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베트남 독립전쟁, 프랑스-베트남 전쟁등으로 불린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베트민의 [2]호찌민은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6년 11월 23일 프랑스가 [5]하이퐁 항구를 포격하여 6,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45년 12월 19일 [4]보응우옌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군은 하노이의 프랑스군을 공격하였다. [2]호찌민은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베트남 독립전쟁인 제1차 [1]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프랑스는 재정문제와 내부의 반발과 비판하는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54년 5월 7일 [6]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전하면서 베트민과 휴전 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56일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천명~3천명의 전사자를 냈고 8년간의 전쟁에서 총 7만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양측은 휴전 협정을 통하여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프랑스의 남베트남(월남)과 베트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 월맹)으로 나눠졌으며 남북으로 2km씩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되었다.
[1] 인도차이나 :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라고 불렸다
[2] 호찌민(Ho Chi Minh, 1890년~1969년) : 본명은 응우옌 신 꿍(Nguyen Sinh Cung).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베트남의 초대 국가주석.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
[3] 베트민(Viet Minh) : 베트남 독립동맹회(越南獨立同盟會)의 약칭으로, 1941년 5월 19일 호찌민이 빡보에서 설립한 베트남 민족독립주의 단체이다. 대한민국 한자음으로 월맹(越盟)으로 알려져 있다.1941년에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민족주의 계열 정당의 동맹으로 결성되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독립의 주역이다
[4]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1911년~2013년) : 베트남의 장군이자 정치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 뒤이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까지 승리를 이끈 현대 베트남 최고의 명장
[5] 하이퐁(Hai Phong) : 베트남 동북부의 항구 도시
[6] 디엔비엔푸(Điện Biên Phủ) : 베트남 북부, 라오스와의 접경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당시 프랑스군이 베트민의 교통을 차단하고자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였으나 베트민의 포위공격에 항복함으로써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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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초기(1945~1946년), 국민당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우위를 점하며 주요 도시와 철도망을 확보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내부의 부패, 비효율적인 행정, 경제난으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잃어갔다. 반면,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게릴라 전술을 통해 국민당군을 점차 약화시켰고, 홍군은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되어 더욱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1946년, 미국이 중재한 평화회담이 결렬되면서 내전은 본격적인 전면전으로 확산되었다.
1947년부터 공산당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동북 지역에서의 전투를 통해 전략적 주도권을 확보했으며,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토지 개혁 정책으로 민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는 "삼대전역(三大战役)"이라 불리는 세 가지 주요 전투가 내전의 판도를 결정지었다.
- 랴오선 전역(1948년 9~11월): 동북 지역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고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
- 화이하이 전역(1948년 11월~1949년 1월): 중원 지역에서 국민당군의 주력을 괴멸.
- 핑진 전역(1948년 12월~1949년 1월): 북경(베이징)을 포함한 화북 지역을 공산당이 점령.
이 승리들로 국민당군은 전력을 상실했고, 국민당 정부는 대규모로 후퇴를 거듭했다. 1949년 4월, 공산당은 국민당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며 사실상 전쟁에서 승리했다.
1949년 10월 1일, [1]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식 선포하며 제2차 국공내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공산당 [3]인민해방군은 같은 해 10월 14일에는 광저우를 접수하고, 11월 30일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마저 함락시켰다. 12월 10일 [2]장제스는 대륙 최후 거점인 충칭에서 타이완으로 탈출하여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12월 27일 중국 [3]인민해방군이 충칭에 입성함으로써 대륙에서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공산당이 통치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재편되었다.
제2차 국공내전은 중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공산당의 승리는 민중 기반을 강화하고 군사적 전략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반면 국민당은 외세 의존, 행정 부패, 민중의 신뢰 상실 등 내부적인 요인으로 패배의 길을 걷게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중앙위원회 주석(임기, 1945년 6월 19일~1976년 9월 9일). 일본 패망 이후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 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2]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3] 인민해방군 :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 또는 단순히 홍군(紅軍)은 1927-1946 사이의 중국 공산당의 무장조직으로 1927년 8월 1일 중국공농혁명군(中國工農革命軍)을 시작으로, 1928년 5월 25일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으로 개칭하였다. 제2차 국공합작(1937.9)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으로 개편되었다. 일본패망 이후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킹 데이비드 호텔은 1932년에 개장한 예루살렘 최초의 현대식 고급 6층짜리 호텔이다. 평면적으로 I자형으로 날개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긴 중앙 축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도로인 [2]줄리안스 웨이는 호텔 서쪽과 평행하게 뻗어 있었다.
영국 행정본부는 호텔 남쪽 건물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군사 본부는 남쪽 건물의 최상층과 호텔 중앙의 최상층, 2층, 3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1946년 7월 22일, 이르군 대원들은 영국군 복장을 하고 호텔의 지하 카페로 진입한 후, 우유통에 위장한 폭발물을 설치했다. 폭파 시각은 오전 12시 37분경으로, 경고 전화가 여러 곳에 사전에 전달되었지만, 영국 당국이 이를 무시했거나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폭발로 인해 호텔 남쪽 전체가 붕괴되었고, 총 91명이 사망하고 4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사망자 중에는 영국인뿐 아니라 유대인, 아랍인, 기타 외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어 민간인 피해가 상당했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며 벌어진 폭력적인 행동으로, 특히 많은 피해를 초래하고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은 유대 무장세력에 대한 강경 진압에 나섰고, 유대인 사회 내부에서도 이르군의 무차별적 폭력에 대해 비판 여론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이 사건을 영국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보기도 했다.
