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프랑스
사건기간 : 1803년 5월 18일~1815년 11월 20일, 조회수 : 177, 등록일 : 2022-03-09
프랑스 혁명에서 전쟁으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여 나폴레옹 전쟁에서 절정에 이르렀다.이 전쟁은 5개 항목으로 분류된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오스트리아 전쟁 (1805)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독일·폴란드 원정 (1806 ~ 1807)
-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8 ~ 1814)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1809)
- 러시아 원정 (1812)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나폴레옹의 몰락 (1813 ~ 1814)
- 빈 회의 (1814. 9. 1 ~ 1815. 6. 9)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워털루 전투(1615)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오스트리아 전쟁 (1805)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독일·폴란드 원정 (1806 ~ 1807)
- 이베리아 반도 전쟁 (1808 ~ 1814)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 (1809)
- 러시아 원정 (1812)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나폴레옹의 몰락 (1813 ~ 1814)
- 빈 회의 (1814. 9. 1 ~ 1815. 6. 9)
제7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 워털루 전투(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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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미국 백인 정착민과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사이의 정복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말
1791년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혁명의 결과로 식민지의 아프리카인 노예들이 해방되었으며, 아프리카인들이 지배하는 최초의 공화국인 아이티가 세워졌다.
스페인은 히스파니올라 섬의 생도맹그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1697년 이 섬의 서쪽을 프랑스에 내주게 된다.
생도맹그는 전 세계 설탕의 40%를 아이티 원주민과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생산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과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내용을 기초로한 인권선언은 생도맹그의 식민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생도맹그 시민들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환영하였다. 흑인노예들과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열)들은 '자유, 평등, 우애'의 원칙을 생도맹그에도 적용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식민지 총독이 이를 거부하자 반발하는 물라토들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이는 아이티 혁명에 불을 지폈다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산토도밍고를 공격하여 그곳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1801년 생도맹그에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혁명군은 1803년 마지막 전투인 베르티에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1804년 1월 1일 아이티 공화국을 세웠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어 큰 타격을 입었으며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재식민화 계획을 포기하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게 되었다.
* 생도맹그(Saint-Domingue) : 1697년부터 1804년까지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1/3을 차지했던 프랑스의 식민지. 현재의 아이티
* 히스파니올라 섬(Hispaniola) : 카리브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서쪽 1/3은 아이티의 영토이고, 동쪽 2/3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영토이다, 히스파니올라는 '작은 스페인'을 뜻한다
*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년~1803년) : 아이티의 혁명가, 독립 투사이다. 아이티의 독립의 아버지
* 물라토(mulatto) : 백인과 흑인의 혼혈
*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스페인은 히스파니올라 섬의 생도맹그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1697년 이 섬의 서쪽을 프랑스에 내주게 된다.
생도맹그는 전 세계 설탕의 40%를 아이티 원주민과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생산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과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내용을 기초로한 인권선언은 생도맹그의 식민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생도맹그 시민들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환영하였다. 흑인노예들과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열)들은 '자유, 평등, 우애'의 원칙을 생도맹그에도 적용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식민지 총독이 이를 거부하자 반발하는 물라토들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이는 아이티 혁명에 불을 지폈다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산토도밍고를 공격하여 그곳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1801년 생도맹그에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혁명군은 1803년 마지막 전투인 베르티에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1804년 1월 1일 아이티 공화국을 세웠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어 큰 타격을 입었으며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재식민화 계획을 포기하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게 되었다.
* 생도맹그(Saint-Domingue) : 1697년부터 1804년까지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1/3을 차지했던 프랑스의 식민지. 현재의 아이티
* 히스파니올라 섬(Hispaniola) : 카리브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서쪽 1/3은 아이티의 영토이고, 동쪽 2/3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영토이다, 히스파니올라는 '작은 스페인'을 뜻한다
*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년~1803년) : 아이티의 혁명가, 독립 투사이다. 아이티의 독립의 아버지
* 물라토(mulatto) : 백인과 흑인의 혼혈
*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1801년에서 1805년까지 미합중국과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국가와 벌어진 전쟁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국제전쟁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세계 최강 미 해군이 처음 창설된 계기가 되었다. 트리폴리 전쟁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제국의 준독립 국가 상태에 있었다. 바르바리 국가는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리 세 지역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각 오스만 제국 본국에서 파샤가 임명되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지중해 일대에는 바르바리 국가들의 보호아래 바르바리 해적들이 난립하였으며 지중해를 통과하는 상선의 통행료를 명목삼아 상납금을 징수했을 뿐만 아니라 상선을 습격하여 포로들을 인질로 삼아 해당 국가와 협상을 벌여 몸값을 받아내고 있었다.
