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정책
미국
사건기간 : 1933년 ~ 1938년, 조회수 : 280, 등록일 : 2020-02-26
뉴 딜(New Deal)은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경제 구조와 관행을 개혁해, 대공황으로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이 1933년~1936년에 추진하기 시작한 경제 정책이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경제 불황이 미국 전역으로 퍼지고, 당시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필사적인 방지 대책에도 물가는 폭락하여 GNP를 1932년 당시 1929년의 56%로 떨어뜨리고 1,300만명의 실업자를 양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과 대통령 선거 시기가 도래되고, 이때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루스벨트는 대선의 최대 이슈인 대공황 극복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라 불리는 각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일종의 정책 자문단을 만드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기회와 부의 불균형, 경제적 불황으로부터 국민들을 구제하겠다는, 즉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신정책)'을 약속한다.
당선된 루스벨트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브레인 트러스트의 자문을 중심으로 구상된 정책들을 내놓게 되는데 이것이 뉴딜 정책의 시작이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경제 불황이 미국 전역으로 퍼지고, 당시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필사적인 방지 대책에도 물가는 폭락하여 GNP를 1932년 당시 1929년의 56%로 떨어뜨리고 1,300만명의 실업자를 양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상황과 대통령 선거 시기가 도래되고, 이때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는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루스벨트는 대선의 최대 이슈인 대공황 극복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라 불리는 각계의 전문가로 구성된 일종의 정책 자문단을 만드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기회와 부의 불균형, 경제적 불황으로부터 국민들을 구제하겠다는, 즉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신정책)'을 약속한다.
당선된 루스벨트는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브레인 트러스트의 자문을 중심으로 구상된 정책들을 내놓게 되는데 이것이 뉴딜 정책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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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제1차 국공내전은 1927년 4월 12일 [1]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 내전의 발단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1924년에 군벌 타도를 목표로 제1차 국공합작을 결성했으나, 이념적 갈등과 권력 다툼으로 인해 협력이 붕괴된 데 있다. 특히 국민당은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위협으로 간주하며 제거하려 했고,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를 기반으로 독립적 세력을 키우려 하면서 충돌이 심화되었다.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은 공산당원들을 대규모로 숙청하며 본격적인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내전 초기, 국민당은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쳐 공산당 세력을 도시와 주요 지역에서 축소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에 공산당은 도시에서의 저항을 포기하고 농촌으로 후퇴해 [4]홍군을 조직하고 게릴라 전술을 통해 저항했다.
국민당은 공산당 근거지를 파괴하기 위한 다섯 차례의 공세를 벌였으며, 특히 1933~1934년의 제5차 토벌 작전은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약 9,000km에 달하는 [3]대장정을 감행하며 국민당의 포위망을 벗어나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초래했지만, 공산당 내부에서 [2]마오쩌둥의 지도력이 부각되었고 당의 조직이 재정비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제2차 국공합작을 체결하며 내전은 종결되었다.
제1차 국공내전은 공산당에게는 농촌 기반을 강화하고[4] 홍군의 전술과 조직력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시기였으며, 이는 이후 제2차 국공내전에서의 승리로 이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국민당은 일시적으로 공산당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전쟁으로 인한 장기적인 내부 분열과 공산당의 생존 전략은 국민당의 궁극적인 패배를 예고하는 요인이 되었다.
[1]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2]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중앙위원회 주석(임기, 1945년 6월 19일~1976년 9월 9일). 일본 패망 이후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 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3] 대장정(大長征) : 1934년 10월, 국민혁명군의 제5차 초공작전을 견디지 못한 중국공산당이 기존의 근거지였던 중국 동남부의 장시성을 떠나 약 1년에 걸쳐 중국 서북부 산시성으로 근거지를 이동한 사건. 10만에 육박했던 출발 인원 중 산시성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인원은 6,000명에 불과했다
[4] 홍군 :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 또는 단순히 홍군(紅軍)은 1927-1946 사이의 중국공산당의 무장조직다. 1927년 8월 1일 중국공농혁명군(中國工農革命軍)을 시작으로, 1928년 5월 25일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으로 개칭하였다. 제2차 국공합작(1937.9)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으로 개편되었다. 일본패망 이후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전 초기, 국민당은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쳐 공산당 세력을 도시와 주요 지역에서 축소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에 공산당은 도시에서의 저항을 포기하고 농촌으로 후퇴해 [4]홍군을 조직하고 게릴라 전술을 통해 저항했다.
국민당은 공산당 근거지를 파괴하기 위한 다섯 차례의 공세를 벌였으며, 특히 1933~1934년의 제5차 토벌 작전은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약 9,000km에 달하는 [3]대장정을 감행하며 국민당의 포위망을 벗어나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초래했지만, 공산당 내부에서 [2]마오쩌둥의 지도력이 부각되었고 당의 조직이 재정비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제2차 국공합작을 체결하며 내전은 종결되었다.
제1차 국공내전은 공산당에게는 농촌 기반을 강화하고[4] 홍군의 전술과 조직력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시기였으며, 이는 이후 제2차 국공내전에서의 승리로 이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국민당은 일시적으로 공산당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전쟁으로 인한 장기적인 내부 분열과 공산당의 생존 전략은 국민당의 궁극적인 패배를 예고하는 요인이 되었다.