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 사건은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유지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철수를 결정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과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테러를 주도한 이르군의 지도자 [3]메나헴 베긴은 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되어, 독립운동과 테러리즘 사이의 경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 이르군(Irgun) : 1931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 위임통치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했던 시온주의 무장조직. 이르군의 주요 목표는 무력을 동원하여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으며, 영국군과 아랍인 모두를 공격했다. 이르군의 정치조직은 이스라엘 우파 집권 정당인 리쿠드당의 뿌리 중 하나가 됐다.
[2] 줄리안스 웨이(Julian's Way) : 현재 킹 데이비드 스트리트
[3]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 1913년 8월 16일~1992년 3월 9일) : 이스라엘의 제7대 총리(임기, 1977년 6월 20일~1983년 10월 10일). 이스라엘-이집트 간의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이집트 사다트와 함께 1978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중국 국민당정부는 1945년 8월 28일, [1]천이를 타이완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타이완 주민들은 같은 민족인 중국 대륙의 국민당정부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며 10월 24일 타이베이에 도착한 [1]천이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천이는 10월 25일 타이완 주둔 일본군의 항복으로 타이완과 [2]펑후 제도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영토로 완전하게 회복하였음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일본의 지배와 수탈을 받던 타이완 주민들은 새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국민당정부는 중국 대륙의 문화와 다른 문화를 갖고 있던 타이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으며 타이완 주민을 친일파 혹은 미개인으로 취급하며 점령군과 같은 의식을 갖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타이완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관인 [1]천이부터 말단까지 타이완에 도착하자마자 타이완 주민을 착취하였으며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당시 타이완의 주요 요직은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넘어온 외성인(중국 본토인)들이 차지하면서 본성인(타이완 주민)들은 차별과 착취를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이완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고 국민당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날로 커져만 갔고 '개(일본)가 가고 돼지가 왔다'고 하는 등 불심감이 팽배하였다.
1947년 2월 27일 밤, 타이베이시 위엔환빌딩 안의 복도에서 국민당정부의 전매 독점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팔던 린쟝마이라는 여인이 허가받지 않고 담배노점을 벌였다는 이유로 단속원과 경찰에 의해 폭행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폭행을 당하면서도 담배를 빼앗지 말아 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하였고 주변에 있던 군중들이 동정하였다. 이때 단속원과 경찰이 군중속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권총을 뽑아 발사하였는데 군중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단속원과 경찰은 도망쳤고 분노한 군중은 경찰서로 몰려가 살인자를 처벌하라고 항의했다. 이로 인하여 타이베이시는 분노의 정서가 확산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이를 원환집연사건(圓環緝煙事件)이라고 한다.
1947년 2월 28일 사망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서와 군부대로 몰려들어 해당 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며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타이완성 행정장관 집무처로 몰려가 천이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요구하였다. 시위에 가담하는 군중은 갈수록 늘어났다. 관청을 지키던 경비병과 시위대가 충돌하면서 두 사람이 경비병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급기야 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기도 했으며 경찰들을 구타해 사망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시위는 타이베이 시내 도처에서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의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2월 28일 오후 계엄이 선포되면서 민중과 정부간의 대립을 더욱 격화되었다. 2월 28일 당일 타이베이시 전역에서 파업 및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기 시작했고, 그 다음 날인 3월 1일 이후에는 시위의 범위가 타이완 전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른바 '2.28사건'이다.
사태 해결을 위해 행정장관 천이의 타협으로 '2.28사건처리위원회'를 구성되어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3월 4일 이후 사태는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천이는 앞으로는 처리위원회를 통해 소요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뒤로는 시위의 무력 진압을 위해 국민당 총통 [5]장제스에게 중국대륙에 있는 국민혁명군의 증파를 요청했다.
3월 8일 중국대륙에서 파병된 중화민국군 헌병 제4연대의 대대병력이 타이완 [3]지룽항에 도착하면서 항구에 대해 무차별 소탕작전을 실시하여 진압했다. 3월 9일 제21사단도 지룽항에 도착하여 타이베이시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무차별 진압에 돌입했으며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진압은 10여 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고, 본성인(타이완 주민) 약 3만 명이 사망,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과 약탈로 인해 타이완 전역이 초토화되었고, 결국 시위는 강제 진압되었다. 당시엔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수상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사살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조선인, 일본인들도 이 때 타이완사람으로 오인받아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대규모 살육과 약탈은 3월 17일 국민당 국방부장 [4]바이충시가 타이완에 도착하여 3월 21일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국민당 총통 [5]장제스는 '2.28사건처리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하고 위원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했다. 5월 16일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사태 종료를 선언함으로써 2.28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국민당정부는 [6]'청향운동'을 전개하여 민중들을 구속하고 처형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사건 이후 40년 동안 타이완(현 중화민국)에서 2.28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최대의 금기였다. 중국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중국 국민당은 1949년 12월에 중화민국 국민당정부를 타이베이로 옮겨왔다.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 중화민국 정부는 공식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2.28 평화기념공원(二二八和平紀念公園)을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 천이(1883년~1950년) :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가. 복건성 정부주석, 대만 행정장관 등을 역임했으나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를 배신하려다가 들켜 총살당했다.
