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운동(Great Leap Forward)
중국
사건기간 : 1958년~1962년, 조회수 : 76, 등록일 : 2024-11-30
대약진운동은 [1]마오쩌둥의 주도하에 1958년부터 1962년경까지 실시되었던 경제, 사회 개발 운동이다.
대규모 경제·사회적 운동으로, 공산주의 이상을 실현하고 농업과 공업 생산을 급속히 증대시키려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내수 시장과 자국 생산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이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농업 집단화를 통해 생산성 극대화, 철강 생산 증대를 위해 농촌에서도 소규모 제철소 설치, 공산주의 사회로 빠르게 전환하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되었으나, 잘못된 계획과 과장된 생산목표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비현실적 정책과 자원의 낭비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였다. 약 1500만~4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아사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과는 중국 경제와 사회에 막대한 혼란을 야기하며, 실패로 평가되었으며, [1]마오쩌둥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었다.
대약진운동은 1966년에 일어난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대규모 경제·사회적 운동으로, 공산주의 이상을 실현하고 농업과 공업 생산을 급속히 증대시키려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내수 시장과 자국 생산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을 이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농업 집단화를 통해 생산성 극대화, 철강 생산 증대를 위해 농촌에서도 소규모 제철소 설치, 공산주의 사회로 빠르게 전환하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되었으나, 잘못된 계획과 과장된 생산목표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하고 비현실적 정책과 자원의 낭비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였다. 약 1500만~45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아사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과는 중국 경제와 사회에 막대한 혼란을 야기하며, 실패로 평가되었으며, [1]마오쩌둥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되었다.
대약진운동은 1966년에 일어난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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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Second Indochina war)이라고도 한다.
베트남은 항미전쟁이라고 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남전으로 부른다.
이 전쟁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의 내전으로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 전쟁 양상을 띠었다.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다.
미국은 [2]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남베트남을 수호하려던 미국은 결국 북베트남의 20여년동안 끈질긴 공세와 저항에 지치게 되고 미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1973년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미군이 철수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공세에 패배하였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호찌민까지 함락되면서 기나긴 전쟁은 종결된다. 그리하여 1976년 베트남은 통일을 선언하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 : 프랑스-베트남 전쟁. 베트남 독립전쟁
[2]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 1964년 8월 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공격한 사건
베트남은 항미전쟁이라고 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남전으로 부른다.
이 전쟁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의 내전으로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 전쟁 양상을 띠었다.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다.
미국은 [2]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남베트남을 수호하려던 미국은 결국 북베트남의 20여년동안 끈질긴 공세와 저항에 지치게 되고 미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1973년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미군이 철수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공세에 패배하였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호찌민까지 함락되면서 기나긴 전쟁은 종결된다. 그리하여 1976년 베트남은 통일을 선언하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 : 프랑스-베트남 전쟁. 베트남 독립전쟁
[2]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 1964년 8월 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공격한 사건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경상북도 대구시의 8개 고교 학생들이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과 [1]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여 2월 28일에 일어난 학생의거이다. 2.28 학생민주의거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었으며, 2018년 2월 6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일요일이었던 1960년 2월 28일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야당 부통령 후보인 [2]장면 후보의 선거 연설이 계획되어 있었다. 장면 후보의 유세장에 많은 인원이 모이는 것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는 이를 방지하고자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학교 등교를 지시를 내린것이다.
경북고등학교는 3월 3일부터 예정되었던 중간고사가 앞당겨 변경되었다는 사유를 들어 학교 등교를 강요하였다. 이외에 대구 시내에 있던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개 역시 토끼사냥, 영화관람, 졸업생 송별회등과 같이 다채롭고 궁색하고 황당한 사유로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각 학교는 부당함을 지적하고 등교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2월 28일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대구시청등 대구 시내를 돌며 시위를 하였다.
각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커졌으며, 8개 학교 총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였다.
이 시위는 하루 만에 끝났지만, 이후 전국으로 번지면서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8개 고교와 등교사유는 다음과 같다
- 경북고등학고 : 중간고사
- 대구고등학교 : 토끼사냥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 임시수업
-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 졸업생 송별회
- 대구농림고등학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 대구공업고등학교
- 경북여자고등학고 : 무조건 등교
- 대구여자고등학교 : 무용발표회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일요일이었던 1960년 2월 28일은 대구 수성천변에서 야당 부통령 후보인 [2]장면 후보의 선거 연설이 계획되어 있었다. 장면 후보의 유세장에 많은 인원이 모이는 것을 우려한 이승만 정부는 이를 방지하고자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학교 등교를 지시를 내린것이다.