[1]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2]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중앙위원회 주석(임기, 1945년 6월 19일~1976년 9월 9일). 일본 패망 이후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 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3] 대장정(大長征) : 1934년 10월, 국민혁명군의 제5차 초공작전을 견디지 못한 중국공산당이 기존의 근거지였던 중국 동남부의 장시성을 떠나 약 1년에 걸쳐 중국 서북부 산시성으로 근거지를 이동한 사건. 10만에 육박했던 출발 인원 중 산시성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인원은 6,000명에 불과했다
[4] 홍군 :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 또는 단순히 홍군(紅軍)은 1927-1946 사이의 중국공산당의 무장조직다. 1927년 8월 1일 중국공농혁명군(中國工農革命軍)을 시작으로, 1928년 5월 25일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으로 개칭하였다. 제2차 국공합작(1937.9)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으로 개편되었다. 일본패망 이후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공항(Depression)은 높은 실업률, 임금삭감, 물가하락, 기업 활동의 위축을 동반하는 대규모 경제 공황을 뜻하며 일반적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공황을 말한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전세계 경제 침체 현상으로 금융 시장의 대혼란과 대규모 실직 사태가 일어나 당시 서구 자본주의 사회 체계를 뒤흔들어 버렸고 미국은 1929년 10월 24일(검은 목요일)월스트리트의 주가가 급작스럽게 폭락하면서 경기침체의 시작을 알렸다.
대공황의 영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전세계 경제 침체 현상으로 금융 시장의 대혼란과 대규모 실직 사태가 일어나 당시 서구 자본주의 사회 체계를 뒤흔들어 버렸고 미국은 1929년 10월 24일(검은 목요일)월스트리트의 주가가 급작스럽게 폭락하면서 경기침체의 시작을 알렸다.
대공황의 영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31년 총선에서 공화파는 대승을 거두었고 이에 알폰소 13세가 퇴위하여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스페인은 제2공화국 체제가 된다. 이후 1936년 2월 총선 결과 공화파내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두면서 토지 개혁등 개혁정책을 시행하자 자본가.카톨릭 교회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마침내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란시스꼬 프랑꼬 장군이 스페인 제2공화국의 공화파에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다.
공화파는 쿠데타군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이질적인 집단의 혼합체로서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전투력을 보유하지 않았다.
스페인 공화국 정부는 1939년 3월 28일을 기점으로 마드리드, 발렌시아가 점령당하고 바르셀로나까지 쿠데타군의 무저항 입성되자 4월1일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은 전 지역이 황폐화되었다. 이후 스페인의 총통이 된 프란시스꼬 프랑꼬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일인독재정치를 계속하였으며 조직적인 숙청행위가 행해졌다.
1975년에 부르봉 왕조가 복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프란시스꼬 프랑꼬(Francisco Franco, 1892년~1975년) : 스페인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스페인 총통(국가원수)을 역임했으며 독재자이다.
* 부르봉(Bourbon)왕가 : 1589년부터 프랑스 등 유럽 일부 국가를 통치했고 일부는 현재도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왕조. 스페인에서는 1701년부터 통치하고 있었으며 스페인의 공화정으로 인하여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망명하였다(알폰스 13세). 1975년 알폰스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로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마침내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란시스꼬 프랑꼬 장군이 스페인 제2공화국의 공화파에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다.
공화파는 쿠데타군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 이질적인 집단의 혼합체로서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전투력을 보유하지 않았다.
스페인 공화국 정부는 1939년 3월 28일을 기점으로 마드리드, 발렌시아가 점령당하고 바르셀로나까지 쿠데타군의 무저항 입성되자 4월1일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은 전 지역이 황폐화되었다. 이후 스페인의 총통이 된 프란시스꼬 프랑꼬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일인독재정치를 계속하였으며 조직적인 숙청행위가 행해졌다.
1975년에 부르봉 왕조가 복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프란시스꼬 프랑꼬(Francisco Franco, 1892년~1975년) : 스페인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스페인 총통(국가원수)을 역임했으며 독재자이다.
* 부르봉(Bourbon)왕가 : 1589년부터 프랑스 등 유럽 일부 국가를 통치했고 일부는 현재도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왕조. 스페인에서는 1701년부터 통치하고 있었으며 스페인의 공화정으로 인하여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망명하였다(알폰스 13세). 1975년 알폰스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로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1]동북군을 물리치고 만주지역을 [2]관동군 휘하에 두게 된다. [3]장쉐량이 이끄는 20만 동북군이 관동군에 패배한 것이다.
국민당 [4]장제스가 중국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고 동북지방을 일본에 내어주는 동안 중국내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총을 겨누지 말고 합심하여 일본과 싸우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1936년 12월, 대일항쟁을 요구하는 동북군의 [3]장쉐량은 계속해서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는 [4]장제스를 [5]시안에서 납치하여 연금하였다. 일련의 하극상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장쉐량은 아래와 같이 8개 항목의 조건을 장제스에게 요구했다.
1. 난징 정부를 개편하여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공동으로 구국의 책임을 진다.
2. 일체의 내전을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한다.
3. 상하이에서 체포된 애국지도자를 즉시 석방한다.
4. 전국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한다.
5. 인민의 집사, 결사 등 모든 자유를 보장한다.
6. 인민의 애국운동을 개방한다.
7. 쑨원 총리의 유언을 준수하고 실행한다
8. 즉시 전국구국회의를 소집한다.
공산당의 중화소비에트 정부는 찬성을 표시했다. 장제스는 12월 25일 석방되었고 시안사건을 계기로 장제스는 요구사항을 거부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공산당과 합작을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 해 7월 7일 베이징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본격적인 중일전쟁의 신호탄이 된 [7]7.7사변(노구교사변)이 일어나자 9월에는 공산당과 제2차 합작을 하고 기나긴 항일전쟁에 돌입했다. 공산당의 소비에트정부는 국민정부 휘하의 정부로 격하되고 [6]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칭되었다
장쉐량은 난징에서 장제스에게 스스로 처벌을 요청하였고 12월 31일 군사법정에서 10년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해인 1937년 1월 4일 사면을 받았다. 이후 가택연금에 처했으며 1993년이 되어서 풀려났다고 한다.
