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브라질아르헨티나사건기간 : 1825년 12월 10일~1828년 8월 27일, 조회수 : 340, 등록일 : 2023-07-31
오늘날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우루과이 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이루고 있다. 우루과이 강 서쪽은 아르헨티나, 동쪽은 우루과이가 위치하고 있다.
스페인 점령시대 당시 우루과이강 동쪽에 위치한 오리엔탈 주(오늘날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에 속해 있었는데, 1811년에 [1]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는 오리엔탈 주의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아르헨티나와 연합하여 스페인을 물리친 후에 아르헨티나에서 독립을 위하여 싸웠다. 당시 아르헨티나에 속한 주였으며 중앙집권을 꾀하는 아르헨티나 정부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1816년 8월 포르투갈과 브라질 제국 연합이 오리엔탈 주를 침략하였다. 포르투갈 연합군은 1817년 1월 몬테비데오(Montevideo)를 점령했으며 3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오리엔탈 주를 점령한 브라질 제국은 '시스플라티나 주'로 합병시켰다. 몬테비데오(Montevideo)는 아르헨티나를 지배하던 스페인이 브라질을 지배하던 포르투갈에 대항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요새에서 출발한 도시이며 오늘날 우루과이의 수도이다.
1822년 9월 7일 브라질 제국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자 [2]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이끄는 동방의 33인을 중심으로 아르헨티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825년 8월 25일 브라질 제국으로 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로 인하여 브라질 제국과 아르헨티나가 충돌해 500여일간의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일어났다.
어느 한쪽의 세력이 훨씬 더 커지는 것을 염려한 영국과 프랑스가 중재에 나섰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계속되는 전쟁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고,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1828년 몬테비데오 조약'을 맺으면서 신생 독립국으로 '우루과이 공화국'이 탄생되었다.
신생 독립국 우루과이는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싸워준 아르헨티나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국의 국기에 아르헨티나의 국기에 있는 5월의 태양을 모양만 변형해서 사용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이후로 영원한 우방국이다. 이에 반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앙숙관계가 되었다.
[1]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JJosé Gervasio Artigas, 1764년~1850년) : 우루과이 독립의 아버지 [2]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Juan Antonio Lavalleja, 1784년~1853년) : 우루과이의 정치인이자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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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미국 백인 정착민과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사이의 정복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말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그리스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민족적·종교적·문화적으로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데 대한 그리스인의 반감과 오스만 제국 투르크의 가중되는 여러 가지 압력이 독립에의 의지를 강하게 했다.
1821년 3월 6일 [1]필리케 헤타이리아의 지도자인 [2]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3]몰다비아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1821년 6월 19일 도나우 강 북편의 드러거샤니 전투(Battle of Dragashani)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패했다. 그는 체포되었고 감금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봉기에 호응하여 [4]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 그리스, 마케도니아 등의 그리스 각 지역에서 연달아 봉기가 일어나면서 그리스 독립전쟁은 오히려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821년 3월 25일 [4]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본격적인 봉기가 시작되었다. 10월 5일 [5]데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주도인 [6]트리폴리를 함락시켰다. 이 때문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봉기가 처음 일어난 3월 23일이 오늘날 그리스의 독립기념일로 지정되었다.
그리스 중부에서 오스만군은 알라마나 전투(Battle of Alamana, 1821년 4월 22일)에서 그리스군을 패배시켰다. 그리고 페로폰네소스 반도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라이바 인 전투(Battle of Gravia Inn, 1821년 5월 8일)에서 일격을 당하면서 오스만군은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하였다. 이 전투는 그리스 독립의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821년의 8월 25일, 바실리카 전투(Battle of Vasilika)의 승리는 중부 그리스의 오스만 군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진입하는 것을 막았다.
1822년 1월 1일 공화제를 근간으로 하는 그리스 헌법을 채택하고 1월 13일 그리스 제1공화국이 출범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1822년부터 1824년까지 3차례에 걸쳐 공격을 하였지만 육지와 바다에서 그리스를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 총독인 [7]무함마드 알리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사이 그리스 제1공화국은 내분에 휩싸였다. 중앙 그리스와 지역 정부간의 내전상태에 빠졌다. 1차, 2차 내전이 일어나는 등 그리스는 사분오열하고 있었다.
