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디언 전쟁(American Indian wars)
미국
사건기간 : 1622년 ~ 1890년, 조회수 : 983, 등록일 : 2020-03-24
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미국 백인 정착민과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사이의 정복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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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교황과 함께 계속되었는데 교황은 마치 황제와 같은 인물이었고, 대주교와 주교들은 옛 로마마제국의 행정관들과 똑같으며, 그들 밑으로는 지역마다 사제들이 있었다. 이 신성한 단체는 그 자체의 법률, 형벌, 교도소 그리고 조세제도를 지니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가 당시 위와 같은 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한다.
죄 많고 타락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는 것이며, 믿음을 지닌다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는것을 주장(스스로 믿는 종교)하며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함으로써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던 개혁 운동이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 :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가 당시 위와 같은 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한다.
죄 많고 타락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는 것이며, 믿음을 지닌다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는것을 주장(스스로 믿는 종교)하며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함으로써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던 개혁 운동이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 :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네덜란드(혹은 저지대)는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즉 베네룩스 지역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릴까지 포함하여 총 17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는 무적함대를 이끌며 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합스부르크 왕국의 스페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네덜란드 17개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개신교의 교세가 확산되자 이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 1세는 반기를 들면서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라는 두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과 대립하여 1588년 무적함대를 구성하여 영국으로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대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로 해상권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1600년 스페인과 해전에서 승리를 하며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의 후반부에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종교개혁 이후 야기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30년간의 종교전쟁(1618~1648)에 휘말렸으나 1648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고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 Empire)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부르는 말이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전체와 루마니아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이탈리아, 폴란드의 남부 등이 포함된다.
*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1598년
* 오라녜 공(Prins van Oranje) : 네덜란드의 왕위 계승자의 칭호
* 빌럼 1세(William I, 1533년~1584년) :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스페인과 가톨릭에 저항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의 국부로 빌럼 1세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또한 침묵공(De Zwijger)이라고도 불린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네덜란드 17개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개신교의 교세가 확산되자 이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 1세는 반기를 들면서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라는 두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과 대립하여 1588년 무적함대를 구성하여 영국으로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대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로 해상권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1600년 스페인과 해전에서 승리를 하며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의 후반부에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종교개혁 이후 야기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30년간의 종교전쟁(1618~1648)에 휘말렸으나 1648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고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 Empire)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부르는 말이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전체와 루마니아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이탈리아, 폴란드의 남부 등이 포함된다.
*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1598년
* 오라녜 공(Prins van Oranje) : 네덜란드의 왕위 계승자의 칭호
* 빌럼 1세(William I, 1533년~1584년) :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스페인과 가톨릭에 저항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의 국부로 빌럼 1세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또한 침묵공(De Zwijger)이라고도 불린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1517년에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신교인 개신교에 대하여 구교인 가톨릭 세력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는 30년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종교 갈등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정치, 경제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점점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30년 전쟁을 보통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전기를 종교 전쟁, 후기를 정치적 영토전쟁으로 분류한다.
유럽의 종교개혁 이후 유럽 북쪽의 개신교와 남쪽의 로마 카톨릭교로 양분되어 대립을 이어가던 무렵인 1617년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면서 개신교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1618년 보헤미아 프라하의 개신교 귀족들은 로마 가톨릭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가 보낸 특사 두 명을 약 17미터 높이의 건물에서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를 반란으로 판단한 페르디난트 2세는 군대를 일으켜 보헤미아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많은 요인들이 얽히며 유럽 각국으로 전선이 확대되어 무려 30년이나 지속했다.
1640년이 되자 30년 전쟁을 시작한 초기의 왕 및 장군, 병사들도 거의 다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주역들이 등장했지만 각 나라들은 대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조차 망각한 채 관성적으로 싸울 뿐이었다. 마침내 1648년 웨스트팔리아에서 유럽 각국은 조약을 맺고 30년 전쟁은 끝나게 된다.
30년 전쟁은 이후 유럽의 지도뿐만 아니라 종교, 문화 등을 크게 변화시켰다.
*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Holy Roman Emperor, 1578년~1637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독일의 왕, 보헤미아의 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 보헤미아 왕국 : 중앙유럽 보헤미아 지역에 있던 나라로, 영토 대부분은 오늘날 체코에 속한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유럽의 종교개혁 이후 유럽 북쪽의 개신교와 남쪽의 로마 카톨릭교로 양분되어 대립을 이어가던 무렵인 1617년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면서 개신교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1618년 보헤미아 프라하의 개신교 귀족들은 로마 가톨릭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가 보낸 특사 두 명을 약 17미터 높이의 건물에서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를 반란으로 판단한 페르디난트 2세는 군대를 일으켜 보헤미아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많은 요인들이 얽히며 유럽 각국으로 전선이 확대되어 무려 30년이나 지속했다.
1640년이 되자 30년 전쟁을 시작한 초기의 왕 및 장군, 병사들도 거의 다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주역들이 등장했지만 각 나라들은 대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조차 망각한 채 관성적으로 싸울 뿐이었다. 마침내 1648년 웨스트팔리아에서 유럽 각국은 조약을 맺고 30년 전쟁은 끝나게 된다.
30년 전쟁은 이후 유럽의 지도뿐만 아니라 종교, 문화 등을 크게 변화시켰다.
*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Holy Roman Emperor, 1578년~1637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독일의 왕, 보헤미아의 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 보헤미아 왕국 : 중앙유럽 보헤미아 지역에 있던 나라로, 영토 대부분은 오늘날 체코에 속한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은 1623년(광해군 15년) 4월 11일 서인 반정 세력이 광해군 및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인조)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이괄은 2등 공신으로 배정받자 불만이 컸다.
1624년 1월에 이괄(평양 병마절도사)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를 당하자 이괄은 항왜100여명과 휘하 병사 1만여명을 통솔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괄은 2월에 한양에 입성하였고 인조는 한양에서 충남 공주에 위치한 공산성으로 피란을 갔다.
이후 조선 관군의 반격으로 이괄의 군대는 대패하였고 경기도 광주로 달아난 이괄은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인조는 환도하였다.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이와 동시에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에 가담했던 평안도 구성부사인 한명련의 아들인 윤(潤)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괄의 난)]
* 인조반정 : 1623년 4월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왕(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으로 옹립한 사건
* 공산성 : 충남 공주시에 소재하고 있는 산성으로 백제의 두번째 도읍지이자 왕궁터
* 부사 : 고려·조선시대 지방의 장관직
* 병마절도사 : 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무관직
* 후금 : 1616년 여진족 누루하치가 건국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
* 정묘호란 :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입해 일어난 전쟁
1624년 1월에 이괄(평양 병마절도사)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를 당하자 이괄은 항왜100여명과 휘하 병사 1만여명을 통솔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괄은 2월에 한양에 입성하였고 인조는 한양에서 충남 공주에 위치한 공산성으로 피란을 갔다.
이후 조선 관군의 반격으로 이괄의 군대는 대패하였고 경기도 광주로 달아난 이괄은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인조는 환도하였다.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이와 동시에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에 가담했던 평안도 구성부사인 한명련의 아들인 윤(潤)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괄의 난)]
* 인조반정 : 1623년 4월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왕(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으로 옹립한 사건
* 공산성 : 충남 공주시에 소재하고 있는 산성으로 백제의 두번째 도읍지이자 왕궁터
* 부사 : 고려·조선시대 지방의 장관직
* 병마절도사 : 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무관직
* 후금 : 1616년 여진족 누루하치가 건국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
* 정묘호란 :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입해 일어난 전쟁
정묘호란(丁卯胡亂)은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3만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하고 정주성, 안주성으로 남하하였으며 조선군은 곳곳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3월에는 평양성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넘어갔다.
조선은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고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더라도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 인조(1595년~1649년) : 조선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1649년
* 후금 : 1616년 여진족 누루하치가 건국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
* 평산 : 황해북도에 위치한 군
* 명나라 :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하고 정주성, 안주성으로 남하하였으며 조선군은 곳곳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3월에는 평양성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넘어갔다.
조선은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고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더라도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 인조(1595년~1649년) : 조선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1649년
* 후금 : 1616년 여진족 누루하치가 건국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
* 평산 : 황해북도에 위치한 군
* 명나라 :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
[1]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2] 30년 전쟁중 가장 유명한 전투이다.
1631년 9월 17일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지휘관이었던 스웨덴 왕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라이프치히 근교 브라이텐펠트 평원에서 로마 가톨릭군의 지휘관인 틸리 백작인 [4]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30년 전쟁에서 처음으로 [5]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진영이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이 승리로 [3]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위대한 전술적 지도자로 면모를 확고히 다졌으며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영웅이 되었다.
[1] 브라이텐펠트 :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4km 떨어져 있는 지역
[2] 30년 전쟁 :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과 중부유럽을 무대로 벌어진 개신교(신교)와 카톨릭교(구교)간의 종교전쟁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4]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Johann Tserclaes, Count of Tilly, 1559년~1632) : '갑옷을 입은 수도사' 혹은 '마그데부르크(독일 도시)의 도살자'로 유명한 30년 전쟁(1618~1648년)시 신성 로마 제국의 장수
[5]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 개신교.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자의 의미로 담고있다
1631년 9월 17일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지휘관이었던 스웨덴 왕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라이프치히 근교 브라이텐펠트 평원에서 로마 가톨릭군의 지휘관인 틸리 백작인 [4]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30년 전쟁에서 처음으로 [5]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진영이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이 승리로 [3]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위대한 전술적 지도자로 면모를 확고히 다졌으며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영웅이 되었다.
[1] 브라이텐펠트 :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4km 떨어져 있는 지역
[2] 30년 전쟁 :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과 중부유럽을 무대로 벌어진 개신교(신교)와 카톨릭교(구교)간의 종교전쟁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4]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Johann Tserclaes, Count of Tilly, 1559년~1632) : '갑옷을 입은 수도사' 혹은 '마그데부르크(독일 도시)의 도살자'로 유명한 30년 전쟁(1618~1648년)시 신성 로마 제국의 장수
[5]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 개신교.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자의 의미로 담고있다
[1]뤼첸 전투(Battle of Lützen)는 30년 전쟁 중기인 1632년 11월 16일에 독일 [2]라이프치히 남서쪽 [1]뤼첸 근교에서 벌어진 개신교(신교) 군대와 가톨릭(구교) 군대가 벌인 전투이다.
[3]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 및 독일 개신교 제후 연합군과 신성 로마 제국 [6]페르디난트 2세 휘하의 [4]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가톨릭 동맹 연합군이 교전하여 보병, 기병, 포병의 3병의 결합이 어우러진 전투였다. 스웨덴군이 전술적으로 완전히 승리하였으나 국왕 [3]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여 개신교 군대의 단결이 악화되었다.
뤼첸 근교에서 진지를 차린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개신교군은 11월 16일 오전 공격을 개시하였다. 개신교군은 전투초반의 팽팽함과는 달리 카톨릭군의 포격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구스타프 2세가 직접 전장에 나섰으나 카톨릭군과 정면으로 맞닺게 되어 치열하게 싸웠으나 총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호위병들과 함께 후퇴하였으나 카톨릭군의 연이은 총탄을 추가로 맞으면서 치명상을 입고 낙마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난전 상태에서 연속된 총탄으로 결국 사망했다.
양군은 구스타브 2세의 죽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교전을 계속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스타브의 전사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개신교군은 일시적으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전선 부대는 후퇴하려고 하였다. 패주 직전의 상태에서 지휘관인 크니프하우젠이 냉정을 찾아 전군을 결속시켜 붕괴를 막는 데 성공했다. 독일 신교도를 이끌었던 작센바이마르의 공작인 [5]베른하르트는 구스타브의 죽음을 알고 지휘권을 넘겨받은 후 총 공격을 감행했다.
스웨덴군을 포함한 개신교군은 구스타브 2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맹렬한 기세로 돌격을 시작했다. 카톨릭군도 이에 응전하면서 양군 모두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개신교군 세력이 승리하였다. 사기가 떨어진 카톨릭군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했다.
뤼첸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3]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으로 스웨덴군 및 개신 제후 연합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결국, 1934년 9월 6일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를 겪으면서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그 후 교착상태에 빠진 30년 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참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구스타프 2세가 착용했던 황색의 [7]버프코트는 전리품으로 신성로마 황제에게 보내졌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오스트리아에서 스웨덴으로 반환되었다.
[1] 뤼첸(Lützen) : 독일의 라이프치히 시 경계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도시
[2] 라이프치히(Leipzig) : 독일 작센 주의 가장 큰 도시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4]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 1583년~1634년) : 보헤미아(현재의 체코)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30년 전쟁 중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2세 황제 휘하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5]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Bernhard von Sachsen-Weimar, 1604년~1639년) : 30년 전쟁 당시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1632년 11월 16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사령관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군대를 무찔렀다
[6]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1578년~1637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재위, 1619년~1637년). 보헤미아의 국왕(재위, 1617년~1637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1617년~1637년)
[7] 버프코드(buff coat) : 16세기에 만든 유럽의 가죽 갑옷의 한 종류
[3]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 및 독일 개신교 제후 연합군과 신성 로마 제국 [6]페르디난트 2세 휘하의 [4]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가톨릭 동맹 연합군이 교전하여 보병, 기병, 포병의 3병의 결합이 어우러진 전투였다. 스웨덴군이 전술적으로 완전히 승리하였으나 국왕 [3]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여 개신교 군대의 단결이 악화되었다.
뤼첸 근교에서 진지를 차린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개신교군은 11월 16일 오전 공격을 개시하였다. 개신교군은 전투초반의 팽팽함과는 달리 카톨릭군의 포격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구스타프 2세가 직접 전장에 나섰으나 카톨릭군과 정면으로 맞닺게 되어 치열하게 싸웠으나 총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호위병들과 함께 후퇴하였으나 카톨릭군의 연이은 총탄을 추가로 맞으면서 치명상을 입고 낙마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난전 상태에서 연속된 총탄으로 결국 사망했다.
양군은 구스타브 2세의 죽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교전을 계속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스타브의 전사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개신교군은 일시적으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전선 부대는 후퇴하려고 하였다. 패주 직전의 상태에서 지휘관인 크니프하우젠이 냉정을 찾아 전군을 결속시켜 붕괴를 막는 데 성공했다. 독일 신교도를 이끌었던 작센바이마르의 공작인 [5]베른하르트는 구스타브의 죽음을 알고 지휘권을 넘겨받은 후 총 공격을 감행했다.
스웨덴군을 포함한 개신교군은 구스타브 2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맹렬한 기세로 돌격을 시작했다. 카톨릭군도 이에 응전하면서 양군 모두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개신교군 세력이 승리하였다. 사기가 떨어진 카톨릭군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했다.
뤼첸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3]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으로 스웨덴군 및 개신 제후 연합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결국, 1934년 9월 6일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를 겪으면서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그 후 교착상태에 빠진 30년 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참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구스타프 2세가 착용했던 황색의 [7]버프코트는 전리품으로 신성로마 황제에게 보내졌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오스트리아에서 스웨덴으로 반환되었다.
[1] 뤼첸(Lützen) : 독일의 라이프치히 시 경계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도시
[2] 라이프치히(Leipzig) : 독일 작센 주의 가장 큰 도시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4]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 1583년~1634년) : 보헤미아(현재의 체코)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30년 전쟁 중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2세 황제 휘하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5]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Bernhard von Sachsen-Weimar, 1604년~1639년) : 30년 전쟁 당시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1632년 11월 16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사령관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군대를 무찔렀다
[6]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1578년~1637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재위, 1619년~1637년). 보헤미아의 국왕(재위, 1617년~1637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1617년~1637년)
[7] 버프코드(buff coat) : 16세기에 만든 유럽의 가죽 갑옷의 한 종류
[1]뇌르틀링겐 전투는 30년 전쟁 중기인 1634년 9월 6일에 벌어진 가톨릭(구교) 군대와 개신교(신교) 군대가 벌인 전투이다.
신성로마제국은 [3]페르디난트 3세와 사촌인 [5]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하는 있었으며 개신교군은 [4]구스타브 호른이 지휘하는 스웨덴군과 [6]베르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가 지휘하고 있었다.
스웨덴군은 2년 전 뤼첸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당시 전투에서 스웨덴의 국왕 [2]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사망으로 스웨덴군 및 개신교군 연합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개신교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패배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동남부 독일을 지배하던 스웨덴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스페인의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여 라인강의 서부 지역을 확고히 장악했고, 이로 인해 위협받게 된 프랑스는 30년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1] 뇌르틀링겐(Nördlingen) : 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도시
[2]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3]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1608년~1657년) : 페르디난트 2세의 장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재위:1637년~1657년), 보헤미아 국왕(재위:1627년~1657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1625년~1657년). 30년 전쟁을 끝낸 황제
[4] 구스타브 호른(Gustav Horn, 1592년~1657년) : 스웨덴 제국의 군인, 정치인
[5]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Fernando de Austria, 1609년~1641년) : 합스부르크 가의 스페인 국왕의 펠리페 3세의 차남
[6]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Bernhard von Sachsen-Weimar, 1604년~1639년) : 30년 전쟁 당시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1632년 1632년 11월 16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사령관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군대를 무찔렀다
신성로마제국은 [3]페르디난트 3세와 사촌인 [5]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하는 있었으며 개신교군은 [4]구스타브 호른이 지휘하는 스웨덴군과 [6]베르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가 지휘하고 있었다.
스웨덴군은 2년 전 뤼첸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당시 전투에서 스웨덴의 국왕 [2]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사망으로 스웨덴군 및 개신교군 연합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개신교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패배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동남부 독일을 지배하던 스웨덴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스페인의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여 라인강의 서부 지역을 확고히 장악했고, 이로 인해 위협받게 된 프랑스는 30년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1] 뇌르틀링겐(Nördlingen) : 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도시
[2]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3]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1608년~1657년) : 페르디난트 2세의 장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재위:1637년~1657년), 보헤미아 국왕(재위:1627년~1657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1625년~1657년). 30년 전쟁을 끝낸 황제
[4] 구스타브 호른(Gustav Horn, 1592년~1657년) : 스웨덴 제국의 군인, 정치인
[5]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Fernando de Austria, 1609년~1641년) : 합스부르크 가의 스페인 국왕의 펠리페 3세의 차남
[6]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Bernhard von Sachsen-Weimar, 1604년~1639년) : 30년 전쟁 당시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1632년 1632년 11월 16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사령관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군대를 무찔렀다
임진왜란 여파로 명나라는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여진족은 후금을 세웠다.
점점 국력이 강해진 후금은 조선에게 형제 관계에서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후금의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나라로 바꾸고 대군을 거느리고 1636년(인조14) 12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쳐들어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철수하여 후일을 기약하려 했으나 강화도로 가는 길이 청나라군에 의해 점령됨에 따라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거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강추위와 굶주림으로 오래 버티지 못하였다. 당시 조선 관료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청과 화의하자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로 나뉘어 논쟁을 계속했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당시 한강 나루터)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 인조 : 조선 제16대 임금(재위: 1623년 ~ 1649년)
* 홍타이지(1592년~1643년) : 청나라의 제2대 황제. 재위 : 1626년~1643년. '청태종' 혹은 '숭덕제'로 알려져 있다
점점 국력이 강해진 후금은 조선에게 형제 관계에서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후금의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나라로 바꾸고 대군을 거느리고 1636년(인조14) 12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쳐들어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철수하여 후일을 기약하려 했으나 강화도로 가는 길이 청나라군에 의해 점령됨에 따라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거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강추위와 굶주림으로 오래 버티지 못하였다. 당시 조선 관료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청과 화의하자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로 나뉘어 논쟁을 계속했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당시 한강 나루터)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 인조 : 조선 제16대 임금(재위: 1623년 ~ 1649년)
* 홍타이지(1592년~1643년) : 청나라의 제2대 황제. 재위 : 1626년~1643년. '청태종' 혹은 '숭덕제'로 알려져 있다
쌍령전투는 병자호란이 진행되던 중 1637년 1월 2일에 쌍령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청군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청군에 대패하였으며 결국 남한산성에서 항전하고 있었던 인조가 청나라에게 항복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패전을 결정한 최종 전투였으며 한국 역사 3대 패전(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중 하나로 꼽힌다.
* 인조(1595~1649) : 조선의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 ~ 1649년
* 쌍령 : 경기도 광주부 쌍령(현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패전을 결정한 최종 전투였으며 한국 역사 3대 패전(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중 하나로 꼽힌다.
* 인조(1595~1649) : 조선의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 ~ 1649년
* 쌍령 : 경기도 광주부 쌍령(현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포르투갈 독립전쟁은 포르투갈 왕국과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 왕국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포르투갈 왕정 복고전쟁이라고도 한다
포르투갈 [1]아비스 왕조의 [2]엔히크 1세 국왕이 후세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국와 [4]펠리페 2세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하여 1580년에 [5]이베리아 연합을 만들었다.
[4]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폭넓은 자치권을 인정했지만 ,뒤를 이은 펠리페 3세는 포르투갈을 스페인의 한 주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쳤고 이어 펠리페 4세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중과세를 부과하고 포르투갈 귀족들의 지위를 박탈하였으며 요직은 스페인 혹은 친 스페인 성향의 포르투갈 귀족들을 등용해 포르투갈내에서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다.
1640년 12월 7일 포르투갈 귀족들과 시민들이 리스본에서 봉기를 일으켜 [8]리베이라 궁전을 공격하여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이던 재상 [9]미겔 드 바스콘셀로스를 살해하고 포르투갈을 통치하던 스페인 총독을 추방하였다.
이 공격을 주도한 귀족들의 대표인 브라간사 공작이 포르투갈 새 국왕으로 추대되어 [6]주앙 4세로 등극하여 단절된 포르투갈 왕조는 [3]브라간사 왕조로 계승되었다.
주앙 4세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선언했고 이에 반발한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침공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668년까지 28년간 전쟁 상태가 지속되었다.
초기 포르투갈은 방어와 잉글랜드와 외교적 동맹을 통해 저항했다. 이후 스페인은 유럽 내 다른 전쟁들로 인해 포르투갈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고, 포르투갈은 방어를 강화하며 독립을 유지했다. 결국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제압하는데 실패했고 잉글랜드의 중재를 받아들여 리스본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독립과 [3]브라간사 왕조를 정식으로 승인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에게 [7]세우타를 할양했지만 그 밖의 국외 영토들은 모두 보존하였다.
이로써 약 60년간의 이베리아 연합이 종식되고, 포르투갈은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1] 아비스 왕조(House of Aviz) : 조아니나가로 알려진 포르투갈의 두 번째 왕가
[2] 엔히크 1세(Henrique I, 1512년 1월 31일~1580년 1월 31일) :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10대 국왕(재위, 1578년 8월 4일 ~ 1580년 1월 31일)
[3] 브라간사 왕조(House of Braganza) : 아비스 가에서 갈라진 가문으로서 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을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추대하여 왕가의 지위를 얻었으며 이후 제4왕조 브라간사 왕조를 열게 된다. 이 왕조는 1910년 포르투갈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270년간 16대를 이어갔다
[4]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제2대 국왕(스페인 재위 : 1556~1598). 포르투갈 왕으로 필리프(Filipe) 1세로 불린다
[5] 이베리아 연합(Iberian Union) : 포르투갈 왕국과 스페인 왕국의 동군연합으로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약 60년간 존속되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의 시기이다
[6] 주앙 4세(John IV of Portugal, 1604년~1656년) : 포르투갈 왕국을 다스린 브라간사 왕가 최초의 국왕(재위: 1640년~1656년)
[7] 세우타(Ceuta) : 이베리아 반도가 아닌 북아프리카 본토에 위치해 모로코와 육상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 스페인의 자치도시
[8] 리베이라 궁전(Ribeira Palace) :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에서 위치한 포르투갈 왕들이 약 250년 동안 거주하였던 궁전. 이 궁전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현재는 코레르시우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9] 미겔 드 바스콘셀로스(Miguel de Vasconcelos e Brito, 약 1590년 ~ 1640년 12월 1일) : 포르투갈의 정치인으로 이베리아 연합 말기인 1635년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 왕국의 국무장관(사실상 총리)을 역임했다. 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서 포르투갈의 자치권을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국민들의 강한 반감을 샀으며 1640년 포르투갈 독립 혁명 당시 암살되었다
포르투갈 [1]아비스 왕조의 [2]엔히크 1세 국왕이 후세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국와 [4]펠리페 2세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하여 1580년에 [5]이베리아 연합을 만들었다.
[4]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폭넓은 자치권을 인정했지만 ,뒤를 이은 펠리페 3세는 포르투갈을 스페인의 한 주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쳤고 이어 펠리페 4세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중과세를 부과하고 포르투갈 귀족들의 지위를 박탈하였으며 요직은 스페인 혹은 친 스페인 성향의 포르투갈 귀족들을 등용해 포르투갈내에서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다.
1640년 12월 7일 포르투갈 귀족들과 시민들이 리스본에서 봉기를 일으켜 [8]리베이라 궁전을 공격하여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이던 재상 [9]미겔 드 바스콘셀로스를 살해하고 포르투갈을 통치하던 스페인 총독을 추방하였다.
이 공격을 주도한 귀족들의 대표인 브라간사 공작이 포르투갈 새 국왕으로 추대되어 [6]주앙 4세로 등극하여 단절된 포르투갈 왕조는 [3]브라간사 왕조로 계승되었다.
주앙 4세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선언했고 이에 반발한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침공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668년까지 28년간 전쟁 상태가 지속되었다.
초기 포르투갈은 방어와 잉글랜드와 외교적 동맹을 통해 저항했다. 이후 스페인은 유럽 내 다른 전쟁들로 인해 포르투갈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고, 포르투갈은 방어를 강화하며 독립을 유지했다. 결국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제압하는데 실패했고 잉글랜드의 중재를 받아들여 리스본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독립과 [3]브라간사 왕조를 정식으로 승인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에게 [7]세우타를 할양했지만 그 밖의 국외 영토들은 모두 보존하였다.
이로써 약 60년간의 이베리아 연합이 종식되고, 포르투갈은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1] 아비스 왕조(House of Aviz) : 조아니나가로 알려진 포르투갈의 두 번째 왕가
[2] 엔히크 1세(Henrique I, 1512년 1월 31일~1580년 1월 31일) :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10대 국왕(재위, 1578년 8월 4일 ~ 1580년 1월 31일)
[3] 브라간사 왕조(House of Braganza) : 아비스 가에서 갈라진 가문으로서 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을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추대하여 왕가의 지위를 얻었으며 이후 제4왕조 브라간사 왕조를 열게 된다. 이 왕조는 1910년 포르투갈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270년간 16대를 이어갔다
[4]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제2대 국왕(스페인 재위 : 1556~1598). 포르투갈 왕으로 필리프(Filipe) 1세로 불린다
[5] 이베리아 연합(Iberian Union) : 포르투갈 왕국과 스페인 왕국의 동군연합으로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약 60년간 존속되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의 시기이다
[6] 주앙 4세(John IV of Portugal, 1604년~1656년) : 포르투갈 왕국을 다스린 브라간사 왕가 최초의 국왕(재위: 1640년~1656년)
[7] 세우타(Ceuta) : 이베리아 반도가 아닌 북아프리카 본토에 위치해 모로코와 육상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 스페인의 자치도시
[8] 리베이라 궁전(Ribeira Palace) :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에서 위치한 포르투갈 왕들이 약 250년 동안 거주하였던 궁전. 이 궁전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현재는 코레르시우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9] 미겔 드 바스콘셀로스(Miguel de Vasconcelos e Brito, 약 1590년 ~ 1640년 12월 1일) : 포르투갈의 정치인으로 이베리아 연합 말기인 1635년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 왕국의 국무장관(사실상 총리)을 역임했다. 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서 포르투갈의 자치권을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국민들의 강한 반감을 샀으며 1640년 포르투갈 독립 혁명 당시 암살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1642년부터 1651년까지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포함한 영국 전역에서 발생하다. 왕권을 주장하는 왕당파와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의회파의 충돌로 발생하였다. 이 내전은 잉글랜드의 정치 체제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7]입헌군주제와 의회 중심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전의 배경에는 왕권과 의회의 갈등, 종교적 대립,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 [1]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 부과와 종교 정책 강행을 시도했으며, 이에 의회는 반발했다. 특히 찰스가 1629년부터 1940년까지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의회를 없애려고 한다는 의구심을 일으켰다. 잉글랜드는 성공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 체계에 대해 청교도들은 비판적이었으며, 찰스 1세는 이를 억압했다.
스코틀랜드에 성공회를 강제로 도입하려 하며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벌어졌고 이는 재정난으로 이어졌다. 찰스 1세는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고 이에 찰스 1세는 의회를 통제하려다가 실패하면서가 갈등이 폭발하였다. 왕당파와 의회파의 긴장이 심화되면서 전쟁으로 이어졌다.
1642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왕당파(국왕 지지 세력)와 의회파(청교도와 개혁 지지 세력)가 충돌했다. 전쟁 초기에는 왕당파가 우세했으나, 1645년 [3]네이즈비 전투에서 [5]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하며 전세가 뒤집혔다. 1646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항복하였지만, 스코틀랜드는 의회파에 신변을 넘기면서 감금되었다.
찰스 1세는 비밀리에 왕권 회복을 위해 1657년에 스코틀랜드와 협상하여 왕당파는 2차 내전(1648~1649)을 일으켰다. 그러나 1년여 만에 패배하면서 결국 찰스 1세는 1649년 1월 30일에, 공개 재판 후 처형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는 국왕이 없는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왕당파는 찰스 1세의 아들인 [2]찰스 2세의 복위를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저항하면서 3차 내전(1649~1651)이 발발했다. 결국 1651년 울스터 전투에서 [5]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하며 내전은 마무리되었다.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5]올리버 크롬웰은 1653년 의회를 해산하고 구준와 유사한 [6]호국경에 취임하여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화정은 붕괴되었다. 1660년 [2]찰스 2세가 왕으로 복귀하면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내전을 거치면서 왕권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았고,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결국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의 기틀이 확립되면서 잉글랜드는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왕권 제한, 의회 권력 강화, 종교 개혁, 군사 혁신 등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 내전으로 인해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와 [7]입헌군주제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정치발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1] 찰스 1세(Charles I,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재위, 1625년 3월 27일~1649년 1월 30일)
[2] 찰스 2세(Charles II, 1630년 5월 29일~1685년 2월 6일) : 잉글랜드,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국왕(재위, 1660년 5월 29일 ~ 1685년 2월 6일)
[3] 네이즈비 전투(Battle of Naseby) : 잉글랜드 내전 시기인 1645년 6월 14일 노샘프턴셔의 네이즈비에서 찰스 1세가 이끄는 국왕군과 토머스 페어팩스 경과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하는 의회군이 맞붙은 전투. 의회군이 이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1차 잉글랜드 내전은 이 전투 이후 1년 만에 의회파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4] 우스터 전투(Battle of Worcester, 1651년 9월 3일) : 잉글랜드 우스터에서 치뤄진 잉글랜드 내전의 마지막 전투였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왕당파와 의회파와의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의회파가 승리하였다
[5]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 : 영국 내전에서 의회군을 이끌어 왕당파에 승리하여 잉글랜드 공화국을 세웠다. 1653년부터는 국가원수인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서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군사 정권을 유지했다. 그의 사후 왕정이 복귀했지만, 영국 정치에서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6] 호국경(Lord Protector) : 잉글랜드의 왕권이 미약하였을 때, 왕을 섭정하던 귀족에게 붙이던 호칭
[7] 입헌군주제 : 헌법 체계 아래서 세습되거나 선임된 군주를 인정하는 정부 형태. 즉 정치적 군주의 권력이 헌법에 의하여 제한을 받는 군주제
내전의 배경에는 왕권과 의회의 갈등, 종교적 대립,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 [1]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 부과와 종교 정책 강행을 시도했으며, 이에 의회는 반발했다. 특히 찰스가 1629년부터 1940년까지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의회를 없애려고 한다는 의구심을 일으켰다. 잉글랜드는 성공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 체계에 대해 청교도들은 비판적이었으며, 찰스 1세는 이를 억압했다.
스코틀랜드에 성공회를 강제로 도입하려 하며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벌어졌고 이는 재정난으로 이어졌다. 찰스 1세는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고 이에 찰스 1세는 의회를 통제하려다가 실패하면서가 갈등이 폭발하였다. 왕당파와 의회파의 긴장이 심화되면서 전쟁으로 이어졌다.
1642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왕당파(국왕 지지 세력)와 의회파(청교도와 개혁 지지 세력)가 충돌했다. 전쟁 초기에는 왕당파가 우세했으나, 1645년 [3]네이즈비 전투에서 [5]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하며 전세가 뒤집혔다. 1646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항복하였지만, 스코틀랜드는 의회파에 신변을 넘기면서 감금되었다.
찰스 1세는 비밀리에 왕권 회복을 위해 1657년에 스코틀랜드와 협상하여 왕당파는 2차 내전(1648~1649)을 일으켰다. 그러나 1년여 만에 패배하면서 결국 찰스 1세는 1649년 1월 30일에, 공개 재판 후 처형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는 국왕이 없는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왕당파는 찰스 1세의 아들인 [2]찰스 2세의 복위를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저항하면서 3차 내전(1649~1651)이 발발했다. 결국 1651년 울스터 전투에서 [5]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하며 내전은 마무리되었다.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5]올리버 크롬웰은 1653년 의회를 해산하고 구준와 유사한 [6]호국경에 취임하여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화정은 붕괴되었다. 1660년 [2]찰스 2세가 왕으로 복귀하면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내전을 거치면서 왕권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았고,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결국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의 기틀이 확립되면서 잉글랜드는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왕권 제한, 의회 권력 강화, 종교 개혁, 군사 혁신 등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 내전으로 인해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와 [7]입헌군주제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정치발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1] 찰스 1세(Charles I,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재위, 1625년 3월 27일~1649년 1월 30일)
[2] 찰스 2세(Charles II, 1630년 5월 29일~1685년 2월 6일) : 잉글랜드,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국왕(재위, 1660년 5월 29일 ~ 1685년 2월 6일)
[3] 네이즈비 전투(Battle of Naseby) : 잉글랜드 내전 시기인 1645년 6월 14일 노샘프턴셔의 네이즈비에서 찰스 1세가 이끄는 국왕군과 토머스 페어팩스 경과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하는 의회군이 맞붙은 전투. 의회군이 이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1차 잉글랜드 내전은 이 전투 이후 1년 만에 의회파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4] 우스터 전투(Battle of Worcester, 1651년 9월 3일) : 잉글랜드 우스터에서 치뤄진 잉글랜드 내전의 마지막 전투였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왕당파와 의회파와의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의회파가 승리하였다
[5]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 : 영국 내전에서 의회군을 이끌어 왕당파에 승리하여 잉글랜드 공화국을 세웠다. 1653년부터는 국가원수인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서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군사 정권을 유지했다. 그의 사후 왕정이 복귀했지만, 영국 정치에서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6] 호국경(Lord Protector) : 잉글랜드의 왕권이 미약하였을 때, 왕을 섭정하던 귀족에게 붙이던 호칭
[7] 입헌군주제 : 헌법 체계 아래서 세습되거나 선임된 군주를 인정하는 정부 형태. 즉 정치적 군주의 권력이 헌법에 의하여 제한을 받는 군주제
웨스트팔렌 조약은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현재 독일의 두 도시인 [1]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2]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이다.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30년 전쟁은 로마 가톨릭세력과 개신교세력간의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종교갈등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한 양상을 흐르게 된다. 30년 전쟁은 유럽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료되었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개신교 국가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에서 벗어나 생존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중세에서 근대국가체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근대 국제법의 시초로 평가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 첫째, 조약 체결 방식을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강제적 형식이 아닌 참전했던 유럽 왕국들과 제후국들의 대표들이 모여 협상을 통해 체결되었다.
- 둘째,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종교의 자유란 구교와 신교 중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각 국가들에게 위임했음을 의미한다.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종교가 강요되었던 과거 중세와 비교했을 때 종교의 자유는 각 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신성로마제국은 약화되어 멸망하게 된다. 각 국가들의 '주권' 의식의 탄생과 함께 영토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국가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1]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 독일 북서쪽 니더작센주에 있는 도시
[2] 뮌스터(Münster) : 독일 북서쪽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있는 도시
30년 전쟁은 로마 가톨릭세력과 개신교세력간의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종교갈등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한 양상을 흐르게 된다. 30년 전쟁은 유럽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료되었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개신교 국가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에서 벗어나 생존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중세에서 근대국가체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근대 국제법의 시초로 평가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 첫째, 조약 체결 방식을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강제적 형식이 아닌 참전했던 유럽 왕국들과 제후국들의 대표들이 모여 협상을 통해 체결되었다.
- 둘째,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종교의 자유란 구교와 신교 중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각 국가들에게 위임했음을 의미한다.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종교가 강요되었던 과거 중세와 비교했을 때 종교의 자유는 각 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신성로마제국은 약화되어 멸망하게 된다. 각 국가들의 '주권' 의식의 탄생과 함께 영토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국가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1]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 독일 북서쪽 니더작센주에 있는 도시
[2] 뮌스터(Münster) : 독일 북서쪽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있는 도시
1651년 잉글랜드의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년 4월25일~1658년 9월3일)이 항해조례를 선포하였다.이는 잉글랜드의 해상무역과 어업을 보호하기 위한 해상독점이 직접적인 목적이었다. 이에 네덜란드와 충돌하여 벌어진 전쟁이다.
당시 조선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네덜란드 해군은 전쟁초반 승리를 거듭하였으나 1653년 스헤베닝언(Scheveningen)에서 명제독 마르텐 트롬프(Maarten Harpertszoon Tromp, 1598년 4월 23일~1653년 8월 10일)가 전사(네덜란드 함대의 사기를 위해서 마르텐 트롬프의 죽음은 비밀에 붙여졌지만 많은 피해를 입었고 전황을 역전시키지 못한 채 텍셀(Texel)섬으로 후퇴하였다)하면서 네덜란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잃었다.
결국 양국은 전쟁을 계속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1654년 웨스트민스터조약(Treaty of Westminster)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이로써 17세기 전반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네덜란드가 바다의 지배권을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쇠퇴의 길을 걷는 전조가 되었다.
* 호국경(Lord Protector) : 잉글랜드의 왕권이 미약하였을 때 왕을 섭정하던 귀족에게 붙이던 호칭이었다.
당시 조선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네덜란드 해군은 전쟁초반 승리를 거듭하였으나 1653년 스헤베닝언(Scheveningen)에서 명제독 마르텐 트롬프(Maarten Harpertszoon Tromp, 1598년 4월 23일~1653년 8월 10일)가 전사(네덜란드 함대의 사기를 위해서 마르텐 트롬프의 죽음은 비밀에 붙여졌지만 많은 피해를 입었고 전황을 역전시키지 못한 채 텍셀(Texel)섬으로 후퇴하였다)하면서 네덜란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잃었다.
결국 양국은 전쟁을 계속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1654년 웨스트민스터조약(Treaty of Westminster)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이로써 17세기 전반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네덜란드가 바다의 지배권을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쇠퇴의 길을 걷는 전조가 되었다.
* 호국경(Lord Protector) : 잉글랜드의 왕권이 미약하였을 때 왕을 섭정하던 귀족에게 붙이던 호칭이었다.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이 서거하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예송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서인(송시열, 송준길, 김수항등)들은 효종이 인조의 차자(인조의 장자는 소현세자)의 예에 따라 기년복(1년)을 주장하였고, 남인(윤선도, 허목, 휸휴등)들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여 인조의 장자에 해당한다고 하여 삼년복(3년)을 주장하였다.
당시 영의정 정태화는 '경국대전'을 근거로 장자와 차자를 구분하지 않는 기년복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현종은 몇 번의 수의(收議)를 거쳐 기년복으로 확정하였다. 그러자 남인은 서인들의 기년설을 '효종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이분화'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서인들이 격분하여 윤선도를 유배시키고 예송에 가담한 남인들을 조정에서 축출되어 이 시기에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예송은 단순히 상복을 두고 벌인 논쟁은 아니었으며,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 효종의 정통성, 왕권과 신권의 관계 등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중대한 정치 현안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기해예송), 국산편찬위원회(예송)
* 예송 : 예절에 관한 논란
* 자의대비(장렬왕후, 1624년~1688년) :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의 계비(새 중전)
* 효종(1619년~1659년) : 조선 제17대 국왕, 재위 : 1649년~1659년.
* 현종(1641년~1674년) : 조선 제18대 국왕, 재위 : 1659년~1674년
* 서인 : 신권중심
* 남인 : 왕권중심
* 경국대전 : 조선시대의 기본 법전
서인(송시열, 송준길, 김수항등)들은 효종이 인조의 차자(인조의 장자는 소현세자)의 예에 따라 기년복(1년)을 주장하였고, 남인(윤선도, 허목, 휸휴등)들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여 인조의 장자에 해당한다고 하여 삼년복(3년)을 주장하였다.
당시 영의정 정태화는 '경국대전'을 근거로 장자와 차자를 구분하지 않는 기년복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현종은 몇 번의 수의(收議)를 거쳐 기년복으로 확정하였다. 그러자 남인은 서인들의 기년설을 '효종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이분화'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서인들이 격분하여 윤선도를 유배시키고 예송에 가담한 남인들을 조정에서 축출되어 이 시기에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예송은 단순히 상복을 두고 벌인 논쟁은 아니었으며,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 효종의 정통성, 왕권과 신권의 관계 등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중대한 정치 현안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기해예송), 국산편찬위원회(예송)
* 예송 : 예절에 관한 논란
* 자의대비(장렬왕후, 1624년~1688년) :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의 계비(새 중전)
* 효종(1619년~1659년) : 조선 제17대 국왕, 재위 : 1649년~1659년.
* 현종(1641년~1674년) : 조선 제18대 국왕, 재위 : 1659년~1674년
* 서인 : 신권중심
* 남인 : 왕권중심
* 경국대전 : 조선시대의 기본 법전
1658년 올리버 클롬웰이 사망한 후 1660년 찰스 2세가 복위하는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찰스 2세는 해외 곳곳에서 네덜란드 상인들과 무역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잉글랜드 상인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항해 조례를 갱신하며 네덜란드와 계속해서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던 중 북 아메리카의 네덜란드 식민지인 뉴 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뉴욕으로 명명하면서 양국의 대립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결국 1665년 잉글랜드가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로스토프트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을 무찔렀으나 이후 프랑스가 네덜란드와 연합하면서 전황은 점차 네덜란드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런던 대화재와 흑사병의 여파와 미힐 데 로이테르 제독(Michiel de Ruyter)휘하의 네덜란드 함대의 메드웨이(Medway)강 습격(잉글랜드 해군 사상 최악의 굴욕 중 하나)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잉글랜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667년 7월 브레다 조약(Treaty of Breda)을 체결하였다.
잉글랜드는 뉴욕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그대로 영유하는 대신에 네덜란드에게 남아메리카의 기아나의 분할로 수리남을 양보했다.
그러던 중 북 아메리카의 네덜란드 식민지인 뉴 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뉴욕으로 명명하면서 양국의 대립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결국 1665년 잉글랜드가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이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로스토프트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을 무찔렀으나 이후 프랑스가 네덜란드와 연합하면서 전황은 점차 네덜란드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런던 대화재와 흑사병의 여파와 미힐 데 로이테르 제독(Michiel de Ruyter)휘하의 네덜란드 함대의 메드웨이(Medway)강 습격(잉글랜드 해군 사상 최악의 굴욕 중 하나)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잉글랜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667년 7월 브레다 조약(Treaty of Breda)을 체결하였다.
잉글랜드는 뉴욕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그대로 영유하는 대신에 네덜란드에게 남아메리카의 기아나의 분할로 수리남을 양보했다.
갑인예송은 1674년(현종 15) 2월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의 국상이 일어나자, 시어머니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사건이다. 일명, '제2차 예송'이라고도 한다.(1차 예송은 1659년에 일어난 기해예송이다)
인선왕후의 국상으로 효종이 장자(장자는 소현세자)가 아니니 인선왕후도 맏며느리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은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대공복(9개월)으로 결정하였다. 맏며느리는 기년복(1년)인데 그외 며느리는 대공복(9개월)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인계의 대구 유생 도신징이 상소하여 기년복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이에 현종은 기해예송 시기에는 기년복의 법을 사용하였는데 이제는 그 전의 법을 쓰라고 하는 일관성없는 서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종은 서인 송시열의 제자인 김수흥을 영의정에서 파직하고 남인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는 대신 김수흥의 동생 김수항을 좌의정으로 삼아 조정의 균형을 맞추어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후 2달도 채 지나지 않아 현종은 숨을 거둔다. 뒤이어 즉위한 숙종은 이 예송을 잘못 이끈 죄를 물어 서인 중심인물들을 대거 축출하고 남인들을 등용하여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 만에 정국이 개편되었다.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갑인예송)
* 예송 : 예절에 관한 논란
* 자의대비(장렬왕후, 1624년~1688년) :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의 계비(새 중전)
* 인선왕후(1618년~1674s년) : 조선 제17대 국왕 효종의 정비. 현종의 어머니
* 대공복 : 상례의 오복제도에 따른 상복으로 대공친(친척)은 9개월 상복을 입는다
* 효종(1619년~1659년) : 조선 제17대 국왕, 재위 : 1649년~1659년
* 현종(1641년~1674년) : 조선 제18대 국왕, 재위 : 1659년~1674년
* 숙종(1661년~1720년) : 조선 제19대 국왕, 재위: 1674년~1720년
* 도신징 :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예제에 밝았으며 유생의 신분으로 소를 올려 기년설(1년)을 주장함으로써, 김수흥등 서인 일파를 축출하게 하였다.
* 인조반정 : 1623년(광해군 15년) 서인 반정 세력이 광해군 및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인조)을 옹립한 사건
* 서인 : 신권중심
* 남인 : 왕권중심
인선왕후의 국상으로 효종이 장자(장자는 소현세자)가 아니니 인선왕후도 맏며느리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은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대공복(9개월)으로 결정하였다. 맏며느리는 기년복(1년)인데 그외 며느리는 대공복(9개월)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인계의 대구 유생 도신징이 상소하여 기년복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이에 현종은 기해예송 시기에는 기년복의 법을 사용하였는데 이제는 그 전의 법을 쓰라고 하는 일관성없는 서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종은 서인 송시열의 제자인 김수흥을 영의정에서 파직하고 남인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삼는 대신 김수흥의 동생 김수항을 좌의정으로 삼아 조정의 균형을 맞추어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후 2달도 채 지나지 않아 현종은 숨을 거둔다. 뒤이어 즉위한 숙종은 이 예송을 잘못 이끈 죄를 물어 서인 중심인물들을 대거 축출하고 남인들을 등용하여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 만에 정국이 개편되었다.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갑인예송)
* 예송 : 예절에 관한 논란
* 자의대비(장렬왕후, 1624년~1688년) : 조선 제16대 국왕 인조의 계비(새 중전)
* 인선왕후(1618년~1674s년) : 조선 제17대 국왕 효종의 정비. 현종의 어머니
* 대공복 : 상례의 오복제도에 따른 상복으로 대공친(친척)은 9개월 상복을 입는다
* 효종(1619년~1659년) : 조선 제17대 국왕, 재위 : 1649년~1659년
* 현종(1641년~1674년) : 조선 제18대 국왕, 재위 : 1659년~1674년
* 숙종(1661년~1720년) : 조선 제19대 국왕, 재위: 1674년~1720년
* 도신징 :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예제에 밝았으며 유생의 신분으로 소를 올려 기년설(1년)을 주장함으로써, 김수흥등 서인 일파를 축출하게 하였다.
* 인조반정 : 1623년(광해군 15년) 서인 반정 세력이 광해군 및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인조)을 옹립한 사건
* 서인 : 신권중심
* 남인 : 왕권중심
제2차 빈 공방전은 [2]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심장부를 점령하려고 시도한 대규모 공성전으로, [1]신성로마 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을 격퇴하며 유럽의 역사를 바꾼 중요한 전투다.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 확장 정점에서 벌어졌으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점진적 쇠퇴와 유럽의 세력 강화로 이어진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2]오스만 제국은 16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발칸 반도와 중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유럽 국가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었다. 술탄 [6]메흐메드 4세와 대재상 [3]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빈을 점령하여 유럽의 관문을 열고 기독교 세계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거두려 했다. 특히 빈은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이를 점령하면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지배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았다.
오스만군은 성벽 파괴와 공성전을 통해 도시를 점령하려 했으나,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4]레오폴트 1세는 약 1만 5천 명의 수비군과 시민들의 힘으로 방어를 이어갔다. 빈의 수비군은 끝까지 저항하며 성벽을 방어했지만, 식량 부족과 병력 손실로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위기를 대응하기 위하여 폴란드의 [5]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군대와 신성로마 제국, 독일 제후국들의 연합으로 구성되었으며, 연합군은 오스만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며 협공 작전을 펼쳤다.
1683년 9월 12일, 연합군과 오스만군 간의 최후 결전이 벌어졌다. 폴란드의 [5]얀 3세 소비에스키는 연합군을 지휘하며 오스만군의 좌익을 공격했고, 특히 폴란드의 중장갑 기병인 흰 날개 후사르가 대규모 돌격을 감행해 오스만군의 전열을 붕괴시켰다. 이 돌격은 유럽 전투사에서 가장 큰 기병 돌격으로 기록되며,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오스만군은 돌파구를 막지 못하고 대패했으며, [3]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포위를 풀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패배의 책임을 물어 [3]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오스만 제국에서 처형되었다.
제2차 빈 공성전은 오스만 제국의 유럽 확장이 저지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 승리는 기독교 연합군의 협력과 단결의 결과로, 이후 유럽 국가들 간의 연대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빈의 승리는 또한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했으며, 이후 벌어진 대튀르크 전쟁(1683~1699)에서 오스만 제국은 연달아 패배하며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점차 상실했다.
또한, 이 전투는 유럽의 군사 전술과 전략, 특히 폴란드의 기병과 독일 제후국의 지원병 역할이 부각된 사례로 남았다. 오스만 제국은 이 전투 이후 유럽에서 더 이상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빈은 기독교 세계의 상징적인 승리의 현장으로 기억되었다.
[1] 신성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 : 962년부터 1806년까지 중앙유럽을 중심으로 존재한 다민족적 연합체로, 기독교적 정통성과 황제권을 바탕으로 유럽의 정치·종교적 중심 역할을 했던 제국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06년 황제 프란츠 2세가 퇴위하며 제국은 해체되었다.