[출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세계의 역사, 박구병외 8인, 2021, P.54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동북군 : 중국 동북 지역에서 성립된 장쭤린(장작림)의 군벌로 20만 병력의 대군벌. 국민정부 장제스의 휘하에 들어간다. 봉천군벌, 동북군벌이라고도 부른다.
[2] 관동군 : 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 정권의 부대
[3] 장쉐량(중1898년~2001년) : 한자음 장학량. 장쭤린(장작림)의 아들로 부친사후 동북군을 물려받았다. 중화민국의 군벌 정치가. 103세로 장수.
[4] 장제스(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5] 시안(서안) : 중국의 산시 성의 성도. 옛 이름은 장안
[6] 홍군 : 중국 인민해방군의 과거(1927년~1937년) 명칭. 제2차 국공합작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의 명칭으로 불렸다. 일본항복 이후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7] 7.7사변(루거우차오사건) : 루거우차오의 한자음은 노구교. 중국 베이징의 노구교부근에서 총성이 울렸고 이는 중일전쟁의 서막이었다
국민당 [4]장제스가 중국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고 동북지방을 일본에 내어주는 동안 중국내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총을 겨누지 말고 합심하여 일본과 싸우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1936년 12월, 대일항쟁을 요구하는 동북군의 [3]장쉐량은 계속해서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는 [4]장제스를 [5]시안에서 납치하여 연금하였다. 일련의 하극상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장쉐량은 아래와 같이 8개 항목의 조건을 장제스에게 요구했다.
1. 난징 정부를 개편하여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공동으로 구국의 책임을 진다.
2. 일체의 내전을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한다.
3. 상하이에서 체포된 애국지도자를 즉시 석방한다.
4. 전국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한다.
5. 인민의 집사, 결사 등 모든 자유를 보장한다.
6. 인민의 애국운동을 개방한다.
7. 쑨원 총리의 유언을 준수하고 실행한다
8. 즉시 전국구국회의를 소집한다.
공산당의 중화소비에트 정부는 찬성을 표시했다. 장제스는 12월 25일 석방되었고 시안사건을 계기로 장제스는 요구사항을 거부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공산당과 합작을 약속했다. 그리고 다음 해 7월 7일 베이징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본격적인 중일전쟁의 신호탄이 된 [7]7.7사변(노구교사변)이 일어나자 9월에는 공산당과 제2차 합작을 하고 기나긴 항일전쟁에 돌입했다. 공산당의 소비에트정부는 국민정부 휘하의 정부로 격하되고 [6]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칭되었다
장쉐량은 난징에서 장제스에게 스스로 처벌을 요청하였고 12월 31일 군사법정에서 10년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해인 1937년 1월 4일 사면을 받았다. 이후 가택연금에 처했으며 1993년이 되어서 풀려났다고 한다.
[출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세계의 역사, 박구병외 8인, 2021, P.54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동북군 : 중국 동북 지역에서 성립된 장쭤린(장작림)의 군벌로 20만 병력의 대군벌. 국민정부 장제스의 휘하에 들어간다. 봉천군벌, 동북군벌이라고도 부른다.
[2] 관동군 : 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 정권의 부대
[3] 장쉐량(중1898년~2001년) : 한자음 장학량. 장쭤린(장작림)의 아들로 부친사후 동북군을 물려받았다. 중화민국의 군벌 정치가. 103세로 장수.
[4] 장제스(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5] 시안(서안) : 중국의 산시 성의 성도. 옛 이름은 장안
[6] 홍군 : 중국 인민해방군의 과거(1927년~1937년) 명칭. 제2차 국공합작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의 명칭으로 불렸다. 일본항복 이후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7] 7.7사변(루거우차오사건) : 루거우차오의 한자음은 노구교. 중국 베이징의 노구교부근에서 총성이 울렸고 이는 중일전쟁의 서막이었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1937년 7월 7일에 베이징 서남쪽 방향 [1]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벌어진 중일간의 교전사건으로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7.7사변으로 통칭한다.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고 화북 지역을 장악한 사실상의 점령군인 일본군이 베이징 서남쪽 교외의 돌다리인 [1]루거우차오(노구교)를 사이에 두고 중국 [3]국민혁명군과 긴장 속에 대치하던 때였다. 로거우차오의 동쪽은 명나라 말기의 성곽도시인 완핑성이 위치하고 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서쪽인 [2]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예고 없이 야간 실탄훈련을 실시했다.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훈련을 끝내고 부대로 복귀한 일본군은 병사 한 명이 행발불명된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여 상급부대에 그 사실을 보고한 뒤 중국군측에 직접 수색 및 진상 조사를 벌이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중국군은 루거우차오는 중국영토이며 일본군이 성내에 들어와 조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7월 8일 오전 2시에 일본은 완핑성내 조사를 실시하게 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군사력을 동원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중국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완핑성 인근을 수색하였고, 일본군 중대 전원도 실종된 병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실종된 병사는 20분뒤에 무사히 복귀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문제의 병사가 귀대했음을 밝히고 행방불명의 상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으므로 쌍방 합동으로 조사하는 제의를 하면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협상이 진쟁되던 중에 7월 8일 새벽 4시 50분경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완핑성 내부의 주요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 이에 중국군도 격렬한 저항에 나섰지만 결국 루거우차우는 빼았겼다. 일본군의 도발과 교전이 사흘간 계속 이어졌다. 7월 11일 전투가 중지된 상태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교섭에서 일본군은 세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베이징 내의 모든 반일단체를 일소하고 반일활동을 중지하며 국민당은 모든 사건의 책임을 지며 중국군 고위 장교들은 반드시 사과하라는 일본군의 조건으로 사태는 마무리되는 듯 했다.
