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영국프랑스사건기간 : 1757년 6월 23일, 조회수 : 570, 등록일 : 2022-09-26
[1]7년 전쟁으로 영국-프랑스 전쟁은 인도에서도 연장되었다. 이 시기인 1757년 6월 23일 인도 [2]벵골 지역의 패권을 두고 영국 동인도 회사와 프랑스 동인도회사-벵골 토후국 연합군과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은 벵골 지역에서 주도권을 확실시하게 되었고, 이후 100년간 인도 전체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17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인도의 무굴제국의 중앙지배력이 약화되고 각지역 제후들이 사실상 독립적 정치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지방의 권력자들은 영국, 프랑스등 서양 세력과 연합해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이 틈을 타서 영국과 프랑스도 상호 이익을 위한 싸움에 제후국들을 활용했다.
벵골지역의 태수인 [3]시라즈 우드다울라는 영국 동인도회사에 요새 확장 작업을 중지하고 수비대를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회사는 이를 무시하고 오새를 계속 확장했다. 1756년 6월 16일 [3]시라즈 우드다울라는 군대를 동원해 [5]갤커타로 진격하여 공격하였다. 6월 20일 [5]캘거타의 윌리엄 요새 수비군 146명은 백기를 들었다.
포로가 된 영국인 146명은 지하감옥에 수용되어 하루만에 질식사하고 23명이 살아남았다.
이에 격분한 영국의 [4]로버트 클라이브는 10월 16일 구원군을 이끌고 [5]캘커타로 출발하였다. 1575년 1월 2일 캘커타를 탈환하고 벵골군의 요새들을 격파하였다.
수세에 몰린 [3]시라즈 우드다울라는 영국인들의 재산을 반환하고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2월 9일에 평화협정을 맺는다. 표면적으로 영국과 벵골 사이에 평화가 찾아온듯 했다.
[4]로버트 클라이브는 여세를 몰아 캘거타 북쪽의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거점인 찬데르나고르를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프랑스는 벵골 태수인 [3]시라지 웃 다울라와 동맹을 맺고 개전을 결심한다.
전투는 캘커타에서 북쪽으로 150km 떨어져 있고 벵골 수비국의 수도였던 [6]무르시다바드 남쪽에 위치한 [7]후글리 강변에 위치한 플라시에서 벌어졌다.
1757년 6월 23일 벵골군 5만명과 영국군 3천명이 대치하였다. 영국군은 2천명이 [10]세포이였다.
영국은 사전에 시라지 웃 다울라 군대의 사령관인 [8]미르 자파르를 매수하여 벵골의 태수 자리를 약속했다. 전투 개시와 함께 벵골군은 [8]미르 자파르의 배신으로 대혼란에 빠지면서 패배하였다. 결국 영국 동인도 회사는 캘커타를 점령했다.
플라시 전투 후 [3]시라지는 도주했으나 얼마 뒤 미르 자파르의 부하들에게 체포된 직후 처형되었다. [8]미르 자파르는 약속대로 벵골의 새 태수로 임명되었지만 영국인들의 간섭에 시달리다가 175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연합하여 영국을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하고 강제로 물러났다. 이리하여 영국은 벵골에서의 패권을 확고히 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삼아 인도 식민화 작업에 착수한다.
1758년 10월 29일 쿠달로르 해전에서 프랑스는 참패하여 재해권마저 영국이 완전 장악하게 되었고 [9]퐁디셰리등 프랑스의 주요 인도거점들이 고립된다.