[2]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 1299년부터 1923년까지 이어진 강력한 이슬람 제국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광대한 영토와 문화를 가진 제국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3년 터키 공화국의 수립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3] 카라 무스타파 파샤(Kara Mustafa Paşa, 1634/1635년 ~ 1683년 12월 25일) : 오스만 제국의 재상.
[4] 레오폴트 1세(Leopold I, 1640년 6월 9일~1705년 5월 5일) : 신성 로마의 합스부르크 왕조 제10대 황제(재위 1658년 7월 18일~1705년 5월 5일), 헝가리 국왕(재위, 1655년~1705년 5월 5일)
[5] 얀 3세 소비에스키(John III Sobieski, 1629년 8월 17일~1696년 6월 17일) :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이루어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1674년 5월 21일~1696년 6월 17일)
[6] 메흐메드 4세(Mehmed IV, 1642년 1월 2일~1693년 1월 6일) : 오스만 제국의 제19대 술탄(재위 1648년 8월 8일~1687년 11월 8일)
[2]오스만 제국은 16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발칸 반도와 중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유럽 국가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었다. 술탄 [6]메흐메드 4세와 대재상 [3]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빈을 점령하여 유럽의 관문을 열고 기독교 세계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거두려 했다. 특히 빈은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이를 점령하면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지배가 가능해질 것으로 보았다.
오스만군은 성벽 파괴와 공성전을 통해 도시를 점령하려 했으나,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4]레오폴트 1세는 약 1만 5천 명의 수비군과 시민들의 힘으로 방어를 이어갔다. 빈의 수비군은 끝까지 저항하며 성벽을 방어했지만, 식량 부족과 병력 손실로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위기를 대응하기 위하여 폴란드의 [5]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군대와 신성로마 제국, 독일 제후국들의 연합으로 구성되었으며, 연합군은 오스만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며 협공 작전을 펼쳤다.
1683년 9월 12일, 연합군과 오스만군 간의 최후 결전이 벌어졌다. 폴란드의 [5]얀 3세 소비에스키는 연합군을 지휘하며 오스만군의 좌익을 공격했고, 특히 폴란드의 중장갑 기병인 흰 날개 후사르가 대규모 돌격을 감행해 오스만군의 전열을 붕괴시켰다. 이 돌격은 유럽 전투사에서 가장 큰 기병 돌격으로 기록되며,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오스만군은 돌파구를 막지 못하고 대패했으며, [3]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포위를 풀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패배의 책임을 물어 [3]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오스만 제국에서 처형되었다.
제2차 빈 공성전은 오스만 제국의 유럽 확장이 저지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이 승리는 기독교 연합군의 협력과 단결의 결과로, 이후 유럽 국가들 간의 연대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빈의 승리는 또한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했으며, 이후 벌어진 대튀르크 전쟁(1683~1699)에서 오스만 제국은 연달아 패배하며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점차 상실했다.
또한, 이 전투는 유럽의 군사 전술과 전략, 특히 폴란드의 기병과 독일 제후국의 지원병 역할이 부각된 사례로 남았다. 오스만 제국은 이 전투 이후 유럽에서 더 이상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빈은 기독교 세계의 상징적인 승리의 현장으로 기억되었다.
[1] 신성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 : 962년부터 1806년까지 중앙유럽을 중심으로 존재한 다민족적 연합체로, 기독교적 정통성과 황제권을 바탕으로 유럽의 정치·종교적 중심 역할을 했던 제국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06년 황제 프란츠 2세가 퇴위하며 제국은 해체되었다.
[2]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 1299년부터 1923년까지 이어진 강력한 이슬람 제국으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광대한 영토와 문화를 가진 제국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3년 터키 공화국의 수립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3] 카라 무스타파 파샤(Kara Mustafa Paşa, 1634/1635년 ~ 1683년 12월 25일) : 오스만 제국의 재상.
[4] 레오폴트 1세(Leopold I, 1640년 6월 9일~1705년 5월 5일) : 신성 로마의 합스부르크 왕조 제10대 황제(재위 1658년 7월 18일~1705년 5월 5일), 헝가리 국왕(재위, 1655년~1705년 5월 5일)
[5] 얀 3세 소비에스키(John III Sobieski, 1629년 8월 17일~1696년 6월 17일) :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이루어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1674년 5월 21일~1696년 6월 17일)
[6] 메흐메드 4세(Mehmed IV, 1642년 1월 2일~1693년 1월 6일) : 오스만 제국의 제19대 술탄(재위 1648년 8월 8일~1687년 11월 8일)
명예혁명은 영국에서 일어난 비폭력적 정치 혁명으로, 절대왕정을 종식시키고 입헌군주제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혁명은 국왕 [1]제임스 2세의 카톨릭 중심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발한 영국 의회가, 개신교의 딸 [2]메리 2세와 남편 네덜란드 총독 [3]윌리엄 3세(오렌지 공 빌럼)이 연합하여 왕위를 교체한 사건이다.
1688년, [3]윌리엄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들어왔으며, 이에 저항할 군사적 지지를 얻지 못한 [1]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큰 전투나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아 "명예로운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혁명의 결과, 1689년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 제정되어 국왕의 권한이 제한되고 의회의 권력이 강화되었으며, 절대왕정이 종식되고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었다. 이는 이후 현대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정치 체제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시민혁명은 봉건제 또는 군주제의 절대권력을 시민이 제한하고 민주적 권리를 확립하기 위해 일으킨 정치·사회적 변혁이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1642년~1649년), 명예 혁명(1688년), 미국 독립혁명(1775년~1783년), 프랑스 혁명(1789년-1799년)이 대표적인 시민혁명이다. 시민 혁명의 결과로 민족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 제임스 2세(James Ⅱ, 1633년 10월 24일~1701년 9월 16일) : 1685년 2월 6일 형이었던 찰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스튜어트 왕조 제4대 국왕 제임스 2세,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 제13대 국왕 제임스 7세로서 재위하였다(재위기간 : 1685년 2월 6일 ~ 1688년 12월 11일)
[2] 메리 2세(Mary II, 1662년 4월 30일~1694년 12월 28일) : 제임스 2세의 딸로서 잉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의 여왕(재위: 1688년 2월 13일~1694년 12월 28일). 개신교 신자
[3] 윌리엄 3세(William III, 1650년 11월 4일~1702년 3월 8일) :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14대 국왕으로 윌리엄 2세. 잉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5대 국왕으로 윌리엄 3세(재위 : 1689년~1702년 3월 8일). 네덜란드 공화국 빌럼 3세(Willem III, 재직 1672년 6월 28일 ~ 1702년 3월 8일)
이 혁명은 국왕 [1]제임스 2세의 카톨릭 중심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발한 영국 의회가, 개신교의 딸 [2]메리 2세와 남편 네덜란드 총독 [3]윌리엄 3세(오렌지 공 빌럼)이 연합하여 왕위를 교체한 사건이다.
1688년, [3]윌리엄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들어왔으며, 이에 저항할 군사적 지지를 얻지 못한 [1]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큰 전투나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아 "명예로운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혁명의 결과, 1689년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 제정되어 국왕의 권한이 제한되고 의회의 권력이 강화되었으며, 절대왕정이 종식되고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었다. 이는 이후 현대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정치 체제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시민혁명은 봉건제 또는 군주제의 절대권력을 시민이 제한하고 민주적 권리를 확립하기 위해 일으킨 정치·사회적 변혁이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1642년~1649년), 명예 혁명(1688년), 미국 독립혁명(1775년~1783년), 프랑스 혁명(1789년-1799년)이 대표적인 시민혁명이다. 시민 혁명의 결과로 민족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 제임스 2세(James Ⅱ, 1633년 10월 24일~1701년 9월 16일) : 1685년 2월 6일 형이었던 찰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스튜어트 왕조 제4대 국왕 제임스 2세,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 제13대 국왕 제임스 7세로서 재위하였다(재위기간 : 1685년 2월 6일 ~ 1688년 12월 11일)
[2] 메리 2세(Mary II, 1662년 4월 30일~1694년 12월 28일) : 제임스 2세의 딸로서 잉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의 여왕(재위: 1688년 2월 13일~1694년 12월 28일). 개신교 신자
[3] 윌리엄 3세(William III, 1650년 11월 4일~1702년 3월 8일) :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14대 국왕으로 윌리엄 2세. 잉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5대 국왕으로 윌리엄 3세(재위 : 1689년~1702년 3월 8일). 네덜란드 공화국 빌럼 3세(Willem III, 재직 1672년 6월 28일 ~ 1702년 3월 8일)
스페인 국왕 [1]카를로스 2세는 선친 [2]펠리페 4세의 아들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4살 때 왕위를 계승했다. 유럽의 왕가는 근친혼이 성행했다. 근친혼을 통해 명문을 유지하려 했다.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은 근친혼이 너무 가까웠다. 이러한 근친혼의 결과로 [1]카를로스 2세는 신체적 장애를 앓고 있었는데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이어져 내려온 주걱턱이 심해서 튀어난 아랫입술로 입을 다물고 있기 어려웠으며 각종 희귀한 유전질환들을 앓았다. 카를로스 2세는 근친혼의 끝판왕이기도 했다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병으로 위중해지자 후계자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앙주 공작 [3]필리프(펠리페 5세, [5]루이 14세의 손자)와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4]카를 대공(카를 6세, [6]레오폴트 1세 차남)이 선상에 올랐다.
이 두나라가 왕위계승을 주장하는 이유는 카를로스 2세의 누이중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는 프랑스의 [5]루이 14세와 결혼을 했고 마르가리타 테레사(Margaret Theresa)는 신성로마제국의 [6]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1]카를로스 2세는 스페인의 법과 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프랑스의 왕위계승을 인정하고 숨을 거두었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3]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이 되었다. 결국 카를로스 2세를 끝으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끝을 맺었고 [3]펠리페 5세부터 프랑스의 [13]부르봉 왕가가 스페인의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1701년 [3]펠리페 5세가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국가들이 프랑스와 스페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5]루이 14세의 유럽패권 야욕으로 힘의 균형이 깨지게 되는 것을 우려하여 유럽의 주변국들은 신성로마제국의 [4]카를 대공(카를 6세)을 지지하며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항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을 들라싸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벌였던 네덜란드, 스페인과 앙숙인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독립하려는 [8]카탈루냐, 프랑스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던 [7]사보이아 공국이 참전하였다.
전쟁결과 맺어진 [12]위트레흐트 조약에서 [3]펠리페 5세를 스페인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3]펠리페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다.
영국은 지중해의 입구인 지브롤터를 양도받았다. 지브롤터는 아직도 영국의 영토로 남아있다.
신성로마제국은 네덜란드에 있는 스페인의 영토와 [9]나폴리, [10]사르데냐, [11]밀라노 공국의 많은 부분을 획득했다.
카탈루냐 지방은 스페인에서 독립하기 위하여 부르봉 왕가의 [3]펠리페 5세와 끝까지 싸우기로 했다. 1713년 펠리페 5세와 카탈루냐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1년간 저항했지만 결국 바르셀로나는 펠리페 5세에 패배하여 항복했다. [3]펠리페 5세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15]가스티야 왕국에 통합시킴으로서 오늘날의 스페인의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5]루이 14세의 손자가 펠리페 5세로 즉위하여 스페인 [13]부르봉 왕가가 성립되어 현재에 이른다.
[4]카를 대공(카를 6세)은 1711년 그의 형인 [14]요제프 1세가 후사없이 갑자기 사망하자 신성로마제국의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1] 카를로스 2세(Charles II of Spain, 1661년~1700년)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5대 국왕이자 마지막 국왕
[2] 펠리페 4세(Felipe IV, 1605년~1665년)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제4대 국왕
[3] 펠리페 5세(Philip V of Spain, 1683년~1746년) :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초대 국왕. 루이 14세의 부인이자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였던 마리 테레즈 왕비의 손자
[4] 카를 6세(Charles VI, 1865년~1740년) :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조의 국왕. 레오폴트 1세의 차남이자 요제프 1세 동생
[5] 루이 14세(Louis XIV, 1638년~1715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3대 국왕. 베르사유 궁전을 개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6] 레오폴트 1세(Leopold I, 1640년~1705년) :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조의 국왕
[7] 사보이아 공국(Duchy of Savoy) : 사보이아 가문이 통치한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위치했던 공국이다. 프랑스 왕국의 부르봉 왕조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 간의 대립을 교묘히 이용해 영토를 넓혔다. 훗날 사보이아 공작이 사르데냐 국왕을 겸하게 되면서 사보이아 공국은 이탈리아 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8] 카탈루냐(Catalonia) :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에 위치한 스페인의 광역자치주
[9] 나폴리 왕국(Kingdom of Naples) :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나폴리를 거점으로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존재하였던 왕국
[10] 사르데냐 왕국(Kingdom of Sardinia) : 1324년, 혹은 1720년부터 1861년까지 토리노를 수도로 하여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왕국.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이 되는 국가이다
[11] 밀라노 공국(Duchy of Milan) : 1395년부터 1797년까지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도시 밀라노를 거점으로 삼은 도시국가. 신성로마제국의 일부
[12] 위트레흐트 조약(Peace of Utrecht)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수습을 위해 1713년 프랑스 왕국이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과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체결로 루이 14세의 손자가 펠리페 5세로 즉위하면서 스페인에도 부르봉 왕실이 세워졌으나 프랑스의 왕이 스페인의 왕을 겸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13] 부르봉(Bourbon) 왕가 : 프랑스에서 1589년부터 1791년까지 그리고 1814년부터 1830년까지 지속
[14] 요제프 1세(Joseph I, 1678년~1711년) :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조의 국왕
[15] 카스티야 왕국(Kingdom of Castile) : 이베리아 반도 중앙부에 있었던 왕국이다. 레콩키스타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훗날 아라곤 왕국과 통합하여 통일 스페인 왕국의 핵심부가 되었다
* 아라곤 왕국 : 현재 스페인의 아라곤 지방과 카탈루냐, 발렌시아에 걸쳐 존재했던 중세와 근세 시대의 왕국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은 근친혼이 너무 가까웠다. 이러한 근친혼의 결과로 [1]카를로스 2세는 신체적 장애를 앓고 있었는데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이어져 내려온 주걱턱이 심해서 튀어난 아랫입술로 입을 다물고 있기 어려웠으며 각종 희귀한 유전질환들을 앓았다. 카를로스 2세는 근친혼의 끝판왕이기도 했다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병으로 위중해지자 후계자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앙주 공작 [3]필리프(펠리페 5세, [5]루이 14세의 손자)와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4]카를 대공(카를 6세, [6]레오폴트 1세 차남)이 선상에 올랐다.
이 두나라가 왕위계승을 주장하는 이유는 카를로스 2세의 누이중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는 프랑스의 [5]루이 14세와 결혼을 했고 마르가리타 테레사(Margaret Theresa)는 신성로마제국의 [6]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1]카를로스 2세는 스페인의 법과 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프랑스의 왕위계승을 인정하고 숨을 거두었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3]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이 되었다. 결국 카를로스 2세를 끝으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끝을 맺었고 [3]펠리페 5세부터 프랑스의 [13]부르봉 왕가가 스페인의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1701년 [3]펠리페 5세가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국가들이 프랑스와 스페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5]루이 14세의 유럽패권 야욕으로 힘의 균형이 깨지게 되는 것을 우려하여 유럽의 주변국들은 신성로마제국의 [4]카를 대공(카를 6세)을 지지하며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항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을 들라싸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벌였던 네덜란드, 스페인과 앙숙인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독립하려는 [8]카탈루냐, 프랑스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던 [7]사보이아 공국이 참전하였다.
전쟁결과 맺어진 [12]위트레흐트 조약에서 [3]펠리페 5세를 스페인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3]펠리페 5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다.
영국은 지중해의 입구인 지브롤터를 양도받았다. 지브롤터는 아직도 영국의 영토로 남아있다.
신성로마제국은 네덜란드에 있는 스페인의 영토와 [9]나폴리, [10]사르데냐, [11]밀라노 공국의 많은 부분을 획득했다.
카탈루냐 지방은 스페인에서 독립하기 위하여 부르봉 왕가의 [3]펠리페 5세와 끝까지 싸우기로 했다. 1713년 펠리페 5세와 카탈루냐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1년간 저항했지만 결국 바르셀로나는 펠리페 5세에 패배하여 항복했다. [3]펠리페 5세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15]가스티야 왕국에 통합시킴으로서 오늘날의 스페인의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5]루이 14세의 손자가 펠리페 5세로 즉위하여 스페인 [13]부르봉 왕가가 성립되어 현재에 이른다.
[4]카를 대공(카를 6세)은 1711년 그의 형인 [14]요제프 1세가 후사없이 갑자기 사망하자 신성로마제국의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1] 카를로스 2세(Charles II of Spain, 1661년~1700년)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5대 국왕이자 마지막 국왕
[2] 펠리페 4세(Felipe IV, 1605년~1665년)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제4대 국왕
[3] 펠리페 5세(Philip V of Spain, 1683년~1746년) :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초대 국왕. 루이 14세의 부인이자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였던 마리 테레즈 왕비의 손자
[4] 카를 6세(Charles VI, 1865년~1740년) :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조의 국왕. 레오폴트 1세의 차남이자 요제프 1세 동생
[5] 루이 14세(Louis XIV, 1638년~1715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3대 국왕. 베르사유 궁전을 개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6] 레오폴트 1세(Leopold I, 1640년~1705년) :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조의 국왕
[7] 사보이아 공국(Duchy of Savoy) : 사보이아 가문이 통치한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위치했던 공국이다. 프랑스 왕국의 부르봉 왕조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합스부르크 왕조 간의 대립을 교묘히 이용해 영토를 넓혔다. 훗날 사보이아 공작이 사르데냐 국왕을 겸하게 되면서 사보이아 공국은 이탈리아 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8] 카탈루냐(Catalonia) :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에 위치한 스페인의 광역자치주
[9] 나폴리 왕국(Kingdom of Naples) :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나폴리를 거점으로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존재하였던 왕국
[10] 사르데냐 왕국(Kingdom of Sardinia) : 1324년, 혹은 1720년부터 1861년까지 토리노를 수도로 하여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왕국.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이 되는 국가이다
[11] 밀라노 공국(Duchy of Milan) : 1395년부터 1797년까지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도시 밀라노를 거점으로 삼은 도시국가. 신성로마제국의 일부
[12] 위트레흐트 조약(Peace of Utrecht)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수습을 위해 1713년 프랑스 왕국이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과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체결로 루이 14세의 손자가 펠리페 5세로 즉위하면서 스페인에도 부르봉 왕실이 세워졌으나 프랑스의 왕이 스페인의 왕을 겸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13] 부르봉(Bourbon) 왕가 : 프랑스에서 1589년부터 1791년까지 그리고 1814년부터 1830년까지 지속
[14] 요제프 1세(Joseph I, 1678년~1711년) :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조의 국왕
[15] 카스티야 왕국(Kingdom of Castile) : 이베리아 반도 중앙부에 있었던 왕국이다. 레콩키스타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훗날 아라곤 왕국과 통합하여 통일 스페인 왕국의 핵심부가 되었다
* 아라곤 왕국 : 현재 스페인의 아라곤 지방과 카탈루냐, 발렌시아에 걸쳐 존재했던 중세와 근세 시대의 왕국
신축년(辛丑年)과 임인년(壬寅年)에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 혹은 '신임옥사'라 한다. 임인년에 주로 일어났으므로 '임인옥'이라고도 한다.
노론은 경종이 자식이 없고 병이 많아 하루 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주장하여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고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승인되었다. 그러자 소론은 시기상조론을 들어 부당함을 주장하며 노론을 역모라고 공격하여 노론의 권력기반은 무너지고 노론 4대신은 파직되어 사사되었다. 그리고 처형당한 자가 20여 명, 국문을 받다 장형으로 죽은자가 30여 명, 연루자로 교살된 자가 10여 명, 유배된 이가 100여 명을 넘었다.
신임사화는 노론과 소론간에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의 대의명분을 내세워 대결한 사화이다. 결과적으로 당인(黨人)들이 정권을 획득해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당을 축출해 자당(自黨)의 세력 기반을 확보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영조의 탕평책도 그 자신이 신임사화의 참상을 몸소 겪은 데서 비롯되었으나 당쟁은 근절되지 못한 채 점차 노론의 기반이 확고해졌다.
* 경종(1688년~1724년) : 조선 제 20대 임금. 재위 1720년~1724년. 숙종(조선 21대 왕)과 희빈 장씨의 아들
* 연잉군(1694년~1776년) : 훗날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 숙종(조선 19대 왕)과 숙빈 최씨의 차남.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로 왕위 오른왕
* 노론 사대신(老論四大臣) : 신임옥사(辛壬獄事)때 화를 당한 노론 측 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건명·영중추부사 이이명·판중추부사 조태채의 총칭. 노론에서는 ‘사충(四忠)’으로, 소론에서는 ‘사흉(四凶)’으로 불렀다.
* 탕평책 : 조선 영조·정조대에 당쟁을 막기 위해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하려한 정책
노론은 경종이 자식이 없고 병이 많아 하루 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주장하여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고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승인되었다. 그러자 소론은 시기상조론을 들어 부당함을 주장하며 노론을 역모라고 공격하여 노론의 권력기반은 무너지고 노론 4대신은 파직되어 사사되었다. 그리고 처형당한 자가 20여 명, 국문을 받다 장형으로 죽은자가 30여 명, 연루자로 교살된 자가 10여 명, 유배된 이가 100여 명을 넘었다.
신임사화는 노론과 소론간에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의 대의명분을 내세워 대결한 사화이다. 결과적으로 당인(黨人)들이 정권을 획득해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당을 축출해 자당(自黨)의 세력 기반을 확보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영조의 탕평책도 그 자신이 신임사화의 참상을 몸소 겪은 데서 비롯되었으나 당쟁은 근절되지 못한 채 점차 노론의 기반이 확고해졌다.
* 경종(1688년~1724년) : 조선 제 20대 임금. 재위 1720년~1724년. 숙종(조선 21대 왕)과 희빈 장씨의 아들
* 연잉군(1694년~1776년) : 훗날 조선의 제21대 왕인 영조. 숙종(조선 19대 왕)과 숙빈 최씨의 차남.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로 왕위 오른왕
* 노론 사대신(老論四大臣) : 신임옥사(辛壬獄事)때 화를 당한 노론 측 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건명·영중추부사 이이명·판중추부사 조태채의 총칭. 노론에서는 ‘사충(四忠)’으로, 소론에서는 ‘사흉(四凶)’으로 불렀다.
* 탕평책 : 조선 영조·정조대에 당쟁을 막기 위해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하려한 정책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왕세제인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 이후 실각당하였던 노론이 집권하자 소론은 재집권을 위하여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고자 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몇일 안되어 조선 관군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 난은 이인자가 모두 주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인좌가 가장 크게 항쟁하였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 영조(1694년~1776년) : 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4년~1776년
* 신임사화(辛壬士禍): 조선 1721년(경종1년)부터 1722년까지 연잉군(추후 조선 21대 왕 ) 왕세제 책봉문제로 소론이 노론을 역모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
* 밀풍군 이탄 : 소현세자의 증손
이 난은 이인자가 모두 주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인좌가 가장 크게 항쟁하였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 영조(1694년~1776년) : 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4년~1776년
* 신임사화(辛壬士禍): 조선 1721년(경종1년)부터 1722년까지 연잉군(추후 조선 21대 왕 ) 왕세제 책봉문제로 소론이 노론을 역모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
* 밀풍군 이탄 : 소현세자의 증손
중세 유럽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15]아우크스부르크화의, 30년 전쟁, [16]베스트팔렌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위는 추락하였다. [9]프로이센, [10]작센, 바이에른 등과 같은 유력한 [8]선제후국들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여성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에 따라 오스트리아 [1]합스부르크 왕가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3]카를 6세의 장녀인 [2]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의 계승을 둘러싸고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개입되면서 시작되었다.
카를 6세는 유일한 아들이 일찌기 사망하여 딸인 [2]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했다. 살라카법에 따라 [2]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은 불가능했지만, [3]카를 6세는 즉위초인 1713년 여성 왕위 승계 금지 조항을 부정하는 [6]국사조칙을 내놓으며 재임 기간 내내 주변국인 선제후국들을 설득하여 승인받는다.
그러나 카를 6세 말년에 두차례의 전쟁(1737~38년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오스만 전쟁)에서 모두 패배하면서 [6]국사조칙의 의미가 퇴색해 버렸다. 전쟁의 후휴증과 쇠약해진 카를 6세는 1740년 10월 20일 사망하고 [2]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였다.
오스트리아 [1]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 문제는 신성로마제국의 제위 계승과도 관련이 있었다. 황제 자리는 계속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차지하고 있었고, [8]선제후들은 황제선거에서 왕가를 지지하면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1740년 5월 31일 즉위한 [9]프로이센의 젊은 선제후인 [17]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령 [11]슐레지엔 지역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740년 11월 16일 [11]슐레지엔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확대되기 시작했다.
카를 6세의 형인 [4]요제프 1세의 차녀와 결혼한 바이에른 선제후 [5]카를 알브레히트(후 카를 7세)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비텔스바흐 가문이 오스트리아의 상속권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계약서를 내세우며 [6]국사조칙 승인을 번복하고 자신이 정당한 상속자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승계를 요구하며 황제선거에 출마하였다. [4]요제프 1세의 장녀와 결혼한 [10]작센 선제후 [13]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1742년 선회하여 오스트리아를 지원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진격할 준비와 함께 바이에른을 지원했다.
전쟁선포후 바이에른 선제후 [5]카를 알브레히트는 카를 7세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인정받았으나 1742년 대관식후 단 하루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의 권위와 권력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결국 통치할 영토를 잃었다. 초반에는 선전했으나 후반 수세에 몰리면서 지병으로 1745년에 사망한다.
바이에른을 지원한 프랑스는 카를 알브레히트의 죽음으로 얻은 것 없이 재정만 축내고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북아메리카와 인도를 둘러싼 프랑스와 패권 경쟁중인 영국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가 무너질 경우 영국과 [12]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노버 선제후국이 위험해진다는 판단으로 오스트리아를 지원했다.
스페인과 나폴리 왕국의 군대는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며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 세력을 밀어낼 기회를 노렸다.
[14]사르데냐 왕국은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참전하였고, 이의 결과로 밀라노 근처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스웨덴은 프로이센에 동조하여 오랜 숙적이자 오스트리아의 유일한 동맹국이었던 러시아와 전쟁(1741년~1743년)이 시작되어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지원할 수 없도록 견제하였다. 이 전쟁에서 스웨덴은 러시아에 대패하였다.
이 전쟁은 1748년 [17]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됨과 함께 종결되었다.
조약의 주요내용은 마리아 테레지아와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을 양도하는 대가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이 인정되었다. 이는 곧 7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프로이센이 유럽의 강대국으로 급성장하게 되었으며,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는 유럽 주요 국가들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1]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있던 가문 중 하나
[2]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군주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 재위기간(1745년 9월 13일~1765년 8월 18일)
[3] 카를 6세(Karl VI, 1685년~1740년) :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재위기간(1711년 10월 12일 ~ 1740년 10월 20일). 보헤미아의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
[4] 요제프 1세(Joseph I, 1678년~1711년) :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카를 6세의 친형. 재위기간(1705년 5월 5일~1711년 4월 17일). 보헤미아의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
[5] 카를 알브레히트(Karl Albrecht, 1697년~1745년) : 카를 7세. 신성로마제국의 비텔스바흐 가문의 황제. 재위기간(1742년 1월 24일 ~ 1745년 1월 20일). 바이에른 선제후
[6] 국사조칙(Pragmatic sanction) : 카를 6세가 1713년 발표한 칙령으로 당시 여성의 상속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을 부정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여성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7]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 중앙유럽과 서유럽의 여러민족의 영지와 정치적 조직인 선제후국으로 형성되었으며 황제가 중심이 되어 이끌었다. 962년부터 1806년 해체될 때까지 약 800년 이상 존속되었다
[8] 선제후 :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황제선거를 개최하여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황제를 선출할 선거권을 가진 신성로마제국 내의 영주
[9]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신성로마제국 동북족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1701년 왕국을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왕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1701년 1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를 수도 로 삼아 그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제국의 선언을 이끌었으며, 1차대전의 패전과 함께 1918년 11월 9일에 종말을 맞이하였다
[10] 작센 왕국(Kingdom of Saxony) : 아스카니아 가문(Haus Askania)의 작센-비텐베르크 공국(Herzogtum Sachsen-Wittenberg)이 1356년 금인칙서(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군주가 수여한 문서)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로 부터 선제후 작위를 부여받아 성립된 국가. 1422년 아스카이나 가문의 마지막 선제후가 후손없이 사망하자, 베틴 가문의 프리드리히 4세가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되었다. 1806년 제국이 해체된 후, 프리드리히 3세는 작센 선제후국을 작센왕국으로 승격시켰다. 작센왕국은 180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중부에 있던 왕국이다
[11] 슐레지엔(Silesia) : 중세 유럽 최대 공업지대.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독일 제국 시기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폴란드의 남서부, 독일 작센 주의 일부, 체코 북동부 일부에 걸친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에 속해 있다
[12]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 : 군주 혹은 그 배우자가 되어, 결혼 관계를 매개로 둘 이상의 국가들을 하나로 병합하지 않고 연합하여 주권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통치하는 것
[13]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Friedrich August II, 1696년~1763년) : 작센 선제후. 재위(1733년 2월 1일 ~ 1763년 10월 5일)
[14] 사르데냐 왕국(Kingdom of Sardinia) :1720년부터 1861년까지 수도 토리노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이탈리아 왕국.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이 되는 국가이다
[15] 아우크스부르크 화의(The Peace of Augsburg, Augsburg Settlement) : 1555년 9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맺어진 카를 5세와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제후들과 체결된 종교협약. 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간의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한 것
[16]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 : 1648년 로마 가톨릭세력과 개신교세력간의 30년 전쟁을 끝마치기 위해 1648년에 체결된 평화 조약
[17]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 등으로 불리게 된다
[17] 엑스라샤펠 조약(Treaty of Aix-la-Chapelle) : 1748년 10월 18일 신성 로마 제국의 아헨에서 체결된 조약으로 아헨 조약(Treaty of Aachen)이라고도 한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 사르데냐 왕국,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군주국)가 서명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여성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에 따라 오스트리아 [1]합스부르크 왕가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3]카를 6세의 장녀인 [2]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의 계승을 둘러싸고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개입되면서 시작되었다.
카를 6세는 유일한 아들이 일찌기 사망하여 딸인 [2]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하기를 원했다. 살라카법에 따라 [2]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은 불가능했지만, [3]카를 6세는 즉위초인 1713년 여성 왕위 승계 금지 조항을 부정하는 [6]국사조칙을 내놓으며 재임 기간 내내 주변국인 선제후국들을 설득하여 승인받는다.
그러나 카를 6세 말년에 두차례의 전쟁(1737~38년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오스만 전쟁)에서 모두 패배하면서 [6]국사조칙의 의미가 퇴색해 버렸다. 전쟁의 후휴증과 쇠약해진 카를 6세는 1740년 10월 20일 사망하고 [2]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였다.
오스트리아 [1]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 문제는 신성로마제국의 제위 계승과도 관련이 있었다. 황제 자리는 계속 합스부르크 왕가가 독차지하고 있었고, [8]선제후들은 황제선거에서 왕가를 지지하면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1740년 5월 31일 즉위한 [9]프로이센의 젊은 선제후인 [17]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령 [11]슐레지엔 지역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740년 11월 16일 [11]슐레지엔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확대되기 시작했다.
카를 6세의 형인 [4]요제프 1세의 차녀와 결혼한 바이에른 선제후 [5]카를 알브레히트(후 카를 7세)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비텔스바흐 가문이 오스트리아의 상속권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계약서를 내세우며 [6]국사조칙 승인을 번복하고 자신이 정당한 상속자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승계를 요구하며 황제선거에 출마하였다. [4]요제프 1세의 장녀와 결혼한 [10]작센 선제후 [13]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지만 1742년 선회하여 오스트리아를 지원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진격할 준비와 함께 바이에른을 지원했다.
전쟁선포후 바이에른 선제후 [5]카를 알브레히트는 카를 7세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인정받았으나 1742년 대관식후 단 하루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의 권위와 권력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결국 통치할 영토를 잃었다. 초반에는 선전했으나 후반 수세에 몰리면서 지병으로 1745년에 사망한다.
바이에른을 지원한 프랑스는 카를 알브레히트의 죽음으로 얻은 것 없이 재정만 축내고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북아메리카와 인도를 둘러싼 프랑스와 패권 경쟁중인 영국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가 무너질 경우 영국과 [12]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노버 선제후국이 위험해진다는 판단으로 오스트리아를 지원했다.
스페인과 나폴리 왕국의 군대는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하며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 세력을 밀어낼 기회를 노렸다.
[14]사르데냐 왕국은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참전하였고, 이의 결과로 밀라노 근처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스웨덴은 프로이센에 동조하여 오랜 숙적이자 오스트리아의 유일한 동맹국이었던 러시아와 전쟁(1741년~1743년)이 시작되어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지원할 수 없도록 견제하였다. 이 전쟁에서 스웨덴은 러시아에 대패하였다.
이 전쟁은 1748년 [17]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됨과 함께 종결되었다.
조약의 주요내용은 마리아 테레지아와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을 양도하는 대가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이 인정되었다. 이는 곧 7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프로이센이 유럽의 강대국으로 급성장하게 되었으며,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는 유럽 주요 국가들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1]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있던 가문 중 하나
[2]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군주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 재위기간(1745년 9월 13일~1765년 8월 18일)
[3] 카를 6세(Karl VI, 1685년~1740년) :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재위기간(1711년 10월 12일 ~ 1740년 10월 20일). 보헤미아의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
[4] 요제프 1세(Joseph I, 1678년~1711년) :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카를 6세의 친형. 재위기간(1705년 5월 5일~1711년 4월 17일). 보헤미아의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
[5] 카를 알브레히트(Karl Albrecht, 1697년~1745년) : 카를 7세. 신성로마제국의 비텔스바흐 가문의 황제. 재위기간(1742년 1월 24일 ~ 1745년 1월 20일). 바이에른 선제후
[6] 국사조칙(Pragmatic sanction) : 카를 6세가 1713년 발표한 칙령으로 당시 여성의 상속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을 부정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여성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7]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 : 중앙유럽과 서유럽의 여러민족의 영지와 정치적 조직인 선제후국으로 형성되었으며 황제가 중심이 되어 이끌었다. 962년부터 1806년 해체될 때까지 약 800년 이상 존속되었다
[8] 선제후 :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황제선거를 개최하여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황제를 선출할 선거권을 가진 신성로마제국 내의 영주
[9]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신성로마제국 동북족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1701년 왕국을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왕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1701년 1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를 수도 로 삼아 그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제국의 선언을 이끌었으며, 1차대전의 패전과 함께 1918년 11월 9일에 종말을 맞이하였다
[10] 작센 왕국(Kingdom of Saxony) : 아스카니아 가문(Haus Askania)의 작센-비텐베르크 공국(Herzogtum Sachsen-Wittenberg)이 1356년 금인칙서(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군주가 수여한 문서)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로 부터 선제후 작위를 부여받아 성립된 국가. 1422년 아스카이나 가문의 마지막 선제후가 후손없이 사망하자, 베틴 가문의 프리드리히 4세가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되었다. 1806년 제국이 해체된 후, 프리드리히 3세는 작센 선제후국을 작센왕국으로 승격시켰다. 작센왕국은 180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중부에 있던 왕국이다
[11] 슐레지엔(Silesia) : 중세 유럽 최대 공업지대.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독일 제국 시기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폴란드의 남서부, 독일 작센 주의 일부, 체코 북동부 일부에 걸친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에 속해 있다
[12]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 : 군주 혹은 그 배우자가 되어, 결혼 관계를 매개로 둘 이상의 국가들을 하나로 병합하지 않고 연합하여 주권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통치하는 것
[13]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Friedrich August II, 1696년~1763년) : 작센 선제후. 재위(1733년 2월 1일 ~ 1763년 10월 5일)
[14] 사르데냐 왕국(Kingdom of Sardinia) :1720년부터 1861년까지 수도 토리노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이탈리아 왕국.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이 되는 국가이다
[15] 아우크스부르크 화의(The Peace of Augsburg, Augsburg Settlement) : 1555년 9월 25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맺어진 카를 5세와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제후들과 체결된 종교협약. 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간의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한 것
[16]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 : 1648년 로마 가톨릭세력과 개신교세력간의 30년 전쟁을 끝마치기 위해 1648년에 체결된 평화 조약
[17]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 등으로 불리게 된다
[17] 엑스라샤펠 조약(Treaty of Aix-la-Chapelle) : 1748년 10월 18일 신성 로마 제국의 아헨에서 체결된 조약으로 아헨 조약(Treaty of Aachen)이라고도 한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 사르데냐 왕국,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군주국)가 서명했다
유럽에서 7년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 전쟁이며 인디언들이 프랑스 편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 불린다. 식민지 쟁탈전에서 프랑스는 인디언과 타협정책을 썼고 영국은 탐욕스럽게 땅을 점령해 나갔으므로 대부분의 인디언들은 프랑스 편에 있었다. 스페인은 뒤늦게 프랑스편을 들어 전쟁에 참여를 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북미 식민지 전쟁의 참전국 중에서 사실상 북아메리카 신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스페인은 쿠바를 재획득하기 위해 플로리다를 영국과 교환했으며 플로리다를 상실한 대가로 프랑스로부터 뉴올리언스를 포함한 루이지애나를 얻었다.
프랑스는 캐나다를 할양했고, 따라서 프랑스의 식민지는 생피에르 미클롱(Saint Pierre and Miquelon, 캐나다의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섬 남쪽의 여러 섬)만 남게 되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 동쪽 절반을 식민지 세력의 지배를 하였으나, 전쟁에 투입한 재정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영국은 부족한 재정을 메꾸기 위하여 식민지인들에게 이주제한과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지나친 영국의 간섭으로 식민지 거주자들은 점점 영국에 반감을 갖게 되어 미국 독립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북미 식민지 전쟁의 참전국 중에서 사실상 북아메리카 신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스페인은 쿠바를 재획득하기 위해 플로리다를 영국과 교환했으며 플로리다를 상실한 대가로 프랑스로부터 뉴올리언스를 포함한 루이지애나를 얻었다.
프랑스는 캐나다를 할양했고, 따라서 프랑스의 식민지는 생피에르 미클롱(Saint Pierre and Miquelon, 캐나다의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섬 남쪽의 여러 섬)만 남게 되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 동쪽 절반을 식민지 세력의 지배를 하였으나, 전쟁에 투입한 재정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영국은 부족한 재정을 메꾸기 위하여 식민지인들에게 이주제한과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지나친 영국의 간섭으로 식민지 거주자들은 점점 영국에 반감을 갖게 되어 미국 독립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오스트리아 [1]합스부르크가는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2]슐레지엔 지역을 되찾기 위해 [4]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으로 유럽의 거의 모든 열강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참여하면서 유럽뿐 아니라 식민지 지역인 북아메리카와 인도까지 확장된 세계대전 규모의 전쟁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전쟁을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도 한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팽창에 대항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확보하여 패권의 교두보를 삼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프로이센과 동맹관계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년~1748년)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는 [3]선제후국인 프로이센에게 패하면서 [2]슐레지엔 지역을 넘겨주었다.
오스트리아의 [5]마리아 테레지아는 빼앗긴 [2]슐레지엔 지역을 되찾기 위해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공격하기로 한다. [5]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전쟁이 벌어지면 프랑스가 참전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영국은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면 [8]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노버 [3]선제후국의 지원이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영국은 러시아 군대를 이용하여 [4]프로이센을 견제하는 동시에 하노버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러시아는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북부의 발트해 연안으로 진출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프로이센을 넘어서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하여 하노이 [3]선제후국를 지킨다는 조건하에 영국과 동맹을 맺는다.
영국과 프로이센이 동맹을 맺자 [5]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에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프랑스를 끌어안게 된다.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스웨덴에 연합을 결성한다. 프랑스의 부르봉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는 단순 적대관계를 넘어선 철천지 원수관계가 동맹을 맺은 것이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지가 된 셈이다.
스페인은 부르봉 왕조가 성립되면서 프랑스와 같은 왕조로 [8]동군연합으로 사실상 영구적인 동맹을 이루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영국동맹' 대 '프로이센-프랑스동맹' 구도가 '오스트리아-프랑스' 대 '프로이센-영국'로 바뀐것이다.
1756년 6월 2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자 위기감을 느낀 프로이센의 [6]프리드리히 2세는 예방차원으로 [10]작센 [3]선제후국을 침공하면서 7년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의 작센 기습침공으로 러시아의 여제 [7]옐리자베타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스웨덴도 프로이센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프로이센을 공격하면서 참전하였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1962년 [7]옐리자베타 여제가 갑자기 사망하여 뒤를 이어 [9]표드로 3세가 즉위하였다.
[3]표드로 3세는 상호 조건없는 화친을 프로이센에 제안하여 프로이센의 [6]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탈한다. 스웨덴까지 이 전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한 재원손실로 국고가 고갈되어 가는 상태였으며, 프랑스는 유럽밖의 식민지전쟁에서 패배한 상태였다. 동맹국 러시아까지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7년 전쟁은 종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러시아는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의 소방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프로이센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2]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보했으며, 식민지 전쟁에서는 영국이 승리를 거두어 북아메리카의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던 현재의 퀘벡주와 온타리오주를 차지하였다. 인도에서도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어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7년 전쟁은 참전한 모든 국가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남겼으며 유럽은 전쟁 이전과 거의 바뀐 것이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명목상으로는 패전국이 됐지만 내부 결속, 군제 개혁등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프로이센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국토가 초토화되는등 막대한 전쟁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전 유럽의 열강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군사적 강대함을 알렸다
러시아는 유럽의 국제정치에 참여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영국은 인도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들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지나친 전비부담은 영국의 재정을 악화시켰다.
프랑스도 국가재정이 악화된 건 물론이고, 캐나다와 미시시피 강 동쪽 전체를 영국에게 빼앗기고 인도 역시 영국에게 넘겨주어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도 넘겨받지 못했다.
스페인은 북아메리카의 플로리다를 영국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얻으며 중남미 일대에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1]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있던 가문 중 하나
[2] 슐레지엔(Silesia) : 중세 유럽 최대 공업지대.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독일 제국 시기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폴란드의 남서부, 독일 작센 주의 일부, 체코 북동부 일부에 걸친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에 속해 있다
[3] 선제후 :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황제선거를 개최하여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황제를 선출할 선거권을 가진 신성로마제국 내의 영주
[4]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신성로마제국 동북족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1701년 왕국을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왕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1701년 1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를 수도 로 삼아 그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제국의 선언을 이끌었으며, 1차대전의 패전과 함께 1918년 11월 9일에 종말을 맞이하였다
[5]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군주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 재위기간(1745년 9월 13일~1765년 8월 18일)
[6]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 등으로 불리게 된다
[7]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1709년~1762년) : 제6대 러시아 제국 여황제. 재위(1741년 12월 6일-1762년 1월 5일)
[8]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 : 군주 혹은 그 배우자가 되어, 결혼 관계를 매개로 둘 이상의 국가들을 하나로 병합하지 않고 연합하여 주권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통치하는 것
[9] 표트르 3세(Peter III of Russia, 1728년 2월 21일 - 1762년 7월 17일) : 제7대 러시아 황제. 재위(1762년 1월 5일-1762년 7월 9일). 로마노프 왕조의 7번째 군주
[10] 작센 왕국(Kingdom of Saxony) : 아스카니아 가문(Haus Askania)의 작센-비텐베르크 공국(Herzogtum Sachsen-Wittenberg)이 1356년 금인칙서(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군주가 수여한 문서)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로 부터 선제후 작위를 부여받아 성립된 국가. 1422년 아스카이나 가문의 마지막 선제후가 후손없이 사망하자, 베틴 가문의 프리드리히 4세가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되었다. 1806년 제국이 해체된 후, 프리드리히 3세는 작센 선제후국을 작센왕국으로 승격시켰다. 작센왕국은 180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중부에 있던 왕국이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팽창에 대항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확보하여 패권의 교두보를 삼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프로이센과 동맹관계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년~1748년)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는 [3]선제후국인 프로이센에게 패하면서 [2]슐레지엔 지역을 넘겨주었다.
오스트리아의 [5]마리아 테레지아는 빼앗긴 [2]슐레지엔 지역을 되찾기 위해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공격하기로 한다. [5]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전쟁이 벌어지면 프랑스가 참전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영국은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면 [8]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노버 [3]선제후국의 지원이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영국은 러시아 군대를 이용하여 [4]프로이센을 견제하는 동시에 하노버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러시아는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북부의 발트해 연안으로 진출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프로이센을 넘어서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하여 하노이 [3]선제후국를 지킨다는 조건하에 영국과 동맹을 맺는다.
영국과 프로이센이 동맹을 맺자 [5]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에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프랑스를 끌어안게 된다.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스웨덴에 연합을 결성한다. 프랑스의 부르봉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는 단순 적대관계를 넘어선 철천지 원수관계가 동맹을 맺은 것이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지가 된 셈이다.
스페인은 부르봉 왕조가 성립되면서 프랑스와 같은 왕조로 [8]동군연합으로 사실상 영구적인 동맹을 이루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영국동맹' 대 '프로이센-프랑스동맹' 구도가 '오스트리아-프랑스' 대 '프로이센-영국'로 바뀐것이다.
1756년 6월 2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자 위기감을 느낀 프로이센의 [6]프리드리히 2세는 예방차원으로 [10]작센 [3]선제후국을 침공하면서 7년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의 작센 기습침공으로 러시아의 여제 [7]옐리자베타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스웨덴도 프로이센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프로이센을 공격하면서 참전하였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1962년 [7]옐리자베타 여제가 갑자기 사망하여 뒤를 이어 [9]표드로 3세가 즉위하였다.
[3]표드로 3세는 상호 조건없는 화친을 프로이센에 제안하여 프로이센의 [6]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탈한다. 스웨덴까지 이 전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한 재원손실로 국고가 고갈되어 가는 상태였으며, 프랑스는 유럽밖의 식민지전쟁에서 패배한 상태였다. 동맹국 러시아까지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7년 전쟁은 종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러시아는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의 소방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프로이센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2]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보했으며, 식민지 전쟁에서는 영국이 승리를 거두어 북아메리카의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던 현재의 퀘벡주와 온타리오주를 차지하였다. 인도에서도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어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7년 전쟁은 참전한 모든 국가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남겼으며 유럽은 전쟁 이전과 거의 바뀐 것이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명목상으로는 패전국이 됐지만 내부 결속, 군제 개혁등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프로이센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국토가 초토화되는등 막대한 전쟁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전 유럽의 열강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군사적 강대함을 알렸다
러시아는 유럽의 국제정치에 참여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영국은 인도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들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지나친 전비부담은 영국의 재정을 악화시켰다.
프랑스도 국가재정이 악화된 건 물론이고, 캐나다와 미시시피 강 동쪽 전체를 영국에게 빼앗기고 인도 역시 영국에게 넘겨주어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도 넘겨받지 못했다.
스페인은 북아메리카의 플로리다를 영국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얻으며 중남미 일대에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1]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있던 가문 중 하나
[2] 슐레지엔(Silesia) : 중세 유럽 최대 공업지대.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독일 제국 시기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폴란드의 남서부, 독일 작센 주의 일부, 체코 북동부 일부에 걸친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에 속해 있다
[3] 선제후 :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황제선거를 개최하여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황제를 선출할 선거권을 가진 신성로마제국 내의 영주
[4]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신성로마제국 동북족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1701년 왕국을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왕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1701년 1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를 수도 로 삼아 그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제국의 선언을 이끌었으며, 1차대전의 패전과 함께 1918년 11월 9일에 종말을 맞이하였다
[5]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군주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 재위기간(1745년 9월 13일~1765년 8월 18일)
[6]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 등으로 불리게 된다
[7]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1709년~1762년) : 제6대 러시아 제국 여황제. 재위(1741년 12월 6일-1762년 1월 5일)
[8]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 : 군주 혹은 그 배우자가 되어, 결혼 관계를 매개로 둘 이상의 국가들을 하나로 병합하지 않고 연합하여 주권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통치하는 것
[9] 표트르 3세(Peter III of Russia, 1728년 2월 21일 - 1762년 7월 17일) : 제7대 러시아 황제. 재위(1762년 1월 5일-1762년 7월 9일). 로마노프 왕조의 7번째 군주
[10] 작센 왕국(Kingdom of Saxony) : 아스카니아 가문(Haus Askania)의 작센-비텐베르크 공국(Herzogtum Sachsen-Wittenberg)이 1356년 금인칙서(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군주가 수여한 문서)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로 부터 선제후 작위를 부여받아 성립된 국가. 1422년 아스카이나 가문의 마지막 선제후가 후손없이 사망하자, 베틴 가문의 프리드리히 4세가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되었다. 1806년 제국이 해체된 후, 프리드리히 3세는 작센 선제후국을 작센왕국으로 승격시켰다. 작센왕국은 180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중부에 있던 왕국이다
[1]7년 전쟁으로 영국-프랑스 전쟁은 인도에서도 연장되었다. 이 시기인 1757년 6월 23일 인도 [2]벵골 지역의 패권을 두고 영국 동인도 회사와 프랑스 동인도회사-벵골 토후국 연합군과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은 벵골 지역에서 주도권을 확실시하게 되었고, 이후 100년간 인도 전체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17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인도의 무굴제국의 중앙지배력이 약화되고 각지역 제후들이 사실상 독립적 정치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지방의 권력자들은 영국, 프랑스등 서양 세력과 연합해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이 틈을 타서 영국과 프랑스도 상호 이익을 위한 싸움에 제후국들을 활용했다.
벵골지역의 태수인 [3]시라즈 우드다울라는 영국 동인도회사에 요새 확장 작업을 중지하고 수비대를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회사는 이를 무시하고 오새를 계속 확장했다. 1756년 6월 16일 [3]시라즈 우드다울라는 군대를 동원해 [5]갤커타로 진격하여 공격하였다. 6월 20일 [5]캘거타의 윌리엄 요새 수비군 146명은 백기를 들었다.
포로가 된 영국인 146명은 지하감옥에 수용되어 하루만에 질식사하고 23명이 살아남았다.