중국은 일본이 군사적 침략이 계속되는 한 부국강병이 근본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 중국의 [4]장제스는 내전을 종식하고 국민당군에 공산당의 홍군까지 편입하여 일본군과 전면전 준비에 착수했다. 일본은 루거우차오 사건이 '중국의 계획적인 무력공격'이라고 규정하고 군대를 증파했다.
협상은 결렬되고 일본군은 7월 28일에 베이징과 텐진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8년간의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1] 루거우차오(盧溝橋) : 한자음 노구교. 중국 베이징시의 서남쪽을 흐르는 영정강(永定河)위에 놓인 돌로 만들어진 아치 모양의 다리. 전체길이 약 270m이고 11개의 아치로 구성되어있다. 금나라때인 1192년에 완성하였는데 난간에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을 한 사자 조각상 501개가 설치되어 있다.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석조 다리'라고 서술한 것에 기인하여 서양에서는 '마르코폴로다리'라고도 불린다
[2] 펑타이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의 6개구중 하나. 로거우차오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명나라 말기의 성곽도시인 완핑성(宛平城)이 위치하고 있다
[3] 국민혁명군 : 북벌에 의해 중국을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한 군대로서 1925년에 중국 국민당에 의해 창설되었다.
[4] 장제스(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고 화북 지역을 장악한 사실상의 점령군인 일본군이 베이징 서남쪽 교외의 돌다리인 [1]루거우차오(노구교)를 사이에 두고 중국 [3]국민혁명군과 긴장 속에 대치하던 때였다. 로거우차오의 동쪽은 명나라 말기의 성곽도시인 완핑성이 위치하고 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서쪽인 [2]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예고 없이 야간 실탄훈련을 실시했다.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훈련을 끝내고 부대로 복귀한 일본군은 병사 한 명이 행발불명된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여 상급부대에 그 사실을 보고한 뒤 중국군측에 직접 수색 및 진상 조사를 벌이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중국군은 루거우차오는 중국영토이며 일본군이 성내에 들어와 조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7월 8일 오전 2시에 일본은 완핑성내 조사를 실시하게 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군사력을 동원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중국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완핑성 인근을 수색하였고, 일본군 중대 전원도 실종된 병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실종된 병사는 20분뒤에 무사히 복귀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문제의 병사가 귀대했음을 밝히고 행방불명의 상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으므로 쌍방 합동으로 조사하는 제의를 하면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협상이 진쟁되던 중에 7월 8일 새벽 4시 50분경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완핑성 내부의 주요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 이에 중국군도 격렬한 저항에 나섰지만 결국 루거우차우는 빼았겼다. 일본군의 도발과 교전이 사흘간 계속 이어졌다. 7월 11일 전투가 중지된 상태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교섭에서 일본군은 세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베이징 내의 모든 반일단체를 일소하고 반일활동을 중지하며 국민당은 모든 사건의 책임을 지며 중국군 고위 장교들은 반드시 사과하라는 일본군의 조건으로 사태는 마무리되는 듯 했다.
중국은 일본이 군사적 침략이 계속되는 한 부국강병이 근본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 중국의 [4]장제스는 내전을 종식하고 국민당군에 공산당의 홍군까지 편입하여 일본군과 전면전 준비에 착수했다. 일본은 루거우차오 사건이 '중국의 계획적인 무력공격'이라고 규정하고 군대를 증파했다.
협상은 결렬되고 일본군은 7월 28일에 베이징과 텐진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8년간의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1] 루거우차오(盧溝橋) : 한자음 노구교. 중국 베이징시의 서남쪽을 흐르는 영정강(永定河)위에 놓인 돌로 만들어진 아치 모양의 다리. 전체길이 약 270m이고 11개의 아치로 구성되어있다. 금나라때인 1192년에 완성하였는데 난간에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을 한 사자 조각상 501개가 설치되어 있다.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석조 다리'라고 서술한 것에 기인하여 서양에서는 '마르코폴로다리'라고도 불린다
[2] 펑타이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의 6개구중 하나. 로거우차오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명나라 말기의 성곽도시인 완핑성(宛平城)이 위치하고 있다
[3] 국민혁명군 : 북벌에 의해 중국을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한 군대로서 1925년에 중국 국민당에 의해 창설되었다.
[4] 장제스(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중일 전쟁은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중국)과 일본의 전쟁이다
상하이 전투 또는 제2차 상하이 사변으로 부른다.
1937년 8월 9일 일본군이 정찰 명목으로 중화민국의 관할 구역인 홍차오 공항에 진입을 시도하다 중국군에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8월 13일 중국 관할구역인 바오산 도로로 진입한 일본군을 중화민국군이 총격을 가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 초반은 중국군이 우세해 보였다. 5만여 중국군이 일본군을 포위하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3개월이 넘는 육지, 공중 및 해상에서의 광범위한 전투 끝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상하이에서 중국의 끈질긴 저항은 중국 정부가 중요한 산업을 내륙으로 이전하는 데 필요한 많은 시간을 제공하는 동시에 일본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동시에 동조하는 서구 열강을 중국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3개월 간의 치열한 전투 동안 중국군과 일본군은 일본군이 상륙작전을 벌인 상하이 시내와 변두리 마을, 양쯔강과 항저우만 해변에서 교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만여명이 전사했지만, 중국군은 이 전투에서 25~30만 명이나 희생되었다. 이후 난징(南京)의 함락으로 이어지고 중일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사건이 되었다.