결국 1761년 마지막 거점인 [9]퐁디셰리가 함락되면서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1] 7년 전쟁 : 1756년에서 1763년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일어난 전쟁
[2] 벵골(Bengal) : 방글라데시(동벵골)와 인도의 서벵골 주로 나뉘어 있는 지역을 말하며 서벵골은 힌두교, 동벵골은 이슬람을 많이 믿는다
[3] 시라지 웃 다울라(Siraj ud-Daulah) : 뱅골태수
[4]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1725~1774) : 인도의 식민화시키는 기초를 마련한 영국의 군인, 정치가, 귀족
[5] 캘커타(Kolkata) : 인도의 서벵골 주의 주도
[6] 무르시다바드(Murshidabad) : 인도 서벵골 주에 있는 구
[7] 후글리강(Hooghly River) : 갠지스강 지류. 갤커다는 후글리강에 접해 있다
[8] 미르 자파르(Mir Jafar, 1691~1765) : 시라즈 우드 다올라 휘하의 벵골군 사령관. 시라즈를 배신하고 영국의 승리이후 시라즈의 뒤를 이어 태수가 되었다
[9] 퐁디셰리(Puducherry) : 인도 동남부의 항구 도시
[10] 세포이(sepoy) : 영국 동인도 회사에 채용된 인도 현지 용병을 부르는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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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디언 전쟁은 17세기 초 유럽 식민자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이래 19세기 말까지 이어진 일련의 무력 충돌과 갈등을 통칭하는 역사적 명칭이다. 이 전쟁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던 원주민(인디언) 부족들과 유럽계 정착민들 그리고 후에 미국 연방정부 간의 영토 분쟁, 문화 충돌, 자원 경쟁, 조약 위반 등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초기 식민지 시기에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 부족들이 식민 전쟁에 참여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초기 충돌로는 킹 필립 전쟁(King Philip’s War, 1675~1678), 포하탄 전쟁(Powhatan Wars), 그리고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1763)이 있다. 이 시기 인디언들은 대체로 식민지 세력의 군사적 동맹이자 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영토 보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1776년에 독립한 신생 미국 정부는 서부 확장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원주민과의 충돌이 더욱 잦아졌다. 미국-인디언 전쟁의 핵심은 "서부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들의 땅을 몰수하고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전쟁으로는 북서부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년~1795), 테쿰세 전쟁(Tecumseh's War), 제1차~제3차 세미놀 전쟁(Seminole Wars), 블랙 호크 전쟁(Black Hawk War), 수족 전쟁(Sioux Wars), 치페와 전쟁(Chippewa War), 아파치 전쟁(Apache Wars), 그리고 제로니모 항쟁(Geronimo's resistance) 등이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 미국 정부는 원주민 부족들을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이를 거부한 부족들과의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1876년 리틀 빅혼 전투(Battle of the Little Bighorn)에서는 라코타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군을 전멸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미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식량 차단, 협상 파기 등으로 대부분의 부족이 항복하거나 멸족하였다.
1890년,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은 미국-인디언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에서 미군은 대규모 무장 해제 중이던 라코타 수우족을 공격하여 남녀노소 수백 명을 살해하였다. 운디드니 학살사건 이후 사실상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소규모의 전투가 가끔 벌어졌다.
이 전쟁의 결과 수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빼앗겼으며 미국 전역의 원주민 사회는 급격한 해체와 문화적 침탈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국-인디언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식민주의·제국주의·인종주의에 기초한 국가 건설과 정복의 역사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사회 내에서 원주민 문제와 정체성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유럽에서는 [4]7년 전쟁의 일부로 간주된다.
이 전쟁은 프랑스가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과 연합하여 하나의 편을 이루고 이에 맞서 영국과 그 식민지 군이 또 다른 편을 형성하여 벌인 충돌이었다. 명칭에서 "인디언"은 당시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던 북미 원주민들을 가리킨다.
프랑스는 원주민들과의 상호 이익에 기반한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전쟁 초반부터 원주민들과의 군사 동맹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에 반해 영국 식민지 개척민들은 북미 동부에서 점차 서부로 진출하면서 원주민들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침해하였다. 특히 오하이오 계곡 지역은 원주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생활 터전이었으나 영국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려 하자 원주민들은 강한 반감을 가졌다.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북미 대륙 내 영토 확장과 무역권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오하이오 계곡 지역은 프랑스와 영국 모두가 중대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으며 이 지역에서의 영토 분쟁이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자국령 캐나다와 루이지애나를 연결하는 교통로로 중시하였고 영국 식민지 개척민들은 그 땅을 농업과 정착에 이상적인 땅으로 간주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와 그 동맹 부족들이 군사적 우세를 점하였으며 일련의 전투에서 영국군을 패퇴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영국 본국은 대규모 병력과 자금을 북미 전선에 투입하였고 1759년 [1]퀘벡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결국 1763년 [2]파리 조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북미에서 대부분의 식민지를 상실하고 캐나다와 오하이오 계곡 지역을 영국에 할양하였다. 루이지애나는 미시시피강을 기준으로 동쪽 지역은 영국에 서쪽 지역은 스페인에 넘겨주었다.