이에 격분한 영국의 [4]로버트 클라이브는 10월 16일 구원군을 이끌고 [5]캘커타로 출발하였다. 1575년 1월 2일 캘커타를 탈환하고 벵골군의 요새들을 격파하였다.
수세에 몰린 [3]시라즈 우드다울라는 영국인들의 재산을 반환하고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2월 9일에 평화협정을 맺는다. 표면적으로 영국과 벵골 사이에 평화가 찾아온듯 했다.
[4]로버트 클라이브는 여세를 몰아 캘거타 북쪽의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거점인 찬데르나고르를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프랑스는 벵골 태수인 [3]시라지 웃 다울라와 동맹을 맺고 개전을 결심한다.
전투는 캘커타에서 북쪽으로 150km 떨어져 있고 벵골 수비국의 수도였던 [6]무르시다바드 남쪽에 위치한 [7]후글리 강변에 위치한 플라시에서 벌어졌다.
1757년 6월 23일 벵골군 5만명과 영국군 3천명이 대치하였다. 영국군은 2천명이 [10]세포이였다.
영국은 사전에 시라지 웃 다울라 군대의 사령관인 [8]미르 자파르를 매수하여 벵골의 태수 자리를 약속했다. 전투 개시와 함께 벵골군은 [8]미르 자파르의 배신으로 대혼란에 빠지면서 패배하였다. 결국 영국 동인도 회사는 캘커타를 점령했다.
플라시 전투 후 [3]시라지는 도주했으나 얼마 뒤 미르 자파르의 부하들에게 체포된 직후 처형되었다. [8]미르 자파르는 약속대로 벵골의 새 태수로 임명되었지만 영국인들의 간섭에 시달리다가 175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연합하여 영국을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하고 강제로 물러났다. 이리하여 영국은 벵골에서의 패권을 확고히 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삼아 인도 식민화 작업에 착수한다.
1758년 10월 29일 쿠달로르 해전에서 프랑스는 참패하여 재해권마저 영국이 완전 장악하게 되었고 [9]퐁디셰리등 프랑스의 주요 인도거점들이 고립된다.
결국 1761년 마지막 거점인 [9]퐁디셰리가 함락되면서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1] 7년 전쟁 : 1756년에서 1763년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일어난 전쟁
[2] 벵골(Bengal) : 방글라데시(동벵골)와 인도의 서벵골 주로 나뉘어 있는 지역을 말하며 서벵골은 힌두교, 동벵골은 이슬람을 많이 믿는다
[3] 시라지 웃 다울라(Siraj ud-Daulah) : 뱅골태수
[4]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1725~1774) : 인도의 식민화시키는 기초를 마련한 영국의 군인, 정치가, 귀족
[5] 캘커타(Kolkata) : 인도의 서벵골 주의 주도
[6] 무르시다바드(Murshidabad) : 인도 서벵골 주에 있는 구
[7] 후글리강(Hooghly River) : 갠지스강 지류. 갤커다는 후글리강에 접해 있다
[8] 미르 자파르(Mir Jafar, 1691~1765) : 시라즈 우드 다올라 휘하의 벵골군 사령관. 시라즈를 배신하고 영국의 승리이후 시라즈의 뒤를 이어 태수가 되었다
[9] 퐁디셰리(Puducherry) : 인도 동남부의 항구 도시
[10] 세포이(sepoy) : 영국 동인도 회사에 채용된 인도 현지 용병을 부르는 명칭
17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인도의 무굴제국의 중앙지배력이 약화되고 각지역 제후들이 사실상 독립적 정치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지방의 권력자들은 영국, 프랑스등 서양 세력과 연합해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이 틈을 타서 영국과 프랑스도 상호 이익을 위한 싸움에 제후국들을 활용했다.
벵골지역의 태수인 [3]시라즈 우드다울라는 영국 동인도회사에 요새 확장 작업을 중지하고 수비대를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회사는 이를 무시하고 오새를 계속 확장했다. 1756년 6월 16일 [3]시라즈 우드다울라는 군대를 동원해 [5]갤커타로 진격하여 공격하였다. 6월 20일 [5]캘거타의 윌리엄 요새 수비군 146명은 백기를 들었다.
포로가 된 영국인 146명은 지하감옥에 수용되어 하루만에 질식사하고 23명이 살아남았다.
이에 격분한 영국의 [4]로버트 클라이브는 10월 16일 구원군을 이끌고 [5]캘커타로 출발하였다. 1575년 1월 2일 캘커타를 탈환하고 벵골군의 요새들을 격파하였다.
수세에 몰린 [3]시라즈 우드다울라는 영국인들의 재산을 반환하고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2월 9일에 평화협정을 맺는다. 표면적으로 영국과 벵골 사이에 평화가 찾아온듯 했다.
[4]로버트 클라이브는 여세를 몰아 캘거타 북쪽의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거점인 찬데르나고르를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프랑스는 벵골 태수인 [3]시라지 웃 다울라와 동맹을 맺고 개전을 결심한다.
전투는 캘커타에서 북쪽으로 150km 떨어져 있고 벵골 수비국의 수도였던 [6]무르시다바드 남쪽에 위치한 [7]후글리 강변에 위치한 플라시에서 벌어졌다.
1757년 6월 23일 벵골군 5만명과 영국군 3천명이 대치하였다. 영국군은 2천명이 [10]세포이였다.
영국은 사전에 시라지 웃 다울라 군대의 사령관인 [8]미르 자파르를 매수하여 벵골의 태수 자리를 약속했다. 전투 개시와 함께 벵골군은 [8]미르 자파르의 배신으로 대혼란에 빠지면서 패배하였다. 결국 영국 동인도 회사는 캘커타를 점령했다.
플라시 전투 후 [3]시라지는 도주했으나 얼마 뒤 미르 자파르의 부하들에게 체포된 직후 처형되었다. [8]미르 자파르는 약속대로 벵골의 새 태수로 임명되었지만 영국인들의 간섭에 시달리다가 175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연합하여 영국을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하고 강제로 물러났다. 이리하여 영국은 벵골에서의 패권을 확고히 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삼아 인도 식민화 작업에 착수한다.
1758년 10월 29일 쿠달로르 해전에서 프랑스는 참패하여 재해권마저 영국이 완전 장악하게 되었고 [9]퐁디셰리등 프랑스의 주요 인도거점들이 고립된다.
결국 1761년 마지막 거점인 [9]퐁디셰리가 함락되면서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1] 7년 전쟁 : 1756년에서 1763년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일어난 전쟁
[2] 벵골(Bengal) : 방글라데시(동벵골)와 인도의 서벵골 주로 나뉘어 있는 지역을 말하며 서벵골은 힌두교, 동벵골은 이슬람을 많이 믿는다
[3] 시라지 웃 다울라(Siraj ud-Daulah) : 뱅골태수
[4]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1725~1774) : 인도의 식민화시키는 기초를 마련한 영국의 군인, 정치가, 귀족
[5] 캘커타(Kolkata) : 인도의 서벵골 주의 주도
[6] 무르시다바드(Murshidabad) : 인도 서벵골 주에 있는 구
[7] 후글리강(Hooghly River) : 갠지스강 지류. 갤커다는 후글리강에 접해 있다
[8] 미르 자파르(Mir Jafar, 1691~1765) : 시라즈 우드 다올라 휘하의 벵골군 사령관. 시라즈를 배신하고 영국의 승리이후 시라즈의 뒤를 이어 태수가 되었다
[9] 퐁디셰리(Puducherry) : 인도 동남부의 항구 도시
[10] 세포이(sepoy) : 영국 동인도 회사에 채용된 인도 현지 용병을 부르는 명칭
로스바흐 전투는 1757년 11월 5일, 7년 전쟁(1756~1763) 중에 벌어진 중요한 전투로, 프로이센 왕국과 프랑스-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이 격돌한 전투이다.
전투는 독일의 로스바흐 마을 인근에서 벌어졌으며, 프로이센의 [1]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군대가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사례로 유명하다.
당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은 약 4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프로이센군은 약 2만 2천 명으로 크게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1]프리드리히 2세는 뛰어난 전략적 기동과 기습 전술을 통해 연합군의 허점을 노렸다.
전투의 서막은 연합군이 프로이센군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해 측면을 우회하려는 시도로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프로이센군이 정면 충돌을 피하고 퇴각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1]프리드리히 2세는 연합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기병과 포병을 빠르게 재배치하여 적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는 기습 전술을 구사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프랑스-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퇴각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짧은 시간 안에 전열이 붕괴되었다. 프로이센군은 단 90분 만에 전투를 끝내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는 약 500명에 불과했지만, 연합군은 약 10,000명의 병력을 잃고 대패했다. 또한 수많은 병사가 포로로 잡혔으며, 무기와 보급품이 대거 프로이센군의 손에 넘어갔다.
전투의 결과로 프로이센은 유럽에서 군사적 위상을 크게 높였으며, 프리드리히 2세는 천재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얻었다. 반면,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사기와 명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로스바흐 전투는 현대적 군사 전략과 기동전의 효율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이후 유럽 각국의 군사 전략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등으로 불리게 된다
전투는 독일의 로스바흐 마을 인근에서 벌어졌으며, 프로이센의 [1]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군대가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사례로 유명하다.
당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은 약 4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프로이센군은 약 2만 2천 명으로 크게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1]프리드리히 2세는 뛰어난 전략적 기동과 기습 전술을 통해 연합군의 허점을 노렸다.
전투의 서막은 연합군이 프로이센군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해 측면을 우회하려는 시도로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프로이센군이 정면 충돌을 피하고 퇴각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1]프리드리히 2세는 연합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기병과 포병을 빠르게 재배치하여 적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는 기습 전술을 구사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프랑스-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퇴각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짧은 시간 안에 전열이 붕괴되었다. 프로이센군은 단 90분 만에 전투를 끝내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는 약 500명에 불과했지만, 연합군은 약 10,000명의 병력을 잃고 대패했다. 또한 수많은 병사가 포로로 잡혔으며, 무기와 보급품이 대거 프로이센군의 손에 넘어갔다.
전투의 결과로 프로이센은 유럽에서 군사적 위상을 크게 높였으며, 프리드리히 2세는 천재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얻었다. 반면,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사기와 명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로스바흐 전투는 현대적 군사 전략과 기동전의 효율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이후 유럽 각국의 군사 전략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등으로 불리게 된다
[5]로이텐 전투는 7년 전쟁(1756~1763년)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벌어진 중요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1]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뛰어난 전술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4]슐레지엔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7년 전쟁이 한창이던 1757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러시아 등과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압박하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1]프리드리히 2세는 [2]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을 격파했지만, 동쪽에서 오스트리아군이 [4]슐레지엔 지역을 장악하고 중심지인 [6]브레슬라우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신속하게 군을 슐레지엔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오스트리아군은 [3]샤를 드 로렌이 지휘했으며, 병력은 약 66,000명에 달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약 36,000명으로 절반에 가까운 병력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뛰어난 전술을 활용하여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의 정면 공격을 예상하도록 유도한 뒤, 신속한 기동력을 통해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기습했다.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의 한쪽 측면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과 기병 돌격이 이어지면서 오스트리아군은 대열이 무너졌고 결국 패주했다.
프로이센군은 약 6,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22,000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히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슐레지엔 지역은 다시 프로이센이 지배하게 되었다.
로이텐 전투로 프리드리히 2세는 유럽 역사에서 최고의 전략가로 자리매김하게 했으며 프로이센의 군사적 위상을 크게 강화했다.
[1]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등으로 불리게 된다
[2] 로스바흐 전투(Battle of Rossbach) : 1757년 11월 5일, 7년 전쟁(1756~1763) 중에 벌어진 중요한 전투로, 프로이센 왕국과 프랑스-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이 격돌한 전투
[3] 샤를 드 로렌(Charles Alexander of Lorraine, 1712년 12월 12일 ~ 1780년 7월 4일) : 로렌공국 출신의 오스트리아 장군이자 군인이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
[4] 슐레지엔(Silesia) : 중세 유럽 최대 공업지대.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독일 제국 시기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폴란드의 남서부, 독일 작센 주의 일부, 체코 북동부 일부에 걸친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에 속해 있다
[5] 로이텐(Leuthen) : 현재 폴란드 슐레지엔 지방에 위치한 마을
[6] 브레슬라우(독일어 Breslau) : 폴란드 남서부에 있는 도시. 역사적으로 슐레지엔 지방의 중심 도시. 프로츠와프(폴란드어: Wrocław)
7년 전쟁이 한창이던 1757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러시아 등과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압박하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1]프리드리히 2세는 [2]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을 격파했지만, 동쪽에서 오스트리아군이 [4]슐레지엔 지역을 장악하고 중심지인 [6]브레슬라우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신속하게 군을 슐레지엔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오스트리아군은 [3]샤를 드 로렌이 지휘했으며, 병력은 약 66,000명에 달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약 36,000명으로 절반에 가까운 병력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뛰어난 전술을 활용하여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의 정면 공격을 예상하도록 유도한 뒤, 신속한 기동력을 통해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기습했다.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의 한쪽 측면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과 기병 돌격이 이어지면서 오스트리아군은 대열이 무너졌고 결국 패주했다.
프로이센군은 약 6,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22,000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히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슐레지엔 지역은 다시 프로이센이 지배하게 되었다.
로이텐 전투로 프리드리히 2세는 유럽 역사에서 최고의 전략가로 자리매김하게 했으며 프로이센의 군사적 위상을 크게 강화했다.
[1]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등으로 불리게 된다
[2] 로스바흐 전투(Battle of Rossbach) : 1757년 11월 5일, 7년 전쟁(1756~1763) 중에 벌어진 중요한 전투로, 프로이센 왕국과 프랑스-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이 격돌한 전투
[3] 샤를 드 로렌(Charles Alexander of Lorraine, 1712년 12월 12일 ~ 1780년 7월 4일) : 로렌공국 출신의 오스트리아 장군이자 군인이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
[4] 슐레지엔(Silesia) : 중세 유럽 최대 공업지대.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독일 제국 시기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폴란드의 남서부, 독일 작센 주의 일부, 체코 북동부 일부에 걸친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에 속해 있다
[5] 로이텐(Leuthen) : 현재 폴란드 슐레지엔 지방에 위치한 마을
[6] 브레슬라우(독일어 Breslau) : 폴란드 남서부에 있는 도시. 역사적으로 슐레지엔 지방의 중심 도시. 프로츠와프(폴란드어: Wrocław)
1762년, 구교인 카톨릭과 신교인 개신교의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에 친 카톨릭 성향이 강한 프랑스 남부 [1]툴루즈 지방의 장 칼라스의 아들은 자신이 개신교라는 이유로 취업 제한과 도박 빚까지 짊어지자 삶을 비탄하여 목을 메어 자살하였다. 그 광경을 본 몇몇 가톨릭 교인들이 개신교도였던 장 칼라스와 그 가족들이 아들의 개종을 막기 위하여 살해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사건이 발생하기 200여년 전에는 4,000여명의 시민들이 이단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을 정도였고, 툴르즈인 지방은 이 날이 다가오면 축제를 벌일 정도로 카톨릭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가톨릭 교인들은 칼라스 가족들을 교수대에 세워야 한다고 외쳐댔다. 이에 고무된 툴루즈시의 관료는 살해 증거가 없는데도 군중의 심리에 따라 칼라스 가족을 체포하였다. 칼라스 가족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적법한 재판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여론에 밀려 장 칼라스(당시 63세)는 [2]거열형에 처형했고 가족들은 추방 당했다.
이 사건에 분노한 [3]볼테르는 이 사건을 널리 알리며 칼라스 가족의 무죄를 입증하고 그를 복권시키기 위해 3년에 걸쳐 지대한 노력을 쏟은 끝에 재심 판결을 이끌어 냈고 장 칼라스의 아들은 자살한 것으로 판정이 번복되면서 무죄를 규명하였다. 1765년 3월9일 칼라스가 처형된 지 3년째 되던 날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이 선고됐다.
볼테르는 1763년에 '관용론'을 출간하였다. 종교적 맹신과 편견으로 법의 이름 아래 죄 없는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간 현실을 고발한 '관용론'은 프랑스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1] 툴루즈(Toulouse) : 프랑스의 남서쪽에 있는 도시. 오트가론(Haute-Garonne)주의 주도시
[2] 거열형 : 수레바퀴에 몸을 묶어 돌리며 죽이는 형벌
[3] 볼테르(Voltaire, 1694년~1778년) :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작가. 그 유명한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종교적 불관용의 희생자들을 변호하고 돕는 활동들을 적극적으로 벌여서 오늘날 관용의 상징적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볼테르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해 가혹하게 탄압하던 개신교도 종교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주장을 한 철학자였다.
사건이 발생하기 200여년 전에는 4,000여명의 시민들이 이단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을 정도였고, 툴르즈인 지방은 이 날이 다가오면 축제를 벌일 정도로 카톨릭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가톨릭 교인들은 칼라스 가족들을 교수대에 세워야 한다고 외쳐댔다. 이에 고무된 툴루즈시의 관료는 살해 증거가 없는데도 군중의 심리에 따라 칼라스 가족을 체포하였다. 칼라스 가족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적법한 재판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여론에 밀려 장 칼라스(당시 63세)는 [2]거열형에 처형했고 가족들은 추방 당했다.
이 사건에 분노한 [3]볼테르는 이 사건을 널리 알리며 칼라스 가족의 무죄를 입증하고 그를 복권시키기 위해 3년에 걸쳐 지대한 노력을 쏟은 끝에 재심 판결을 이끌어 냈고 장 칼라스의 아들은 자살한 것으로 판정이 번복되면서 무죄를 규명하였다. 1765년 3월9일 칼라스가 처형된 지 3년째 되던 날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이 선고됐다.
볼테르는 1763년에 '관용론'을 출간하였다. 종교적 맹신과 편견으로 법의 이름 아래 죄 없는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간 현실을 고발한 '관용론'은 프랑스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1] 툴루즈(Toulouse) : 프랑스의 남서쪽에 있는 도시. 오트가론(Haute-Garonne)주의 주도시
[2] 거열형 : 수레바퀴에 몸을 묶어 돌리며 죽이는 형벌
[3] 볼테르(Voltaire, 1694년~1778년) :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작가. 그 유명한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종교적 불관용의 희생자들을 변호하고 돕는 활동들을 적극적으로 벌여서 오늘날 관용의 상징적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볼테르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해 가혹하게 탄압하던 개신교도 종교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주장을 한 철학자였다.
1762년(영조 38년) 아버지 [1]영조가 대리청정중인 왕세자 [2]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둬 굶어죽게 만든 사건이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 뒤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영조는 세자의 자리를 회복시키며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를 직접 주관한 후, 그 아들인 세손(조선의 제22대 왕 [3]정조)에게 세자의 지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1] 영조(1694년~1776년) : 조선의 제21대 왕. 재위 1724년~1776년
[2] 사도세자(1735년~1762년) : 조선의 왕세자로 아버지인 21대 임금인 영조와 갈등으로 임오화변으로 뒤주에 갇혀 8일만에 굶어 사망했다. 사후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되었으며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에 장조로 추존되었다
[3]정조(1752년~1800년) : 조선의 제22대 임금, 재위 : 1776년~1800년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 뒤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영조는 세자의 자리를 회복시키며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를 직접 주관한 후, 그 아들인 세손(조선의 제22대 왕 [3]정조)에게 세자의 지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1] 영조(1694년~1776년) : 조선의 제21대 왕. 재위 1724년~1776년
[2] 사도세자(1735년~1762년) : 조선의 왕세자로 아버지인 21대 임금인 영조와 갈등으로 임오화변으로 뒤주에 갇혀 8일만에 굶어 사망했다. 사후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되었으며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에 장조로 추존되었다
[3]정조(1752년~1800년) : 조선의 제22대 임금, 재위 : 1776년~1800년
1763년 왕립 선언운 프랑스 인디언 전쟁, 7년 전쟁의 종결로 영국은 북미의 프랑스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영국의 국왕 조지 3세는 광대한 북미 영토를 조직화하고 추가전쟁을 피하고 북민 원주민(인디언)과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1763년 10월 7일에 선문문을 발표한다.
이 선언은 기본적으로 미국 식민지인에 대해서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서쪽으로 이주 및 토지 구입을 금지시켰다. 대서양 해안에 있는 영국 식민지와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인디언 소유의 땅과의 경계를 확정한 것이다.이 경계를 Proclamation Line of 1763 이라 한다.
미국 원주민에게 구입한 토지를 영국 왕실이 독점 거래할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이미 해당 지역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많은 식민지 정착민들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이 선언으로 식민지 주민들의 세금이 증가하게 되었고 식민지 정착민들의 불만은 결국 미국 독립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 조지 3세(George William Frederick, 1738년~1820년)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의 국왕.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국왕
*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 : 북아메리카의 산맥으로 일부는 캐나다에, 대부분은 미국에 자리하고 있다
영국의 국왕 조지 3세는 광대한 북미 영토를 조직화하고 추가전쟁을 피하고 북민 원주민(인디언)과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1763년 10월 7일에 선문문을 발표한다.
이 선언은 기본적으로 미국 식민지인에 대해서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서쪽으로 이주 및 토지 구입을 금지시켰다. 대서양 해안에 있는 영국 식민지와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인디언 소유의 땅과의 경계를 확정한 것이다.이 경계를 Proclamation Line of 1763 이라 한다.
미국 원주민에게 구입한 토지를 영국 왕실이 독점 거래할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이미 해당 지역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많은 식민지 정착민들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이 선언으로 식민지 주민들의 세금이 증가하게 되었고 식민지 정착민들의 불만은 결국 미국 독립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 조지 3세(George William Frederick, 1738년~1820년)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의 국왕.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국왕
*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 : 북아메리카의 산맥으로 일부는 캐나다에, 대부분은 미국에 자리하고 있다
1775년부터 1783년까지 8년간 진행된 영국과 13개 식민지 사이의 전쟁이다.
'프랑스-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에서 영국은 승리하였으나 전쟁에 투입한 재정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북미 식민지인들에게 이주제한과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나친 영국의 간섭으로 식민지인들은 영국에 많은 반감을 갖게되었고, 이는 곧 미국 독립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공코드 전투를 시작으로 1781년 요크타운 전투를 마지막으로 8년간의 미국 독립전쟁은 끝나게 되고 1983년 파리조약으로 미국은 독립을 인정받았다.
이후 미국은 영국을 대체할 통치자로 인류 최초의 대통령이자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을 투표로 선출하였다.
* 프랑스-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년 5월 28일~1763년 2월 15일) : 북아메리카 식민지 쟁탈전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벌인 전쟁.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북아메리카 신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 렉싱턴-콩코드 전투(Battles of Lexington and Concord, 1775년 4월 19일) : 영국군과 미국 민병대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근교의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벌인 전투.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전투이다
* 요크타운 전투(Siege of Yorktown, 1781년 9월 28일) : 미국 버지니아주의 요크타운에서 벌어진 전투로 미국 독립 전쟁을 사실상 종결시킨 전투이다
'프랑스-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에서 영국은 승리하였으나 전쟁에 투입한 재정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북미 식민지인들에게 이주제한과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나친 영국의 간섭으로 식민지인들은 영국에 많은 반감을 갖게되었고, 이는 곧 미국 독립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775년 4월 19일 렉싱턴-공코드 전투를 시작으로 1781년 요크타운 전투를 마지막으로 8년간의 미국 독립전쟁은 끝나게 되고 1983년 파리조약으로 미국은 독립을 인정받았다.
이후 미국은 영국을 대체할 통치자로 인류 최초의 대통령이자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을 투표로 선출하였다.
* 프랑스-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 1754년 5월 28일~1763년 2월 15일) : 북아메리카 식민지 쟁탈전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벌인 전쟁.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북아메리카 신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 렉싱턴-콩코드 전투(Battles of Lexington and Concord, 1775년 4월 19일) : 영국군과 미국 민병대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근교의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벌인 전투.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전투이다
* 요크타운 전투(Siege of Yorktown, 1781년 9월 28일) : 미국 버지니아주의 요크타운에서 벌어진 전투로 미국 독립 전쟁을 사실상 종결시킨 전투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13개의 주 대표들이 펜실베이니아주의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모여 7월 4일에 미국독립선언문을 발표하면서 13개주 식민지는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 선언문에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년 1월 17일~1790년 4월 17일),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 4월 13일~1826년 7월 4일, 미국 3대 대통령), 존 애덤스(John Adams, 1735년 10월 30일~1826년 7월 4일, 미국 2대 대통령)를 비롯해 당대 식민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독립 선언이 있은 후 약 8년간의 미국독립전쟁 끝에 '파리 조약'을 거쳐 1783년 9월 3일에 비로소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로 부터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 독립선언에 참여한 미국 초기 13개 주
뉴햄프셔(New Hampshire),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 코네티컷(Connecticut), 뉴욕(New York), 뉴저지(New Jersey),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델라웨어(Delaware), 메릴랜드(Maryland), 버지니아(Virginia),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조지아(Georgia)
독립 선언문에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년 1월 17일~1790년 4월 17일),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 4월 13일~1826년 7월 4일, 미국 3대 대통령), 존 애덤스(John Adams, 1735년 10월 30일~1826년 7월 4일, 미국 2대 대통령)를 비롯해 당대 식민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독립 선언이 있은 후 약 8년간의 미국독립전쟁 끝에 '파리 조약'을 거쳐 1783년 9월 3일에 비로소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로 부터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 독립선언에 참여한 미국 초기 13개 주
뉴햄프셔(New Hampshire),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 코네티컷(Connecticut), 뉴욕(New York), 뉴저지(New Jersey),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델라웨어(Delaware), 메릴랜드(Maryland), 버지니아(Virginia),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사우스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조지아(Georgia)
체사피크 만 해전(Battle of the Chesapeake)은 미국 독립 전쟁 중에 미국을 지원하는 프랑스 해군과 영국 해군이 체사피크 만(Chesapeake Bay)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버지니아 케이프 전투(Battle of the Virginia Capes)라고도 불린다.
프랑스 해군은 프랑수아 조세프 폴 드 그라드, 영국은 토머스 그레이브스가 지휘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은 1척이 침몰하였고 2척이 파손되었으나 프랑스는 단 한척도 피해를 입지않았다. 결국 영국함대는 철수하였고, 이로 인하여 요크타운(Yorktown)의 찰스 콘윌리스가 이끄는 영국군은 보급물자와 증원군이 끊기게 되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요크타운 영국군 항복은 미국 독립 전쟁이 사실상 끝났음을 의미하였다.
체사피크만 해전은 미국 독립 전쟁을 판가름했던 중요한 결전이라고 할 수 있다
* 체사피크 만(Chesapeake Bay) : 미국 동부에서 가장 긴 해안으로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에 걸쳐있다. 사냥개의 일종인 체사피크 베이 리트리버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 프랑수아 조세프 폴 드 그라드(François Joseph Paul de Grasse, 1722~1788) : 경력 프랑스 국민 계급을 달성 한 장교 해군 대장. 그는 프랑스 함대를 지휘하는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체사 피크 전투 1781 년 미국 독립 전쟁중에 요크 타운에서 영국 항복 반군의 승리를 도왔다
* 토머스 그레이브스(Thomas Graves, 1747~1814) : 영국 해군의 제독으로 7년전쟁,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전쟁등에 참전했다
*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1738년~1805년) : 영국의 육군 장군이자 정치인. 전 세계 식민지 총독을 맡았다. 미국 독립 전쟁 때 영국군을 지휘한 장군
* 요크타운(Yorktown) : 미국 버지니아주(Virginia)의 지역
프랑스 해군은 프랑수아 조세프 폴 드 그라드, 영국은 토머스 그레이브스가 지휘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은 1척이 침몰하였고 2척이 파손되었으나 프랑스는 단 한척도 피해를 입지않았다. 결국 영국함대는 철수하였고, 이로 인하여 요크타운(Yorktown)의 찰스 콘윌리스가 이끄는 영국군은 보급물자와 증원군이 끊기게 되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요크타운 영국군 항복은 미국 독립 전쟁이 사실상 끝났음을 의미하였다.
체사피크만 해전은 미국 독립 전쟁을 판가름했던 중요한 결전이라고 할 수 있다
* 체사피크 만(Chesapeake Bay) : 미국 동부에서 가장 긴 해안으로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에 걸쳐있다. 사냥개의 일종인 체사피크 베이 리트리버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 프랑수아 조세프 폴 드 그라드(François Joseph Paul de Grasse, 1722~1788) : 경력 프랑스 국민 계급을 달성 한 장교 해군 대장. 그는 프랑스 함대를 지휘하는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체사 피크 전투 1781 년 미국 독립 전쟁중에 요크 타운에서 영국 항복 반군의 승리를 도왔다
* 토머스 그레이브스(Thomas Graves, 1747~1814) : 영국 해군의 제독으로 7년전쟁,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전쟁등에 참전했다
*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1738년~1805년) : 영국의 육군 장군이자 정치인. 전 세계 식민지 총독을 맡았다. 미국 독립 전쟁 때 영국군을 지휘한 장군
* 요크타운(Yorktown) : 미국 버지니아주(Virginia)의 지역
미국 독립 전쟁을 사실상 종결시킨 전투이다.
버지니아 식민지 동쪽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요크타운에서 미국 프랑스 연합군이 찰스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 7,000여 명을 포위하였다. 이후 미국의 공격은 계속 되었다. 외부지원이 끊겨 고립무원이 된 콘윌리스의 군은 식량도 떨어지고 날씨는 추어지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하게 된다.
영국의 요크타운에서의 패배는 아메리카 13주에 대한 영국의 지배가 끝났음을 의미하였다. 즉, 미국 독립 전쟁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 요크타운(Yorktown) : 미국 버지니아주(Virginia)의 지역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 : 1707년에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합방하여 성립한 왕국으로 섬 전체를 지배한 첫 왕국으로 영국이라 불린다.
*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1738년~1805년) : 영국의 육군 장군이자 정치인. 전 세계 식민지 총독을 맡았다. 미국 독립 전쟁 때 영국군을 지휘한 장군
*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년~1799년) :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년~1797년)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린다
* 로샹보 백작 장바티스트 도나티앵 드 비뫼르(Jean-Baptiste Donatien de Vimeur, comte de Rochambeau 1725년~1807년) : 프랑스 원수이자 군인이며 미국 독립 전쟁에 참여해 독립군을 지원한 프랑스 원정군의 최고사령관
버지니아 식민지 동쪽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요크타운에서 미국 프랑스 연합군이 찰스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 7,000여 명을 포위하였다. 이후 미국의 공격은 계속 되었다. 외부지원이 끊겨 고립무원이 된 콘윌리스의 군은 식량도 떨어지고 날씨는 추어지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하게 된다.
영국의 요크타운에서의 패배는 아메리카 13주에 대한 영국의 지배가 끝났음을 의미하였다. 즉, 미국 독립 전쟁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 요크타운(Yorktown) : 미국 버지니아주(Virginia)의 지역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 : 1707년에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합방하여 성립한 왕국으로 섬 전체를 지배한 첫 왕국으로 영국이라 불린다.
*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1738년~1805년) : 영국의 육군 장군이자 정치인. 전 세계 식민지 총독을 맡았다. 미국 독립 전쟁 때 영국군을 지휘한 장군
*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년~1799년) :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년~1797년)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린다
* 로샹보 백작 장바티스트 도나티앵 드 비뫼르(Jean-Baptiste Donatien de Vimeur, comte de Rochambeau 1725년~1807년) : 프랑스 원수이자 군인이며 미국 독립 전쟁에 참여해 독립군을 지원한 프랑스 원정군의 최고사령관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치세 말기부터 시작된 국가 재정 악화는 루이 15세에서도 호전되지 못했고 [3]루이 16세가 즉위할 즈음에는 다른 나라로부터 빚을 내야 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을 견제하고 식민지 개척경쟁 차원에서 미국 독립 혁명을 지원했으나, 프랑스가 얻은 이익은 없었고 재정만 더욱 악화되었다.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1]앙시앵 레짐하에서 18세기에 나타난 일반적 특징처럼 부르주아 계급이 부상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독립 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되어 있었다.
프랑스는 만성화된 왕실 재정위기를 해결하고자 루이 16세의 재정총감 칼론은 1787년 2월, [4]명사회를 열어 귀족, 성직자 등의 특권 계층에게 임시로 과세하는 것을 재정 위기의 타개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면세혜택을 받는 특권 계층인 귀족, 성직자는 크게 반발하며 과세를 강력히 거부했다. 재정개혁에 실패한 칼론은 1787년 4월 8일에 해임되었다.
1789년 후임 재무총감인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는 삼부회를 제안했다. 그동안 세금이 면제되어온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에 해당하는 귀족에게 세금을 추징하기 위해 1789년 5월 5일, 175년만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신분별 의회인 [2]삼부회가 개최되었다.
루이 16세는 한 신분당 같은 의석수였던 삼부회에서 평민대표의 요구를 수용하여 제3신분의 수를 두 배로 승인하였다. 따라서 삼부회는 제1신분인 성직자대표 294인, 제2신분인 귀족대표 270인, 그리고 제3신분인 평민대표 578인으로 구성되었다.
삼부회는 초반부터 제1,2신분인 성직자, 귀족대표와 제3신분인 평민대표는 표결 방식 채택을 두고 의견이 충돌하였다. 성직자, 귀족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주장한 데 비해 평민대표는 머릿수 표결 방식을 주장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결국 회의 장소가 폐쇄되자 평민대표는 왕궁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6월 17일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없이 징수할 수 없으며 해산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테니스 코트 선언을 하였다. 이 때 성립된 국민의회는 제1신분과 제2신분의 일부가 참가하게 되면서 대표성을 가지게 되었다.
루이 16세의 왕당파는 무력으로 '국민의회'를 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파리 민중은 격분하였다.ㅍ7월 13일 파리 민중은 스스로 자치를 선포하고 '국민방위대'를 조직했다.
그 다음날인 7월 14일 무기를 조달을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파리의 요새로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 있었다. 바스티유 수비대와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으며 결국 사상자가 나오면서 민중에 의해 바스티유 감옥이 장악되었다. 이 혁명운동은 농촌까지 확산되어 농민들도 동참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국민의회는 8월 4일 봉건제 폐지선언하고 26일에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으로 혁명의 이념을 세워 민중의 지지와 혁명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의 '봉건제 폐지 선언'과 '인권선언'에 대한 재가를 계속 거부하였으나 1789년 10월 여성들이 주동이 되어 10월 폭동을 일으켰다. 결국 '봉건제 폐지 선언'과 '인권선언'에 대한 재가했다.
11월에는 교회 토지를 국유화하는등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의회는 1791년 새로운 프랑스의 헌법을 제정하고 해산되었다.
이후 프랑스 제1공화정인 국민공회(1792년~1795년), 프랑스 제1공화국 총재정부(1795 ~ 1799)를 거쳐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프랑스 제1공화국의 통령정부(1799 ~ 1804)가 수립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종료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1]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린 후 공화정, 제정, 왕정으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불안한 정치상황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역사적으로 정치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지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다.
프랑스는 10년이라는 짧은 혁명기간 동안에 무수한 체제변화를 겪었다. 절대왕정이 입헌군주제로 바뀌고 다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공화정 안에서도 처음에는 비교적 온건한 자유주의의 특징을 보이다가 급진적인 인민민주주의로 탈바꿈하고 다시 부르주아지 주도의 공화정이 들어섰는가 하면, 그 속에서 공산주의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다가 끝내는 쿠데타로 제정이 등장하는 엄청난 격변의 과정을 거쳤다.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인민주권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치적으로 발전시켜 나갔고 전 유럽에 그 이상을 전파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여기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근대 유럽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 1789년 프랑스 혁명 전의 절대 군주 정치체제를 통칭하는 말. 프랑스어로 ‘옛 체제’를 뜻한다.현재는 프랑스 혁명 의미보다 낡은 기존의 제도나 무능력했던 이전 정권을 일컫는 단어로도 사용한다
[2] 삼부회(Estates General) : 국왕의 주도로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의 신분별 대표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 사안에 관해 토론하며 협력·자문하는 의회이다. 1302년 4월 10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분쟁시에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시킨 것이 시초가 되고 있다. 실제로 1614년 이래 거의 소집되지 않다가 1789년 루이 16세에 의해 소집되었다. 그러나 신분별 대표 간의 표결방식을 두고 대립하여 결렬되고 제3신분은 삼부회에서 벗어나 국민의회를 조직했다
[3] 루이 16세(Louis XVI, 1754년 8월 23일~1793년 1월 21일) :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4] 명사회 : 국왕의 자문에 의해 중요 의제를 논의하는 자리로, 발루아 왕조에서 부르봉 왕조까지 프랑스 왕국에 존재한 자문 기구이다. 명사회 위원은 귀족과 로마 가톨릭교회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되었다. 마지막으로 명사회가 개최되었던 시기는 루이 16세에 의해 소집었던 1787년 및 1788년이다. 이 두차례의 명사회에서 논의된 주요 의제는 극도로 악화된 경제난 회복과 세제개혁이었다.
[참고문헌]
- 윤혜영, 이혜령 외 7인 공저 『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pp. 45-66, 203-215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https://www.kdemo.or.kr/) : 프랑스 시민혁명과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
- 위키백과, 나무위키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1]앙시앵 레짐하에서 18세기에 나타난 일반적 특징처럼 부르주아 계급이 부상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독립 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되어 있었다.
프랑스는 만성화된 왕실 재정위기를 해결하고자 루이 16세의 재정총감 칼론은 1787년 2월, [4]명사회를 열어 귀족, 성직자 등의 특권 계층에게 임시로 과세하는 것을 재정 위기의 타개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면세혜택을 받는 특권 계층인 귀족, 성직자는 크게 반발하며 과세를 강력히 거부했다. 재정개혁에 실패한 칼론은 1787년 4월 8일에 해임되었다.
1789년 후임 재무총감인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는 삼부회를 제안했다. 그동안 세금이 면제되어온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에 해당하는 귀족에게 세금을 추징하기 위해 1789년 5월 5일, 175년만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신분별 의회인 [2]삼부회가 개최되었다.
루이 16세는 한 신분당 같은 의석수였던 삼부회에서 평민대표의 요구를 수용하여 제3신분의 수를 두 배로 승인하였다. 따라서 삼부회는 제1신분인 성직자대표 294인, 제2신분인 귀족대표 270인, 그리고 제3신분인 평민대표 578인으로 구성되었다.
삼부회는 초반부터 제1,2신분인 성직자, 귀족대표와 제3신분인 평민대표는 표결 방식 채택을 두고 의견이 충돌하였다. 성직자, 귀족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주장한 데 비해 평민대표는 머릿수 표결 방식을 주장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결국 회의 장소가 폐쇄되자 평민대표는 왕궁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6월 17일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없이 징수할 수 없으며 해산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테니스 코트 선언을 하였다. 이 때 성립된 국민의회는 제1신분과 제2신분의 일부가 참가하게 되면서 대표성을 가지게 되었다.
루이 16세의 왕당파는 무력으로 '국민의회'를 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파리 민중은 격분하였다.ㅍ7월 13일 파리 민중은 스스로 자치를 선포하고 '국민방위대'를 조직했다.
그 다음날인 7월 14일 무기를 조달을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파리의 요새로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 있었다. 바스티유 수비대와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으며 결국 사상자가 나오면서 민중에 의해 바스티유 감옥이 장악되었다. 이 혁명운동은 농촌까지 확산되어 농민들도 동참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국민의회는 8월 4일 봉건제 폐지선언하고 26일에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으로 혁명의 이념을 세워 민중의 지지와 혁명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의 '봉건제 폐지 선언'과 '인권선언'에 대한 재가를 계속 거부하였으나 1789년 10월 여성들이 주동이 되어 10월 폭동을 일으켰다. 결국 '봉건제 폐지 선언'과 '인권선언'에 대한 재가했다.
11월에는 교회 토지를 국유화하는등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의회는 1791년 새로운 프랑스의 헌법을 제정하고 해산되었다.
이후 프랑스 제1공화정인 국민공회(1792년~1795년), 프랑스 제1공화국 총재정부(1795 ~ 1799)를 거쳐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프랑스 제1공화국의 통령정부(1799 ~ 1804)가 수립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종료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1]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린 후 공화정, 제정, 왕정으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불안한 정치상황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역사적으로 정치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지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다.
프랑스는 10년이라는 짧은 혁명기간 동안에 무수한 체제변화를 겪었다. 절대왕정이 입헌군주제로 바뀌고 다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공화정 안에서도 처음에는 비교적 온건한 자유주의의 특징을 보이다가 급진적인 인민민주주의로 탈바꿈하고 다시 부르주아지 주도의 공화정이 들어섰는가 하면, 그 속에서 공산주의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다가 끝내는 쿠데타로 제정이 등장하는 엄청난 격변의 과정을 거쳤다.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인민주권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치적으로 발전시켜 나갔고 전 유럽에 그 이상을 전파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여기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근대 유럽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 1789년 프랑스 혁명 전의 절대 군주 정치체제를 통칭하는 말. 프랑스어로 ‘옛 체제’를 뜻한다.현재는 프랑스 혁명 의미보다 낡은 기존의 제도나 무능력했던 이전 정권을 일컫는 단어로도 사용한다
[2] 삼부회(Estates General) : 국왕의 주도로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의 신분별 대표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 사안에 관해 토론하며 협력·자문하는 의회이다. 1302년 4월 10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분쟁시에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시킨 것이 시초가 되고 있다. 실제로 1614년 이래 거의 소집되지 않다가 1789년 루이 16세에 의해 소집되었다. 그러나 신분별 대표 간의 표결방식을 두고 대립하여 결렬되고 제3신분은 삼부회에서 벗어나 국민의회를 조직했다
[3] 루이 16세(Louis XVI, 1754년 8월 23일~1793년 1월 21일) :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4] 명사회 : 국왕의 자문에 의해 중요 의제를 논의하는 자리로, 발루아 왕조에서 부르봉 왕조까지 프랑스 왕국에 존재한 자문 기구이다. 명사회 위원은 귀족과 로마 가톨릭교회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되었다. 마지막으로 명사회가 개최되었던 시기는 루이 16세에 의해 소집었던 1787년 및 1788년이다. 이 두차례의 명사회에서 논의된 주요 의제는 극도로 악화된 경제난 회복과 세제개혁이었다.
[참고문헌]
- 윤혜영, 이혜령 외 7인 공저 『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pp. 45-66, 203-215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https://www.kdemo.or.kr/) : 프랑스 시민혁명과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
- 위키백과, 나무위키
프랑스는 만성화된 왕실 재정위기를 해결하고자 재무장관인 자크 네케르는 삼부회를 제안했다. 그동안 과세가 면제되어온 제1신분과 제2신분에 대해 세금을 추징하기 위해 1789년 5월 5일, 175년만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신분별 의회인 삼부회가 개최된었다. 그러나 삼부회는 초반부터 심의와 표결방식을 놓고 제1,2신분인 성직자, 귀족대표와 제3신분인 평민간에 표결 방식 채택을 두고 의견이 충돌하며 갈등을 빚었다.
루이 16세는 한 신분당 같은 의석수였던 삼부회에서 제3신분인 평민 의원의 수를 두 배로 늘렸다. 성직자, 귀족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대표는 의원수 표결 방식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계급에 유리한 표결 방식의 채택을 주장했다.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삼부회가 끝났다.
평민대표는 단독으로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없이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제1신분과 제2신분의 일부가 참가하게 되면서 국민의회는 대표성을 가지게 된다. 결국 국왕은 의회를 공인하게 되고,1789년 7월 9일에는 국민제헌의회라 개칭하며 헌법제정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이에 루이 16세의 왕당파는 무력으로 '국민의회'를 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파리시민은 격분하여 무기를 조달을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파리의 요새로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 있었다.
시민대표는 무기인도를 위하여 바스티유 수비대 대표와 협상하였으나 거절당했다. 협상중에 군중의 수가 늘어나고 흥분상태가 고조되면서 바스티유 수비대와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된다. 결국 사상자가 나오면서 시민에 의해 바스티유 전체가 장악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 루이 16세(Louis XVI, 1754년~1793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국왕(재위 : 1774년~1792년)
* 삼부회(Estates General) : 국왕의 주도로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의 신분별 대표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 사안에 관해 토론하며 협력·자문하는 의회이다. 1302년 4월 10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분쟁시에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시킨 것이 시초가 되고 있다. 실제로 1614년 이래 거의 소집되지 않다가 1789년 루이 16세에 의해 소집되었다. 그러나 신분별 대표 간의 표결방식을 두고 대립하여 결렬되고 제3신분은 삼부회에서 벗어나 국민의회를 조직했다
*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 1732년~1804년) : 프랑스 혁명 당시 재무장관
루이 16세는 한 신분당 같은 의석수였던 삼부회에서 제3신분인 평민 의원의 수를 두 배로 늘렸다. 성직자, 귀족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대표는 의원수 표결 방식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계급에 유리한 표결 방식의 채택을 주장했다.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삼부회가 끝났다.
평민대표는 단독으로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없이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제1신분과 제2신분의 일부가 참가하게 되면서 국민의회는 대표성을 가지게 된다. 결국 국왕은 의회를 공인하게 되고,1789년 7월 9일에는 국민제헌의회라 개칭하며 헌법제정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이에 루이 16세의 왕당파는 무력으로 '국민의회'를 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파리시민은 격분하여 무기를 조달을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파리의 요새로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 있었다.
시민대표는 무기인도를 위하여 바스티유 수비대 대표와 협상하였으나 거절당했다. 협상중에 군중의 수가 늘어나고 흥분상태가 고조되면서 바스티유 수비대와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된다. 결국 사상자가 나오면서 시민에 의해 바스티유 전체가 장악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 루이 16세(Louis XVI, 1754년~1793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국왕(재위 : 1774년~1792년)
* 삼부회(Estates General) : 국왕의 주도로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의 신분별 대표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 사안에 관해 토론하며 협력·자문하는 의회이다. 1302년 4월 10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분쟁시에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시킨 것이 시초가 되고 있다. 실제로 1614년 이래 거의 소집되지 않다가 1789년 루이 16세에 의해 소집되었다. 그러나 신분별 대표 간의 표결방식을 두고 대립하여 결렬되고 제3신분은 삼부회에서 벗어나 국민의회를 조직했다
*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 1732년~1804년) : 프랑스 혁명 당시 재무장관
1791년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혁명의 결과로 식민지의 아프리카인 노예들이 해방되었으며, 아프리카인들이 지배하는 최초의 공화국인 아이티가 세워졌다.
스페인은 히스파니올라 섬의 생도맹그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1697년 이 섬의 서쪽을 프랑스에 내주게 된다.
생도맹그는 전 세계 설탕의 40%를 아이티 원주민과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생산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과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내용을 기초로한 인권선언은 생도맹그의 식민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생도맹그 시민들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환영하였다. 흑인노예들과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열)들은 '자유, 평등, 우애'의 원칙을 생도맹그에도 적용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식민지 총독이 이를 거부하자 반발하는 물라토들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이는 아이티 혁명에 불을 지폈다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산토도밍고를 공격하여 그곳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1801년 생도맹그에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혁명군은 1803년 마지막 전투인 베르티에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1804년 1월 1일 아이티 공화국을 세웠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어 큰 타격을 입었으며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재식민화 계획을 포기하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게 되었다.
* 생도맹그(Saint-Domingue) : 1697년부터 1804년까지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1/3을 차지했던 프랑스의 식민지. 현재의 아이티
* 히스파니올라 섬(Hispaniola) : 카리브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서쪽 1/3은 아이티의 영토이고, 동쪽 2/3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영토이다, 히스파니올라는 '작은 스페인'을 뜻한다
*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년~1803년) : 아이티의 혁명가, 독립 투사이다. 아이티의 독립의 아버지
* 물라토(mulatto) : 백인과 흑인의 혼혈
*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스페인은 히스파니올라 섬의 생도맹그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1697년 이 섬의 서쪽을 프랑스에 내주게 된다.
생도맹그는 전 세계 설탕의 40%를 아이티 원주민과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생산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과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내용을 기초로한 인권선언은 생도맹그의 식민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생도맹그 시민들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환영하였다. 흑인노예들과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열)들은 '자유, 평등, 우애'의 원칙을 생도맹그에도 적용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식민지 총독이 이를 거부하자 반발하는 물라토들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이는 아이티 혁명에 불을 지폈다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산토도밍고를 공격하여 그곳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1801년 생도맹그에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혁명군은 1803년 마지막 전투인 베르티에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1804년 1월 1일 아이티 공화국을 세웠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어 큰 타격을 입었으며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재식민화 계획을 포기하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게 되었다.
* 생도맹그(Saint-Domingue) : 1697년부터 1804년까지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1/3을 차지했던 프랑스의 식민지. 현재의 아이티
* 히스파니올라 섬(Hispaniola) : 카리브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서쪽 1/3은 아이티의 영토이고, 동쪽 2/3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영토이다, 히스파니올라는 '작은 스페인'을 뜻한다
*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년~1803년) : 아이티의 혁명가, 독립 투사이다. 아이티의 독립의 아버지
* 물라토(mulatto) : 백인과 흑인의 혼혈
*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신해박해(辛亥迫害)는 1791년(신해년, 정조 15년) 조선 최초의 가톨릭에 대한 박해 사건이다. 신해교난(辛亥敎難) 또는 신해사옥(辛亥邪獄),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부른다.
전라도 진산에 사는 독실한 천주교인이던 윤지충⋅권상연 두 양반은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일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당쟁으로 비화되었다. 천주교를 배척하는 공서파는 신서파를 공격하면서 정치 문제로 확대하였다.
결국 권상연과 윤지충은 무부무군의 사교(邪敎)를 신봉하고 이를 유포시켜 강상을 그르치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 정조(正祖, 1752년~1800년) : 조선의 제22대 왕, 재위: 1776년~1800년
* 공서파(攻西派) : 천주교를 배척하는 벽파세력
* 신서파(信西派) : 천주교에 호의적인 시파세력
* 무부무군(無父無君) : 임금도 아버지도 없다는 뜻으로 초기의 천주교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부모를 없는 것으로 보며 하느님 아래 누구나 평등하다고 주장하여 임금의 존엄을 무시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 사교(邪敎) : 근본이 옳지 못하고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종교 또는 그 나라의 도덕이나 사회제도에 어긋나는 종교
* 강상(綱常) : 조선시대의 윤리인 삼강오상(三綱五常)을 뜻한다. 부자, 군신, 부부, 형제, 친구 간의 윤리를 뜻하며 삼강오륜과 같은 의미이다
전라도 진산에 사는 독실한 천주교인이던 윤지충⋅권상연 두 양반은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일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당쟁으로 비화되었다. 천주교를 배척하는 공서파는 신서파를 공격하면서 정치 문제로 확대하였다.
