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국공내전(Chinese Civil War II)
중국
사건기간 : 1945년 8월 15일~1949년 12월 27일, 조회수 : 81, 등록일 : 2024-12-28
중국 제2차 국공내전은 1945년 8월 14일, 제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일본이 패망하여 중국에서 철수한 뒤 시작되었다. 전쟁의 발단은 중일전쟁 기간 동안 유지되었던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제2차 국공합작이 전쟁 종료 후 이념적 갈등과 권력 다툼으로 붕괴된 데 있다.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중국 대륙의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지만, 공산당은 일본 점령지였던 동북부(만주)를 신속히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소련이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 무기를 공산당에 제공하며 공산당의 군사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내전 초기(1945~1946년), 국민당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우위를 점하며 주요 도시와 철도망을 확보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내부의 부패, 비효율적인 행정, 경제난으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잃어갔다. 반면,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게릴라 전술을 통해 국민당군을 점차 약화시켰고, 홍군은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되어 더욱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1946년, 미국이 중재한 평화회담이 결렬되면서 내전은 본격적인 전면전으로 확산되었다.
1947년부터 공산당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동북 지역에서의 전투를 통해 전략적 주도권을 확보했으며,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토지 개혁 정책으로 민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는 "삼대전역(三大战役)"이라 불리는 세 가지 주요 전투가 내전의 판도를 결정지었다.
- 랴오선 전역(1948년 9~11월): 동북 지역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고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
- 화이하이 전역(1948년 11월~1949년 1월): 중원 지역에서 국민당군의 주력을 괴멸.
- 핑진 전역(1948년 12월~1949년 1월): 북경(베이징)을 포함한 화북 지역을 공산당이 점령.
이 승리들로 국민당군은 전력을 상실했고, 국민당 정부는 대규모로 후퇴를 거듭했다. 1949년 4월, 공산당은 국민당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며 사실상 전쟁에서 승리했다.
1949년 10월 1일, [1]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식 선포하며 제2차 국공내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공산당 [3]인민해방군은 같은 해 10월 14일에는 광저우를 접수하고, 11월 30일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마저 함락시켰다. 12월 10일 [2]장제스는 대륙 최후 거점인 충칭에서 타이완으로 탈출하여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12월 27일 중국 [3]인민해방군이 충칭에 입성함으로써 대륙에서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공산당이 통치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재편되었다.
제2차 국공내전은 중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공산당의 승리는 민중 기반을 강화하고 군사적 전략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반면 국민당은 외세 의존, 행정 부패, 민중의 신뢰 상실 등 내부적인 요인으로 패배의 길을 걷게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중앙위원회 주석(임기, 1945년 6월 19일~1976년 9월 9일). 일본 패망 이후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 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2]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3] 인민해방군 :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 또는 단순히 홍군(紅軍)은 1927-1946 사이의 중국 공산당의 무장조직으로 1927년 8월 1일 중국공농혁명군(中國工農革命軍)을 시작으로, 1928년 5월 25일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으로 개칭하였다. 제2차 국공합작(1937.9)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으로 개편되었다. 일본패망 이후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전 초기(1945~1946년), 국민당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우위를 점하며 주요 도시와 철도망을 확보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내부의 부패, 비효율적인 행정, 경제난으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잃어갔다. 반면,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게릴라 전술을 통해 국민당군을 점차 약화시켰고, 홍군은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되어 더욱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1946년, 미국이 중재한 평화회담이 결렬되면서 내전은 본격적인 전면전으로 확산되었다.
1947년부터 공산당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동북 지역에서의 전투를 통해 전략적 주도권을 확보했으며,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토지 개혁 정책으로 민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는 "삼대전역(三大战役)"이라 불리는 세 가지 주요 전투가 내전의 판도를 결정지었다.
- 랴오선 전역(1948년 9~11월): 동북 지역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고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
- 화이하이 전역(1948년 11월~1949년 1월): 중원 지역에서 국민당군의 주력을 괴멸.
- 핑진 전역(1948년 12월~1949년 1월): 북경(베이징)을 포함한 화북 지역을 공산당이 점령.
이 승리들로 국민당군은 전력을 상실했고, 국민당 정부는 대규모로 후퇴를 거듭했다. 1949년 4월, 공산당은 국민당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며 사실상 전쟁에서 승리했다.
1949년 10월 1일, [1]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식 선포하며 제2차 국공내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공산당 [3]인민해방군은 같은 해 10월 14일에는 광저우를 접수하고, 11월 30일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마저 함락시켰다. 12월 10일 [2]장제스는 대륙 최후 거점인 충칭에서 타이완으로 탈출하여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12월 27일 중국 [3]인민해방군이 충칭에 입성함으로써 대륙에서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공산당이 통치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재편되었다.
제2차 국공내전은 중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공산당의 승리는 민중 기반을 강화하고 군사적 전략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반면 국민당은 외세 의존, 행정 부패, 민중의 신뢰 상실 등 내부적인 요인으로 패배의 길을 걷게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중앙위원회 주석(임기, 1945년 6월 19일~1976년 9월 9일). 일본 패망 이후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 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2]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3] 인민해방군 :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 또는 단순히 홍군(紅軍)은 1927-1946 사이의 중국 공산당의 무장조직으로 1927년 8월 1일 중국공농혁명군(中國工農革命軍)을 시작으로, 1928년 5월 25일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으로 개칭하였다. 제2차 국공합작(1937.9)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으로 개편되었다. 일본패망 이후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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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은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중국)과 일본의 전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으로 이루어진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간에 벌어진 전 세계적인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강한 제약을 받았으며,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권이 등장했다. 독일은 조약을 무시하고 군비를 증강하며 유럽 내 영토 확장을 시도했고, 이탈리아와 일본도 각각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팽창 정책을 펼치면서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국제 연맹은 이를 효과적으로 제재하지 못하면서 전쟁을 방지하는 데 실패했다.
전쟁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40년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 본토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으며, 1941년에는 소련을 침공하며 전선을 더욱 확대했다. 같은 해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전세는 1942~1943년을 기점으로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퇴하며 동부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했고,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며 서부 전선을 개방했고, 독일군은 연합군과 소련군의 압박 속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45년 5월,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 전쟁이 끝났다.
한편, 태평양 전쟁에서는 미국이 일본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공식적인 종전은 9월 2일에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은 약 7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초래한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으며, 일본은 미국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전쟁 범죄에 대한 심판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고, 국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유엔(UN)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전쟁 후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 체제가 시작되면서 세계는 또 다른 긴장 상태로 접어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강한 제약을 받았으며,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권이 등장했다. 독일은 조약을 무시하고 군비를 증강하며 유럽 내 영토 확장을 시도했고, 이탈리아와 일본도 각각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팽창 정책을 펼치면서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국제 연맹은 이를 효과적으로 제재하지 못하면서 전쟁을 방지하는 데 실패했다.
전쟁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40년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 본토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으며, 1941년에는 소련을 침공하며 전선을 더욱 확대했다. 같은 해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전세는 1942~1943년을 기점으로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퇴하며 동부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했고,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며 서부 전선을 개방했고, 독일군은 연합군과 소련군의 압박 속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45년 5월,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 전쟁이 끝났다.
한편, 태평양 전쟁에서는 미국이 일본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공식적인 종전은 9월 2일에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은 약 7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초래한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으며, 일본은 미국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전쟁 범죄에 대한 심판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고, 국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유엔(UN)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전쟁 후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 체제가 시작되면서 세계는 또 다른 긴장 상태로 접어들었다.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은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것은 독일과 소련이 중앙 유럽의 분할지배에 합의하고 상호안전보장조약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독소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선전포고없이 [1]바르바로사 작전이 펼쳐지면서 소련을 침공하였다. 이른바 제2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독일군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불과 30km 앞둔 [2]힘키까지 진격했다. 베를린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무려 1,500km에 달한다. 이렇듯이 개전 초기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이 전쟁의 흐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 전쟁은 1945년 5월 9일 소련이 베를린을 함락시킬 때까지 약 4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나치 독일과 소련사이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한 전선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이 시작되었다.
[1]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한 작전명칭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었던 '바르바로사(붉은 수염)'에서 유래했다
[2] 힘키(Khimki) : 러시아 모스크바주에 있는 도시로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3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독일군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불과 30km 앞둔 [2]힘키까지 진격했다. 베를린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무려 1,500km에 달한다. 이렇듯이 개전 초기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이 전쟁의 흐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 전쟁은 1945년 5월 9일 소련이 베를린을 함락시킬 때까지 약 4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나치 독일과 소련사이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한 전선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이 시작되었다.
[1]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한 작전명칭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었던 '바르바로사(붉은 수염)'에서 유래했다
[2] 힘키(Khimki) : 러시아 모스크바주에 있는 도시로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3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선 중 하나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과 국민혁명군이 주도한 중국 전선 및 영국군이 주도한 버마 전선,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주공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역이 해당된다.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과 국민혁명군이 주도한 중국 전선 및 영국군이 주도한 버마 전선,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주공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역이 해당된다.
