~1461년 5월 4일). 외할아버지 샤를 6세가 갑자기 사망하여 트루아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의 왕까지 되었다.
[20] 슬로이스(Sluys) : 현재 네덜란드 도시
[21] 부르고뉴 공국(Duchy of Burgundy) : 중세 프랑스 동부의 공국. 1032년 ~ 1477년
[22] 부르고뉴 공작(Philip the Good, 1396년~1467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방계인 부르고뉴-발루아가의 공작으로 필리프 3세라고도 한다
[23]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1431년)
프랑스 [4]카페왕조의 왕인 [5]샤를 4세가 후사없이 1328년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5]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샤를 4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13]에드워드 3세, 사촌동생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결국 필리프가 [7]필리프 6세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여 [6]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잉글랜드는 1066년 [1]노르망디 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의 일부 영토를 소유하였는데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분쟁이 계속되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국왕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아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갖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13]에드워드 3세 시기에 [12]플랜태저넷가가 소유한 프랑스 내 [2]노르망디와 [3]아키텐 지역에 대한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등이 누적되면서 1337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운 잉글랜드가 연승했지만 [23]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프랑스내 영토를 상실하였다.
100년 전쟁 결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100년 전쟁 연표
- 1337년 : 잉글랜드 선전포고
- 1338년 : 잉글랜드의 프랑스 상륙. [13]에드워드 3세
- 1340년 : [20]슬로이스 해전(Battle of Sluys) 잉글랜드의 승리로 해상권 장악
- 1346년 : 크레시 전투. 잉글랜드 승리. 영국의 에드워드 3세 vs 프랑스 [7]필리프 6세
- 1347년~1350년 : 흑사병 창궐, 휴전
- 1350년 : 프랑스 필리프 6세가 죽고 뒤를 이어 [8]장 2세 즉위
- 1356년 :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 잉글랜드 승리.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아들 [14]흑태자 에드워드 vs 장 2세. 장 2세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이송
- 1360년 : 브레티니-칼레 조약. 프랑스 브레티니(Brétigny) 지방에서 초안이 작성되어 같은 해 10월 24일에 칼레에서 비준
- 1364년 : 프랑스 [8]장 2세가 죽고 [9]샤를 5세 즉위
- 1364년 : 오레 전투(Bataille d'Auray) 프랑스 승리. 프랑스 [9]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 1369년~1389년 : 개롤라인 전쟁(Caroline War). 프랑스 승리. 프랑스 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프랑스는 잃었던 영토들을 회복
- 1377년 :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죽고 [15]리처드 2세 즉위
- 1380년 : 프랑스 샤를 5세가 죽고 [10]샤를 6세 즉위
- 1399년 : 잉글랜드 리처드 2세는 폐위되고 [16]랭커스터 가의 [17]헨리 4세 즉위
- 1413년 : 잉글랜드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18]헨리 5세 즉위
- 1415년 :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 잉글랜드 승리. 잉글랜드의 헨리 5세 vs 샤를 6세
- 1422년 :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19]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 프랑스는 [11]샤를 7세가 왕위 선언
- 1428년 : 잉글랜드의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 포위
- 1429년 : 오를레앙 전투(Orléans) 프랑스 승리. [23]잔 다르크 출현
- 1429년 : 프랑스 [11]샤를 7세 정식으로 즉위
- 1431년 : 잔 다르크 루앙에서 화형
- 1435년 : 1407년부터 시작된 [21]부르고뉴 공국과 프랑스 왕가의 내전. 아라스 조약으로 [22]부르고뉴 공작과 샤를 7세와 평화협정. 이로써 프랑스내에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1436년 파리 수복
- 1441년~1453년 : 프랑스의 영토수복
- 백년전쟁의 끝(1475): 잉글랜드의 [2]노르망디와 [3]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 노르망디 공국(Duchy of Normandy ) : 프랑스 왕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의 영지였으나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월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영지가 되었다.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1066년~1135년)가 시작되었다
[2] 노르망디(Normandy) : 프랑스 북서부 지방
