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미국캄보디아사건기간 : 1967년 3월 11일 ~1975년 4월 17일, 조회수 : 234, 등록일 : 2024-05-11
1949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독립한 캄보디아는 국왕 [4]노로돔 시아누크에 의해 독재체제로 통치되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경제가 침체되면서 이를 반대하는 파벌간 분쟁으로 불안정 요소를 안고 있었다. 1965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4]시아누크 정부는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의 지원을 거부하고 중국을 지지했다. 베트남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영내의 [7]호치민 루트를 활용했고, 이에 미국은 캄보디아의 친미정권이 필요했다.
1970년 3월 18일 [4]시아누크 국왕이 소련과 중국의 방문을 틈타 캄보디아내 의회가 소집되어 시아누크의 하야를 만장일치로 가결하면서 축출했다. 대표적인 주동자 [5]론 놀은 수상이 되어, 10월에 [1]크메르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시아누크 국왕은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으며 라디오를 통해 [5]론 놀의 친미정권에 저항을 호소하였다. 시아누크를 도와 캄보디아로 귀국을 도운 것은 [6]폴 포트등이 지휘하는 [2]크메르 루주였디. 폴 포트는 시아누크를 옹립하여 [5]론 놀 정권과 내전이 발발했다.
1972년 1월, 미국은 [5]론 놀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일부를 캄보디아에 파견하였다. [7]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기 위하여 캄보디아 국경 곳곳에 공습이 이뤄지면서 수 십만명의 농민이 희생되었다. 국경에 살던 원주민들은 분노하여 [2]크메르 루주에 가담하면서 크메르 루즈 세력은 점점 커져갔다. 게다가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의 지지까지 크게 얻었다.
지속된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의 상황은 더욱 나빠지면서 대부분의 캄보디아 영토는 [2]크메르 루주, [8]베트콩에게 점령당했다. 미국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쳐가면서 자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73년에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를 했다. 베트남 전쟁은 1975년 [9]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종결되었다.
1975년 4월 1일 수도 프놈펜으로 크메르 루주가 진격하자 [5]론 놀은 인도네시아를 경유하여 미국의 하와이로 망명했다. 결국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주의 [6]폴 포트가 론 놀정부를 무너뜨리고, 1976년 [3]민주 캄푸치아가 건국되었다. 이후 [3]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크메르 루주는 전국민을 집단농장으로 강제이주시키고 [10]킬링필드라는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다.
[1] 크메르공화국(Khmer Republic) : 캄보디아 의회에서 캄보디아 왕국의 국왕인 노로돔 시아누크를 폐위시키고 1970년 10월 1일 캄보디아에 세워진 공화국으로 1975년 4월 17일까지 존재하였다. 론 놀이 초대 총리를 맡았다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51년에 조직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조직 [3]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크메르 루주가 주축이 되어 캄보디아 내전에서 승리하여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에 민주 캄푸치아라명명하고 지배하였다. 킬링필드로 알려진 대학살 정책을 저질렀다.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으로 붕괴되었다. [4]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5]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호찌민 루트(Ho Chi Minh trail) :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이 간첩과 군수 물자를 남베트남으로 보내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연결한 통로 [8] 베트콩(Viet Cong) : 일명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남 공화국과 미국을 상대로 싸운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을 펼쳐 북베트남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9] 사이공(Sài Gòn) : 현재의 호찌민시.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10] 킬링필드(Killing Fields) :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폴 포트가 이끄는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크메르 루주가 자행한 대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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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Second Indochina war)이라고도 한다. 베트남은 항미전쟁이라고 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남전으로 부른다.
이 전쟁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의 내전으로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 전쟁 양상을 띠었다.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다.
미국은 [2]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남베트남을 수호하려던 미국은 결국 북베트남의 20여년동안 끈질긴 공세와 저항에 지치게 되고 미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1973년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미군이 철수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공세에 패배하였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호찌민까지 함락되면서 기나긴 전쟁은 종결된다. 그리하여 1976년 베트남은 통일을 선언하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 : 프랑스-베트남 전쟁. 베트남 독립전쟁 [2]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 1964년 8월 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공격한 사건
1954년 제네바 협정이후,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경계로 일단 양분되었고, 17도 이북에는 [4]호치민이 이끄는 공산국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이 수립되고, 17도 이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5]응오 딘 지엠 정권의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수립되었다.