네덜란드 대기근은 1944년 1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극심한 식량 부족 사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가장 심각한 인도적 위기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 기근은 주로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서 연합군의 반격 작전과 독일군의 보복적 봉쇄 조치로 인해 발생했다.
1944년,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하고 네덜란드로 진격하면서 서부 네덜란드 일부 지역이 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군의 통치를 약화시키기 위해 철도 파업을 지시했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군은 철도망을 차단해 식량 및 연료 공급을 봉쇄했다. 특히 서부 네덜란드의 대도시(암스테르담, 로테르담, 헤이그 등)는 이 봉쇄로 인해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1944~1945년 겨울은 이례적으로 추웠고, 연료 부족으로 난방이 불가능했다. 이는 농작물 재배와 저장이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 전쟁 전부터 네덜란드는 인구가 조밀했으며, 전쟁 중 대도시로의 인구 이동이 가속화되어 식량 부족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기근으로 인해 약 20,000명 이상이 기아와 관련된 직접적 또는 간접적 원인으로 사망했다. 어린이와 노약자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주민들은 튤립 구근, 가축 사료, 심지어는 나무껍질까지 섭취하며 생존을 도모했다. 또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시골로 가서 물물교환을 시도하는 도시 주민들이 증가했다. 대기근을 겪은 세대는 신체 발달 문제, 면역 체계 약화, 그리고 정신적 외상과 같은 장기적 건강 문제를 경험했다.
1945년 5월, 네덜란드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면서 기근이 종식되었다. 연합군은 항공기를 통해 식량을 공수했으며, 점차 물자 공급망이 회복되었다.
네덜란드 대기근은 인류학적, 정치적, 사회적 연구에서 중요한 사례로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기근이 세대 간 건강 및 사회 정책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연구들이 많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은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점령의 고통을 상기시켰으며, 이후 국가 복구와 복지 시스템 구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4년,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하고 네덜란드로 진격하면서 서부 네덜란드 일부 지역이 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군의 통치를 약화시키기 위해 철도 파업을 지시했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군은 철도망을 차단해 식량 및 연료 공급을 봉쇄했다. 특히 서부 네덜란드의 대도시(암스테르담, 로테르담, 헤이그 등)는 이 봉쇄로 인해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1944~1945년 겨울은 이례적으로 추웠고, 연료 부족으로 난방이 불가능했다. 이는 농작물 재배와 저장이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 전쟁 전부터 네덜란드는 인구가 조밀했으며, 전쟁 중 대도시로의 인구 이동이 가속화되어 식량 부족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기근으로 인해 약 20,000명 이상이 기아와 관련된 직접적 또는 간접적 원인으로 사망했다. 어린이와 노약자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주민들은 튤립 구근, 가축 사료, 심지어는 나무껍질까지 섭취하며 생존을 도모했다. 또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시골로 가서 물물교환을 시도하는 도시 주민들이 증가했다. 대기근을 겪은 세대는 신체 발달 문제, 면역 체계 약화, 그리고 정신적 외상과 같은 장기적 건강 문제를 경험했다.
1945년 5월, 네덜란드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면서 기근이 종식되었다. 연합군은 항공기를 통해 식량을 공수했으며, 점차 물자 공급망이 회복되었다.
네덜란드 대기근은 인류학적, 정치적, 사회적 연구에서 중요한 사례로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기근이 세대 간 건강 및 사회 정책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연구들이 많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은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점령의 고통을 상기시켰으며, 이후 국가 복구와 복지 시스템 구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임박한 시점이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크림 반도에 위치한 휴양도시 얄타의 리바디아 궁전(Livadia Palace)에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소련의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lin),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회담을 하였다.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으로 독일의 분할 및 비무장화와 나치 독일 잔재의 청산, 폴란드의 영토 문제 등이 결정되었다. 또한 소련의 대일본 전쟁 참전결정과 러일전쟁 당시 상실했던 영토인 사할린의 반환이 합의되었다.
여기서 일본 패전이후 한반도는 미·소 분할 신탁통치방안이 제시되었다. 구체적으로 논의된 사항은 아니었지만 불행하게도 한반도 남북분단의 시발점이 되었다.
얄타회담은 영국의 처칠이 참여했지만 실질적으로 영향력은 없었으며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의 담판 회담 성격이 짙었다. 이리하여 초강대국으로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을 풍미한 대영제국 몰락의 마지막 방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 얄타(Yalta) : 크림 반도 남부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러시아 크림 공화국(사실상) 또는 우크라이나 크림 자치 공화국(국제적인 승인)에 위치
* 크림반도(Crimean Peninsula) : 흑해(Black Sea)북부 연안에 위치한 반도이며 2014년 이후부터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러시아에 병합되었지만 국제사회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년~1965년) : 영국의 제42,44대 총리
*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년~1945년) : 미국 제32대 대통령
*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 1878년~1953년) :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 리바디아궁(Livadia Palace) : 크림반도 얄타의 리바디아에 위치한 궁전. 러시아 제국의 로마노프 왕조(니콜라이 2세는 마지막 황제)의 별장. 얄타 회담이 이곳에서 열렸다.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으로 독일의 분할 및 비무장화와 나치 독일 잔재의 청산, 폴란드의 영토 문제 등이 결정되었다. 또한 소련의 대일본 전쟁 참전결정과 러일전쟁 당시 상실했던 영토인 사할린의 반환이 합의되었다.
여기서 일본 패전이후 한반도는 미·소 분할 신탁통치방안이 제시되었다. 구체적으로 논의된 사항은 아니었지만 불행하게도 한반도 남북분단의 시발점이 되었다.
얄타회담은 영국의 처칠이 참여했지만 실질적으로 영향력은 없었으며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의 담판 회담 성격이 짙었다. 이리하여 초강대국으로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을 풍미한 대영제국 몰락의 마지막 방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 얄타(Yalta) : 크림 반도 남부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러시아 크림 공화국(사실상) 또는 우크라이나 크림 자치 공화국(국제적인 승인)에 위치
* 크림반도(Crimean Peninsula) : 흑해(Black Sea)북부 연안에 위치한 반도이며 2014년 이후부터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러시아에 병합되었지만 국제사회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년~1965년) : 영국의 제42,44대 총리
*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년~1945년) : 미국 제32대 대통령
*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 1878년~1953년) :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 리바디아궁(Livadia Palace) : 크림반도 얄타의 리바디아에 위치한 궁전. 러시아 제국의 로마노프 왕조(니콜라이 2세는 마지막 황제)의 별장. 얄타 회담이 이곳에서 열렸다.
이오지마 전투는 일본 도쿄와 마리아나 제도의 중간쯤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인 [1]이오지마에서 벌어진 미 해군 및 해병대와 일본 육군 간의 전투이다. 미군의 작전명은 디태치먼트 작전(Operation Detachment)이었다.
미국은 공습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 본토까지 폭격기가 날아가야 했는데, 당시에 무장한 B-29 폭격기는 5,000km 정도만 비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최소한 일본 본토 2,000 km 이내의 섬들을 점령하여 발진기지로 만들어야 했다. 미국은 1944년 도쿄로부터 2,300km 남쪽의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였다. 드디어 마리아나 제도의 괌이나 사이판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도쿄까지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11월부터는 B-29 폭격기를 이용해 일본 본토 각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 중간의 이오지마에는 일본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가 있었다. 이오지마의 일본 전투기들이 마리아나 제도에서 이륙한 미군 폭격기들을 미군 폭격기의 이동을 미리 예측하고 저지했다. 심지어는 이오지마에서 발진한 일본 전투기들이 마리아나 제도의 미군 기지를 폭격해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미국은 전진 항공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1]이오지마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1945년 2월에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1945년 2월 19일 미군 해병대가 이오섬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곳곳에 요새와 지하터널을 만들어놓고 기관총과 박격포를 난사하며 미군에 저항했다. 일본군 포병의 사격으로 인해 해안선에 상륙한 해병대는 혼란에 빠졌고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부족한 보급으로 총알이 떨어진 일본군은 이내 미해병대의 필사적인 반격에 뚫리기 시작했다. 3월 17일에 미군은 섬을 장악했으며, 거의 모든 일본군 부대가 전멸했다. 3월 26일 구리바야시 대장 이하 남은 300명의 일본군이 마지막 항전을 했으나 전멸했다.
5주 동안의 전투로 미군 전사자는 6,821명이지만 부상자는 21,865명으로 집계됐으며, 일본군은 20,933명의 수비 병력 중 20,129명이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태평양전쟁 중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일본보다 미군측 피해가 더 컸던 유일한 전투라고 한다. 당시 일본군 진지 구축에는 한국인 징용자들도 수백 명 동원됐다고 한다.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의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이오섬의 성조기 게양'은 퓰리처상을 받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1945년 2월23일 오전 10시35분 이오지마의 수리바치산 정상에 미국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이오섬의 성조기 게양'은 퓰리처상을 받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미 해병 5사단 28연대가 이 섬에 내려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지 나흘 만이다. 이 사진은 미 해병대원들의 투혼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오지마는 미국의 공군기지로 사용되다 1968년에 일본에 반환되었다. 현재는 일본 항공자위대의 기자가 이섬에 남아있으며 주민은 살지 않는다.