1937년 8월 9일 일본군이 정찰 명목으로 중화민국의 관할 구역인 홍차오 공항에 진입을 시도하다 중국군에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8월 13일 중국 관할구역인 바오산 도로로 진입한 일본군을 중화민국군이 총격을 가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 초반은 중국군이 우세해 보였다. 5만여 중국군이 일본군을 포위하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3개월이 넘는 육지, 공중 및 해상에서의 광범위한 전투 끝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상하이에서 중국의 끈질긴 저항은 중국 정부가 중요한 산업을 내륙으로 이전하는 데 필요한 많은 시간을 제공하는 동시에 일본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동시에 동조하는 서구 열강을 중국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3개월 간의 치열한 전투 동안 중국군과 일본군은 일본군이 상륙작전을 벌인 상하이 시내와 변두리 마을, 양쯔강과 항저우만 해변에서 교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만여명이 전사했지만, 중국군은 이 전투에서 25~30만 명이나 희생되었다. 이후 난징(南京)의 함락으로 이어지고 중일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사건이 되었다.
중일 전쟁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인 [1]난징을 점령한 일본이 난징 주변과 시내로 도망친 중화민국군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6주 동안 중국인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30만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몇몇 중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했으며, 어린이는 물론 늙은 노인까지 잔인하게 강간한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라고 전해진다.
[1]난징 대학살의 책임자인 다니 히사오와 100인 목베기, 300인 목베기 경연대회를 자행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노다 쓰요시, 다나카 군키치는 [2]극동군사군사재판은 A급 전범만 다루기 때문에 B, C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현지 재판을 받기로 하여 1947년 9월 2일에 [1]난징의 중국 국민당 정권으로 신병이 인도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 1월 28일에 난징의 [3]우화대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난징 대학살 기념관을 1985년 설립하여 매년 12월 13일에 추모식을 가지며, 일본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난징대학살은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1] 난징(Nanjing) : 중화민국(대만, 지도자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의 명목상 수도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쑤성의 성도
[2] 극동국제군사재판(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IMTFE) : 포츠담 선언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일본군의 A급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국제적으로 행한 심판한 재판
[3] 우화대(雨花台, 위화타이) : 난징시에 있고 중국 국민당 통치 시절엔 공산혁명가 수십만이 이곳에서 처형 되었다.
몇몇 중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했으며, 어린이는 물론 늙은 노인까지 잔인하게 강간한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라고 전해진다.
[1]난징 대학살의 책임자인 다니 히사오와 100인 목베기, 300인 목베기 경연대회를 자행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노다 쓰요시, 다나카 군키치는 [2]극동군사군사재판은 A급 전범만 다루기 때문에 B, C급 전범으로 분류되어 현지 재판을 받기로 하여 1947년 9월 2일에 [1]난징의 중국 국민당 정권으로 신병이 인도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 1월 28일에 난징의 [3]우화대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난징 대학살 기념관을 1985년 설립하여 매년 12월 13일에 추모식을 가지며, 일본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난징대학살은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1] 난징(Nanjing) : 중화민국(대만, 지도자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의 명목상 수도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쑤성의 성도
[2] 극동국제군사재판(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IMTFE) : 포츠담 선언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일본군의 A급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국제적으로 행한 심판한 재판
[3] 우화대(雨花台, 위화타이) : 난징시에 있고 중국 국민당 통치 시절엔 공산혁명가 수십만이 이곳에서 처형 되었다.
1932년에 실시된 오스트리아 지방 선거에서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오스트리아 나치당)은 기존의 정당들과 맞먹는 지지율을 기록했다. 또한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우익집단인 [1]보국단의 쿠데타 계획이 실패하면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보수주의, 반공주의 성향을 가진 인사들의 높은 지지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3]아돌프 히틀러는 1934년 독일의 대통령과 총리의 모든 권한을 합친 총통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독일과의 통일을 과격하게 주장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오스트리아 [2]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은 독일과의 통일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독일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오스트리아 병합을 반대했던 이탈리아의 [4]베니토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1934년 7월 25일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수상 관저를 습격하여 [2]엥겔베르트 돌푸스 총리가 사망하였다. 이 쿠데타는 오스트리아 [5]빌헬름 미클라스 대통령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6]쿠르트 슈슈니크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 내에서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존재했던 독일과의 합병론은 힘을 잃었다.
그러나 1935년에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독일이 국제적 지위를 개선했고, 1936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4]베니토 무솔리니를 [3]아돌프 히틀러가 지지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가 좋아졌다. 또한 1936년에 독일-오스트리아 협정으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하면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사면과 정치 활동의 재개를 보장받았다.
1938년에 이르러 히틀러는 2월 12일 [6]쿠르트 슈슈니크를 초대하여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보호국으로 두기 위한 여러 조치를 요구했다. 슈슈니크는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오스트리아 나치를 대표하는 [7]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데는 동의했다.
위와 같은 국제정세 흐름을 타고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독일 병합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개시하고 있었다.