경북고등학교는 3월 3일부터 예정되었던 중간고사가 앞당겨 변경되었다는 사유를 들어 학교 등교를 강요하였다. 이외에 대구 시내에 있던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개 역시 토끼사냥, 영화관람, 졸업생 송별회등과 같이 다채롭고 궁색하고 황당한 사유로 일요일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각 학교는 부당함을 지적하고 등교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2월 28일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가 자유당 정권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며 대구시청등 대구 시내를 돌며 시위를 하였다.
각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커졌으며, 8개 학교 총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였다.
이 시위는 하루 만에 끝났지만, 이후 전국으로 번지면서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8개 고교와 등교사유는 다음과 같다
- 경북고등학고 : 중간고사
- 대구고등학교 : 토끼사냥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 임시수업
- 대구상업고등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 졸업생 송별회
- 대구농림고등학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 대구공업고등학교
- 경북여자고등학고 : 무조건 등교
- 대구여자고등학교 : 무용발표회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1]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어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
2월 28일 대구학생의거를 시작으로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15부정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민주화를 외치던 3.15마산의거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2]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왼쪽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보도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 후 괴한에 의해 습격을 당한 것이 알려져 반정부 정서가 점차 심화되었다.
4월 19일 수많은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와 자유당의 독재규탄을 외치며 국회의사당과 [6]경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경무대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치열한 대치 끝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시위대 100여 명이 사망했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2018년 4.19혁명 58주년을 맞아 종로구 청와대앞 분수광장 바닥에는 4.19 최초 발포현장 표지석을 설치했다.
전 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다.
이승만의 하야로 당시 외무부장관인 [3]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과도정부는 제1공화국헌법을 개정하여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7월 29일 총선거를 거쳐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4]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그 해 8월 18일 [5]장면이 총리로 지명되었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김주열(1944년~1960년) : 3·15 민주화의거중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 허정(1896년~1988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 서울특별시장, 외무부장관, 이승만 하야후 대통령 권한대행등을 역임
[4]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5]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6]경무대(景武臺) : 현재의 청와대로 2022년 5월 9일까지 사용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
2월 28일 대구학생의거를 시작으로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15부정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민주화를 외치던 3.15마산의거에 참여한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2]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왼쪽 눈에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보도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 후 괴한에 의해 습격을 당한 것이 알려져 반정부 정서가 점차 심화되었다.
4월 19일 수많은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부정선거와 자유당의 독재규탄을 외치며 국회의사당과 [6]경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경무대 앞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치열한 대치 끝에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시위대 100여 명이 사망했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2018년 4.19혁명 58주년을 맞아 종로구 청와대앞 분수광장 바닥에는 4.19 최초 발포현장 표지석을 설치했다.
전 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다.
이승만의 하야로 당시 외무부장관인 [3]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과도정부는 제1공화국헌법을 개정하여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7월 29일 총선거를 거쳐서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4]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그 해 8월 18일 [5]장면이 총리로 지명되었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김주열(1944년~1960년) : 3·15 민주화의거중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 허정(1896년~1988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 서울특별시장, 외무부장관, 이승만 하야후 대통령 권한대행등을 역임
[4]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5]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6]경무대(景武臺) : 현재의 청와대로 2022년 5월 9일까지 사용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
3.15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의 개표조작이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여당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1]이승만, 부통령 후보는 [2]이기붕이었으며, 야당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3]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4]장면이었다.
1960년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났으나 선거일 한달전인 2월 15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당선이 확정적었다.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병옥 2명이었으므로 조병옥이 사망했으니 이승만은 유일한 후보가 된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전체 유권자의 30%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당선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3·15 부정선거는 이전의 선거 부정과 달리 사전 계획에 의해 자행되었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6]최인규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던 1959년 3월부터 부정선거에 대한 기획과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준비된 부정선거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었다.
부정선거에서 사용된 가장 핵심적인 수단은 4할 사전선거였다. 이는 선거인 명부를 허위기재하거나 유령유권자를 만들고 나아가 유권자를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투표용지를 미리 빼돌리는 것이었다. 그 밖에 3인조 9인조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이 사전에 준비, 계획되었다.
