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사건기간 : 1792년 9월 20일, 조회수 : 427, 등록일 : 2022-07-16
프랑스 혁명 전쟁 초기 오스트리아-[4]프로이센 연합군에 계속 밀리던 프랑스 혁명군이 파리 근교 [1]발미에서 승리한 전투로서 프랑스 혁명군의 첫 승리였다.
[8]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인 [5]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이끄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7월 19일 프랑스로 진격하면서 "프랑스 국왕인 루이 16세의 통치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며 왕실에 위해를 가하면 파리를 괴멸시킬 것"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자 프랑스 민심은 격분하였으며 혁명을 붕괴시키려는 왕당파와 반혁명 세력의 음모가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8월 9일 과격한 혁명가들은 민중들은 봉기를 일으켜 왕궁을 습격하였고, 이에 프랑스 의회는 굴복하여 봉기를 주도한 혁명파는 정권을 장악했다. 왕권은 정지되었다.
8월 25일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2]롱위를 점령하고 9월 2일 [3]베르됭을 함락시켰다. 이후 수도인 파리를 노리는 상황었다. 이러한 패전소식에 격분한 파리 시민들은 9월 2일부터 9월 7일까지 엿새동안 감옥을 습격해 왕당파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중이던 죄수들을 즉결 재판의 형식으로 살해했다. 이른바 9월 대학살 사건이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과 전투에서 패배를 당한 프랑스 북부군의 [7]뒤무리에 장군은 [6]켈레르만 장군의 중앙군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군 3만 5천명과 [7]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는 [6]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의 원군을 얻어 프로이센군보다 많은 4만 7천명은 발미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8시간의 전투 끝에 프랑스군은 승리해 파리로 진격하려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프랑스군은 300명, 프로이센군은 184명의 사상자를 냈다.
병력손실 상으로는 대전투는 아니었지만 이 전투로 인하여 계속 밀리기만 했던 프랑스 혁명 정부는 위기를 벗어났다. 만약 이때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했다면 프랑스 대혁명은 무너졌을 것이다.
발미전투의 승리로 프랑스는 제1공화정이 수립되면서 국민공회가 개설되었다. 이어 1793년 1월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으며 공포 정치가 시작되었다.
[1] 발미(Valmy) : 프랑스 마른(Marne)주의 도시
[2] 롱위(Longwy) : 프랑스 북동부 로렌에 위치한 뫼르트에모젤주의 도시
[3] 베르됭(Verdun) : 프랑스 북부 그랑테스트 레지옹의 뫼즈주에 있는 소도시
[4]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독일 북부 지역에 위치한 왕국으로 1701년에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5]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Charles William Ferdinand, Duke of Brunswick, 1735년~1806년) :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공작 겸 프로이센 육군 원수
[6] 프랑수아 에티엔 크리스토프 켈레르만(François Étienne Christophe Kellermann, 1735년~1820년) :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발미 공작. 7년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을 모두 경험한 인물
[7] 샤를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Charles-François du Périer Dumouriez, 1739년~1823년) : 프랑스 혁명 전쟁 때의 프랑스 장군. 발미 전투에서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과 함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후 프랑스 공화국에 반기를 들어 쿠데타를 시도하려다 실패하고 외국으로 망명했다. 나폴레옹 황제의 치세에는 왕당파가 되었다
[8] 브라운슈바이크 공국(Duchy of Brunswick) : 13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신성 로마 제국과 독일 제국을 구성했던 공국이었으며 수도는 브라운슈바이크였다. 현재 거의 대부분의 지역은 독일 니더작센주에 속하고, 일부는 작센안할트주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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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디언 전쟁은 17세기 초 유럽 식민자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이래 19세기 말까지 이어진 일련의 무력 충돌과 갈등을 통칭하는 역사적 명칭이다. 이 전쟁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던 원주민(인디언) 부족들과 유럽계 정착민들 그리고 후에 미국 연방정부 간의 영토 분쟁, 문화 충돌, 자원 경쟁, 조약 위반 등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초기 식민지 시기에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 부족들이 식민 전쟁에 참여하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초기 충돌로는 킹 필립 전쟁(King Philip’s War, 1675~1678), 포하탄 전쟁(Powhatan Wars), 그리고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1763)이 있다. 이 시기 인디언들은 대체로 식민지 세력의 군사적 동맹이자 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영토 보존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1776년에 독립한 신생 미국 정부는 서부 확장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면서 원주민과의 충돌이 더욱 잦아졌다. 미국-인디언 전쟁의 핵심은 "서부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원주민들의 땅을 몰수하고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전쟁으로는 북서부 인디언 전쟁(Northwest Indian War, 1785년~1795), 테쿰세 전쟁(Tecumseh's War), 제1차~제3차 세미놀 전쟁(Seminole Wars), 블랙 호크 전쟁(Black Hawk War), 수족 전쟁(Sioux Wars), 치페와 전쟁(Chippewa War), 아파치 전쟁(Apache Wars), 그리고 제로니모 항쟁(Geronimo's resistance) 등이 있다.