당시 세계 최강 영국 해군 때문에 바르바리 해적들은 영국 국적의 상선은 건드리지 않았으나 독립 직후의 미국 상선을 집중 공격하였다. 미국은 신생 국가로 나라 재정이 열악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1796년에 미국 정부는 바르바리 해적에게 매년 8만여 달러를 상납하는 조건의 트리폴리 조약을 맺으며 미국 국적의 선박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리 해적들은 미국 선박을 계속해서 공격했고 이에 격분한 미국은 해군 창설과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하였다.
트리폴리이 파샤인 유수프 카라만르는 1801에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마자 상납요구를 했다. 미국이 이를 거부하자 1801년 5월 10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1801년 6월 1일 미 해군은 4척의 함선을 구성하여 지중해로 들어왔다. 이는 미군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이기도 하다.
8월 1일 미 해군은 함포의 포격으로 바르바리 함선은 전투불능한 상태가 되었다. 미국의 호쾌한 승전이었다. 이후 1803년에는 전함 7척으로 구성된 미 해군 함대가 트리폴리를 봉쇄했고 1805년에는 리비아 북동부 지역을 공격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군이 외국 땅에서 이룬 첫 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트리폴리 파샤 유수프 카라만르는 300명에 이르는 미국 포로들을 석방하고 배상금 6만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휴전 조약에 조인하면서 1차 바르바리 전쟁은 종결된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은 미국 군대의 국제적인 평판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고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시스템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입증했고 미해군과 해병대는 미국의 군사조직으로 위상을 확립하였다.
* 오스만 제국 :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고대 그리스에서 아시아라고 불렸던 지방으로서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하는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 터키제국, 오스만튀르크라고도 불린다
* 바르바리(Barbary) : 유럽에서 베르베르인(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이 살던 지역을 부르던 말. 특히 아프리카의 북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국가인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해안 지역을 말한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 트리폴리(Tripoli) : 리비아의 수도
* 파샤 : 오스만 제국의 최고위층 귀족에게 주어진 호칭. 주로 장군이나 지방 총독에게 주어졌다. 영국의 경(lord)과 비슷하다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1803년)이 재임 기간중 일어난 큰 사건이다
* 튀니스(Tunis) : 튀니지의 수도
지중해 연안의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제국의 준독립 국가 상태에 있었다. 바르바리 국가는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리 세 지역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각 오스만 제국 본국에서 파샤가 임명되어 통치를 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지중해 일대에는 바르바리 국가들의 보호아래 바르바리 해적들이 난립하였으며 지중해를 통과하는 상선의 통행료를 명목삼아 상납금을 징수했을 뿐만 아니라 상선을 습격하여 포로들을 인질로 삼아 해당 국가와 협상을 벌여 몸값을 받아내고 있었다.
당시 세계 최강 영국 해군 때문에 바르바리 해적들은 영국 국적의 상선은 건드리지 않았으나 독립 직후의 미국 상선을 집중 공격하였다. 미국은 신생 국가로 나라 재정이 열악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1796년에 미국 정부는 바르바리 해적에게 매년 8만여 달러를 상납하는 조건의 트리폴리 조약을 맺으며 미국 국적의 선박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바르바리 해적들은 미국 선박을 계속해서 공격했고 이에 격분한 미국은 해군 창설과 군비를 증강하기 시작하였다.
트리폴리이 파샤인 유수프 카라만르는 1801에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마자 상납요구를 했다. 미국이 이를 거부하자 1801년 5월 10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1801년 6월 1일 미 해군은 4척의 함선을 구성하여 지중해로 들어왔다. 이는 미군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이기도 하다.