결국 권상연과 윤지충은 무부무군의 사교(邪敎)를 신봉하고 이를 유포시켜 강상을 그르치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 정조(正祖, 1752년~1800년) : 조선의 제22대 왕, 재위: 1776년~1800년
* 공서파(攻西派) : 천주교를 배척하는 벽파세력
* 신서파(信西派) : 천주교에 호의적인 시파세력
* 무부무군(無父無君) : 임금도 아버지도 없다는 뜻으로 초기의 천주교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부모를 없는 것으로 보며 하느님 아래 누구나 평등하다고 주장하여 임금의 존엄을 무시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 사교(邪敎) : 근본이 옳지 못하고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종교 또는 그 나라의 도덕이나 사회제도에 어긋나는 종교
* 강상(綱常) : 조선시대의 윤리인 삼강오상(三綱五常)을 뜻한다. 부자, 군신, 부부, 형제, 친구 간의 윤리를 뜻하며 삼강오륜과 같은 의미이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10]프로이센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하자 민중들은 패전의 원인이 국왕에게 있으며 왕비 [6]마리 아투아네트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2]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인 [11]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프랑스로 진격하면서 프랑스 국왕을 옹호하는 선언문으로 프랑스 민중은 분노에 휩싸이면서 혁명을 붕괴시키려는 왕당파와 반혁명 세력의 음모가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1792년 8월 9일, 프랑스 민중의 대표를 자처하는 의원들이 파리 시청을 점령하고 파리 시민들에게 봉기를 촉구하였디. 다음날 8월 10일 봉기가 시작되면서 수만의 파리 시민들은 루이 16세가 머물고 있는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갔다. 루이 16세는 [1]튈르리 궁을 탈출해 의회에 피신하였다. 시민들은 의회로 몰려가 국왕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의회는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루이 16세를 시민들에게 넘겨준다. 왕권은 정지되고 [5]루이 16세와 [6]마리 앙투아네트는 유폐된다.
이런 가운데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3]롱위를 점령하고 9월 2일 [4]베르됭을 함락시켰다. 이후 수도인 파리를 노리는 상황었다. 이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파리 시민들은 왕당파와 반력명 세력의 음모가 있을 거라는 소문도 더 커지게 된다.
흥분한 파리 시민들은 9월 2일부터 9월 7일까지 감옥을 습격해 왕당파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중이던 죄수들을 즉결 재판의 형식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약 1,200여명의 수감자가 살해되었다.
이 일련의 사태동안 왕비인 [6]마리 앙투아네트의 측근이었던 랑발 공작부인이 살해되었는데 파리 시민들은 공작부인의 머리를 창끝에 얹어 왕비에게 보여주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충격을 받아 실신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들의 배후에는 [7]파리코뮌이 있었다. [9]장폴 마라와 [8]조르주 당통을 비롯한 코뮌 정부의 각료들과 지도자들은 반혁명 세력의 숙청을 방조하면서 미리 작성해둔 명부를 통해 감옥에서의 즉결 처분에 일조하였다. 코뮌 지도자들은 프랑스 각처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반혁명세력들의 숙청을 권고하였고 이는 대학살이 프랑스 전역으로 퍼지게 하였다.
9월 대학살은 프랑스 혁명의 과격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며 이후 국민공회 공포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1] 튈르리 궁(Palais des Tuileries) : 파리에 1871년까지 존재하던 궁전.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샹젤리제 사이에 있던 옛 왕궁
[2] 브라운슈바이크 공국(Duchy of Brunswick) : 13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신성 로마 제국과 독일 제국을 구성했던 공국이었으며 수도는 브라운슈바이크였다. 현재 거의 대부분의 지역은 독일 니더작센주에 속하고, 일부는 작센안할트주에 속한다
[3] 롱위(Longwy) : 프랑스 북동부 로렌에 위치한 뫼르트에모젤주의 도시
[4] 베르됭(Verdun) : 프랑스 북부 그랑테스트 레지옹의 뫼즈주에 있는 소도시
[5] 루이 16세(Louis XVI, 1754년 8월 23일~1793년 1월 21일) :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6]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년 11월 2일~1793년 10월 16일) :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재위, 1774년 5월 10일~1791년 10월 1일)
[7] 파리 코뮌(Paris Commune, 1871년 3월 18일 ~ 5월 28일) : 파리 시민들이 세운 사회주의 자치 정부
[8] 조르주 자크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년~1794년) :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 로베스피에르, 장폴 마라와 함께 '프랑스 대혁명의 3거장'라고 불린다
[9] 장폴 마라(Jean-Paul Marat, 1743년~1793년) :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혁명에서 급진적인 저널리스트이자 정치가. 자코뱅 클럽의 산악파에 참가하여 공포 정치를 추진했다
[10]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독일 북부 지역에 위치한 왕국으로 1701년에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11]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Charles William Ferdinand, Duke of Brunswick, 1735년~1806년) :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공작 겸 프로이센 육군 원수
[2]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인 [11]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프랑스로 진격하면서 프랑스 국왕을 옹호하는 선언문으로 프랑스 민중은 분노에 휩싸이면서 혁명을 붕괴시키려는 왕당파와 반혁명 세력의 음모가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1792년 8월 9일, 프랑스 민중의 대표를 자처하는 의원들이 파리 시청을 점령하고 파리 시민들에게 봉기를 촉구하였디. 다음날 8월 10일 봉기가 시작되면서 수만의 파리 시민들은 루이 16세가 머물고 있는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갔다. 루이 16세는 [1]튈르리 궁을 탈출해 의회에 피신하였다. 시민들은 의회로 몰려가 국왕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의회는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루이 16세를 시민들에게 넘겨준다. 왕권은 정지되고 [5]루이 16세와 [6]마리 앙투아네트는 유폐된다.
이런 가운데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3]롱위를 점령하고 9월 2일 [4]베르됭을 함락시켰다. 이후 수도인 파리를 노리는 상황었다. 이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파리 시민들은 왕당파와 반력명 세력의 음모가 있을 거라는 소문도 더 커지게 된다.
흥분한 파리 시민들은 9월 2일부터 9월 7일까지 감옥을 습격해 왕당파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중이던 죄수들을 즉결 재판의 형식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약 1,200여명의 수감자가 살해되었다.
이 일련의 사태동안 왕비인 [6]마리 앙투아네트의 측근이었던 랑발 공작부인이 살해되었는데 파리 시민들은 공작부인의 머리를 창끝에 얹어 왕비에게 보여주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충격을 받아 실신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들의 배후에는 [7]파리코뮌이 있었다. [9]장폴 마라와 [8]조르주 당통을 비롯한 코뮌 정부의 각료들과 지도자들은 반혁명 세력의 숙청을 방조하면서 미리 작성해둔 명부를 통해 감옥에서의 즉결 처분에 일조하였다. 코뮌 지도자들은 프랑스 각처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반혁명세력들의 숙청을 권고하였고 이는 대학살이 프랑스 전역으로 퍼지게 하였다.
9월 대학살은 프랑스 혁명의 과격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며 이후 국민공회 공포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1] 튈르리 궁(Palais des Tuileries) : 파리에 1871년까지 존재하던 궁전.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샹젤리제 사이에 있던 옛 왕궁
[2] 브라운슈바이크 공국(Duchy of Brunswick) : 13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신성 로마 제국과 독일 제국을 구성했던 공국이었으며 수도는 브라운슈바이크였다. 현재 거의 대부분의 지역은 독일 니더작센주에 속하고, 일부는 작센안할트주에 속한다
[3] 롱위(Longwy) : 프랑스 북동부 로렌에 위치한 뫼르트에모젤주의 도시
[4] 베르됭(Verdun) : 프랑스 북부 그랑테스트 레지옹의 뫼즈주에 있는 소도시
[5] 루이 16세(Louis XVI, 1754년 8월 23일~1793년 1월 21일) :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6]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년 11월 2일~1793년 10월 16일) :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재위, 1774년 5월 10일~1791년 10월 1일)
[7] 파리 코뮌(Paris Commune, 1871년 3월 18일 ~ 5월 28일) : 파리 시민들이 세운 사회주의 자치 정부
[8] 조르주 자크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년~1794년) :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 로베스피에르, 장폴 마라와 함께 '프랑스 대혁명의 3거장'라고 불린다
[9] 장폴 마라(Jean-Paul Marat, 1743년~1793년) :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혁명에서 급진적인 저널리스트이자 정치가. 자코뱅 클럽의 산악파에 참가하여 공포 정치를 추진했다
[10]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독일 북부 지역에 위치한 왕국으로 1701년에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11]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Charles William Ferdinand, Duke of Brunswick, 1735년~1806년) :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공작 겸 프로이센 육군 원수
프랑스 혁명 전쟁 초기 오스트리아-[4]프로이센 연합군에 계속 밀리던 프랑스 혁명군이 파리 근교 [1]발미에서 승리한 전투로서 프랑스 혁명군의 첫 승리였다.
[8]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인 [5]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이끄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7월 19일 프랑스로 진격하면서 "프랑스 국왕인 루이 16세의 통치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며 왕실에 위해를 가하면 파리를 괴멸시킬 것"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자 프랑스 민심은 격분하였으며 혁명을 붕괴시키려는 왕당파와 반혁명 세력의 음모가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8월 9일 과격한 혁명가들은 민중들은 봉기를 일으켜 왕궁을 습격하였고, 이에 프랑스 의회는 굴복하여 봉기를 주도한 혁명파는 정권을 장악했다. 왕권은 정지되었다.
8월 25일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2]롱위를 점령하고 9월 2일 [3]베르됭을 함락시켰다. 이후 수도인 파리를 노리는 상황었다. 이러한 패전소식에 격분한 파리 시민들은 9월 2일부터 9월 7일까지 엿새동안 감옥을 습격해 왕당파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중이던 죄수들을 즉결 재판의 형식으로 살해했다. 이른바 9월 대학살 사건이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과 전투에서 패배를 당한 프랑스 북부군의 [7]뒤무리에 장군은 [6]켈레르만 장군의 중앙군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군 3만 5천명과 [7]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는 [6]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의 원군을 얻어 프로이센군보다 많은 4만 7천명은 발미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8시간의 전투 끝에 프랑스군은 승리해 파리로 진격하려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프랑스군은 300명, 프로이센군은 184명의 사상자를 냈다.
병력손실 상으로는 대전투는 아니었지만 이 전투로 인하여 계속 밀리기만 했던 프랑스 혁명 정부는 위기를 벗어났다. 만약 이때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했다면 프랑스 대혁명은 무너졌을 것이다.
발미전투의 승리로 프랑스는 제1공화정이 수립되면서 국민공회가 개설되었다. 이어 1793년 1월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으며 공포 정치가 시작되었다.
[1] 발미(Valmy) : 프랑스 마른(Marne)주의 도시
[2] 롱위(Longwy) : 프랑스 북동부 로렌에 위치한 뫼르트에모젤주의 도시
[3] 베르됭(Verdun) : 프랑스 북부 그랑테스트 레지옹의 뫼즈주에 있는 소도시
[4]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독일 북부 지역에 위치한 왕국으로 1701년에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5]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Charles William Ferdinand, Duke of Brunswick, 1735년~1806년) :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공작 겸 프로이센 육군 원수
[6] 프랑수아 에티엔 크리스토프 켈레르만(François Étienne Christophe Kellermann, 1735년~1820년) :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발미 공작. 7년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을 모두 경험한 인물
[7] 샤를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Charles-François du Périer Dumouriez, 1739년~1823년) : 프랑스 혁명 전쟁 때의 프랑스 장군. 발미 전투에서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과 함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후 프랑스 공화국에 반기를 들어 쿠데타를 시도하려다 실패하고 외국으로 망명했다. 나폴레옹 황제의 치세에는 왕당파가 되었다
[8] 브라운슈바이크 공국(Duchy of Brunswick) : 13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신성 로마 제국과 독일 제국을 구성했던 공국이었으며 수도는 브라운슈바이크였다. 현재 거의 대부분의 지역은 독일 니더작센주에 속하고, 일부는 작센안할트주에 속한다
[8]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인 [5]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이끄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7월 19일 프랑스로 진격하면서 "프랑스 국왕인 루이 16세의 통치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며 왕실에 위해를 가하면 파리를 괴멸시킬 것"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자 프랑스 민심은 격분하였으며 혁명을 붕괴시키려는 왕당파와 반혁명 세력의 음모가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8월 9일 과격한 혁명가들은 민중들은 봉기를 일으켜 왕궁을 습격하였고, 이에 프랑스 의회는 굴복하여 봉기를 주도한 혁명파는 정권을 장악했다. 왕권은 정지되었다.
8월 25일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2]롱위를 점령하고 9월 2일 [3]베르됭을 함락시켰다. 이후 수도인 파리를 노리는 상황었다. 이러한 패전소식에 격분한 파리 시민들은 9월 2일부터 9월 7일까지 엿새동안 감옥을 습격해 왕당파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중이던 죄수들을 즉결 재판의 형식으로 살해했다. 이른바 9월 대학살 사건이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과 전투에서 패배를 당한 프랑스 북부군의 [7]뒤무리에 장군은 [6]켈레르만 장군의 중앙군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군 3만 5천명과 [7]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는 [6]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의 원군을 얻어 프로이센군보다 많은 4만 7천명은 발미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8시간의 전투 끝에 프랑스군은 승리해 파리로 진격하려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프랑스군은 300명, 프로이센군은 184명의 사상자를 냈다.
병력손실 상으로는 대전투는 아니었지만 이 전투로 인하여 계속 밀리기만 했던 프랑스 혁명 정부는 위기를 벗어났다. 만약 이때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했다면 프랑스 대혁명은 무너졌을 것이다.
발미전투의 승리로 프랑스는 제1공화정이 수립되면서 국민공회가 개설되었다. 이어 1793년 1월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으며 공포 정치가 시작되었다.
[1] 발미(Valmy) : 프랑스 마른(Marne)주의 도시
[2] 롱위(Longwy) : 프랑스 북동부 로렌에 위치한 뫼르트에모젤주의 도시
[3] 베르됭(Verdun) : 프랑스 북부 그랑테스트 레지옹의 뫼즈주에 있는 소도시
[4]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독일 북부 지역에 위치한 왕국으로 1701년에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5]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Charles William Ferdinand, Duke of Brunswick, 1735년~1806년) :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공작 겸 프로이센 육군 원수
[6] 프랑수아 에티엔 크리스토프 켈레르만(François Étienne Christophe Kellermann, 1735년~1820년) :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발미 공작. 7년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을 모두 경험한 인물
[7] 샤를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Charles-François du Périer Dumouriez, 1739년~1823년) : 프랑스 혁명 전쟁 때의 프랑스 장군. 발미 전투에서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과 함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후 프랑스 공화국에 반기를 들어 쿠데타를 시도하려다 실패하고 외국으로 망명했다. 나폴레옹 황제의 치세에는 왕당파가 되었다
[8] 브라운슈바이크 공국(Duchy of Brunswick) : 13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신성 로마 제국과 독일 제국을 구성했던 공국이었으며 수도는 브라운슈바이크였다. 현재 거의 대부분의 지역은 독일 니더작센주에 속하고, 일부는 작센안할트주에 속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온화한 정책을 써 오던 정조가 1800년 8월 18일 승하하였다. 이어서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55세의 나이로 수렴청정을 시작하였으므로 정순왕후의 친오라버니 김귀주(이미 1786년 사망)가 주축을 이루었던 벽파(僻派)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벽파는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정순왕후를 움직여 언교(諺敎)로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며 탄압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 신부이자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인 주문모(중국인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를 비롯하여 초기교회의 지도자이던 이승훈, 정약종(다산 정약용의 형), 여성 평신도 지도자인 강완숙 등 박해 피해자는 신도만도 300명이 넘었다. 오가작통법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다.
* 언교(諺敎) : 언문으로 쓴 왕후의 교서
* 정조(正祖, 1752년~1800년) : 조선의 제22대 왕, 재위: 1776년~1800년
* 순조(純祖, 1790년~1834년) : 조선의 제23대 왕, 재위: 1800년~1834년
* 벽파(僻派) :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반대한 정파
* 시파(時派) :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세력
*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 조선에서 시행된 행정 구역 체계이며 세조 때 실시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 5개의 호(戶)를 1개의 통(統)으로 구성하고 리(里)는 5개의 통(統)으로 구성하며 면(面)은 3~4개의 리(里)로 구성
벽파는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정순왕후를 움직여 언교(諺敎)로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도를 수색하며 탄압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 신부이자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인 주문모(중국인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를 비롯하여 초기교회의 지도자이던 이승훈, 정약종(다산 정약용의 형), 여성 평신도 지도자인 강완숙 등 박해 피해자는 신도만도 300명이 넘었다. 오가작통법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다.
* 언교(諺敎) : 언문으로 쓴 왕후의 교서
* 정조(正祖, 1752년~1800년) : 조선의 제22대 왕, 재위: 1776년~1800년
* 순조(純祖, 1790년~1834년) : 조선의 제23대 왕, 재위: 1800년~1834년
* 벽파(僻派) :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반대한 정파
* 시파(時派) :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세력
*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 조선에서 시행된 행정 구역 체계이며 세조 때 실시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 5개의 호(戶)를 1개의 통(統)으로 구성하고 리(里)는 5개의 통(統)으로 구성하며 면(面)은 3~4개의 리(里)로 구성
1801년에서 1805년까지 미합중국과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국가와 벌어진 전쟁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국제전쟁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세계 최강 미 해군이 처음 창설된 계기가 되었다. 트리폴리 전쟁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제국의 준독립 국가 상태에 있었다. 바르바리 국가는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리 세 지역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각 오스만 제국 본국에서 파샤가 임명되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지중해 일대에는 바르바리 국가들의 보호아래 바르바리 해적들이 난립하였으며 지중해를 통과하는 상선의 통행료를 명목삼아 상납금을 징수했을 뿐만 아니라 상선을 습격하여 포로들을 인질로 삼아 해당 국가와 협상을 벌여 몸값을 받아내고 있었다.
당시 세계 최강 영국 해군 때문에 바르바리 해적들은 영국 국적의 상선은 건드리지 않았으나 독립 직후의 미국 상선을 집중 공격하였다. 미국은 신생 국가로 나라 재정이 열악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1796년에 미국 정부는 바르바리 해적에게 매년 8만여 달러를 상납하는 조건의 트리폴리 조약을 맺으며 미국 국적의 선박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리 해적들은 미국 선박을 계속해서 공격했고 이에 격분한 미국은 해군 창설과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하였다.
트리폴리이 파샤인 유수프 카라만르는 1801에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마자 상납요구를 했다. 미국이 이를 거부하자 1801년 5월 10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1801년 6월 1일 미 해군은 4척의 함선을 구성하여 지중해로 들어왔다. 이는 미군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이기도 하다.
8월 1일 미 해군은 함포의 포격으로 바르바리 함선은 전투불능한 상태가 되었다. 미국의 호쾌한 승전이었다. 이후 1803년에는 전함 7척으로 구성된 미 해군 함대가 트리폴리를 봉쇄했고 1805년에는 리비아 북동부 지역을 공격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군이 외국 땅에서 이룬 첫 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트리폴리 파샤 유수프 카라만르는 300명에 이르는 미국 포로들을 석방하고 배상금 6만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휴전 조약에 조인하면서 1차 바르바리 전쟁은 종결된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은 미국 군대의 국제적인 평판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고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시스템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입증했고 미해군과 해병대는 미국의 군사조직으로 위상을 확립하였다.
* 오스만 제국 :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고대 그리스에서 아시아라고 불렸던 지방으로서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하는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 터키제국, 오스만튀르크라고도 불린다
* 바르바리(Barbary) : 유럽에서 베르베르인(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이 살던 지역을 부르던 말. 특히 아프리카의 북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국가인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해안 지역을 말한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 트리폴리(Tripoli) : 리비아의 수도
* 파샤 : 오스만 제국의 최고위층 귀족에게 주어진 호칭. 주로 장군이나 지방 총독에게 주어졌다. 영국의 경(lord)과 비슷하다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1803년)이 재임 기간중 일어난 큰 사건이다
* 튀니스(Tunis) : 튀니지의 수도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제국의 준독립 국가 상태에 있었다. 바르바리 국가는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리 세 지역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각 오스만 제국 본국에서 파샤가 임명되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지중해 일대에는 바르바리 국가들의 보호아래 바르바리 해적들이 난립하였으며 지중해를 통과하는 상선의 통행료를 명목삼아 상납금을 징수했을 뿐만 아니라 상선을 습격하여 포로들을 인질로 삼아 해당 국가와 협상을 벌여 몸값을 받아내고 있었다.
당시 세계 최강 영국 해군 때문에 바르바리 해적들은 영국 국적의 상선은 건드리지 않았으나 독립 직후의 미국 상선을 집중 공격하였다. 미국은 신생 국가로 나라 재정이 열악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1796년에 미국 정부는 바르바리 해적에게 매년 8만여 달러를 상납하는 조건의 트리폴리 조약을 맺으며 미국 국적의 선박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리 해적들은 미국 선박을 계속해서 공격했고 이에 격분한 미국은 해군 창설과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하였다.
트리폴리이 파샤인 유수프 카라만르는 1801에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마자 상납요구를 했다. 미국이 이를 거부하자 1801년 5월 10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1801년 6월 1일 미 해군은 4척의 함선을 구성하여 지중해로 들어왔다. 이는 미군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이기도 하다.
8월 1일 미 해군은 함포의 포격으로 바르바리 함선은 전투불능한 상태가 되었다. 미국의 호쾌한 승전이었다. 이후 1803년에는 전함 7척으로 구성된 미 해군 함대가 트리폴리를 봉쇄했고 1805년에는 리비아 북동부 지역을 공격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군이 외국 땅에서 이룬 첫 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트리폴리 파샤 유수프 카라만르는 300명에 이르는 미국 포로들을 석방하고 배상금 6만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휴전 조약에 조인하면서 1차 바르바리 전쟁은 종결된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은 미국 군대의 국제적인 평판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고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시스템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입증했고 미해군과 해병대는 미국의 군사조직으로 위상을 확립하였다.
* 오스만 제국 :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고대 그리스에서 아시아라고 불렸던 지방으로서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하는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 터키제국, 오스만튀르크라고도 불린다
* 바르바리(Barbary) : 유럽에서 베르베르인(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이 살던 지역을 부르던 말. 특히 아프리카의 북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국가인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해안 지역을 말한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 트리폴리(Tripoli) : 리비아의 수도
* 파샤 : 오스만 제국의 최고위층 귀족에게 주어진 호칭. 주로 장군이나 지방 총독에게 주어졌다. 영국의 경(lord)과 비슷하다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1803년)이 재임 기간중 일어난 큰 사건이다
* 튀니스(Tunis) : 튀니지의 수도
1803년에 미국은 2,147,000 평방미터의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달러에 매입하였다. 이 지역은 현재의 루이지애나 주가 아니라 미시시피강에서 부터 서쪽의 로키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리켰고 현 미국 영통의 23%를 이룬다.
당시에는 연방헌법이 영토획득과 관련된 조항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위헌소지가 있었으며 큰 논란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미 내륙의 곳곳을 잇던 미시시피 수로의 주요 결절지인 뉴올리언스항을 확보하여 미국 무역에 대한 프랑스와 스페인의 잠재적인 위협을 없애고자 미국 의회를 설득하여 매입을 승인 및 결정하였다.
뉴올리언스 매입을 위해 미국 대표단은 프랑스를 방문하여 나폴레옹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카리브해의 '아이티 혁명'으로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었으며 북아메리카 식민화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프랑스는 협상에 들어가자 뉴올리언스를 포함하여 루이지애나지역 매입을 권했다. 깜짝놀란 역제안으로 미국 대표단은 루이지애나 지역의 전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단은 의회의 승인없이 영토 매입을 결정해야 하는 것에 의견이 분분했으나 결과적으로 제안을 수락했고 매매계약은 체결되었다.
이후 미국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루이지애나 매입은 의회로부터 승인되었다.
당시 가격은 1,125만 달러에 그간의 부채 735만 달러를 포함해 총 1,500만 달러(2018년 기준으로 약 2억 5천만 달러)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본격적인 서부개척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 3대 대통령(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1776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
*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 : 미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미국 중부를 남북으로 흐른다. 미국을 동서로 나눌때 기준점으로 쓰인다
* 뉴올리언스(New Orleans) : 현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최대 도시
*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년~1821년) :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 카리브해(Caribbean Sea) : 대서양과 멕시코만에 접한 바다
당시에는 연방헌법이 영토획득과 관련된 조항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위헌소지가 있었으며 큰 논란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미 내륙의 곳곳을 잇던 미시시피 수로의 주요 결절지인 뉴올리언스항을 확보하여 미국 무역에 대한 프랑스와 스페인의 잠재적인 위협을 없애고자 미국 의회를 설득하여 매입을 승인 및 결정하였다.
뉴올리언스 매입을 위해 미국 대표단은 프랑스를 방문하여 나폴레옹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카리브해의 '아이티 혁명'으로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었으며 북아메리카 식민화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프랑스는 협상에 들어가자 뉴올리언스를 포함하여 루이지애나지역 매입을 권했다. 깜짝놀란 역제안으로 미국 대표단은 루이지애나 지역의 전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단은 의회의 승인없이 영토 매입을 결정해야 하는 것에 의견이 분분했으나 결과적으로 제안을 수락했고 매매계약은 체결되었다.
이후 미국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루이지애나 매입은 의회로부터 승인되었다.
당시 가격은 1,125만 달러에 그간의 부채 735만 달러를 포함해 총 1,500만 달러(2018년 기준으로 약 2억 5천만 달러)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본격적인 서부개척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 3대 대통령(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1776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
*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 : 미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미국 중부를 남북으로 흐른다. 미국을 동서로 나눌때 기준점으로 쓰인다
* 뉴올리언스(New Orleans) : 현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최대 도시
*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년~1821년) :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 카리브해(Caribbean Sea) : 대서양과 멕시코만에 접한 바다
프랑스 혁명에서 전쟁으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여 나폴레옹 전쟁에서 절정에 이르렀다.이 전쟁은 5개 항목으로 분류된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오스트리아 전쟁 (1805)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독일·폴란드 원정 (1806 ~ 1807)
-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8 ~ 1814)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1809)
- 러시아 원정 (1812)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나폴레옹의 몰락 (1813 ~ 1814)
- 빈 회의 (1814. 9. 1 ~ 1815. 6. 9)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워털루 전투(1615)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오스트리아 전쟁 (1805)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독일·폴란드 원정 (1806 ~ 1807)
-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8 ~ 1814)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1809)
- 러시아 원정 (1812)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나폴레옹의 몰락 (1813 ~ 1814)
- 빈 회의 (1814. 9. 1 ~ 1815. 6. 9)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워털루 전투(1615)
나폴레옹 전쟁기간중 1805년 10월 21일에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의 영국함대와 프랑스-에스파이나 연합 함대를 상대로 영국해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서유럽 대부분을 재패한 나폴레옹은 그의 제국을 동쪽으로 더 넓히고 영국을 정복하고자 했으나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배로 꿈이 되고 말았다.
범선 시대의 마지막 대해전이자 영국의 막강 해군력 신화를 대표하는 전투들 가운데 하나이자, 영국이 자랑하는 대제독 넬슨이 전사한 전투이기도 했다.
이 해전의 승리는 이후 100년 동안 영국이 해상 지배권을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유럽 대부분을 재패한 나폴레옹은 그의 제국을 동쪽으로 더 넓히고 영국을 정복하고자 했으나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배로 꿈이 되고 말았다.
범선 시대의 마지막 대해전이자 영국의 막강 해군력 신화를 대표하는 전투들 가운데 하나이자, 영국이 자랑하는 대제독 넬슨이 전사한 전투이기도 했다.
이 해전의 승리는 이후 100년 동안 영국이 해상 지배권을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체사피크 레오퍼드 사건(Chesapeake–Leopard Affair)은 1807년 6월 22일 버지니아 주 노퍽(Norfolk) 해안에서 영국 전함 레오퍼드(Leopard)호와 미국 프리킷함 체사피크(Chesapeake)호의 해상 교전이다.
이 시기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의 여파로 캐나다에 기지를 둔 영국 해군은 미국 연안을 순찰하며 정찰활동을 했다. 중립의 입장을 취한 미국을 감시하고 자국 탈영병을 단속하는 임무였다.
영국의 레오퍼드호의 슬루베리 험프리즈(Salusbury Humphreys)함장은 탈령병의 정보를 입수하고 미국 체사피크호를 쫒아 수색을 진행했다.
버지니아 주 노퍽(Norfolk)에서 항해 준비를 하고 있던 체사피크호와 마주쳤다.
영국군이 탈영병 수색을 위해 체사피크호에 탑승하려 했으나 미국 승무원이 강하게 항의하자 레오퍼드호에서 대포를 발사했다. 아무런 준비를 못했던 체사피크호는 일방적으로 공격당했다. 3명이 사망하고 1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체사피크호 함장인 제임스 배런(James Barron)은 즉각 항복을 했다.
영국군은 레오퍼드호를 강제 수색하여 4명의 탈영병을 발견하였고 체사피크호도 나포되었다. 4명의 탈영병은 과거 영국 해군 출신이었으며 이중 3명은 미국 해군으로 전향한 미국인이었다. 군사재판으로 영국인 탈영병 1명은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나중에 3명은 체사피크호와 제임스 배런 함장, 승무원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제임스 배런은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정직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을 접한 미국 여론은 분노했으며 즉각적인 군사행동을 주장하며 전쟁을 불사할 만큼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러한 소동은 가라앉았다.
당시 미국은 해군도 약했으며 바르바리 해적의 미국상선 나포를 막기위하여 대부분의 함선이 지중해에 배치되어 있었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경제적으로 영국에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 사건은 1812년 미국-영국 전쟁이 발생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프리깃함(Frigate) : 대항해 시대 말기에 쓰인 대형 목조 범선의 하나. 순찰과 호위에 유용하게 바르고 가벼운 무장을 했다는 의미. 호위용 함선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1803년)이 재임 기간중 일어난 큰 사건이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이 시기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의 여파로 캐나다에 기지를 둔 영국 해군은 미국 연안을 순찰하며 정찰활동을 했다. 중립의 입장을 취한 미국을 감시하고 자국 탈영병을 단속하는 임무였다.
영국의 레오퍼드호의 슬루베리 험프리즈(Salusbury Humphreys)함장은 탈령병의 정보를 입수하고 미국 체사피크호를 쫒아 수색을 진행했다.
버지니아 주 노퍽(Norfolk)에서 항해 준비를 하고 있던 체사피크호와 마주쳤다.
영국군이 탈영병 수색을 위해 체사피크호에 탑승하려 했으나 미국 승무원이 강하게 항의하자 레오퍼드호에서 대포를 발사했다. 아무런 준비를 못했던 체사피크호는 일방적으로 공격당했다. 3명이 사망하고 1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체사피크호 함장인 제임스 배런(James Barron)은 즉각 항복을 했다.
영국군은 레오퍼드호를 강제 수색하여 4명의 탈영병을 발견하였고 체사피크호도 나포되었다. 4명의 탈영병은 과거 영국 해군 출신이었으며 이중 3명은 미국 해군으로 전향한 미국인이었다. 군사재판으로 영국인 탈영병 1명은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나중에 3명은 체사피크호와 제임스 배런 함장, 승무원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제임스 배런은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정직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을 접한 미국 여론은 분노했으며 즉각적인 군사행동을 주장하며 전쟁을 불사할 만큼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러한 소동은 가라앉았다.
당시 미국은 해군도 약했으며 바르바리 해적의 미국상선 나포를 막기위하여 대부분의 함선이 지중해에 배치되어 있었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경제적으로 영국에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 사건은 1812년 미국-영국 전쟁이 발생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프리깃함(Frigate) : 대항해 시대 말기에 쓰인 대형 목조 범선의 하나. 순찰과 호위에 유용하게 바르고 가벼운 무장을 했다는 의미. 호위용 함선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1803년)이 재임 기간중 일어난 큰 사건이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아르헨티나는 1516년,스페인의 탐험가 [1]주앙 디 솔리스에 의해 발견된 후 1580년부터 스페인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었다. 당시 수많은 식민지를 보유했던 스페인 제국은 식민지를 요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2]부왕령을 실시했다.
1776년에 [3]라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이 설치되었다. 이 영향으로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쓰이게 되었고 로마 카톨릭이 주요 종교가 되었다.
18세기 이후 유럽 철학의 주축이었던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사상과 더불어 미국의 독립선언(1776년)과 프랑스 혁명(1789년)은 당시 식민지 국가에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부추겼다.
1808년 스페인의 국왕 [5]페르난도 7세는 나폴레옹에게 양위했고, 나폴레옹은 [6]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으로 임명하면서 스페인의 권위는 실추된 상태였다.
이러한 시국에서 5월 혁명은 1810년 5월 18일부터 25일까지 [3]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일주일 동안 일어난 독립운동 사건이다. 이 결과 5월 25일 총독 [7]발타자르 히달고 드 시스네로스가 해임되고 첫번째 독립정부 의회인 프리메라 [8]훈타(Primera Junta)가 조직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스페인으로 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독립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10]호세 데 산마르틴이 1814년에서 1817년 사이에 독립 운동을 지휘하면서 점차 독립은 현실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10]산 마르틴을 국가 독립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1816년 7월 9일 [9]투쿠만 의회가 소집되어 스페인으로 부터의 공식적인 독립을 선언했다.
[1] 주앙 디 솔리스(Juan de Solís, 1470년~1516년) : 스페인의 탐험가.유럽인 최초로 우루과이에 상륙했다
[2] 부왕령(viceroyalty) : 본국의 국왕을 대신하는 직책인 부왕에 의해 통치되는 식민지
[3]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Viceroyalty of the Río de la Plata) : 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스페인 제국의 마지막 부왕령. 주로 리오데라플라타 유역(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 브라질 일부 지역 및 칠레 북부 지역 일대)을 중심으로 1776년에 세웠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삼았다
[5] 페르난도 7세(Fernando VII, 1784년~1833년) : 스페인 국왕(재위 : 1808년, 1813년~1833년). 스페인 부르봉 왕조 제7·8대 국왕
[6]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 1768년~1844년)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 나폴리와 시칠리아 국왕(재위 1806년 - 1808년), 스페인 국왕(호세 1세 보나파르테,재위 1808년 - 1813년)
[7] 발타자르 히달고 드 시스네로스(Baltasar Hidalgo de Cisneros, 1756년~1829년) :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마지막 총독
[8] 훈타(junta) : '모임','위원희'를 뜻하는 스페인 단어. 20세기 들어 중남미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가 스스로를 '훈타'로 칭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쿠데타로 인한 군사정부를 '훈타'라 부른다
[9] 투쿠만주(Provincia de Tucumán) :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위치한 주
[10] 호세 데 산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1778년~1850년) :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남아메리카를 해방시킨 영웅이자 아르헨티나 국민의 아버지 운동가
1776년에 [3]라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이 설치되었다. 이 영향으로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쓰이게 되었고 로마 카톨릭이 주요 종교가 되었다.
18세기 이후 유럽 철학의 주축이었던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사상과 더불어 미국의 독립선언(1776년)과 프랑스 혁명(1789년)은 당시 식민지 국가에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부추겼다.
1808년 스페인의 국왕 [5]페르난도 7세는 나폴레옹에게 양위했고, 나폴레옹은 [6]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으로 임명하면서 스페인의 권위는 실추된 상태였다.
이러한 시국에서 5월 혁명은 1810년 5월 18일부터 25일까지 [3]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일주일 동안 일어난 독립운동 사건이다. 이 결과 5월 25일 총독 [7]발타자르 히달고 드 시스네로스가 해임되고 첫번째 독립정부 의회인 프리메라 [8]훈타(Primera Junta)가 조직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스페인으로 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독립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10]호세 데 산마르틴이 1814년에서 1817년 사이에 독립 운동을 지휘하면서 점차 독립은 현실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10]산 마르틴을 국가 독립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1816년 7월 9일 [9]투쿠만 의회가 소집되어 스페인으로 부터의 공식적인 독립을 선언했다.
[1] 주앙 디 솔리스(Juan de Solís, 1470년~1516년) : 스페인의 탐험가.유럽인 최초로 우루과이에 상륙했다
[2] 부왕령(viceroyalty) : 본국의 국왕을 대신하는 직책인 부왕에 의해 통치되는 식민지
[3]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Viceroyalty of the Río de la Plata) : 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스페인 제국의 마지막 부왕령. 주로 리오데라플라타 유역(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 브라질 일부 지역 및 칠레 북부 지역 일대)을 중심으로 1776년에 세웠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삼았다
[5] 페르난도 7세(Fernando VII, 1784년~1833년) : 스페인 국왕(재위 : 1808년, 1813년~1833년). 스페인 부르봉 왕조 제7·8대 국왕
[6]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 1768년~1844년)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 나폴리와 시칠리아 국왕(재위 1806년 - 1808년), 스페인 국왕(호세 1세 보나파르테,재위 1808년 - 1813년)
[7] 발타자르 히달고 드 시스네로스(Baltasar Hidalgo de Cisneros, 1756년~1829년) :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마지막 총독
[8] 훈타(junta) : '모임','위원희'를 뜻하는 스페인 단어. 20세기 들어 중남미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가 스스로를 '훈타'로 칭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쿠데타로 인한 군사정부를 '훈타'라 부른다
[9] 투쿠만주(Provincia de Tucumán) :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위치한 주
[10] 호세 데 산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1778년~1850년) :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남아메리카를 해방시킨 영웅이자 아르헨티나 국민의 아버지 운동가
1521년에 [1]아즈텍 문명이 스페인의 정복자 [2]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정복당한후 300여 년의 기간 동안 멕시코는 스페인 식민지로 통치되었다.
멕시코는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여 1810년 9월 16일 [3]돌로레스에서 [4]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신부의 외침(일명 돌로레스의 외침, 울부짖음)으로 멕시코 인디오들과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인 [5]메스티조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한다. 1811년 [4]미겔 이달고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6]누에바에스파냐에 전해져 각지에서 항전이 이어졌다.
이달고 신부가 1811년 사망한 이후 [8]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4년간 독립운동은 계속하였으나 1815년 스페인군 소속 사령관인 [7]아구스틴 데이투르비데에게 패배당하고 만다.
독립군을 진압하던 [7]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스페인에 회의를 느끼고 무장투쟁을 하여 1821년 8월 24일 [6]누에바에스파냐의 부왕과 코르도바 조약(Treaty of Córdoba)을 체결하여 멕시코는 독립하였다.
이후 [7]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의회를 구성하고 입헌군주국 헌법을 제정한다. 1822년 5월 19일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스스로 아구스틴 1세(Agustin I)로 칭하면서 멕시코 제국을 성립했다.
[4]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신부의 외침은 멕시코 독립전쟁의 발단이 되어 9월 16일은 멕시코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1] 아즈텍 제국(Aztec Empire, 1248년~1521년): 라틴아메리카의 멕시코 중부 부근에 존재했던 아즈텍인들의 국가
[2]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 1485년~1547년) :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화의 첫 단계를 끊은 식민지 개척자로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3] 돌로레스 이달고(Dolores Hidalgo): 멕시코 중부 과나후아토(Guanajuato)주에 위치한 도시
[4] 미겔 이달고 코스티야(Miguel Hidalgo Costilla, 1753년~1811년) : 멕시코에서 태어난 토착민(크리오요)로서 카톨릭 신부. 멕시코 독립 초기 지도자.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5] 크리오요(스페인어: Crioll), 크리올(영어, Criole) : 본래 유럽인의 자손으로 식민지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보통 유럽계와 현지인의 혼혈을 부르는 말로 쓰인다. 그 무렵 멕시코에는 4개의 인종 집단이 있었다. 원주민인 인디오, 혼혈인 메스티조(Mestizo), 스페인 후손인 크리올, 스페인에서 건너온 백인 페닌슈랄(Peninsular) 등이다
[6] 누에바에스파냐(스페인어: Virreinato de Nueva España) : 북아메리카와 아시아-태평양에 위치한 스페인의 영토 행정 단위. 누에바에스파냐의 영토는 오늘날 미국 남서부, 멕시코, 중앙아메리카(파나마 제외), 카리브 해, 필리핀을 아울렀다.
[7]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 1783년~1824년) : 멕시코의 정치가로 당시 멕시코 독립 전쟁의 지도자이자 멕시코 제1제국의 초대 황제.
[8]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1765년~1815년) : 멕시코의 성직자이며 독립운동가
멕시코는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여 1810년 9월 16일 [3]돌로레스에서 [4]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신부의 외침(일명 돌로레스의 외침, 울부짖음)으로 멕시코 인디오들과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인 [5]메스티조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한다. 1811년 [4]미겔 이달고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6]누에바에스파냐에 전해져 각지에서 항전이 이어졌다.
이달고 신부가 1811년 사망한 이후 [8]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4년간 독립운동은 계속하였으나 1815년 스페인군 소속 사령관인 [7]아구스틴 데이투르비데에게 패배당하고 만다.
독립군을 진압하던 [7]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스페인에 회의를 느끼고 무장투쟁을 하여 1821년 8월 24일 [6]누에바에스파냐의 부왕과 코르도바 조약(Treaty of Córdoba)을 체결하여 멕시코는 독립하였다.
이후 [7]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의회를 구성하고 입헌군주국 헌법을 제정한다. 1822년 5월 19일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스스로 아구스틴 1세(Agustin I)로 칭하면서 멕시코 제국을 성립했다.
[4]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신부의 외침은 멕시코 독립전쟁의 발단이 되어 9월 16일은 멕시코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1] 아즈텍 제국(Aztec Empire, 1248년~1521년): 라틴아메리카의 멕시코 중부 부근에 존재했던 아즈텍인들의 국가
[2]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 1485년~1547년) :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화의 첫 단계를 끊은 식민지 개척자로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3] 돌로레스 이달고(Dolores Hidalgo): 멕시코 중부 과나후아토(Guanajuato)주에 위치한 도시
[4] 미겔 이달고 코스티야(Miguel Hidalgo Costilla, 1753년~1811년) : 멕시코에서 태어난 토착민(크리오요)로서 카톨릭 신부. 멕시코 독립 초기 지도자.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5] 크리오요(스페인어: Crioll), 크리올(영어, Criole) : 본래 유럽인의 자손으로 식민지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보통 유럽계와 현지인의 혼혈을 부르는 말로 쓰인다. 그 무렵 멕시코에는 4개의 인종 집단이 있었다. 원주민인 인디오, 혼혈인 메스티조(Mestizo), 스페인 후손인 크리올, 스페인에서 건너온 백인 페닌슈랄(Peninsular) 등이다
[6] 누에바에스파냐(스페인어: Virreinato de Nueva España) : 북아메리카와 아시아-태평양에 위치한 스페인의 영토 행정 단위. 누에바에스파냐의 영토는 오늘날 미국 남서부, 멕시코, 중앙아메리카(파나마 제외), 카리브 해, 필리핀을 아울렀다.
[7]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 1783년~1824년) : 멕시코의 정치가로 당시 멕시코 독립 전쟁의 지도자이자 멕시코 제1제국의 초대 황제.
[8]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1765년~1815년) : 멕시코의 성직자이며 독립운동가
러다이트 운동은 19세기 초 영국에서 발생한 노동자들의 저항 운동으로, 산업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기술 발전과 기계화의 확산으로 인해 직물 산업 노동자들이 직면한 생계 위협과 실업 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1811년부터 1816년까지 주로 노팅엄셔(Nottinghamshire), 요크셔(Yorkshire), 랭커셔(Lancashire) 등의 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방적기, 직조기와 같은 기계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수공업 기반의 생산 방식을 빠르게 대체했다. 이로 인해 숙련된 직물 노동자들이 노동 시장에서 밀려나거나 임금이 급감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특히 고용주들은 기계 도입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한편, 노동자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노동 조건을 악화시키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불만이 커졌다.
운동의 이름은 전설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네드 러드(Ned Ludd)에서 유래했으며,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며,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한 사건과 관련된 상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러다이트 운동의 주요 특징은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공장과 기계 설비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표시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주로 야간에 활동하며 공장에 침입하여 기계를 부수거나, 이를 제조하는 시설을 공격했다.
운동의 배경에는 단순히 기술 혁신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기술 도입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특히 숙련 노동자의 소외와 저임금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계가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믿었으며, 기계화의 영향을 최소화하거나 철폐하려는 목적으로 이러한 행동을 취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영국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했다. 1812년, 정부는 "기계 파괴법"을 제정하여 기계 파괴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로 규정했고, 군대를 동원하여 운동을 진압했다. 수백 명의 러다이트 운동 참가자들이 체포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당했다. 이러한 영국정부의 강경한 진압으로 인해 러다이트 운동은 1816년경 사실상 종식되었다. 많은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되면서 조직적인 저항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단순히 기술 발전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는, 산업화와 기술 혁신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사회적·경제적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와 기술 도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으며, 이후 노동조합 운동 및 사회적 안전망 강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현대에는 인공지능(AI)과 자동화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며 일자리 감소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러다이트 운동은 기술 혁신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는 기술 발전이 필연적이더라도,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적 공정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방적기, 직조기와 같은 기계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수공업 기반의 생산 방식을 빠르게 대체했다. 이로 인해 숙련된 직물 노동자들이 노동 시장에서 밀려나거나 임금이 급감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특히 고용주들은 기계 도입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한편, 노동자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노동 조건을 악화시키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불만이 커졌다.
운동의 이름은 전설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네드 러드(Ned Ludd)에서 유래했으며,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며,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한 사건과 관련된 상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러다이트 운동의 주요 특징은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공장과 기계 설비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표시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주로 야간에 활동하며 공장에 침입하여 기계를 부수거나, 이를 제조하는 시설을 공격했다.
운동의 배경에는 단순히 기술 혁신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기술 도입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특히 숙련 노동자의 소외와 저임금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계가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믿었으며, 기계화의 영향을 최소화하거나 철폐하려는 목적으로 이러한 행동을 취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영국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했다. 1812년, 정부는 "기계 파괴법"을 제정하여 기계 파괴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로 규정했고, 군대를 동원하여 운동을 진압했다. 수백 명의 러다이트 운동 참가자들이 체포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당했다. 이러한 영국정부의 강경한 진압으로 인해 러다이트 운동은 1816년경 사실상 종식되었다. 많은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되면서 조직적인 저항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단순히 기술 발전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는, 산업화와 기술 혁신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사회적·경제적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와 기술 도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으며, 이후 노동조합 운동 및 사회적 안전망 강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현대에는 인공지능(AI)과 자동화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며 일자리 감소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러다이트 운동은 기술 혁신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는 기술 발전이 필연적이더라도,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적 공정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1]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인 1811년([2]순조 11년)부터 1812년까지 평안도 지역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으로, 홍경래, 우군칙, 김창시등이 중심으로 농민들의 저항 의식 성장과 [4]서북 지역의 특성이 결합하면서 일어났다. 이 난은 조선 사회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지역 차별, 그리고 지배층의 부패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다.
조선 후기 평안도는 청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중앙 정부로부터 지역적 차별을 받았다. 평안도 출신 사람들은 주요 관직에 오르기 어려웠고, 이는 지역 엘리트 계층과 농민들 사이에서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과도한 세금과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락 양반 출신인 홍경래는 부유한 상인들과 농민들을 규합해 봉기를 계획했다.
1811년 12월, 홍경래는 [3]정주성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켜 영세 농민, 상인, 그리고 소외된 양반 계층을 이끌었다. 그는 평안도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3]정주성을 본거지로 삼아 조선 정부에 대항했다.
봉기 세력은 순식간에 가산, 선천, 곽산 등 평안도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키웠지만, 조직력과 무기 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조선 정부는 중앙군과 관군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정주성에 고립되었고, 결국 1812년 초에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봉기는 진압되었다. 홍경래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처형되거나 사로잡혔으며, 반란에 가담했던 농민들도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홍경래의 난은 단순한 농민 봉기가 아니라, 지역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집단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평가되며, 이후 동학 농민 운동과 같은 다른 저항 운동의 선구적인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1] 홍경래(洪景來, 1780년~1812년 5월 29일) : 조선 후기 몰락 양반 출신으로, 평안도 지역의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하여 1811년 농민 봉기를 주도한 지도자
[2] 순조(純祖, 1790년~1834년) : 조선의 제23대 왕, 재위: 1800년 7월 4일 ~ 1834년 11월 13일 (음력)
[3] 정주성 :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에 있는 성곽
[4] 서북지역 : 평양직할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의 대부분, 량강도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
조선 후기 평안도는 청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중앙 정부로부터 지역적 차별을 받았다. 평안도 출신 사람들은 주요 관직에 오르기 어려웠고, 이는 지역 엘리트 계층과 농민들 사이에서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과도한 세금과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락 양반 출신인 홍경래는 부유한 상인들과 농민들을 규합해 봉기를 계획했다.
1811년 12월, 홍경래는 [3]정주성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켜 영세 농민, 상인, 그리고 소외된 양반 계층을 이끌었다. 그는 평안도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3]정주성을 본거지로 삼아 조선 정부에 대항했다.
봉기 세력은 순식간에 가산, 선천, 곽산 등 평안도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키웠지만, 조직력과 무기 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조선 정부는 중앙군과 관군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정주성에 고립되었고, 결국 1812년 초에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봉기는 진압되었다. 홍경래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처형되거나 사로잡혔으며, 반란에 가담했던 농민들도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홍경래의 난은 단순한 농민 봉기가 아니라, 지역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집단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평가되며, 이후 동학 농민 운동과 같은 다른 저항 운동의 선구적인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1] 홍경래(洪景來, 1780년~1812년 5월 29일) : 조선 후기 몰락 양반 출신으로, 평안도 지역의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하여 1811년 농민 봉기를 주도한 지도자
[2] 순조(純祖, 1790년~1834년) : 조선의 제23대 왕, 재위: 1800년 7월 4일 ~ 1834년 11월 13일 (음력)
[3] 정주성 :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에 있는 성곽
[4] 서북지역 : 평양직할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의 대부분, 량강도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20여 년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하고 유럽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5]발하우스플라츠에서 모여 개최한 회의이다.
빈 회의의 기본목적은 세력균형과 정통주의라는 원칙이다.