이오지마 전투는 태평양전쟁 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투 중 하나였다.
미국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오지마 전투를 일본군과 미군의 입장에서 바라본 두 편의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아버지의 깃발>을 2006년과 2007년 각각 선보였다.
[1] 이오지마 : 도쿄 남쪽으로 1,080km, 괌 북쪽 1,130km에 위치하고 있는 도쿄~괌·사이판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화산섬으로 섬의 표면이 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다고 한다. '이오'는 유황, '지마'는 섬을 말한다
[2] 마리아나 제도(Mariana Islands) : 행정상 괌과 미연방에 편입된 북마리아나 제도로 나뉘어 있다. 북마리아나 제도는 괌 북쪽으로 725km까지 펼쳐져 있다. 주요섬으로는 사이판·티니안·아그리한·로타 등이 있고 파간·아순시온·파라욘데파하로스는 활화산 섬이다
미국은 공습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 본토까지 폭격기가 날아가야 했는데, 당시에 무장한 B-29 폭격기는 5,000km 정도만 비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최소한 일본 본토 2,000 km 이내의 섬들을 점령하여 발진기지로 만들어야 했다. 미국은 1944년 도쿄로부터 2,300km 남쪽의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였다. 드디어 마리아나 제도의 괌이나 사이판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도쿄까지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11월부터는 B-29 폭격기를 이용해 일본 본토 각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 중간의 이오지마에는 일본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가 있었다. 이오지마의 일본 전투기들이 마리아나 제도에서 이륙한 미군 폭격기들을 미군 폭격기의 이동을 미리 예측하고 저지했다. 심지어는 이오지마에서 발진한 일본 전투기들이 마리아나 제도의 미군 기지를 폭격해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미국은 전진 항공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1]이오지마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1945년 2월에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1945년 2월 19일 미군 해병대가 이오섬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곳곳에 요새와 지하터널을 만들어놓고 기관총과 박격포를 난사하며 미군에 저항했다. 일본군 포병의 사격으로 인해 해안선에 상륙한 해병대는 혼란에 빠졌고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부족한 보급으로 총알이 떨어진 일본군은 이내 미해병대의 필사적인 반격에 뚫리기 시작했다. 3월 17일에 미군은 섬을 장악했으며, 거의 모든 일본군 부대가 전멸했다. 3월 26일 구리바야시 대장 이하 남은 300명의 일본군이 마지막 항전을 했으나 전멸했다.
5주 동안의 전투로 미군 전사자는 6,821명이지만 부상자는 21,865명으로 집계됐으며, 일본군은 20,933명의 수비 병력 중 20,129명이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태평양전쟁 중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일본보다 미군측 피해가 더 컸던 유일한 전투라고 한다. 당시 일본군 진지 구축에는 한국인 징용자들도 수백 명 동원됐다고 한다.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의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이오섬의 성조기 게양'은 퓰리처상을 받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1945년 2월23일 오전 10시35분 이오지마의 수리바치산 정상에 미국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이오섬의 성조기 게양'은 퓰리처상을 받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미 해병 5사단 28연대가 이 섬에 내려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지 나흘 만이다. 이 사진은 미 해병대원들의 투혼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오지마는 미국의 공군기지로 사용되다 1968년에 일본에 반환되었다. 현재는 일본 항공자위대의 기자가 이섬에 남아있으며 주민은 살지 않는다.
이오지마 전투는 태평양전쟁 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투 중 하나였다.
미국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오지마 전투를 일본군과 미군의 입장에서 바라본 두 편의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아버지의 깃발>을 2006년과 2007년 각각 선보였다.
[1] 이오지마 : 도쿄 남쪽으로 1,080km, 괌 북쪽 1,130km에 위치하고 있는 도쿄~괌·사이판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화산섬으로 섬의 표면이 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다고 한다. '이오'는 유황, '지마'는 섬을 말한다
[2] 마리아나 제도(Mariana Islands) : 행정상 괌과 미연방에 편입된 북마리아나 제도로 나뉘어 있다. 북마리아나 제도는 괌 북쪽으로 725km까지 펼쳐져 있다. 주요섬으로는 사이판·티니안·아그리한·로타 등이 있고 파간·아순시온·파라욘데파하로스는 활화산 섬이다
1945년 3월 9일 밤과 10일 새벽에 걸쳐 사이판과 [2]티니언 섬에서 344대의 [3]B-29 슈퍼 포트리스 폭격기가 출격했다.
B-29 폭격기 344대는 일본의 수도인 도쿄 상공을 뒤덮으며 도쿄 일대에 [1]네이팜탄 2400톤을 3시간동안 투하하였다. 도쿄시내의 건물은 목조건물로 이루어져 원통하나가 지붕에서 떨어지면 사방으로 액체가 튀었고 불이붙기 시작하여 불바다로 변했고, 불꽃은 사방에서 타오르면서 너울너울 춤추기 시작했다. 연기는 1.5km 상공까지 치솟았다.
이 공습으로 도쿄 중심부로부터 41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이 불바다가 되어 파괴되었으며 당시 일본 경시청조사에서 사망자 83,793명, 부상자 40,918명, 이재민 1,008,005명, 피해주택 268,358명이 발생했다. 도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1만여 명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 네이팜탄(Napalm bomb) : 연소재료인 나프타에 네이팜제로 불리는 증점제를 첨가하여 젤리 상태로 충전한 유지 소이탄이다. 매우 높은 온도(900~1300도)에서 연소하고 광범위한 지역을 불태워 파괴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2] 티니언 섬(Tinian) : 미국 자치령인 북마리아나 제도의 섬으로 괌 북쪽 160 km에, 사이판에서 약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3] B-29 슈퍼 포트리스(Boeing B-29 Superfortress) : 미군이 제 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에서 투입한 전략 폭격기
B-29 폭격기 344대는 일본의 수도인 도쿄 상공을 뒤덮으며 도쿄 일대에 [1]네이팜탄 2400톤을 3시간동안 투하하였다. 도쿄시내의 건물은 목조건물로 이루어져 원통하나가 지붕에서 떨어지면 사방으로 액체가 튀었고 불이붙기 시작하여 불바다로 변했고, 불꽃은 사방에서 타오르면서 너울너울 춤추기 시작했다. 연기는 1.5km 상공까지 치솟았다.
이 공습으로 도쿄 중심부로부터 41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이 불바다가 되어 파괴되었으며 당시 일본 경시청조사에서 사망자 83,793명, 부상자 40,918명, 이재민 1,008,005명, 피해주택 268,358명이 발생했다. 도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1만여 명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 네이팜탄(Napalm bomb) : 연소재료인 나프타에 네이팜제로 불리는 증점제를 첨가하여 젤리 상태로 충전한 유지 소이탄이다. 매우 높은 온도(900~1300도)에서 연소하고 광범위한 지역을 불태워 파괴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2] 티니언 섬(Tinian) : 미국 자치령인 북마리아나 제도의 섬으로 괌 북쪽 160 km에, 사이판에서 약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3] B-29 슈퍼 포트리스(Boeing B-29 Superfortress) : 미군이 제 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에서 투입한 전략 폭격기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이던 시기에 이오지마(이오섬)전투에 이어 일본 내에서 유일한 대규모 지상전이 있었던 곳이며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치른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다. 어아수스버그 작전(Operation Iceberg)으로도 불린다.
오키나와에 전쟁 준비를 시작한 것은 오키나와를 담당하는 일본군 제32군이 창설된 1944년 3월부터 시작하여 6~9월을 정점으로 부대배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미국은 1945년 3월 오키나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오키나와를 버리는 역할로 삼아 본토 방어의 시간을 확보하려고 했기때문에 일본군은 내륙으로 들어가 방어에 집중했다.
때문에 일본군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주민들까지 전원 옥쇄해 가족끼리 서로를 죽이거나 수류탄으로 자결하는 등의 비극이 일어났다. 오키나와 주민은 미국의 일본 본토 침공을 막는다는 명목하에 잔인하게 희생됐다.
전투의 결과로 5월 말 제32군 사령부는 달아나고 6월 23일 군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가 자결했다. 이로써 수많은 희생자를 낸 이 전투는 끝이 났다.
오키나와 주민 사망자 중에는 전투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집단자결로 내몰려 죽은 경우와 스파이 혐의로 살해된 경우 피난했던 참호에서 군대가 쫓아내 죽은 경우가 다수 포함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키나와를 희생하여 미군의 일본 본토 진격을 늦추고 패전 준비 시간을 확보하려던 일본군의 의도된 결과였다.
확인된 사망자 수는 오키나와인이 오키나와 징집병 28,000여 명과 일반 민간인 94,000명으로 총 사망자 122,000여 명, 타지역 출신 일본 군인 약 66,000명, 미군 사망자 12,500여 명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다. 민간인은 물론 일본군 관계자로 동원된 인력, 미군을 합하여 20만 명이상이 사망했다.