미국은 세계적 냉전이 심화되던 시대에 '공산주의 봉쇄'라는 전략과 기치를 내걸고 인도차이나 분쟁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964년 8월 2일에 발생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본격화했다. 미국 [1]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1964년 8월 5일 북베트남 폭격을 지시했으며, 이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Pierce Arrow)작전의 시작으로 미국의 베트남전 전면전의 포문을 열었다.
미국은 풍부한 군대와 첨단 무기를 가지고도 [3]베트콩의 예측이 불가능한 게릴라 전술, 불규칙한 전투행동, 베트남의 자연환경등으로 고전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미국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해지면서 1968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사이의 휴전협상을 시작하였다
1969년 6월, [2]리차드 닉슨은 베트남으로부터의 단계적인 미군 철수를 발표했고, 1973년 1월 27일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미국이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하였다.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의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으며 그해 3월 마지막 남은 미국의 전투부대가 남베트남에서 철수하였다.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패권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베트남에 개입하는 길을 선택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패퇴하였고 초강대국 미국의 위신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미국으로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년간 5만 명의 인명피해와 1,200억 달러가 소요된 대규모 전쟁이었으나 패배한 전쟁으로써 역사에 남게 되었다.
[1] 린든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1973년) : 미국 제36대 대통령(임기,1963년 11월 22일~1969년 1월 20일) [2]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1913년~1994년) :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임기, 1969년 1월 20일~1974년 8월 9일) [3] 베트콩(Viet Cong) :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칭하는 용어 [4] 호찌민(Ho Chi Minh, 1890년~1969년) : 초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주석(임기, 1951년 2월 19일 - 1969년 9월 2일).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불린다. [5] 응오 딘 지엠(NNgo Dinh Diem, 1901년~1963년) : 남베트남의 제1대 총통(임기, 1955년 10월 26일~1963년 11월 2일)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또는 월남전 참전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쳐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전투부대를 파병하였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당시 남베트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1차 파병
- 1964년 9월 11일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 22일 베트남의 수도 [1] 사이공에 상륙하였다.
-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10명을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요원 등 140명을 파병하였다.
2차 파병
-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3월 16일 당시 베트남의 수도 [1] 이공에 도착하였으며, 사이공 동북방 22㎞ 지점의 디안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 및 자체 방어를 위한 경비대대, 수송, 공병임무 수행하였다.
- 강원도 현리에 있는 국군 제6사단 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부대'로 명명하여 파병하였다.
3차 파병
- 1965년 10월 9일 제2해병여단(청룡부대)은 남베트남 [2] 캄란에 상륙하였고 11월 1일 수도사단(맹호부대)가 [3] 퀴논에 상륙을 하였다
4차 파병
- 1966년 4월 19일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제26연대가 꾸이년에 상륙을 하고, 이어서 10월 8일 제9사단(백마부대)가 [4] 닌호아에 상륙하였다
196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 내에서는 언론매체의 영향으로 반전 여론이 고조되어 1969년 1월 닉슥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철군을 발표하고 1969년 7월부터 일부 병력을 철수시켰다.
대한민국 정부도 제1단계로 1971년 12월 4일 제2해병 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972년 4월 1일까지 9천명의 병력을 철수 시켰다.
제2단계 철수는 1973년 1월 8일, 파리에서 체결된 휴전 협정의 규정 사항인 "모든 외국 군대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다."는 조항에 따라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1973년 1월 30일 125명의 선발대가 항공편으로 철수하였으며, 3월 14일까지 본대가 철수하고, 3월 23일 후발대 118명이 항공편으로 철수함으로써, 남베트남에 주둔하였던 모든 부대가 철수를 완료하였다.