[2] 펑후(Penghu)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3] 지룽(Keelung) : 중화민국 타이완 북부의 항만도시. 일본의 식민통치 시대 이전부터 대외 무역의 거점이었으며 일본해군의 군항이었다
[4] 바이충시(白崇禧, 1893년~1966년) : 한자음 백숭희. 중화민국의 군벌, 군인, 정치가. 중화민국의 제1대 국방부 장관. 국민혁명군 내의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서 일급상장(대장에 해당)까지 올랐다
[5]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6] 청향(淸鄕) : 산간지방으로 도피한 타이완인들을 잡아 농촌을 깨끗하게 한다는 이른바 청향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들과 연계되었다고 의심받은 수많은 타이완인들이 사법절차도 없이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재판없이 처형되었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죄없는 민간인들이 무차별하게 희생당한 사건이 제주 4.3사건이다. 민간인 희생자는 약 3만명으로 추정된다.
학살 피해자들의 유족 및 제주 도민들은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하여 노력했으나 민주화 이후에도 4.3사건의 부정과 탄압이 계속되었다.
2000년에 이르러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1] 남조선노동당 : 1946년 11월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3당 합당으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 당수는 초대 여운형, 2대 허헌, 3대 박헌영이 맡았다
이 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에 대항하기 위해 마련되었으며, 특히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1]트루먼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갈등"으로 규정하며, 미국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루먼 독트린은 냉전 초기 미국의 [2]봉쇄정의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3]마셜플랜과 [4]나토창설 등으로 이어져 서방 진영의 단결을 강화하고 공산 진영과 대립하는 냉전 체제를 고착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1884년 5월 8일~1972년 12월 26일) : 미국 33대(재임:1945년 4월 12일~1953년 1월 20일) 대통령
[2]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 :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수단을 동원한 냉전 시대의 대외 정책
[3] 마셜플랜(Marshall Plan) : 유럽 부흥 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경제 회복과 공산주의 확산 방지를 위해 미국이 제공한 대규모 경제 지원 정책
[4]나토(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 1949년 창설된 북대서양 조약기구로, 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 32개의 회원국들 간의 정치 및 군사 동맹으로 본부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위치한다
유엔의 결의에 의거하여 보통·평등·비밀·직접의 4대 원칙을 수용한 민주주의 제도로 한국대표 및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남북 총선거 실시를 발표하였다.
남북한을 통하여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로 300석의 국회의원을 선출할 방침이었으나, 북한지역의 선거불가능으로 북한지역 할당의석 수 100석을 유보해 두고 남한에서의 의석 수를 200석으로 할당하여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유권자 등록기간을 설정하여 총유권자(813만2517명)중에 96.4%에 해당하는 784만871인이 선거인 명부에 등재되었다. 이 중에 95.5%가 투표에 참가했으며, 이는 역대 선거사상 최고의 투표율로써 정부 수립이라는 염원이 지대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그 해 5월 31일에 선거위원회의 소집에 의하여 한국헌정사상 최초로 제헌의회가 개원되었고, 국회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를 선출하였다
제헌국회는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북한은 9월 9일 정부를 수립한다.
한국사에서 최초로 자유 다당제를 정착시킨 사례이며 성공적으로 자유민주적 방식으로 공직자를 선출한 사례이기도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 선거라는 한계로 많은 아쉬움이 남는 선거였다.
이 선거는 1948년 5월 9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 날이 일요일이라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많다는 의견과 5월 9일은 한반도를 통과하는 일식이 예정되어 있어 5월 10일로 하루 연기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1920년부터 통치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8년에 영국은 파레스타인에서 철수했다.
수천년동안 나라없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은 2차 세계대전때 홀로코스트를 계기로 명목상 주인없는 땅이 되어버린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한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두고 아랍인과 유대인간의 갈등과 충돌이 지속되었다. 1947년에 팔레스타인지역에는 유대인 60만명, 팔레스타인인은 136만명으로 상호 대립관계가 형성되면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유엔총회(1947년 11월 29일)에서 팔레스타인 영토의 56% 유대인에게 나머지 44%는 아랍민족에게 배분하고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국제관리지구로 지정한다는 결의안이 통과되자,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은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게 되었다. 주위 [1]아랍국가들은 연합을 결성하였으며 1948년 1월 팔레스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아랍지원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2]벤구리온은 [3]텔아비브에서 1948년 5월14일 독립을 선언했다. 이스라엘 건국에 반발한 [1]아랍연합군은 바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남쪽에서 이집트, 서쪽은 요르단, 북쪽으로 시리아, 레바논이 3면에서 공격하였다. 전력면이나 지정학적으로 이스라엘이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당시 소련은 아랍쪽으로 영향력을 넓히기 싶어했다. 주변국가들의 눈치때문에 위성국가였던 체코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하였다. 수세에 몰리던 이스라엘은 아랍연합군과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서쪽의 요르단의 공격으로 이스라엘 민병대는 예루살렘에서 포위되었으나 격렬한 저항으로 포위망을 뚫고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서로 공격하고 방어하면서 전투가 지속되었으며, 북쪽지역의 시리아군, 레바논군은 이스라엘에 패배하였다.
계속되는 공방전에서 아랍연합군 통합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하여 서로간의 불신으로 단합이 되지 않아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같은 아랍연합군의 내부적으로 분열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더 이상 실효성없다고 판단한 아랍연합군은 각자 차례대로 이스라엘과 휴전을 체결하였다.