쿠르트 슈슈니크 총리는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스트리아 독립 유지 여부를 묻기 위한 국민투표를 3월 13일에 실시하기로 하였다. 국민투포안에 불쾌감을 느낀 히틀러는 투표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독일 국방군을 오스트리아로 진군시켜 점령하는 계획을 세웠다. 3월 11일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넘어오자 오스트리아는 이에 굴복하여 국민투표는 무산되고 슈슈니크는 총리직을 사임하고 [7]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후계자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빌헬름 미클라스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새로운 총리 임명을 거절하였으나 독일의 압력에 굴복하여 12일 수상으로 지명하였다. 수상디 된 [7]아르투어 자이스이크바르트는 곧 독일군의 지원요청하였다.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저항으로 오스트리아로 진주했고 대통령의 권한까지 대행하게 된 자이스이크바르트는 3월 13일 수도 빈에서 히틀러와 병합에 관한 법률안에 서명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3월 14일에 히틀러는 자신의 고향인 [8]린츠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전역을 접수한 가운데 형식적인 법 절차로 나치당 감독 아래 4월 10일 국민투표를 했다. 이 투표는 투표용지부터 병합 찬성에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97% 찬성이라는 투표결과가 나왔다.
1943년 모스크바 선언에서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은 무효라고 선언 되었다.
1955년에 체결된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독립 국가 지위를 회복했고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은 영구히 금지되었다.
1938년에 이루어진 독일국과 오스트리아 연방국과의 정치연합, 사실상 통일을 가리킨다. 원래 독일어로 안슐루스는 통합 등을 뜻하는 보통명사이지만,[3] 이 사건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이 사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도 통한다.
독일어로 안슐루스(Anschluss)는 병합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원래 보통명사이지만 이 사건의 영향력이 너무커서 이 사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도 통한다
[1] 보국단 : 1920년대 ~ 193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우익 준군사조직
[2] 엥겔베르트 돌푸스(Engelbert Dollfuss, 1892년~1934년) : 오스트리아 총리(1932년 5월 20일~1934년 7월 25일). 오스트리아 극우인사
[3]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년~1945년) : 나치 독일의 퓌러(Führer,총통)
[4]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년~1945년) : 이탈리아 왕국의 총리(재임:1922년~1943년). 파시스트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정치가.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두체(Duce(지도자), 임기:1943년~1945년)
[5] 빌헬름 미클라스(Wilhelm Miklas, 1872년~1956년) : 오스트리아 대통령(1928년 12월 10일~1938년)
[6] 쿠르트 슈슈니크(Kurt Schuschnigg, 1897년~1977년) : 오스트리아 총리(1934년 8월 29일~1938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독립유지을 위한 국민투표 제안으로 독일의 반발로 국민투표는 무산되고 1938년 3월 11일에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수감되었다.
[7]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Arthur Seyss-Inquart, 1892년~1946년) :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법률가로, 나치당 당원. 유대인과 네덜란드인을 20만 명 이상 죽인 전범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아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8] 린츠(Linz) : 오스트리아 북쪽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오버외스터라이히주의 주도시. 빈, 그라츠에 이어 오스트리아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
오스트리아 출신의 [3]아돌프 히틀러는 1934년 독일의 대통령과 총리의 모든 권한을 합친 총통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독일과의 통일을 과격하게 주장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오스트리아 [2]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은 독일과의 통일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독일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오스트리아 병합을 반대했던 이탈리아의 [4]베니토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1934년 7월 25일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수상 관저를 습격하여 [2]엥겔베르트 돌푸스 총리가 사망하였다. 이 쿠데타는 오스트리아 [5]빌헬름 미클라스 대통령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6]쿠르트 슈슈니크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 내에서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존재했던 독일과의 합병론은 힘을 잃었다.
그러나 1935년에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독일이 국제적 지위를 개선했고, 1936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4]베니토 무솔리니를 [3]아돌프 히틀러가 지지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가 좋아졌다. 또한 1936년에 독일-오스트리아 협정으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하면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사면과 정치 활동의 재개를 보장받았다.
1938년에 이르러 히틀러는 2월 12일 [6]쿠르트 슈슈니크를 초대하여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보호국으로 두기 위한 여러 조치를 요구했다. 슈슈니크는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오스트리아 나치를 대표하는 [7]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데는 동의했다.
위와 같은 국제정세 흐름을 타고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독일 병합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개시하고 있었다.
쿠르트 슈슈니크 총리는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스트리아 독립 유지 여부를 묻기 위한 국민투표를 3월 13일에 실시하기로 하였다. 국민투포안에 불쾌감을 느낀 히틀러는 투표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독일 국방군을 오스트리아로 진군시켜 점령하는 계획을 세웠다. 3월 11일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넘어오자 오스트리아는 이에 굴복하여 국민투표는 무산되고 슈슈니크는 총리직을 사임하고 [7]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후계자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빌헬름 미클라스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새로운 총리 임명을 거절하였으나 독일의 압력에 굴복하여 12일 수상으로 지명하였다. 수상디 된 [7]아르투어 자이스이크바르트는 곧 독일군의 지원요청하였다.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저항으로 오스트리아로 진주했고 대통령의 권한까지 대행하게 된 자이스이크바르트는 3월 13일 수도 빈에서 히틀러와 병합에 관한 법률안에 서명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3월 14일에 히틀러는 자신의 고향인 [8]린츠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전역을 접수한 가운데 형식적인 법 절차로 나치당 감독 아래 4월 10일 국민투표를 했다. 이 투표는 투표용지부터 병합 찬성에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97% 찬성이라는 투표결과가 나왔다.
1943년 모스크바 선언에서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은 무효라고 선언 되었다.