세력균형의 원칙은 프랑스의 재침략을 예방할 수 있는 장치 마련과 나폴레옹에 의해 개편된 유럽의 국경선을 어떻게 다시 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정통주의 원칙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말미암아 퇴위한 과거 왕조들을 복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트리아는 회의 주재국으로 [1]메테르니히가, 영국은 [4]로버트 스튜어트, 러시아는 [13]알렉산드르 1세, [3]프로이센은 [14]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참석하였다
주요 현안은 러시아, [3]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등 승전 4대강국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패전국인 프랑스는 [2]탈레랑페리고르의 유능함과 능란한 책략으로 강대국의 일원으로 협상에 참여하였다.
빈 회의는 각국 대표단이 하나둘씩 도착하는 데만 한 달여를 소비한 끝에 11월에 들어서야 공식개회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더디고 느린 진행이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틈새마다 축제와 연회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참가국이 많이 크고 작은 90개 왕국과 52개 공국, 교황령등이 참가했으나 전체 회의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4대 강국과 패전국인 프랑스는 연일 머리를 맞댔지만 모두가 만족할 방안이 없었다. 각 국의 영토와 이권을 둘러싼 각국의 대립과 갈등으로 회의가 지속되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무너지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으나 민심을 얻지 못했다. 1815년 3월초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서 파리에 다시 입성했고 루이 18세는 벨기에로 도피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지지부진했던 각국들의 회의는 속도가 붙었다. 예상치 못한 나폴레옹의 재등장은 오히려 꼬여만 가던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타결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열강들을 비롯한 각국은 [12]워털루 전투를 열흘 남짓 앞두고 위기감에 한 마음 한 뜻으로 타협하여, 마침내 합의 사항들을 121개 조항과 17개 부속규정으로 이루어진 '최종의정서’, 이른바 '빈 조약'을 1815년 6월 9일에 공포했다.
빈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유럽의 체제를 빈 체제라 부른다.
최종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러시아는 바르샤바 대공국의 대부분과 핀란드 영토를 차지한다.
② 프로이센은 작센의 북부와 [6]바르샤바 공국의 일부인 [7]포젠지역과 라인란트, [8]베스트팔렌, 단치히를 차지한다.
③ 옛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인 38개의 공국으로 이루어진 독일연방을 구성한다. 연방의 의장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맡는다.
④ 네덜란드와 [9]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연합왕국으로 통합한다.
⑤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를 포기하는 대신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지역의 라구사를 차지한다.
⑥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8국위원회(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스웨덴, 포르투갈, 에스파냐)에 의해 인정받는다.
⑦ 하노버 왕국은 라우엔부르크 공국을 덴마크에 내주는 대신 뮌스터 주교령과 프로이센령 동프리지아를 얻는다.
⑧ 바이에른 왕국은 팔라티나 지방, 뷔르츠부르크 공작령의 일부, 프랑크푸르트 공국을 차지하며, [11]헤센 대공국은 [8]베스트팔렌을 [3]프로이센에 내주는 대신 라인-헤센 지역을 차지한다.
⑨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토바고, 모리셔스, 세인트루시아 등 대서양 식민지들을 차지하며, 네덜란드로부터 실론과 케이프 식민지를 얻는다.
⑩ 사르데냐 왕국은 피에몬테, 니스, 사부아, 제노아를 되찾는다.추가로 제노바 공화국을 왕국의 영토로 흡수한다.
⑪ 나폴리 왕국은 부르봉나폴리 왕가의 페르디난도 4세가 복위하며, 시칠리아 왕국을 합병한다.
⑫ 파르마, 모데나, 투스카니아 공국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복귀한다.
[1]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1773년 ~ 1859년) : 합스부르크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교관, 정치가
[2]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1754년~1838년) : 프랑스의 정치가,
[3] 프로이센(Prussia) : 170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한 독일 제국 내의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동북쪽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출발하여 독일 제국 수립의 주역으로 성장한 국가
[4] 로버트 스튜어트(Robert Stewart, 1769년~1822년) : 영국의 정치가·외교관. 흔히 캐슬레이 경(Lord Castlereagh) 혹은 캐슬레이 자작(Viscount Castlereagh)으로 림, 외무상으로 재임(1812년~1822년)하는 동안, 빈 체제 성립에 기여했다
[5] 발하우스플라츠(Ballhausplatz) : 오스트리아의 정치1번지. 현재 현재 오스트리아의 총리 관저
[6] 바르샤바 공국(Duchy of Warsaw) : 1807년부터 1815년까지 지금의 폴란드 지역에 존속했던 국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이 폴란드 지역에 만든 국가
[7] 포젠(Posen) : 독일과 폴란드 두 국가의 역사가 겹치는 지역. 나폴레옹 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로 편입. 현재는 폴란드 지역
[8] 베스트팔렌(Westfalen) : 독일의 서부 지역 중 하나.
[9]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Austrian Netherlands) : 합스부르크 제국의 남네덜란드로 현재의 벨기에
[10] 라구사 공화국(Respublica Ragusina) : 현재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역에 14세기부터 1808년까지 이어졌던 공화국. 수도 라구사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 해당. 나폴레옹전쟁으로 1808년에 멸망
[11] 헤센 대공국(Grand Duchy of Hesse) : 1806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서부의 대공국. 오늘날 독일의 헤센 주 지역을 구성
[12]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 1815년 6월 18일 오늘날의 벨기에 워털루 인근에서 벌어진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의 대프랑스 연합군 간의 벌어진 전투. 이 전투로 나폴레옹은 완전히 종결되고,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은 종식되었다
[13]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 of Russia, 1777년~1825년) : 러시아 제국의 황제(재위 1801년 3월 23일 ~ 1825년 12월 1일). 로마노프 왕조의 10대 황제
[14]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ederick William III of Prussia, 1770년~1840년) : 프로이센의 제5대 국왕(재위 1797년 11월 16일~1840년 6월 7일)
빈 회의의 기본목적은 세력균형과 정통주의라는 원칙이다.
세력균형의 원칙은 프랑스의 재침략을 예방할 수 있는 장치 마련과 나폴레옹에 의해 개편된 유럽의 국경선을 어떻게 다시 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정통주의 원칙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말미암아 퇴위한 과거 왕조들을 복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트리아는 회의 주재국으로 [1]메테르니히가, 영국은 [4]로버트 스튜어트, 러시아는 [13]알렉산드르 1세, [3]프로이센은 [14]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참석하였다
주요 현안은 러시아, [3]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등 승전 4대강국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패전국인 프랑스는 [2]탈레랑페리고르의 유능함과 능란한 책략으로 강대국의 일원으로 협상에 참여하였다.
빈 회의는 각국 대표단이 하나둘씩 도착하는 데만 한 달여를 소비한 끝에 11월에 들어서야 공식개회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더디고 느린 진행이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틈새마다 축제와 연회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참가국이 많이 크고 작은 90개 왕국과 52개 공국, 교황령등이 참가했으나 전체 회의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4대 강국과 패전국인 프랑스는 연일 머리를 맞댔지만 모두가 만족할 방안이 없었다. 각 국의 영토와 이권을 둘러싼 각국의 대립과 갈등으로 회의가 지속되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무너지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으나 민심을 얻지 못했다. 1815년 3월초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서 파리에 다시 입성했고 루이 18세는 벨기에로 도피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지지부진했던 각국들의 회의는 속도가 붙었다. 예상치 못한 나폴레옹의 재등장은 오히려 꼬여만 가던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타결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열강들을 비롯한 각국은 [12]워털루 전투를 열흘 남짓 앞두고 위기감에 한 마음 한 뜻으로 타협하여, 마침내 합의 사항들을 121개 조항과 17개 부속규정으로 이루어진 '최종의정서’, 이른바 '빈 조약'을 1815년 6월 9일에 공포했다.
빈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유럽의 체제를 빈 체제라 부른다.
최종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러시아는 바르샤바 대공국의 대부분과 핀란드 영토를 차지한다.
② 프로이센은 작센의 북부와 [6]바르샤바 공국의 일부인 [7]포젠지역과 라인란트, [8]베스트팔렌, 단치히를 차지한다.
③ 옛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인 38개의 공국으로 이루어진 독일연방을 구성한다. 연방의 의장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맡는다.
④ 네덜란드와 [9]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연합왕국으로 통합한다.
⑤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를 포기하는 대신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지역의 라구사를 차지한다.
⑥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8국위원회(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스웨덴, 포르투갈, 에스파냐)에 의해 인정받는다.
⑦ 하노버 왕국은 라우엔부르크 공국을 덴마크에 내주는 대신 뮌스터 주교령과 프로이센령 동프리지아를 얻는다.
⑧ 바이에른 왕국은 팔라티나 지방, 뷔르츠부르크 공작령의 일부, 프랑크푸르트 공국을 차지하며, [11]헤센 대공국은 [8]베스트팔렌을 [3]프로이센에 내주는 대신 라인-헤센 지역을 차지한다.
⑨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토바고, 모리셔스, 세인트루시아 등 대서양 식민지들을 차지하며, 네덜란드로부터 실론과 케이프 식민지를 얻는다.
⑩ 사르데냐 왕국은 피에몬테, 니스, 사부아, 제노아를 되찾는다.추가로 제노바 공화국을 왕국의 영토로 흡수한다.
⑪ 나폴리 왕국은 부르봉나폴리 왕가의 페르디난도 4세가 복위하며, 시칠리아 왕국을 합병한다.
⑫ 파르마, 모데나, 투스카니아 공국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복귀한다.
[1]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1773년 ~ 1859년) : 합스부르크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교관, 정치가
[2]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1754년~1838년) : 프랑스의 정치가,
[3] 프로이센(Prussia) : 170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한 독일 제국 내의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동북쪽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출발하여 독일 제국 수립의 주역으로 성장한 국가
[4] 로버트 스튜어트(Robert Stewart, 1769년~1822년) : 영국의 정치가·외교관. 흔히 캐슬레이 경(Lord Castlereagh) 혹은 캐슬레이 자작(Viscount Castlereagh)으로 림, 외무상으로 재임(1812년~1822년)하는 동안, 빈 체제 성립에 기여했다
[5] 발하우스플라츠(Ballhausplatz) : 오스트리아의 정치1번지. 현재 현재 오스트리아의 총리 관저
[6] 바르샤바 공국(Duchy of Warsaw) : 1807년부터 1815년까지 지금의 폴란드 지역에 존속했던 국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이 폴란드 지역에 만든 국가
[7] 포젠(Posen) : 독일과 폴란드 두 국가의 역사가 겹치는 지역. 나폴레옹 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로 편입. 현재는 폴란드 지역
[8] 베스트팔렌(Westfalen) : 독일의 서부 지역 중 하나.
[9]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Austrian Netherlands) : 합스부르크 제국의 남네덜란드로 현재의 벨기에
[10] 라구사 공화국(Respublica Ragusina) : 현재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역에 14세기부터 1808년까지 이어졌던 공화국. 수도 라구사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 해당. 나폴레옹전쟁으로 1808년에 멸망
[11] 헤센 대공국(Grand Duchy of Hesse) : 1806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서부의 대공국. 오늘날 독일의 헤센 주 지역을 구성
[12]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 1815년 6월 18일 오늘날의 벨기에 워털루 인근에서 벌어진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의 대프랑스 연합군 간의 벌어진 전투. 이 전투로 나폴레옹은 완전히 종결되고,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은 종식되었다
[13]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 of Russia, 1777년~1825년) : 러시아 제국의 황제(재위 1801년 3월 23일 ~ 1825년 12월 1일). 로마노프 왕조의 10대 황제
[14]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ederick William III of Prussia, 1770년~1840년) : 프로이센의 제5대 국왕(재위 1797년 11월 16일~1840년 6월 7일)
알제리 전쟁(Algerian war)이라고도 한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 이후 바르바리의 해적들의 미국과 유럽의 상선에 대한 해적 행위는 멈췄다. 통행료를 납부하던 관습을 끝내고 원할하게 이 지역을 통과했다.
하지만 1812년 미국-영국 전쟁으로 국력이 내부에 쏠리면서 북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졌다.
바르바리 국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과 유럽 상선에 대한 해적 행위를 다시 시작하여 선원들을 나포하여 몸값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내 1815년 2월 미국-영국 전쟁이 끝나고 미국 의회는 3월에 미 해군 파견을 승인했다. 2개의 전투대대를 구성하여 전쟁준비에 나섰다.
윌리엄 베인브리지 함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보스텅 항구로, 스티븐 디케이터 함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뉴욕 항으로 집결했다. 디케이터의 전대가 먼저 준비를 마치고 5월 20일에 출항하여 6월 15일 지브롤터를 지났다.
6월 17일 스티븐 디케이터 함대는 지중해로 이동중에 알제리 전함인 메슈다(Meshuda)호를 만나 바로 공격하였고 나포하였다. 이어 이틀후에 파로스 곶 해안에서 알제리의 에스테디호(Estedio)호도 전투 끝에 나포했다.
6월말 알제리 항구에 도착한 미국은 당시 알제리 파샤인 데이 오마르(Omar Agha)와 협상에 들어갔다.
도시를 파괴하겠다는 위협으로 인질석방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미국의 조건에 알제리의 파샤는 받아들였다. 7월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나포한 '메슈다(Meshuda)호와 에스테디호(Estedio)호는 돌려주었으며 미국의 인질은 돌아왔고 미국의 상선은 더 이상 통행료를 납부하지 않아도 됐다.
* 오스만 제국 :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고대 그리스에서 아시아라고 불렸던 지방으로서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하는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 터키제국, 오스만튀르크라고도 불린다
* 바르바리국가 :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는 트리폴리, 알제리, 튀니스의 3개 나라를 합쳐 부르는 명칭
* 바르바리(Barbary) : 유럽에서 베르베르인(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이 살던 지역을 부르던 말. 특히 아프리카의 북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국가인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해안 지역을 말한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 파로스 곳(Cape Palos) : 스페인의 남부 지중해와 접한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있는 곳
* 트리폴리(Tripoli) : 리비아의 수도
* 튀니스(Tunis) : 튀니지의 수도
* 스티븐 디케이터(Stephen Decatur, 1779년~1820년) : 미국의 군인으로 해군 준장. 바르바리 전쟁과 미영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미국 해군 사상 가장 어린 나이인 25세에 대령(Captain)의 계급으로 승진하였으며 국가적 영웅으로 기리고 있다
* 파샤 : 오스만 제국의 최고위층 귀족에게 주어진 호칭. 주로 장군이나 지방 총독에게 주어졌다. 영국의 경(lord)과 비슷하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 이후 바르바리의 해적들의 미국과 유럽의 상선에 대한 해적 행위는 멈췄다. 통행료를 납부하던 관습을 끝내고 원할하게 이 지역을 통과했다.
하지만 1812년 미국-영국 전쟁으로 국력이 내부에 쏠리면서 북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졌다.
바르바리 국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과 유럽 상선에 대한 해적 행위를 다시 시작하여 선원들을 나포하여 몸값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내 1815년 2월 미국-영국 전쟁이 끝나고 미국 의회는 3월에 미 해군 파견을 승인했다. 2개의 전투대대를 구성하여 전쟁준비에 나섰다.
윌리엄 베인브리지 함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보스텅 항구로, 스티븐 디케이터 함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뉴욕 항으로 집결했다. 디케이터의 전대가 먼저 준비를 마치고 5월 20일에 출항하여 6월 15일 지브롤터를 지났다.
6월 17일 스티븐 디케이터 함대는 지중해로 이동중에 알제리 전함인 메슈다(Meshuda)호를 만나 바로 공격하였고 나포하였다. 이어 이틀후에 파로스 곶 해안에서 알제리의 에스테디호(Estedio)호도 전투 끝에 나포했다.
6월말 알제리 항구에 도착한 미국은 당시 알제리 파샤인 데이 오마르(Omar Agha)와 협상에 들어갔다.
도시를 파괴하겠다는 위협으로 인질석방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미국의 조건에 알제리의 파샤는 받아들였다. 7월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나포한 '메슈다(Meshuda)호와 에스테디호(Estedio)호는 돌려주었으며 미국의 인질은 돌아왔고 미국의 상선은 더 이상 통행료를 납부하지 않아도 됐다.
* 오스만 제국 :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고대 그리스에서 아시아라고 불렸던 지방으로서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하는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 터키제국, 오스만튀르크라고도 불린다
* 바르바리국가 :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는 트리폴리, 알제리, 튀니스의 3개 나라를 합쳐 부르는 명칭
* 바르바리(Barbary) : 유럽에서 베르베르인(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이 살던 지역을 부르던 말. 특히 아프리카의 북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국가인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해안 지역을 말한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 파로스 곳(Cape Palos) : 스페인의 남부 지중해와 접한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있는 곳
* 트리폴리(Tripoli) : 리비아의 수도
* 튀니스(Tunis) : 튀니지의 수도
* 스티븐 디케이터(Stephen Decatur, 1779년~1820년) : 미국의 군인으로 해군 준장. 바르바리 전쟁과 미영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미국 해군 사상 가장 어린 나이인 25세에 대령(Captain)의 계급으로 승진하였으며 국가적 영웅으로 기리고 있다
* 파샤 : 오스만 제국의 최고위층 귀족에게 주어진 호칭. 주로 장군이나 지방 총독에게 주어졌다. 영국의 경(lord)과 비슷하다
워털루 전투는 1803년부터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 최후의 전투이며, 이전투에서 프랑스가 패하면서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은 끝나게 된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네덜란드(당시 브뤼셀은 네덜란드 소속이었다)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싸운 전투이며, 이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추방되었던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복귀하였으나)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프랑스 제1제국 또한 붕괴되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년~1821년) :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다
* 프로이센(Kingdom of Prussia) : 유럽 동북부와 중부(중앙유럽)지방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자 해당 지역에 존재했던 나라의 국호.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한 국가
* 워털루(Waterloo) : 벨기에 동남부의 지명. 수도 브뤼셀에서 동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지역에 위치
* 웰링턴 공작(Duke of Wellington) : 영국의 귀족 작위. 초대 공작(1814년)의 자손들이 상속받으며 현재는 제9대(2014년~) 공작으로 아서 찰스 발레리언 웰즐리이다
*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 1769년~1852년) : 제1대 웰링턴 공작. 군인출신으로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치가로 활동하여 총리를 역임했으며, 이후 영국 육군 총사령관이 되기도 하였다.
*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1742년~1819년) :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육군원수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네덜란드(당시 브뤼셀은 네덜란드 소속이었다)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싸운 전투이며, 이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추방되었던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복귀하였으나)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프랑스 제1제국 또한 붕괴되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년~1821년) :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다
* 프로이센(Kingdom of Prussia) : 유럽 동북부와 중부(중앙유럽)지방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자 해당 지역에 존재했던 나라의 국호.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한 국가
* 워털루(Waterloo) : 벨기에 동남부의 지명. 수도 브뤼셀에서 동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지역에 위치
* 웰링턴 공작(Duke of Wellington) : 영국의 귀족 작위. 초대 공작(1814년)의 자손들이 상속받으며 현재는 제9대(2014년~) 공작으로 아서 찰스 발레리언 웰즐리이다
*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 1769년~1852년) : 제1대 웰링턴 공작. 군인출신으로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치가로 활동하여 총리를 역임했으며, 이후 영국 육군 총사령관이 되기도 하였다.
*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1742년~1819년) :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육군원수
그리스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민족적·종교적·문화적으로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데 대한 그리스인의 반감과 오스만 제국 투르크의 가중되는 여러 가지 압력이 독립에의 의지를 강하게 했다.
1821년 3월 6일 [1]필리케 헤타이리아의 지도자인 [2]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3]몰다비아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1821년 6월 19일 도나우 강 북편의 드러거샤니 전투(Battle of Dragashani)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패했다. 그는 체포되었고 감금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봉기에 호응하여 [4]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 그리스, 마케도니아 등의 그리스 각 지역에서 연달아 봉기가 일어나면서 그리스 독립전쟁은 오히려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821년 3월 25일 [4]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본격적인 봉기가 시작되었다. 10월 5일 [5]데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주도인 [6]트리폴리를 함락시켰다. 이 때문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봉기가 처음 일어난 3월 23일이 오늘날 그리스의 독립기념일로 지정되었다.
그리스 중부에서 오스만군은 알라마나 전투(Battle of Alamana, 1821년 4월 22일)에서 그리스군을 패배시켰다. 그리고 페로폰네소스 반도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라이바 인 전투(Battle of Gravia Inn, 1821년 5월 8일)에서 일격을 당하면서 오스만군은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하였다. 이 전투는 그리스 독립의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821년의 8월 25일, 바실리카 전투(Battle of Vasilika)의 승리는 중부 그리스의 오스만 군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1822년 1월 1일 공화제를 근간으로 하는 그리스 헌법을 채택하고 1월 13일 그리스 제1공화국이 출범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822년부터 1824년까지 3차례에 걸쳐 공격을 하였지만 육지와 바다에서 그리스를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 총독인 [7]무함마드 알리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사이 그리스 제1공화국은 내분에 휩싸였다. 중앙 그리스와 지역 정부간의 내전상태에 빠졌다. 1차, 2차 내전이 일어나는 등 그리스는 사분오열하고 있었다.
오스만의 도움을 수락한 [7]무함마드 알리는 아들 [8]이브라힘 파샤에게 원정대를 맡겨 그리스에 파병하였다. [8]이브라힘 파샤이집트 함대는 1825년 2월 24일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하여 서부 지역을 장악하여 그리스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빈 체제의 원칙에 따라 그리스 독립전쟁을 불간섭의 원칙을 내세우며 관망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리스가 불리하게 진행되자 그리스를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리스 독립전쟁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인 대립이기도 하였다. 동방정교회의 그리스인과 이슬람교 무슬림 사이의 학살이 서로 자행되었다. 특히 당시에는 고대 그리스 문화를 동경하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유행했다.
전황은 계속하여 오스만-이집트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어 오스만군은 1826년 4월 중앙 그리스의 [9]미솔링기가 함락시켰고 1826년 8월에 아테네 중심가를, 1827년 6월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까지 점령했다.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3개국은 1827년 7월 6일 [10]런던조약을 체결하고 오스만 제국에게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도록 하는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이를 거부하고 결국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서쪽의 나바리노 만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유럽연합함대와 오스만-이집트 연합함대 사이에 해전이 벌어졌다. 일명 나바리노 해전(Battle of Navarino, 1827년 10월 20일)해전이다. 결과는 유럽 연합함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오스만-이집트 함대는 궤멸되었다. 이 해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그리스 독립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오스만 제국은 보복으로 러시아 상선의 [12]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를 거부하자 이를 명분으로 1828년 4월 오스만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제10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주력부대가 러시아 국경지대인 왈라키아와 몰도비아로 옮기자 그 틈을 이용하여 그리스 독립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장악하였다.
러시아는 초기에 오스만군에 고전하였으나 1829년 8월 [11]에디르네를 함락시켰다. 오스만 제국은 패배하였고 결과로 1829년 9월 14일 에디르아노플 조약(Treaty of Adrianople)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자유로운 항해권 획득, 오스만 제국내에서 러시아의 통상권 획득, 세르비아에 대한 자치를 보장받았으며 전쟁배상금의 지불이 완료될 때까지 러시아 군을 [13]왈라키아와 [3]몰다비아에 주둔하였다.
1828년 8월 30일 프랑스 군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하면서 이집트 군마저 몰아내어 그리스 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넘어 본토의 아테네와 테베까지 회복하였다.
독립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난 전투는 [14]아티키주의 북쪽에서 일어난 페트라 전투(1829년 8월 12일)였다. 이 전투는 그리스군이 정규군으로 승리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오스만 제국과 그리스가 전장에서 처음으로 교섭한 날이기도 하다.
1828년 11월 런던 의정서(London Protocol)를 채택하여 영국, 러시아, 프랑스 3개국이 그리스를 오스만 제국하의 자치국을 성립되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가 발칸반도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스가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독립시키기로 하여 1830년 2월 새로운 런던의정서를 통해 그리스는 독립국임이 선언되었다.
1832년 7월에 '이스탄불 조약(Treaty of Istanbul)'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1] 필리케 헤타이리아(Filiki Eteria) : 1814년 오데사(현,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그리스 상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2]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Alexander Ypsilantis, 1792년~1828년) : 1820년 헤타이리아 필리케의 지도자가 되어 1821년에 앞장서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그리스 독립의 실마리가 되었다. 8년 뒤인 1829년에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였다
[3] 몰다비아(Moldavia) : 현재의 루마니아와 몰도바, 우크라이나 사이에 걸쳐 있었던 공국이며 1859년에 왈라키아 공국과 동군연합을 구성하였다
[4] 펠로폰네소스(Peloponnesian) 반도 : 그리스 남부의 반도. 펠로폰네소스주, 서그리스주, 아티키주 3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5]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Theodoros Kolokotronis, 1770년~1843년) : 그리스의 장군이자 독립전쟁의 지도자
[6] 트리폴리(Tripoli) 또는 트리폴리스 :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부에 위치한 하고 있으며 펠로폰네소스주의 주도
[7]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of Egypt, 1769년~1849년)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재위 ,1805년 5월 17일 ~ 1848년 3월 2일). 이집트 마지막 왕조인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창시자
[8]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 of Egypt, 1789년~1848년) :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집트의 총독(재위, 1848년 3월 2일~1848년 11월 10일)
[9] 메솔롱기(Missolonghi) : 그리스 서부에 위치한 도시.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많은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였던 곳. 1824년에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전한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이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메솔롱기에는 조지 고든 바이런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0] 런던조약(Treaty of London) :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이 1827년 7월 6일 체결한 조약.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에게 1821년 3월 6일 그리스의 독립으로 지속되었던 전쟁을 중단하는 것을 요구했다
[11] 에디르네(Edirne) : 터키의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 그리스와 불가리아 국경근처의 도시로 터키의 에디르네 주의 주도. 영어 아드리아노플로 알려져 있다
[12]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ait) : 에게 해와 내해인 마르마라 해를 잇는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과 함께 터키를 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13] 왈라키아(Wallachia) : 오스만 제국의 제후국. 1859년에 몰다비아 공국과 동군연합이 이루어졌으며, 1861년에 국호를 루마니아 공국으로 바꾸었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이 되었다. 현재 루마니아 남부 일대
[14] 아티키주(Attica) : 에게 해와 접한 반도 지대로서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주
1821년 3월 6일 [1]필리케 헤타이리아의 지도자인 [2]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3]몰다비아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1821년 6월 19일 도나우 강 북편의 드러거샤니 전투(Battle of Dragashani)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패했다. 그는 체포되었고 감금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봉기에 호응하여 [4]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 그리스, 마케도니아 등의 그리스 각 지역에서 연달아 봉기가 일어나면서 그리스 독립전쟁은 오히려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821년 3월 25일 [4]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본격적인 봉기가 시작되었다. 10월 5일 [5]데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주도인 [6]트리폴리를 함락시켰다. 이 때문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봉기가 처음 일어난 3월 23일이 오늘날 그리스의 독립기념일로 지정되었다.
그리스 중부에서 오스만군은 알라마나 전투(Battle of Alamana, 1821년 4월 22일)에서 그리스군을 패배시켰다. 그리고 페로폰네소스 반도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라이바 인 전투(Battle of Gravia Inn, 1821년 5월 8일)에서 일격을 당하면서 오스만군은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하였다. 이 전투는 그리스 독립의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821년의 8월 25일, 바실리카 전투(Battle of Vasilika)의 승리는 중부 그리스의 오스만 군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1822년 1월 1일 공화제를 근간으로 하는 그리스 헌법을 채택하고 1월 13일 그리스 제1공화국이 출범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822년부터 1824년까지 3차례에 걸쳐 공격을 하였지만 육지와 바다에서 그리스를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 총독인 [7]무함마드 알리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사이 그리스 제1공화국은 내분에 휩싸였다. 중앙 그리스와 지역 정부간의 내전상태에 빠졌다. 1차, 2차 내전이 일어나는 등 그리스는 사분오열하고 있었다.
오스만의 도움을 수락한 [7]무함마드 알리는 아들 [8]이브라힘 파샤에게 원정대를 맡겨 그리스에 파병하였다. [8]이브라힘 파샤이집트 함대는 1825년 2월 24일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하여 서부 지역을 장악하여 그리스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빈 체제의 원칙에 따라 그리스 독립전쟁을 불간섭의 원칙을 내세우며 관망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리스가 불리하게 진행되자 그리스를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리스 독립전쟁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인 대립이기도 하였다. 동방정교회의 그리스인과 이슬람교 무슬림 사이의 학살이 서로 자행되었다. 특히 당시에는 고대 그리스 문화를 동경하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유행했다.
전황은 계속하여 오스만-이집트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어 오스만군은 1826년 4월 중앙 그리스의 [9]미솔링기가 함락시켰고 1826년 8월에 아테네 중심가를, 1827년 6월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까지 점령했다.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3개국은 1827년 7월 6일 [10]런던조약을 체결하고 오스만 제국에게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도록 하는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이를 거부하고 결국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서쪽의 나바리노 만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유럽연합함대와 오스만-이집트 연합함대 사이에 해전이 벌어졌다. 일명 나바리노 해전(Battle of Navarino, 1827년 10월 20일)해전이다. 결과는 유럽 연합함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오스만-이집트 함대는 궤멸되었다. 이 해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그리스 독립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오스만 제국은 보복으로 러시아 상선의 [12]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를 거부하자 이를 명분으로 1828년 4월 오스만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제10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주력부대가 러시아 국경지대인 왈라키아와 몰도비아로 옮기자 그 틈을 이용하여 그리스 독립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장악하였다.
러시아는 초기에 오스만군에 고전하였으나 1829년 8월 [11]에디르네를 함락시켰다. 오스만 제국은 패배하였고 결과로 1829년 9월 14일 에디르아노플 조약(Treaty of Adrianople)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자유로운 항해권 획득, 오스만 제국내에서 러시아의 통상권 획득, 세르비아에 대한 자치를 보장받았으며 전쟁배상금의 지불이 완료될 때까지 러시아 군을 [13]왈라키아와 [3]몰다비아에 주둔하였다.
1828년 8월 30일 프랑스 군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하면서 이집트 군마저 몰아내어 그리스 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넘어 본토의 아테네와 테베까지 회복하였다.
독립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난 전투는 [14]아티키주의 북쪽에서 일어난 페트라 전투(1829년 8월 12일)였다. 이 전투는 그리스군이 정규군으로 승리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오스만 제국과 그리스가 전장에서 처음으로 교섭한 날이기도 하다.
1828년 11월 런던 의정서(London Protocol)를 채택하여 영국, 러시아, 프랑스 3개국이 그리스를 오스만 제국하의 자치국을 성립되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가 발칸반도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스가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독립시키기로 하여 1830년 2월 새로운 런던의정서를 통해 그리스는 독립국임이 선언되었다.
1832년 7월에 '이스탄불 조약(Treaty of Istanbul)'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1] 필리케 헤타이리아(Filiki Eteria) : 1814년 오데사(현,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그리스 상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2]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Alexander Ypsilantis, 1792년~1828년) : 1820년 헤타이리아 필리케의 지도자가 되어 1821년에 앞장서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그리스 독립의 실마리가 되었다. 8년 뒤인 1829년에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였다
[3] 몰다비아(Moldavia) : 현재의 루마니아와 몰도바, 우크라이나 사이에 걸쳐 있었던 공국이며 1859년에 왈라키아 공국과 동군연합을 구성하였다
[4] 펠로폰네소스(Peloponnesian) 반도 : 그리스 남부의 반도. 펠로폰네소스주, 서그리스주, 아티키주 3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5]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Theodoros Kolokotronis, 1770년~1843년) : 그리스의 장군이자 독립전쟁의 지도자
[6] 트리폴리(Tripoli) 또는 트리폴리스 :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부에 위치한 하고 있으며 펠로폰네소스주의 주도
[7]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of Egypt, 1769년~1849년)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재위 ,1805년 5월 17일 ~ 1848년 3월 2일). 이집트 마지막 왕조인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창시자
[8]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 of Egypt, 1789년~1848년) :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집트의 총독(재위, 1848년 3월 2일~1848년 11월 10일)
[9] 메솔롱기(Missolonghi) : 그리스 서부에 위치한 도시.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많은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였던 곳. 1824년에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전한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이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메솔롱기에는 조지 고든 바이런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0] 런던조약(Treaty of London) :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이 1827년 7월 6일 체결한 조약.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에게 1821년 3월 6일 그리스의 독립으로 지속되었던 전쟁을 중단하는 것을 요구했다
[11] 에디르네(Edirne) : 터키의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 그리스와 불가리아 국경근처의 도시로 터키의 에디르네 주의 주도. 영어 아드리아노플로 알려져 있다
[12]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ait) : 에게 해와 내해인 마르마라 해를 잇는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과 함께 터키를 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13] 왈라키아(Wallachia) : 오스만 제국의 제후국. 1859년에 몰다비아 공국과 동군연합이 이루어졌으며, 1861년에 국호를 루마니아 공국으로 바꾸었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이 되었다. 현재 루마니아 남부 일대
[14] 아티키주(Attica) : 에게 해와 접한 반도 지대로서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주
미국 제5대 대통령 [1]제임스 먼로가 의회 연설을 통해 발표한 외교 정책 원칙으로, 미국이 유럽 열강의 아메리카 대륙 내 간섭을 거부하고 독립된 외교 노선을 취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선언은 유럽의 식민지 확장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으며, 유럽 국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신생 독립국에 간섭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동시에 미국도 유럽에서 일어나는 정치나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상호 불간섭의 원칙을 천명했다.
[1]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758년 4월 28일 ~ 1831년 7월 4일) : 미국의 제5대 대통령(재임 1817년 3월 4일~1825년 3월 4일)
이 선언은 유럽의 식민지 확장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으며, 유럽 국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신생 독립국에 간섭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동시에 미국도 유럽에서 일어나는 정치나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상호 불간섭의 원칙을 천명했다.
[1]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758년 4월 28일 ~ 1831년 7월 4일) : 미국의 제5대 대통령(재임 1817년 3월 4일~1825년 3월 4일)
영국과 [1]미얀마가 싸운 전쟁으로 영국이 승리해 미얀마의 아라칸, 아삼, 마니푸르, 테나세림 지역이 영국령으로 병합되었다. 이후 2차, 3차의 전쟁이후 1885년 미얀마는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버마 [4]꼰바웅 왕조의 [5]보도파야 국왕은 굉장히 호전적인 인물로 서쪽으로 국경을 확장하며 1784년에는 [16]아라칸 지역을, 1814년에는 [3]마니푸르 지역을, 1817년에는 [2]아삼 지역을 편입시켰다.
아삼 왕조의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국왕은 버마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군대를 강화하고 버마의 추가침략을 막기 이하여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보도파야 국왕의 뒤를 이은 [6]바기도 국왕은 아삼을 다시 찾기위하여 1821년 2월에 2만명의 군대를 [2]아삼지역으로 파견하여 1년 반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1822년 7월에 아삼 왕국에 승리하였다.
패배한 아삼 왕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는 영국 영토인 [18]벵골로 도망쳤다. [19]캘커타에 기반을 둔 영국은 마니푸르, 아삼, 아라칸 지역에서 도주한 반란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버마왕국은 1822년까지 [3]마니푸르와 [2]아삼지역의 정복으로 인하여 영국령 인도 사이에 긴 국경이 생겼다. 영국은 일방적으로 [7]카차르(Cachar)와 자인티아(Jaintia)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언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1824년 1월 버마의 [9]마하 반둘라는 반군을 몰아내기 위해 카차르(Cachar)에 병력을 보냈고, 1824년 3월 5일 [16]아라칸(Arakan)의 국경 충돌 이후 제1차 버마와 영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군은 험난한 지형에서 싸우는 대신 1824년 5월 11일 인도의 [11]세포이를 포함한 1만명의 병력이 남부에 위치한 [13]양곤항구에 입성하여 기습공격했다.
영국군은 양곤의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내부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군은 공격을 개시했고 버마의 [6]바기도 국왕은 이에 맞서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9]마하 반둘라는 서부전선에서 급히 철수하여 [13]양곤 외곽에 집결하여 3만명의 병력을 지휘하였다. [9]마하 반둘라는 초기의 전투에서 몇 차례 승리했다.
11월 30일 마하 반둘라는 영국군 진지에 정면 공격을 하였으나 훨씬 뛰어난 무기를 갖춘 영국군에 패하여 3만명중 7천명만 남았다.
마하 반둘라는 양곤에서 멀지 않은 이라와디 삼각주(Irrawaddy delta)에 있는 작은 마을인 다누부(Danubyu)에 있는 후방기지로 후퇴했다.
1825년 3월부터 영국군은 다누뷰에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4월 1일 마하 반둘라는 전사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버마 [4]꼰바웅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영국은 기세를 이어 아라칸, 테나세림까지 공략했으며, 영국함대는 버마를 관통하는 이라와디강을 거슬러 당시 버마의 수도 [12]아마라푸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지휘관을 잃은 버마군은 기세를 잃었고, 영국군이 내놓은 강화조건에 1826년 [6]바기도 왕은 굴복하고 말았다.
2월 26일 굴욕적인 내용의 [15]얀다보 조약이 체결되면서 1차 영국-미얀마 전쟁은 끝을 맺는다.
오늘날의 미얀마인 버마는 [9]마하 반둘라가 확장한 영토인 아라칸, 테나세림, 아쌈, 마니푸르를 영국에 넘겼다. 또한 전쟁배상금으로 1백만 파운드의 거금을 물어내야 했다.
이후 영국은 두 차례 더 전쟁을 벌였고, 1885년 결국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 미얀마 : 미얀마는 135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며, 버마족이 68%를 차지하고 있다
[2] 아삼주(Assam)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3] 마니푸르주(Manipur)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주도는 임팔(Imphal)
[4] 꼰바웅 왕조(Konbaung dynasty, 1752년~1885년)) :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연이어 패전하며 완전히 멸망한다
[5] 보도파야 국왕(Bodawpaya, 1745년~1819년) : 꼰바웅 왕조의 제6대 국왕(재임, 1782년 2월 11일~1819년 6월 5일)
[6] 바기도 국왕(Bagyidaw,1784년~1846년) : 꼰바웅 왕조의 제7대 국왕(1819년 6월 5일~1837년 4월 15일)
[7] 카차르(Cachar) : 인도 아삼주에 있는 지역
[8] 치타공(Chittagong) :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로, 치타공 주의 주도. 방글라데시 동부의 거점도시
[9] 마하 반둘라(Maha Bandula, 1782년~1825년) : 왕립 버마군의 총사령관. 오늘날 미얀마의 국가 영웅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 : 미얀마 양곤에 있는 높이 112.17m인 황금 탑. 미얀마의 랜드마크이자 미얀마 불교도들의 정신적 지주
[11] 세포이(sepoy) : 19세기의 인도 용병. 무슬림과 힌두교도 등으로 구성된 인도인으로 구성된 영국군소속의 용병
[12] 아마라뿌라(Amarapura) : 꼰바옹 왕조의 수도
[13] 양곤(Yangon) : 미얀마의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랑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랑군의 명칭을 양곤으로 바꾸었다
[14] 다누부(Danubyu) : 미얀마의 양곤에서 약80마일 떨어진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15] 얀다보 조약(Treaty of Yandabo, 1826년 2월 24일) : 수도 아바(Ava)에서 불과 80킬로미터(50마일) 떨어진 얀다보(Yandabo) 마을에서 맺어졌다
[16] 아라칸 왕국(The Kingdom of Arakan, 1429년~1784년) : 미얀마의 라카인주 아라칸족의 왕국. 라카인 왕국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므락우
[17] 아라칸족(Arakan) : 미얀마의 라카인주와 인도, 방글라데시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미얀마 인구의 약 5.53%를 구성하고 있다
[18] 벵골(Bengal) : 현재 인도의 서벵골주, 방글라데시(동벵골)로 나뉘어 있다. 서벵골은 힌두교, 동벵골은 이슬람교를 많이 믿는다
[19] 캘커타(Calcutta) : 인도 동부에 있는 도시이자 인도 서벵골 주의 주도. 2001년 1월 도시의 이름을 캘커타(Calcutta)에서 콜카타(Kolkata)로 공식 변경하였다
버마 [4]꼰바웅 왕조의 [5]보도파야 국왕은 굉장히 호전적인 인물로 서쪽으로 국경을 확장하며 1784년에는 [16]아라칸 지역을, 1814년에는 [3]마니푸르 지역을, 1817년에는 [2]아삼 지역을 편입시켰다.
아삼 왕조의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국왕은 버마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군대를 강화하고 버마의 추가침략을 막기 이하여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보도파야 국왕의 뒤를 이은 [6]바기도 국왕은 아삼을 다시 찾기위하여 1821년 2월에 2만명의 군대를 [2]아삼지역으로 파견하여 1년 반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1822년 7월에 아삼 왕국에 승리하였다.
패배한 아삼 왕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는 영국 영토인 [18]벵골로 도망쳤다. [19]캘커타에 기반을 둔 영국은 마니푸르, 아삼, 아라칸 지역에서 도주한 반란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버마왕국은 1822년까지 [3]마니푸르와 [2]아삼지역의 정복으로 인하여 영국령 인도 사이에 긴 국경이 생겼다. 영국은 일방적으로 [7]카차르(Cachar)와 자인티아(Jaintia)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언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1824년 1월 버마의 [9]마하 반둘라는 반군을 몰아내기 위해 카차르(Cachar)에 병력을 보냈고, 1824년 3월 5일 [16]아라칸(Arakan)의 국경 충돌 이후 제1차 버마와 영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군은 험난한 지형에서 싸우는 대신 1824년 5월 11일 인도의 [11]세포이를 포함한 1만명의 병력이 남부에 위치한 [13]양곤항구에 입성하여 기습공격했다.
영국군은 양곤의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내부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군은 공격을 개시했고 버마의 [6]바기도 국왕은 이에 맞서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9]마하 반둘라는 서부전선에서 급히 철수하여 [13]양곤 외곽에 집결하여 3만명의 병력을 지휘하였다. [9]마하 반둘라는 초기의 전투에서 몇 차례 승리했다.
11월 30일 마하 반둘라는 영국군 진지에 정면 공격을 하였으나 훨씬 뛰어난 무기를 갖춘 영국군에 패하여 3만명중 7천명만 남았다.
마하 반둘라는 양곤에서 멀지 않은 이라와디 삼각주(Irrawaddy delta)에 있는 작은 마을인 다누부(Danubyu)에 있는 후방기지로 후퇴했다.
1825년 3월부터 영국군은 다누뷰에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4월 1일 마하 반둘라는 전사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버마 [4]꼰바웅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영국은 기세를 이어 아라칸, 테나세림까지 공략했으며, 영국함대는 버마를 관통하는 이라와디강을 거슬러 당시 버마의 수도 [12]아마라푸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지휘관을 잃은 버마군은 기세를 잃었고, 영국군이 내놓은 강화조건에 1826년 [6]바기도 왕은 굴복하고 말았다.
2월 26일 굴욕적인 내용의 [15]얀다보 조약이 체결되면서 1차 영국-미얀마 전쟁은 끝을 맺는다.
오늘날의 미얀마인 버마는 [9]마하 반둘라가 확장한 영토인 아라칸, 테나세림, 아쌈, 마니푸르를 영국에 넘겼다. 또한 전쟁배상금으로 1백만 파운드의 거금을 물어내야 했다.
이후 영국은 두 차례 더 전쟁을 벌였고, 1885년 결국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 미얀마 : 미얀마는 135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며, 버마족이 68%를 차지하고 있다
[2] 아삼주(Assam)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3] 마니푸르주(Manipur)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주도는 임팔(Imphal)
[4] 꼰바웅 왕조(Konbaung dynasty, 1752년~1885년)) :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연이어 패전하며 완전히 멸망한다
[5] 보도파야 국왕(Bodawpaya, 1745년~1819년) : 꼰바웅 왕조의 제6대 국왕(재임, 1782년 2월 11일~1819년 6월 5일)
[6] 바기도 국왕(Bagyidaw,1784년~1846년) : 꼰바웅 왕조의 제7대 국왕(1819년 6월 5일~1837년 4월 15일)
[7] 카차르(Cachar) : 인도 아삼주에 있는 지역
[8] 치타공(Chittagong) :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로, 치타공 주의 주도. 방글라데시 동부의 거점도시
[9] 마하 반둘라(Maha Bandula, 1782년~1825년) : 왕립 버마군의 총사령관. 오늘날 미얀마의 국가 영웅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 : 미얀마 양곤에 있는 높이 112.17m인 황금 탑. 미얀마의 랜드마크이자 미얀마 불교도들의 정신적 지주
[11] 세포이(sepoy) : 19세기의 인도 용병. 무슬림과 힌두교도 등으로 구성된 인도인으로 구성된 영국군소속의 용병
[12] 아마라뿌라(Amarapura) : 꼰바옹 왕조의 수도
[13] 양곤(Yangon) : 미얀마의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랑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랑군의 명칭을 양곤으로 바꾸었다
[14] 다누부(Danubyu) : 미얀마의 양곤에서 약80마일 떨어진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15] 얀다보 조약(Treaty of Yandabo, 1826년 2월 24일) : 수도 아바(Ava)에서 불과 80킬로미터(50마일) 떨어진 얀다보(Yandabo) 마을에서 맺어졌다
[16] 아라칸 왕국(The Kingdom of Arakan, 1429년~1784년) : 미얀마의 라카인주 아라칸족의 왕국. 라카인 왕국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므락우
[17] 아라칸족(Arakan) : 미얀마의 라카인주와 인도, 방글라데시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미얀마 인구의 약 5.53%를 구성하고 있다
[18] 벵골(Bengal) : 현재 인도의 서벵골주, 방글라데시(동벵골)로 나뉘어 있다. 서벵골은 힌두교, 동벵골은 이슬람교를 많이 믿는다
[19] 캘커타(Calcutta) : 인도 동부에 있는 도시이자 인도 서벵골 주의 주도. 2001년 1월 도시의 이름을 캘커타(Calcutta)에서 콜카타(Kolkata)로 공식 변경하였다
자와전쟁 [2]디포네고로 전쟁이라고도 한다.
1824년 체결된 런던조약에 따라 영국으로부터 인도네시아 지배권을 승인 받았으며, 완강히 저항하던 [3]자와 섬의 토착왕국들을 무력으로 굴복시켰다. 네덜란드의 식민지배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822년 [1]욕야카르타 술탄국의 술탄 하멩구부워노 4세가 수상한 죽음(독살 소문)으로 젖먹이 아들이 술탄 하멩쿠부워노 5세로 즉위하자 섭정자리를 놓고 정국이 혼란으로 치달았다. 더군다나 1822년 [4]므라피 화산이 폭발하고 더욱 큰 혼란의 시대가 도래되었다. 이는 네덜란드 식민지배의 빌미가 되었다.
술탄의 자리를 사양한 왕위계승자 [2]디파느가라 왕자는 민중의 지지를 크게 얻게 되었으며 네덜란드와 대항하기 위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1]욕야카르타를 중심으로 중부 및 동부 자와에 광범위하게 확대된 이 반식민 저항운동은 많은 왕족과 귀족들로 부터 지지를 얻고 또한 무슬림 사회의 폭넓은 후원을 등에 업고 전개되었다.
[2]디파느가라의 세력은 네덜란드인을 포함한 유럽인에 대한 공격이 확대되어 갔고, 1826년 말까지 중부 자와 내륙 지방의 대부분을 통제하게 되었다. 1826년까지 네덜란드도 자와에 투입한 군사력을 보강하였으나,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는 디파느가라군을 맞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네덜란드는 1827년부터 전면적인 진압 작전에 들어갔다. 병력을 증강하여 강화된 방어력을 토대로 기동성을 높이며 주요 거점들을 점령하면서 1828년부터 전세가 역전되어 디파느가라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심각한 타격을 입은 디파느가라군은 1930년 네덜란드와 협상을 시작했다. 1830년 3월 디파느가라는 협상장으로 나갔다가 네덜란드의 배신으로 3월 28일 체포되면서, 사실상 디파느가라를 구심점으로 한 자와전쟁도 끝났다.
체포된 디파느가라는 감금되어 유배생활에서 사망하였다.
이 전쟁은 자와 지역에 엄청난 인명 피해를 일으켰다. 6천 명 가량의 네덜란드 군인과 유럽인이 사망하였으며, 7천 명 이상의 디파느가라를 따르는 자와군이 죽었다.
자와 전쟁후 자와 섬 전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를 확보하게된 네덜란드는 강제재배 제도를 도입하여 장와의 토지와 노동력을 본격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했다
[1] 욕야카르타(Yogyakarta) :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 특별주의 주도. 전통적으로 자와 미술의 중심지였으며 바틱, 무용, 연극, 음악, 시, 와양(그림자 연극) 등의 문화가 발달했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중이던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인도네시아의 임시 수도였던 곳이다
[2] 디파느가라(Dipanagara, 1785년~1855년) : 욕야카르타 술탄국의 왕자로, 역대 군주 하멩쿠부워노 3세의 장남이다. 디포네고로(Diponegoro)로도 불린다. 네덜란드에 대한 군사적 반격으로 1825년 ~ 1830년의 디파느가라 전쟁을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 인도네시아의 영웅 중 한 사람이다
[3] 자와(Jawa) :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수도인 자카르타와 반둥, 욕야카르타, 보고르 등 주요 도시들 대부분이 이 섬에 위치해 있다. 영어 이름은 '자바(Java)'이다
[4] 므라피 산(Mount Merapi) : 인도네시아 자와섬에 있는 활화산. 2010년에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 화산 주변에 있는 마을 대부분이 화산재에 묻히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활동이 왕성한 화산으로 알려져 있다
1824년 체결된 런던조약에 따라 영국으로부터 인도네시아 지배권을 승인 받았으며, 완강히 저항하던 [3]자와 섬의 토착왕국들을 무력으로 굴복시켰다. 네덜란드의 식민지배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1822년 [1]욕야카르타 술탄국의 술탄 하멩구부워노 4세가 수상한 죽음(독살 소문)으로 젖먹이 아들이 술탄 하멩쿠부워노 5세로 즉위하자 섭정자리를 놓고 정국이 혼란으로 치달았다. 더군다나 1822년 [4]므라피 화산이 폭발하고 더욱 큰 혼란의 시대가 도래되었다. 이는 네덜란드 식민지배의 빌미가 되었다.