1949년 3월 10일 홍해와 접한 항구도시인 [4]에일라트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면적의 78%를 차지했고 나머지 지역 중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장악한 지역에서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70여 만명의 팔레스타인인을 타지역으로 내몰았다.
[1] 아랍연합국 :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파이살 국왕), 이집트(파루크 국왕), 요르단(압둘라 국왕)
[2]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1886~1973) : 이스라엘의 초대총리
[3] 텔아비브(Tel Aviv) : 이스라엘 서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 이스라엘의 실질적 수도
[4] 에일라트(Eilat) : 이스라엘 최남단. 홍해에 딸린 아카바 만 최북단에 위치하는 항구도시로 서쪽은 이집트, 동쪽은 요르단에 면하는 국경도시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발효하여 진압하였다.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을 포함하여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 당시 계엄령 발효는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엄령 발효는 위헌행위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 지창수(1906년~1950년) : 여순 14연대 소속 군인
* 김지회(? ~ 1949년 4월 9일) : 여순 14연대 소속 군인
2충 집무실 남쪽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던 선생은 인사를 하고 싶다고 찾아온 주한미국 방첩대(CIC)요원이자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쏜 네발의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한 발은 인중을, 또 한발은 목을 관통했으며 다른 두발은 앞가슴과 하복부를 뚫고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선생의 죽음에 3천만 동포 모두 슬픔에 빠졌고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후 7월 5일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1] 경교장 : 1945년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시막 청사이자 백범 김구(金九)가 기거 및 서거한 공간(사적 제465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강북삼성병원 부지 안에 위치(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까오방 전투는 1947년 10월에 시작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1949년 9월 3일에 절정에 달했던 베트남 북부에서 진행된 전투였다.
베트민군은 [2]통킹 만에서 루트 콜로니얼 4(Route Colonial 4, RC4)로 알려진 카오방의 프랑스 수비대까지 147마일의 경로를 따라 베트남-중국 국경을 따라 프랑스 호송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매복했다.
루트 콜로니얼 4(RC4)는 [1]까오방에 있는 프랑스 군사 기지에 물자를 공급하는데 사용되는 험난한 도로이다.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프랑스 군은 베트님의 매복공격으로 프랑스 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은 비참한 연속 전투였다.
프랑스 군의 몇몇 부대는 전멸되었고 약 4,800명의 프랑스 군인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업고 2,000명이 신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1949년 9월 3일, [4]탓케(That Khe)에서 100대의 차량이 보병 스크린을 통과하여 강화된 호송대를 타고 26km의 거리를 이동하였다. 병력 수로 인해 차량당 병사 한 명으로 줄어든 프랑스군은 베트민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처음 20대의 트럭과 마지막 10대의 트럭이 정지되었고, 호송대의 중앙은 포탄에 의해 파괴되었다. 다음날 부상당한 프랑스군은 4명만이 살아남은 채 발견되었다.
이로인해 남은 전쟁동안 호송관행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 후 10~12대의 차량 호송대를 항공기 관찰을 통해 초소에서 초소로 이동했다.
[1] 까오방(Cao Bang) : 베트남 북부 까오방성의 주도.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
[2] 통킹만(Gulf of Tonkin)은 베트남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있는 만.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옛 명칭인 통킹에서 유래되었다
[3] 베트민(Viet Minh) : 베트남 독립동맹회(越南獨立同盟會)의 약칭으로, 1941년 5월 19일 호찌민이 빡보에서 설립한 베트남 민족독립주의 단체이다. 대한민국 한자음으로 월맹(越盟)으로 알려져 있다.1941년에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민족주의 계열 정당의 동맹으로 결성되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독립의 주역이다.
[4] 탓케(That Khe) : 까오방에서 남쪽으로 60m, 하노이 수도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230km 떨어져 있는 베트남 도시
국공내전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1]마오쩌둥의 공산당의 내전으로, 초기에는 국민당이 우세했으나 중국 공산당의 세력 확장과 전략적 승리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패배한 국민당 정부는 중국 본토에서 철수해 타이완섬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약 200만 명에 이르는 국민당 군인, 관료, 지식인들이 대만으로 건너갔다. 이를 통해 타이완은 중화민국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고,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완 타이베이시를 임시 수도로 삼아 중국 본토 수복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국부천대는 타이완의 정치·사회·경제적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제스는 타이완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력한 독재 정권을 수립하며 공산당 세력에 대한 탄압과 내부 결속을 강화했다. 이후 타이완은 냉전 체제 속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했다.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중국과 타이완의 분단 상황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은 대만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타이완이 독자적인 정치·경제적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3]양안관계의 갈등과 국제적 외교 문제의 근원이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중앙위원회 주석(임기, 1945년 6월 19일~1976년 9월 9일). 일본 패망 이후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 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2]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3] 양안관계(兩岸關係) : 중국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의 중화민국 사이의 정치·외교·군사적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남침하였다.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한의 기습으로 남한은 3일만에 수도 서을을 빼앗겼으며 북한군은 여세를 몰아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였다.
유엔결의에 의해 유엔군이 조직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7월 14일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갔다. 남으로 계속 밀린 남한군과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여 항쟁하였다.