1955년에 체결된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독립 국가 지위를 회복했고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은 영구히 금지되었다.
1938년에 이루어진 독일국과 오스트리아 연방국과의 정치연합, 사실상 통일을 가리킨다. 원래 독일어로 안슐루스는 통합 등을 뜻하는 보통명사이지만,[3] 이 사건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이 사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도 통한다.
독일어로 안슐루스(Anschluss)는 병합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원래 보통명사이지만 이 사건의 영향력이 너무커서 이 사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도 통한다
[1] 보국단 : 1920년대 ~ 193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우익 준군사조직
[2] 엥겔베르트 돌푸스(Engelbert Dollfuss, 1892년~1934년) : 오스트리아 총리(1932년 5월 20일~1934년 7월 25일). 오스트리아 극우인사
[3]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년~1945년) : 나치 독일의 퓌러(Führer,총통)
[4]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년~1945년) : 이탈리아 왕국의 총리(재임:1922년~1943년). 파시스트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정치가.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두체(Duce(지도자), 임기:1943년~1945년)
[5] 빌헬름 미클라스(Wilhelm Miklas, 1872년~1956년) : 오스트리아 대통령(1928년 12월 10일~1938년)
[6] 쿠르트 슈슈니크(Kurt Schuschnigg, 1897년~1977년) : 오스트리아 총리(1934년 8월 29일~1938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독립유지을 위한 국민투표 제안으로 독일의 반발로 국민투표는 무산되고 1938년 3월 11일에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수감되었다.
[7]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Arthur Seyss-Inquart, 1892년~1946년) :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법률가로, 나치당 당원. 유대인과 네덜란드인을 20만 명 이상 죽인 전범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아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8] 린츠(Linz) : 오스트리아 북쪽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오버외스터라이히주의 주도시. 빈, 그라츠에 이어 오스트리아에서 세번째로 큰 도시
영국의 [1]네빌 체임벌린 총리, 프랑스의 [2]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독일의 [3]아돌프 히틀러 총통, 이탈리아의 [4]베니토 무솔리니 총리가 서명한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테란트 지역이 나찌 독일에게 넘어갔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 대전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합쳐진 나라이다.
1920년 후반부터 시작된 세계 대공황으로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고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막대한 배상금등으로 피폐해졌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의 위기상황에 강력한 민족주의를 내세운 [8]파시즘으로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히틀러의 나치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1938년 3월 12일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방국 병합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인 [5]주데텐란트에는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이후 [6]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원래 독일의 영토였던 주덴텐란트 지역을 원래대로 합병하겠다며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간 긴장이 고조되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군사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으며 전쟁에 대한 대비도 미비한 상황이었다. 체코슬로바키에서 전쟁이 터지면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도 휘말리게 되는 상황이었다.
9월 15일에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전격적으로 뮌헨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을 가졌다. 회담 내용에 따라 체임벌린 총리는 또 다른 세계 전쟁을 피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주데텐란트 지역을 포기하는 대신 영국과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주데텐란트 지역뿐만 아니라 또 다른 조건을 요구하면서 고의적으로 조건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태는 영국, 프랑스, 독일은 군사행동을 예고하며 전쟁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각국의 자제를 촉구하며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중재를 통하여 영국의 [1]네빌 체임벌린 총리, 프랑스의 [2]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독일의 [3]아돌프 히틀러 총통, 이탈리아의 [4]베니토 무솔리니 총리가 독일 뮌헨에서 회담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데텐란트는 독일의 합병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테란트 지역은 독일에게 양도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협상에 참여하지도 못한 채 영토를 잃었다.
이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달리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한 체코슬로바키아 [7]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은 회담결과를 묵인하고 책임하에 사임하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체임벌린은 회담후 영국에 돌아오자 엄청난 군중이 그를 환영했고, 유럽에서 전쟁의 위기를 막아낸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체임벌린은 이 자리에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의 유명한 연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6개월 후 나찌 독일 히틀러는 협정을 파기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1939년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체임벌린의 뮌헨 회담은 역사상 최악의 외교협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후 주데텐란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환원되었고 독일계 주민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나뉘어 추방되었으며 주데텐란트라는 지명도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는 뮌헨 협정을 뮌헨 늑약,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동맹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뮌헨의 배신이라고도 부른다.
[관련영화] 뮌헨-전쟁의 문턱에서(Munich: The Edge of War, München: Im Angesicht des krieges) 2021년
- 내용 : 전운이 감도는 1938년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옥스퍼드 대학 동창이었던 영국 고위 공무원과 독일 외교관의 운명이 독일 뮌헨에서 교차하며 전쟁을 막으려다가 정치적 음모와 거대한 위협에 휩싸이게 된다는 내용의 소설 원작 영화
- 장르 : 드라마/스릴러, 129분
- 감독 : 크리스티안 슈뵈초브(Christian Schwochow)
- 주연 : 조지 맥케이(George MacKay, 휴 레거트 역), 야니스 니에브외너(Jannis Niewohner, 폴 본 하트만 역), 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 레미 아이언스 역)
[1]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1869년~1940년) : 영국의 보수당 정치인이자 영국의 41대 총리(임기:1937년~1940년)
[2] 에두아르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 1884년~1970년) : 1933년, 1934년, 그리고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세 차례 프랑스 총리를 역임하였다. 프랑스의 72대 총리(재임:1936년~1940년)로써 마지막 총리
[3]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년~1945년) : 나치 독일의 퓌러(Führer,총통)
[4]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년~1945년) : 이탈리아 왕국의 총리(재임:1922년~1943년). 파시스트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정치가.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두체(Duce(지도자), 임기:1943년~1945년)
[5] 주데테란트(Sudetenland) : 독일과 국경을 이루는 체코슬로바키아 서부지역이며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6]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 독일과 연합국과 맺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평화협정으로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서명했고, 1920년 1월 10일 공포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국제연맹의 탄생과 전쟁을 일으킨 독일에 대한 제재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7]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 1884년~1948년) : 체코슬로바키아의 외무장관(1918년~1935년), 총리(1921년~1922년), 제2대 대통령(1935년~1938년),제4대 대통령(1945년~1948년)등을 역임했다
[8] 파시즘(Fascism)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특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나타난 대중 정치와 대중 동원에 기초하여 극단적인 민족주의(극우 전체주의적인 국수주의)사상을 주장하는 정치적 행동이자 체제(운동). 이탈리아 베티토 무솔리니가 주도. 파시즘이란 단어는 19세기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정치 결사체인 '파쇼'의 사상이란 뜻에서 유래해 파쇼라고도 불린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 대전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합쳐진 나라이다.