한국군은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여 경제 발전에 필요한 외화수입이라는 많은 경제적 이익과 한국전쟁 이후의 값진 실전 경험을 얻었으나 파병자 중 5,000명의 사망자와 2만여 명의 참전용사가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1] 사이공(Saigon) : 베트남 최대도시로 경제 중심지. 남베트남(1954년~1976년) 수도였으며 1975년에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2] 캄란(Cam Ranh) : 베트남의 남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3] 퀴논(Quy Nhon) :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반도모양) 베트남 중부의 해안도시. 다낭과 나트랑의 중간지점에 위치. 베트남전쟁 당시 맹호부대의 주둔지
[4] 닌호아(Ninh Hòa) : 베트남의 해안마을. 베트남 전쟁당시 백마부대 사령부
중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사회·정치적 운동으로, [1]마오쩌둥이 주도하여 공산주의 이념을 강화하고 반혁명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1]마오쩌둥은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 혁명 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가치와 권력 구조를 타파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주로 청년들로 구성된 [2]홍위병은 전통 문화와 지식인을 공격하며 운동의 중심에 섰다. 전통 문화의 파괴, 고위 관료 숙청, 지식인의 박해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혼란이 발생했으며 정치적 숙청과 내부 권력 투쟁이 격화되며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기도 했다.
경제와 교육 시스템의 붕괴,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 문화유산의 대규모 파괴 등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문화대혁명은 [1]마오쩌둥의 사망과 [3]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인해 종결되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정치적·사회적 구조에 심각한 혼란과 상처를 남겼으며, 현대 중국 역사에서 실패한 정치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건은 중국 내 전통 문화와 지식층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렸고, 이후 중국 정부는 실용주의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이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2] 홍위병(紅衛兵, Red Guards) : 중국 문화대혁명 초기, 마오쩌둥의 지지를 받아 결성된 젊은 학생(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중심의 혁명 집단. 이들은 마오쩌둥 사상을 충실히 따르며,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하거나 "반혁명적"으로 간주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홍위병의 폭력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자, 1968년 마오쩌둥은 군대를 동원해 이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해산을 명령했다 [3]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 Deng Xiaoping,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지도자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두어 그 결과로 요르단의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지구, 이집트의 가자지구(Gaza Strip)와 시나이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획득하였다.
* 골란고원(Golan Heights) :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이며 국제법상 시리아의 영토이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후 이 지역 3분의 2를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국제사회 대부분 국가는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골란고원은 군사적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물 공급의 15%를 차지한다. *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1967년의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1994년까지 이스라엘군의 통치 아래 있었으나 1994년부터 통치권이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에 이양되었다. *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 : 1979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을 조인한 이후에 이집트에 반환하였다. 반환은 1982년 4월에 타바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 반환되었고 1989년에는 타바도 반환되었다. * 요르단강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예루살렘(Jerusalem),베들레헴(Bethlehem),예리코(Jericho)등이 있다.
1·21 사태는 1968년 1월 21일에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무장 군인 31명이 대한민국 서울에 침투,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 이후에 대한민국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은 북파공작원 특수부대 684 부대(실미도부대등..)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제3공화국 시기 여당인 민주공화당과 정부 기관이 대통령 3선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한 야당과 학생 등이 1969년 6월부터 12월까지 지속한 개헌 저지·규탄 활동을 말한다.
정권 연장을 위하여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게 하는 6번째 대한민국 헌법개정안은 9월 14일 국회에서 변칙통과하여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확정되었고, 박정희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유신체제와 장기집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제3공화국 : 1963년 12월 17일부터 1972년 12월 26일까지 존속하였던 대통령 중심제 정부로 대통령은 제5대, 제6대, 제7대 대통령 박정희였다.
와우아파트 준공 4개월 만인 1970년 4월 8일 오전 8시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산 1번지에 위치한 와우지구 시민아파트의 한 개동(제15동,5층)이 부실공사로 무너진 사건이다. 그 결과로 사망 33명, 중상19명, 경상 21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하루 8시간 노동과 초과근무수당을 국가가 법으로 규정한 근로기준법이 최초로 제정된 해는 1953년이었다. 그로부터 17년이나 지났지만 1970년대 한국 사회는 경제 개발이란 미명 하에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정당한 대가마저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부인했다.
전태일은 서울시 종로구 평화시장 피복 공장의 재단사등으로 일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를 체험하였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에 관하여 노동청에 진정도하고 호소를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22살의 전태일은 이에 항거하여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쓰러진 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평화시장에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으며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7·4 남북 공동 성명은 1972년 7월 4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원칙을 발표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러나 1973년에 들어와 남북대화는 동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접촉이 지연되고 더 이상 대화진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3년 9월 11일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민주 선거로 집권한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정권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쿠데타로 무너졌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3년 만이었다.