3월 15일 마침내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종료되었다.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95%∼99%까지 나온 지역이 속출하였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역에서 감표로 조정하여 최종집계는 이승만 88% 득표, 이기붕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나 당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와 개표상의 부정행위에 대한 전국민의 저항은 3월 15일 저녁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강경대응으로 마산시민이 사망 및 부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는 더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마산에서 시작된 3.15마산의거는 전국적인 규모의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내각책임제 헌법이 공포되어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공포된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5]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 18일 장면은 총리로 지명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기록원 - 나라기록포털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이기붕(1896년~1960년) : 대한민국 제3대 국방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
[3] 조병옥(1894년~1960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
[4]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6] 최인규(1919년~1961년) : 대한민국 제18대 내무부 장관(1959년 3월 20일~1960년 3월 23일), 제7대 교통부 장관(1958년 9월 9일~1959년 3월 20일).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으로 1961년 12월 21일 교수형당한다
당시 여당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는 [1]이승만, 부통령 후보는 [2]이기붕이었으며, 야당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3]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4]장면이었다.
1960년 1월 29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신병이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떠났으나 선거일 한달전인 2월 15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의 사망으로 이승만은 당선이 확정적었다.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과 조병옥 2명이었으므로 조병옥이 사망했으니 이승만은 유일한 후보가 된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전체 유권자의 30% 이상의 지지를 받으면 당선되도록 되어 있었다.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3·15 부정선거는 이전의 선거 부정과 달리 사전 계획에 의해 자행되었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6]최인규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던 1959년 3월부터 부정선거에 대한 기획과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준비된 부정선거의 기획은 광범위하고 구체적이었다.
부정선거에서 사용된 가장 핵심적인 수단은 4할 사전선거였다. 이는 선거인 명부를 허위기재하거나 유령유권자를 만들고 나아가 유권자를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투표용지를 미리 빼돌리는 것이었다. 그 밖에 3인조 9인조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이 사전에 준비, 계획되었다.
3월 15일 마침내 제4대 대통령 선거가 종료되었다. 개표 결과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가 95%∼99%까지 나온 지역이 속출하였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에게 득표수를 하향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역에서 감표로 조정하여 최종집계는 이승만 88% 득표, 이기붕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나 당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표와 개표상의 부정행위에 대한 전국민의 저항은 3월 15일 저녁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강경대응으로 마산시민이 사망 및 부상자가 발생하자 시위는 더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마산에서 시작된 3.15마산의거는 전국적인 규모의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내각책임제 헌법이 공포되어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공포된 새로운 헌법하에 1960년 8월 12일 국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제4대 대통령으로 [5]윤보선이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 18일 장면은 총리로 지명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기록원 - 나라기록포털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이승만(1875년~1965년)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
[2] 이기붕(1896년~1960년) : 대한민국 제3대 국방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
[3] 조병옥(1894년~1960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
[4] 장면(1899년~1966년) :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6] 최인규(1919년~1961년) : 대한민국 제18대 내무부 장관(1959년 3월 20일~1960년 3월 23일), 제7대 교통부 장관(1958년 9월 9일~1959년 3월 20일).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으로 1961년 12월 21일 교수형당한다
4.19혁명 이후 정치.사회의 혼란을 틈타 군내의 [1]정군운동으로 정치지향적 군인이 조직화되어 세력을 넓혀나갔다.
1961년 5월 16일에 [2]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군사정변(쿠데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회를 해산하였다.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라 개명하고 5월 20일 혁명내각을 발표함으로써 군인들이 통치하는 군사정권을 수립하였다.
[4]장면총리는 혜화동의 갈멜수녀원으로 몸을 피신하였다. 이후 내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5]윤보선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이며 국가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을 지닌 합법 정부를 수호하지 않았다. 접견실에서 박정희, [3]장도영등 쿠데타 세력들을 만난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그해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1] 정군운동 : 1960년 4.19혁명 직후 군내부에서 부정부패 및 과거사 청을 빌미로 상급 장교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운동
[2] 박정희(1917년~1979년) :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3] 장도영(1923년~2012년) : 장면내각의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 5.16군사정변 직후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4]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1961년 5월 16일에 [2]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군사정변(쿠데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회를 해산하였다.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라 개명하고 5월 20일 혁명내각을 발표함으로써 군인들이 통치하는 군사정권을 수립하였다.