술탄의 자리를 사양한 왕위계승자 [2]디파느가라 왕자는 민중의 지지를 크게 얻게 되었으며 네덜란드와 대항하기 위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1]욕야카르타를 중심으로 중부 및 동부 자와에 광범위하게 확대된 이 반식민 저항운동은 많은 왕족과 귀족들로 부터 지지를 얻고 또한 무슬림 사회의 폭넓은 후원을 등에 업고 전개되었다.
[2]디파느가라의 세력은 네덜란드인을 포함한 유럽인에 대한 공격이 확대되어 갔고, 1826년 말까지 중부 자와 내륙 지방의 대부분을 통제하게 되었다. 1826년까지 네덜란드도 자와에 투입한 군사력을 보강하였으나,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는 디파느가라군을 맞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네덜란드는 1827년부터 전면적인 진압 작전에 들어갔다. 병력을 증강하여 강화된 방어력을 토대로 기동성을 높이며 주요 거점들을 점령하면서 1828년부터 전세가 역전되어 디파느가라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심각한 타격을 입은 디파느가라군은 1930년 네덜란드와 협상을 시작했다. 1830년 3월 디파느가라는 협상장으로 나갔다가 네덜란드의 배신으로 3월 28일 체포되면서, 사실상 디파느가라를 구심점으로 한 자와전쟁도 끝났다.
체포된 디파느가라는 감금되어 유배생활에서 사망하였다.
이 전쟁은 자와 지역에 엄청난 인명 피해를 일으켰다. 6천 명 가량의 네덜란드 군인과 유럽인이 사망하였으며, 7천 명 이상의 디파느가라를 따르는 자와군이 죽었다.
자와 전쟁후 자와 섬 전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를 확보하게된 네덜란드는 강제재배 제도를 도입하여 장와의 토지와 노동력을 본격적으로 착취하기 시작했다
[1] 욕야카르타(Yogyakarta) :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 특별주의 주도. 전통적으로 자와 미술의 중심지였으며 바틱, 무용, 연극, 음악, 시, 와양(그림자 연극) 등의 문화가 발달했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중이던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인도네시아의 임시 수도였던 곳이다
[2] 디파느가라(Dipanagara, 1785년~1855년) : 욕야카르타 술탄국의 왕자로, 역대 군주 하멩쿠부워노 3세의 장남이다. 디포네고로(Diponegoro)로도 불린다. 네덜란드에 대한 군사적 반격으로 1825년 ~ 1830년의 디파느가라 전쟁을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 인도네시아의 영웅 중 한 사람이다
[3] 자와(Jawa) :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수도인 자카르타와 반둥, 욕야카르타, 보고르 등 주요 도시들 대부분이 이 섬에 위치해 있다. 영어 이름은 '자바(Java)'이다
[4] 므라피 산(Mount Merapi) : 인도네시아 자와섬에 있는 활화산. 2010년에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 화산 주변에 있는 마을 대부분이 화산재에 묻히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활동이 왕성한 화산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우루과이 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이루고 있다. 우루과이 강 서쪽은 아르헨티나, 동쪽은 우루과이가 위치하고 있다.
스페인 점령시대 당시 우루과이강 동쪽에 위치한 오리엔탈 주(오늘날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에 속해 있었는데, 1811년에 [1]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는 오리엔탈 주의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아르헨티나와 연합하여 스페인을 물리친 후에 아르헨티나에서 독립을 위하여 싸웠다. 당시 아르헨티나에 속한 주였으며 중앙집권을 꾀하는 아르헨티나 정부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1816년 8월 포르투갈과 브라질 제국 연합이 오리엔탈 주를 침략하였다. 포르투갈 연합군은 1817년 1월 몬테비데오(Montevideo)를 점령했으며 3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오리엔탈 주를 점령한 브라질 제국은 '시스플라티나 주'로 합병시켰다.
몬테비데오(Montevideo)는 아르헨티나를 지배하던 스페인이 브라질을 지배하던 포르투갈에 대항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요새에서 출발한 도시이며 오늘날 우루과이의 수도이다.
1822년 9월 7일 브라질 제국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자 [2]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이끄는 동방의 33인을 중심으로 아르헨티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825년 8월 25일 브라질 제국으로 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로 인하여 브라질 제국과 아르헨티나가 충돌해 500여일간의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일어났다.
어느 한쪽의 세력이 훨씬 더 커지는 것을 염려한 영국과 프랑스가 중재에 나섰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계속되는 전쟁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고,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1828년 몬테비데오 조약'을 맺으면서 신생 독립국으로 '우루과이 공화국'이 탄생되었다.
신생 독립국 우루과이는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워준 아르헨티나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국의 국기에 아르헨티나의 국기에 있는 5월의 태양을 모양만 변형해서 사용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이후로 영원한 우방국이다. 이에 반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앙숙관계가 되었다.
[1]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JJosé Gervasio Artigas, 1764년~1850년) : 우루과이 독립의 아버지
[2]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Juan Antonio Lavalleja, 1784년~1853년) : 우루과이의 정치인이자 혁명가
스페인 점령시대 당시 우루과이강 동쪽에 위치한 오리엔탈 주(오늘날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에 속해 있었는데, 1811년에 [1]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는 오리엔탈 주의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아르헨티나와 연합하여 스페인을 물리친 후에 아르헨티나에서 독립을 위하여 싸웠다. 당시 아르헨티나에 속한 주였으며 중앙집권을 꾀하는 아르헨티나 정부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1816년 8월 포르투갈과 브라질 제국 연합이 오리엔탈 주를 침략하였다. 포르투갈 연합군은 1817년 1월 몬테비데오(Montevideo)를 점령했으며 3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오리엔탈 주를 점령한 브라질 제국은 '시스플라티나 주'로 합병시켰다.
몬테비데오(Montevideo)는 아르헨티나를 지배하던 스페인이 브라질을 지배하던 포르투갈에 대항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요새에서 출발한 도시이며 오늘날 우루과이의 수도이다.
1822년 9월 7일 브라질 제국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자 [2]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이끄는 동방의 33인을 중심으로 아르헨티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825년 8월 25일 브라질 제국으로 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로 인하여 브라질 제국과 아르헨티나가 충돌해 500여일간의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일어났다.
어느 한쪽의 세력이 훨씬 더 커지는 것을 염려한 영국과 프랑스가 중재에 나섰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계속되는 전쟁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고,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1828년 몬테비데오 조약'을 맺으면서 신생 독립국으로 '우루과이 공화국'이 탄생되었다.
신생 독립국 우루과이는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워준 아르헨티나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국의 국기에 아르헨티나의 국기에 있는 5월의 태양을 모양만 변형해서 사용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이후로 영원한 우방국이다. 이에 반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앙숙관계가 되었다.
[1]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JJosé Gervasio Artigas, 1764년~1850년) : 우루과이 독립의 아버지
[2]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Juan Antonio Lavalleja, 1784년~1853년) : 우루과이의 정치인이자 혁명가
프랑의 7월 혁명의 영향과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종교절 갈등등으로 1830년 8월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남부 지역이었던 벨기에가 독립하기 위해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벨기에 혁명군은 빠르게 브뤼셀 지역의 정부 청사들을 점령해나갔고 9월말 사흘에 걸친 시가전에서 네덜란드 군은 패퇴하고 만다. 10월 4일 마침내 벨기에는 공식적으로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해 12월 런던에 모인 유럽 열강(영국, 프랑스 왕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등)들은 공식적으로 독립을 승인하면서 벨기에라는 국가가 최초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이후 벨기에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레오폴트를 레오폴드 1세로 국왕으로 추대하였으며 레오폴드 1세의 즉위일인 7월 21일은 벨기에의 독립 기념일이다.
* 빌럼 1세(William I of the Netherlands, 1772년~1843년) :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초대 국왕.
* 레오폴드 1세(Leopold I, 1790년~1865년) : 벨기에의 초대 국왕. 재위: 1831년~1865년. 작센코부르크고타(House of Saxe‑Coburg and Gotha)가문 출신
* 브뤼셀(Brussels) : 벨기에의 수도
벨기에 혁명군은 빠르게 브뤼셀 지역의 정부 청사들을 점령해나갔고 9월말 사흘에 걸친 시가전에서 네덜란드 군은 패퇴하고 만다. 10월 4일 마침내 벨기에는 공식적으로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해 12월 런던에 모인 유럽 열강(영국, 프랑스 왕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등)들은 공식적으로 독립을 승인하면서 벨기에라는 국가가 최초로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이후 벨기에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레오폴트를 레오폴드 1세로 국왕으로 추대하였으며 레오폴드 1세의 즉위일인 7월 21일은 벨기에의 독립 기념일이다.
* 빌럼 1세(William I of the Netherlands, 1772년~1843년) :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초대 국왕.
* 레오폴드 1세(Leopold I, 1790년~1865년) : 벨기에의 초대 국왕. 재위: 1831년~1865년. 작센코부르크고타(House of Saxe‑Coburg and Gotha)가문 출신
* 브뤼셀(Brussels) : 벨기에의 수도
1835년 10월 2일부터 1836년 4월 21일까지 멕시코와 멕시코의 한 주였던 코아우일라 테하스 주 중 테하스지역이 분리 독립을 목표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텍사스 독립 전쟁이라고도 한다.
미국은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백인 정착자들이 서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텍사스는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한 멕시코의 땅이 된 이후에도 서부로 향하는 이민은 계속되었다.
멕시코는 자국의 국교인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를 믿는 이주민자들과 스페인어를 쓰고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조건으로 정착을 인정받았으며 이후로 이민은 계속되어 텍사스 인구의 90%가 미국인 이주민들이었다. 결국 미국 이민자들과 멕시코의 잦은 충돌로 멕시코 대통령인 산타 안나는 이주민의 철수를 명령하였으나 이주민은 이에 반발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계속되는 전투에서 산타 안나는 텍사스 이민자군에 포로가 되면서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 코아우일라 테하스(Coahuila Tejas) : 1824년 멕시코 헌법으로 설립된 멕시코 북동부에 위치한 주였다. 텍사스 혁명과 멕시코-미국 전쟁으로 현재는 코아우일라는 멕시코 코아우일라주로 테하스는 미국의 텍사스로 분리되었다.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 1794년~1876년) : 멕시코 제1공화국의 정치 지도자. 22년여의 기간동안 10차례 멕시코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미국은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백인 정착자들이 서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텍사스는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한 멕시코의 땅이 된 이후에도 서부로 향하는 이민은 계속되었다.
멕시코는 자국의 국교인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를 믿는 이주민자들과 스페인어를 쓰고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조건으로 정착을 인정받았으며 이후로 이민은 계속되어 텍사스 인구의 90%가 미국인 이주민들이었다. 결국 미국 이민자들과 멕시코의 잦은 충돌로 멕시코 대통령인 산타 안나는 이주민의 철수를 명령하였으나 이주민은 이에 반발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계속되는 전투에서 산타 안나는 텍사스 이민자군에 포로가 되면서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 코아우일라 테하스(Coahuila Tejas) : 1824년 멕시코 헌법으로 설립된 멕시코 북동부에 위치한 주였다. 텍사스 혁명과 멕시코-미국 전쟁으로 현재는 코아우일라는 멕시코 코아우일라주로 테하스는 미국의 텍사스로 분리되었다.
*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 1794년~1876년) : 멕시코 제1공화국의 정치 지도자. 22년여의 기간동안 10차례 멕시코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세기 영국에서 노동 계층을 중심으로 전개된 정치 개혁 운동으로, 당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노동자들이 정치적 권리를 얻고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해 벌였던 중요한 운동이다. 이 운동의 이름은 1838년에 발표된 인민헌장(People’s Charter)에서 유래했으며, 헌장은 영국 의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6가지 주요 항목을 포함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빠른 경제적 성장과 함께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었으며, 노동 계층은 투표권과 정치 참여에서 배제된 상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차티스트들은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며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고 서명 운동과 집회를 통해 인민헌장의 내용을 홍보했다. 인민헌장에서 요구한 6대 개혁안은 다음과 같다.
(1) 보통선거권: 모든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 부여.
(2) 비밀투표제: 투표 과정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비밀투표를 실시.
(3) 의회 정기선거: 의회의 연간 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정기적으로 반영.
(4) 평등한 선거구제: 지역 간 인구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공평한 선거구 설정.
(5) 국회의원 자격 제한 폐지: 모든 계층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도록 자격 제한 철폐.
(6) 국회의원 보수 지급: 경제적 여건에 상관없이 누구나 국회의원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보수 지급.
차티스트 운동은 1830~1850년대에 걸쳐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청원 운동과 의회 제출을 진행했으나, 당대 영국 정부와 의회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노동 계층의 불만과 정치적 의식을 높였으며, 전국적인 단결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차티스트들은 시위를 통해 평화적인 방법과 폭력적인 방법을 병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반영한다. 차티스트 운동이 즉각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선거법 개정과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 계층의 권리 신장을 위한 민주주의 투쟁의 선구적 사례로 기억되며,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빠른 경제적 성장과 함께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었으며, 노동 계층은 투표권과 정치 참여에서 배제된 상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차티스트들은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며 전국적인 조직을 결성하고 서명 운동과 집회를 통해 인민헌장의 내용을 홍보했다. 인민헌장에서 요구한 6대 개혁안은 다음과 같다.
(1) 보통선거권: 모든 성인 남성에게 선거권 부여.
(2) 비밀투표제: 투표 과정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비밀투표를 실시.
(3) 의회 정기선거: 의회의 연간 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정기적으로 반영.
(4) 평등한 선거구제: 지역 간 인구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공평한 선거구 설정.
(5) 국회의원 자격 제한 폐지: 모든 계층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도록 자격 제한 철폐.
(6) 국회의원 보수 지급: 경제적 여건에 상관없이 누구나 국회의원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보수 지급.
차티스트 운동은 1830~1850년대에 걸쳐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청원 운동과 의회 제출을 진행했으나, 당대 영국 정부와 의회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노동 계층의 불만과 정치적 의식을 높였으며, 전국적인 단결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차티스트들은 시위를 통해 평화적인 방법과 폭력적인 방법을 병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반영한다. 차티스트 운동이 즉각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19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선거법 개정과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 계층의 권리 신장을 위한 민주주의 투쟁의 선구적 사례로 기억되며,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조선 후기 1839년(헌종 5년)에 발생한 두 번째 천주교 박해사건이다.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벽파인 풍양조씨가 시파 안동김씨로 부터 권력을 탈취하기 위하여 일으켰다.
프랑스인 선교사 앵베르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및 조선신자들이 처형되었다.
* 헌종(憲宗, 1827년~1849년) : 조선의 제24대 왕, 재위:1834년~1849년
* 벽파(僻派) :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반대한 정파
* 시파(時派) :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세력
*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Laurent-Joseph-Marius Imbert, 1797년~1839) : 로마 카톨릭교회의 사제,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중 한명. 한국어명은 범세형
*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1803~1839) : 한국교회사 최초의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중 한명
* 자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 Chastan, 1803~1839) : 프랑스인 사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명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벽파인 풍양조씨가 시파 안동김씨로 부터 권력을 탈취하기 위하여 일으켰다.
프랑스인 선교사 앵베르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및 조선신자들이 처형되었다.
* 헌종(憲宗, 1827년~1849년) : 조선의 제24대 왕, 재위:1834년~1849년
* 벽파(僻派) :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면서 정조의 정책에 반대한 정파
* 시파(時派) :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세력
* 로랑조제프마리위스 앵베르(Laurent-Joseph-Marius Imbert, 1797년~1839) : 로마 카톨릭교회의 사제, 천주교 조선교구 2대 교구장,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중 한명. 한국어명은 범세형
*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1803~1839) : 한국교회사 최초의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중 한명
* 자크 오노레 샤스탕(Jacques Honor Chastan, 1803~1839) : 프랑스인 사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명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와 영국의 완충지역이 되었다.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러시아 제국의 부동항 진출(남하정책)을 막기위해 영국이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과 일어난 전쟁으로 영국에 의하여 아프카니스탄 국왕 도스트 모하마드는 쫓겨나고 샤 슈자가 왕위에 복위되었다.
그러나 샤 슈자의 통치력과 영국인의 방탕한 행태로 아프가니스탄은 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에 대한 아프가니스탄인의 적개심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면서 대대적으로 저항하게 되었다. 결국 샤 슈자는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주둔하고 있었던 영국군도 전멸되었다. 살아남아 영국으로 되돌아간 영국군은 단 한명이었다고 한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으로 부터 해방되었으며 '도스트 무함마드'가 다시 왕위로 복위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
36년후인 1878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공격했다. 이를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고 한다.
* 도스트 모하마드(Dost Mohammad, 1793년~1863년) : 아프가니스탄 바라크자이 왕조(아프카니스탄 아미르국 - Emirate of Afghanistan, 1826 ~ 1919)의 창시자. 아미르국은 1919년 이후 아프카니스탄 왕국(1919년~1973년)이라 한다
* 샤 슈자(Shah Shujah) : 바라크자이 왕조의 전 왕조였던 두라니 왕조에서 1803년경에 재위했으나 6년만에 쿠데타로 쫒겨났던 왕으로 영국에 의해 1839년 다시 왕으로 복위한다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러시아 제국의 부동항 진출(남하정책)을 막기위해 영국이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과 일어난 전쟁으로 영국에 의하여 아프카니스탄 국왕 도스트 모하마드는 쫓겨나고 샤 슈자가 왕위에 복위되었다.
그러나 샤 슈자의 통치력과 영국인의 방탕한 행태로 아프가니스탄은 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에 대한 아프가니스탄인의 적개심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면서 대대적으로 저항하게 되었다. 결국 샤 슈자는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주둔하고 있었던 영국군도 전멸되었다. 살아남아 영국으로 되돌아간 영국군은 단 한명이었다고 한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으로 부터 해방되었으며 '도스트 무함마드'가 다시 왕위로 복위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
36년후인 1878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다시 공격했다. 이를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고 한다.
* 도스트 모하마드(Dost Mohammad, 1793년~1863년) : 아프가니스탄 바라크자이 왕조(아프카니스탄 아미르국 - Emirate of Afghanistan, 1826 ~ 1919)의 창시자. 아미르국은 1919년 이후 아프카니스탄 왕국(1919년~1973년)이라 한다
* 샤 슈자(Shah Shujah) : 바라크자이 왕조의 전 왕조였던 두라니 왕조에서 1803년경에 재위했으나 6년만에 쿠데타로 쫒겨났던 왕으로 영국에 의해 1839년 다시 왕으로 복위한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한후 청나라(중국)과 무역을 시작하였다. 청나라의 최대수출품은 차였고 영국의 주요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였다.
영국은 자국의 수출품에 비하여 청나라의 차가 큰 인기를 끌자 무역적자가 지속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청나라에 몰래 팔기시작하였다.
마침 청나라의 정치가 혼란해지고 백성들이 힘들어하자 아편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아편의 독성과 해악성에 대한 경각심이 미비하던 당시에 아편의 환각효과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상황은 청나라가 해결해야 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청나라 조정은 대대적인 아편단속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영국은 청나라의 이러한 아편 단속에 반발하여 제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영국의 최신식 대포와 군함앞에 청나라는 패배하고 결과로 난징조약을 체결하였다.
난징조약으로 홍콩 섬이 영국 통치로 넘어갔고, 청나라의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가 강제적으로 개항되었다.
* 아편(opium) : 양귀비의 덜 익은 꽃봉오리와 꽃씨에서 채취되는 향정신성 마약
영국은 자국의 수출품에 비하여 청나라의 차가 큰 인기를 끌자 무역적자가 지속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하여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청나라에 몰래 팔기시작하였다.
마침 청나라의 정치가 혼란해지고 백성들이 힘들어하자 아편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아편의 독성과 해악성에 대한 경각심이 미비하던 당시에 아편의 환각효과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상황은 청나라가 해결해야 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청나라 조정은 대대적인 아편단속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영국은 청나라의 이러한 아편 단속에 반발하여 제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영국의 최신식 대포와 군함앞에 청나라는 패배하고 결과로 난징조약을 체결하였다.
난징조약으로 홍콩 섬이 영국 통치로 넘어갔고, 청나라의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가 강제적으로 개항되었다.
* 아편(opium) : 양귀비의 덜 익은 꽃봉오리와 꽃씨에서 채취되는 향정신성 마약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가 영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홍콩 섬이 영국 통치로 넘어갔고, 청나라의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가 강제적으로 개항되었다.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열강의 반(半)식민지적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홍콩 섬이 영국 통치로 넘어갔고, 청나라의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가 강제적으로 개항되었다.
청나라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 열강의 반(半)식민지적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다.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100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다수가 해외로 집단이주하였다.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Irish Potato Femine)이라고도 한다.
1801년 연합법에 의해 아일랜드는 영국에 합병되었다.
1843년 북아메리카에서 시작된 감자역병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흰 곰팡이가 생겨 잎파리는 물로 땅속의 씨감자까지 죽게 만들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출신의 대지주가 농지를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격차 심했으며 생산되는 농작물은 영국으로 수탈당하는 구조였다. 감자가 유일한 식량이었던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무려 5년간 이어진 감자역병으로 아일랜드인 10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더구나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이질병등의 전염병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아사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결국 생존을 위해 아일랜드를 떠나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는데,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던 20여만명이 열악한 환경으로 배 안에서 사망하였다. 아메리카에 정착해서도 현실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존 이민자, 토착민들과는 다른 언어, 다른 종교를 믿는 이방인이었으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배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함께 매장된 공동묘지가 있다.
대기근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0년대 후반의 아일랜드 인구는 850만 명이었다. 대기근 기간 중에 사망 또는 이주로 인해 전체인구의 약 20%~25% 정도가 줄어들었다.
기근의 주된 원인은 감자 역병 이었으나 그 외에도 영국의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차별정책이 사태가 심각해지도록 만든 또 다른 원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졌으며 독립의 열망이 증가하였다.
감자 역병을 보낸 건 물론 신이었지만, 그것을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잉글랜드인들이다
The almighty indeed sent the potato blight but the english created the famine.
-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 존 미첼(John Mitchel)
1801년 연합법에 의해 아일랜드는 영국에 합병되었다.
1843년 북아메리카에서 시작된 감자역병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흰 곰팡이가 생겨 잎파리는 물로 땅속의 씨감자까지 죽게 만들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출신의 대지주가 농지를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격차 심했으며 생산되는 농작물은 영국으로 수탈당하는 구조였다. 감자가 유일한 식량이었던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무려 5년간 이어진 감자역병으로 아일랜드인 10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더구나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 이질병등의 전염병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아사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결국 생존을 위해 아일랜드를 떠나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이주했는데,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던 20여만명이 열악한 환경으로 배 안에서 사망하였다. 아메리카에 정착해서도 현실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존 이민자, 토착민들과는 다른 언어, 다른 종교를 믿는 이방인이었으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배제는 더욱 심화되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함께 매장된 공동묘지가 있다.
대기근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0년대 후반의 아일랜드 인구는 850만 명이었다. 대기근 기간 중에 사망 또는 이주로 인해 전체인구의 약 20%~25% 정도가 줄어들었다.
기근의 주된 원인은 감자 역병 이었으나 그 외에도 영국의 정치적, 민족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차별정책이 사태가 심각해지도록 만든 또 다른 원인이었다.
이 사건으로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졌으며 독립의 열망이 증가하였다.
감자 역병을 보낸 건 물론 신이었지만, 그것을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잉글랜드인들이다
The almighty indeed sent the potato blight but the english created the famine.
-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 존 미첼(John Mitchel)
멕시코-미국 전쟁은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미국의 서부 확장 정책과 국경 분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미국은 1845년 텍사스를 정식으로 합병했지만, 멕시코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을 [2]리오그란데 강과 [3]누에세스 강 중 어디로 설정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 대통령 [1]제임스 녹스 포크는 서부 영토 확장을 추진하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다.
1845년, 미국은 텍사스를 정식으로 합병했으며, 이는 멕시코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후 포크 대통령은 [5]재커리 테일러 장군을 이끌고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지대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1846년 4월, 미국과 멕시코 군대가 리오그란데 강 근처에서 충돌하였고, 이 사건을 구실로 미국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은 [5]재커리 테일러 장군과 [6]윈필드 스콧 장군을 중심으로 멕시코를 공격했다. 미국군은 [7]팔로 알토 전투, [8]몬테레이 전투, [9]부에나 비스타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며 멕시코 북부를 장악했고, 1847년에는 [10]베라크루스 상륙 작전을 통해 멕시코 동부 해안을 점령한 뒤,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했다. 1847년 9월, 미국군이 멕시코시티를 점령하면서 사실상 전쟁은 끝이 났다.
1848년 2월 2일, [4]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네바다, 유타, 와이오밍, 콜로라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으며, 국경을 리오그란데 강으로 확정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멕시코에 1,500만 달러를 지급하고, 멕시코 정부의 미국인 부채 350만 달러를 탕감해 주었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서부 개척의 기반을 마련하며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할 것인지의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심화되면서 남북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멕시코는 국토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며 심각한 정치·경제적 혼란에 빠졌고, 이는 반미 감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멕시코-미국 전쟁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토 확장의 계기가 되었으며, 오늘날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과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친 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1] 제임스 녹스 포크(James Knox Polk, 1795년~1849년) : 미국의 11대 대통령(임기 : 1845년~1849년)
[2]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약 3,034km 길이의 강으로, 미국의 텍사스주와 멕시코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국경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양국 간 이민 및 수자원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누에세스 강(Nueces River) : 미국 텍사스주 남부를 흐르는 약 507km 길이의 강으로, 리오그란데 강과 함께 미국-멕시코 국경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멕시코는 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으나,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간주하면서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4]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 : 이 조약으로 멕시코는 1500만달러에 대한 대가로 미국에 광대한 토지를 양도했다. 동시에 멕시코의 대미 부채 325만 달러를 탕감했다. 양도된 곳은 현재 텍사스 주, 콜로라도 주,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와이오밍 주의 일부,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유타 주의 전체 면적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은 *리오그란데 강으로 확정했다
[5]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1784년 11월 24일 ~ 1850년 7월 9일) : 미국의 군인이자, 12대 대통령. 임기, 1849년 3월 4일~1850년 7월 9일
[6]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1786년 6월 13일 ~ 1866년 5월 29일) : 미국 육군의 장군, 외교관이자 대통령 후보
[7] 팔로 알토 전투(Battle of Palo Alto, 1846년 5월 8일) : 멕시코-미국 전쟁의 첫 번째 주요 전투로, 미국의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멕시코군을 격파하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전투이다. 미국군의 우수한 포병 전술과 기동력이 승리를 이끌었으며, 이 승리로 미군은 멕시코 북부로 진격할 기반을 마련했다
[8] 몬테레이 전투(Battle of Monterrey, 1846년 9월 21~24일) : 멕시코-미국 전쟁 중 미국의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멕시코의 요새화된 도시 몬테레이를 공격하여 점령한 전투이다. 격렬한 시가전 끝에 미군이 승리했지만, 멕시코군이 무장을 유지한 채 철수하는 조건으로 휴전이 체결되어 논란이 되었다.
[9] 부에나 비스타 전투(Battle of Buena Vista, 1847년 2월 22~23일) : 멕시코-미국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 장군의 멕시코군을 격퇴한 전투이다. 미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지형을 활용한 방어 전략과 강력한 포병 전력으로 승리하며 미국의 멕시코 북부 장악을 확고히 했다.
[10] 베라크루스 상륙 작전(Siege of Veracruz, 1847년 3월 9일~29일) : 미국군이 멕시코 동부 해안의 요새 도시 베라크루스를 포위하고 점령한 작전으로, 멕시코-미국 전쟁 중 최초의 대규모 상륙 작전이었다. 윈필드 스콧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해상 포격과 포위전을 통해 베라크루스를 함락시켰으며, 이를 발판으로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했다
미국은 1845년 텍사스를 정식으로 합병했지만, 멕시코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을 [2]리오그란데 강과 [3]누에세스 강 중 어디로 설정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 대통령 [1]제임스 녹스 포크는 서부 영토 확장을 추진하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다.
1845년, 미국은 텍사스를 정식으로 합병했으며, 이는 멕시코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후 포크 대통령은 [5]재커리 테일러 장군을 이끌고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지대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1846년 4월, 미국과 멕시코 군대가 리오그란데 강 근처에서 충돌하였고, 이 사건을 구실로 미국은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은 [5]재커리 테일러 장군과 [6]윈필드 스콧 장군을 중심으로 멕시코를 공격했다. 미국군은 [7]팔로 알토 전투, [8]몬테레이 전투, [9]부에나 비스타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며 멕시코 북부를 장악했고, 1847년에는 [10]베라크루스 상륙 작전을 통해 멕시코 동부 해안을 점령한 뒤,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했다. 1847년 9월, 미국군이 멕시코시티를 점령하면서 사실상 전쟁은 끝이 났다.
1848년 2월 2일, [4]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미국은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네바다, 유타, 와이오밍, 콜로라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으며, 국경을 리오그란데 강으로 확정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멕시코에 1,500만 달러를 지급하고, 멕시코 정부의 미국인 부채 350만 달러를 탕감해 주었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서부 개척의 기반을 마련하며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할 것인지의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심화되면서 남북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반면, 멕시코는 국토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며 심각한 정치·경제적 혼란에 빠졌고, 이는 반미 감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멕시코-미국 전쟁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토 확장의 계기가 되었으며, 오늘날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과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친 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1] 제임스 녹스 포크(James Knox Polk, 1795년~1849년) : 미국의 11대 대통령(임기 : 1845년~1849년)
[2]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약 3,034km 길이의 강으로, 미국의 텍사스주와 멕시코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국경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양국 간 이민 및 수자원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누에세스 강(Nueces River) : 미국 텍사스주 남부를 흐르는 약 507km 길이의 강으로, 리오그란데 강과 함께 미국-멕시코 국경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멕시코는 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으나,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간주하면서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4]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 : 이 조약으로 멕시코는 1500만달러에 대한 대가로 미국에 광대한 토지를 양도했다. 동시에 멕시코의 대미 부채 325만 달러를 탕감했다. 양도된 곳은 현재 텍사스 주, 콜로라도 주,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와이오밍 주의 일부, 캘리포니아 주, 네바다 주, 유타 주의 전체 면적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은 *리오그란데 강으로 확정했다
[5]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1784년 11월 24일 ~ 1850년 7월 9일) : 미국의 군인이자, 12대 대통령. 임기, 1849년 3월 4일~1850년 7월 9일
[6]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1786년 6월 13일 ~ 1866년 5월 29일) : 미국 육군의 장군, 외교관이자 대통령 후보
[7] 팔로 알토 전투(Battle of Palo Alto, 1846년 5월 8일) : 멕시코-미국 전쟁의 첫 번째 주요 전투로, 미국의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멕시코군을 격파하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전투이다. 미국군의 우수한 포병 전술과 기동력이 승리를 이끌었으며, 이 승리로 미군은 멕시코 북부로 진격할 기반을 마련했다
[8] 몬테레이 전투(Battle of Monterrey, 1846년 9월 21~24일) : 멕시코-미국 전쟁 중 미국의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멕시코의 요새화된 도시 몬테레이를 공격하여 점령한 전투이다. 격렬한 시가전 끝에 미군이 승리했지만, 멕시코군이 무장을 유지한 채 철수하는 조건으로 휴전이 체결되어 논란이 되었다.
[9] 부에나 비스타 전투(Battle of Buena Vista, 1847년 2월 22~23일) : 멕시코-미국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Antonio López de Santa Anna) 장군의 멕시코군을 격퇴한 전투이다. 미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지형을 활용한 방어 전략과 강력한 포병 전력으로 승리하며 미국의 멕시코 북부 장악을 확고히 했다.
[10] 베라크루스 상륙 작전(Siege of Veracruz, 1847년 3월 9일~29일) : 미국군이 멕시코 동부 해안의 요새 도시 베라크루스를 포위하고 점령한 작전으로, 멕시코-미국 전쟁 중 최초의 대규모 상륙 작전이었다. 윈필드 스콧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해상 포격과 포위전을 통해 베라크루스를 함락시켰으며, 이를 발판으로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했다
1846년(헌종 12)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이다. 조선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처형하였다.
* 헌종(憲宗, 1827년~1849년) : 조선의 제24대 왕, 재위:1834년~1849년
* 헌종(憲宗, 1827년~1849년) : 조선의 제24대 왕, 재위:1834년~1849년
몬테레이 전투는 미국-멕시코 전쟁중 벌어진 전투이며, 미국과 멕시코 간의 초기 교전 중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 중 하나이다. 미국의 [3]제임스 녹스 포크 대통령은 멕시코령이었던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를 포함한 서부 지역을 미국 영토로 편입하려 했다.
1846년 4월,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 분쟁이 격화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미국은 [6]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지만, 멕시코는 [7]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하며 미국의 텍사스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미국은 멕시코 북부로 군대를 진격시켰고, 이 과정에서 [4]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멕시코의 [1]몬테레이를 목표로 삼았다.
몬테레이는 멕시코 북부 누에보레온 주의 수도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요새화된 방어 시설과 멕시코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곳을 점령하면 멕시코 북부 전역을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1846년 9월, 미국의 [4]재커리 테일러는 6,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몬테레이를 공격했다. 멕시코군은 약 7,000명이 이를 방어하고 있었다. 멕시코군의 지휘관은 [5]페드로 데 암푸디아였다.
전투는 9월 21일부터 시작되었으며 미국군은 도시 외곽에의 요새화된 방어선을 점령한 뒤 시내로 진격했다. 하지만 멕시코군은 몬테레이의 강력한 요새와 좁은 골목과 건물들을 활용해 격렬한 저항을 하였다. 미국군은 이 과정에서 상당한 사상자를 냈으나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동원했다. 9월 23일, 미국군은 주요 건물을 하나씩 폭파하는 방식으로 돌파하며 시내 중심부로 전진했다. 전투가 지속되자 멕시코군의 [5]페드로 데 암푸디아는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협상을 시도했다.
결국 9월 24일, 양측은 8주 동안 전투를 중단하고 멕시코군이 무기를 가지고 퇴각하는 조건으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몬테레이를 점령했으며 멕시코군은 전투를 중단하고 철수했다.
몬테레이 전투는 미국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를 점령하면서 멕시코 북부 공략의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승리였다. 그러나 재커리 테일러의 휴전 협정으로 워싱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더 강경한 조치를 원했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미국이 중요한 요충지를 확보한 것이었고, 이후 미국군은 멕시코 내륙으로 더 깊이 진격할 수 있었다.
이 전투 이후 미국은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결국 1847년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 점령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몬테레이 전투는 멕시코-미국 전쟁의 전환점 중 하나로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보여주었으며, 시가전 전술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미국 역사에서 재커리 테일러의 명성을 크게 높였으며 그는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1] 몬테레이(Monterrey) : 멕시코 북동부 누에보레온주의 주도로 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및 경제 중심지 중 하나다. 현대적인 도시 인프라와 강력한 제조업 기반을 갖추고 있으며, 교육, 기술, 금융 부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 : 미국의 영토 확장 정책과 텍사스 합병 문제로 발생한 전쟁으로 미국이 승리하며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3] 제임스 녹스 포크(James Knox Polk, 1795년 11월 2일 ~ 1849년 6월 15일) : 미국 11대 대통령. 임기, 1845년 3월 4일~1849년 3월 4일
[4]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1784년 11월 24일 ~ 1850년 7월 9일) : 미국의 군인이자, 12대 대통령. 임기, 1849년 3월 4일~1850년 7월 9일
[5] 페드로 데 암푸디아(Pedro de Ampudia, 1805년 1월 30일 ~ 1868년 8월 7일) : 쿠바 하바나에서 태어나 멕시코의 군인 겸 정치가
[6]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약 3,034km 길이의 강으로, 미국의 텍사스주와 멕시코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국경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양국 간 이민 및 수자원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7] 누에세스 강(Nueces River) : 미국 텍사스주 남부를 흐르는 약 507km 길이의 강으로, 리오그란데 강과 함께 미국-멕시코 국경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멕시코는 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으나,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간주하면서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1846년 4월,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 분쟁이 격화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미국은 [6]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지만, 멕시코는 [7]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하며 미국의 텍사스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미국은 멕시코 북부로 군대를 진격시켰고, 이 과정에서 [4]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멕시코의 [1]몬테레이를 목표로 삼았다.
몬테레이는 멕시코 북부 누에보레온 주의 수도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요새화된 방어 시설과 멕시코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곳을 점령하면 멕시코 북부 전역을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1846년 9월, 미국의 [4]재커리 테일러는 6,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몬테레이를 공격했다. 멕시코군은 약 7,000명이 이를 방어하고 있었다. 멕시코군의 지휘관은 [5]페드로 데 암푸디아였다.
전투는 9월 21일부터 시작되었으며 미국군은 도시 외곽에의 요새화된 방어선을 점령한 뒤 시내로 진격했다. 하지만 멕시코군은 몬테레이의 강력한 요새와 좁은 골목과 건물들을 활용해 격렬한 저항을 하였다. 미국군은 이 과정에서 상당한 사상자를 냈으나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동원했다. 9월 23일, 미국군은 주요 건물을 하나씩 폭파하는 방식으로 돌파하며 시내 중심부로 전진했다. 전투가 지속되자 멕시코군의 [5]페드로 데 암푸디아는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협상을 시도했다.
결국 9월 24일, 양측은 8주 동안 전투를 중단하고 멕시코군이 무기를 가지고 퇴각하는 조건으로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몬테레이를 점령했으며 멕시코군은 전투를 중단하고 철수했다.
몬테레이 전투는 미국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를 점령하면서 멕시코 북부 공략의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승리였다. 그러나 재커리 테일러의 휴전 협정으로 워싱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더 강경한 조치를 원했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미국이 중요한 요충지를 확보한 것이었고, 이후 미국군은 멕시코 내륙으로 더 깊이 진격할 수 있었다.
이 전투 이후 미국은 멕시코시티까지 진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결국 1847년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 점령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몬테레이 전투는 멕시코-미국 전쟁의 전환점 중 하나로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보여주었으며, 시가전 전술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미국 역사에서 재커리 테일러의 명성을 크게 높였으며 그는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1] 몬테레이(Monterrey) : 멕시코 북동부 누에보레온주의 주도로 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 및 경제 중심지 중 하나다. 현대적인 도시 인프라와 강력한 제조업 기반을 갖추고 있으며, 교육, 기술, 금융 부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 : 미국의 영토 확장 정책과 텍사스 합병 문제로 발생한 전쟁으로 미국이 승리하며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등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
[3] 제임스 녹스 포크(James Knox Polk, 1795년 11월 2일 ~ 1849년 6월 15일) : 미국 11대 대통령. 임기, 1845년 3월 4일~1849년 3월 4일
[4]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 1784년 11월 24일 ~ 1850년 7월 9일) : 미국의 군인이자, 12대 대통령. 임기, 1849년 3월 4일~1850년 7월 9일
[5] 페드로 데 암푸디아(Pedro de Ampudia, 1805년 1월 30일 ~ 1868년 8월 7일) : 쿠바 하바나에서 태어나 멕시코의 군인 겸 정치가
[6]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약 3,034km 길이의 강으로, 미국의 텍사스주와 멕시코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국경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양국 간 이민 및 수자원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7] 누에세스 강(Nueces River) : 미국 텍사스주 남부를 흐르는 약 507km 길이의 강으로, 리오그란데 강과 함께 미국-멕시코 국경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멕시코는 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으나,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간주하면서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존더분트 전쟁(Sonderbund War)이라고도 한다. 스위스 연방정부의 권력을 확대하는 신헌법을 반대하여 7개 주가 조직한 존더분트와 치른 스위스 내전이다.
스위스 연방군에 의하여 존더분트의 프리부르 주를 시작으로 발레 주가 마지막으로 항복하면서 존더분트는 해체되었다.
내전의 결과로 느슨한 국가 연합이였던 스위스는 이듬해인 1848년에 연방 헌법이 발효되어 연방 국가로 조직되었다.
존더분트의 패배로 스위스에서는 예수회가 추방당하고 헌법으로 예수회의 활동이 금지된다. 그러나 백년이 넘게 지난 1973년 5월에 헌법 개정을 통해 예수회의 활동이 허용되었다.
* 존더분트(독일어: Sonderbund, 분리연방) : 스위스의 가톨릭을 믿는 7개 주(루체른, 프리부르, 발레,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가 조직한 동맹. 정식명칭은 방어동맹(독일어: Schutzvereinigung)이다.
스위스 연방군에 의하여 존더분트의 프리부르 주를 시작으로 발레 주가 마지막으로 항복하면서 존더분트는 해체되었다.
내전의 결과로 느슨한 국가 연합이였던 스위스는 이듬해인 1848년에 연방 헌법이 발효되어 연방 국가로 조직되었다.
존더분트의 패배로 스위스에서는 예수회가 추방당하고 헌법으로 예수회의 활동이 금지된다. 그러나 백년이 넘게 지난 1973년 5월에 헌법 개정을 통해 예수회의 활동이 허용되었다.
* 존더분트(독일어: Sonderbund, 분리연방) : 스위스의 가톨릭을 믿는 7개 주(루체른, 프리부르, 발레,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가 조직한 동맹. 정식명칭은 방어동맹(독일어: Schutzvereinigung)이다.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California Gold Rush)는 캘리포니아의 세크라멘토 근교인 콜로마(Coloma)라는 마을의 제재소(Sutter's Mill)에서 일하던 제임스 마셜(James W. Marshall)이 아메리칸 리버(American river)에서 금가루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이내 확산되어 미국의 각지역 그리고 해외에서 남녀노소를 비롯하여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오늘날의 금액으로 수십억달러에 해당하는 금이 채집되었다.
이 과정에서 캘리포니아는 작은 정착촌에서 신흥도시가 되고 늘어난 인구에 따른 각종 기간 시설이 건설되고 법체제가 갖춰지면서 1850년에 미국의 31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유입된 채굴자들 중 1849년에 캘리포니아로 향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연도를 따서 '포티나이너(Forty-niner, 약칭 49er)'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금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이내 확산되어 미국의 각지역 그리고 해외에서 남녀노소를 비롯하여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오늘날의 금액으로 수십억달러에 해당하는 금이 채집되었다.
이 과정에서 캘리포니아는 작은 정착촌에서 신흥도시가 되고 늘어난 인구에 따른 각종 기간 시설이 건설되고 법체제가 갖춰지면서 1850년에 미국의 31번째 주로 편입되었다.
유입된 채굴자들 중 1849년에 캘리포니아로 향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연도를 따서 '포티나이너(Forty-niner, 약칭 49er)'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1]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은 1848년 2월 2일, 멕시코-미국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체결된 평화 조약으로, 멕시코와 미국 간의 국경 분쟁을 해결하고 미국의 대륙 확장을 확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약은 멕시코시티 북쪽의 과달루페 이달고에서 체결되었으며, 이 조약으로 미국은 멕시코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할양받았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멕시코는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네바다, 유타, 와이오밍, 콜로라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약 200만㎢의 광대한 영토를 미국에 넘겼다. 이로써 미국은 멕시코 영토의 약 절반을 획득하며 현재의 서남부 지역을 획득하였다. 둘째,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이 [2]리오그란데 강으로 확정되었으며, 이는 멕시코가 주장했던 [3]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삼으려 했던 입장을 철회한 것이었다. 셋째, 미국은 이에 대한 대가로 멕시코에 1,500만 달러를 지급하고 멕시코 정부가 미국 시민들에게 지고 있던 350만 달러의 부채를 탕감해 주었다. 넷째, 미국이 새롭게 획득한 영토에 살고 있던 멕시코 거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권리를 부여했으나, 이후 이 지역의 멕시코계 주민들은 차별과 토지 몰수 등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미국은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경제적·전략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으며, 특히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로 인해 서부로의 이주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지의 여부가 논쟁이 되면서 미국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결국 남북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멕시코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며 국토의 절반 가까이를 잃고 경제적·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이는 멕시코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이후 멕시코 역사에서 반미 감정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은 미국과 멕시코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서남부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과달루페 이달고(Guadalupe Hidalgo) : 멕시코시티 북쪽에 위치한 역사적인 도시로 1848년 멕시코-미국 전쟁을 종결짓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이 체결된 장소로 유명하다. 현재는 멕시코시티의 일부로 통합되었으며, 가톨릭 성지인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Basílica de Guadalupe)이 있는 중요한 종교적·역사적 중심지이다
[2]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약 3,034km 길이의 강으로, 미국의 텍사스주와 멕시코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국경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양국 간 이민 및 수자원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누에세스 강(Nueces River) : 미국 텍사스주 남부를 흐르는 약 507km 길이의 강으로, 리오그란데 강과 함께 미국-멕시코 국경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멕시코는 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으나,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간주하면서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멕시코는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네바다, 유타, 와이오밍, 콜로라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약 200만㎢의 광대한 영토를 미국에 넘겼다. 이로써 미국은 멕시코 영토의 약 절반을 획득하며 현재의 서남부 지역을 획득하였다. 둘째,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이 [2]리오그란데 강으로 확정되었으며, 이는 멕시코가 주장했던 [3]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삼으려 했던 입장을 철회한 것이었다. 셋째, 미국은 이에 대한 대가로 멕시코에 1,500만 달러를 지급하고 멕시코 정부가 미국 시민들에게 지고 있던 350만 달러의 부채를 탕감해 주었다. 넷째, 미국이 새롭게 획득한 영토에 살고 있던 멕시코 거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권리를 부여했으나, 이후 이 지역의 멕시코계 주민들은 차별과 토지 몰수 등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미국은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경제적·전략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으며, 특히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로 인해 서부로의 이주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새로 획득한 영토에서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지의 여부가 논쟁이 되면서 미국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결국 남북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멕시코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며 국토의 절반 가까이를 잃고 경제적·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이는 멕시코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이후 멕시코 역사에서 반미 감정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은 미국과 멕시코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서남부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과달루페 이달고(Guadalupe Hidalgo) : 멕시코시티 북쪽에 위치한 역사적인 도시로 1848년 멕시코-미국 전쟁을 종결짓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이 체결된 장소로 유명하다. 현재는 멕시코시티의 일부로 통합되었으며, 가톨릭 성지인 과달루페 성모 대성당(Basílica de Guadalupe)이 있는 중요한 종교적·역사적 중심지이다
[2] 리오그란데 강(Rio Grande) :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약 3,034km 길이의 강으로, 미국의 텍사스주와 멕시코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경계선이다.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국경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양국 간 이민 및 수자원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누에세스 강(Nueces River) : 미국 텍사스주 남부를 흐르는 약 507km 길이의 강으로, 리오그란데 강과 함께 미국-멕시코 국경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멕시코는 누에세스 강을 국경으로 주장했으나, 미국은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간주하면서 1846년 멕시코-미국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태평천국운동 청나라 말기의 사회적·경제적 혼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중화제국의 질서가 붕괴되어 가는 동안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이자 종교 혁명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운동의 지도자인 [1]홍수전은 [2]광시성 출신의 몰락한 유생으로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한 후 기독교 서적을 접하고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중국에서 태어난 메시아라는 교리를 세우고 전파하였다. 그는 서양 기독교의 사상과 중국 민간 신앙을 혼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 평등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851년, 홍수전은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 열망을 바탕으로 농민과 하층민,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아 태평천국이라는 국가를 선포하고 스스로 천왕에 올랐다. 그는 청조의 통치를 부정하며 새 질서를 세우고자 하였다. 태평천국은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1853년에는 중국의 중심 도시인 [3]난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재산의 공동 소유, 남녀평등, 신분제 폐지, 전족 금지 등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등 근대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많은 농민과 억압받는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권력 다툼, 통치 경험 부족, 과도한 종교 중심주의 등으로 인해 점차 혼란이 커졌고 외부적으로는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후 청나라군과 서양 열강(영국, 프랑스)에 패퇴하였다. 결국 [5]중국번의 [4]상군에 희하여 난징이 함락되고 홍수전이 사망하면서 14년간의 태평천국운동은 종결되었다.
이 운동은 청나라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이후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 신해혁명 등의 근대화에 영향을 주었다.
[1] 홍수전(1814년~1864) : 청나라 내에서 기독교에 기초한 종교국가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국하여 청나라 조정과 대립하였다
[2] 광시성 :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로 성도는 난닝시이다. 1958년 이전에는 광시성이었지만 1958년에 좡족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3] 난징(Nanjing) : 중화민국(대만, 지도자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의 명목상 수도이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쑤성의 성도
[4] 상군 : 청나라 말기 후난성 지방군의 호칭. 후난성의 상향출신의 증국번이 향용을 조직했으며 상군은 향용조식중 하나이다
[5] 증국번(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이 운동의 지도자인 [1]홍수전은 [2]광시성 출신의 몰락한 유생으로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한 후 기독교 서적을 접하고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중국에서 태어난 메시아라는 교리를 세우고 전파하였다. 그는 서양 기독교의 사상과 중국 민간 신앙을 혼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 평등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851년, 홍수전은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 열망을 바탕으로 농민과 하층민,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아 태평천국이라는 국가를 선포하고 스스로 천왕에 올랐다. 그는 청조의 통치를 부정하며 새 질서를 세우고자 하였다. 태평천국은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1853년에는 중국의 중심 도시인 [3]난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재산의 공동 소유, 남녀평등, 신분제 폐지, 전족 금지 등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등 근대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많은 농민과 억압받는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권력 다툼, 통치 경험 부족, 과도한 종교 중심주의 등으로 인해 점차 혼란이 커졌고 외부적으로는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후 청나라군과 서양 열강(영국, 프랑스)에 패퇴하였다. 결국 [5]중국번의 [4]상군에 희하여 난징이 함락되고 홍수전이 사망하면서 14년간의 태평천국운동은 종결되었다.
이 운동은 청나라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이후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 신해혁명 등의 근대화에 영향을 주었다.
[1] 홍수전(1814년~1864) : 청나라 내에서 기독교에 기초한 종교국가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국하여 청나라 조정과 대립하였다
[2] 광시성 :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로 성도는 난닝시이다. 1958년 이전에는 광시성이었지만 1958년에 좡족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3] 난징(Nanjing) : 중화민국(대만, 지도자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의 명목상 수도이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쑤성의 성도
[4] 상군 : 청나라 말기 후난성 지방군의 호칭. 후난성의 상향출신의 증국번이 향용을 조직했으며 상군은 향용조식중 하나이다
[5] 증국번(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크림 전쟁은 1853년부터 1856년까지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여기에 영국, 프랑스, [1]사르데냐 왕국이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개입하면서 국제적인 충돌로 확대되었다. 이 전쟁의 주요 원인은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틈타 흑해와 발칸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령 [2]다뉴브 공국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하며 개입을 시도했고, 이에 맞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인 1853년 [3]시노페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대파하며 우위를 점했으나 러시아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1854년에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1854년에 연합군은 러시아의 [10]크림반도를 공격하며 [4]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시작했고, 같은 해 [5]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군의 무모한 돌격으로 유명한 [6]경기병 여단의 돌격이 벌어졌다.