아옌데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 세력에 대항하여 긑까지 투쟁하다 결국은 자결을 하였다.
아옌데가 사회주의적 개혁 정책을 펼치자 이를 반대하는 외부세력들은 칠레에 경제 제재를 가했으며 칠레내의 아옌데 반대파를 적극 지원하였다.
미국 정보기관이 비밀해제된 문서에서 미국정보가 칠레쿠데타 공작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발표되어 많은 충격을 주었다.
*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1915년~2006년) : 칠레의 제33,34,35대 대통령. 임기 1974년~1990년
*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년~1973년) : 칠레의 제29대 대통령. 임기 1970년~1973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에서 6일만에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이집의 시나이 반도와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획득하였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에게 이스라엘의 인정과 영구적인 평화 협정 체결과 이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를 조건으로 두 지역을 반환하는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 지역을 자국 영토로 합병하는 절차에 착수했고 이에 반발한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의 반환과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수에즈 운하 일대에서 지속적인 소모전을 벌였다.
1970년 이집트는 나세르의 뒤어 이어 대통령이 된 [2]사다트는 [4]골란고원 문제로 이스라엘에 원한관계에 있던 시리아와 손을 잡고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에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전쟁이 일어난 당일이 [1]'욤 키푸르'날이었기 때문에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한다. 이집트는 [5]시나이 반도로 시리아는 [4]골란고원을 향해 기습 공격했다.
이스라엘은 기습적인 대규모 공격으로 초반에 매우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전투가 시작된지 3일후 이집트군의 공세를 저지시키면서 교착 상태에 이르고, 골란고원으로 진격한 시시라군도 경계선까지 몰아내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전쟁기간동안 상호 동맹국에 대량으로 물자를 보급했고, 이로 인해 미국과 소련의 대결 수준이 되면서 긴장이 높아지게 되었다. 확전을 우려한 유엔은 10월 22일 중재를 제안했고, 결국 10월 25일 휴전되어 전쟁은 종결되었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반격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 초반 이집트군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도 상당했다. 이집트 역시 지난 전쟁에 비하여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또 패배했다. 이를 확인한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정책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했다. 결국 1974년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면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었다.
그 후 몇 년에 걸친 협상끝에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한 후 [5]시나이 반도는 1982년 완전히 이집트에 반환되었다.
반면 시리아는 아직도 [4]골란고원을 찾지 못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골란고원은 지형적인 형태에 따른 전략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1] 욤 키푸르(Yom Kippur) : 유대교의 속죄일이자 명절. 유대인들은 이날 금식을 하며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 히브리어로 '날(day)'을 뜻하는 '욤(yom)'과 '속죄(atonement)'를 뜻하는 '키푸르(kippur)'가 합쳐진 말 [2]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년~1981년) : 이집트의 3대 대통령, 임기 : 1970년 10월 15일~1981년 10월 6일 [3] 골다 메이어(Golda Meir, 1898년~1978년) : 이스라엘을 건국한 정치인 중 한명. 4대 이스라엘 총리이자 첫 여성 초리(임기 : 1969~1974). 원조 '철의여인' [4] 골란고원(Golan Heights) :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이며 국제법상 시리아의 영토이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이후 이 지역 3분의 2를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국제사회 대부분 국가는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점령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골란고원은 군사적 요충지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물 공급의 15%를 차지한다. [5]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 : 1979년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ccords)을 조인한 이후에 이집트에 반환하였다. 반환은 1982년 4월에 타바(Taba)를 제외한 다른 지역이 반환되었고 1989년에는 타바(Taba)도 반환되었다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에서는 40여 년간 지속된 독재 정권을 종식시키는 무혈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카네이션 혁명이라고 불리며, 혁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거리의 혁명군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지지 의사를 표시한데서 비롯되었다. 4·25 혁명으로도 불린다
1932년부터 집권한 총리 [1]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경찰국가적인 요소를 강화한 권위주의 정권이었다. 특히 196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 식민지들이 대부분 독립한 것과 달리 식민지 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 아프리카 식민지들과의 독립 전쟁은 국가 재정을 압박했고 징병으로 인한 사회적 반감도 심해졌다. 이로인해 경제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낙후되기 시작했다.