오스만의 도움을 수락한 [7]무함마드 알리는 아들 [8]이브라힘 파샤에게 원정대를 맡겨 그리스에 파병하였다. [8]이브라힘 파샤이집트 함대는 1825년 2월 24일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하여 서부 지역을 장악하여 그리스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빈 체제의 원칙에 따라 그리스 독립전쟁을 불간섭의 원칙을 내세우며 관망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나 그리스가 불리하게 진행되자 그리스를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리스 독립전쟁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인 대립이기도 하였다. 동방정교회의 그리스인과 이슬람교 무슬림 사이의 학살이 서로 자행되었다. 특히 당시에는 고대 그리스 문화를 동경하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유행했다.
전황은 계속하여 오스만-이집트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어 오스만군은 1826년 4월 중앙 그리스의 [9]미솔링기가 함락시켰고 1826년 8월에 아테네 중심가를, 1827년 6월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까지 점령했다.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3개국은 1827년 7월 6일 [10]런던조약을 체결하고 오스만 제국에게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도록 하는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이를 거부하고 결국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서쪽의 나바리노 만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유럽연합함대와 오스만-이집트 연합함대 사이에 해전이 벌어졌다. 일명 나바리노 해전(Battle of Navarino, 1827년 10월 20일)해전이다. 결과는 유럽 연합함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오스만-이집트 함대는 궤멸되었다. 이 해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제해권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그리스 독립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오스만 제국은 보복으로 러시아 상선의 [12]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를 거부하자 이를 명분으로 1828년 4월 오스만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제10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주력부대가 러시아 국경지대인 왈라키아와 몰도비아로 옮기자 그 틈을 이용하여 그리스 독립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장악하였다.
러시아는 초기에 오스만군에 고전하였으나 1829년 8월 [11]에디르네를 함락시켰다. 오스만 제국은 패배하였고 결과로 1829년 9월 14일 에디르아노플 조약(Treaty of Adrianople)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자유로운 항해권 획득, 오스만 제국내에서 러시아의 통상권 획득, 세르비아에 대한 자치를 보장받았으며 전쟁배상금의 지불이 완료될 때까지 러시아 군을 [13]왈라키아와 [3]몰다비아에 주둔하였다.
1828년 8월 30일 프랑스 군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하면서 이집트 군마저 몰아내어 그리스 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넘어 본토의 아테네와 테베까지 회복하였다.
독립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난 전투는 [14]아티키주의 북쪽에서 일어난 페트라 전투(1829년 8월 12일)였다. 이 전투는 그리스군이 정규군으로 승리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오스만 제국과 그리스가 전장에서 처음으로 교섭한 날이기도 하다.
1828년 11월 런던 의정서(London Protocol)를 채택하여 영국, 러시아, 프랑스 3개국이 그리스를 오스만 제국하의 자치국을 성립되었다.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가 발칸반도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스가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독립시키기로 하여 1830년 2월 새로운 런던의정서를 통해 그리스는 독립국임이 선언되었다.