특히 19세기 후반 미국 정부는 원주민 부족들을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이를 거부한 부족들과의 충돌은 더욱 격렬해졌다. 1876년 리틀 빅혼 전투(Battle of the Little Bighorn)에서는 라코타 수우족과 샤이엔족이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미군을 전멸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미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식량 차단, 협상 파기 등으로 대부분의 부족이 항복하거나 멸족하였다.
1890년, 사우스다코타주 운디드니(Wounded Knee)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은 미국-인디언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사건에서 미군은 대규모 무장 해제 중이던 라코타 수우족을 공격하여 남녀노소 수백 명을 살해하였다. 운디드니 학살사건 이후 사실상 전쟁은 막을 내렸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소규모의 전투가 가끔 벌어졌다.
이 전쟁의 결과 수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빼앗겼으며 미국 전역의 원주민 사회는 급격한 해체와 문화적 침탈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국-인디언 전쟁은 단순한 무력 충돌을 넘어 식민주의·제국주의·인종주의에 기초한 국가 건설과 정복의 역사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사회 내에서 원주민 문제와 정체성 논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치세 말기부터 시작된 국가 재정 악화는 루이 15세에서도 호전되지 못했고 [3]루이 16세가 즉위할 즈음에는 다른 나라로부터 빚을 내야 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을 견제하고 식민지 개척경쟁 차원에서 미국 독립 혁명을 지원했으나, 프랑스가 얻은 이익은 없었고 재정만 더욱 악화되었다.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1]앙시앵 레짐하에서 18세기에 나타난 일반적 특징처럼 부르주아 계급이 부상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독립 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되어 있었다.
프랑스는 만성화된 왕실 재정위기를 해결하고자 루이 16세의 재정총감 칼론은 1787년 2월, [4]명사회를 열어 귀족, 성직자 등의 특권 계층에게 임시로 과세하는 것을 재정 위기의 타개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면세혜택을 받는 특권 계층인 귀족, 성직자는 크게 반발하며 과세를 강력히 거부했다. 재정개혁에 실패한 칼론은 1787년 4월 8일에 해임되었다.
1789년 후임 재무총감인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는 삼부회를 제안했다. 그동안 세금이 면제되어온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에 해당하는 귀족에게 세금을 추징하기 위해 1789년 5월 5일, 175년만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신분별 의회인 [2]삼부회가 개최되었다.
루이 16세는 한 신분당 같은 의석수였던 삼부회에서 평민대표의 요구를 수용하여 제3신분의 수를 두 배로 승인하였다. 따라서 삼부회는 제1신분인 성직자대표 294인, 제2신분인 귀족대표 270인, 그리고 제3신분인 평민대표 578인으로 구성되었다.
삼부회는 초반부터 제1,2신분인 성직자, 귀족대표와 제3신분인 평민대표는 표결 방식 채택을 두고 의견이 충돌하였다. 성직자, 귀족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주장한 데 비해 평민대표는 머릿수 표결 방식을 주장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결국 회의 장소가 폐쇄되자 평민대표는 왕궁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6월 17일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없이 징수할 수 없으며 해산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테니스 코트 선언을 하였다. 이 때 성립된 국민의회는 제1신분과 제2신분의 일부가 참가하게 되면서 대표성을 가지게 되었다.
