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이·망소이의 난

대한민국 사건기간 : 1176년 1월~1177년 7월, 조회수 : 147,   등록일 : 2023-01-17
공주 [1]명학소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으므로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고려시대 지방행정제도에서 주군현(州郡縣)은 도의 하위 행정 단위로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모든 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지는 않았으며, 일부 현에만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지방관이 파견된 현을 주현(主縣), 그렇지 않은 현을 속현(屬縣)이라 불렀다. 현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향·소·부곡이 존재했다.

종래에는 노비와 향(鄕)·소(所)·부곡(部曲)의 거주민, 즉 잡척(雜尺)을 모두 천인(또는 천민)이라 간주했으나, 최근 학계에서는 향(鄕)·소(所)·부곡(部曲)의 거주민은 양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향·소·부곡민은 타지역민과 같이 조세, 공부(貢賦), 역역(力役), 국유지 경작하는 의무가 있었다. 특히 소(所)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수공업품, 광산물 등 특수 물품 생산지 역할을 하였다. 금소(金所)는 금을 생산, 은소(銀所)는 은을 생산, 자기소(磁器所)는 고려청자 생산지였다.

[3]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명학소(鳴鶴所)는 충청도 공주목 유성현(濡城縣) 동쪽 10리에 있는 곳으로 기록되어 현재의 대전광역시 탄방동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명학소는 숯을 생산하는 탄소(炭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所)의 주민들은 천민과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으면서 각종 부담은 일반 군현민보다 무거웠다. 이 시기는 지방관들의 수탈과 횡포가 심했던 고려 [2]명종 6년 무신집권시대로 이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명학소에 거주하던 망이와 망소이가 주동이 되어 공주를 공격해 함락시킴으로써 반란이 시작되었다. 반란 초기에 고려 조정은 반란군을 회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3천명의 토벌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패배하였다.

고려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켜 지방관을 파견해 다시 반란군을 회유했으나, 이때에도 응하지 않고 예산현을 공략해 충주까지 점령하였다. 고려 조정은 정세유와 이부를 출정시켜 대대적인 토벌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주효해 1177년 정월에는 망이·망소이가 강화를 요청하여 항복함으로써 난이 일단 진정되는 듯하였다. 고려 조정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처형하지 않고 오히려 곡식을 주어 향리로 호송하였다.

그러나 한 달 뒤인 2월에 망이·망소이 등은 재차 봉기해 [5]가야사를 약탈했고, 3월에는 [6]홍경원을 불태우고 승려 10인까지 죽였으며 개경까지 진격할 것임을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때 망이 등이 홍경원의 주지승을 시켜서 개경에 전달한 글에 의하면, 이들이 다시 봉기하게 된 이유는 난이 진정된 이후 조정에서 다시 군사를 보내 그들의 가족들을 가두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7]아주를 함락시키고, 청주를 제외한 청주목 관내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강경책을 펼치면서 같은 해 5월에 충순현에서 명학소로 강등시키고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토벌하였다.

1177년 7월에 병마사 [4]정세유가 망이와 망소이를 체포해 청주의 옥에 가둠으로써 반란은 완전히 진정되었다.

이 난은 비록 실패했지만, 고려사회 신분질서를 타파하려는 신분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선구적인 의미가 인정되며, 실제로 이후 향·소·부곡 등 특수행정구역의 소멸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평가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망이 망소이의 난(亡伊亡所伊─亂))
 
[1] 명학소 : 현 대전광역시 탄방동으로 추정
[2] 명종(1131년~1202년) : 고려 제19대 국왕(재위: 1170년 ~ 1197년)
[3]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조선 성종 당시인 1530년에 편찬한 지리서. 전 55권 25책
[4] 정세유(생몰년 미상) : 고려후기 서북면병마사, 형부상서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5] 가야사(伽耶寺): 충청남도 예산군 던산면에 있던 고려전기 사찰
[6] 홍경원 : 충청남도 천안시 성환읍에 있었던 고려전기 사찰
[7] 아주 : 지금의 중청남도 아산

Copyright 2020 TMSTOR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