또한 지옥 같은 전투는 태평양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키나와에서 많은 희생으로 상처뿐인 승리를 얻은 미국은 일본 본토를 침략할 경우 더 큰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을 우려했다. 미국은 전쟁을 종결시킬 빠른 방법으로 원자폭탄을 선택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고 순식간에 수 만명의 희생으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 이오섬 : 일본 남동쪽에 있는 화산섬으로 도쿄에서 남쪽으로 1,200km 떨어져있다
* 오키나와 : 일본 최남단에 있는 현으로 오키나와섬을 포함한 류큐 제도를 관할한다. 본국인 일본보다 거리상 대만과 가까운 지역이라 중화민국과 거래나 왕래가 많은 지역이다. 과거 류큐 왕국이라 부르던 섬나라였다
[참고문헌]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오키나와에 전쟁 준비를 시작한 것은 오키나와를 담당하는 일본군 제32군이 창설된 1944년 3월부터 시작하여 6~9월을 정점으로 부대배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미국은 1945년 3월 오키나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오키나와를 버리는 역할로 삼아 본토 방어의 시간을 확보하려고 했기때문에 일본군은 내륙으로 들어가 방어에 집중했다.
때문에 일본군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주민들까지 전원 옥쇄해 가족끼리 서로를 죽이거나 수류탄으로 자결하는 등의 비극이 일어났다. 오키나와 주민은 미국의 일본 본토 침공을 막는다는 명목하에 잔인하게 희생됐다.
전투의 결과로 5월 말 제32군 사령부는 달아나고 6월 23일 군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가 자결했다. 이로써 수많은 희생자를 낸 이 전투는 끝이 났다.
오키나와 주민 사망자 중에는 전투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집단자결로 내몰려 죽은 경우와 스파이 혐의로 살해된 경우 피난했던 참호에서 군대가 쫓아내 죽은 경우가 다수 포함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키나와를 희생하여 미군의 일본 본토 진격을 늦추고 패전 준비 시간을 확보하려던 일본군의 의도된 결과였다.
확인된 사망자 수는 오키나와인이 오키나와 징집병 28,000여 명과 일반 민간인 94,000명으로 총 사망자 122,000여 명, 타지역 출신 일본 군인 약 66,000명, 미군 사망자 12,500여 명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다. 민간인은 물론 일본군 관계자로 동원된 인력, 미군을 합하여 20만 명이상이 사망했다.
또한 지옥 같은 전투는 태평양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키나와에서 많은 희생으로 상처뿐인 승리를 얻은 미국은 일본 본토를 침략할 경우 더 큰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을 우려했다. 미국은 전쟁을 종결시킬 빠른 방법으로 원자폭탄을 선택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고 순식간에 수 만명의 희생으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 이오섬 : 일본 남동쪽에 있는 화산섬으로 도쿄에서 남쪽으로 1,200km 떨어져있다
* 오키나와 : 일본 최남단에 있는 현으로 오키나와섬을 포함한 류큐 제도를 관할한다. 본국인 일본보다 거리상 대만과 가까운 지역이라 중화민국과 거래나 왕래가 많은 지역이다. 과거 류큐 왕국이라 부르던 섬나라였다
[참고문헌]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는 제2차 세계대전이 다 끝나갈 무렵 1945년 나치 독일의 항복(5월 7일 항복) 이후에도 전쟁 수행 의지를 꺾지 않는 일본에 8월 6일 히로시마시에 '리틀 보이(Little boy)'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3일 후인 8월 9일에 나가사키시에 '팻 맨(Fat man)'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6일 후인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했으며 9월 2일 항복 문서에 사인하면서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렸다.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6일 후인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했으며 9월 2일 항복 문서에 사인하면서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렸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 사이에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대표 번스(James F. Byrnes)국무장관, 소련대표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외무장관, 영국대표 베빈(Ernest Bevin)외무장관이 모여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문제들과 관련한 7개 의제에 대해 논의하여 발표하였다.
1.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그리고 핀란드에 대한 평화조약 준비(I. PREPARATION OF PEACE TREATIES WITH ITALY, ROMANIA, BULGARIA, HUNGARY AND FINLAND,(파리 조약 참고)
2.일본에 대한 극동 지역 위원회와 연합회의(II. FAR EASTERN COMMISSION AND ALLIED COUNCIL FOR JAPAN)
3.한국(III. KOREA)
4.중국(IV. CHINA)
5.루마니아 (V. RUMANIA)
6.불가리아 (VI. BULGARIA)
7.원자력 에너지의 통제를 위한 미국에 의한 위원회 설립 (VII. THE ESTABLISHMENT BY THE UNITED NATIONS OF A COMMISSION FOR THE CONTROL OF ATOMIC ENERGY)
회담에서는 전후 유럽의 처리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며, 3번째 의제인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기간의 신탁통치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사안이 결정되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인들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든다.
둘째, 이러한 조직을 도와주기 위해 미군과 소련군의 대표로 구성된 공동위원회를 수립한다.
셋째, 열강들과 한국인들의 대표로 만든 조직이 협의해서 최대 5년을 기한으로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넷째, 분할 점령으로 인한 심각한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과 소련군이 협의한다.
'신탁통치'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내용을 살펴보면 길어야 5년 이내의 한시조건이었지만 또 다른 외세 개입이 이루어진다는 역풍으로 대한민국은 찬탁(김규식, 여운형등)과 반탁(김구,이승만등)의 극심한 분열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되어 오늘날 분단의 아픔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1.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그리고 핀란드에 대한 평화조약 준비(I. PREPARATION OF PEACE TREATIES WITH ITALY, ROMANIA, BULGARIA, HUNGARY AND FINLAND,(파리 조약 참고)
2.일본에 대한 극동 지역 위원회와 연합회의(II. FAR EASTERN COMMISSION AND ALLIED COUNCIL FOR JAPAN)
3.한국(III. KOREA)
4.중국(IV. CHINA)
5.루마니아 (V. RUMANIA)
6.불가리아 (VI. BULGARIA)
7.원자력 에너지의 통제를 위한 미국에 의한 위원회 설립 (VII. THE ESTABLISHMENT BY THE UNITED NATIONS OF A COMMISSION FOR THE CONTROL OF ATOMIC ENERGY)
회담에서는 전후 유럽의 처리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며, 3번째 의제인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기간의 신탁통치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사안이 결정되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인들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든다.
둘째, 이러한 조직을 도와주기 위해 미군과 소련군의 대표로 구성된 공동위원회를 수립한다.
셋째, 열강들과 한국인들의 대표로 만든 조직이 협의해서 최대 5년을 기한으로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넷째, 분할 점령으로 인한 심각한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과 소련군이 협의한다.
'신탁통치'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내용을 살펴보면 길어야 5년 이내의 한시조건이었지만 또 다른 외세 개입이 이루어진다는 역풍으로 대한민국은 찬탁(김규식, 여운형등)과 반탁(김구,이승만등)의 극심한 분열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되어 오늘날 분단의 아픔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 사건은 1946년 7월 22일, 당시 영국의 위임통치령이던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탄 테러 사건이다. 유대 무장조직인 [1]이르군이 영국 행정본부을 겨냥해 주도한 공격이었다.
킹 데이비드 호텔은 1932년에 개장한 예루살렘 최초의 현대식 고급 6층짜리 호텔이다. 평면적으로 I자형으로 날개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긴 중앙 축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도로인 [2]줄리안스 웨이는 호텔 서쪽과 평행하게 뻗어 있었다.
영국 행정본부는 호텔 남쪽 건물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군사 본부는 남쪽 건물의 최상층과 호텔 중앙의 최상층, 2층, 3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1946년 7월 22일, 이르군 대원들은 영국군 복장을 하고 호텔의 지하 카페로 진입한 후, 우유통에 위장한 폭발물을 설치했다. 폭파 시각은 오전 12시 37분경으로, 경고 전화가 여러 곳에 사전에 전달되었지만, 영국 당국이 이를 무시했거나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폭발로 인해 호텔 남쪽 전체가 붕괴되었고, 총 91명이 사망하고 4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사망자 중에는 영국인뿐 아니라 유대인, 아랍인, 기타 외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어 민간인 피해가 상당했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며 벌어진 폭력적인 행동으로, 특히 많은 피해를 초래하고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은 유대 무장세력에 대한 강경 진압에 나섰고, 유대인 사회 내부에서도 이르군의 무차별적 폭력에 대해 비판 여론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이 사건을 영국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보기도 했다.
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 사건은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유지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철수를 결정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과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테러를 주도한 이르군의 지도자 [3]메나헴 베긴은 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되어, 독립운동과 테러리즘 사이의 경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 이르군(Irgun) : 1931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 위임통치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했던 시온주의 무장조직. 이르군의 주요 목표는 무력을 동원하여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으며, 영국군과 아랍인 모두를 공격했다. 이르군의 정치조직은 이스라엘 우파 집권 정당인 리쿠드당의 뿌리 중 하나가 됐다.