루이 16세의 왕당파는 무력으로 '국민의회'를 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파리 민중은 격분하였다.ㅍ7월 13일 파리 민중은 스스로 자치를 선포하고 '국민방위대'를 조직했다. 그 다음날인 7월 14일 무기를 조달을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파리의 요새로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 있었다. 바스티유 수비대와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으며 결국 사상자가 나오면서 민중에 의해 바스티유 감옥이 장악되었다. 이 혁명운동은 농촌까지 확산되어 농민들도 동참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국민의회는 8월 4일 봉건제 폐지선언하고 26일에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으로 혁명의 이념을 세워 민중의 지지와 혁명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의 '봉건제 폐지 선언'과 '인권선언'에 대한 재가를 계속 거부하였으나 1789년 10월 여성들이 주동이 되어 10월 폭동을 일으켰다. 결국 '봉건제 폐지 선언'과 '인권선언'에 대한 재가했다. 11월에는 교회 토지를 국유화하는등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의회는 1791년 새로운 프랑스의 헌법을 제정하고 해산되었다.
이후 프랑스 제1공화정인 국민공회(1792년~1795년), 프랑스 제1공화국 총재정부(1795 ~ 1799)를 거쳐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프랑스 제1공화국의 통령정부(1799 ~ 1804)가 수립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종료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1]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린 후 공화정, 제정, 왕정으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불안한 정치상황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역사적으로 정치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지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다.
프랑스는 10년이라는 짧은 혁명기간 동안에 무수한 체제변화를 겪었다. 절대왕정이 입헌군주제로 바뀌고 다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공화정 안에서도 처음에는 비교적 온건한 자유주의의 특징을 보이다가 급진적인 인민민주주의로 탈바꿈하고 다시 부르주아지 주도의 공화정이 들어섰는가 하면, 그 속에서 공산주의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다가 끝내는 쿠데타로 제정이 등장하는 엄청난 격변의 과정을 거쳤다.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인민주권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치적으로 발전시켜 나갔고 전 유럽에 그 이상을 전파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여기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근대 유럽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 1789년 프랑스 혁명 전의 절대 군주 정치체제를 통칭하는 말. 프랑스어로 ‘옛 체제’를 뜻한다.현재는 프랑스 혁명 의미보다 낡은 기존의 제도나 무능력했던 이전 정권을 일컫는 단어로도 사용한다 [2] 삼부회(Estates General) : 국왕의 주도로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의 신분별 대표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 사안에 관해 토론하며 협력·자문하는 의회이다. 1302년 4월 10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분쟁시에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시킨 것이 시초가 되고 있다. 실제로 1614년 이래 거의 소집되지 않다가 1789년 루이 16세에 의해 소집되었다. 그러나 신분별 대표 간의 표결방식을 두고 대립하여 결렬되고 제3신분은 삼부회에서 벗어나 국민의회를 조직했다 [3] 루이 16세(Louis XVI, 1754년 8월 23일~1793년 1월 21일) :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4] 명사회 : 국왕의 자문에 의해 중요 의제를 논의하는 자리로, 발루아 왕조에서 부르봉 왕조까지 프랑스 왕국에 존재한 자문 기구이다. 명사회 위원은 귀족과 로마 가톨릭교회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되었다. 마지막으로 명사회가 개최되었던 시기는 루이 16세에 의해 소집었던 1787년 및 1788년이다. 이 두차례의 명사회에서 논의된 주요 의제는 극도로 악화된 경제난 회복과 세제개혁이었다.
[참고문헌] - 윤혜영, 이혜령 외 7인 공저 『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pp. 45-66, 203-215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https://www.kdemo.or.kr/) : 프랑스 시민혁명과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 - 위키백과, 나무위키
1791년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혁명의 결과로 식민지의 아프리카인 노예들이 해방되었으며, 아프리카인들이 지배하는 최초의 공화국인 아이티가 세워졌다.
스페인은 히스파니올라 섬의 생도맹그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1697년 이 섬의 서쪽을 프랑스에 내주게 된다.
생도맹그는 전 세계 설탕의 40%를 아이티 원주민과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생산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과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내용을 기초로한 인권선언은 생도맹그의 식민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생도맹그 시민들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환영하였다. 흑인노예들과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열)들은 '자유, 평등, 우애'의 원칙을 생도맹그에도 적용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식민지 총독이 이를 거부하자 반발하는 물라토들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이는 아이티 혁명에 불을 지폈다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산토도밍고를 공격하여 그곳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1801년 생도맹그에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혁명군은 1803년 마지막 전투인 베르티에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1804년 1월 1일 아이티 공화국을 세웠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어 큰 타격을 입었으며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재식민화 계획을 포기하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게 되었다.