전쟁은 1855년 9월, 세바스토폴이 함락되면서 러시아의 패색이 확실해졌고, 결국 1856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7]몰다비아와 [8]왈라키아에서 철수해야 했으며 흑해에서 군사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재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크림 전쟁은 단순한 영토 전쟁을 넘어 근대 전쟁의 특징을 처음으로 보여준 전쟁이었다. 철도와 전신이 군사 작전에 활용되었으며 언론과 전쟁 사진 보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9]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참전하여 군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체계적인 간호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근대 간호학의 발전을 촉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패배를 계기로 내부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861년 농노 해방령을 발표하는 등 사회 변화를 겪게 되었다. 또한 사르데냐 왕국의 참전은 이후 이탈리아 통일의 발판이 되었으며 유럽 전체적으로는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고 오스만 제국을 일정 부분 유지하려는 외교적 균형이 유지되었다.
크림 전쟁은 유럽 세력 균형을 조정하는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근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쟁으로서 군사, 외교,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1] 사르데냐 왕국(Kingdom of Sardinia) : 1720년부터 1861년까지 토리노를 수도로 하여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왕국으로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을 탄생시키는 기반을 마련한 왕국
[2] 다뉴브 공국(Danubian Principalities) :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역(현재 루마니아)으로,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주요 분쟁 지역이었다
[3] 시노페 해전(Battle of Sinop, 1853년 11월 30일) : 크림 전쟁 초기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섬멸한 전투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세바스토폴 공방전(Siege of Sevastopol, 1854년 ~ 1855년)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이 11개월간 러시아의 요새 도시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여 함락시킨 전투로 러시아의 패배를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5] 발라클라바 전투(Battle of Balaclava, 1854년 10월 25일)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전투로, 특히 영국군의 무모한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으로 유명하다
[6]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 1854) : 크림 전쟁 중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 기병대가 잘못된 명령으로 러시아 대포 진지를 향해 돌격하여 막대한 희생을 낳은 사건으로 용맹함과 군사 지휘 실수의 상징이 되었다
[7] 몰다비아(Moldavia) : 현재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다가 러시아-오스만 갈등의 주요 무대가 되었으며, 이후 루마니아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8] 왈라키아(Wallachia) : 현재 루마니아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1859년 몰다비아와 합병하여 루마니아 왕국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년 5월 12일 ~ 1910년 8월 13일) : 크림 전쟁 중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근대 간호학의 기초를 확립한 영국의 간호사이자 의료 개혁가
[10] 크림반도(Crimea Peninsula) : 흑해 북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역사적으로 여러 제국과 국가들이 차지하려 했던 분쟁 지역이며 현재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갈등 중심지이다.
전쟁 초기인 1853년 [3]시노페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대파하며 우위를 점했으나 러시아의 확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1854년에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1854년에 연합군은 러시아의 [10]크림반도를 공격하며 [4]세바스토폴 공방전을 시작했고, 같은 해 [5]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군의 무모한 돌격으로 유명한 [6]경기병 여단의 돌격이 벌어졌다.
전쟁은 1855년 9월, 세바스토폴이 함락되면서 러시아의 패색이 확실해졌고, 결국 1856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종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7]몰다비아와 [8]왈라키아에서 철수해야 했으며 흑해에서 군사 활동이 금지되었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재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크림 전쟁은 단순한 영토 전쟁을 넘어 근대 전쟁의 특징을 처음으로 보여준 전쟁이었다. 철도와 전신이 군사 작전에 활용되었으며 언론과 전쟁 사진 보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9]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참전하여 군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체계적인 간호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근대 간호학의 발전을 촉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는 패배를 계기로 내부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1861년 농노 해방령을 발표하는 등 사회 변화를 겪게 되었다. 또한 사르데냐 왕국의 참전은 이후 이탈리아 통일의 발판이 되었으며 유럽 전체적으로는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고 오스만 제국을 일정 부분 유지하려는 외교적 균형이 유지되었다.
크림 전쟁은 유럽 세력 균형을 조정하는 중요한 전쟁이었으며 근대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쟁으로서 군사, 외교,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1] 사르데냐 왕국(Kingdom of Sardinia) : 1720년부터 1861년까지 토리노를 수도로 하여 존재했던 이탈리아의 왕국으로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을 탄생시키는 기반을 마련한 왕국
[2] 다뉴브 공국(Danubian Principalities) :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역(현재 루마니아)으로,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주요 분쟁 지역이었다
[3] 시노페 해전(Battle of Sinop, 1853년 11월 30일) : 크림 전쟁 초기 러시아 해군이 오스만 제국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섬멸한 전투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며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세바스토폴 공방전(Siege of Sevastopol, 1854년 ~ 1855년)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이 11개월간 러시아의 요새 도시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여 함락시킨 전투로 러시아의 패배를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5] 발라클라바 전투(Battle of Balaclava, 1854년 10월 25일) : 크림 전쟁 중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과 러시아군의 전투로, 특히 영국군의 무모한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으로 유명하다
[6] 경기병 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 1854) : 크림 전쟁 중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 기병대가 잘못된 명령으로 러시아 대포 진지를 향해 돌격하여 막대한 희생을 낳은 사건으로 용맹함과 군사 지휘 실수의 상징이 되었다
[7] 몰다비아(Moldavia) : 현재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다가 러시아-오스만 갈등의 주요 무대가 되었으며, 이후 루마니아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8] 왈라키아(Wallachia) : 현재 루마니아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1859년 몰다비아와 합병하여 루마니아 왕국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년 5월 12일 ~ 1910년 8월 13일) : 크림 전쟁 중 병원의 위생 환경을 개선하고 근대 간호학의 기초를 확립한 영국의 간호사이자 의료 개혁가
[10] 크림반도(Crimea Peninsula) : 흑해 북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역사적으로 여러 제국과 국가들이 차지하려 했던 분쟁 지역이며 현재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갈등 중심지이다.
미일화친조약은 1854년 3월 31일에 일본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일본의 쇄국 정책을 끝내고 서구 국가들과의 외교 및 무역 관계를 시작하는 계기가 된 조약이다.
이 조약은 미국 해군 제독 [1]매튜 페리가 이끄는 함대가 일본에 무력 시위를 벌인 후 강제적으로 체결되었으며 일본의 근대화와 개항을 촉진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2]시모다와 [3]하코다테의 두 항구를 미국 선박에 개방하여 연료와 식량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난파된 미국 선원을 일본이 구조하고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 셋째, 양국이 평등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이 일본에 영사관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오랜 기간 유지해온 쇄국 정책을 공식적으로 철폐했으며, 이후 서구 열강과의 조약이 연이어 체결되면서 본격적인 개항 시대가 시작되었다. 또한, 미일화친조약은 일본의 [4]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근대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일본이 국제 사회로 편입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 매튜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년 ~ 1858년) : 미국 해군 제독
[2] 시모다(Shimoda) : 일본 시즈오카현의 이즈반도 남부에 위치하는 도시. 일본 에도시대 말의 1854년에 미일 화친 조약이 조인된 도시
[3] 하코다테(Hakodate) : 일본 홋카이도 남부에 있는 도시
[4] 메이지 유신(Meiji Restoration, 1868) : 일본이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로 전환한 정치·사회 개혁 운동으로, 서구식 군대·산업·교육 시스템을 도입하며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서구 열강과 경쟁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조약은 미국 해군 제독 [1]매튜 페리가 이끄는 함대가 일본에 무력 시위를 벌인 후 강제적으로 체결되었으며 일본의 근대화와 개항을 촉진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2]시모다와 [3]하코다테의 두 항구를 미국 선박에 개방하여 연료와 식량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다. 둘째, 난파된 미국 선원을 일본이 구조하고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 셋째, 양국이 평등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미국이 일본에 영사관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오랜 기간 유지해온 쇄국 정책을 공식적으로 철폐했으며, 이후 서구 열강과의 조약이 연이어 체결되면서 본격적인 개항 시대가 시작되었다. 또한, 미일화친조약은 일본의 [4]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근대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일본이 국제 사회로 편입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 매튜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년 ~ 1858년) : 미국 해군 제독
[2] 시모다(Shimoda) : 일본 시즈오카현의 이즈반도 남부에 위치하는 도시. 일본 에도시대 말의 1854년에 미일 화친 조약이 조인된 도시
[3] 하코다테(Hakodate) : 일본 홋카이도 남부에 있는 도시
[4] 메이지 유신(Meiji Restoration, 1868) : 일본이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로 전환한 정치·사회 개혁 운동으로, 서구식 군대·산업·교육 시스템을 도입하며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서구 열강과 경쟁할 수 있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피의 캔자스는 미국역사에서 '피로 물든 캔자스(Bloody Kansas) 혹은 경계지역의 전쟁(Border War)'라고 언급된다.
피의 캔자스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자유주 정착민과 노예제를 찬성하는 노예주 정착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련의 폭력적, 정치적 대립 사건을 말한다.
미국의 노예제 문제를 놓고 벌어진 폭력적인 사태는 미국 북부와 남부의 노예 제도를 둘러싼 대리 전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미국 남북전쟁의 사전 징후가 되었다.
이러한 폭력적인 사건들은 캔자스 준주와 인접한 미주리주 서쪽의 프런티어 타운에서 발생했다. 갈등의 주요 이슈는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할 것인가 아니면 노예주로 가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노예주로서 미주리주는 두 면이 자유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일리노이주, 북쪽으로는 아이오와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한다면 미주리는 삼면이 자유주들로 경계를 이루는 상황에 처한다.이는 미주리 노예 소유주들에게 위협이었다.
극심한 감정대결은 몇 년 동안 이어졌고 이후 진행된 주민투표에서 캔자스주에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법안은 주 의회의 인준을 받았고 1861년 1월 29일 노예제도를 거부하는 자유주로서 연방에 새로 편입되었다.
캔자스주의 연방가입 후 세 달 뒤에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 준주(準州) : 미합중국 자산의 일부로 병합되었거나 미국 연방 의회에서 제정된 조직법에 따라 입법, 행정, 사법 등의 조직을 갖춘 곳을 말한다. 1912년 애리조나가 주가 된 것을 마지막으로 미국 본토내의 준주는 없으며, 하와이와 알래스카가 1959년 준주에서 주가 되면서 현재 미국내 준주인 곳은 없다
* 노예주(slave state) : 미국 남북 전쟁 이전에 있었던 노예 제도가 합법적이었던 주
* 자유주(free state) : 노예 제도를 금지했거나 이미 폐지한 주
피의 캔자스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자유주 정착민과 노예제를 찬성하는 노예주 정착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련의 폭력적, 정치적 대립 사건을 말한다.
미국의 노예제 문제를 놓고 벌어진 폭력적인 사태는 미국 북부와 남부의 노예 제도를 둘러싼 대리 전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미국 남북전쟁의 사전 징후가 되었다.
이러한 폭력적인 사건들은 캔자스 준주와 인접한 미주리주 서쪽의 프런티어 타운에서 발생했다. 갈등의 주요 이슈는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할 것인가 아니면 노예주로 가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노예주로서 미주리주는 두 면이 자유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일리노이주, 북쪽으로는 아이오와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한다면 미주리는 삼면이 자유주들로 경계를 이루는 상황에 처한다.이는 미주리 노예 소유주들에게 위협이었다.
극심한 감정대결은 몇 년 동안 이어졌고 이후 진행된 주민투표에서 캔자스주에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법안은 주 의회의 인준을 받았고 1861년 1월 29일 노예제도를 거부하는 자유주로서 연방에 새로 편입되었다.
캔자스주의 연방가입 후 세 달 뒤에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 준주(準州) : 미합중국 자산의 일부로 병합되었거나 미국 연방 의회에서 제정된 조직법에 따라 입법, 행정, 사법 등의 조직을 갖춘 곳을 말한다. 1912년 애리조나가 주가 된 것을 마지막으로 미국 본토내의 준주는 없으며, 하와이와 알래스카가 1959년 준주에서 주가 되면서 현재 미국내 준주인 곳은 없다
* 노예주(slave state) : 미국 남북 전쟁 이전에 있었던 노예 제도가 합법적이었던 주
* 자유주(free state) : 노예 제도를 금지했거나 이미 폐지한 주
1856년 발발한 제2차 아편 전쟁은 일명 애로우호 전쟁이라고 불린다. 제2차 중영전쟁이다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의 승리로 청나라의 개항과 무역 독점권을 얻었지만 생각보다 큰 이득이 되지 않았고 여전히 아편수출에 의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아편을 몰래 자체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무역적자가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의 차 수출량이 급증하는 상황까지 되었다.
게다가 당시 청나라는 프랑스인 선교사 처형문제로 프랑스와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영국인 선주의 청나라 선박인 애로우호의 영국국기를 바다에 던진 사건, 일명 애로우호 사건을 핑게삼아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였다.
내부적으로 태평천국의 난으로 국가적 역량이 크게 쇠퇴하였던 청나라는 베이징이 함락된 후 러시아의 중재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는 1차 아편전쟁의 패배의 결과인 난징조약(1842년)에서 영국에 홍콩 섬을 내준데 이어 홍콩섬 맞은 편의 주룽(Kowloon)반도까지 내주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넘겨받으면서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만주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청나라에서 프랑스인의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패하면서 허약한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게 된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덩치 큰 호구,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베이징 조약을 맺은 이후 청은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중화 우위의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 애로우호(Arrow) : 영국인 선주 소유의 청나라 선박
* 태평천국 운동 :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대봉기이자 신정국가(종교적 원리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지는 정치형태)인 태평천국 건국 운동
영국은 제1차 아편전쟁의 승리로 청나라의 개항과 무역 독점권을 얻었지만 생각보다 큰 이득이 되지 않았고 여전히 아편수출에 의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아편을 몰래 자체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의 무역적자가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의 차 수출량이 급증하는 상황까지 되었다.
게다가 당시 청나라는 프랑스인 선교사 처형문제로 프랑스와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영국인 선주의 청나라 선박인 애로우호의 영국국기를 바다에 던진 사건, 일명 애로우호 사건을 핑게삼아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였다.
내부적으로 태평천국의 난으로 국가적 역량이 크게 쇠퇴하였던 청나라는 베이징이 함락된 후 러시아의 중재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는 1차 아편전쟁의 패배의 결과인 난징조약(1842년)에서 영국에 홍콩 섬을 내준데 이어 홍콩섬 맞은 편의 주룽(Kowloon)반도까지 내주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넘겨받으면서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만주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청나라에서 프랑스인의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패하면서 허약한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게 된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덩치 큰 호구,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베이징 조약을 맺은 이후 청은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중화 우위의 질서가 무너지고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 애로우호(Arrow) : 영국인 선주 소유의 청나라 선박
* 태평천국 운동 :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대봉기이자 신정국가(종교적 원리에 의해 통치가 이루어지는 정치형태)인 태평천국 건국 운동
1857년 인도항쟁, 제1차 인도 독립전쟁으로도 불린다.
영국은 1757년 [1]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와 인도연합군에 승리한 이후 인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은 총독을 파견해 지배하는 대신 [2]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통치하고 있었다.
영국 [2]동인도회사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인도인 용병인 [3]세포이를 고용하였다. [3]세포이는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토후국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갈 때 용병으로 참여했으며 지역에 따라 이슬람교, 힌두교등의 다양한 종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계속되는 팽창 정책으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일대로 세포이의 파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파병을 꺼리던 세포이는 영국과 갈등을 빚었고 처우에 대한 불만도 쌓여갔다. 이러한 불만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새로 지급된 탄약통이 세포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롭게 지급된 [6]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 소총은 보다 빠른 장전을 위하여 개별 포장된 탄약통을 사용하였다. 문제는 탄약통의 방수를 위해 종이에 소나 돼지의 지방 입힌 것에서 비롯되었다. 소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고 돼지는 이슬람교도들이 싫어했다.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신자였던 세포이들은 이 탄약통을 입으로 물어 뜯어 사용하라는 것은 자신들의 종교를 멸시하는 행위라고 받아들였다.
1857년 3월 29일 제34 벵골인 연대의 세포이였던 [5]망갈 판데이는 탄약통을 수령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5]만갈 판데이는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은 선고받았고 4월 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대는 해산되었으며 항명에 가담한 세포이는 불명예 제대를 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전국적으로 번진 항쟁에 민간인으로 가담하였다.
실제적인 항쟁은 델리에서 북동쪽 70km에 위치하고 있는 [7]메루트 지역에서 비롯되었다.
4월 24일에 [7]메루트의 동인도회사 소속 90명의 세포이에게 탄약통이 지급되었다. 90명의 세포이중에 85명이 수령을 거부하였다. 이때문에 이들은 영국군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5월 9일에 5년~10년형의 선고를 받았다. 이에 분개한 세포이들은 다음날인 5월 10일에 결집하여 병영을 공격하고 영국군 장교를 사살하였다. 5월 10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국 병사들은 교회에 가거나 비번이 상황이었다. 항쟁이 시작되었다.
항쟁 직전 세포이는 20만 명에 달했으나 영국군의 수는 약 4만명에 불과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굴황제가 인도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약간의 권위를 인정했다. 따라서 황제인 [8]바하두르 샤 2세는 왕궁에 기거하면서 품위 유지 명목으로 델리 일대에서 소수의 근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5월 11일 아침 세포이는 델리에 도착하여 [8]바하두르 샤 2세가 있는 왕궁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바하두르 샤 2세 황제에게 무굴제국의 부활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통상적인 청원자로 여겨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세포이가 봉기하였다는 소식이 퍼져나갔고 무기고를 탈취하여 항쟁을 계속해 나갔다.
다음날인 5월 12일 바하두르 샤 2세는 실로 오랫만에 국정회의를 소집했다. 세포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황제는 세포이들의 충성을 요구하며 항쟁을 지지하였다. 5월 16일, 황제는 체포되거나 구금된 영국인 50명을 왕궁 밖에 있던 보리수 나무에서 처형하였다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하면서 항쟁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인도의 각 지역은 종파와 토후 제후국의 이해득실로 인하여 무굴제국과 세포이 항쟁을 지지하거나 영국 동인도회사를 지지하는 쪽으로 분열되었다.
항쟁초기에는 세포이들은 기세등등하여 영국군에 승리하였으나 영국군의 반격을 시작되자 명령체계의 구조적인 약점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크림전쟁에 투입되었던 병력과 중국에 주둔해 있던 병력의 일부까지 불러들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영국군은 세포이군과 델리 공방전을 벌인끝에 9월 14일 델리를 탈환하여 점령하였고 바하두르 샤 2세를 체포하였다.
1857년 말 무렵 영국은 교전의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으며 세포이 항쟁은 1858년 7월 20일 괄리로르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진압되었다.
포로로 붙잡힌 세포이는 대포입구에 머리가 위치하도록 묶은 뒤 포탄을 쏴 머리를 폭살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8]바하두르 샤 2세는 폐위하여 영국령 미얀마 양곤지역으로 추방되어 사망하였다. 330년간 지속된 무굴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영국은 직접 인도를 통치하기로 결정하고 영국 동인도회사를 해체하였다.
1877년 영국령 인도제국이 선포되어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제국의 황제가 되어 식민지 배가 본격화했다.
이후 인도는 90년 후인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참고문헌]
- 아틀라스 뉴스(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8)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 영국 동인도회사와 벵골 토후국-프랑스 동인도회사의 전투. 이 전투에서의 승리한 영국은 100년간 인도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2] 영국 동인도 회사 : 인도양, 동아시아에 대한 모직물 시장 및 향료 획득 등의 독점 무역을 목적으로 세워진 영국의 회사
[3] 세포이(sepoy) : 영국 동인도 회사에 채용된 인도인 용병.
[4] 나르마다강(Narmada) : 인도 중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
[5] 망갈 판데이(Mangal Pandey, 1827~1857) : 1857 년 3 월 29 일 영국 장교를 공격 한 인도 군인
[6] 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Enfield Pattern 1853 rifle-musket) : 영국의 엔필드 조병창에서 개발된 전장식 소총
[7] 메루트(Meerut) :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도시. 뉴델리에서 북동쪽으로 70km에 위치하며 1857년 세포이 항쟁이 벌어진 도시이다
[8]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Zafar, 1775년~1862년) : 인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티무르 황조의 마지막 군주(재위, 1837년 9월 28일~1857년 9월 14일)
영국은 1757년 [1]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와 인도연합군에 승리한 이후 인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은 총독을 파견해 지배하는 대신 [2]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통치하고 있었다.
영국 [2]동인도회사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인도인 용병인 [3]세포이를 고용하였다. [3]세포이는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토후국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갈 때 용병으로 참여했으며 지역에 따라 이슬람교, 힌두교등의 다양한 종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계속되는 팽창 정책으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미얀마 일대로 세포이의 파병을 요구하였다. 이에 파병을 꺼리던 세포이는 영국과 갈등을 빚었고 처우에 대한 불만도 쌓여갔다. 이러한 불만들이 쌓여가는 가운데 새로 지급된 탄약통이 세포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롭게 지급된 [6]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 소총은 보다 빠른 장전을 위하여 개별 포장된 탄약통을 사용하였다. 문제는 탄약통의 방수를 위해 종이에 소나 돼지의 지방 입힌 것에서 비롯되었다. 소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고 돼지는 이슬람교도들이 싫어했다.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신자였던 세포이들은 이 탄약통을 입으로 물어 뜯어 사용하라는 것은 자신들의 종교를 멸시하는 행위라고 받아들였다.
1857년 3월 29일 제34 벵골인 연대의 세포이였던 [5]망갈 판데이는 탄약통을 수령하라는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5]만갈 판데이는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은 선고받았고 4월 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연대는 해산되었으며 항명에 가담한 세포이는 불명예 제대를 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전국적으로 번진 항쟁에 민간인으로 가담하였다.
실제적인 항쟁은 델리에서 북동쪽 70km에 위치하고 있는 [7]메루트 지역에서 비롯되었다.
4월 24일에 [7]메루트의 동인도회사 소속 90명의 세포이에게 탄약통이 지급되었다. 90명의 세포이중에 85명이 수령을 거부하였다. 이때문에 이들은 영국군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5월 9일에 5년~10년형의 선고를 받았다. 이에 분개한 세포이들은 다음날인 5월 10일에 결집하여 병영을 공격하고 영국군 장교를 사살하였다. 5월 10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국 병사들은 교회에 가거나 비번이 상황이었다. 항쟁이 시작되었다.
항쟁 직전 세포이는 20만 명에 달했으나 영국군의 수는 약 4만명에 불과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무굴황제가 인도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약간의 권위를 인정했다. 따라서 황제인 [8]바하두르 샤 2세는 왕궁에 기거하면서 품위 유지 명목으로 델리 일대에서 소수의 근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5월 11일 아침 세포이는 델리에 도착하여 [8]바하두르 샤 2세가 있는 왕궁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바하두르 샤 2세 황제에게 무굴제국의 부활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통상적인 청원자로 여겨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세포이가 봉기하였다는 소식이 퍼져나갔고 무기고를 탈취하여 항쟁을 계속해 나갔다.
다음날인 5월 12일 바하두르 샤 2세는 실로 오랫만에 국정회의를 소집했다. 세포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황제는 세포이들의 충성을 요구하며 항쟁을 지지하였다. 5월 16일, 황제는 체포되거나 구금된 영국인 50명을 왕궁 밖에 있던 보리수 나무에서 처형하였다
세포이들은 순식간에 델리를 점령하면서 항쟁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인도의 각 지역은 종파와 토후 제후국의 이해득실로 인하여 무굴제국과 세포이 항쟁을 지지하거나 영국 동인도회사를 지지하는 쪽으로 분열되었다.
항쟁초기에는 세포이들은 기세등등하여 영국군에 승리하였으나 영국군의 반격을 시작되자 명령체계의 구조적인 약점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크림전쟁에 투입되었던 병력과 중국에 주둔해 있던 병력의 일부까지 불러들여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영국군은 세포이군과 델리 공방전을 벌인끝에 9월 14일 델리를 탈환하여 점령하였고 바하두르 샤 2세를 체포하였다.
1857년 말 무렵 영국은 교전의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으며 세포이 항쟁은 1858년 7월 20일 괄리로르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진압되었다.
포로로 붙잡힌 세포이는 대포입구에 머리가 위치하도록 묶은 뒤 포탄을 쏴 머리를 폭살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됐다.
[8]바하두르 샤 2세는 폐위하여 영국령 미얀마 양곤지역으로 추방되어 사망하였다. 330년간 지속된 무굴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영국은 직접 인도를 통치하기로 결정하고 영국 동인도회사를 해체하였다.
1877년 영국령 인도제국이 선포되어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제국의 황제가 되어 식민지 배가 본격화했다.
이후 인도는 90년 후인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참고문헌]
- 아틀라스 뉴스(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8)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 : 영국 동인도회사와 벵골 토후국-프랑스 동인도회사의 전투. 이 전투에서의 승리한 영국은 100년간 인도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2] 영국 동인도 회사 : 인도양, 동아시아에 대한 모직물 시장 및 향료 획득 등의 독점 무역을 목적으로 세워진 영국의 회사
[3] 세포이(sepoy) : 영국 동인도 회사에 채용된 인도인 용병.
[4] 나르마다강(Narmada) : 인도 중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
[5] 망갈 판데이(Mangal Pandey, 1827~1857) : 1857 년 3 월 29 일 영국 장교를 공격 한 인도 군인
[6] 1853년형 엔필드 강선머스킷(Enfield Pattern 1853 rifle-musket) : 영국의 엔필드 조병창에서 개발된 전장식 소총
[7] 메루트(Meerut) :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의 도시. 뉴델리에서 북동쪽으로 70km에 위치하며 1857년 세포이 항쟁이 벌어진 도시이다
[8] 바하두르 샤 2세(Bahadur Shah Zafar, 1775년~1862년) : 인도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티무르 황조의 마지막 군주(재위, 1837년 9월 28일~1857년 9월 14일)
제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1860년 러시아의 중재하에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체결한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의 주요내용으로 외국 공사의 베이징 주재, 천진을 포함한 11개 항 개항, 내지에서의 여행,통상,포교의 자유, 양쯔 강 및 통상항으로의 군함 진입권,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 허용, 배상금 등이 규정되었다. 또 교회는 토지를 임대하거나 구매해 교회를 건립할 수 있는 토지조매권을 얻었다.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에 홍콩 섬을 내준데 이어 홍콩섬 맞은 편의 주룽(Kowloon)반도까지 내주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넘겨받았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는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만주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다. 프랑스는 청나라 내에서 프랑스인의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이 조약의 주요내용으로 외국 공사의 베이징 주재, 천진을 포함한 11개 항 개항, 내지에서의 여행,통상,포교의 자유, 양쯔 강 및 통상항으로의 군함 진입권, 중국인 노동자의 이민 허용, 배상금 등이 규정되었다. 또 교회는 토지를 임대하거나 구매해 교회를 건립할 수 있는 토지조매권을 얻었다.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에 홍콩 섬을 내준데 이어 홍콩섬 맞은 편의 주룽(Kowloon)반도까지 내주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넘겨받았으며 이로 인해 러시아는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만주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다. 프랑스는 청나라 내에서 프랑스인의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청나라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무기력하게 패하고 태평천국운동을 겪은 뒤 국제사회의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미국 남북 전쟁(American Civil War)은 미국에서 아메리카 합중국과 아메리카 연합국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후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 포격을 시작으로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결과 남부연합군이 패했고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후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 포격을 시작으로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결과 남부연합군이 패했고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 함풍제는 제2차 아편전쟁(애로호 전쟁) 이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베이징 북쪽에 위치한 열하에 있는 별궁(피서산장)으로 피신해 있었다.
아편전쟁은 이복동생인 공친왕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음으로써 종결되었지만 상심한 함풍제는 수도인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열하에 남아있었으며 1년 뒤인 1861년 11월 21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함풍제는 사망하기전에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 황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막기위하여 가까운 황족종친을 배제하고 황실의 먼 종친이거나 고명대신인 이친왕, 정친왕을 비롯하여 숙순, 경수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보정대신 8인을 구성하였다.
이 기미를 알아챈 서태후(함풍제의 후궁)는 소외되어 있던 황족 공친왕을 끌어들여 황제의 시신을 베이징의 자금성으로 운구하던 두 친왕과 숙순 및 그 일당을 체포한다. 두 친왕은 자결명령을 받았고 열하행궁 일체의 실무 책임자인 숙순등은 모두 처형당했다. 결국 함풍제가 지정한 보정대신 8인은 모두 숙청당한다.
이 궁정반란은 신유년에 일어났다하여 신유정변이라 한다. 함풍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서태후의 집권을 열어준 사건이 되었다.
이후 서태후의 어린 아들(당시 6세)은 함풍제에 이어 황제에 등극하는데, 그가 청나라 10대 황제 동치제이다. 서태후와 동태후(함풍제의 두번째 황후)는 태후로서 동치제의 공동섭정이 시작되면서 권력을 잡게 되었다.
특히, 서태후는 1861년부터 1908년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청나라를 통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가 죽은지 4년후에 대청제국은 종말을 고했으니 청나라 말기는 거의 서태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함풍제(1831년~1861년) : 중국 청나라 제9대 황제.혁저. 재위 : 1850년~1861년. 묘호는 문종.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4남
* 동치제(1856년~1875년) : 중국 청나라 제10대 황제. 재위 : 1861년~1874년). 묘호는 목종
*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림
* 동태후(자안황태후,1837년~1881년) : 함풍제의 두번째 황후. 처소가 자금성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태후라 불림
*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
* 열하 : 중국 허베이성에 위치한 현재의 청더시를 말하며 청나라 황제의 행궁(피서산장)이 있다.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230km 떨어져 있으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아편전쟁은 이복동생인 공친왕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음으로써 종결되었지만 상심한 함풍제는 수도인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열하에 남아있었으며 1년 뒤인 1861년 11월 21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함풍제는 사망하기전에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 황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막기위하여 가까운 황족종친을 배제하고 황실의 먼 종친이거나 고명대신인 이친왕, 정친왕을 비롯하여 숙순, 경수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보정대신 8인을 구성하였다.
이 기미를 알아챈 서태후(함풍제의 후궁)는 소외되어 있던 황족 공친왕을 끌어들여 황제의 시신을 베이징의 자금성으로 운구하던 두 친왕과 숙순 및 그 일당을 체포한다. 두 친왕은 자결명령을 받았고 열하행궁 일체의 실무 책임자인 숙순등은 모두 처형당했다. 결국 함풍제가 지정한 보정대신 8인은 모두 숙청당한다.
이 궁정반란은 신유년에 일어났다하여 신유정변이라 한다. 함풍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서태후의 집권을 열어준 사건이 되었다.
이후 서태후의 어린 아들(당시 6세)은 함풍제에 이어 황제에 등극하는데, 그가 청나라 10대 황제 동치제이다. 서태후와 동태후(함풍제의 두번째 황후)는 태후로서 동치제의 공동섭정이 시작되면서 권력을 잡게 되었다.
특히, 서태후는 1861년부터 1908년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청나라를 통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가 죽은지 4년후에 대청제국은 종말을 고했으니 청나라 말기는 거의 서태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함풍제(1831년~1861년) : 중국 청나라 제9대 황제.혁저. 재위 : 1850년~1861년. 묘호는 문종.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4남
* 동치제(1856년~1875년) : 중국 청나라 제10대 황제. 재위 : 1861년~1874년). 묘호는 목종
*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림
* 동태후(자안황태후,1837년~1881년) : 함풍제의 두번째 황후. 처소가 자금성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태후라 불림
*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
* 열하 : 중국 허베이성에 위치한 현재의 청더시를 말하며 청나라 황제의 행궁(피서산장)이 있다.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230km 떨어져 있으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 프랑스는 동남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 내 가톨릭 선교사 보호와 경제적 이익을 명분으로 개입하면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프랑스는 1858년 [3]다낭을 공격하며 베트남 [1]응우옌 왕조와 전쟁을 본격화하였고 1859년에는 [2]사이공을 점령하였다. 이후 몇 년간 베트남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 지속되었으며 프랑스는 남부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결국 베트남은 프랑스와 협상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1862년 6월 5일 제1차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에게 남부 [4]코친차이나 일부 지역을 할양하기로 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 영토를 직접적으로 첫 번재로 차지하였으며 이후 베트남 전역으로 식민지 지배가 확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약에 따라 베트남은 프랑스의 무역을 개방했으며 프랑스 상인들이 특정 항구에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이는 베트남의 경제적 주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프랑스가 점진적으로 경제적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가 개입한 중요한 명분 중 하나였던 가톨릭 신앙의 자유 보장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베트남은 가톨릭 선교사와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종교 활동을 보장해야 했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부에 지속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으며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베트남은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는 [1]응우옌 왕조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고 베트남의 국력이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에서 본격적으로 식민 통치를 시작하였다. 1867년에 프랑스는 [4]코친차이나 전체를 완전히 점령하며 영토 확장을 지속하였다. 한편, 조약에 반발하는 베트남 내부의 저항으로 반프랑스 운동이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향력은 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1884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면서 완전한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사이공 조약은 20세기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다낭(Da Nang) : 다낭은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이자 경제 및 관광 중심지이다. 1858년 프랑스가 다낭을 공격하면서 베트남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다낭은 프랑스의 주요 군사 거점이 되었다.
[4]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용한 지역이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에게 남부 [4]코친차이나 일부 지역을 할양하기로 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 영토를 직접적으로 첫 번재로 차지하였으며 이후 베트남 전역으로 식민지 지배가 확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약에 따라 베트남은 프랑스의 무역을 개방했으며 프랑스 상인들이 특정 항구에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이는 베트남의 경제적 주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프랑스가 점진적으로 경제적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가 개입한 중요한 명분 중 하나였던 가톨릭 신앙의 자유 보장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베트남은 가톨릭 선교사와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종교 활동을 보장해야 했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부에 지속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으며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베트남은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는 [1]응우옌 왕조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고 베트남의 국력이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에서 본격적으로 식민 통치를 시작하였다. 1867년에 프랑스는 [4]코친차이나 전체를 완전히 점령하며 영토 확장을 지속하였다. 한편, 조약에 반발하는 베트남 내부의 저항으로 반프랑스 운동이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향력은 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1884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면서 완전한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사이공 조약은 20세기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다낭(Da Nang) : 다낭은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이자 경제 및 관광 중심지이다. 1858년 프랑스가 다낭을 공격하면서 베트남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다낭은 프랑스의 주요 군사 거점이 되었다.
[4]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용한 지역이다
미국 남북전쟁은 1861년 4월에 일어났다.
1862년 7월 22일 링컨 대통령은 그의 각료들에게 역사적인 노예 해방 선언의 초안을 낭독해 보였으며 9월22일 노예해방 선언의 제 2초안을 내각에게 낭독했다. 몇 가지 수정을 가하여 이 선언문은 예비선언으로 발표되었다.
정식 노예해방 선언문은 1863년 1월 1일에 발표되었다.
*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1865년) : 미국의 16대 대통령. 임기 :1861년 ~1865년
* 윌리엄 스워드(William Seward) : 미국 국무장관이며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62년 7월 22일 링컨 대통령은 그의 각료들에게 역사적인 노예 해방 선언의 초안을 낭독해 보였으며 9월22일 노예해방 선언의 제 2초안을 내각에게 낭독했다. 몇 가지 수정을 가하여 이 선언문은 예비선언으로 발표되었다.
정식 노예해방 선언문은 1863년 1월 1일에 발표되었다.
*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1865년) : 미국의 16대 대통령. 임기 :1861년 ~1865년
* 윌리엄 스워드(William Seward) : 미국 국무장관이며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 전투의 격전지였던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열린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링컨 대통령이 한 연설이다.
272 단어에 3분여의 짧은 연설이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이자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이 되었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지금으로부터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 자유의 정신으로 잉태되고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념이 바쳐진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나라가, 아니 이러한 정신과 신념으로 잉태되고 헌신하는 어느 나라이든지, 과연 오래도록 굳건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대인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전쟁의 거대한 싸움터인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 싸움터의 일부를, 이 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 바로 그 나라를 살리고자 한 영령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봉헌하기 위함입니다.
리의 이 헌정은 지극히 마땅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할 수도, 축성할 수도, 신성화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싸웠던 용맹한 전사자와 생존 용사들이 이미 이 곳을 신성한 땅으로
272 단어에 3분여의 짧은 연설이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이자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이 되었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지금으로부터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 자유의 정신으로 잉태되고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념이 바쳐진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나라가, 아니 이러한 정신과 신념으로 잉태되고 헌신하는 어느 나라이든지, 과연 오래도록 굳건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대인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전쟁의 거대한 싸움터인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 싸움터의 일부를, 이 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 바로 그 나라를 살리고자 한 영령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봉헌하기 위함입니다.
리의 이 헌정은 지극히 마땅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할 수도, 축성할 수도, 신성화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싸웠던 용맹한 전사자와 생존 용사들이 이미 이 곳을 신성한 땅으로
병인박해는 1866년(고종 3년) 흥선대원군의 대규모 천주교 탄압을 말하며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한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살아남은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청나라로 탈출해 천진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고 이는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천주교 탄압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1873년에 종료되었으며 1886년 프랑스와 조선이 국교를 맺고 병인박해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인정하며 추숭 조치로 박해는 마무리된다.
해방 이후인 1968년에는 순교자들을 복자로 추숭하였고 1984년에는 성인으로 추앙하였다.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 펠릭스 클레르 리델(1830년~1884) : 프랑스 낭트 출생의 가톨릭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한국이름은 이복명
*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병인양요 때 조선 공격을 지휘하였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살아남은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청나라로 탈출해 천진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고 이는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천주교 탄압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1873년에 종료되었으며 1886년 프랑스와 조선이 국교를 맺고 병인박해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인정하며 추숭 조치로 박해는 마무리된다.
해방 이후인 1968년에는 순교자들을 복자로 추숭하였고 1984년에는 성인으로 추앙하였다.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 펠릭스 클레르 리델(1830년~1884) : 프랑스 낭트 출생의 가톨릭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한국이름은 이복명
*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병인양요 때 조선 공격을 지휘하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號事件)은 1866년(조선 고종 3년) 평양 군민들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를 응징하여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다. 이 배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마을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였다. 이에 평양 감사 박규수의 지휘 아래 평양 관민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고 선원들은 처형하였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1866년([1]고종 3년)에 [2]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가 사망하자, 이를 구실로 프랑스의 [3] 로즈 제독은 함대 7척을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수교를 요구했다.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무력으로 대항하며 강화도 곳곳에서 교전이 일어났다. 교전이 계속되자 프랑스군은 더 이상의 교전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철수를 결정했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점령했던 [4] 강화성을 파괴하고 관아에 불을 지르고 [5] 외규장각 의궤, 서적등 각종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후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졌고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병인양요는 병인년에 양이(洋夷 :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1]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2]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3]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4] 강화성 :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고려궁지이며 고려시대 몽골 침입 당시에 사용하던 고려 궁궐터
[5] 외규장각 : 조선 정조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무력으로 대항하며 강화도 곳곳에서 교전이 일어났다. 교전이 계속되자 프랑스군은 더 이상의 교전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철수를 결정했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점령했던 [4] 강화성을 파괴하고 관아에 불을 지르고 [5] 외규장각 의궤, 서적등 각종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후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졌고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병인양요는 병인년에 양이(洋夷 :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1]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2]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3]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4] 강화성 :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고려궁지이며 고려시대 몽골 침입 당시에 사용하던 고려 궁궐터
[5] 외규장각 : 조선 정조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
1868년 9월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1]이사벨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폐위되었다. 1869년 스페인 혁명정부는 새로운 왕위 계승자를 물색하였다. 후보를 탐색하다가 1870년 프로이센 왕국의 [2]빌헬름 1세 국왕의 사촌인 레오폴트에게 왕위를 제안하였다.
레오폴트는 처음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프로이센 왕국의 [2]빌헬름 1세는 혁명후 내전상태인 스페인으로 가는 것에 반대했다. 또한 프랑스는 레오폴트가 스페인의 국왕이 되면 스페인과 독일에 둘러쌓이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대의 뜻을 강력히 전달하였다. 결국 1870년 7월 11일 레오폴트는 스페인 왕위 수락을 철회하였다.
프랑스 외교관이 스페인 왕위 포기의 재확인을 위하여 휴양중이던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게 요구한 사건을 [3]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전달했다. 전보를 받은 [3]비스마르크는 내용을 편집하여 언론에 흘렸다. 일명 [4]엠스전보사건으로 프로이센과 프랑스 양국은 서로 분노하였고 여론이 들끓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감정이 악화되자 프랑스의 [5]나폴레옹 3세는 1870년 7월 19일에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등 유럽 열강이 프랑스에 동조하지 않도록 외교정책에 주력했으며 그 결과로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상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제후 국가들은 프로이센편으로 참전하면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뭉친 독일과 프랑스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실전 경험까지 쌓은 프로이센군에게 연속적으로 패배하였고, 이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1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참전하여 진군했으나 [6]스당전투에서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의 패전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1870년 9월 4일 프랑스 제2제정은 붕괴되고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3세는 이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프로이센은 여세를 몰아 9월 15일 파리외곽에 당도하여 [9]알자스-로렌지역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리 방어사령관인 [7]루이 쥘 트로쉬는 이를 거부하고 저항했으나 9월 18일 파리가 포위당했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의 [10]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2]빌헬름 1세는 초대황제로 즉위하고 독일제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수상이자 독일제국의 수상이 되었다.
포위된 파리는 비참한 겨울을 보내고 1871년 1월 28일 항복했고, 휴전협상이 시작되어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프랑스는 50억 프랑을 배상해야 했으며, 알자스-로렌지역을 넘겨주었다. 또한 배상금 완납전까지 프랑스 북부지역에 독일군이 주둔했다.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굴욕, 분노, 상실감과 복수심으로 반독 감정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까지 적대적인 사이가 되었다. 독일은 통일이 완성되어 유럽내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1] 이사벨 2세(Isabel II of Spain, 1830년~1904년) :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유일한 여왕. 여왕이 쫓겨난 후 스페인은 왕위계승의 내분을 겪다가 결국은 이사벨 2세의 왕세자인 알폰소 12세가 즉위하여 스페인은 보르봉 왕조를 계승한다.
[2] 빌헬름 1세(William I,1797년~1888년) : 프로이센의 국왕(1861년~1888년). 독일 제국의 황제(1871년~1888년)
[3]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 프로이센 수상(1862~1890년). 통일독일제국 수상(1871년~1890년)
[4] 엠스전보사건(Ems Dispatch) :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독일 주재 프랑스 대사 사이에 있었던 일을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에게 알리는 내부 전보를 비스마르크가 의도적으로 편집하여 언론에 배포한 사건
[5]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년~1873년) :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초대 대통령(재임,1848년 12월 20일~1852년 12월 2일)이자 프랑스 제2제국의 유일한 황제(재위,1852년 12월 2일~1870년 9월 4일)
[6] 스당(Sedan) : 프랑스 아르덴주에 위치한 코뮌(프랑스 공화국의 최하위 행정구역)중 하나
[7] 루이 쥘 트로쉬(Louis Jules Trochu, 1815년~1896년) : 프랑스의 군 장교이자 정치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중 국민방위정부 수반
[8]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 1797년~1877년) : 프랑스 제3공화국 임시정부 수반. 제2대 대통령(1871년 8월 31일~1873년 5월 24일)
[9]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 : 프랑스와 독일사이에 위치한 프랑스 행정 구역. 프랑스와 독일사이의 주요한 분쟁지역
[10]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 : 프랑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가량 떨어진 베르사유 시에 있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건설한 궁전.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루이 14세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레오폴트는 처음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프로이센 왕국의 [2]빌헬름 1세는 혁명후 내전상태인 스페인으로 가는 것에 반대했다. 또한 프랑스는 레오폴트가 스페인의 국왕이 되면 스페인과 독일에 둘러쌓이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대의 뜻을 강력히 전달하였다. 결국 1870년 7월 11일 레오폴트는 스페인 왕위 수락을 철회하였다.
프랑스 외교관이 스페인 왕위 포기의 재확인을 위하여 휴양중이던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게 요구한 사건을 [3]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전달했다. 전보를 받은 [3]비스마르크는 내용을 편집하여 언론에 흘렸다. 일명 [4]엠스전보사건으로 프로이센과 프랑스 양국은 서로 분노하였고 여론이 들끓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감정이 악화되자 프랑스의 [5]나폴레옹 3세는 1870년 7월 19일에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등 유럽 열강이 프랑스에 동조하지 않도록 외교정책에 주력했으며 그 결과로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상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제후 국가들은 프로이센편으로 참전하면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뭉친 독일과 프랑스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실전 경험까지 쌓은 프로이센군에게 연속적으로 패배하였고, 이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1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참전하여 진군했으나 [6]스당전투에서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의 패전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1870년 9월 4일 프랑스 제2제정은 붕괴되고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3세는 이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프로이센은 여세를 몰아 9월 15일 파리외곽에 당도하여 [9]알자스-로렌지역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리 방어사령관인 [7]루이 쥘 트로쉬는 이를 거부하고 저항했으나 9월 18일 파리가 포위당했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의 [10]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2]빌헬름 1세는 초대황제로 즉위하고 독일제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수상이자 독일제국의 수상이 되었다.
포위된 파리는 비참한 겨울을 보내고 1871년 1월 28일 항복했고, 휴전협상이 시작되어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프랑스는 50억 프랑을 배상해야 했으며, 알자스-로렌지역을 넘겨주었다. 또한 배상금 완납전까지 프랑스 북부지역에 독일군이 주둔했다.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굴욕, 분노, 상실감과 복수심으로 반독 감정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까지 적대적인 사이가 되었다. 독일은 통일이 완성되어 유럽내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1] 이사벨 2세(Isabel II of Spain, 1830년~1904년) :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유일한 여왕. 여왕이 쫓겨난 후 스페인은 왕위계승의 내분을 겪다가 결국은 이사벨 2세의 왕세자인 알폰소 12세가 즉위하여 스페인은 보르봉 왕조를 계승한다.
[2] 빌헬름 1세(William I,1797년~1888년) : 프로이센의 국왕(1861년~1888년). 독일 제국의 황제(1871년~1888년)
[3]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 프로이센 수상(1862~1890년). 통일독일제국 수상(1871년~1890년)
[4] 엠스전보사건(Ems Dispatch) :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독일 주재 프랑스 대사 사이에 있었던 일을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에게 알리는 내부 전보를 비스마르크가 의도적으로 편집하여 언론에 배포한 사건
[5]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년~1873년) :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초대 대통령(재임,1848년 12월 20일~1852년 12월 2일)이자 프랑스 제2제국의 유일한 황제(재위,1852년 12월 2일~1870년 9월 4일)
[6] 스당(Sedan) : 프랑스 아르덴주에 위치한 코뮌(프랑스 공화국의 최하위 행정구역)중 하나
[7] 루이 쥘 트로쉬(Louis Jules Trochu, 1815년~1896년) : 프랑스의 군 장교이자 정치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중 국민방위정부 수반
[8]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 1797년~1877년) : 프랑스 제3공화국 임시정부 수반. 제2대 대통령(1871년 8월 31일~1873년 5월 24일)
[9]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 : 프랑스와 독일사이에 위치한 프랑스 행정 구역. 프랑스와 독일사이의 주요한 분쟁지역
[10]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 : 프랑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가량 떨어진 베르사유 시에 있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건설한 궁전.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루이 14세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미국은 1866년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 사건의 책임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제국주의 시절 횡행하던 강제 개항을 시킬 의도로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강화해협을 거슬러 침공한 사건이다.
강력한 근대식 신식 화기로 무장하고 인디언 전쟁과 남북전쟁 등을 거치며 단련된 미 해군에게 병력과 화력 모두 열세였던 조선군은 참패하였으나 조선군의 야간 기습으로 미 해군 함정 한 척을 패퇴시키는등. 악착같이 덤벼드는 조선군에게 질려버려 광성보를 점령한 바로 다음날인 6월 11일에 철군하였다.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조선에서는 신미년 조선과 서양(미국)사이에 발생한 전쟁 또는 소동이란 의미를 갖고 있어 신미양요라 하며 미국은 1871년 미-한 전쟁(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 혹은 간단히 조선 원정(Korean Expedition to Korea)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강력한 근대식 신식 화기로 무장하고 인디언 전쟁과 남북전쟁 등을 거치며 단련된 미 해군에게 병력과 화력 모두 열세였던 조선군은 참패하였으나 조선군의 야간 기습으로 미 해군 함정 한 척을 패퇴시키는등. 악착같이 덤벼드는 조선군에게 질려버려 광성보를 점령한 바로 다음날인 6월 11일에 철군하였다.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조선에서는 신미년 조선과 서양(미국)사이에 발생한 전쟁 또는 소동이란 의미를 갖고 있어 신미양요라 하며 미국은 1871년 미-한 전쟁(United States-Korea War of 1871) 혹은 간단히 조선 원정(Korean Expedition to Korea)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19세기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 통치 아래 있었으며, 필리핀 원주민들은 심각한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었다. 특히 [2]포로스라는 강제 노동 제도와 과도한 세금 부과로 인해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또한, 1868년 스페인 본국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며 필리핀에서도 개혁의 기대가 있었지만, 보수적인 스페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식민 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필리핀인 군인과 노동자들에게 주어졌던 세금 감면 등의 특혜가 철회되었다. 이는 군부와 노동 계층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72년 1월 20일 밤, [1]카비테 해군 조선소의 필리핀인 군인들과 노동자들이 스페인 식민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조선소와 일부 군사 시설을 점령하려 계획했지만 사전에 [3]마누엘 솔라노라는 스페인 장교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스페인 군대는 신속히 대응하여 반란군을 제압하였다. 이후 필리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스페인 정부는 반란에 가담한 군인과 노동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 또한 필리핀 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반란과 관련이 없던 필리핀 [4]고모부르자 사제인 마리아노 고메스(Mariano Gó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삼오라(Jacinto Zamora)를 반역죄로 몰아 1872년 2월 17일 마닐라의 바고움바얀(Bagumbayan)광장에서 공개 처형하였다. 이들은 필리핀의 독립운동에 깊은 영향을 준 인물들로 그들의 처형은 민족주의 감정을 더욱 고조시켰다.
