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사건

중화민국 중국 사건기간 : 1947년 2월 28일~1947년 5월 16일, 조회수 : 723,   등록일 : 2022-04-15
타이완은 중국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1895년 4월 17일에 일본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 1945년 10월 17일 중화민국의 국민혁명군이 타이완에 상륙하면서 타이완과 [2]펑후제도를 영토로 회복하였다. 

중국 국민당정부는 1945년 8월 28일, [1]천이를 타이완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타이완 주민들은 같은 민족인 중국 대륙의 국민당정부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며 10월 24일 타이베이에 도착한 [1]천이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천이는 10월 25일 타이완 주둔 일본군의 항복으로 타이완과 [2]펑후 제도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영토로 완전하게 회복하였음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일본의 지배와 수탈을 받던 타이완 주민들은 새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국민당정부는 중국 대륙의 문화와 다른 문화를 갖고 있던 타이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으며 타이완 주민을 친일파 혹은 미개인으로 취급하며 점령군과 같은 의식을 갖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타이완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관인 [1]천이부터 말단까지 타이완에 도착하자마자 타이완 주민을 착취하였으며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당시 타이완의 주요 요직은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으로 넘어온 외성인(중국 본토인)들이 차지하면서 본성인(타이완 주민)들은 차별과 착취를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이완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고 국민당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날로 커져만 갔고 '개(일본)가 가고 돼지가 왔다'고 하는 등 불심감이 팽배하였다.

1947년 2월 27일 밤, 타이베이시 위엔환빌딩 안의 복도에서 국민당정부의 전매 독점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팔던 린쟝마이라는 여인이 허가받지 않고 담배노점을 벌였다는 이유로 단속원과 경찰에 의해 폭행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폭행을 당하면서도 담배를 빼앗지 말아 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하였고 주변에 있던 군중들이 동정하였다. 이때 단속원과 경찰이 군중속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권총을 뽑아 발사하였는데 군중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단속원과 경찰은 도망쳤고 분노한 군중은 경찰서로 몰려가 살인자를 처벌하라고 항의했다. 이로 인하여 타이베이시는 분노의 정서가 확산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이를 원환집연사건(圓環緝煙事件)이라고 한다.

1947년 2월 28일 사망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서와 군부대로 몰려들어 해당 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며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군중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타이완성 행정장관 집무처로 몰려가 천이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요구하였다. 시위에 가담하는 군중은 갈수록 늘어났다. 관청을 지키던 경비병과 시위대가 충돌하면서 두 사람이 경비병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급기야 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기도 했으며 경찰들을 구타해 사망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시위는 타이베이 시내 도처에서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의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2월 28일 오후 계엄이 선포되면서 민중과 정부간의 대립을 더욱 격화되었다.  2월 28일 당일 타이베이시 전역에서 파업 및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기 시작했고, 그 다음 날인 3월 1일 이후에는 시위의 범위가 타이완 전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른바 '2.28사건'이다.

사태 해결을 위해 행정장관 천이의 타협으로 '2.28사건처리위원회'를 구성되어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3월 4일 이후 사태는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천이는 앞으로는 처리위원회를 통해 소요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뒤로는 시위의 무력 진압을 위해 국민당 총통 [5]장제스에게 중국대륙에 있는 국민혁명군의 증파를 요청했다. 

3월 8일 중국대륙에서 파병된 중화민국군 헌병 제4연대의 대대병력이 타이완 [3]지룽항에 도착하면서 항구에 대해 무차별 소탕작전을 실시하여 진압했다. 3월 9일 제21사단도 지룽항에 도착하여 타이베이시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무차별 진압에 돌입했으며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진압은 10여 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고, 본성인(타이완 주민) 약 3만 명이 사망,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과 약탈로 인해 타이완 전역이 초토화되었고, 결국 시위는 강제 진압되었다. 당시엔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수상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사살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조선인, 일본인들도 이 때 타이완사람으로 오인받아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대규모 살육과 약탈은 3월 17일 국민당 국방부장 [4]바이충시가 타이완에 도착하여 3월 21일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국민당 총통 [5]장제스는 '2.28사건처리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하고 위원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했다. 5월 16일 장제스가 공식적으로 사태 종료를 선언함으로써 2.28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국민당정부는 [6]'청향운동'을 전개하여 민중들을 구속하고 처형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사건 이후 40년 동안 타이완(현 중화민국)에서 2.28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최대의 금기였다. 중국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중국 국민당은 1949년 12월에 중화민국 국민당정부를 타이베이로 옮겨왔다.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 중화민국 정부는 공식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2.28 평화기념공원(二二八和平紀念公園)을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 천이(1883년~1950년) :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가. 복건성 정부주석, 대만 행정장관 등을 역임했으나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를 배신하려다가 들켜 총살당했다.
[2] 펑후(Penghu)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3] 지룽(Keelung) : 중화민국 타이완 북부의 항만도시. 일본의 식민통치 시대 이전부터 대외 무역의 거점이었으며 일본해군의 군항이었다
[4] 바이충시(白崇禧, 1893년~1966년) : 한자음 백숭희. 중화민국의 군벌, 군인, 정치가. 중화민국의 제1대 국방부 장관. 국민혁명군 내의 가장 유능한 장군으로서 일급상장(대장에 해당)까지 올랐다
[5]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6] 청향(淸鄕) : 산간지방으로 도피한 타이완인들을 잡아 농촌을 깨끗하게 한다는 이른바 청향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들과 연계되었다고 의심받은 수많은 타이완인들이 사법절차도 없이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재판없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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