8월 1일 미 해군은 함포의 포격으로 바르바리 함선은 전투불능한 상태가 되었다. 미국의 호쾌한 승전이었다. 이후 1803년에는 전함 7척으로 구성된 미 해군 함대가 트리폴리를 봉쇄했고 1805년에는 리비아 북동부 지역을 공격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군이 외국 땅에서 이룬 첫 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트리폴리 파샤 유수프 카라만르는 300명에 이르는 미국 포로들을 석방하고 배상금 6만 달러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휴전 조약에 조인하면서 1차 바르바리 전쟁은 종결된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은 미국 군대의 국제적인 평판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고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시스템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고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입증했고 미해군과 해병대는 미국의 군사조직으로 위상을 확립하였다.
* 오스만 제국 :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고대 그리스에서 아시아라고 불렸던 지방으로서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하는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 터키제국, 오스만튀르크라고도 불린다
* 바르바리(Barbary) : 유럽에서 베르베르인(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이 살던 지역을 부르던 말. 특히 아프리카의 북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국가인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해안 지역을 말한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 트리폴리(Tripoli) : 리비아의 수도
* 파샤 : 오스만 제국의 최고위층 귀족에게 주어진 호칭. 주로 장군이나 지방 총독에게 주어졌다. 영국의 경(lord)과 비슷하다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1803년)이 재임 기간중 일어난 큰 사건이다
* 튀니스(Tunis) : 튀니지의 수도
1803년에 미국은 2,147,000 평방미터의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달러에 매입하였다. 이 지역은 현재의 루이지애나 주가 아니라 미시시피강에서 부터 서쪽의 로키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리켰고 현 미국 영통의 23%를 이룬다.
당시에는 연방헌법이 영토획득과 관련된 조항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위헌소지가 있었으며 큰 논란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미 내륙의 곳곳을 잇던 미시시피 수로의 주요 결절지인 뉴올리언스항을 확보하여 미국 무역에 대한 프랑스와 스페인의 잠재적인 위협을 없애고자 미국 의회를 설득하여 매입을 승인 및 결정하였다.
뉴올리언스 매입을 위해 미국 대표단은 프랑스를 방문하여 나폴레옹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카리브해의 '아이티 혁명'으로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었으며 북아메리카 식민화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프랑스는 협상에 들어가자 뉴올리언스를 포함하여 루이지애나지역 매입을 권했다. 깜짝놀란 역제안으로 미국 대표단은 루이지애나 지역의 전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단은 의회의 승인없이 영토 매입을 결정해야 하는 것에 의견이 분분했으나 결과적으로 제안을 수락했고 매매계약은 체결되었다.
이후 미국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루이지애나 매입은 의회로부터 승인되었다.
당시 가격은 1,125만 달러에 그간의 부채 735만 달러를 포함해 총 1,500만 달러(2018년 기준으로 약 2억 5천만 달러)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본격적인 서부개척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 3대 대통령(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1776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
*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 : 미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미국 중부를 남북으로 흐른다. 미국을 동서로 나눌때 기준점으로 쓰인다
* 뉴올리언스(New Orleans) : 현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최대 도시
*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년~1821년) :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 카리브해(Caribbean Sea) : 대서양과 멕시코만에 접한 바다
당시에는 연방헌법이 영토획득과 관련된 조항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위헌소지가 있었으며 큰 논란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미 내륙의 곳곳을 잇던 미시시피 수로의 주요 결절지인 뉴올리언스항을 확보하여 미국 무역에 대한 프랑스와 스페인의 잠재적인 위협을 없애고자 미국 의회를 설득하여 매입을 승인 및 결정하였다.
뉴올리언스 매입을 위해 미국 대표단은 프랑스를 방문하여 나폴레옹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카리브해의 '아이티 혁명'으로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었으며 북아메리카 식민화를 포기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프랑스는 협상에 들어가자 뉴올리언스를 포함하여 루이지애나지역 매입을 권했다. 깜짝놀란 역제안으로 미국 대표단은 루이지애나 지역의 전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단은 의회의 승인없이 영토 매입을 결정해야 하는 것에 의견이 분분했으나 결과적으로 제안을 수락했고 매매계약은 체결되었다.