1832년 7월에 '이스탄불 조약(Treaty of Istanbul)'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1] 필리케 헤타이리아(Filiki Eteria) : 1814년 오데사(현,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그리스 상인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2]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Alexander Ypsilantis, 1792년~1828년) : 1820년 헤타이리아 필리케의 지도자가 되어 1821년에 앞장서서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그리스 독립의 실마리가 되었다. 8년 뒤인 1829년에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였다
[3] 몰다비아(Moldavia) : 현재의 루마니아와 몰도바, 우크라이나 사이에 걸쳐 있었던 공국이며 1859년에 왈라키아 공국과 동군연합을 구성하였다
[4] 펠로폰네소스(Peloponnesian) 반도 : 그리스 남부의 반도. 펠로폰네소스주, 서그리스주, 아티키주 3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다
[5]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Theodoros Kolokotronis, 1770년~1843년) : 그리스의 장군이자 독립전쟁의 지도자
[6] 트리폴리(Tripoli) 또는 트리폴리스 :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부에 위치한 하고 있으며 펠로폰네소스주의 주도
[7]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of Egypt, 1769년~1849년)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재위 ,1805년 5월 17일 ~ 1848년 3월 2일). 이집트 마지막 왕조인 무함마드 알리 왕조의 창시자
[8]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 of Egypt, 1789년~1848년) :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 이집트의 총독(재위, 1848년 3월 2일~1848년 11월 10일)
[9] 메솔롱기(Missolonghi) : 그리스 서부에 위치한 도시.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많은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저항 운동을 벌였던 곳. 1824년에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전한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이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메솔롱기에는 조지 고든 바이런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0] 런던조약(Treaty of London) :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이 1827년 7월 6일 체결한 조약.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에게 1821년 3월 6일 그리스의 독립으로 지속되었던 전쟁을 중단하는 것을 요구했다
[11] 에디르네(Edirne) : 터키의 가장 서쪽에 있는 도시. 그리스와 불가리아 국경근처의 도시로 터키의 에디르네 주의 주도. 영어 아드리아노플로 알려져 있다
[12]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ait) : 에게 해와 내해인 마르마라 해를 잇는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과 함께 터키를 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13] 왈라키아(Wallachia) : 오스만 제국의 제후국. 1859년에 몰다비아 공국과 동군연합이 이루어졌으며, 1861년에 국호를 루마니아 공국으로 바꾸었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이 되었다. 현재 루마니아 남부 일대
[14] 아티키주(Attica) : 에게 해와 접한 반도 지대로서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주
영국과 [1]미얀마가 싸운 전쟁으로 영국이 승리해 미얀마의 아라칸, 아삼, 마니푸르, 테나세림 지역이 영국령으로 병합되었다. 이후 2차, 3차의 전쟁이후 1885년 미얀마는 영국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버마 [4]꼰바웅 왕조의 [5]보도파야 국왕은 굉장히 호전적인 인물로 서쪽으로 국경을 확장하며 1784년에는 [16]아라칸 지역을, 1814년에는 [3]마니푸르 지역을, 1817년에는 [2]아삼 지역을 편입시켰다. 아삼 왕조의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국왕은 버마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군대를 강화하고 버마의 추가침략을 막기 이하여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보도파야 국왕의 뒤를 이은 [6]바기도 국왕은 아삼을 다시 찾기위하여 1821년 2월에 2만명의 군대를 [2]아삼지역으로 파견하여 1년 반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1822년 7월에 아삼 왕국에 승리하였다. 패배한 아삼 왕 찬드라칸타 싱하(Chandrakanta Singha)는 영국 영토인 [18]벵골로 도망쳤다. [19]캘커타에 기반을 둔 영국은 마니푸르, 아삼, 아라칸 지역에서 도주한 반란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버마왕국은 1822년까지 [3]마니푸르와 [2]아삼지역의 정복으로 인하여 영국령 인도 사이에 긴 국경이 생겼다. 영국은 일방적으로 [7]카차르(Cachar)와 자인티아(Jaintia)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선언하고 군대를 파견했다.
1824년 1월 버마의 [9]마하 반둘라는 반군을 몰아내기 위해 카차르(Cachar)에 병력을 보냈고, 1824년 3월 5일 [16]아라칸(Arakan)의 국경 충돌 이후 제1차 버마와 영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군은 험난한 지형에서 싸우는 대신 1824년 5월 11일 인도의 [11]세포이를 포함한 1만명의 병력이 남부에 위치한 [13]양곤항구에 입성하여 기습공격했다. 영국군은 양곤의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내부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군은 공격을 개시했고 버마의 [6]바기도 국왕은 이에 맞서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9]마하 반둘라는 서부전선에서 급히 철수하여 [13]양곤 외곽에 집결하여 3만명의 병력을 지휘하였다. [9]마하 반둘라는 초기의 전투에서 몇 차례 승리했다. 11월 30일 마하 반둘라는 영국군 진지에 정면 공격을 하였으나 훨씬 뛰어난 무기를 갖춘 영국군에 패하여 3만명중 7천명만 남았다. 마하 반둘라는 양곤에서 멀지 않은 이라와디 삼각주(Irrawaddy delta)에 있는 작은 마을인 다누부(Danubyu)에 있는 후방기지로 후퇴했다. 1825년 3월부터 영국군은 다누뷰에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4월 1일 마하 반둘라는 전사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버마 [4]꼰바웅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영국은 기세를 이어 아라칸, 테나세림까지 공략했으며, 영국함대는 버마를 관통하는 이라와디강을 거슬러 당시 버마의 수도 [12]아마라푸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지휘관을 잃은 버마군은 기세를 잃었고, 영국군이 내놓은 강화조건에 1826년 [6]바기도 왕은 굴복하고 말았다.
