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공성전(Siege of Constantinople)
튀르키예
그리스
사건기간 : 1453년 4월 2일~1453년 5월 29일, 조회수 : 166, 등록일 : 2022-10-21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4월 2일 10만여 대군을 이끌고 도시 서쪽 외곽에 자리잡았으며 4월 5일 동로마제국(비잔틴제곡)의 수도인 노스탄티노플 성문앞에 도착했다.
동로마제국의 군사는 대략 7천명으로 그 중 2천명은 용병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천년요새로 불렸던 만큼 단단한 삼중구조의 성벽과 바다로 둘러쌓여 있었다. 육지로 이어지는 서쪽 성벽은 해자를 갖추고 있었다. 해자는 20m넓이와 5~10m 깊이로 되어 있으며, 해자 뒤의 흉벽, 넓이 2m와 높이 5m인 외성벽, 넓이 5m와 높이 12m인 내성벽의 구조로 성벽간의 총 거리가 60m에 달해 있었다.
남쪽성벽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수심 80m의 바마르마라 해협이 감싸고 있어 배한척 댈 수가 없었다. 북서쪽 성벽의 골든혼 입구는 두께 20cm의 굵은 쇠사슬로 연결되어 적군의 배가 진입할 수 없었다.
마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뚫기 위하여 8m가 넘는 청동으로 만든 대포를 배치시켰다. 대포는 헝가리인인 우르반이 제작하였으며 대포를 옮기는데 60마리의 황소와 200명의 군인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1.6km의 사정거리와 포탄의 무게만도 0.5톤에 달했다.
오스만군은 대포로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격의 효과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포는 열에 약해서 한번 발사하면 열이 식을 때까지 최소 3시간을 기다려 다시 발사해야 했다. 급한 마음에 열이 식기전에 발사하여 자체 폭발하여 오스만군의 피해도 있었다. 그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군은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였다.
대포의 공격으로 콘스탄티노플 시민의 심리적 공포는 대단했으며 초반에는 오스만군이 우위를 이어갔다.
대포공격에 이어 성안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오스만군에 고용되었던 용병인 바슈보주크군을 선봉으로 공략하였다. 뒤 이어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군까지 진격하였으나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진두지휘와 강한 결속력에 막혀 성벽을 뚫는데 실패하였다.
계속되는 공격에도 성벽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원정에 나선 오스만제국의 병사들도 지쳐갔다. 메흐메트2세는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뚫기 위해 최후의 묘수를 생각해 낸다.
서북쪽 성벽의 골든혼으로 배를 이동시키기로 하였다. 굵은 쇠사슬에 가로막혀 진입하지 못하자 산으로 배를 이동시켰는데 통나무에 기름을 발라 오스만 병사들이 72척의 배를 끌고 골든혼 해안으로 진입하였다. 단 하루만에 72척의 배를 이동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7일이 걸렸다고 하는 문헌도 있다.
골든혼에 오스만의 배가 진입하자 콘스탄티노플의 서쪽성벽만을 방어하던 병력이 골든혼으로 분산되어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취약해진 서쪽 성벽으로 총공격을 감행하여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였다. 2천년의 명맥을 이어오던 로마제국이 역사속에 사라지는 순간이다. 공략한지 53일만이었으며 마흐메트2세는 비잔틴제국의 상징인 성소피아 사원에서 이슬람의식을 거행했고 파티(Fatih, 정복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메흐메트 2세는 노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뒤 다문화, 다민족 전제군주국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무너지자 적진으로 뛰어들어 전사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은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대격전이었으며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역사학계에서는 말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으르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리상의 대발견이라 불리는 유럽인의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였다.
동로마제국의 군사는 대략 7천명으로 그 중 2천명은 용병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천년요새로 불렸던 만큼 단단한 삼중구조의 성벽과 바다로 둘러쌓여 있었다. 육지로 이어지는 서쪽 성벽은 해자를 갖추고 있었다. 해자는 20m넓이와 5~10m 깊이로 되어 있으며, 해자 뒤의 흉벽, 넓이 2m와 높이 5m인 외성벽, 넓이 5m와 높이 12m인 내성벽의 구조로 성벽간의 총 거리가 60m에 달해 있었다.
남쪽성벽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수심 80m의 바마르마라 해협이 감싸고 있어 배한척 댈 수가 없었다. 북서쪽 성벽의 골든혼 입구는 두께 20cm의 굵은 쇠사슬로 연결되어 적군의 배가 진입할 수 없었다.
마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뚫기 위하여 8m가 넘는 청동으로 만든 대포를 배치시켰다. 대포는 헝가리인인 우르반이 제작하였으며 대포를 옮기는데 60마리의 황소와 200명의 군인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1.6km의 사정거리와 포탄의 무게만도 0.5톤에 달했다.
오스만군은 대포로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격의 효과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포는 열에 약해서 한번 발사하면 열이 식을 때까지 최소 3시간을 기다려 다시 발사해야 했다. 급한 마음에 열이 식기전에 발사하여 자체 폭발하여 오스만군의 피해도 있었다. 그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군은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였다.
대포의 공격으로 콘스탄티노플 시민의 심리적 공포는 대단했으며 초반에는 오스만군이 우위를 이어갔다.
대포공격에 이어 성안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오스만군에 고용되었던 용병인 바슈보주크군을 선봉으로 공략하였다. 뒤 이어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군까지 진격하였으나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진두지휘와 강한 결속력에 막혀 성벽을 뚫는데 실패하였다.
계속되는 공격에도 성벽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원정에 나선 오스만제국의 병사들도 지쳐갔다. 메흐메트2세는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뚫기 위해 최후의 묘수를 생각해 낸다.
서북쪽 성벽의 골든혼으로 배를 이동시키기로 하였다. 굵은 쇠사슬에 가로막혀 진입하지 못하자 산으로 배를 이동시켰는데 통나무에 기름을 발라 오스만 병사들이 72척의 배를 끌고 골든혼 해안으로 진입하였다. 단 하루만에 72척의 배를 이동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7일이 걸렸다고 하는 문헌도 있다.
골든혼에 오스만의 배가 진입하자 콘스탄티노플의 서쪽성벽만을 방어하던 병력이 골든혼으로 분산되어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취약해진 서쪽 성벽으로 총공격을 감행하여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였다. 2천년의 명맥을 이어오던 로마제국이 역사속에 사라지는 순간이다. 공략한지 53일만이었으며 마흐메트2세는 비잔틴제국의 상징인 성소피아 사원에서 이슬람의식을 거행했고 파티(Fatih, 정복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메흐메트 2세는 노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뒤 다문화, 다민족 전제군주국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무너지자 적진으로 뛰어들어 전사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은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대격전이었으며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역사학계에서는 말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으르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리상의 대발견이라 불리는 유럽인의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