9월 15일 새벽 유엔군의 총사령관인 맥아더의 지휘아래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 26일에 서울에 진입하였고 9월 29일에는 빼앗겼던 서울을 되찾았다.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과 남한군은 여세를 몰아 계속 북상하였다. 유엔군은 11월 21일에 압록강 연안까지 북진하였으나 11월 25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북한군은 1951년 1월 4일에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고 남한은 다시 남쪽으로 밀려났다. 이른바 1.4후퇴가 시작되었다. 3월 14일 유엔군은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며 3월 24일에는 38선을 다시 돌파하였다.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이 나타나면서 1951년 7월 10일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여러차례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간헐적인 사건 및 전투는 계속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비로소 휴전협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3년 1개월에 걸친 전쟁은 종료되고 휴전이 성립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김일성(1912년~1994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최고지도자
* 유엔군(United Nations Command, UNC)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로 한국전쟁을 계기로 선립된 다국적군 사령부. 현재 대한민국에 주둔 중인 다국적 연합군 부대를 가리킨다.
*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년~1964년) : 한국전쟁당시 UN군 총사령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미국군과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활동
* 한국전쟁 참전국 : 미국, 영국, 네덜란드, 캐나다,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터키,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에디오피아, 콜롬비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해군은 보유 함정 수는 105척이었지만 대부분 장비가 노후해 작전 가능한 배는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까지 무장을 갖춘 전투용 함정은 단 한 척도 없었다. 1949년 6월, 해군참모총장 [1]손원일 제독은 전투용 함정을 구입하기 위하여 장교부터 사병까지 모금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해군장병의 성금과 정부의 지원금 6만 달러를 모았다.
1949년 10월 7일,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킹스포인트에 있는 해양대학교에서 [2]화이트헤드 소위호라는 실습선을 1만 8천달러에 구입하였다.
뉴욕의 미 해안경비대의 부두로 옮겨진 화이트헤드소위호는 12월 26일 함미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백두산(PC-701)함으로 명명하였다.
당시 화이트헤드 소위호는 퇴역한지 오래되었고 몹시 낡아 운용하기에는 많은 과정이 필요했다. 승조원들은 배에서 숙식하며 손수 수리하여 1950년 1월 24일 중간기착지인 하와이에 도착한다. 3월에 3인치(76mm) 주포를 장착하고 포탄 100발과 기름을 구입하여 1950년 4월 10일 해군기지인 경남 진해항에 입항했다.
백두산(PC-701)함은 해군장병들과 국민들의 성금으로 미국에서 구매한 함정으로서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이자 당시 유일한 전투함이었다.
손원일 제독은 나머지 돈으로 백두산함과 동형함을 한 척당 1만 2천 달러에 세척을 더 구입하였으며 이것이 각각 PC-702 금강산함, PC-703 삼각산함, PC-704 지리산함이었다.
6월 25일 오후 8시 경 연기를 내며 오고 있는 미식별 선박이 발견되었다. 국기와 선명도 표시되지 않은 선박의 갑판 뒤쪽에는 중기관총 2정과 수병복을 착용한 수많은 무장 병력이 승선해 있었다.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북한 정규해군 및 육전대의 복장으로 인해 북한의 선박임을 확신한 백두산함장은 적선으로부터 이탈하여 "확인된 선박은 북한의 1,000톤급 수송함정이며, 약 600명의 북한군이 승선한 채 남하 중에 있음. 상륙을 기도하는 것으로 판단됨"이라고 해군본부에 타전 보고하였다.
해군본부는 백두산함에서 보고한 상황을 경무대에 있는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고 국방부의 지시를 기다렸다. 국방부 장관은 "백두산함이 접촉 중인 선박이 적 공산군 함정으로 판단되면 쏘라"고 지시했다.
백두산함은 명령에 따라 위협사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적선은 선수갑판의 주포와 중기관총으로 대응사격을 해왔다.백두산함은 적선을 향해 주포를 발사했다. 이때 백두산함의 뒤를 따라 진해를 출발한 [3]소해정 고성정(YMS-518)이 현장에 도착하며 후방에서 적선에 대해 포를 발사하였다. 드디어 오전 1시경 적수송선은 포를 맞고 침몰하였다. 북한군 약 600여 명 전원이 사망하였다(추정).
이 해전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김종식 소위(병기관장), 김춘배 [4]삼등병조(주포 전환수)가 부상당했고 전병익 일등병조(포탄 장전수, 1929년생), 김창학 이등병조(조타수, 1929년생)이 전사하였다.
백두산의 대한해협 전투승전은 거의 무방비상태로 놓여있던 부산항의 안전을 확보한 전략적인 사건이었다. 이 대한해협전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의를 갖는다.
첫째, 미군이 참전하기 이전 우리 해군이 단독으로 적 선박을 격침시켰다.
둘째, 부산으로 향하는 군수물자와 증원 병력을 위한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했다.
셋째, 남해안 상륙을 기도한 적의 게릴라 부대를 격멸하여 후방교란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즉 한국전쟁의 발발 초기 후방으로 침투하는 북한군을 격퇴함으로써 부산 및 남해안의 안전을 확보한 의미있는 전투였다.
