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독일사건기간 : 1940년 4월 9일, 조회수 : 482, 등록일 : 2023-02-11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철광석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르웨이를 침공하기로 하였다.
노르웨이의 [1]나르비크 항구는 스웨덴의 [2]키루나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을 운반하는데 있어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독일은 노르웨이 침공을 위하여 [3]베저위붕 작전을 수립하였다. 덴마크 침공은 1940년 4월 9일 베저위붕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독일은 노르웨이를 점령하기 위해서 노르웨이와 덴마크 사이의 [4]스카게라크 해협을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 덴마크를 침공했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가 덴마크 침공을 지켜주기 위해 군 병력을 파병했다'라는 명분을 들어 덴마크를 침공하였다. 국경지대에서 덴마크군이 독일군에 저항을 하여 20여명 정도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덴마크는 선전포고도 없이 독일군 공수 부대의 기습을 받아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공항과 교량을 뺏긴데다 독일공군의 무력시위와 독일군 전차 부대가 진격해 들어오자 4시간만에 항복하였다. 그리고 덴마크는 독일의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사실상 덴마크에 무혈입성한 독일은 이후 벌어진 노르웨이 전역은 아주 치열하게 전개된다.
[1] 나르비크(Narvik) : 노르웨이에 북부 있는 도시로 피오르드(Fjord)인 오포트피오르드(Ofotfjord) 해안에 접해있다. 노르웨이의 부동항으로 스웨덴과 철로가 연결되어 있다
[2] 키루나(Kiruna) : 스웨덴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 광업이 주요산업이며 오로라를 볼 수 있다
[3] 베저위붕 작전(Operation Weserübung, 1940년 4월 9일~6월 10일)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스칸디나비아의 중립국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 작전이다
[4] 스카게라크 해협(Skagerrak) : 노르웨이의 남해안, 스웨덴의 서남해안과 덴마크의 윌란반도 사이의 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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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은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중국)과 일본의 전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으로 이루어진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간에 벌어진 전 세계적인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강한 제약을 받았으며,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권이 등장했다. 독일은 조약을 무시하고 군비를 증강하며 유럽 내 영토 확장을 시도했고, 이탈리아와 일본도 각각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팽창 정책을 펼치면서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국제 연맹은 이를 효과적으로 제재하지 못하면서 전쟁을 방지하는 데 실패했다.
전쟁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40년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 본토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으며, 1941년에는 소련을 침공하며 전선을 더욱 확대했다. 같은 해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전세는 1942~1943년을 기점으로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퇴하며 동부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했고,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며 서부 전선을 개방했고, 독일군은 연합군과 소련군의 압박 속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45년 5월,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 전쟁이 끝났다.
한편, 태평양 전쟁에서는 미국이 일본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공식적인 종전은 9월 2일에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은 약 7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초래한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으며, 일본은 미국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전쟁 범죄에 대한 심판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고, 국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유엔(UN)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전쟁 후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 체제가 시작되면서 세계는 또 다른 긴장 상태로 접어들었다.
겨울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39년 11월 30일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여 1940년 3월 13일까지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의 시작과 종료가 겨울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탓에 겨울전쟁으로 불린다.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과 대비하여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이라고도 한다.
소련은 군사력 우위로 핀란드를 쉽게 정복할 것이라 생각하고 침공하였지만 핀란드는 기후와 강을 이용한 방어로 거센 저항을 하였다. 소련군도 전투가 지속될수록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전쟁은 완전히 교착 상태에 빠져버렸다.
소련군은 1940년 봄이 되자 재정비를 하고 대규모 공습을 감행하여 핀란드는 병력의 20%를 넘는 감각한 피해를 입었다.
결국 핀란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소련에 카리알라 동부 지역(Karelia, 핀란드 영토의 10%, 산업능력의 20%에 해당)을 넘겨주는 조건등의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전쟁은 종식되었다.
양국의 많은 희생으로 이 전쟁은 핀란드가 러시아에게 사실상 이겼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으며 핀란드는 비록 영토의 10%를 잃었지만 이웃한 발트 3국(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과는 달리 소련에 강제합병되지 않았다.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조약이 체결되고 그 일주일 뒤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 서부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개시되었다.
1939년 9월 17일 소련은 폴란드 동부쪽으로 침공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폴란드 군인 및 경찰이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억류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풀려났지만 폴란드군 장교와 부사관, 지식인, 기술자 등 폴란드를 이끄는 엘리트층 수만 명은 소련의 비밀경찰이자 정보기관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840년 4월 3일부터 폴란드 전쟁포로 수감자들이 처형되기 시작했다. 처형된 전쟁포로 수감자 일부는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 숲에 암매장했다.