스페인은 전쟁 말기에 프랑스 측을 지원하는 형태로 참전하였다. 스페인은 처음부터 이 전쟁에 직접 개입한 것은 아니었으나 유럽 대륙에서 7년 전쟁이 격화되면서 1762년에 프랑스와의 동맹에 따라 공식적으로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는 프랑스가 연합국으로서 스페인의 도움을 얻어 전세를 반전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스페인의 전쟁 참여는 북미보다는 카리브해와 플로리다 지역에서의 충돌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영국은 곧바로 스페인령 쿠바의 [3]하바나를 점령하고 또 다른 전선에서는 필리핀 마닐라까지 공격하였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상당한 군사적·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
스페인은 쿠바를 재획득하기 위해 플로리다를 넘겨주고 대가로 프랑스로부터 뉴올리언스를 포함한 루이지애나를 얻었다.
이로써 북미 대륙에서 영국의 식민지 제국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프랑스의 영향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이 전쟁으로 막대한 재정 부담을 지게 된 영국 정부는 이후 여러 세금을 식민지에 부과하였고 이는 미국 독립혁명의 간접적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전쟁 기간 동안 형성된 원주민과 식민지 주민 간의 갈등은 이후 미국 서부 개척 과정에서 이어지는 충돌의 시초가 되기도 하였다.
[1] 퀘벡 전투(Battle of the Plains of Abraham) : 1759년 9월 13일에 프랑스-인디언 전쟁 중 북미의 주도권을 결정짓는 핵심 전투로, 현재 캐나다 퀘벡시 인근의 아브라함 평원에서 벌어졌다.결과적으로 영국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는 곧 퀘벡 시의 함락과 함께 프랑스가 북미에서 패권을 상실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2] 파리 조약(Treaty of Paris) : 프랑스-인디언 전쟁과 7년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다자간 평화 조약으로 1763년 2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되었다 [3] 하바나(Havana) : 쿠바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로 카리브해 북서부에 위치한 섬의 서쪽 연안에 자리하고 있다. 1519년 스페인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전략적 항구이자 해상 요충지로서 스페인 식민 제국의 핵심 해양 기지로 기능하였다. 프랑스-인디언 전쟁말기에 영국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였으나 파리 조약(1763)에 따라 스페인에 반환되었다 [4] 7년 전쟁(1756년~1763년) : 유럽을 중심으로 벌어진 대규모 국제 분쟁으로 세계 최초의 "세계대전"이라 불릴 만큼 유럽, 북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여러 대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주요 교전국은 영국과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동맹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페인 등으로 구성된 반동맹이었다. 전쟁의 원인은 유럽 내 영토 분쟁과 패권 경쟁, 식민지 확장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오스트리아 [1]합스부르크가는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2]슐레지엔 지역을 되찾기 위해 [4]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으로 유럽의 거의 모든 열강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참여하면서 유럽뿐 아니라 식민지 지역인 북아메리카와 인도까지 확장된 세계대전 규모의 전쟁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전쟁을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도 한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팽창에 대항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확보하여 패권의 교두보를 삼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프로이센과 동맹관계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년~1748년)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는 [3]선제후국인 프로이센에게 패하면서 [2]슐레지엔 지역을 넘겨주었다.
오스트리아의 [5]마리아 테레지아는 빼앗긴 [2]슐레지엔 지역을 되찾기 위해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공격하기로 한다. [5]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전쟁이 벌어지면 프랑스가 참전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영국은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면 [8]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노버 [3]선제후국의 지원이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영국은 러시아 군대를 이용하여 [4]프로이센을 견제하는 동시에 하노버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러시아는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북부의 발트해 연안으로 진출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프로이센을 넘어서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하여 하노이 [3]선제후국를 지킨다는 조건하에 영국과 동맹을 맺는다.