[2] 줄리안스 웨이(Julian's Way) : 현재 킹 데이비드 스트리트
[3]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 1913년 8월 16일~1992년 3월 9일) : 이스라엘의 제7대 총리(임기, 1977년 6월 20일~1983년 10월 10일). 이스라엘-이집트 간의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이집트 사다트와 함께 1978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킹 데이비드 호텔은 1932년에 개장한 예루살렘 최초의 현대식 고급 6층짜리 호텔이다. 평면적으로 I자형으로 날개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긴 중앙 축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도로인 [2]줄리안스 웨이는 호텔 서쪽과 평행하게 뻗어 있었다.
영국 행정본부는 호텔 남쪽 건물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군사 본부는 남쪽 건물의 최상층과 호텔 중앙의 최상층, 2층, 3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1946년 7월 22일, 이르군 대원들은 영국군 복장을 하고 호텔의 지하 카페로 진입한 후, 우유통에 위장한 폭발물을 설치했다. 폭파 시각은 오전 12시 37분경으로, 경고 전화가 여러 곳에 사전에 전달되었지만, 영국 당국이 이를 무시했거나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폭발로 인해 호텔 남쪽 전체가 붕괴되었고, 총 91명이 사망하고 4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사망자 중에는 영국인뿐 아니라 유대인, 아랍인, 기타 외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어 민간인 피해가 상당했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며 벌어진 폭력적인 행동으로, 특히 많은 피해를 초래하고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은 유대 무장세력에 대한 강경 진압에 나섰고, 유대인 사회 내부에서도 이르군의 무차별적 폭력에 대해 비판 여론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일부는 이 사건을 영국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보기도 했다.
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 사건은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유지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철수를 결정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1947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분할 결의안과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테러를 주도한 이르군의 지도자 [3]메나헴 베긴은 훗날 이스라엘 총리가 되어, 독립운동과 테러리즘 사이의 경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 이르군(Irgun) : 1931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 위임통치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했던 시온주의 무장조직. 이르군의 주요 목표는 무력을 동원하여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으며, 영국군과 아랍인 모두를 공격했다. 이르군의 정치조직은 이스라엘 우파 집권 정당인 리쿠드당의 뿌리 중 하나가 됐다.
[2] 줄리안스 웨이(Julian's Way) : 현재 킹 데이비드 스트리트
[3]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 1913년 8월 16일~1992년 3월 9일) : 이스라엘의 제7대 총리(임기, 1977년 6월 20일~1983년 10월 10일). 이스라엘-이집트 간의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이집트 사다트와 함께 1978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후 대부분의 식민 국가들은 독립했으나 프랑스는 베트남의 식민 지배를 재건하려 했고, [2]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인 [3]베트민은 독립을 위해 싸웠다.
베트남 독립전쟁, 프랑스-베트남 전쟁등으로 불린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베트민의 [2]호찌민은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6년 11월 23일 프랑스가 [5]하이퐁 항구를 포격하여 6,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45년 12월 19일 [4]보응우옌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군은 하노이의 프랑스군을 공격하였다. [2]호찌민은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베트남 독립전쟁인 제1차 [1]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프랑스는 재정문제와 내부의 반발과 비판하는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54년 5월 7일 [6]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전하면서 베트민과 휴전 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56일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천명~3천명의 전사자를 냈고 8년간의 전쟁에서 총 7만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양측은 휴전 협정을 통하여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프랑스의 남베트남(월남)과 베트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 월맹)으로 나눠졌으며 남북으로 2km씩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되었다.
[1] 인도차이나 :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라고 불렸다
[2] 호찌민(Ho Chi Minh, 1890년~1969년) : 본명은 응우옌 신 꿍(Nguyen Sinh Cung).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베트남의 초대 국가주석.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
[3] 베트민(Viet Minh) : 베트남 독립동맹회(越南獨立同盟會)의 약칭으로, 1941년 5월 19일 호찌민이 빡보에서 설립한 베트남 민족독립주의 단체이다. 대한민국 한자음으로 월맹(越盟)으로 알려져 있다.1941년에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민족주의 계열 정당의 동맹으로 결성되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독립의 주역이다
[4]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1911년~2013년) : 베트남의 장군이자 정치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 뒤이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까지 승리를 이끈 현대 베트남 최고의 명장
[5] 하이퐁(Hai Phong) : 베트남 동북부의 항구 도시
[6] 디엔비엔푸(Điện Biên Phủ) : 베트남 북부, 라오스와의 접경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당시 프랑스군이 베트민의 교통을 차단하고자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였으나 베트민의 포위공격에 항복함으로써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베트남 독립전쟁, 프랑스-베트남 전쟁등으로 불린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베트민의 [2]호찌민은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6년 11월 23일 프랑스가 [5]하이퐁 항구를 포격하여 6,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45년 12월 19일 [4]보응우옌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군은 하노이의 프랑스군을 공격하였다. [2]호찌민은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베트남 독립전쟁인 제1차 [1]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프랑스는 재정문제와 내부의 반발과 비판하는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54년 5월 7일 [6]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전하면서 베트민과 휴전 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56일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천명~3천명의 전사자를 냈고 8년간의 전쟁에서 총 7만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양측은 휴전 협정을 통하여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프랑스의 남베트남(월남)과 베트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 월맹)으로 나눠졌으며 남북으로 2km씩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되었다.
[1] 인도차이나 :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라고 불렸다
[2] 호찌민(Ho Chi Minh, 1890년~1969년) : 본명은 응우옌 신 꿍(Nguyen Sinh Cung).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베트남의 초대 국가주석.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
[3] 베트민(Viet Minh) : 베트남 독립동맹회(越南獨立同盟會)의 약칭으로, 1941년 5월 19일 호찌민이 빡보에서 설립한 베트남 민족독립주의 단체이다. 대한민국 한자음으로 월맹(越盟)으로 알려져 있다.1941년에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민족주의 계열 정당의 동맹으로 결성되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독립의 주역이다
[4]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1911년~2013년) : 베트남의 장군이자 정치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 뒤이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까지 승리를 이끈 현대 베트남 최고의 명장
[5] 하이퐁(Hai Phong) : 베트남 동북부의 항구 도시
[6] 디엔비엔푸(Điện Biên Phủ) : 베트남 북부, 라오스와의 접경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당시 프랑스군이 베트민의 교통을 차단하고자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였으나 베트민의 포위공격에 항복함으로써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타이완은 중국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1895년 4월 17일에 일본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 1945년 10월 17일 중화민국의 국민혁명군이 타이완에 상륙하면서 타이완과 [2]펑후제도를 영토로 회복하였다.
중국 국민당정부는 1945년 8월 28일, [1]천이를 타이완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타이완 주민들은 같은 민족인 중국 대륙의 국민당정부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며 10월 24일 타이베이에 도착한 [1]천이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천이는 10월 25일 타이완 주둔 일본군의 항복으로 타이완과 [2]펑후 제도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영토로 완전하게 회복하였음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일본의 지배와 수탈을 받던 타이완 주민들은 새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국민당정부는 중국 대륙의 문화와 다른 문화를 갖고 있던 타이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으며 타이완 주민을 친일파 혹은 미개인으로 취급하며 점령군과 같은 의식을 갖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타이완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관인 [1]천이부터 말단까지 타이완에 도착하자마자 타이완 주민을 착취하였으며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당시 타이완의 주요 요직은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넘어온 외성인(중국 본토인)들이 차지하면서 본성인(타이완 주민)들은 차별과 착취를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이완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고 국민당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날로 커져만 갔고 '개(일본)가 가고 돼지가 왔다'고 하는 등 불심감이 팽배하였다.
1947년 2월 27일 밤, 타이베이시 위엔환빌딩 안의 복도에서 국민당정부의 전매 독점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팔던 린쟝마이라는 여인이 허가받지 않고 담배노점을 벌였다는 이유로 단속원과 경찰에 의해 폭행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폭행을 당하면서도 담배를 빼앗지 말아 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하였고 주변에 있던 군중들이 동정하였다. 이때 단속원과 경찰이 군중속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권총을 뽑아 발사하였는데 군중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단속원과 경찰은 도망쳤고 분노한 군중은 경찰서로 몰려가 살인자를 처벌하라고 항의했다. 이로 인하여 타이베이시는 분노의 정서가 확산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이를 원환집연사건(圓環緝煙事件)이라고 한다.
1947년 2월 28일 사망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서와 군부대로 몰려들어 해당 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며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타이완성 행정장관 집무처로 몰려가 천이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요구하였다. 시위에 가담하는 군중은 갈수록 늘어났다. 관청을 지키던 경비병과 시위대가 충돌하면서 두 사람이 경비병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급기야 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기도 했으며 경찰들을 구타해 사망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시위는 타이베이 시내 도처에서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의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2월 28일 오후 계엄이 선포되면서 민중과 정부간의 대립을 더욱 격화되었다. 2월 28일 당일 타이베이시 전역에서 파업 및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기 시작했고, 그 다음 날인 3월 1일 이후에는 시위의 범위가 타이완 전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른바 '2.28사건'이다.
사태 해결을 위해 행정장관 천이의 타협으로 '2.28사건처리위원회'를 구성되어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3월 4일 이후 사태는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천이는 앞으로는 처리위원회를 통해 소요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뒤로는 시위의 무력 진압을 위해 국민당 총통 [5]장제스에게 중국대륙에 있는 국민혁명군의 증파를 요청했다.