1920년 후반부터 시작된 세계 대공황으로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고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막대한 배상금등으로 피폐해졌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의 위기상황에 강력한 민족주의를 내세운 [8]파시즘으로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히틀러의 나치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1938년 3월 12일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방국 병합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인 [5]주데텐란트에는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이후 [6]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원래 독일의 영토였던 주덴텐란트 지역을 원래대로 합병하겠다며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간 긴장이 고조되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군사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으며 전쟁에 대한 대비도 미비한 상황이었다. 체코슬로바키에서 전쟁이 터지면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도 휘말리게 되는 상황이었다.
9월 15일에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전격적으로 뮌헨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을 가졌다. 회담 내용에 따라 체임벌린 총리는 또 다른 세계 전쟁을 피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주데텐란트 지역을 포기하는 대신 영국과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주데텐란트 지역뿐만 아니라 또 다른 조건을 요구하면서 고의적으로 조건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태는 영국, 프랑스, 독일은 군사행동을 예고하며 전쟁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각국의 자제를 촉구하며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중재를 통하여 영국의 [1]네빌 체임벌린 총리, 프랑스의 [2]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독일의 [3]아돌프 히틀러 총통, 이탈리아의 [4]베니토 무솔리니 총리가 독일 뮌헨에서 회담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주데텐란트는 독일의 합병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테란트 지역은 독일에게 양도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협상에 참여하지도 못한 채 영토를 잃었다.
이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달리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한 체코슬로바키아 [7]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은 회담결과를 묵인하고 책임하에 사임하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체임벌린은 회담후 영국에 돌아오자 엄청난 군중이 그를 환영했고, 유럽에서 전쟁의 위기를 막아낸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체임벌린은 이 자리에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의 유명한 연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6개월 후 나찌 독일 히틀러는 협정을 파기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1939년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체임벌린의 뮌헨 회담은 역사상 최악의 외교협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후 주데텐란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환원되었고 독일계 주민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나뉘어 추방되었으며 주데텐란트라는 지명도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는 뮌헨 협정을 뮌헨 늑약,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동맹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뮌헨의 배신이라고도 부른다.
[관련영화] 뮌헨-전쟁의 문턱에서(Munich: The Edge of War, München: Im Angesicht des krieges) 2021년
- 내용 : 전운이 감도는 1938년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옥스퍼드 대학 동창이었던 영국 고위 공무원과 독일 외교관의 운명이 독일 뮌헨에서 교차하며 전쟁을 막으려다가 정치적 음모와 거대한 위협에 휩싸이게 된다는 내용의 소설 원작 영화
- 장르 : 드라마/스릴러, 129분
- 감독 : 크리스티안 슈뵈초브(Christian Schwochow)
- 주연 : 조지 맥케이(George MacKay, 휴 레거트 역), 야니스 니에브외너(Jannis Niewohner, 폴 본 하트만 역), 레미 아이언스(Jeremy Irons, 레미 아이언스 역)
[1]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1869년~1940년) : 영국의 보수당 정치인이자 영국의 41대 총리(임기:1937년~1940년)
[2] 에두아르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 1884년~1970년) : 1933년, 1934년, 그리고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세 차례 프랑스 총리를 역임하였다. 프랑스의 72대 총리(재임:1936년~1940년)로써 마지막 총리
[3]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년~1945년) : 나치 독일의 퓌러(Führer,총통)
[4]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년~1945년) : 이탈리아 왕국의 총리(재임:1922년~1943년). 파시스트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정치가.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두체(Duce(지도자), 임기:1943년~1945년)
[5] 주데테란트(Sudetenland) : 독일과 국경을 이루는 체코슬로바키아 서부지역이며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6]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 독일과 연합국과 맺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평화협정으로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서명했고, 1920년 1월 10일 공포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국제연맹의 탄생과 전쟁을 일으킨 독일에 대한 제재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7]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 1884년~1948년) : 체코슬로바키아의 외무장관(1918년~1935년), 총리(1921년~1922년), 제2대 대통령(1935년~1938년),제4대 대통령(1945년~1948년)등을 역임했다
[8] 파시즘(Fascism)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특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나타난 대중 정치와 대중 동원에 기초하여 극단적인 민족주의(극우 전체주의적인 국수주의)사상을 주장하는 정치적 행동이자 체제(운동). 이탈리아 베티토 무솔리니가 주도. 파시즘이란 단어는 19세기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정치 결사체인 '파쇼'의 사상이란 뜻에서 유래해 파쇼라고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