영국과 프로이센이 동맹을 맺자 [5]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에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프랑스를 끌어안게 된다.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스웨덴에 연합을 결성한다. 프랑스의 부르봉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는 단순 적대관계를 넘어선 철천지 원수관계가 동맹을 맺은 것이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지가 된 셈이다. 스페인은 부르봉 왕조가 성립되면서 프랑스와 같은 왕조로 [8]동군연합으로 사실상 영구적인 동맹을 이루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영국동맹' 대 '프로이센-프랑스동맹' 구도가 '오스트리아-프랑스' 대 '프로이센-영국'로 바뀐것이다.
1756년 6월 2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자 위기감을 느낀 프로이센의 [6]프리드리히 2세는 예방차원으로 [10]작센 [3]선제후국을 침공하면서 7년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의 작센 기습침공으로 러시아의 여제 [7]옐리자베타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스웨덴도 프로이센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프로이센을 공격하면서 참전하였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1962년 [7]옐리자베타 여제가 갑자기 사망하여 뒤를 이어 [9]표드로 3세가 즉위하였다. [3]표드로 3세는 상호 조건없는 화친을 프로이센에 제안하여 프로이센의 [6]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탈한다. 스웨덴까지 이 전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한 재원손실로 국고가 고갈되어 가는 상태였으며, 프랑스는 유럽밖의 식민지전쟁에서 패배한 상태였다. 동맹국 러시아까지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7년 전쟁은 종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러시아는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의 소방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프로이센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2]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보했으며, 식민지 전쟁에서는 영국이 승리를 거두어 북아메리카의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던 현재의 퀘벡주와 온타리오주를 차지하였다. 인도에서도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어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7년 전쟁은 참전한 모든 국가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남겼으며 유럽은 전쟁 이전과 거의 바뀐 것이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명목상으로는 패전국이 됐지만 내부 결속, 군제 개혁등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프로이센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국토가 초토화되는등 막대한 전쟁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전 유럽의 열강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군사적 강대함을 알렸다
러시아는 유럽의 국제정치에 참여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영국은 인도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들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지나친 전비부담은 영국의 재정을 악화시켰다.
프랑스도 국가재정이 악화된 건 물론이고, 캐나다와 미시시피 강 동쪽 전체를 영국에게 빼앗기고 인도 역시 영국에게 넘겨주어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도 넘겨받지 못했다.
스페인은 북아메리카의 플로리다를 영국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얻으며 중남미 일대에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1]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있던 가문 중 하나 [2] 슐레지엔(Silesia) : 중세 유럽 최대 공업지대.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독일 제국 시기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폴란드의 남서부, 독일 작센 주의 일부, 체코 북동부 일부에 걸친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에 속해 있다 [3] 선제후 :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황제선거를 개최하여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황제를 선출할 선거권을 가진 신성로마제국 내의 영주 [4]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신성로마제국 동북족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1701년 왕국을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왕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1701년 1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를 수도 로 삼아 그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제국의 선언을 이끌었으며, 1차대전의 패전과 함께 1918년 11월 9일에 종말을 맞이하였다 [5]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군주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 재위기간(1745년 9월 13일~1765년 8월 18일) [6]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 등으로 불리게 된다 [7]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1709년~1762년) : 제6대 러시아 제국 여황제. 재위(1741년 12월 6일-1762년 1월 5일) [8]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 : 군주 혹은 그 배우자가 되어, 결혼 관계를 매개로 둘 이상의 국가들을 하나로 병합하지 않고 연합하여 주권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통치하는 것 [9] 표트르 3세(Peter III of Russia, 1728년 2월 21일 - 1762년 7월 17일) : 제7대 러시아 황제. 재위(1762년 1월 5일-1762년 7월 9일). 로마노프 왕조의 7번째 군주 [10] 작센 왕국(Kingdom of Saxony) : 아스카니아 가문(Haus Askania)의 작센-비텐베르크 공국(Herzogtum Sachsen-Wittenberg)이 1356년 금인칙서(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군주가 수여한 문서)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로 부터 선제후 작위를 부여받아 성립된 국가. 1422년 아스카이나 가문의 마지막 선제후가 후손없이 사망하자, 베틴 가문의 프리드리히 4세가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되었다. 1806년 제국이 해체된 후, 프리드리히 3세는 작센 선제후국을 작센왕국으로 승격시켰다. 작센왕국은 180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중부에 있던 왕국이다
로스바흐 전투는 1757년 11월 5일, 7년 전쟁(1756~1763) 중에 벌어진 중요한 전투로, 프로이센 왕국과 프랑스-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이 격돌한 전투이다. 전투는 독일의 로스바흐 마을 인근에서 벌어졌으며, 프로이센의 [1]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군대가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사례로 유명하다.