[3] 아키텐(Aquitaine) :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심도시는 보르도이다. 서쪽으로 대서양과 접하며 남쪽으로 스페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4] 카페왕조(Capetian dynasty) : 프랑스의 왕가. 987년~1328년 존속. 14대
[5] 샤를 4세(Charles IV of France, 1294년~1328년) : 프랑스 카페 왕가의 제14대 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22년 1월 3일~1328년 2월 1일)
[6] 발루아가(House of Valois) : 프랑스 왕국의 왕조. 1328년에서 1589년까지 지속. 발루아가(1328년~1498년, 7대), 발루아 오를레앙가(1498년~1515년, 1대), 발루아 앙굴렘가(1515년~1589년, 5대)로 계승
[7] 필리프 6세(Philip VI, 1293년~1350년) :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재위 1328년 4월 1일~1350년 8월 22일)
[8] 장 2세(Jean II, 1319년~1364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1350년 8월 22일~1364년 4월 8일)
[9] 샤를 5세(Charles V, 1338년~1380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3대 국왕(재위: 1364년 ~ 1380년)
[10]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11] 샤를 7세(Charles Ⅶ, 1403년~1461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5대 국왕(재위 1422년 10월 21일~1461년 8월 16일). 샤를 6세의 5번째 아들
[12] 플랜태저넷가(House of Plantagenet) :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 성립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윌리엄 1세)이었고, 노르망디 왕조의 뒤를 이어 헨리2세가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2세는 프랑스 앙주 백작의 직위를 계승하여 프랑스의 아키텐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13] 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년~1377년) : 잉글랜드의 국왕.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외손자(1325년–1360년). 100년 전쟁을 일으켰다
[14]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1376년) :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왕위 계승자였으나 아버지 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왕위는 그의 아들 리처드 2세에게 돌아갔다.
[15] 리처드 2세(Richard II, 1367년~1400년) : 잉글랜드 플랜태저넷가의 제8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77년 6월 21일-1399년 9월 30일)
[16] 랭커스터 가(House of Lancaster) :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3명의 잉글랜드 국왕 배출
[17] 헨리 4세(Henry Ⅳ, 1366년~1413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초대 국왕이며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손자(재위 1399년 9월 30일-1413년 3월 20일)
[18]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19] 헨리 6세(Henry VI, 1421년~1471년) : 생후 9개월만에 즉위.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3대 국왕(재위 1422년 8월 31일~1461년 5월 4일). 외할아버지 샤를 6세가 갑자기 사망하여 트루아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의 왕까지 되었다.
[20] 슬로이스(Sluys) : 현재 네덜란드 도시
[21] 부르고뉴 공국(Duchy of Burgundy) : 중세 프랑스 동부의 공국. 1032년 ~ 1477년
[22] 부르고뉴 공작(Philip the Good, 1396년~1467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방계인 부르고뉴-발루아가의 공작으로 필리프 3세라고도 한다
[23]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1431년)
1378년부터 1417년까지 서방교회가 두 명, 나중에는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며 심각한 분열을 겪었던 혼란의 시기로, 중세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통일성을 크게 흔들었다.
서방교회 대분열은 [1]아비뇽 유수로 거슬러 올라간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청은 로마 대신 프랑스 아비뇽에 위치하며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1377년 교황 [2]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켰으나, 그의 사망 후 새 교황 선출 과정에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1378년, 로마 시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 교황 [3]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었지만, 그의 엄격한 개혁 정책과 독단적인 태도로 인해 일부 추기경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고 아비뇽에서 새로운 교황인 [4]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진영을 형성했다. 서방교회는 두 교황이 서로를 정통성 없는 적으로 간주하며 대립하는 상황에 빠졌다.