이후 미국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루이지애나 매입은 의회로부터 승인되었다.
당시 가격은 1,125만 달러에 그간의 부채 735만 달러를 포함해 총 1,500만 달러(2018년 기준으로 약 2억 5천만 달러)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은 본격적인 서부개척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 3대 대통령(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1776년).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
*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 : 미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미국 중부를 남북으로 흐른다. 미국을 동서로 나눌때 기준점으로 쓰인다
* 뉴올리언스(New Orleans) : 현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최대 도시
*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년~1821년) :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
* 카리브해(Caribbean Sea) : 대서양과 멕시코만에 접한 바다
나폴레옹 전쟁기간중 1805년 10월 21일에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의 영국함대와 프랑스-에스파이나 연합 함대를 상대로 영국해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서유럽 대부분을 재패한 나폴레옹은 그의 제국을 동쪽으로 더 넓히고 영국을 정복하고자 했으나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배로 꿈이 되고 말았다.
범선 시대의 마지막 대해전이자 영국의 막강 해군력 신화를 대표하는 전투들 가운데 하나이자, 영국이 자랑하는 대제독 넬슨이 전사한 전투이기도 했다.
이 해전의 승리는 이후 100년 동안 영국이 해상 지배권을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유럽 대부분을 재패한 나폴레옹은 그의 제국을 동쪽으로 더 넓히고 영국을 정복하고자 했으나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배로 꿈이 되고 말았다.
범선 시대의 마지막 대해전이자 영국의 막강 해군력 신화를 대표하는 전투들 가운데 하나이자, 영국이 자랑하는 대제독 넬슨이 전사한 전투이기도 했다.
이 해전의 승리는 이후 100년 동안 영국이 해상 지배권을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체사피크 레오퍼드 사건(Chesapeake–Leopard Affair)은 1807년 6월 22일 버지니아 주 노퍽(Norfolk) 해안에서 영국 전함 레오퍼드(Leopard)호와 미국 프리킷함 체사피크(Chesapeake)호의 해상 교전이다.
이 시기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의 여파로 캐나다에 기지를 둔 영국 해군은 미국 연안을 순찰하며 정찰활동을 했다. 중립의 입장을 취한 미국을 감시하고 자국 탈영병을 단속하는 임무였다.
영국의 레오퍼드호의 슬루베리 험프리즈(Salusbury Humphreys)함장은 탈령병의 정보를 입수하고 미국 체사피크호를 쫒아 수색을 진행했다.
버지니아 주 노퍽(Norfolk)에서 항해 준비를 하고 있던 체사피크호와 마주쳤다.
영국군이 탈영병 수색을 위해 체사피크호에 탑승하려 했으나 미국 승무원이 강하게 항의하자 레오퍼드호에서 대포를 발사했다. 아무런 준비를 못했던 체사피크호는 일방적으로 공격당했다. 3명이 사망하고 1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체사피크호 함장인 제임스 배런(James Barron)은 즉각 항복을 했다.
영국군은 레오퍼드호를 강제 수색하여 4명의 탈영병을 발견하였고 체사피크호도 나포되었다. 4명의 탈영병은 과거 영국 해군 출신이었으며 이중 3명은 미국 해군으로 전향한 미국인이었다. 군사재판으로 영국인 탈영병 1명은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나중에 3명은 체사피크호와 제임스 배런 함장, 승무원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제임스 배런은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정직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을 접한 미국 여론은 분노했으며 즉각적인 군사행동을 주장하며 전쟁을 불사할 만큼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러한 소동은 가라앉았다.