* 생도맹그(Saint-Domingue) : 1697년부터 1804년까지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1/3을 차지했던 프랑스의 식민지. 현재의 아이티
* 히스파니올라 섬(Hispaniola) : 카리브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서쪽 1/3은 아이티의 영토이고, 동쪽 2/3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영토이다, 히스파니올라는 '작은 스페인'을 뜻한다
*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년~1803년) : 아이티의 혁명가, 독립 투사이다. 아이티의 독립의 아버지
* 물라토(mulatto) : 백인과 흑인의 혼혈
*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10]프로이센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하자 민중들은 패전의 원인이 국왕에게 있으며 왕비 [6]마리 아투아네트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2]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인 [11]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프랑스로 진격하면서 프랑스 국왕을 옹호하는 선언문으로 프랑스 민중은 분노에 휩싸이면서 혁명을 붕괴시키려는 왕당파와 반혁명 세력의 음모가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1792년 8월 9일, 프랑스 민중의 대표를 자처하는 의원들이 파리 시청을 점령하고 파리 시민들에게 봉기를 촉구하였디. 다음날 8월 10일 봉기가 시작되면서 수만의 파리 시민들은 루이 16세가 머물고 있는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갔다. 루이 16세는 [1]튈르리 궁을 탈출해 의회에 피신하였다. 시민들은 의회로 몰려가 국왕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의회는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루이 16세를 시민들에게 넘겨준다. 왕권은 정지되고 [5]루이 16세와 [6]마리 앙투아네트는 유폐된다.
이런 가운데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3]롱위를 점령하고 9월 2일 [4]베르됭을 함락시켰다. 이후 수도인 파리를 노리는 상황었다. 이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파리 시민들은 왕당파와 반력명 세력의 음모가 있을 거라는 소문도 더 커지게 된다.
흥분한 파리 시민들은 9월 2일부터 9월 7일까지 감옥을 습격해 왕당파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중이던 죄수들을 즉결 재판의 형식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약 1,200여명의 수감자가 살해되었다.
이 일련의 사태동안 왕비인 [6]마리 앙투아네트의 측근이었던 랑발 공작부인이 살해되었는데 파리 시민들은 공작부인의 머리를 창끝에 얹어 왕비에게 보여주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충격을 받아 실신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들의 배후에는 [7]파리코뮌이 있었다. [9]장폴 마라와 [8]조르주 당통을 비롯한 코뮌 정부의 각료들과 지도자들은 반혁명 세력의 숙청을 방조하면서 미리 작성해둔 명부를 통해 감옥에서의 즉결 처분에 일조하였다. 코뮌 지도자들은 프랑스 각처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반혁명세력들의 숙청을 권고하였고 이는 대학살이 프랑스 전역으로 퍼지게 하였다.
9월 대학살은 프랑스 혁명의 과격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며 이후 국민공회 공포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1] 튈르리 궁(Palais des Tuileries) : 파리에 1871년까지 존재하던 궁전.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샹젤리제 사이에 있던 옛 왕궁
[2] 브라운슈바이크 공국(Duchy of Brunswick) : 13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신성 로마 제국과 독일 제국을 구성했던 공국이었으며 수도는 브라운슈바이크였다. 현재 거의 대부분의 지역은 독일 니더작센주에 속하고, 일부는 작센안할트주에 속한다
[3] 롱위(Longwy) : 프랑스 북동부 로렌에 위치한 뫼르트에모젤주의 도시
[4] 베르됭(Verdun) : 프랑스 북부 그랑테스트 레지옹의 뫼즈주에 있는 소도시
[5] 루이 16세(Louis XVI, 1754년 8월 23일~1793년 1월 21일) :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6]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년 11월 2일~1793년 10월 16일) :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재위, 1774년 5월 10일~1791년 10월 1일)
[7] 파리 코뮌(Paris Commune, 1871년 3월 18일 ~ 5월 28일) : 파리 시민들이 세운 사회주의 자치 정부
[8] 조르주 자크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년~1794년) :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 로베스피에르, 장폴 마라와 함께 '프랑스 대혁명의 3거장'라고 불린다
[9] 장폴 마라(Jean-Paul Marat, 1743년~1793년) :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인으로 프랑스 혁명에서 급진적인 저널리스트이자 정치가. 자코뱅 클럽의 산악파에 참가하여 공포 정치를 추진했다
[10]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독일 북부 지역에 위치한 왕국으로 1701년에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11]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Charles William Ferdinand, Duke of Brunswick, 1735년~1806년) :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공작 겸 프로이센 육군 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