1959년 7월 1일 백두산함은 함체의 부식과 노후화로 인하여 퇴역하였다. 함체는 폐선 처리되어 해체되었으나 중앙의 마스트(돛대)만이 1965년 해군사관학교에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으며 201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463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무위키
[1] 손원일(1909년~1980년) : 대한민국 해군 초대 참모총장, 제5대 국방부 장관, 초대 서독 주재 대한민국 대사등을 역임
[2] 화이트헤드 소위(Ensign Whitehead)호 : 미국의 PC-461급 구잠함(잠수함을 탐지하고 공격할 능력을 갖춘 대잠 함정)으로 원래 함명은 USS PC-823이다. 서대서양에 투입되어 해상 공중의 구조임무에 사용되었으며 미국 해군에서 퇴역한 후 화이트헤드 소위(Ensign Whitehead)라는 이름으로 실습선으로 사용되었다
[3] 소해정 : 1947년부터 1948년부터 미군정으로부터 18척을 인수 한 YMS-1급 목제 소해정. 인수후 함의 주무장 자체가 없었던 함정에 대해 37mm 대전차포와 20mm 기관포가 탑재되었다. 원래 소해정이란 기뢰를 제거하여 해상 안전을 도모하는 작은 군함을 말한다
[4] 병조 :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는 1962년까지는 병조장(상사), 일등병조(상사와 중사 사이), 이등병조(중사와 하사 사이), 삼등병조(하사)란 호칭을 썼다
1950년 한국전쟁중 미군의 [1]소개령에 따라 1950년 7월 25일 충청남도 영동읍 임계리로 모인 피난민중 500~600명을 미군이 남쪽(후방)으로 피난을 유도하였다. 이에 따라 7월 26일 정오경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들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를 변경해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군은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숨어있다고 주장하며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됐다.
피난민은 미군의 공격을 피해 황간면 노근리에 있는 [2]개근철교(쌍굴다리)밑으로 피신했고, 미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예하 부대는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쌍굴다리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하여 다수의 피난민이 사망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생존자와 목격자들이 증언했으나 묻혀있다가 1999년 9월 30일 [3]AP통신이 노근리 사건을 특종 보도하며 그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2001년 1월 한미 양국 정부의 진상 조사결과가 공동 발표되었으며, 당시 미국 대통령인 [5]빌 클린턴이 유감을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년간 조사가 이뤄졌으나 사실관계와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지는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2001년 한국 정부는 노근리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노근리 [2]개근철교(쌍굴다리) 2003년 6월 25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 2월 9일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같은 해 3월 5일 노근리사건특별법이 공포되었다.
노근리사건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개근철교(쌍굴다리) 건너편에는 희생자 추념을 위한 노근리평화공원이 건립되었다. 4만여 평에 이르는 공원 내에는 학살사건의 전모와,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 과정이 전시되어 있는 평화기념관이 세워져 있으며 평화와 인권에 대해 교육할 수 있는 교육관, 위령탑 등이 있다. 이곳에는 해마다 노근리 희생자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1999년 이 사건을 보도한 [3]AP통신 취재팀은 2000년에 탐사 보도 부문 [4]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소개령 : 비전투 인력의 대피. 미국 시민과 미국 국무부에 의거한 한국 구적의 인원들이 대피하는 것
[2]노근리 쌍굴다리 : 충청북도 영동군 경부선 철도에 1934년 건설되었다. 황간면 노근리와 영동읍 주곡리를 연결하기 위해 개근천(愷勤川)위에 놓인 철도교각이다. 미군의 총탄과 파편 흔적(○, △ 표시)이 아직도 남아있다. 노근리 쌍굴다리는 2003년 6월 30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
[3] AP(Associated Press, AP)통신 :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 규모의 다국적 비영리 뉴스통신사. 미국에서 가장 오랜된 최대의 통신사. 1846년 5월에 신문사와 방송국의 협동조합 형태로 설립되었다
[4] 퓰리처상(Pulitzer Prize) : 미국의 신문 저널리즘, 문학적 업적과 명예, 음악적 구성에서 가장 높은 기여자로 선정되는 사람에게 주는 상. 1917년 미국의 언론인인 조지프 퓰리처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었으며, 미국 뉴욕 시에 위치한 컬럼비아 대학교 언론대학원 퓰리처상 선정위원회에 의해 관리한다. 매년 21개 부문으로 수여되며 권위와 신뢰도가 높아 기자들의 노벨상이라 불린다. 수상자는 인증서와 함께 미화 1만 달러를 받는다
[5]빌 클린턴(Bill Clinton, 1946년~) : 미국 제42대 대통령(재임, 1993년 1월 20일 ~ 2001년 1월 20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며 대한민국과 유엔군은 밀리는 상황이었다. 전세를 뒤집기 위해 당시 유엔군 사령관인 [2]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기획한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데 중대한 의미를 가진 작전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방어를 분산시키고 작전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추가적인 작전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장사 상륙작전이 기획되었다.
장사 상륙작전은[1] LST 문산호 1척을 이용해 이루어졌다. 상륙함은 목선으로 위장되었고, 9월 14일 부산항을 출발한 이후, 9월 15일 06:00에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대원들은 해변에 상륙하자마자 북한군의 후방 교란을 목표로 주요 도로와 철도 시설을 파괴하고 북한군의 병참선을 끊는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 심리전을 수행하며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작전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기상 악화로 인해 LST가 암초에 좌초되었고, 장비와 물자가 충분히 상륙하지 못했다. 또한 북한군의 예상보다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많은 대원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들은 끝까지 작전을 수행하며 북한군의 혼란을 유발했다.
