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스 저격사건
대한민국
사건기간 : 1908년 3월 23일, 조회수 : 233, 등록일 : 2022-11-04
[3]더럼 스티븐슨은 1884년에 일본 외무성에서 근무하였으며 1884년과 1885년에 일본의 외부대신 이노우에 가오루를 따라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와 한성조약 협상을 보조하였다. 그 공로로 가서 일본의 메이지 천왕으로 부터 훈3등 [4]욱일중수장을 수여받았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 외교 고문에 임명된 스티븐슨은 언론에 을사조약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등 일본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3월 21일에 휴가를 얻은 [3]스티븐슨은 일본 선박 니혼마루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리고 미국 언론에 일본의 조선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샌프란시스코지역 한인들은 스티븐스의 발언에 분노하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1908년 3월 22일,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4인은 스티븐스가 묵고 있던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호텔을 찾았다. 영어가 유창했던 이학현은 기사를 정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대한제국은 황제가 어리석어 생각이 어둡고, 정부 관리들이 백성을 학대하며 재산을 탈취하므로 백성의 원망이 심하다. 그리고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가 아니면 러시아에게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망언을 하면서 기사의 정정요청을 거부하였다.
이에 격분한 4인은 스티븐스을 구타하고 의자를 들어 스티븐스에게 휘둘렀다. 경찰관 두 명이 사건현장에 출동하였으나 스티븐스가 처벌을 원치 않아 호텔을 떠났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의 페리부두에서 오클랜드로 이동하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샌프란시스코 페리부두에서 배편으로 오클랜드로 이동한 후 오클랜드에서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를 타야 했다.
먼저 도착해 있었던 [1]전명운 의사가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저격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불발됐고 권총 손잡이로 스티븐스을 가격하는등 둘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다. 때마침 뒤를 이어 [2]장인환 의사가 나타나 스티븐스을 향해 세 발의 총알을 발사하였다. 두 발은 스티븐스에 적중하였고, 한 발은 전명운 의사의 어깨에 맞았다. 스티븐스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 사망하였다. 전명운 의사와 장인환 의사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알지 못했으며 사전에 공모하지 않았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적을 갖고 스티븐스을 처단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을 세계에 알린 최초의 사건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후 [1]전명운과 [2]장인환은 재판을 받았는데 두 사람이 암살을 공모했다는 자료나 근거가 충분하지 않았으며, 전명운 의사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로 풀려났다.
장인환 의사는 25년형이 구형되었으나, 교포 사회에서 많은 성금으로 변호사를 고용해주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10년만에 석방되었다.
스티븐스의 저격사건을 계기로 재미한인 사회에서 여러 단체들의 통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그 결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가 통합돼 1909년 2월 국민회로 발전했고, 1910년 2월에 국민회가 대동보국회와 결합해 [5]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
전명운 의사는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대한 국민회에서 활동하다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1920년에 미국에 귀화했다.
장인환 의사는 1919년에 석방되었으나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다가 1930년 투신자살로 삶을 마감하였다.
[1] 전명운(1884년 6월 25일∼1947년 11월 19일)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2] 장인환(1876년 3월 10일∼1930년 5월 22일)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3]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851년 2월 1일~1908년 3월 25일) : 미국의 외교관. 일본 외무성과 통감부에서 일했다
[4] 욱일장 : 일본의 훈장. 일본 최초의 훈장으로 1875년 메이지 천황에 제정되었으며 남자에게 수여되는 훈장
[5]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 : 스티븐스저격의거를 계기로 일어난 재미 한인단체 통합운동의 결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를 통합하여 1909년 2월 1일 국민회가 창립되었다. 1910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되었다.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 등이 참여하였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 외교 고문에 임명된 스티븐슨은 언론에 을사조약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등 일본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3월 21일에 휴가를 얻은 [3]스티븐슨은 일본 선박 니혼마루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리고 미국 언론에 일본의 조선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았다
샌프란시스코지역 한인들은 스티븐스의 발언에 분노하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1908년 3월 22일, 최정익, 문양목, 정재관, 이학현 4인은 스티븐스가 묵고 있던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호텔을 찾았다. 영어가 유창했던 이학현은 기사를 정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대한제국은 황제가 어리석어 생각이 어둡고, 정부 관리들이 백성을 학대하며 재산을 탈취하므로 백성의 원망이 심하다. 그리고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으니 일본의 보호가 아니면 러시아에게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망언을 하면서 기사의 정정요청을 거부하였다.
이에 격분한 4인은 스티븐스을 구타하고 의자를 들어 스티븐스에게 휘둘렀다. 경찰관 두 명이 사건현장에 출동하였으나 스티븐스가 처벌을 원치 않아 호텔을 떠났다.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의 페리부두에서 오클랜드로 이동하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샌프란시스코 페리부두에서 배편으로 오클랜드로 이동한 후 오클랜드에서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를 타야 했다.
먼저 도착해 있었던 [1]전명운 의사가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저격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불발됐고 권총 손잡이로 스티븐스을 가격하는등 둘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졌다. 때마침 뒤를 이어 [2]장인환 의사가 나타나 스티븐스을 향해 세 발의 총알을 발사하였다. 두 발은 스티븐스에 적중하였고, 한 발은 전명운 의사의 어깨에 맞았다. 스티븐스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틀 뒤 사망하였다. 전명운 의사와 장인환 의사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알지 못했으며 사전에 공모하지 않았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적을 갖고 스티븐스을 처단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을 세계에 알린 최초의 사건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후 [1]전명운과 [2]장인환은 재판을 받았는데 두 사람이 암살을 공모했다는 자료나 근거가 충분하지 않았으며, 전명운 의사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로 풀려났다.
장인환 의사는 25년형이 구형되었으나, 교포 사회에서 많은 성금으로 변호사를 고용해주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10년만에 석방되었다.
스티븐스의 저격사건을 계기로 재미한인 사회에서 여러 단체들의 통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그 결과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가 통합돼 1909년 2월 국민회로 발전했고, 1910년 2월에 국민회가 대동보국회와 결합해 [5]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
전명운 의사는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대한 국민회에서 활동하다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1920년에 미국에 귀화했다.
장인환 의사는 1919년에 석방되었으나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다가 1930년 투신자살로 삶을 마감하였다.
[1] 전명운(1884년 6월 25일∼1947년 11월 19일)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2] 장인환(1876년 3월 10일∼1930년 5월 22일)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3]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851년 2월 1일~1908년 3월 25일) : 미국의 외교관. 일본 외무성과 통감부에서 일했다
[4] 욱일장 : 일본의 훈장. 일본 최초의 훈장으로 1875년 메이지 천황에 제정되었으며 남자에게 수여되는 훈장
[5]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 : 스티븐스저격의거를 계기로 일어난 재미 한인단체 통합운동의 결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를 통합하여 1909년 2월 1일 국민회가 창립되었다. 1910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되었다. 안창호, 박용만, 이승만 등이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