1968년 8월, [1]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휴식중에 머리를 다쳐 의식불능 상태가 되었다. 후임초리로 [2]마르셀루 카에타누로가 선출되었지만 독재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군 장교들이 모여 군 내부 개혁과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3]군사운동(MFA)을 결성하게 되었다. 1974년 4월 25일 새벽에 당시 금지곡인 "그란돌라여, 거무스름한 마을이여(Grândola, Vila Morena)"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며 혁명의 시작을 알렸고, MFA는 리스본의 주요 시설인 정부청사, 방송국등을 점령하며 정권을 무혈로 전복시켰다.
[2]마르셀루 카에타누 총리는 저항없이 항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군의 행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총구에 꽂은 붉은 카네이션이 혁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혁명 이후 독재 정권은 해체되었고, 언론의 자유와 정당 활동이 허용되었으며, 정치범이 석방되고 새로운 민주 헌법이 제정되는 등 포르투갈은 본격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이행하였다. 식민지 전쟁도 중단되며 대부분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1975년까지 독립을 이루었다.
1976년 헌법 제정과 총선 실시를 통해 포르투갈은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고 MFA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카네이션 혁명은 유럽 역사상 가장 평화롭게 독재를 종식시킨 사례로 평가받으며 시민과 군이 협력한 성공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남아있다.
[1]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포르투갈어: António de Oliveira Salazar, 1889년 4월 28일 ~ 1970년 7월 27일): 포르투갈 공화국 제100대 총리(재임, 1932년 7월 5일 ~ 1968년 9월 25일) [2] 마르셀루 카에타누로(Marcelo José das Neves Alves Caetano, 1906년 8월 17일 ~ 1980년 10월 26일) : 포르투갈의 제101대 총리(재위, 1968년 9월 25일~1974년 4월 25일) [3] 군사운동(MFA, Movimento das Forças Armadas) : 포르투갈의 젊은 중·소령급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것으로 독재 정권이 강제했던 식민지 전쟁에 대한 반대와 군 내부의 불평등한 승진 제도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 도중에 발생하였다. 이날 [2]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하던 중에 재일 한국인 [3]문세광이 권총을 발사하면서 사건이 발생했다. 문세광은 박정희 대통령을 겨냥하여 발사했지만 총탄이 빗나가 자신의 허벅지를 쏘았으나, 곧 연단으로 향해 달려나가며 연이어 발사하였다. 그러나 발사된 총탄은 박정희가 아닌 단상 옆에 앉아 있던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를 향했다. 총을 맞은 육영수 여사는 즉시 서울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후 7시경 사망했다.
당시 광복절 행사에 경축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합창 단원으로 참석하였던 [4]장봉화 학생이 대통령 경호원의 오발탄에 맞아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도 발생하였다.
문세광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과거 친북 성향의 단체와 접촉한 이력이 있었다. 그는 체포된 후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으며 북한의 연계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 정부는 북한의 개입 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하며 이를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에 이용하였다. 군사재판을 통해 문세광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사건 발생 두 달 후에 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유신 정권은 더욱 강경한 정치 체제를 구축하는 계기로 삼았다. 박정희 정권은 반정부 활동을 더욱 엄격하게 탄압했고 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또한 정부는 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에게 반공 교육을 강화하며 사회적 분위기를 더욱 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육영수 여사의 죽음은 많은 국민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고 그녀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생전 서민들과의 친밀한 소통으로 인기가 높았던 그녀의 사망은 국민적 애도로 이어졌으며, 이후 그녀를 기리는 기념사업도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둘러싸고 몇 가지 의문점도 제기되었다. 가장 큰 논란은 문세광이 단독 범행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은 북한과 연관성이 명확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 행사에서 문세광이 어떻게 총기를 반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경호 문제도 논란이 되었다.
육영수 저격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박정희 정권이 더욱 강경한 유신 체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사건의 배경과 북한과의 연관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해석이 분분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1] 육영수(1925년 11월 29일~1974년 8월 15일) : 대통령 박정희의 두 번째 배우자, 영부인 [2] 박정희(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 :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 재위기간,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3] 문세광(1951년 12월 26일~1974년 12월 20일) : 대톨령 박정희를 저격하려다 영부인 육영수를 사살한 재일 한국인.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 [4] 장봉화(당시 16세) :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2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