당시 미국은 해군도 약했으며 바르바리 해적의 미국상선 나포를 막기위하여 대부분의 함선이 지중해에 배치되어 있었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경제적으로 영국에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 사건은 1812년 미국-영국 전쟁이 발생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프리깃함(Frigate) : 대항해 시대 말기에 쓰인 대형 목조 범선의 하나. 순찰과 호위에 유용하게 바르고 가벼운 무장을 했다는 의미. 호위용 함선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1803년)이 재임 기간중 일어난 큰 사건이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이 시기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의 여파로 캐나다에 기지를 둔 영국 해군은 미국 연안을 순찰하며 정찰활동을 했다. 중립의 입장을 취한 미국을 감시하고 자국 탈영병을 단속하는 임무였다.
영국의 레오퍼드호의 슬루베리 험프리즈(Salusbury Humphreys)함장은 탈령병의 정보를 입수하고 미국 체사피크호를 쫒아 수색을 진행했다.
버지니아 주 노퍽(Norfolk)에서 항해 준비를 하고 있던 체사피크호와 마주쳤다.
영국군이 탈영병 수색을 위해 체사피크호에 탑승하려 했으나 미국 승무원이 강하게 항의하자 레오퍼드호에서 대포를 발사했다. 아무런 준비를 못했던 체사피크호는 일방적으로 공격당했다. 3명이 사망하고 1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체사피크호 함장인 제임스 배런(James Barron)은 즉각 항복을 했다.
영국군은 레오퍼드호를 강제 수색하여 4명의 탈영병을 발견하였고 체사피크호도 나포되었다. 4명의 탈영병은 과거 영국 해군 출신이었으며 이중 3명은 미국 해군으로 전향한 미국인이었다. 군사재판으로 영국인 탈영병 1명은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나중에 3명은 체사피크호와 제임스 배런 함장, 승무원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제임스 배런은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정직처분을 받았다.
이 사건을 접한 미국 여론은 분노했으며 즉각적인 군사행동을 주장하며 전쟁을 불사할 만큼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러한 소동은 가라앉았다.
당시 미국은 해군도 약했으며 바르바리 해적의 미국상선 나포를 막기위하여 대부분의 함선이 지중해에 배치되어 있었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경제적으로 영국에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 사건은 1812년 미국-영국 전쟁이 발생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프리깃함(Frigate) : 대항해 시대 말기에 쓰인 대형 목조 범선의 하나. 순찰과 호위에 유용하게 바르고 가벼운 무장을 했다는 의미. 호위용 함선
*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년~1826년) :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재임 : 1801년~1809년.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며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1803년)이 재임 기간중 일어난 큰 사건이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아르헨티나는 1516년,스페인의 탐험가 [1]주앙 디 솔리스에 의해 발견된 후 1580년부터 스페인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었다. 당시 수많은 식민지를 보유했던 스페인 제국은 식민지를 요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2]부왕령을 실시했다.
1776년에 [3]라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이 설치되었다. 이 영향으로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쓰이게 되었고 로마 카톨릭이 주요 종교가 되었다.
18세기 이후 유럽 철학의 주축이었던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사상과 더불어 미국의 독립선언(1776년)과 프랑스 혁명(1789년)은 당시 식민지 국가에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부추겼다.
1808년 스페인의 국왕 [5]페르난도 7세는 나폴레옹에게 양위했고, 나폴레옹은 [6]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으로 임명하면서 스페인의 권위는 실추된 상태였다.
이러한 시국에서 5월 혁명은 1810년 5월 18일부터 25일까지 [3]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일주일 동안 일어난 독립운동 사건이다. 이 결과 5월 25일 총독 [7]발타자르 히달고 드 시스네로스가 해임되고 첫번째 독립정부 의회인 프리메라 [8]훈타(Primera Junta)가 조직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스페인으로 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독립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10]호세 데 산마르틴이 1814년에서 1817년 사이에 독립 운동을 지휘하면서 점차 독립은 현실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10]산 마르틴을 국가 독립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1816년 7월 9일 [9]투쿠만 의회가 소집되어 스페인으로 부터의 공식적인 독립을 선언했다.