2월 26일 굴욕적인 내용의 [15]얀다보 조약이 체결되면서 1차 영국-미얀마 전쟁은 끝을 맺는다. 오늘날의 미얀마인 버마는 [9]마하 반둘라가 확장한 영토인 아라칸, 테나세림, 아쌈, 마니푸르를 영국에 넘겼다. 또한 전쟁배상금으로 1백만 파운드의 거금을 물어내야 했다.
이후 영국은 두 차례 더 전쟁을 벌였고, 1885년 결국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 미얀마 : 미얀마는 135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며, 버마족이 68%를 차지하고 있다 [2] 아삼주(Assam)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3] 마니푸르주(Manipur) :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주, 주도는 임팔(Imphal) [4] 꼰바웅 왕조(Konbaung dynasty, 1752년~1885년)) : 미얀마의 마지막 왕조.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연이어 패전하며 완전히 멸망한다 [5] 보도파야 국왕(Bodawpaya, 1745년~1819년) : 꼰바웅 왕조의 제6대 국왕(재임, 1782년 2월 11일~1819년 6월 5일) [6] 바기도 국왕(Bagyidaw,1784년~1846년) : 꼰바웅 왕조의 제7대 국왕(1819년 6월 5일~1837년 4월 15일) [7] 카차르(Cachar) : 인도 아삼주에 있는 지역 [8] 치타공(Chittagong) :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로, 치타공 주의 주도. 방글라데시 동부의 거점도시 [9] 마하 반둘라(Maha Bandula, 1782년~1825년) : 왕립 버마군의 총사령관. 오늘날 미얀마의 국가 영웅 [10] 쉐다곤 파고다(Shwedagon Pagoda) : 미얀마 양곤에 있는 높이 112.17m인 황금 탑. 미얀마의 랜드마크이자 미얀마 불교도들의 정신적 지주 [11] 세포이(sepoy) : 19세기의 인도 용병. 무슬림과 힌두교도 등으로 구성된 인도인으로 구성된 영국군소속의 용병 [12] 아마라뿌라(Amarapura) : 꼰바옹 왕조의 수도 [13] 양곤(Yangon) : 미얀마의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랑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랑군의 명칭을 양곤으로 바꾸었다 [14] 다누부(Danubyu) : 미얀마의 양곤에서 약80마일 떨어진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15] 얀다보 조약(Treaty of Yandabo, 1826년 2월 24일) : 수도 아바(Ava)에서 불과 80킬로미터(50마일) 떨어진 얀다보(Yandabo) 마을에서 맺어졌다 [16] 아라칸 왕국(The Kingdom of Arakan, 1429년~1784년) : 미얀마의 라카인주 아라칸족의 왕국. 라카인 왕국이라고도 한다. 수도는 므락우 [17] 아라칸족(Arakan) : 미얀마의 라카인주와 인도, 방글라데시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미얀마 인구의 약 5.53%를 구성하고 있다 [18] 벵골(Bengal) : 현재 인도의 서벵골주, 방글라데시(동벵골)로 나뉘어 있다. 서벵골은 힌두교, 동벵골은 이슬람교를 많이 믿는다 [19] 캘커타(Calcutta) : 인도 동부에 있는 도시이자 인도 서벵골 주의 주도. 2001년 1월 도시의 이름을 캘커타(Calcutta)에서 콜카타(Kolkata)로 공식 변경하였다
인도네시아는 1602년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업적 식민 지배를 시작으로 1800년도에 동인도회사가 해산되면서 네덜란드 정부의 식민 통치가 이어졌다.
디파느가라 전쟁은 인도네시아 자와섬에서 네덜란드 식민 통치에 맞서 일어난 대규모 저항 전쟁이다. 인도네시아 [4]자와섬에서 [2]욕야카르타 술탄국의 [3]디파느가라(디폰느고로) 왕자가 주도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자와전쟁 혹은 디파느가라(디폰느고로) 전쟁이라 불린다.