유럽 각국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로마파와 아비뇽파로 나뉘어 교황을 지지했으며, 교회는 내부적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409년 [6][7]피사 공의회에서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삼중 교황 체제가 등장했다.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6][8]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분열은 종식되었다. 공의회는 기존 모든 교황들을 퇴위시키거나 폐위하고, 1417년 [5]마르티노 5세를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하면서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했다.
서방교회의 대분열은 중세 교회의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크게 약화시키고, 신앙심 있는 일반인들에게 교회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이는 이후 종교 개혁과 교회 구조 변화의 배경이 되었으며, 중세 말기 유럽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과 정통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1]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 :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해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던 시기
[2] 그레고리오 11세(Pope Gregory XI, 1329년~1378년 3월 27일) : 제201대 교황(재위: 1371년 1월 5일 - 1378년 3월 27일)
[3] 우르바노 6세(Pope Urban VI, 1318년~1389년 10월 15일)는 제202대 교황(재위: 1378년 4월 8일~1389년 10월 15일)
[4]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VII, 1478년 5월 26일~1534년 9월 25일) : 제219대 교황(재위: 1523년 11월 26일~1534년 9월 25일)
[5] 마르티노 5세(Pope Martin V, 1368년~1431년 2월 20일) : 제206대 교황(재위: 1417년 11월 11일~1431년 2월 20일)
[6] 공의회 : 교회 내 주요 교리와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는 주교들의 공식 회의
[7] 피사 공의회(Council of Pisa, 1409년) : 서방교회 대분열 해결을 시도했으나,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오히려 삼중 교황 체제를 초래한 공의회
[8]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 :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공의회로, 서방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여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한 회의
서방교회 대분열은 [1]아비뇽 유수로 거슬러 올라간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청은 로마 대신 프랑스 아비뇽에 위치하며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1377년 교황 [2]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켰으나, 그의 사망 후 새 교황 선출 과정에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1378년, 로마 시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 교황 [3]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었지만, 그의 엄격한 개혁 정책과 독단적인 태도로 인해 일부 추기경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고 아비뇽에서 새로운 교황인 [4]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진영을 형성했다. 서방교회는 두 교황이 서로를 정통성 없는 적으로 간주하며 대립하는 상황에 빠졌다.
유럽 각국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로마파와 아비뇽파로 나뉘어 교황을 지지했으며, 교회는 내부적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409년 [6][7]피사 공의회에서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삼중 교황 체제가 등장했다.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6][8]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분열은 종식되었다. 공의회는 기존 모든 교황들을 퇴위시키거나 폐위하고, 1417년 [5]마르티노 5세를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하면서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했다.
서방교회의 대분열은 중세 교회의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크게 약화시키고, 신앙심 있는 일반인들에게 교회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이는 이후 종교 개혁과 교회 구조 변화의 배경이 되었으며, 중세 말기 유럽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과 정통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1]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 :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해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던 시기
[2] 그레고리오 11세(Pope Gregory XI, 1329년~1378년 3월 27일) : 제201대 교황(재위: 1371년 1월 5일 - 1378년 3월 27일)
[3] 우르바노 6세(Pope Urban VI, 1318년~1389년 10월 15일)는 제202대 교황(재위: 1378년 4월 8일~1389년 10월 15일)
[4]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VII, 1478년 5월 26일~1534년 9월 25일) : 제219대 교황(재위: 1523년 11월 26일~1534년 9월 25일)
[5] 마르티노 5세(Pope Martin V, 1368년~1431년 2월 20일) : 제206대 교황(재위: 1417년 11월 11일~1431년 2월 20일)
[6] 공의회 : 교회 내 주요 교리와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는 주교들의 공식 회의
[7] 피사 공의회(Council of Pisa, 1409년) : 서방교회 대분열 해결을 시도했으나,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오히려 삼중 교황 체제를 초래한 공의회
[8]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 :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공의회로, 서방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여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한 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