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국사건기간 : 1902년 1월 30일, 조회수 : 412, 등록일 : 2022-07-02
1902년 1월 30일 영국 런던에 있는 [1]랜즈다운 후작 저택에서 [2]헨리 페티피츠모리스 영국 외무장관과 [3]하야시 다다스 영국 일본공사가 조인하면서 제1차 영일 동맹이 체결되었다. 영일동맹은 동양의 작은 나라 일본이 외교적 지위를 강화시켜준 커다란 성과였으며, 이는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제사회의 중추국가로 부상했다.
영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많은 시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대단히 우려하였다. 영국은 청일정쟁과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온 자국이익 보호를 위해 일본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고 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나 또 다른 세력인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은 대외 정책의 분열까지 초래했다. 러시아 주도하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내주어야 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면 조선의 지배력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또한 독일은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을 조장하여 러시아세력을 극동지역에 묶어두어 영국이 노불동맹 세력과 가까워지는 것을 봉쇄하는 것이 최상의 상황이란 것을 인식하고 영일동맹을 적극적으로 중재하였다.
이러한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영국과 일본은 동맹을 맺었으며 협약문은 전문 6개조로 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일 양국은 한(韓)·청(淸) 양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영국은 청에, 일본은 한국에 각각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으므로, 제3국으로부터 그 이익이 침해될 때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2. 영·일 양국 중 한 나라가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3국과 개전할 때는 동맹국은 중립을 지킨다. 3. 위의 경우에서 제3국 혹은 여러 나라들이 일국에 대해 교전할 때는 동맹국은 참전하여 공동 작전을 펴고 강화도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한다. 4. 본 협약의 유효 기간은 5년으로 한다.
영일 동맹의 결과 영국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러일전쟁을 시작하면서 만주 진출의 길목에 위치한 조선에서 안정적인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 한일의정서를 강요했고,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와 만주로부터 러시아 세력을 제거하였으며, 한반도에 독자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위키백과,나무위키
[1] 랜즈다운 후작(Marquess of Lansdowne) : 잉글랜드의 귀족. 1784년이후 현재 9대인 찰스 페티피즈모리스가 소유하고 있다 [2] 헨리 찰스 키스 페티피츠모리스(Henry Charles Keith Petty-Fitzmaurice, 1845년~1927년) : 제5대 랜즈다운 후작. 영국의 정치인. 캐나다의 총독, 인도 부왕 겸 총독, 영국의 외무장관 등을 지냈다. [3] 하야시 다다스(1850년~1913년) : 일본 에도 막부의 막신이었으며 메이지 시대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런던에서 1차 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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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시행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개혁이다.
광무개혁은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 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부분적으로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려 하였다.
대한제국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자주성을 뒷받침하기 이해 국방력 강화와 재정 개혁,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먼저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고, 서울의 중앙군과 지방의 지방군을 대폭 증강하며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다.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함인 양무호를 구입하였다. 양무호는 매우 빈약했으며 이마저도 러일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겨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1896년 1월 11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폐지되고 대한제국이 건국 후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9년에 [1]양지아문을 설치하고 1899년부터 1903년까지 일부 지역에서 토지조사사업과 [2]지계발급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토지를 법률의 보호 아래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는 토지거래 질서가 확립 되었으며, 국가 재정을 개선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갑오개혁 때 23부로 개편한 행정을 아관파천 이후 13도로 재개편하였다,
적극적으로 추진된 분야는 상공업 진흥책이다. 정부 스스로 제조공장을 설립했으며, 민간의 제조회사 설립을 지원하여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했으며, 공업전습소 등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황실에서는 방직공장, 유리공장, 제지공장의 설립을 시도했고, 일반 민간인의 공장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지만 황실이 직영하는 업종 이외의 것은 쉽게 허가하였다.
정부는 근대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근대적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의학교를 설립하여 국민들의 위생과 보건에 노력했으며 중학교를 설립하여 중등교육의 근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한성도시개조상업을 통해 도로와 하수도를 정비하고 교통, 통신, 전기, 전차 등의 근대 시설을 도입하여 산업발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시기인 1899년에 전차개통과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그 밖에 도량형 제도와 호적제 실시, 순회 재판소 설치, 종합병원인 제중원(濟衆院),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등이 설립되었다.
광무개혁은 이처럼 전제군주제의 확립을 통해 근대 주권국가를 지향했고, 짧은 기간에 국방, 산업, 교육, 기술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과 함께 대한제국 정부의 개혁 사업은 중단되었다.
광무개혁은 황제권 강화라는 보수적인 색채와 지계발급, 상공업 진흥, 기술학교 설립, 교통.통신의 인프라 개선등 개혁적이고 새로운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갑신벙변, 갑오개혁, 을미개혁 같은 개혁들에 비해 자주적으로 추진했던 개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보수적인 인물들이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을 들어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1] 양지아문(量地衙門) : 1898년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
[2] 지계 : 토지 소유권 증명 문서
필리핀은 1565년부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아왔다. 미 해군이 마닐라를 접수할 당시에 필리핀에는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896년 8월에 시작된 혁명은 미군이 스페인군을 몰아낸 1898년 8월까지 전개되었다.
필리핀의 독립운동가인 [1]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7년 필리핀을 지배해 온 스페인에 맞서 독립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홍콩으로 망명하였으나 미국-스페인 전쟁을 기회로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1898년에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5월 19일 스페인과 무장 투쟁 재개를 선언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스페인군에 대항전을 전개하였다. 5월 24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고, 6월 12일에는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했다. 7월 15일에는 [2]아폴리나리오 마비니를 수상으로 한 내각이 성립되었다. 필리핀군은 미군의 마닐라 입성을 지원하며 스페인군울 몰아냈다.