[4]장면총리는 혜화동의 갈멜수녀원으로 몸을 피신하였다. 이후 내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군사혁명위원회에 정부를 이양하였다.
[5]윤보선 대통령은 국군 통수권자이며 국가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정통성을 지닌 합법 정부를 수호하지 않았다. 접견실에서 박정희, [3]장도영등 쿠데타 세력들을 만난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그해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1] 정군운동 : 1960년 4.19혁명 직후 군내부에서 부정부패 및 과거사 청을 빌미로 상급 장교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운동
[2] 박정희(1917년~1979년) :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3] 장도영(1923년~2012년) : 장면내각의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 5.16군사정변 직후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4] 장면(1899년~1966년) : 대한민국 7대 국무총리(1960년 8월 19일~1961년5월18일), 제4대 부통령(1956년 8월15일~1960년 4월25일) 등을 역임
[5] 윤보선(1897년~1990년) :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1960년 8월 13일~1962년 3월 24일). 5.16군사정변으로 대통령직을 유지하다가 1962년 3월 22일에 하야하였다
영국은 1914년에 [1]맥마흔 라인이 선포하여 티베트와 영국령 인도제국 사이의 국경선을 선언하였다. 이 [1]맥마흔 라인으로 인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에도 중국과 인도는 국경분쟁으로 블편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1959년에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인의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대규모로 진압을 하였다. 티베트의 지도자 [2]달라이 라마(14대)는 중국의 종교탄압과 티베트 문화말살 정책에 반발하여 인도로 피신해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중국과 인도간 무력 충돌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중국의 신장성(신장 위구르 자치구)과 티베트에서 분리주의자들에 의한 반중 무장 투쟁이 격화되었다. [3]마오쩌둥은 만약 소련, 인도가 개입할 경우 가장 먼저 티베트와 신장성이 무너질 것이고 결국에는 중공 정권 전체가 붕괴될수도 있다고 여겼다. 히말라야는 티베트는 물론, 중국의 서부를 지키기 위한 천연의 만리장성이었다. 중국으로서는 결코 물러날 수 없었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자 인도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1]맥마흔 라인에 군을 전진배치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철저히 전쟁준비를 위한 전투 태세도 만만치 않았다. 인도는 정말 중국이 전쟁을 감행할 지 예측하지 못하였다.
10월 6일 중국의 [3]마오쩌둥은 인도와 동부 국경과 서부 국경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10월 18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전쟁 개전을 최종 결정했다.
10월 20일에 1,000km에 이르는 국경의 전 방면으로 중국의 주력군이 침공을 개시하면서 바야흐로 1개월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8만~9만명의 병력을 동원, 규모면에서도 국경수비대의 소규모 교전을 벗어난 정규군간의 정면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미처 전쟁을 예측하지 못한 인도군은 연전 연패하여 결국 후퇴한다.
미국과 소련은 중국의 영향력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도 양국의 충돌 격화에 우려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중국은 전쟁에서 완승했음에도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군대를 모두 철수한다. 또한 승자로서 패자에게 거액의 배상금과 같은 굴욕적인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그냥 아무 일도 없는 양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이것으로 중국-인도 양국간의 전쟁은 일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와 중국의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쌍방 모두 서로의 국경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지도, 더 이상 무력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양국 정부는 서로의 군대가 주둔한 지역을 소위 '실제 통제선'이라 하여 묵인키로 하였고 중간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중국과 인도가 국경 문제를 놓고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은 크게 세개로 나뉜다. 첫번째는 서부의 악사이친(Aksai Chin, 중국점유)지방이며 인도 카슈미르 지방과 신장성, 티베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두번째는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시킴(Sikkim, 인도점유)지방이다. 세번째는 동부 국경의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인도점유)지방이다. 양국의 분쟁지역을 모두 합하면 남한면적보다도 크다.
[1] 맥마흔 라인(McMahon Line) : 청나라가 1912년 신해혁명으로 망하고 티베트가 사실상 독립국이 되고 난 이후인 1914년 인도 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과 중화민국, 티베트가 삼자 협정으로 맺은 국경선이다. 당시 티베트와 영국은 이 조약을 승인했으나 중화민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맥마흔은 이 조약을 주도한 영국의 외교관 헨리 맥마흔의 이름이다.