실제로는 카틴에서만 학살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카틴에서만 4000여명이 학살되었으며 카틴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코젤스크 수용소의 포로들이었고 오스타쉬코프 수용소의 포로들은 모스크바 북부의 칼리닌 부근에서 학살되었으며 스타로빌스크 수용소의 포로들은 하리코프 부근에서 학살되었다. 카틴 숲에서 학살의 흔적이 최초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카틴 학살로 알려진 것이다.
'카틴 학살'은 좁게 얘기하면 코젤스크 포로수용소 수감자들을 상대로 자행된 카틴 숲 학살을 일컫고,광의적으로는 소련이 폴란드 포로와 죄수들을 상대로 전국에서 자행한 학살을 가리킨다.
* 내무인민위원회(NKVD) : 내무인민위원회는 1934년부터 1946년까지 존재했던 소비에트 연방의 정보기관. 소련 대숙청 기간의 정치경찰이었다. 1946년에 국가보안부(MGB), 1954년에 국가보안위원회(KGB)로 개편되었다
* 스몰렌스크(Smolensk) :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서남쪽으로 362km 정도 떨어진 도시로 인접국가는 벨로루시이다
*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 1939년 8월 23일에 나치 독일과 소련은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는다등의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941년에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여 독소 전쟁이 벌어져 이 조약은 파기되었다
* 코젤스크(Kozielsk) : 러시아의 도시
* 오스타시코프(Octawkob) : 러시아의 도시
* 스타로빌스크 : 우크라이나 도시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나치 독일은 노르웨이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노르웨이를 장악하기 위하여 [13]베저위붕 작전을 수립하였다.
첫번째, 노르웨이의 [1]나르비크 항구는 스웨덴의 [2]키루나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을 대량으로 운송하는데 최적의 요건을 갖춘 부동항으로 노르웨이 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독일은 나르비크 항구를 확보하며 수송선단의 안전을 보장하고 노르웨이가 연합국(대표적으로 영국)과 협력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노르웨이 항구는 독일이 봉쇄를 피할 수 있는 출구였으며, 이를 통해 대서양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 항구를 통해 연합군에 대항하여 해상에서 쉽게 세력을 뻗힐 수 있었다. 또한 노르웨이의 항공 기지를 통해 북대서양에서 정찰기를 확대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독일 유보트와 군함은 노르웨이 해군기지를 통해 영국의 북해 봉쇄선을 뚫고 보급로를 공격할 수 있었다.
베저위봉 작전의 일환으로 독일은 노르웨이와 덴마크 사이의 [3]스카게라크 해협을 확보하여 영국 해군의 위협을 막을 수 있어 덴마크 점령이 우선이라 판단하였다. 4월 9일 덴마크를 침공하여 4시간만에 덴마크를 점령하였다(이후 독일의 덴마크 점령은 1945년 5월 5일까지 이어졌다).
4월 8일 아침을 기해 독일군은 전격적으로 노르웨이 침공을 개시했다. 노르웨이군은 병력도 적고 기습까지 받아 곳곳에서 무너졌다.
독일은 노르웨이 북방의 주요 항구도시인 [4]스타방에르, [5]베르겐(Bergen), [6]트론헤임(Trondheim)에 상륙했으며 오슬로피오르를 침략했다. 노르웨이 수도인 오슬로를 함락시키고 전역을 점령하자 1940년 4월 24일 노르웨이 본토에는 [8]국가판무관부가 설치되었다(독일 항복 직전인 1945년 5월 7일 해체되었다).
[6]트론헤임이 독일에 점령되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2개여단중에 트론헤임 북동쪽에 있는 [10]남소스와 트론헤임 남서쪽에 있는 [11]안달스네스에 각각 상륙시켰다. [10]남소스에 상륙한 영국군은 독일군 주력이 오슬로 방면에서 북쪽으로 돌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4월 21일에 최초의 교전이 노르웨이 중부에 위치한 [7]릴리함메르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이 전투가 벌어졌지만 영국군은 붕괴되었으며 [7]릴레함메르는 독일군에게 함락당했다. [11]안달스네스에 상륙한 영국군도 [6]트론헤임을 점령하고 있던 독일 보병사단에 남소스와 트론헤임의 중간지역인 [12]스테인셰르에서 4월 21일에 격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추가로 투입된 영국 정예 병력도 패배하여 결국 트론헤임 방면의 전투는 실패로 끝났다. 이리하여 노르웨이 남중부는 4월 말에 독일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4월 10일 제1차 [1]나르비크 해전과 4월 13일 제2차 나르비크 해전으로 노르웨이 북부의 제해권은 영국이 장악하게 된다. 나르비크 주변은 영국 해군이 장악했지만 육상병력을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4월 27일에 프랑스군, 폴란드군까지 합세한 3국 연합군이 결성되어 나르비크를 탈환하기 위하여 진군하였으나 폭설과 독일군의 저항으로 난항을 겪고 있었다. 결국 5월 27일 독일군의 방어선을 뚫고 나르비크를 탈환했다.