3월 8일 중국대륙에서 파병된 중화민국군 헌병 제4연대의 대대병력이 타이완 [3]지룽항에 도착하면서 항구에 대해 무차별 소탕작전을 실시하여 진압했다. 3월 9일 제21사단도 지룽항에 도착하여 타이베이시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무차별 진압에 돌입했으며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진압은 10여 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고, 본성인(타이완 주민) 약 3만 명이 사망,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과 약탈로 인해 타이완 전역이 초토화되었고, 결국 시위는 강제 진압되었다. 당시엔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수상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사살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조선인, 일본인들도 이 때 타이완사람으로 오인받아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대규모 살육과 약탈은 3월 17일 국민당 국방부장 [4]바이충시가 타이완에 도착하여 3월 21일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국민당 총통 [5]장제스는 '2.28사건처리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하고 위원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했다. 5월 16일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사태 종료를 선언함으로써 2.28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국민당정부는 [6]'청향운동'을 전개하여 민중들을 구속하고 처형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사건 이후 40년 동안 타이완(현 중화민국)에서 2.28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최대의 금기였다. 중국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중국 국민당은 1949년 12월에 중화민국 국민당정부를 타이베이로 옮겨왔다.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 중화민국 정부는 공식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2.28 평화기념공원(二二八和平紀念公園)을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 천이(1883년~1950년) :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가. 복건성 정부주석, 대만 행정장관 등을 역임했으나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를 배신하려다가 들켜 총살당했다.
[2] 펑후(Penghu)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3] 지룽(Keelung) : 중화민국 타이완 북부의 항만도시. 일본의 식민통치 시대 이전부터 대외 무역의 거점이었으며 일본해군의 군항이었다
[4] 바이충시(白崇禧, 1893년~1966년) : 한자음 백숭희. 중화민국의 군벌, 군인, 정치가. 중화민국의 제1대 국방부 장관. 국민혁명군 내의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서 일급상장(대장에 해당)까지 올랐다
[5]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6] 청향(淸鄕) : 산간지방으로 도피한 타이완인들을 잡아 농촌을 깨끗하게 한다는 이른바 청향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들과 연계되었다고 의심받은 수많은 타이완인들이 사법절차도 없이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재판없이 처형되었다
중국 국민당정부는 1945년 8월 28일, [1]천이를 타이완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타이완 주민들은 같은 민족인 중국 대륙의 국민당정부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며 10월 24일 타이베이에 도착한 [1]천이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천이는 10월 25일 타이완 주둔 일본군의 항복으로 타이완과 [2]펑후 제도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영토로 완전하게 회복하였음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일본의 지배와 수탈을 받던 타이완 주민들은 새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국민당정부는 중국 대륙의 문화와 다른 문화를 갖고 있던 타이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으며 타이완 주민을 친일파 혹은 미개인으로 취급하며 점령군과 같은 의식을 갖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타이완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관인 [1]천이부터 말단까지 타이완에 도착하자마자 타이완 주민을 착취하였으며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당시 타이완의 주요 요직은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넘어온 외성인(중국 본토인)들이 차지하면서 본성인(타이완 주민)들은 차별과 착취를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이완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고 국민당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날로 커져만 갔고 '개(일본)가 가고 돼지가 왔다'고 하는 등 불심감이 팽배하였다.
1947년 2월 27일 밤, 타이베이시 위엔환빌딩 안의 복도에서 국민당정부의 전매 독점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팔던 린쟝마이라는 여인이 허가받지 않고 담배노점을 벌였다는 이유로 단속원과 경찰에 의해 폭행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폭행을 당하면서도 담배를 빼앗지 말아 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하였고 주변에 있던 군중들이 동정하였다. 이때 단속원과 경찰이 군중속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권총을 뽑아 발사하였는데 군중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단속원과 경찰은 도망쳤고 분노한 군중은 경찰서로 몰려가 살인자를 처벌하라고 항의했다. 이로 인하여 타이베이시는 분노의 정서가 확산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이를 원환집연사건(圓環緝煙事件)이라고 한다.
1947년 2월 28일 사망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서와 군부대로 몰려들어 해당 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며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타이완성 행정장관 집무처로 몰려가 천이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요구하였다. 시위에 가담하는 군중은 갈수록 늘어났다. 관청을 지키던 경비병과 시위대가 충돌하면서 두 사람이 경비병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급기야 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기도 했으며 경찰들을 구타해 사망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시위는 타이베이 시내 도처에서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의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2월 28일 오후 계엄이 선포되면서 민중과 정부간의 대립을 더욱 격화되었다. 2월 28일 당일 타이베이시 전역에서 파업 및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기 시작했고, 그 다음 날인 3월 1일 이후에는 시위의 범위가 타이완 전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른바 '2.28사건'이다.
사태 해결을 위해 행정장관 천이의 타협으로 '2.28사건처리위원회'를 구성되어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3월 4일 이후 사태는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천이는 앞으로는 처리위원회를 통해 소요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뒤로는 시위의 무력 진압을 위해 국민당 총통 [5]장제스에게 중국대륙에 있는 국민혁명군의 증파를 요청했다.
3월 8일 중국대륙에서 파병된 중화민국군 헌병 제4연대의 대대병력이 타이완 [3]지룽항에 도착하면서 항구에 대해 무차별 소탕작전을 실시하여 진압했다. 3월 9일 제21사단도 지룽항에 도착하여 타이베이시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무차별 진압에 돌입했으며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진압은 10여 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고, 본성인(타이완 주민) 약 3만 명이 사망,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과 약탈로 인해 타이완 전역이 초토화되었고, 결국 시위는 강제 진압되었다. 당시엔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수상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사살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조선인, 일본인들도 이 때 타이완사람으로 오인받아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대규모 살육과 약탈은 3월 17일 국민당 국방부장 [4]바이충시가 타이완에 도착하여 3월 21일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국민당 총통 [5]장제스는 '2.28사건처리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하고 위원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했다. 5월 16일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사태 종료를 선언함으로써 2.28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국민당정부는 [6]'청향운동'을 전개하여 민중들을 구속하고 처형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사건 이후 40년 동안 타이완(현 중화민국)에서 2.28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최대의 금기였다. 중국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중국 국민당은 1949년 12월에 중화민국 국민당정부를 타이베이로 옮겨왔다.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 중화민국 정부는 공식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2.28 평화기념공원(二二八和平紀念公園)을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 천이(1883년~1950년) :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가. 복건성 정부주석, 대만 행정장관 등을 역임했으나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를 배신하려다가 들켜 총살당했다.
[2] 펑후(Penghu)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3] 지룽(Keelung) : 중화민국 타이완 북부의 항만도시. 일본의 식민통치 시대 이전부터 대외 무역의 거점이었으며 일본해군의 군항이었다
[4] 바이충시(白崇禧, 1893년~1966년) : 한자음 백숭희. 중화민국의 군벌, 군인, 정치가. 중화민국의 제1대 국방부 장관. 국민혁명군 내의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서 일급상장(대장에 해당)까지 올랐다
[5]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6] 청향(淸鄕) : 산간지방으로 도피한 타이완인들을 잡아 농촌을 깨끗하게 한다는 이른바 청향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들과 연계되었다고 의심받은 수많은 타이완인들이 사법절차도 없이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재판없이 처형되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이 기점이 되어 1948년 4월 3일 [1]남조선노동당 무장대 봉기로 시작되어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이 발생되었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죄없는 민간인들이 무차별하게 희생당한 사건이 제주 4.3사건이다. 민간인 희생자는 약 3만명으로 추정된다.
학살 피해자들의 유족 및 제주 도민들은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하여 노력했으나 민주화 이후에도 4.3사건의 부정과 탄압이 계속되었다.
2000년에 이르러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1] 남조선노동당 : 1946년 11월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3당 합당으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 당수는 초대 여운형, 2대 허헌, 3대 박헌영이 맡았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죄없는 민간인들이 무차별하게 희생당한 사건이 제주 4.3사건이다. 민간인 희생자는 약 3만명으로 추정된다.
학살 피해자들의 유족 및 제주 도민들은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하여 노력했으나 민주화 이후에도 4.3사건의 부정과 탄압이 계속되었다.
2000년에 이르러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1] 남조선노동당 : 1946년 11월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3당 합당으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 당수는 초대 여운형, 2대 허헌, 3대 박헌영이 맡았다
미국 대통령 [1]해리 트루먼이 발표한 외교 정책으로,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대외정책 원칙을 담고 있다.