[1]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이 필리핀을 독립시켜 줄 것이라 믿었지만 마닐라에 입성한 미국은 필리핀 식민지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898년 8월 13일 미군은 마닐라에 입성하였고 다음날 인 8월 14일에 마닐라에 필리핀 제도 미국군정부를 설립하였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1898년 12월 10일에 스페인과 파리에서 평화 조약에서 필리핀의 지배권을 양도받았다.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필리핀인들은 미국의 배반에 분노하였으며, 미국의 행위를 침략이라고 규탄했다. 1899년 1월 1일에 아기날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월 21일 필리핀 제1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1899년 2월 4일, [3]산후안 델 몬테 다리에서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 들어선 필리핀 병사와 첫 충돌이 발생하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필리핀군은 초기에는 전면전을 펼쳤으나 군사력과 무기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군은 1899년 10월 산속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으로 항전을 이어나갔다. 필리핀군은 미국군을 상대로 산악과 정글 지형을 활용해 저항했으며, 미군은 이에 대응하여 필리핀 민간인들을 집단 거주지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의 전략을 펼쳤다.
미국은 1900년 12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무자비한 학살에 기근과 질병까지 겹쳐 20만명이 넘는 필리핀인이 사망했다.
1901년 3월 23일 [4]프레더릭 펀스튼 장군이 이끄는 미군의 작전으로 [1]아기날도는 미군에게 생포되면서 필리핀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약화되었다. 4월 19일 대부분의 필리핀인들은 항복했고, 1902년 7월 2일 잔여 병력까지 진압된 이후 전쟁 종결되면서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이후 필리핀은 미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모로족이 끝까지 미국의 지배에 반발하여 [5]모로전쟁이 이어졌다. 필리핀 내 독립운동은 계속 확산되었으며, 결국 1946년 필리핀은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필리핀-미국 전쟁은 단순한 식민 전쟁이 아니라, 자주독립을 향한 필리핀인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필리핀은 강대국의 지배 속에서도 독립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는 훗날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 1869년~1964년)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재임 1899년 1월 23일~1901년 3월 23일). 필리핀의 국부중 한 사람이자 필리핀 건국의 영웅. 필리핀 화폐 5페소 도완되었다 [2] 아폴리나리오 마비니(Apolinario Mabini, 1864년~1903년) :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필리핀의 현대 헌법의 초안자이자 작성자. 필리핀 초대수장. 필리핀의 국부중 한 사람. 필리핀 화폐 1페소 지폐,10페소 도안되었다 [3] 산후안 델 몬테(San Juan del Monte) :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북동쪽 지역의 도시 [4] 프레더릭 펀스턴(Frederick Funston, 1865년~1917년) : 미국의 군인으로 미국-스페인 전쟁과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활약을 하였다. 미국-필리핀 전쟁의 작전으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5] 모로전쟁(1902년 5월 3일~1913년 6월 15일) :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 미국과 현지 무슬림 모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모로 전쟁은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 미국과 현지 무슬림 [1]모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2]필리핀-미국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이 필리핀 전역을 장악하려 하면서 발생한 저항운동의 일환이었다. [1]모로족은 오랜 기간 스페인의 지배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통치 시도에도 강한 반발을 보이며 무장 저항을 지속했다.
1898년,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필리핀 전역에서 미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에 따라 [2]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북부 루손 지역과 비사야스를 점령한 후에도 남부 지역의 모로족은 독립을 유지하며 미국의 지배를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모로족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모로족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며 미군에 저항했다. 미국은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모로족은 외세의 지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점점 더 강경한 군사 작전을 펼쳤고, 1906년에는 유명한 [3]바굼바얀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의 거점을 공격하여 6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필리핀 평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했다.
이후에도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었으나 1913년에 벌어진 [4]버드 바그삭 전투가 사실상 모로족의 마지막 대규모 저항이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 전사 500명 이상을 전멸시키며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미국은 필리핀 전역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지만 모로족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모로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필리핀 남부를 강제 통치하며 모로족의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계를 해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기독교화와 서구식 행정 제도를 도입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오히려 모로족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모로족의 독립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필리핀이 1946년 독립한 이후에도 남부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분쟁이 이어졌다.
결국 모로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필리핀 남부의 자치권과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모로족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인 미국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 전쟁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여전히 모로족 분리주의 운동과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모로 전쟁은 필리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자,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 모로족(Moro People) :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술루 군도, 팔라완 등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 민족이다. 필리핀 전체 인구의 약 5~10%를 차지하며 말레이계 혈통을 가진 이슬람 공동체 [2] 필리핀-미국 전쟁(1899년 2월 4일~1902년 7월 4일) :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의 새로운 식민 지배에 저항하면서 발생된 전쟁 [3] 바굼바얀 전투(Battle of Bud Dajo) : 1906년 3월 5일부터 3월 7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다호(Bud Dajo) 화산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 이 전투는 미국 식민 통치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었다. [4] 버드 바그삭 전투(Battle of Bud Bagsak) : 1913년 6월 11일부터 6월 15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바그삭(Bud Bagsak) 산 정상에서 발생한 전투로, 미국군과 모로족 간의 마지막 대규모 충돌이었다. 모로족은 거의 전멸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