그러나 노르웨이 전역이 독일에게 점령되었고 5월 10일부터 시작된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영국 해군 병력이 노르웨이에서 대부분 철수하는 바람에 나르비크를 계속 확보하기는 불가능해졌다. 나르비크를 간신히 탈환했으나 결국은 1940년 6월 6일에 마지막 병력이 철수하였다.
연합군의 지원이 끊긴 노르웨이군은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수 없었다. 노르웨이 본토에 남아있던 노르웨이군은 1940년 6월 10일 항복하였다. 6월 10일 오후 5시에 공식적인 항복조약이 조인되었다. 독일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1] 나르비크(Narvik) : 노르웨이에 북부 있는 도시로 피오르드(Fjord)인 오포트피오르드(Ofotfjord) 해안에 접해있다. 노르웨이의 부동항으로 스웨덴과 철로가 연결되어 있다
[2] 키루나(Kiruna) : 스웨덴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 광업이 주요산업이며 오로라를 볼 수 있다
[3] 스카게라크 해협(Skagerrak) : 노르웨이의 남해안, 스웨덴의 서남해안과 덴마크의 윌란반도 사이의 해협
[4] 스타방에르(Stavanger) : 노르웨이 남부에 있는 도시. 노르웨이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
[5] 베르겐(Bergen) : 노르웨이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 노르웨이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로 오슬로 다음으로 큰 제2의 도시
[6] 트론헤임(Trondheim) : 노르웨이 중부에 있는 도시
[7] 릴리함메르(Lillehammer) : 노르웨이 남부 내륙에 있는 도시. 1994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
[8] 국가판무관부(Reichskommissariat) : 라이히코미사리아트.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점령지에 설치한 민정기관
[9] 오슬로피오르(Oslofjord) : 북해와 발트해로 이어지는 카테가트 해역을 연결하는 스카게라크 해협의 일부
[10] 남소스(Namsos) : 노르웨이 중부에 있는 도시. 트론헤임에서 북동쪽으로 위에 위치한 도시
[11] 안달스네스(Andalsnes) : 노르웨이 중부에 있는 도시. 트론헤임에서 남서쪽으로 밑에 위치한 도시
[12] 스테인셰르(Steinkjer) : 노르웨이 트론헤임에서 북동쪽, 남소스에서 남쪽에 있는 도시
[13] 베저위붕 작전(Operation Weserübung, 1940년 4월 9일~6월 10일)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스칸디나비아의 중립국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 작전이다
* 피오르 또는 피오르드(노르웨이어: fjord, 영어: fiord) : 빙하로 만들어진 좁고 깊은 만
* 스타방에르, 베르겐, 안달스네스. 트론헤임, 남소스, 나르비크는 북해(North Sea)에서 시작하여 노르웨이해(Norwegian Sea)를 북동쪽으로 순차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항구도시들이다
런던 대공습은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공군이 영국에 감행한 대규모 폭격작전으로, 1940년 9월 7일부터 1941년 5월 11일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독일이 영국을 항복시키려는 전략적 목표 아래 수행된 공습으로 특히 런던을 비롯한 주요 산업 및 군사 중심지가 집중적인 타격을 받았다.
1940년에 독일은 유럽 대륙을 장악하며 프랑스를 점령한 후, 다음 목표로 영국을 정조준했다. 히틀러는 영국 본토 침공을 위해 [1]바다사자 작전을 계획했지만,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국의 방공망을 무력화하고 영국 해협에서의 공중 우위를 확보해야 했다. 이에 따라 독일 공군은 1940년 7월부터 영국 [2]왕립공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영국의 강력한 저항과 레이더를 활용한 방어 시스템으로 인해 전세를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히틀러는 기존의 군사 목표를 타격하는 전략에서 벗어나 영국 국민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영국 정부를 항복하게 만들기 위한 전술적 변화를 모색했다. 이에 따라 독일 공군은 런던을 포함한 영국 주요 도시를 대규모로 폭격하는 전략을 채택했으며, 이 과정에서 [3]영국 본토 전투의 흐름도 급격하게 변화 되었다.