당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은 약 4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프로이센군은 약 2만 2천 명으로 크게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1]프리드리히 2세는 뛰어난 전략적 기동과 기습 전술을 통해 연합군의 허점을 노렸다.
전투의 서막은 연합군이 프로이센군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해 측면을 우회하려는 시도로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프로이센군이 정면 충돌을 피하고 퇴각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1]프리드리히 2세는 연합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기병과 포병을 빠르게 재배치하여 적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는 기습 전술을 구사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프랑스-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퇴각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짧은 시간 안에 전열이 붕괴되었다. 프로이센군은 단 90분 만에 전투를 끝내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는 약 500명에 불과했지만, 연합군은 약 10,000명의 병력을 잃고 대패했다. 또한 수많은 병사가 포로로 잡혔으며, 무기와 보급품이 대거 프로이센군의 손에 넘어갔다.
전투의 결과로 프로이센은 유럽에서 군사적 위상을 크게 높였으며, 프리드리히 2세는 천재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얻었다. 반면,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사기와 명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로스바흐 전투는 현대적 군사 전략과 기동전의 효율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이후 유럽 각국의 군사 전략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등으로 불리게 된다
[5]로이텐 전투는 7년 전쟁(1756~1763년)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벌어진 중요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1]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뛰어난 전술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4]슐레지엔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7년 전쟁이 한창이던 1757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러시아 등과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압박하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1]프리드리히 2세는 [2]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을 격파했지만, 동쪽에서 오스트리아군이 [4]슐레지엔 지역을 장악하고 중심지인 [6]브레슬라우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신속하게 군을 슐레지엔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오스트리아군은 [3]샤를 드 로렌이 지휘했으며, 병력은 약 66,000명에 달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약 36,000명으로 절반에 가까운 병력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뛰어난 전술을 활용하여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의 정면 공격을 예상하도록 유도한 뒤, 신속한 기동력을 통해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기습했다.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의 한쪽 측면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과 기병 돌격이 이어지면서 오스트리아군은 대열이 무너졌고 결국 패주했다.
프로이센군은 약 6,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22,000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히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슐레지엔 지역은 다시 프로이센이 지배하게 되었다.
로이텐 전투로 프리드리히 2세는 유럽 역사에서 최고의 전략가로 자리매김하게 했으며 프로이센의 군사적 위상을 크게 강화했다.
[1]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등으로 불리게 된다 [2] 로스바흐 전투(Battle of Rossbach) : 1757년 11월 5일, 7년 전쟁(1756~1763) 중에 벌어진 중요한 전투로, 프로이센 왕국과 프랑스-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이 격돌한 전투 [3] 샤를 드 로렌(Charles Alexander of Lorraine, 1712년 12월 12일 ~ 1780년 7월 4일) : 로렌공국 출신의 오스트리아 장군이자 군인이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 [4] 슐레지엔(Silesia) : 중세 유럽 최대 공업지대.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독일 제국 시기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폴란드의 남서부, 독일 작센 주의 일부, 체코 북동부 일부에 걸친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에 속해 있다 [5] 로이텐(Leuthen) : 현재 폴란드 슐레지엔 지방에 위치한 마을 [6] 브레슬라우(독일어 Breslau) : 폴란드 남서부에 있는 도시. 역사적으로 슐레지엔 지방의 중심 도시. 프로츠와프(폴란드어: Wrocła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