전쟁의 배경은 정치적, 사회경제적, 종교적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3]디파느가라는 욕야카르타 왕국의 왕자였지만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고 이는 그의 정치적 불만을 증폭시켰다. 네덜란드는 자와의 전통 귀족 체계를 약화시키고 행정과 세금, 치안권을 직접 장악해 나가면서 현지 엘리트들의 권위를 무시했다. 이러한 통치는 디파느가라를 비롯한 자와 귀족과 농민들의 불만을 키웠다.
또한 네덜란드의 식민 수탈 체계가 자와 농민들의 삶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커피, 설탕, 인디고 등 현지 자원을 착취했고, 자와 주민들에게 과도한 세금과 강제노동을 요구했다. 전통적인 공동체 구조가 무너지며 농민들은 경제적 압박과 불안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기에 종교적 긴장도 더해졌다.
디파느가라는 세력을 확장하여 많은 왕족과 귀족들과 무슬림 사회의 폭넓은 후원을 등에 업고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이 전개했다. 1825년부터 전쟁은 시작되어 자와 중심부에서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 네덜란드군을 공격했고, 수많은 농민들과 일부 귀족 세력이 그의 편에 가담했다. 반란은 [1]욕야카르타를 넘어 자와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네덜란드는 1827년부터 본격적인 진압 작전을 준비하였다. [5]헨드릭 메르크스가 지휘한 네덜란드군은 군사력 증강과 함께 전략적 요새 건설, 주요 지도자 회유, 지역 간의 이간책 등 체계적인 대응 전략을 실행했다. 또한 반군과 민간인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게릴라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점차 디파느가라는 고립되었고 병력과 자원의 부족으로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렸다.
1830년 3월 28일, 디파느가라는 협상을 위한 회담에 참여하가 위하여 회담장으로 나갔다가 네덜란드에 체포되면서 전쟁은 종료되었다.
전쟁의 결과는 자와 지역에 심각한 피해를 남겼다. 약 20만 명에 달하는 자와인이 전쟁과 그 여파로 사망했고 전통 농촌 사회는 황폐화되었다. 네덜란드는 이후 간접통치 방식에서 벗어나 직접 통치 체계를 강화했고 자와의 귀족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는 정책을 단행했다. 이는 인도네시아 식민 지배 전반에 걸쳐 권력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식민 관료제 중심의 행정 체계가 자리잡게 되었다.
비록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디파느가라는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게 되었다. 그의 반식민 저항은 이후 세대에 영향을 미쳤고, 특히 20세기 인도네시아 독립운동 시기에 그는 식민 통치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재조명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를 국민영웅으로 공식 지정했고 현재도 역사 교과서와 문화 콘텐츠에서 주요 인물로 다뤄진다.
[1] 욕야카르타(Yogyakarta) :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 특별주의 주도. 전통적으로 자와 미술의 중심지였으며 바틱, 무용, 연극, 음악, 시, 와양(그림자 연극) 등의 문화가 발달했다.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중이던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인도네시아의 임시 수도였다 [2] 욕야카르타 술탄국(Sultanate of Yogyakarta) : 인도네시아 자와섬에 위치한 전통적인 이슬람 왕국으로, 현재까지도 문화적·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특수 자치 지역 [3] 디파느가라(인도네시아어 : Diponegoro, 자와어:Dipanagara, 1785년 11월 11일 ~ 1855년 1월 8일) : 욕야카르타 술탄국의 왕자. 인도네시아의 영웅 중 한 사람이다 [4] 자와(인도네시아어: Jawa, 영어: Java) :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수도인 자카르타와 반둥, 욕야카르타, 보고르 등 주요 도시들 대부분이 이 섬에 위치해 있다. 영어 이름은 '자바(Java)'이다 [5] 헨드릭 메르크스(Hendrik Merkus, 1779년 5월 25일~1845년 4월 12일) : 네덜란드의 군인 겸 식민 행정가. 네덜란드 식민지 통치 강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며, 인도네시아 측에서는 디폰느고로 체포를 통해 식민 지배를 연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