[2] 달라이 라마 : 1391년부터 티베트 불교 겔룩파(티베트 불교종파 중 하나)의 최고 수장을 가리키는 세습명이면서 정치적인 의미에서 티베트의 국가원수이자 실징 통치자. 달마이란 몽골어로 큰바다라는 의미이며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의미한다.
[3] 마오저뚱(1893년~1976년) : 한자음으로 모택동. 중국 공산주의 정치가. 제1대 국가주석(1949년~1959년). 1945년에서 1976년까지 초대 중국 공산당 제1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1959년에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인의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대규모로 진압을 하였다. 티베트의 지도자 [2]달라이 라마(14대)는 중국의 종교탄압과 티베트 문화말살 정책에 반발하여 인도로 피신해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중국과 인도간 무력 충돌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중국의 신장성(신장 위구르 자치구)과 티베트에서 분리주의자들에 의한 반중 무장 투쟁이 격화되었다. [3]마오쩌둥은 만약 소련, 인도가 개입할 경우 가장 먼저 티베트와 신장성이 무너질 것이고 결국에는 중공 정권 전체가 붕괴될수도 있다고 여겼다. 히말라야는 티베트는 물론, 중국의 서부를 지키기 위한 천연의 만리장성이었다. 중국으로서는 결코 물러날 수 없었다.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자 인도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1]맥마흔 라인에 군을 전진배치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철저히 전쟁준비를 위한 전투 태세도 만만치 않았다. 인도는 정말 중국이 전쟁을 감행할 지 예측하지 못하였다.
10월 6일 중국의 [3]마오쩌둥은 인도와 동부 국경과 서부 국경에서 동시에 공격을 감행하기로 하고 10월 18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전쟁 개전을 최종 결정했다.
10월 20일에 1,000km에 이르는 국경의 전 방면으로 중국의 주력군이 침공을 개시하면서 바야흐로 1개월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중국이 8만~9만명의 병력을 동원, 규모면에서도 국경수비대의 소규모 교전을 벗어난 정규군간의 정면 충돌로 비화된 것이다. 미처 전쟁을 예측하지 못한 인도군은 연전 연패하여 결국 후퇴한다.
미국과 소련은 중국의 영향력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도 양국의 충돌 격화에 우려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중국은 전쟁에서 완승했음에도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군대를 모두 철수한다. 또한 승자로서 패자에게 거액의 배상금과 같은 굴욕적인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그냥 아무 일도 없는 양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이것으로 중국-인도 양국간의 전쟁은 일단락을 짓는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와 중국의 국경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쌍방 모두 서로의 국경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지도, 더 이상 무력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양국 정부는 서로의 군대가 주둔한 지역을 소위 '실제 통제선'이라 하여 묵인키로 하였고 중간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중국과 인도가 국경 문제를 놓고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은 크게 세개로 나뉜다. 첫번째는 서부의 악사이친(Aksai Chin, 중국점유)지방이며 인도 카슈미르 지방과 신장성, 티베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두번째는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는 시킴(Sikkim, 인도점유)지방이다. 세번째는 동부 국경의 아루나찰 프라데시(Arunachal Pradesh, 인도점유)지방이다. 양국의 분쟁지역을 모두 합하면 남한면적보다도 크다.
[1] 맥마흔 라인(McMahon Line) : 청나라가 1912년 신해혁명으로 망하고 티베트가 사실상 독립국이 되고 난 이후인 1914년 인도 제국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과 중화민국, 티베트가 삼자 협정으로 맺은 국경선이다. 당시 티베트와 영국은 이 조약을 승인했으나 중화민국은 승인하지 않았다. 맥마흔은 이 조약을 주도한 영국의 외교관 헨리 맥마흔의 이름이다.
[2] 달라이 라마 : 1391년부터 티베트 불교 겔룩파(티베트 불교종파 중 하나)의 최고 수장을 가리키는 세습명이면서 정치적인 의미에서 티베트의 국가원수이자 실징 통치자. 달마이란 몽골어로 큰바다라는 의미이며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의미한다.
[3] 마오저뚱(1893년~1976년) : 한자음으로 모택동. 중국 공산주의 정치가. 제1대 국가주석(1949년~1959년). 1945년에서 1976년까지 초대 중국 공산당 제1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권력을 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