이 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에 대항하기 위해 마련되었으며, 특히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1]트루먼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갈등"으로 규정하며, 미국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루먼 독트린은 냉전 초기 미국의 [2]봉쇄정의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3]마셜플랜과 [4]나토창설 등으로 이어져 서방 진영의 단결을 강화하고 공산 진영과 대립하는 냉전 체제를 고착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1884년 5월 8일~1972년 12월 26일) : 미국 33대(재임:1945년 4월 12일~1953년 1월 20일) 대통령
[2]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 :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수단을 동원한 냉전 시대의 대외 정책
[3] 마셜플랜(Marshall Plan) : 유럽 부흥 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경제 회복과 공산주의 확산 방지를 위해 미국이 제공한 대규모 경제 지원 정책
[4]나토(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 1949년 창설된 북대서양 조약기구로, 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 32개의 회원국들 간의 정치 및 군사 동맹으로 본부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위치한다
이 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에 대항하기 위해 마련되었으며, 특히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1]트루먼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갈등"으로 규정하며, 미국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루먼 독트린은 냉전 초기 미국의 [2]봉쇄정의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3]마셜플랜과 [4]나토창설 등으로 이어져 서방 진영의 단결을 강화하고 공산 진영과 대립하는 냉전 체제를 고착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1884년 5월 8일~1972년 12월 26일) : 미국 33대(재임:1945년 4월 12일~1953년 1월 20일) 대통령
[2]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 :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수단을 동원한 냉전 시대의 대외 정책
[3] 마셜플랜(Marshall Plan) : 유럽 부흥 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경제 회복과 공산주의 확산 방지를 위해 미국이 제공한 대규모 경제 지원 정책
[4]나토(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 1949년 창설된 북대서양 조약기구로, 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 32개의 회원국들 간의 정치 및 군사 동맹으로 본부는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위치한다
1948년 5월 10일은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국회원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시작이었다.
유엔의 결의에 의거하여 보통·평등·비밀·직접의 4대 원칙을 수용한 민주주의 제도로 한국대표 및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남북 총선거 실시를 발표하였다.
남북한을 통하여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로 300석의 국회의원을 선출할 방침이었으나, 북한지역의 선거불가능으로 북한지역 할당의석 수 100석을 유보해 두고 남한에서의 의석 수를 200석으로 할당하여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유권자 등록기간을 설정하여 총유권자(813만2517명)중에 96.4%에 해당하는 784만871인이 선거인 명부에 등재되었다. 이 중에 95.5%가 투표에 참가했으며, 이는 역대 선거사상 최고의 투표율로써 정부 수립이라는 염원이 지대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그 해 5월 31일에 선거위원회의 소집에 의하여 한국헌정사상 최초로 제헌의회가 개원되었고, 국회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를 선출하였다
제헌국회는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북한은 9월 9일 정부를 수립한다.
한국사에서 최초로 자유 다당제를 정착시킨 사례이며 성공적으로 자유민주적 방식으로 공직자를 선출한 사례이기도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 선거라는 한계로 많은 아쉬움이 남는 선거였다.
이 선거는 1948년 5월 9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 날이 일요일이라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많다는 의견과 5월 9일은 한반도를 통과하는 일식이 예정되어 있어 5월 10일로 하루 연기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유엔의 결의에 의거하여 보통·평등·비밀·직접의 4대 원칙을 수용한 민주주의 제도로 한국대표 및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남북 총선거 실시를 발표하였다.
남북한을 통하여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로 300석의 국회의원을 선출할 방침이었으나, 북한지역의 선거불가능으로 북한지역 할당의석 수 100석을 유보해 두고 남한에서의 의석 수를 200석으로 할당하여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유권자 등록기간을 설정하여 총유권자(813만2517명)중에 96.4%에 해당하는 784만871인이 선거인 명부에 등재되었다. 이 중에 95.5%가 투표에 참가했으며, 이는 역대 선거사상 최고의 투표율로써 정부 수립이라는 염원이 지대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그 해 5월 31일에 선거위원회의 소집에 의하여 한국헌정사상 최초로 제헌의회가 개원되었고, 국회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를 선출하였다
제헌국회는 7월 17일 헌법을 제정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북한은 9월 9일 정부를 수립한다.
한국사에서 최초로 자유 다당제를 정착시킨 사례이며 성공적으로 자유민주적 방식으로 공직자를 선출한 사례이기도하였으나 남한만의 단독 선거라는 한계로 많은 아쉬움이 남는 선거였다.
이 선거는 1948년 5월 9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 날이 일요일이라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많다는 의견과 5월 9일은 한반도를 통과하는 일식이 예정되어 있어 5월 10일로 하루 연기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제1차 중동전쟁은 아랍국가에서는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이라 부른다. 이 전쟁을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1920년부터 통치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8년에 영국은 파레스타인에서 철수했다.
수천년동안 나라없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은 2차 세계대전때 홀로코스트를 계기로 명목상 주인없는 땅이 되어버린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한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두고 아랍인과 유대인간의 갈등과 충돌이 지속되었다. 1947년에 팔레스타인지역에는 유대인 60만명, 팔레스타인인은 136만명으로 상호 대립관계가 형성되면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유엔총회(1947년 11월 29일)에서 팔레스타인 영토의 56% 유대인에게 나머지 44%는 아랍민족에게 배분하고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국제관리지구로 지정한다는 결의안이 통과되자,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은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게 되었다. 주위 [1]아랍국가들은 연합을 결성하였으며 1948년 1월 팔레스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아랍지원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2]벤구리온은 [3]텔아비브에서 1948년 5월14일 독립을 선언했다. 이스라엘 건국에 반발한 [1]아랍연합군은 바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남쪽에서 이집트, 서쪽은 요르단, 북쪽으로 시리아, 레바논이 3면에서 공격하였다. 전력면이나 지정학적으로 이스라엘이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당시 소련은 아랍쪽으로 영향력을 넓히기 싶어했다. 주변국가들의 눈치때문에 위성국가였던 체코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하였다. 수세에 몰리던 이스라엘은 아랍연합군과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서쪽의 요르단의 공격으로 이스라엘 민병대는 예루살렘에서 포위되었으나 격렬한 저항으로 포위망을 뚫고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서로 공격하고 방어하면서 전투가 지속되었으며, 북쪽지역의 시리아군, 레바논군은 이스라엘에 패배하였다.
계속되는 공방전에서 아랍연합군 통합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하여 서로간의 불신으로 단합이 되지 않아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같은 아랍연합군의 내부적으로 분열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더 이상 실효성없다고 판단한 아랍연합군은 각자 차례대로 이스라엘과 휴전을 체결하였다.
1949년 3월 10일 홍해와 접한 항구도시인 [4]에일라트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면적의 78%를 차지했고 나머지 지역 중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장악한 지역에서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70여 만명의 팔레스타인인을 타지역으로 내몰았다.
[1] 아랍연합국 :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파이살 국왕), 이집트(파루크 국왕), 요르단(압둘라 국왕)
[2]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1886~1973) : 이스라엘의 초대총리
[3] 텔아비브(Tel Aviv) : 이스라엘 서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 이스라엘의 실질적 수도
[4] 에일라트(Eilat) : 이스라엘 최남단. 홍해에 딸린 아카바 만 최북단에 위치하는 항구도시로 서쪽은 이집트, 동쪽은 요르단에 면하는 국경도시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1920년부터 통치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8년에 영국은 파레스타인에서 철수했다.
수천년동안 나라없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은은 2차 세계대전때 홀로코스트를 계기로 명목상 주인없는 땅이 되어버린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한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두고 아랍인과 유대인간의 갈등과 충돌이 지속되었다. 1947년에 팔레스타인지역에는 유대인 60만명, 팔레스타인인은 136만명으로 상호 대립관계가 형성되면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더구나 유엔총회(1947년 11월 29일)에서 팔레스타인 영토의 56% 유대인에게 나머지 44%는 아랍민족에게 배분하고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국제관리지구로 지정한다는 결의안이 통과되자,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은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게 되었다. 주위 [1]아랍국가들은 연합을 결성하였으며 1948년 1월 팔레스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아랍지원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2]벤구리온은 [3]텔아비브에서 1948년 5월14일 독립을 선언했다. 이스라엘 건국에 반발한 [1]아랍연합군은 바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남쪽에서 이집트, 서쪽은 요르단, 북쪽으로 시리아, 레바논이 3면에서 공격하였다. 전력면이나 지정학적으로 이스라엘이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당시 소련은 아랍쪽으로 영향력을 넓히기 싶어했다. 주변국가들의 눈치때문에 위성국가였던 체코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하였다. 수세에 몰리던 이스라엘은 아랍연합군과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서쪽의 요르단의 공격으로 이스라엘 민병대는 예루살렘에서 포위되었으나 격렬한 저항으로 포위망을 뚫고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서로 공격하고 방어하면서 전투가 지속되었으며, 북쪽지역의 시리아군, 레바논군은 이스라엘에 패배하였다.
계속되는 공방전에서 아랍연합군 통합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하여 서로간의 불신으로 단합이 되지 않아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같은 아랍연합군의 내부적으로 분열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더 이상 실효성없다고 판단한 아랍연합군은 각자 차례대로 이스라엘과 휴전을 체결하였다.
1949년 3월 10일 홍해와 접한 항구도시인 [4]에일라트를 점령한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게양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면적의 78%를 차지했고 나머지 지역 중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장악한 지역에서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70여 만명의 팔레스타인인을 타지역으로 내몰았다.