장사 상륙작전은 작전 자체로는 제한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북한군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하여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에게 유리하게 전환되었다.
장사 상륙작전에 참여한 많은 대원들은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그 희생은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LST 문산호는 좌초된 뒤 그대로 잊혀졌다가, 시간이 지나 1997년 3월 6일에 발견되어 인양되었다. 1997년, 작전에 대한 공로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이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상북도 영덕군 장사리에는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작전 당시 대원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추모비와 전시물이 마련되어 있다.
장사 상륙작전은 전투의 성공 여부를 떠나,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젊은이들의 용기와 애국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오늘날 이 작전은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저항과 생존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1] LST 문산 : LST-120(Landing Ship, Tank 120)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 해군 USS LST-120, 한국 전쟁 당시 대한민국 해군에서 LST 문산으로서 활동했던 전차상륙함이었다
[2]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년 1월 26일~1964년 4월 5일)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합중국군과 연합군의 지휘관
코드네임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으로 보안 유지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작전 후에는 인천전투(Battle of Inchon)로 불리고 있다.
인천 상륙 작전은 6·25 전쟁 당시 수세에 몰린 국군과 연합군이 전세를 역전 시킬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년~1964년) : 한국전쟁당시 UN군 총사령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미국군과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활동
인천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향해 진군하였다.
미 해병 제1사단과 국군 해병대는 1950년 9월 18일 김포비행장을 탈환한 뒤 행주나루와 여의도, 서강방향에서 한강을 건너 일부는 서울 북쪽을 차단하고 중아청 방향으로 공격하였다. 한강 남쪽을 이동한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는 서빙고에서 강을 건너 남산과 서울 동쪽 지역을 점령하였다.
북한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국군은 항공기와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지원 덕분에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서울을 포위한 한미연합군은 9월 25일 오후부터 시간전에 돌입하였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9월 27일 오전 6시 국군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마침내 8월 28일 국군은 전쟁이 발발한지 석달만에 수도 서울을 되찾았고 다음날 정오 국회의사당에서 수도 탈환식을 거행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불리한 전세를 뒤집었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전쟁의 확실한 승기를 잡기 위해 중공군의 한반도 개입을 무시하고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하면서 북으로 진격한다. 이에 미국 제10군단장인 [2]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의 예하부대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로 진격했다. 당시 제1해병사단장은 [3]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었다.
미 해병대가 장진호 북쪽까지 진격했을 때에는 중공군 제9병단 예하 사단 병력은 이미 장진호 일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11월 27일 중공군이 장신호 서북쪽 지역인 [4] 유담리의 미 제1해병대를 공격하며 전투가 개시되었다.
장진호 남쪽의 하갈우리의 공격은 중공군 제58사단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전투는 지옥과 다름없었다. 장진호 전투 초반인 11월29일 하갈우리와 남쪽의 [5] 고토리 사이의 해병대 부대들은 고립되고 통신조차 두절됐다. 중공군이 일본식 소총과 방망이 수류탄으로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온통 불바다였다. 전투가 어찌나 치열했던지 훗날 '지옥의 계곡'이라 불렀다.
당시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한랭전선의 영향으로 유래없는 영하 30도이하의 혹독한 강추위는 제3의 적이었다. 총의 쇠붙이에 손가락이 얼어붙었고 밤에는 병사가 참호를 지키다 그자리에서 동사하기도 했다. 수 많은 부상자를 차량에 몇겹씩 포개서 후송하는 것은 예사였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장진호 지역의 전황이 급변하자 미 제10군단은 11월 30일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으로 이동한다는 결정을하였다.
[4] 유담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미 제1해병사단은 이를 격파하고 12월 4일 [6] 하갈우리에 진입함으로써 유담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장진호 동쪽에서 고립된 미 제7사단은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하갈우리로 이동하였다.
계속되는 미 제1해병사단의 분전으로 12월 7일 [5] 고토리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해병사단은 12월 11일 함흥지역에 모두 집결함으로써 장진호전투를 마무리하였다.
이 전투는 "장진호 서쪽 지역(유담리)→장진호 동쪽 지역(신흥리)→장진호 남쪽 지역(하갈우리)→죽음의 계곡→고토리→[7]황초령→진흥리" 로 이어졌다. 장진호와 흥남까지의 거리는 126km라고 한다. 이후 피난민 10만명을 거제도로 탈출시킨 흥남철수작전으로 이어진다.
장진호 전투는 세계 3대 동계 동계전투로 모스크바전투, 스탈리그라드전투와 더불어 가장 치열한 동계전투중 하나이다. 또한 한국전쟁의 당사자인 남한군과 북한군이 아닌 미군과 중공군이 한국에서 수 만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희생해가면서 싸운 전투이다. 이들의 희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1] 장진호 : 함경남도 장진군에 있는 인공호수(저수지)
[2]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Almond, 1892년~1979년) : 한국전쟁당시 미국 육군 10군단 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상륙작전을 지휘하였으며 흥남철수에서 작전 계획에 없던 민간인수송을 명령하여 피난민 10만명을 거제도로 탈출시켰다
[3] 올리버 스미스(Oliver Prince Smith, 1893년~1977년) :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최종 계급은 미합중국 해병대 대장. 6.25전쟁당시 미해병대 1사단장으로 계급은 소장이었다. 장진호 전투 당시 상부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진군속도를 늦추고 하갈우리에 활주로를 건설하는 등의 탁월한 판단을 통해 사상자를 최소화하였다. 장진호에서 후퇴할 당시에 "우리는 후퇴가 아니라 다른방향으로 진격 중이다"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4] 유담리 : 장진호 서북쪽에 있는 지역
[5] 고토리 : 하갈우리와 함흥으로 가는 중간 지역
[6] 하갈우리 : 장진호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 하갈우리를 지나야 흥남 항구로 갈 수 있다.
