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우차오사건(노구교사건, 7.7사변, Marco Polo Bridge Incident)
일본
중국
사건기간 : 1937년 7월 7일~1937년 7월 11일, 조회수 : 459, 등록일 : 2022-03-30
루거우차오 사건은 1937년 7월 7일에 베이징 서남쪽 방향 [1]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벌어진 중일간의 교전사건으로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7.7사변으로 통칭한다.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고 화북 지역을 장악한 사실상의 점령군인 일본군이 베이징 서남쪽 교외의 돌다리인 [1]루거우차오(노구교)를 사이에 두고 중국 [3]국민혁명군과 긴장 속에 대치하던 때였다. 로거우차오의 동쪽은 명나라 말기의 성곽도시인 완핑성이 위치하고 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서쪽인 [2]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예고 없이 야간 실탄훈련을 실시했다.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훈련을 끝내고 부대로 복귀한 일본군은 병사 한 명이 행발불명된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여 상급부대에 그 사실을 보고한 뒤 중국군측에 직접 수색 및 진상 조사를 벌이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중국군은 루거우차오는 중국영토이며 일본군이 성내에 들어와 조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7월 8일 오전 2시에 일본은 완핑성내 조사를 실시하게 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군사력을 동원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중국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완핑성 인근을 수색하였고, 일본군 중대 전원도 실종된 병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실종된 병사는 20분뒤에 무사히 복귀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문제의 병사가 귀대했음을 밝히고 행방불명의 상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으므로 쌍방 합동으로 조사하는 제의를 하면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협상이 진쟁되던 중에 7월 8일 새벽 4시 50분경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완핑성 내부의 주요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 이에 중국군도 격렬한 저항에 나섰지만 결국 루거우차우는 빼았겼다. 일본군의 도발과 교전이 사흘간 계속 이어졌다. 7월 11일 전투가 중지된 상태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교섭에서 일본군은 세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베이징 내의 모든 반일단체를 일소하고 반일활동을 중지하며 국민당은 모든 사건의 책임을 지며 중국군 고위 장교들은 반드시 사과하라는 일본군의 조건으로 사태는 마무리되는 듯 했다.
중국은 일본이 군사적 침략이 계속되는 한 부국강병이 근본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 중국의 [4]장제스는 내전을 종식하고 국민당군에 공산당의 홍군까지 편입하여 일본군과 전면전 준비에 착수했다. 일본은 루거우차오 사건이 '중국의 계획적인 무력공격'이라고 규정하고 군대를 증파했다.
협상은 결렬되고 일본군은 7월 28일에 베이징과 텐진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8년간의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1] 루거우차오(盧溝橋) : 한자음 노구교. 중국 베이징시의 서남쪽을 흐르는 영정강(永定河)위에 놓인 돌로 만들어진 아치 모양의 다리. 전체길이 약 270m이고 11개의 아치로 구성되어있다. 금나라때인 1192년에 완성하였는데 난간에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을 한 사자 조각상 501개가 설치되어 있다.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석조 다리'라고 서술한 것에 기인하여 서양에서는 '마르코폴로다리'라고도 불린다
[2] 펑타이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의 6개구중 하나. 로거우차오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명나라 말기의 성곽도시인 완핑성(宛平城)이 위치하고 있다
[3] 국민혁명군 : 북벌에 의해 중국을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한 군대로서 1925년에 중국 국민당에 의해 창설되었다.
[4] 장제스(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괴뢰 만주국을 수립하고 화북 지역을 장악한 사실상의 점령군인 일본군이 베이징 서남쪽 교외의 돌다리인 [1]루거우차오(노구교)를 사이에 두고 중국 [3]국민혁명군과 긴장 속에 대치하던 때였다. 로거우차오의 동쪽은 명나라 말기의 성곽도시인 완핑성이 위치하고 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서쪽인 [2]펑타이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예고 없이 야간 실탄훈련을 실시했다.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훈련을 끝내고 부대로 복귀한 일본군은 병사 한 명이 행발불명된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여 상급부대에 그 사실을 보고한 뒤 중국군측에 직접 수색 및 진상 조사를 벌이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중국군은 루거우차오는 중국영토이며 일본군이 성내에 들어와 조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7월 8일 오전 2시에 일본은 완핑성내 조사를 실시하게 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군사력을 동원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중국은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완핑성 인근을 수색하였고, 일본군 중대 전원도 실종된 병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실종된 병사는 20분뒤에 무사히 복귀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문제의 병사가 귀대했음을 밝히고 행방불명의 상황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으므로 쌍방 합동으로 조사하는 제의를 하면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협상이 진쟁되던 중에 7월 8일 새벽 4시 50분경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완핑성 내부의 주요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 이에 중국군도 격렬한 저항에 나섰지만 결국 루거우차우는 빼았겼다. 일본군의 도발과 교전이 사흘간 계속 이어졌다. 7월 11일 전투가 중지된 상태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교섭에서 일본군은 세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베이징 내의 모든 반일단체를 일소하고 반일활동을 중지하며 국민당은 모든 사건의 책임을 지며 중국군 고위 장교들은 반드시 사과하라는 일본군의 조건으로 사태는 마무리되는 듯 했다.
중국은 일본이 군사적 침략이 계속되는 한 부국강병이 근본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다. 중국의 [4]장제스는 내전을 종식하고 국민당군에 공산당의 홍군까지 편입하여 일본군과 전면전 준비에 착수했다. 일본은 루거우차오 사건이 '중국의 계획적인 무력공격'이라고 규정하고 군대를 증파했다.
협상은 결렬되고 일본군은 7월 28일에 베이징과 텐진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8년간의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1] 루거우차오(盧溝橋) : 한자음 노구교. 중국 베이징시의 서남쪽을 흐르는 영정강(永定河)위에 놓인 돌로 만들어진 아치 모양의 다리. 전체길이 약 270m이고 11개의 아치로 구성되어있다. 금나라때인 1192년에 완성하였는데 난간에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을 한 사자 조각상 501개가 설치되어 있다.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에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석조 다리'라고 서술한 것에 기인하여 서양에서는 '마르코폴로다리'라고도 불린다
[2] 펑타이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의 6개구중 하나. 로거우차오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명나라 말기의 성곽도시인 완핑성(宛平城)이 위치하고 있다
[3] 국민혁명군 : 북벌에 의해 중국을 통일하는 것을 목표로 한 군대로서 1925년에 중국 국민당에 의해 창설되었다.
[4] 장제스(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