카비테 반란과 [4]고모부르자 사제 처형은 필리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필리핀 지식인 계층과 개혁주의자들은 스페인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을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1896년 필리핀 혁명으로 이어졌다.
카비테 반란은 단순한 군사적 봉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스페인 당국의 강경 대응은 필리핀 민족주의자들의 저항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으며, 이후 필리핀의 독립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반란은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불만에서 비롯된 군사 반란이었지만, 스페인 정부가 이를 과장하고 가혹하게 진압하면서 필리핀 국민들에게 스페인 통치의 부당함을 각인시켰다. 결과적으로 카비테 반란은 필리핀 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1] 카비테(Cavite) : 필리핀 루손섬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
[2] 포로스(Polo y Servicios) : 스페인 식민지 시대 필리핀에서 16~60세의 남성이 일정 기간 강제 노동에 동원되던 의무 노동 제도
[3] 마누엘 솔라노(Manuel Solano) : 카비테 반란 당시 스페인 식민 정부에 반란 계획을 밀고하여 스페인군이 사전에 대비하고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스페인 장교
[4] 고모부르자(Gomburza) : 카비테 반란 이후 스페인 식민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된 필리핀의 세 명의 가톨릭 사제 마리아노 고메스(Mariano Gó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삼오라(Jacinto Zamora)를 지칭하며, 이들의 처형은 필리핀 독립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868년 스페인 본국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며 필리핀에서도 개혁의 기대가 있었지만, 보수적인 스페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식민 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필리핀인 군인과 노동자들에게 주어졌던 세금 감면 등의 특혜가 철회되었다. 이는 군부와 노동 계층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72년 1월 20일 밤, [1]카비테 해군 조선소의 필리핀인 군인들과 노동자들이 스페인 식민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조선소와 일부 군사 시설을 점령하려 계획했지만 사전에 [3]마누엘 솔라노라는 스페인 장교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스페인 군대는 신속히 대응하여 반란군을 제압하였다. 이후 필리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스페인 정부는 반란에 가담한 군인과 노동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 또한 필리핀 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반란과 관련이 없던 필리핀 [4]고모부르자 사제인 마리아노 고메스(Mariano Gó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삼오라(Jacinto Zamora)를 반역죄로 몰아 1872년 2월 17일 마닐라의 바고움바얀(Bagumbayan)광장에서 공개 처형하였다. 이들은 필리핀의 독립운동에 깊은 영향을 준 인물들로 그들의 처형은 민족주의 감정을 더욱 고조시켰다.
카비테 반란과 [4]고모부르자 사제 처형은 필리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필리핀 지식인 계층과 개혁주의자들은 스페인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을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1896년 필리핀 혁명으로 이어졌다.
카비테 반란은 단순한 군사적 봉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스페인 당국의 강경 대응은 필리핀 민족주의자들의 저항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으며, 이후 필리핀의 독립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반란은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불만에서 비롯된 군사 반란이었지만, 스페인 정부가 이를 과장하고 가혹하게 진압하면서 필리핀 국민들에게 스페인 통치의 부당함을 각인시켰다. 결과적으로 카비테 반란은 필리핀 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1] 카비테(Cavite) : 필리핀 루손섬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
[2] 포로스(Polo y Servicios) : 스페인 식민지 시대 필리핀에서 16~60세의 남성이 일정 기간 강제 노동에 동원되던 의무 노동 제도
[3] 마누엘 솔라노(Manuel Solano) : 카비테 반란 당시 스페인 식민 정부에 반란 계획을 밀고하여 스페인군이 사전에 대비하고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스페인 장교
[4] 고모부르자(Gomburza) : 카비테 반란 이후 스페인 식민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된 필리핀의 세 명의 가톨릭 사제 마리아노 고메스(Mariano Gó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삼오라(Jacinto Zamora)를 지칭하며, 이들의 처형은 필리핀 독립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은 프랑스가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고 베트남 남부의 식민지 지배를 공식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베트남 북부에서도 프랑스의 상업적·정치적 개입을 허용하는 조치들이 포함되었으며 결국 베트남 전역이 프랑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1862년 제1차 사이공 조약을 통해 베트남이 [2]사이공과 남부 일부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넘어 [3]코친차이나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지속했다. 1867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여 [3]코친차이나 전체를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었고 이후 북부 베트남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러던 중 1873년, 프랑스 해군의 [4]프란시스 가르니에가 하노이를 침공하여 프랑스의 북부 진출이 현실화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1]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와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결국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코친차이나 전역에 대한 지배를 공식화하였다. 제1차 사이공 조약에서는 일부 지역만 프랑스에 할양되었지만 이번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의 통치권이 베트남 남부 전체로 확대되었다. 이로써 코친차이나는 프랑스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으며 베트남의 주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또한, 조약에서는 베트남의 독립을 명목상 인정하는 조항이 포함되었지만 이는 형식적인 선언에 불과했다. 기존의 속국 관계를 유지하던 당시 청나라의 조공 체계가 폐지되고 베트남이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된다고 명시되었지만 이는 베트남을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한 조치였다. 오히려 베트남이 청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프랑스의 간섭이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프랑스는 조약을 통해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의 경제적 이권을 확대하였다. 조약에 따라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베트남의 주요 항구가 프랑스 상인들에게 개방되었으며 프랑스는 이를 통해 베트남 내 무역을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은 하노이에서 철수하기로 했지만 이는 단기적인 조치에 불과했으며 이후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 북부를 통제하기 위한 전략을 추진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은 프랑스가 베트남의 식민 지배를 확고하게 다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베트남 남부를 완전히 통제하는 동시에 북부 지역에서도 경제적·정치적 개입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이후 베트남이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용한 지역이다.
[4] 프란시스 가르니에(Francis Garnier, 1839년 7월 25일~1873년 12월 21) : 19세기 프랑스의 해군 장교이자 탐험가로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과 식민지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메콩강 탐사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정복 과정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하노이에서 베트남군과 중국 용병(흑기군)으로 이루어진 전투에서 사망
1862년 제1차 사이공 조약을 통해 베트남이 [2]사이공과 남부 일부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넘어 [3]코친차이나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지속했다. 1867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여 [3]코친차이나 전체를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었고 이후 북부 베트남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러던 중 1873년, 프랑스 해군의 [4]프란시스 가르니에가 하노이를 침공하여 프랑스의 북부 진출이 현실화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1]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와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결국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코친차이나 전역에 대한 지배를 공식화하였다. 제1차 사이공 조약에서는 일부 지역만 프랑스에 할양되었지만 이번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의 통치권이 베트남 남부 전체로 확대되었다. 이로써 코친차이나는 프랑스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으며 베트남의 주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또한, 조약에서는 베트남의 독립을 명목상 인정하는 조항이 포함되었지만 이는 형식적인 선언에 불과했다. 기존의 속국 관계를 유지하던 당시 청나라의 조공 체계가 폐지되고 베트남이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된다고 명시되었지만 이는 베트남을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한 조치였다. 오히려 베트남이 청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프랑스의 간섭이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프랑스는 조약을 통해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의 경제적 이권을 확대하였다. 조약에 따라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베트남의 주요 항구가 프랑스 상인들에게 개방되었으며 프랑스는 이를 통해 베트남 내 무역을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은 하노이에서 철수하기로 했지만 이는 단기적인 조치에 불과했으며 이후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 북부를 통제하기 위한 전략을 추진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은 프랑스가 베트남의 식민 지배를 확고하게 다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베트남 남부를 완전히 통제하는 동시에 북부 지역에서도 경제적·정치적 개입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이후 베트남이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용한 지역이다.
[4] 프란시스 가르니에(Francis Garnier, 1839년 7월 25일~1873년 12월 21) : 19세기 프랑스의 해군 장교이자 탐험가로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과 식민지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메콩강 탐사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정복 과정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하노이에서 베트남군과 중국 용병(흑기군)으로 이루어진 전투에서 사망
[1]류큐 왕국은 일본과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관계에 있었다. 일본이 1609년 류큐 침공이후 [2]사쓰마번의 속국이 되었지만 독립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100% 실효재배는 아니어도 명목상 지배를 하고 있었다.
1871년 10월, [1]류큐왕국 소속 선원 66명이 귀국도중 태풍으로 타이완 남부에서 조난당했다. 이들은 타이완 남부에 거주하던 [3]파이완족 원주민 지역에 상륙했는데, 그 과정에서 54명이 살해당했다. 생존자들은 당시 청나라 관료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이 사건은 일본 내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일본 정부는 이 일을 류큐인에 대한 외국인의 침해로 간주하고 이를 구실로 대만 원주민 지역에 무력 개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만은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청 정부는 대만의 남부 산악 지역의 원주민 사회는 중화문화권 밖이라 직접적인 지배를 하지 않았다.
1874년 5월 5일, 일본은 약 3,600명의 병력을 대만 남부로 파병했다. 이는 일본이 [4]메이지 유신이후 해외에서 처음 벌인 군사 작전이었다. 일본군은 [5]모란사 지역을 중심으로 [3]파이완족과 충돌했다. 전투는 치열했으나 현대식 무기와 조직된 병력을 갖춘 일본군이 우세하여 원주민 사회를 압도하여 7월 1일 전투는 끝났다.
이 군사 행동에 대해 청나라는 군사 수천명을 대만에 파병하였고, 영국의 중재로 일본과 협상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청나라는 일본이 대만에 출병한 사실이 자국민 보호 조치였음을 인정하여 보상금 50만을 지불하고, 대만 남부 원주민 지역을 좀 더 적극적으로 통치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실질적으로 전투를 통해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고, 청나라는 대만에 대한 통치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4]메이지유신 이후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대외 확장의 첫 사례였으며 류큐국을 일본에 합병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는 약점을 드러내어 이후 청일전쟁 결과로 대만을 넘겨주는 흐름을 형성했다. 그리고 대만의 원주민 사회에 외부 세력의 강제적 통치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류큐왕국 : 1429s년부터 1879년까지 오키나와 제도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독립 왕국이다. 중국과 일본 모두에 조공을 바치며 해상 무역 중심지로 번영했다. 1879년 일본에 의해 병합되어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2] 사쓰마 번 : 일본 에도시대 규슈 남부의 사쓰마 국. 현재의 가고시마현 전역과 미야자키현의 남서부에 속해 있다
[3] 파이완족(排灣族, Paiwan people) : 타이완 남부에 거주하는 원주민으로 고산족의 한 종족
[4]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 1868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 개혁으로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로 전환하면서 정치, 사회, 경제, 군사 전반에 걸친 근대 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5] 모란사(牡丹社) : 현재의 대만의 핑둥현
1871년 10월, [1]류큐왕국 소속 선원 66명이 귀국도중 태풍으로 타이완 남부에서 조난당했다. 이들은 타이완 남부에 거주하던 [3]파이완족 원주민 지역에 상륙했는데, 그 과정에서 54명이 살해당했다. 생존자들은 당시 청나라 관료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이 사건은 일본 내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일본 정부는 이 일을 류큐인에 대한 외국인의 침해로 간주하고 이를 구실로 대만 원주민 지역에 무력 개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만은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청 정부는 대만의 남부 산악 지역의 원주민 사회는 중화문화권 밖이라 직접적인 지배를 하지 않았다.
1874년 5월 5일, 일본은 약 3,600명의 병력을 대만 남부로 파병했다. 이는 일본이 [4]메이지 유신이후 해외에서 처음 벌인 군사 작전이었다. 일본군은 [5]모란사 지역을 중심으로 [3]파이완족과 충돌했다. 전투는 치열했으나 현대식 무기와 조직된 병력을 갖춘 일본군이 우세하여 원주민 사회를 압도하여 7월 1일 전투는 끝났다.
이 군사 행동에 대해 청나라는 군사 수천명을 대만에 파병하였고, 영국의 중재로 일본과 협상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청나라는 일본이 대만에 출병한 사실이 자국민 보호 조치였음을 인정하여 보상금 50만을 지불하고, 대만 남부 원주민 지역을 좀 더 적극적으로 통치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실질적으로 전투를 통해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고, 청나라는 대만에 대한 통치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4]메이지유신 이후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대외 확장의 첫 사례였으며 류큐국을 일본에 합병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는 약점을 드러내어 이후 청일전쟁 결과로 대만을 넘겨주는 흐름을 형성했다. 그리고 대만의 원주민 사회에 외부 세력의 강제적 통치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류큐왕국 : 1429s년부터 1879년까지 오키나와 제도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독립 왕국이다. 중국과 일본 모두에 조공을 바치며 해상 무역 중심지로 번영했다. 1879년 일본에 의해 병합되어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2] 사쓰마 번 : 일본 에도시대 규슈 남부의 사쓰마 국. 현재의 가고시마현 전역과 미야자키현의 남서부에 속해 있다
[3] 파이완족(排灣族, Paiwan people) : 타이완 남부에 거주하는 원주민으로 고산족의 한 종족
[4]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 1868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 개혁으로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로 전환하면서 정치, 사회, 경제, 군사 전반에 걸친 근대 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5] 모란사(牡丹社) : 현재의 대만의 핑둥현
1875년 일본의 군함인 운요호(운양호)가 조선 해안 탐사를 빙자해 강화해협에 불법으로 침입하여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진에서 조선군과 교전하였으며 일본군은 강화도와 영종도를 습격하고 양민 학살과 주변 방화 등의 만행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의 빌미가 되었다.
'강화도 사건’으로도 불린다.
'강화도 사건’으로도 불린다.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1873년에 흥선대원이 하야하면서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완화되는 등 변화가 발생하였다.
일본내부에 조선을 정벌하야야 한다는 정한론이 대두되었고, 이에 일본은 1875년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도를 공격하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측 대표 신헌과 일본 측 대표 구로다 사이에 조약 관련 협의가 진행되었으며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평가
(제2조)양국은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교제 사무를 협의한다
(제5조)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하도록 허용한다
-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게 함으로써 통상 업무 이외에 정치적·군사적 침략 의도가 내포
(제7조)조선은 연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용한다
- 조선 연안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군사작전 시 상륙 지점을 정탐
(제10조)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 영사재판권(치외법권)을 인정한 불평등조약
(제11조)양국 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 장정을 체결한다
다른 명칭으로는 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이다.
조선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은 척사위정세력과 개화 세력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정책적 전환점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익현(1834년~1907년) : 철종부터 고종까지 조선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 항일운동가
일본내부에 조선을 정벌하야야 한다는 정한론이 대두되었고, 이에 일본은 1875년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도를 공격하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측 대표 신헌과 일본 측 대표 구로다 사이에 조약 관련 협의가 진행되었으며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평가
(제2조)양국은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교제 사무를 협의한다
(제5조)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하도록 허용한다
-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게 함으로써 통상 업무 이외에 정치적·군사적 침략 의도가 내포
(제7조)조선은 연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용한다
- 조선 연안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군사작전 시 상륙 지점을 정탐
(제10조)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 영사재판권(치외법권)을 인정한 불평등조약
(제11조)양국 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 장정을 체결한다
다른 명칭으로는 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이다.
조선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은 척사위정세력과 개화 세력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정책적 전환점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익현(1834년~1907년) : 철종부터 고종까지 조선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 항일운동가
미국 몬태나주의 리틀 빅혼 카운티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연합과 미국 육군 7기병연대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사건은 사우스다코다와 와이오밍 주 사이에 위치한 블랙 힐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서부개척사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금을 찾아 인디언 보호 구역을 침범했고, 이 과정에서 인디언과 미국 이주민들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원주민인 수족의 추장 '앉은황소(Sitting Bull)'과 샤이안족 '미친말(Crazy Horse)'과 연합하여 몬태나 남부의 리틀 빅혼 강 유역에 대규 캠프를 편성했고, 이에 맞서 미국정부도 테리, 기번, 크룩 등 세 명의 사령관이 부대를 이끌고 해당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카스타 중령은 657명의 부하를 이끄는 연대장으로 테리 장군 휘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1876년 6월 25일, 테리 준장은 카스타 중령의 제7기병 연대를 선봉으로 블랙 힐에 진입한다. 테리 준장은 카스타 중령에게 기병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예기치 않게 리틀 빅혼 강가에서 40여 명의 원주민 전사와 맞닥뜨리자 전략을 수정한다. 원주민 전체 부대에 미 기병대의 출진 사실이 전달되기 전에 공격을 개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수족의 전사 수가 2000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던 카스타 중령은 제7기병 연대를 3개 대대로 분산해 진격하였다. 하지만 곧 175명으로 이루어진 1개 대대는 강한 반격에 당황해 강을 건너 후퇴했고, 수족과 샤이엔족 연합군은 그들을 맹렬히 쫓았다. 그사이 카스타 중령이 이끌던 본대 210명도 미친말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 밀려 수천 명의 원주민에게 포위된 채 완전 고립되었다. 그들은 후방 지원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텨보려 했으나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당한다. 카스타 중령도 전사한다. 이날 전투에서 원주민은 27명이 전사한 데 반해 카스타 부대는 300명 이상 사망했다.
이 전투는 미국 원주민 전투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이며 미국정부의 가장 치명적인 패배였다.
이 장소는 1879년 1월 29일 전쟁 장관에 의해 국립 묘지로 지정되었고, 1881년에는 제7기병대의 병사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 윗편의 라스트 스탠드 힐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1991년 미국 의회는 땅을 지키려는 원주민들의 역할을 반영하여 이 장소의 이름을 바꿀 것을 요청했고, 1996년에는 원주민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을 짓는 공모전이 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병대 대원들이 사망한 자리에는 하얀 대리석 표석이 들어섰고, 현재는 붉은 화강암 표석이 원주민 전사들이 죽음을 맞이한 자리도 똑같이 알려 주고 있다.
리틀 빅혼 전투의 승리는 사실 향후 원주민들의 불행한 운명을 크게 바꿔 놓지는 못하였다. 이 전투 이후 대규모 군사 행동이 전개되었고 원주민들은 대부분 집단 학살되거나 캐나다로 쫓겨나게 되었다. 수장이었던 앉은황소는 5년 뒤인 1890년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기 위한 인디언들의 최후의 노력과 꺾이지 않는 강렬한 투지를 오늘날까지도 생생히 보여 주고 있다.
사건은 사우스다코다와 와이오밍 주 사이에 위치한 블랙 힐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서부개척사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금을 찾아 인디언 보호 구역을 침범했고, 이 과정에서 인디언과 미국 이주민들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원주민인 수족의 추장 '앉은황소(Sitting Bull)'과 샤이안족 '미친말(Crazy Horse)'과 연합하여 몬태나 남부의 리틀 빅혼 강 유역에 대규 캠프를 편성했고, 이에 맞서 미국정부도 테리, 기번, 크룩 등 세 명의 사령관이 부대를 이끌고 해당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카스타 중령은 657명의 부하를 이끄는 연대장으로 테리 장군 휘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1876년 6월 25일, 테리 준장은 카스타 중령의 제7기병 연대를 선봉으로 블랙 힐에 진입한다. 테리 준장은 카스타 중령에게 기병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예기치 않게 리틀 빅혼 강가에서 40여 명의 원주민 전사와 맞닥뜨리자 전략을 수정한다. 원주민 전체 부대에 미 기병대의 출진 사실이 전달되기 전에 공격을 개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수족의 전사 수가 2000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던 카스타 중령은 제7기병 연대를 3개 대대로 분산해 진격하였다. 하지만 곧 175명으로 이루어진 1개 대대는 강한 반격에 당황해 강을 건너 후퇴했고, 수족과 샤이엔족 연합군은 그들을 맹렬히 쫓았다. 그사이 카스타 중령이 이끌던 본대 210명도 미친말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 밀려 수천 명의 원주민에게 포위된 채 완전 고립되었다. 그들은 후방 지원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텨보려 했으나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당한다. 카스타 중령도 전사한다. 이날 전투에서 원주민은 27명이 전사한 데 반해 카스타 부대는 300명 이상 사망했다.
이 전투는 미국 원주민 전투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이며 미국정부의 가장 치명적인 패배였다.
이 장소는 1879년 1월 29일 전쟁 장관에 의해 국립 묘지로 지정되었고, 1881년에는 제7기병대의 병사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 윗편의 라스트 스탠드 힐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1991년 미국 의회는 땅을 지키려는 원주민들의 역할을 반영하여 이 장소의 이름을 바꿀 것을 요청했고, 1996년에는 원주민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을 짓는 공모전이 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병대 대원들이 사망한 자리에는 하얀 대리석 표석이 들어섰고, 현재는 붉은 화강암 표석이 원주민 전사들이 죽음을 맞이한 자리도 똑같이 알려 주고 있다.
리틀 빅혼 전투의 승리는 사실 향후 원주민들의 불행한 운명을 크게 바꿔 놓지는 못하였다. 이 전투 이후 대규모 군사 행동이 전개되었고 원주민들은 대부분 집단 학살되거나 캐나다로 쫓겨나게 되었다. 수장이었던 앉은황소는 5년 뒤인 1890년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기 위한 인디언들의 최후의 노력과 꺾이지 않는 강렬한 투지를 오늘날까지도 생생히 보여 주고 있다.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은 메이지 유신에서 9년 후인 1877년에 일본에서 발생한 내란이다. 일본의 사무라이 반란 중 최대 규모였으며 일본 역사상 마지막 내전이다.
한국에는 한자를 한국식으로 음역한 서남전쟁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름 그대로 일본 4대 섬의 서남부에 해당하는 규슈(구마모토현, 미야자키현, 가고시마현)에서 벌어졌다. 한때 메이지 유신에 찬동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공헌을 했고 당연히 그 대가로 신정부 군대에서 복무할 것으로 여겼던 무사들은 신정부(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으로 커다란 배신감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에 사무라이들이 규슈의 사쓰마 번에 모여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메이지 정부는 이를 8개월에 걸쳐 어렵게 진압하였다.
반란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있던 사무라이 계급이 사라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신생 일본국에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안겼다.
* 번(藩) : 제후가 맡아 다스리는 제후국을 가리키는 말. 일본에서는 다이묘(봉건영주)들이 통치하던 영지
* 사이고 다카모리(1828년~1877년) : 일본 에도 시대, 메이지 시대의 군인이자 정치가. 세이난 전쟁의 패배 후 할복하였다
* 사무라이 : 일본 봉건 시대의 무사계급
한국에는 한자를 한국식으로 음역한 서남전쟁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름 그대로 일본 4대 섬의 서남부에 해당하는 규슈(구마모토현, 미야자키현, 가고시마현)에서 벌어졌다. 한때 메이지 유신에 찬동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공헌을 했고 당연히 그 대가로 신정부 군대에서 복무할 것으로 여겼던 무사들은 신정부(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으로 커다란 배신감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에 사무라이들이 규슈의 사쓰마 번에 모여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메이지 정부는 이를 8개월에 걸쳐 어렵게 진압하였다.
반란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있던 사무라이 계급이 사라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신생 일본국에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안겼다.
* 번(藩) : 제후가 맡아 다스리는 제후국을 가리키는 말. 일본에서는 다이묘(봉건영주)들이 통치하던 영지
* 사이고 다카모리(1828년~1877년) : 일본 에도 시대, 메이지 시대의 군인이자 정치가. 세이난 전쟁의 패배 후 할복하였다
* 사무라이 : 일본 봉건 시대의 무사계급
1차 영국-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독립하여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던 도스트 무함마드가 사망하면서 이후 계승한 지도자는 영국에 적대적이라 영국에 많은 모욕을 주었다. 이에 분개한 영국은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이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은 패배하였으며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1919년에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게 된다.
* 도스트 모하마드(Dost Mohammad, 1793년~1863년) : 아프가니스탄 바라크자이 왕조(아프카니스탄 아미르국 - Emirate of Afghanistan, 1826 ~ 1919)의 창시자. 아미르국은 1919년 이후 아프카니스탄 왕국(1919년~1973년)이라 한다
이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은 패배하였으며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1919년에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게 된다.
* 도스트 모하마드(Dost Mohammad, 1793년~1863년) : 아프가니스탄 바라크자이 왕조(아프카니스탄 아미르국 - Emirate of Afghanistan, 1826 ~ 1919)의 창시자. 아미르국은 1919년 이후 아프카니스탄 왕국(1919년~1973년)이라 한다
태평양 전쟁은 1879년 4월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 세 나라가 아타카마 사막의 초석 광산 지대를 놓고 일어난 분쟁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다.
초석 전쟁(硝石戰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태평양 연안 지역인 안토파가스타는 원래 볼리비아의 영토였으며 볼리비아의 유일한 태평양 출구였다. 이 지역의 볼리비아내 칠레광업기업에게 과세 혜택등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조약을 파기하고 칠레의 기업에 과세를 강화하자 칠레군이 볼리비아를 공격하여 안토파가스타 주를 점령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때마침 세나라 모두 경제 공황에 빠져있었던 상태라서 이 광산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동맹을 체결하여 칠레군에게 맞섰으나 해상 및 지상군까지 칠레군에게 연패하여 볼리비아는 안데스 산맥 너머 본토로 쫓겨났으며 페루는 수도 리마가 함락되면서 항전불가상태가 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결과는 볼리비아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을 페루는 타라파카, 아리카, 타크나등이 칠레의 영토로 병합되면서 칠레의 영토는 확장되었다. 이 때문에 볼리비아는 바다로 이어지는 영토를 잃고 내륙국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광물 자원 수출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이루게 된다.
1929년 페루에게 타크나 지역을 돌려주었으나 볼리비아와는 아직도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영유권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 :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서쪽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사막. 황무지같지만 광물자원이 풍부한 노다지 땅이며 원래는 볼리비아령이었으나 위 전쟁으로 칠레로 넘어갔다.
* 초석 : 무색무취의 무기물 결정. 질산칼륨 분자 KNO3의 광물 형태. 구성물질인 질소와 칼륨이 모두 비료의 주 원료이나 역사적으로 초석은 흑색화약의 원료였다.
* 타라파카(Tarapacá) : 칠레의 북쪽에 있는 도시이며 볼리비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 안토파가스타(Antofagast) : 칠레 북쪽지방의 항구도시
* 아리카(Arica) : 칠레 북쪽지방에 있는 항구도시
* 타크나(Tacna) : 페루 남부 칠레 국경 근처에 있는 도시
초석 전쟁(硝石戰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태평양 연안 지역인 안토파가스타는 원래 볼리비아의 영토였으며 볼리비아의 유일한 태평양 출구였다. 이 지역의 볼리비아내 칠레광업기업에게 과세 혜택등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조약을 파기하고 칠레의 기업에 과세를 강화하자 칠레군이 볼리비아를 공격하여 안토파가스타 주를 점령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때마침 세나라 모두 경제 공황에 빠져있었던 상태라서 이 광산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동맹을 체결하여 칠레군에게 맞섰으나 해상 및 지상군까지 칠레군에게 연패하여 볼리비아는 안데스 산맥 너머 본토로 쫓겨났으며 페루는 수도 리마가 함락되면서 항전불가상태가 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결과는 볼리비아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을 페루는 타라파카, 아리카, 타크나등이 칠레의 영토로 병합되면서 칠레의 영토는 확장되었다. 이 때문에 볼리비아는 바다로 이어지는 영토를 잃고 내륙국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광물 자원 수출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이루게 된다.
1929년 페루에게 타크나 지역을 돌려주었으나 볼리비아와는 아직도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영유권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 :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서쪽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사막. 황무지같지만 광물자원이 풍부한 노다지 땅이며 원래는 볼리비아령이었으나 위 전쟁으로 칠레로 넘어갔다.
* 초석 : 무색무취의 무기물 결정. 질산칼륨 분자 KNO3의 광물 형태. 구성물질인 질소와 칼륨이 모두 비료의 주 원료이나 역사적으로 초석은 흑색화약의 원료였다.
* 타라파카(Tarapacá) : 칠레의 북쪽에 있는 도시이며 볼리비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 안토파가스타(Antofagast) : 칠레 북쪽지방의 항구도시
* 아리카(Arica) : 칠레 북쪽지방에 있는 항구도시
* 타크나(Tacna) : 페루 남부 칠레 국경 근처에 있는 도시
1880년에 제2차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이 청의 외교관 황준헌(황쭌셴)의 '조선책략'을 국내에 가지고 돌아왔으며 내용은 러시아의 서양 공략을 막기위하여 조선은 중국을 가까이하며 일본과 관계를 공고히 하고 미국과 연계하여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 이며 이는 곧 '친중국','결일본','연미국'으로 정리된다.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확인받고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주선하였다. 미국과 수교를 맺는데 '조선책략'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제물포에서 이홍장이 중재하는 가운데 조선 측에서는 신헌, 김홍집이 전권대사로, 미국 측은 전권위원 로버트 슈펠트가 참가한 가운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조약의 내용은 앞서 맺은 조일수호조규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등한 항목이 많았다. 그것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조약 초안 작성에 직접 개입했고, 미국이 동아시아에 개입이나 관심 정도가 아직까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은 최혜국 대우 조항으로 인해 후일 구미 국가와 같은 조건으로 조선에서의 제반 권리를 향유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구미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로버트 윌슨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 1822년~1895년) : 미국의 해군 제독이자 외교관
*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조정 말기의 한족계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청나라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 신헌(1810년~1884년) : 조선 말의 무신이자 외교관
* 김홍집(1842년~1896년) :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온건개화파
* 황준헌(1848년~1905년) : 중국 청나라의 외교관 겸 정치가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확인받고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주선하였다. 미국과 수교를 맺는데 '조선책략'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제물포에서 이홍장이 중재하는 가운데 조선 측에서는 신헌, 김홍집이 전권대사로, 미국 측은 전권위원 로버트 슈펠트가 참가한 가운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조약의 내용은 앞서 맺은 조일수호조규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등한 항목이 많았다. 그것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조약 초안 작성에 직접 개입했고, 미국이 동아시아에 개입이나 관심 정도가 아직까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은 최혜국 대우 조항으로 인해 후일 구미 국가와 같은 조건으로 조선에서의 제반 권리를 향유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구미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로버트 윌슨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 1822년~1895년) : 미국의 해군 제독이자 외교관
*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조정 말기의 한족계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청나라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 신헌(1810년~1884년) : 조선 말의 무신이자 외교관
* 김홍집(1842년~1896년) :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온건개화파
* 황준헌(1848년~1905년) : 중국 청나라의 외교관 겸 정치가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이나 밀린 급료 중 1개월분을 지불하였는데 급료내역이 겨와 모래가 섞이고 분량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불량쌀을 지급해 일어난 군란이다.
조선이 멸망의 길을 걷는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사건이며 이 날을 기점으로 조선왕조는 회생불가의 상태가 되었다.
조선이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여 군인들이 백성들과 함께 손잡고 난을 일으켰을 정도로 조선의 국방력이 사실상 상실되었다.
이 난을 막기위하여 외국 군대(청나라)에게 지원요청을 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 임진왜란 발발시에도 외국군대(명나라)에게 지원요청했듯이 같은 역사가 반복이 되었다. 특히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주둔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이 멸망의 길을 걷는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사건이며 이 날을 기점으로 조선왕조는 회생불가의 상태가 되었다.
조선이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여 군인들이 백성들과 함께 손잡고 난을 일으켰을 정도로 조선의 국방력이 사실상 상실되었다.
이 난을 막기위하여 외국 군대(청나라)에게 지원요청을 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 임진왜란 발발시에도 외국군대(명나라)에게 지원요청했듯이 같은 역사가 반복이 되었다. 특히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주둔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러시아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부동항 획득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계속 남하하여 조선과 통상체결을 원했다.
러시아는 조선과 수교를 위해 청나라에 접근하지만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청나라는 이를 거절하자 청나라의 러시아공사인 베베르를 통하여 조선의 묄레도르프에게 접근하여 교섭하였다. 이에 조선은 러시아 베베르와 외무장관 김병시는 1884년 7월 7일에 한로 조약의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후 베베르는 조선의 러시아공사로 부임하게 된다.
* 묄렌도르프(Möllendorff, 1848년~1901년) : 독일(프로이센왕국)출신의 외교관 겸 언어학자로 조선에서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최초의 서양인.한국이름 목인덕
* 베베르(Weber, 1841년~1910년) :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2년에 청나라의 러시아공사로 부임하였으며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등을 역임
러시아는 조선과 수교를 위해 청나라에 접근하지만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청나라는 이를 거절하자 청나라의 러시아공사인 베베르를 통하여 조선의 묄레도르프에게 접근하여 교섭하였다. 이에 조선은 러시아 베베르와 외무장관 김병시는 1884년 7월 7일에 한로 조약의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후 베베르는 조선의 러시아공사로 부임하게 된다.
* 묄렌도르프(Möllendorff, 1848년~1901년) : 독일(프로이센왕국)출신의 외교관 겸 언어학자로 조선에서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최초의 서양인.한국이름 목인덕
* 베베르(Weber, 1841년~1910년) :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2년에 청나라의 러시아공사로 부임하였으며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등을 역임
이 전쟁은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며 청불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의 하나로서 베트남 [3]응우옌 왕조의 카톨릭 탄압은 프랑스에게 베트남 침공 명분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는 베트남 공략을 적극화하여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내용은 청나라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국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청나라는 거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베트남에 들어와 있던 [1]흑기군은 프랑스 군대를 공격했으며 프랑스는 1883년에 이 세력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하노이를 점령했다.
1884년 8월 프랑스는 베트남으로부터 북상하여 타이완(대만)을 공격하고 청나라 [2]복건성의 함대를 대파했다. 청나라는 프랑스의 도발행위에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해전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육전에서는 청나라가 분전했지만 유리하지 못하였다.
전세가 청나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실권을 쥐고 있던 [4]서태후는 1885년 6월 22일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함으로써 청나라의 종주권은 상실되었다. 그리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전쟁으로로 인해 수천년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는 시초가 된다.
[1] 흑기군 : 유영복이 거느린 사병조직. 중국의 윈난성(운남성)과 베트남 사이의 국경지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2] 푸젠성(복건성) : 중국 남동부의 성. 대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중국의 성
* 청나라 말기의 해군 :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 광동함대
[3] 응우옌 왕조(Nguyen Dynasty) :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의 하나로서 베트남 [3]응우옌 왕조의 카톨릭 탄압은 프랑스에게 베트남 침공 명분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는 베트남 공략을 적극화하여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내용은 청나라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국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청나라는 거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베트남에 들어와 있던 [1]흑기군은 프랑스 군대를 공격했으며 프랑스는 1883년에 이 세력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하노이를 점령했다.
1884년 8월 프랑스는 베트남으로부터 북상하여 타이완(대만)을 공격하고 청나라 [2]복건성의 함대를 대파했다. 청나라는 프랑스의 도발행위에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해전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육전에서는 청나라가 분전했지만 유리하지 못하였다.
전세가 청나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실권을 쥐고 있던 [4]서태후는 1885년 6월 22일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함으로써 청나라의 종주권은 상실되었다. 그리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전쟁으로로 인해 수천년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는 시초가 된다.
[1] 흑기군 : 유영복이 거느린 사병조직. 중국의 윈난성(운남성)과 베트남 사이의 국경지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2] 푸젠성(복건성) : 중국 남동부의 성. 대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중국의 성
* 청나라 말기의 해군 :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 광동함대
[3] 응우옌 왕조(Nguyen Dynasty) :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1876년 벨기에 국왕 [1]레오폴 2세는 미국의 유명한 탐험가 [2]헨리 모턴 스탠리에게 충분한 재정적 지원을 해주며 콩고 탐험을 의뢰했다. 헨리 스탠리의 탐험 결과 벨기에가 콩고 지역에 진출하게 되자, 아프리카 전역에 산재한 풍부한 지하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유럽 주요 국가들은 너나할것 없이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발벗고 나섰다.
당시 영국은 이집트 카이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및 인도 캘커타를 잇는 이른바 3C정책과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추구했다. 프랑스는 모로코, 알제리를 거점으로 해서 동쪽으로 점령해 나가는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추구했다. 독일은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잇는 3B정책으로 중부유럽과 발칸 지역을 넘어서서 서아시아와 아프리카로까지 세력범위를 확장시키려 했다. 여기에 벨기에, 포르투갈도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나섰다.
이리하여 중동에서는 독일의 3B정책과 영국의 3C정책이 대립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부딪쳤다. 또 모로코에서는 독일과 프랑스가 부딪쳤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졌다.
벨기에의 [1]레오폴드 2세와 독일의 [3]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를 주도하여 콩고분지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분할 문제를 두고 유럽 각국은 협의를 하였다. 이 회의에서 콩고는 자유무역국(중립국)으로 선포하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개인자격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벨기에는 콩고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할 수 있었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화로 1914년 무렵에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모든 지역이 유럽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이렇게 유럽열강들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원주민들의 문화적, 언어적 경계를 무시하고 만들어진 일직선에 가까운 국경선은 130년 지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1] 레오폴 2세(Leopold II of Belgium, 1835년~1909년) : 벨기에왕국의 2대 국왕(재외 1865년~1909년). 아프리카 콩고 식민지를 사유지처럼 사용하면서 수천만 명의 주민을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고 집단살해하였다
[2] 헨리 모턴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년~1904년) : 영국의 탐험가이자 언론인. 아프리카 탐험과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구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1877년부터 1884년까지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후원을 얻어 콩고 지방을 탐험하였다
[3]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 프로이센 수상(재임 : 1862~1890년). 통일독일제국 수상(재임 :1871년~1890년)
당시 영국은 이집트 카이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및 인도 캘커타를 잇는 이른바 3C정책과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추구했다. 프랑스는 모로코, 알제리를 거점으로 해서 동쪽으로 점령해 나가는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추구했다. 독일은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잇는 3B정책으로 중부유럽과 발칸 지역을 넘어서서 서아시아와 아프리카로까지 세력범위를 확장시키려 했다. 여기에 벨기에, 포르투갈도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나섰다.
이리하여 중동에서는 독일의 3B정책과 영국의 3C정책이 대립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부딪쳤다. 또 모로코에서는 독일과 프랑스가 부딪쳤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졌다.
벨기에의 [1]레오폴드 2세와 독일의 [3]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를 주도하여 콩고분지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분할 문제를 두고 유럽 각국은 협의를 하였다. 이 회의에서 콩고는 자유무역국(중립국)으로 선포하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개인자격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벨기에는 콩고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할 수 있었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화로 1914년 무렵에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모든 지역이 유럽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이렇게 유럽열강들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원주민들의 문화적, 언어적 경계를 무시하고 만들어진 일직선에 가까운 국경선은 130년 지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1] 레오폴 2세(Leopold II of Belgium, 1835년~1909년) : 벨기에왕국의 2대 국왕(재외 1865년~1909년). 아프리카 콩고 식민지를 사유지처럼 사용하면서 수천만 명의 주민을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고 집단살해하였다
[2] 헨리 모턴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년~1904년) : 영국의 탐험가이자 언론인. 아프리카 탐험과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구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1877년부터 1884년까지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후원을 얻어 콩고 지방을 탐험하였다
[3]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 프로이센 수상(재임 : 1862~1890년). 통일독일제국 수상(재임 :1871년~1890년)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1]급진개화파 세력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2]온건개화파를 몰아내고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일으킨 정변이다.
1884년(고종 21), 청나라는 [4]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의 일부를 조선에서 철수시켰다. 이를 기회로 삼아 급진개화파는 일본공사의 협조를 얻어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우정국 낙성식이라 불린다)을 계기로 준비한 폭탄으로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폭탄이 불발되자 근처 민가에 불을 질러 축하연 연회장은 소란스러워 졌고, 이를 틈타 정변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 세력은 창덕궁에 있던 고종을 [3]경우궁으로 이동시켜 신병을 확보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들은 창덕궁으로 돌아와 개혁구상이 담긴 14개조 정강을 발표하는 등 개혁을 진행시켜 나갔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조선에 남아 있던 청나라군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12월 6일 청나라 병력이 창덕궁을 공격하자 불리함을 감지한 일본 공사는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급진개화파 군대는 청나라군과 응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흩어져 버렸다.
결국 급진 개화세력의 집권은 저녁 9시경에 시작되어 12월 6일 오후 7시경에 막을 내렸다. 정변이 진행된 시간은 46시간으로 만 이틀이 채 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 청나라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나라와 일본 두나라의 조선에 대한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어 청일전쟁의 불씨가 된다.
정변 주동자는 인천항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김옥균을 제외하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암살되었고 서광범은 병사했으며 박영효는 친일 개화파로 변신하게 된다.
[14개조 정강]
①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신분제 폐지).
③ 전국의 지조법(地組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히 한다(조세제도 개혁).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는 등용한다(내시 제도 폐지).
⑤ 국가에 해독을 끼친 부정한 관리 중에서 그 죄가 심한 자는 처벌한다.
⑥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환곡제 폐지).
⑦ 규장각을 폐지한다(규장각은 세도 정치의 기반으로 변질).
⑧ 순사제도를 시급히 설치하여 도둑을 방지한다(근대적 경잘체도 도입).
⑨ 혜상공국을 혁파한다(특정상인의 특권 폐지).
⑩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군사제도 개혁).
⑫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게 하며 그 밖의 재무 관청은 폐지한다(재정의 일원화).
⑬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입헌 군주제 실시).
⑭ 의정부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정부조직 개편).
[1] 급진개화파 : 일본의 메이지유신(문명개화론)을 모델로 삼아 급진적인 개혁 추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등
[2] 온건개화파 : 중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점진적인 개혁 주장. 김홍집, 김윤식등
[3] 경우궁 :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3대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사당
[4] 청불전쟁(1884년 8월 ~ 1885년 4월) : 베트남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
1884년(고종 21), 청나라는 [4]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의 일부를 조선에서 철수시켰다. 이를 기회로 삼아 급진개화파는 일본공사의 협조를 얻어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우정국 낙성식이라 불린다)을 계기로 준비한 폭탄으로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폭탄이 불발되자 근처 민가에 불을 질러 축하연 연회장은 소란스러워 졌고, 이를 틈타 정변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 세력은 창덕궁에 있던 고종을 [3]경우궁으로 이동시켜 신병을 확보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들은 창덕궁으로 돌아와 개혁구상이 담긴 14개조 정강을 발표하는 등 개혁을 진행시켜 나갔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조선에 남아 있던 청나라군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12월 6일 청나라 병력이 창덕궁을 공격하자 불리함을 감지한 일본 공사는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급진개화파 군대는 청나라군과 응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흩어져 버렸다.
결국 급진 개화세력의 집권은 저녁 9시경에 시작되어 12월 6일 오후 7시경에 막을 내렸다. 정변이 진행된 시간은 46시간으로 만 이틀이 채 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 청나라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나라와 일본 두나라의 조선에 대한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어 청일전쟁의 불씨가 된다.
정변 주동자는 인천항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김옥균을 제외하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암살되었고 서광범은 병사했으며 박영효는 친일 개화파로 변신하게 된다.
[14개조 정강]
①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신분제 폐지).
③ 전국의 지조법(地組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히 한다(조세제도 개혁).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는 등용한다(내시 제도 폐지).
⑤ 국가에 해독을 끼친 부정한 관리 중에서 그 죄가 심한 자는 처벌한다.
⑥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환곡제 폐지).
⑦ 규장각을 폐지한다(규장각은 세도 정치의 기반으로 변질).
⑧ 순사제도를 시급히 설치하여 도둑을 방지한다(근대적 경잘체도 도입).
⑨ 혜상공국을 혁파한다(특정상인의 특권 폐지).
⑩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군사제도 개혁).
⑫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게 하며 그 밖의 재무 관청은 폐지한다(재정의 일원화).
⑬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입헌 군주제 실시).
⑭ 의정부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정부조직 개편).
[1] 급진개화파 : 일본의 메이지유신(문명개화론)을 모델로 삼아 급진적인 개혁 추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등
[2] 온건개화파 : 중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점진적인 개혁 주장. 김홍집, 김윤식등
[3] 경우궁 :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3대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사당
[4] 청불전쟁(1884년 8월 ~ 1885년 4월) : 베트남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
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영국이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면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의 일환인 부동항 획득을 위하여 더 좋은 항만 조건을 지닌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이다.
영국은 거문도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고 불렀다.
청나라의 중재로 러시아, 영국 상호 조선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을 함으로써 영국 함대는 1887년(고종 24년)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주권국인 조선의 양해 없이 점령이 감행된 점과 처리 과정에서도 조선 정부를 배제하고 열강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교섭이 진행된 점에서, 조선의 허약한 국제적 지위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
거문도에는 당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영국해군수병들의 묘가 아직 3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 거문도 : 전라남도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섬으로서 고도·동도·서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략적 경쟁을 뜻한다. 보통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러시아-페르시아 굴리스탄 조약)부터 1907년(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영국은 거문도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고 불렀다.
청나라의 중재로 러시아, 영국 상호 조선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을 함으로써 영국 함대는 1887년(고종 24년)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주권국인 조선의 양해 없이 점령이 감행된 점과 처리 과정에서도 조선 정부를 배제하고 열강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교섭이 진행된 점에서, 조선의 허약한 국제적 지위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
거문도에는 당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영국해군수병들의 묘가 아직 3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 거문도 : 전라남도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섬으로서 고도·동도·서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략적 경쟁을 뜻한다. 보통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러시아-페르시아 굴리스탄 조약)부터 1907년(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갑신정변을 진압한 청군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고자 청나라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1885년(고종 22)에 체결한 조약이다.
조선내 양국 주둔군 철수가 주 내용이며 다음과 같다.
1. 청과 일본 양 군 모두 조선에서 즉시 철수를 시작해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한다.
2. 청과 일본 양국은 조선에 대해 군사 고문을 파견하지 않는다. 조선은 청일 양국이 아닌 제3국에서 1명 이상 수 명의 군인을 초청한다.
3.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
톈진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충돌을 막을 수 있었으나 조약 내용이 애매했기 때문에(제3조) 양국은 10년 후 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실제로 제3조에 의거하여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이 파병되자 일본 역시 군대를 보냈으며, 이는 청일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 이홍장(1823~1901) :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이에 따라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고자 청나라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1885년(고종 22)에 체결한 조약이다.
조선내 양국 주둔군 철수가 주 내용이며 다음과 같다.
1. 청과 일본 양 군 모두 조선에서 즉시 철수를 시작해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한다.
2. 청과 일본 양국은 조선에 대해 군사 고문을 파견하지 않는다. 조선은 청일 양국이 아닌 제3국에서 1명 이상 수 명의 군인을 초청한다.
3.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
톈진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충돌을 막을 수 있었으나 조약 내용이 애매했기 때문에(제3조) 양국은 10년 후 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실제로 제3조에 의거하여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이 파병되자 일본 역시 군대를 보냈으며, 이는 청일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 이홍장(1823~1901) :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미국의 서부개척 역사는 백인이 아메리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원주민을 몰아내고, 학살하는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1890년은 인디언 전쟁 막바지였고 소탕되지 않은 인디언들 대부분 보호구역에 수용되었다.
신의 땅을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1889년 유령춤(Ghost Dance)이라는 신앙 의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들은 부족의 죽음, 빼앗긴 영토, 파괴된 생활방식등으로 얼룩진 자신의 현재 삶을 애도하며 자유 세상과 함께 버팔로들이 초원에 돌아온다는 신앙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악마적 의식이면서 국가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했다.
미 육군은 [2]제7기병연대 500여 명을 원주민 [3]수족이 있던 [1]사우스다코타 주 인디언 보호구역내 운디드 니(wounded knee)로 보냈고, 원주민들은 바로 항복을 했다.
운디드 니(wounded knee)에서 원주민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다툼이 발생했으며 어느 쪽에선지 총탄이 발사됐다. 이에 제7기병연대는 원주민들에게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추장 큰발(Big Foot)을 비롯하여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수족 350명 중 300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미군은 25명이 죽고, 39명이 부상당했다.
미국 정부는 '운디드 니 전투(battle)'라고 했고, 원주민들은 '학살(massacre)'이라고 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제7기병대원에게 22개의 훈장이 수여됐다. 오늘날 원주민과 시민단체들이 이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지적하고 서훈 취소를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미군과 원주민들 사이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 학살이 벌어진 지역을 현재 국립역사지역으로 지정해 놓고 있다.
제7기병연대는 60년 후인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일으킨 부대이다
[1] 사우스다코타주(State of South Dakota) : 미국 중서부의 주. 미국의 4명의 위대한 대통령을 조각한 조각상이 있는 러시모어 산으로 유명하다
[2] 제7기병연대(7th Cavalry Regiment) : 미국 육군의 기병 연대로 1866년 창성되었다. 미국 남북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3] 수족(Sioux) : 북아메리카 원주민. 오늘날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미네소타, 몬태나의 여러 보호 구역과 지역 사회에 흩어져 있는 많은 별도의 부족 정부를 유지하고 있다
1890년은 인디언 전쟁 막바지였고 소탕되지 않은 인디언들 대부분 보호구역에 수용되었다.
신의 땅을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1889년 유령춤(Ghost Dance)이라는 신앙 의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들은 부족의 죽음, 빼앗긴 영토, 파괴된 생활방식등으로 얼룩진 자신의 현재 삶을 애도하며 자유 세상과 함께 버팔로들이 초원에 돌아온다는 신앙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악마적 의식이면서 국가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했다.
미 육군은 [2]제7기병연대 500여 명을 원주민 [3]수족이 있던 [1]사우스다코타 주 인디언 보호구역내 운디드 니(wounded knee)로 보냈고, 원주민들은 바로 항복을 했다.
운디드 니(wounded knee)에서 원주민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다툼이 발생했으며 어느 쪽에선지 총탄이 발사됐다. 이에 제7기병연대는 원주민들에게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추장 큰발(Big Foot)을 비롯하여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수족 350명 중 300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미군은 25명이 죽고, 39명이 부상당했다.
미국 정부는 '운디드 니 전투(battle)'라고 했고, 원주민들은 '학살(massacre)'이라고 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제7기병대원에게 22개의 훈장이 수여됐다. 오늘날 원주민과 시민단체들이 이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지적하고 서훈 취소를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미군과 원주민들 사이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 학살이 벌어진 지역을 현재 국립역사지역으로 지정해 놓고 있다.
제7기병연대는 60년 후인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일으킨 부대이다
[1] 사우스다코타주(State of South Dakota) : 미국 중서부의 주. 미국의 4명의 위대한 대통령을 조각한 조각상이 있는 러시모어 산으로 유명하다
[2] 제7기병연대(7th Cavalry Regiment) : 미국 육군의 기병 연대로 1866년 창성되었다. 미국 남북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3] 수족(Sioux) : 북아메리카 원주민. 오늘날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미네소타, 몬태나의 여러 보호 구역과 지역 사회에 흩어져 있는 많은 별도의 부족 정부를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