[1] 아랍연합국 :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파이살 국왕), 이집트(파루크 국왕), 요르단(압둘라 국왕)
[2]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1886~1973) : 이스라엘의 초대총리
[3] 텔아비브(Tel Aviv) : 이스라엘 서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 이스라엘의 실질적 수도
[4] 에일라트(Eilat) : 이스라엘 최남단. 홍해에 딸린 아카바 만 최북단에 위치하는 항구도시로 서쪽은 이집트, 동쪽은 요르단에 면하는 국경도시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는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제주도로 출동하라는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14연대 소속 군인 김지회와 지창수를 중심으로 여수 및 순천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발효하여 진압하였다.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을 포함하여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 당시 계엄령 발효는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엄령 발효는 위헌행위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 지창수(1906년~1950년) : 여순 14연대 소속 군인
* 김지회(? ~ 1949년 4월 9일) : 여순 14연대 소속 군인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발효하여 진압하였다.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을 포함하여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 당시 계엄령 발효는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엄령 발효는 위헌행위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 지창수(1906년~1950년) : 여순 14연대 소속 군인
* 김지회(? ~ 1949년 4월 9일) : 여순 14연대 소속 군인
1949년 6월 26일 [1] 경교장에서 울린 총성은 평생을 조국 광복과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백범 김구의 생명을 앗아갔다.
2충 집무실 남쪽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던 선생은 인사를 하고 싶다고 찾아온 주한미국 방첩대(CIC)요원이자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쏜 네발의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한 발은 인중을, 또 한발은 목을 관통했으며 다른 두발은 앞가슴과 하복부를 뚫고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선생의 죽음에 3천만 동포 모두 슬픔에 빠졌고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후 7월 5일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1] 경교장 : 1945년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시막 청사이자 백범 김구(金九)가 기거 및 서거한 공간(사적 제465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강북삼성병원 부지 안에 위치(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2충 집무실 남쪽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던 선생은 인사를 하고 싶다고 찾아온 주한미국 방첩대(CIC)요원이자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쏜 네발의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한 발은 인중을, 또 한발은 목을 관통했으며 다른 두발은 앞가슴과 하복부를 뚫고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선생의 죽음에 3천만 동포 모두 슬픔에 빠졌고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후 7월 5일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1] 경교장 : 1945년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시막 청사이자 백범 김구(金九)가 기거 및 서거한 공간(사적 제465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강북삼성병원 부지 안에 위치(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프랑스 인도차이나 전쟁(1945~1954)동안 프랑스군은 베트남의 식민 지배를 재건하려 했고,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인 [3]베트민은 독립을 위해 싸웠다.
[1]까오방 전투는 1947년 10월에 시작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1949년 9월 3일에 절정에 달했던 베트남 북부에서 진행된 전투였다.
베트민군은 [2]통킹 만에서 루트 콜로니얼 4(Route Colonial 4, RC4)로 알려진 카오방의 프랑스 수비대까지 147마일의 경로를 따라 베트남-중국 국경을 따라 프랑스 호송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매복했다.
루트 콜로니얼 4(RC4)는 [1]까오방에 있는 프랑스 군사 기지에 물자를 공급하는데 사용되는 험난한 도로이다.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프랑스 군은 베트님의 매복공격으로 프랑스 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은 비참한 연속 전투였다.
프랑스 군의 몇몇 부대는 전멸되었고 약 4,800명의 프랑스 군인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업고 2,000명이 신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1949년 9월 3일, [4]탓케(That Khe)에서 100대의 차량이 보병 스크린을 통과하여 강화된 호송대를 타고 26km의 거리를 이동하였다. 병력 수로 인해 차량당 병사 한 명으로 줄어든 프랑스군은 베트민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처음 20대의 트럭과 마지막 10대의 트럭이 정지되었고, 호송대의 중앙은 포탄에 의해 파괴되었다. 다음날 부상당한 프랑스군은 4명만이 살아남은 채 발견되었다.
이로인해 남은 전쟁동안 호송관행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 후 10~12대의 차량 호송대를 항공기 관찰을 통해 초소에서 초소로 이동했다.
[1] 까오방(Cao Bang) : 베트남 북부 까오방성의 주도.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
[2] 통킹만(Gulf of Tonkin)은 베트남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있는 만.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옛 명칭인 통킹에서 유래되었다
[3] 베트민(Viet Minh) : 베트남 독립동맹회(越南獨立同盟會)의 약칭으로, 1941년 5월 19일 호찌민이 빡보에서 설립한 베트남 민족독립주의 단체이다. 대한민국 한자음으로 월맹(越盟)으로 알려져 있다.1941년에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민족주의 계열 정당의 동맹으로 결성되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독립의 주역이다.
[4] 탓케(That Khe) : 까오방에서 남쪽으로 60m, 하노이 수도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230km 떨어져 있는 베트남 도시
[1]까오방 전투는 1947년 10월에 시작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1949년 9월 3일에 절정에 달했던 베트남 북부에서 진행된 전투였다.
베트민군은 [2]통킹 만에서 루트 콜로니얼 4(Route Colonial 4, RC4)로 알려진 카오방의 프랑스 수비대까지 147마일의 경로를 따라 베트남-중국 국경을 따라 프랑스 호송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매복했다.
루트 콜로니얼 4(RC4)는 [1]까오방에 있는 프랑스 군사 기지에 물자를 공급하는데 사용되는 험난한 도로이다.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프랑스 군은 베트님의 매복공격으로 프랑스 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은 비참한 연속 전투였다.
프랑스 군의 몇몇 부대는 전멸되었고 약 4,800명의 프랑스 군인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업고 2,000명이 신종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1949년 9월 3일, [4]탓케(That Khe)에서 100대의 차량이 보병 스크린을 통과하여 강화된 호송대를 타고 26km의 거리를 이동하였다. 병력 수로 인해 차량당 병사 한 명으로 줄어든 프랑스군은 베트민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처음 20대의 트럭과 마지막 10대의 트럭이 정지되었고, 호송대의 중앙은 포탄에 의해 파괴되었다. 다음날 부상당한 프랑스군은 4명만이 살아남은 채 발견되었다.
이로인해 남은 전쟁동안 호송관행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 후 10~12대의 차량 호송대를 항공기 관찰을 통해 초소에서 초소로 이동했다.
[1] 까오방(Cao Bang) : 베트남 북부 까오방성의 주도.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
[2] 통킹만(Gulf of Tonkin)은 베트남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있는 만.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옛 명칭인 통킹에서 유래되었다
[3] 베트민(Viet Minh) : 베트남 독립동맹회(越南獨立同盟會)의 약칭으로, 1941년 5월 19일 호찌민이 빡보에서 설립한 베트남 민족독립주의 단체이다. 대한민국 한자음으로 월맹(越盟)으로 알려져 있다.1941년에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민족주의 계열 정당의 동맹으로 결성되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독립의 주역이다.
[4] 탓케(That Khe) : 까오방에서 남쪽으로 60m, 하노이 수도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230km 떨어져 있는 베트남 도시
국부천대는 1949년 중국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2]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가 중국 본토를 포기하고 타이완섬으로 정부를 옮긴 역사적 사건을 의미한다.
국공내전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1]마오쩌둥의 공산당의 내전으로, 초기에는 국민당이 우세했으나 중국 공산당의 세력 확장과 전략적 승리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패배한 국민당 정부는 중국 본토에서 철수해 타이완섬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약 200만 명에 이르는 국민당 군인, 관료, 지식인들이 대만으로 건너갔다. 이를 통해 타이완은 중화민국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고,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완 타이베이시를 임시 수도로 삼아 중국 본토 수복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국부천대는 타이완의 정치·사회·경제적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제스는 타이완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력한 독재 정권을 수립하며 공산당 세력에 대한 탄압과 내부 결속을 강화했다. 이후 타이완은 냉전 체제 속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했다.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중국과 타이완의 분단 상황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은 대만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타이완이 독자적인 정치·경제적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3]양안관계의 갈등과 국제적 외교 문제의 근원이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중앙위원회 주석(임기, 1945년 6월 19일~1976년 9월 9일). 일본 패망 이후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 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2]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3] 양안관계(兩岸關係) : 중국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의 중화민국 사이의 정치·외교·군사적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국공내전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1]마오쩌둥의 공산당의 내전으로, 초기에는 국민당이 우세했으나 중국 공산당의 세력 확장과 전략적 승리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패배한 국민당 정부는 중국 본토에서 철수해 타이완섬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약 200만 명에 이르는 국민당 군인, 관료, 지식인들이 대만으로 건너갔다. 이를 통해 타이완은 중화민국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고,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완 타이베이시를 임시 수도로 삼아 중국 본토 수복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국부천대는 타이완의 정치·사회·경제적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제스는 타이완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력한 독재 정권을 수립하며 공산당 세력에 대한 탄압과 내부 결속을 강화했다. 이후 타이완은 냉전 체제 속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했다.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중국과 타이완의 분단 상황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은 대만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타이완이 독자적인 정치·경제적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3]양안관계의 갈등과 국제적 외교 문제의 근원이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중앙위원회 주석(임기, 1945년 6월 19일~1976년 9월 9일). 일본 패망 이후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 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2]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3] 양안관계(兩岸關係) : 중국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의 중화민국 사이의 정치·외교·군사적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