런던 대공습은 1940년 9월 7일에 독일 공군이 런던을 향해 대규모 폭격을 가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첫날, 300대 이상의 폭격기가 출격하여 런던 동부의 도크랜드(Docklands) 지역을 포함한 항구 시설과 공업지대를 집중적으로 타격했다. 공습은 주간과 야간을 가리지 않고 지속되었으며, 이후 몇 주 동안 매일같이 수백 대의 폭격기가 런던 상공을 뒤덮었다.
공습이 시작된 후 첫 57일 동안 런던은 매일 밤 폭격을 받았으며, 이후 독일군은 전술을 바꿔 주로 야간 공습을 통해 민간인과 산업시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낮 동안 영국 왕립공군의 전투기들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야간 폭격을 통해 방공망을 회피하려는 전략적 변화였다.
특히 1940년 11월 14일, 독일군은 영국 중부의 산업도시인 코번트리(Coventry)를 강타하는 대규모 폭격을 감행 했는데, 이는 영국 전역에서 가장 치명적인 공습 중 하나였다. 500톤 이상의 고폭탄과 소이탄이 투하되며 도시 대부분이 불길에 휩싸였고, 약 500여 명이 사망하며 코번트리는 사실상 초토화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독일의 무차별 공습 전략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고 런던을 포함한 여러 주요 도시들이 연이어 피해를 입었다.
공습이 절정에 달한 1941년 5월 10일~11일 사이, 독일군은 런던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폭격을 가했다. 이틀 동안 약 1,400명이 사망 했으며, 영국 국회의사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 런던 타워 등이 큰 피해를 입었다. 세인트 폴 대성당도 직격탄을 맞았으나 기적적으로 붕괴를 피했다. 이 공습은 런던 대공습 기간 동안 가장 강도 높은 공격으로 기록되었다.
런던 대공습은 영국 전역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영국 전역에서 약 43,000명이 사망하고 139,0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00만 채 이상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산업시설과 철도망, 항구 시설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영국은 빠르게 복구 작업을 진행하며 독일의 폭격에 굴복하지 않았다.
폭격이 계속되던 와중에도 영국 국민들은 'Keep Calm and Carry On(침착하게 계속 나아가라)'이라는 정신으로 견디며 독일의 심리전 전략에 굴하지 않았다. 많은 시민들이 지하철역과 방공호로 대피하여 생활했고 정부와 시민들은 협력하여 도시 기능을 유지하려 했다.
독일군이 런던과 주요 산업도시를 집중적으로 폭격하는 동안 영국 왕립공군(RAF)은 강력한 방공망을 구축하며 독일 폭격기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영국의 레이더 시스템과 전투기 조종사들의 용맹한 저항 덕분에 독일군은 점점 더 큰 손실을 입게 되었으며 장기적으로 공습을 지속하는 것이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1941년 5월 11일, 독일은 소련 침공 작전인 [4]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영국에 대한 공습을 중단했다. 이는 런던 대공습의 공식적인 종료를 의미했다.
런던 대공습은 독일이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감행한 대규모 폭격 작전이었지만 독일의 전략적 실패로 이어졌다. 히틀러는 런던을 비롯한 영국 주요 도시를 초토화함으로써 영국 정부를 굴복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영국 국민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런던 대공습은 영국 왕립공군의 방공 시스템과 저항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독일 공군이 영국 본토에서 장기적인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결국 독일은 영국 침공 계획인 바다사자 작전을 포기하고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렸으며 이는 이후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런던 대공습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공군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 전투 중 하나 로 평가되며 영국 국민들의 저항과 단결 정신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1] 바다사자 작전(Operation Sea Lion, 1940) : 나치 독일이 영국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 계획한 군사 작전으로 영국 해협을 건너 상륙 작전을 감행하려 했으나 영국 왕립공군의 저항과 방공망, 독일 해군의 열세로 인해 실행되지 못하고 무산된 작전이다 [2] 영국 왕립공군(Royal Air Force, RAF) : 1918년 창설된 영국의 공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본토 전투에서 독일 공군을 격퇴하며 영국을 지켜낸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첨단 레이더 시스템과 스핏파이어(Spitfire) 전투기의 활약으로 공중 우위를 확보하며 독일의 침공을 저지했다 [3] 영국 본토 전투(Battle of Britain, 1940년 7월~10월) :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공군이 영국 왕립공군의 방공망을 무력화하고 바다사자 작전을 위한 공중 우세를 확보하려 했던 전투이다. 그러나 영국의 레이더 시스템, 스핏파이어 전투기의 저항으로 독일 공군이 패배하며 영국 침공 계획은 좌절되었다 [4]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 1941년 6월 22일~1942년 초) :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 위해 수행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 작전으로 독일군은 초기에는 급속한 진격에 성공했으나 소련의 강력한 저항과 혹독한 겨울 기화와 보급 문제로 인해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며 전쟁의 흐름이 전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