[7] 황초령 : 함경남도 함주군(지금의 영광군)과 장진군 경계에 있는 고개
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원산이 적중에 넘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흥남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전투를 피하여 함흥지역에서 피난길에 오른 피난민들 약 10만여명이 흥남부두에 운집하였다.
김백일 제1군단장과 미국 제10군단 소속의 민간인 고문관(통역관)인 현봉학의 설득으로 미국 10군단 사령관인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레너드 라루 선장은 운반하려던 무기를 포기하고 피난민을 수송하는 결단을 내렸다. 피난민 승선으로 버려진 무기들은 적군에게 포획되는 것을 염려하여 승선이 끝난 후 폭파시켰다.
이틀 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2박 3일 동안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한 명의 희생자없이 배는 경남 거제도에 도착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의 기적(Miracle of Christmas)이라고도 불린다.
흥남부두에서 안전지대로 수송된 피난민의 총수는 공식 기록 9만 1천명(또는 9만 8천명)으로 나타나 있다.
* 장진호 전투 : 한국 전쟁의 결정적 전투 중 하나로 미국 해병대와 중국군이 장진호(함경남도 장진군에 있는 장진강에 댐을 설치하여 만든 인공호)에서 벌인 전투
* 현봉학(1922년~2007년) : 대한민국의 의사이자 교수이다. 해방후 미국 버지니아주립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1950년 3월 귀국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다 한국전쟁을 맞았다.
*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Almond, 1892년~1979년) : 미국 육군 10군단 사령관
*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1914년~2001년) :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1월 4일에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가 3월에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38도선을 다시 탈환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서울을 다시 점령하기 위해 70만명의 대군을 밀어붙여 춘계 대공세를 시작했다.
경기도 북부 임진강에서 감악산을 일대를 방어하던 영국군 제29여단 소속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 regiment)대대는 남하한 중공군과 1951년 4월 23일부터 4월 25일까지 파주시 설마리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중 영국 글로스터셔 대대는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에 포위되어 고립되었고 연합군의 구출작전은 중공군의 맹렬한 반격에 밀려 실패하였다.
결국 영국군 부대원 662명이 중공군 3만명과 싸우다 분패하였으며 한국전쟁 중 영국군의 희생이 가장 컸던 전투였다. 하지만 영국군이 3일간 전선을 지켜줌으로써 중공군의 춘계공세는 힘이 빠졌고 유엔군이 서울을 방어하는데 시간을 벌어 주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힌 병사들은 1953년 포로교환협정에 의해 석방되었다.
설마리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이 치른 대표적인 전투 중의 하나로, 가장 성공적으로 실시된 고립방어의 대표적인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1957년에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에 영국군 참전 추모비가 건립되었으며, 이후 매년 합동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엘리자베스 영국여왕도 설마리 전투비를 다녀갔다. 영국인들은 이 고지를 글로스터 고지(Gloster Valley)라 부른다.
* 영국 글로스터셔 연대(Gloucestershire regiment) : 영국 남서부에 있는 글로스터셔 지역의 이름으로 1694년에 창설되었으며 1801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이집트를 상징하는 부대마크를 사용하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때 워털루 전투에도 참여했으며, 1차대전, 2차대전은 물론 버마전투, 이집트전투등 영국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출처 : 아틀라스 뉴스]
한국 전쟁 중인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 대공세로 오마치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당해 당시 유재흥이 지휘하던 대한 육군 제3군단은 현리에서 완전히 포위되었다. 이에 따라 3군단 전체 병력이 분산, 와해된 상태로 후퇴하여 하진부리까지 밀렸다. 하진부리에서 부대를 수습할 수 있었는데 결과 병력의 30%와 장비의 70%를 잃었으며 한국군 장성의 작전지휘 능력은 철저하게 불신받게 되었다.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1892~1992) 미8군 사령관은 한국군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으며, 1군단 또한 미군 사령부로부터 직접 지휘를 받도록 해 육군본부를 지휘선 상에서 제외하여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한국 역사 3대 패전 (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 중 하나이다.
* 현리 :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
* 오마치고개 : 인제군 기린면과 상남면 31번 국도상의 고개. 현재도 인제, 현리와 후방의 홍천, 횡성, 정선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이며 당시에는 3군단 유일의 후방 보급로상의 주요 거점 이었다.
* 하진부리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1953년 11월 프랑스는 라오스 국경 근처에 있는 디엔비엔푸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디에비엔푸는 정글과 협곡이 가득한 산지가 포위하고 있는 지역으로 이러한 지역적 특성과 베트남 기후의 특징인 몬순기후의 악재등 잘못된 전술로 프랑스군은 참혹하게 패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프랑스의 대 인도차이나 정책은 철수로 완전히 굳어지게 되었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 디엔비엔푸 : 베트남 서북부 고원위의 평야지대이고 정글과 협곡이 가득한 산지가 포위하고 있는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