[1] 주앙 디 솔리스(Juan de Solís, 1470년~1516년) : 스페인의 탐험가.유럽인 최초로 우루과이에 상륙했다
[2] 부왕령(viceroyalty) : 본국의 국왕을 대신하는 직책인 부왕에 의해 통치되는 식민지
[3]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Viceroyalty of the Río de la Plata) : 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스페인 제국의 마지막 부왕령. 주로 리오데라플라타 유역(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 브라질 일부 지역 및 칠레 북부 지역 일대)을 중심으로 1776년에 세웠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삼았다
[5] 페르난도 7세(Fernando VII, 1784년~1833년) : 스페인 국왕(재위 : 1808년, 1813년~1833년). 스페인 부르봉 왕조 제7·8대 국왕
[6]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 1768년~1844년)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 나폴리와 시칠리아 국왕(재위 1806년 - 1808년), 스페인 국왕(호세 1세 보나파르테,재위 1808년 - 1813년)
[7] 발타자르 히달고 드 시스네로스(Baltasar Hidalgo de Cisneros, 1756년~1829년) :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마지막 총독
[8] 훈타(junta) : '모임','위원희'를 뜻하는 스페인 단어. 20세기 들어 중남미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가 스스로를 '훈타'로 칭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쿠데타로 인한 군사정부를 '훈타'라 부른다
[9] 투쿠만주(Provincia de Tucumán) :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위치한 주
[10] 호세 데 산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1778년~1850년) :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남아메리카를 해방시킨 영웅이자 아르헨티나 국민의 아버지 운동가
1776년에 [3]라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이 설치되었다. 이 영향으로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쓰이게 되었고 로마 카톨릭이 주요 종교가 되었다.
18세기 이후 유럽 철학의 주축이었던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사상과 더불어 미국의 독립선언(1776년)과 프랑스 혁명(1789년)은 당시 식민지 국가에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부추겼다.
1808년 스페인의 국왕 [5]페르난도 7세는 나폴레옹에게 양위했고, 나폴레옹은 [6]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으로 임명하면서 스페인의 권위는 실추된 상태였다.
이러한 시국에서 5월 혁명은 1810년 5월 18일부터 25일까지 [3]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일주일 동안 일어난 독립운동 사건이다. 이 결과 5월 25일 총독 [7]발타자르 히달고 드 시스네로스가 해임되고 첫번째 독립정부 의회인 프리메라 [8]훈타(Primera Junta)가 조직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스페인으로 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독립을 외친 것은 아니었다
[10]호세 데 산마르틴이 1814년에서 1817년 사이에 독립 운동을 지휘하면서 점차 독립은 현실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10]산 마르틴을 국가 독립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1816년 7월 9일 [9]투쿠만 의회가 소집되어 스페인으로 부터의 공식적인 독립을 선언했다.
[1] 주앙 디 솔리스(Juan de Solís, 1470년~1516년) : 스페인의 탐험가.유럽인 최초로 우루과이에 상륙했다
[2] 부왕령(viceroyalty) : 본국의 국왕을 대신하는 직책인 부왕에 의해 통치되는 식민지
[3]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Viceroyalty of the Río de la Plata) : 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스페인 제국의 마지막 부왕령. 주로 리오데라플라타 유역(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우루과이, 파라과이, 브라질 일부 지역 및 칠레 북부 지역 일대)을 중심으로 1776년에 세웠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삼았다
[5] 페르난도 7세(Fernando VII, 1784년~1833년) : 스페인 국왕(재위 : 1808년, 1813년~1833년). 스페인 부르봉 왕조 제7·8대 국왕
[6] 조제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 1768년~1844년)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형. 나폴리와 시칠리아 국왕(재위 1806년 - 1808년), 스페인 국왕(호세 1세 보나파르테,재위 1808년 - 1813년)
[7] 발타자르 히달고 드 시스네로스(Baltasar Hidalgo de Cisneros, 1756년~1829년) :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마지막 총독
[8] 훈타(junta) : '모임','위원희'를 뜻하는 스페인 단어. 20세기 들어 중남미에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가 스스로를 '훈타'로 칭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쿠데타로 인한 군사정부를 '훈타'라 부른다
[9] 투쿠만주(Provincia de Tucumán) :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위치한 주
[10] 호세 데 산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1778년~1850년) :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남아메리카를 해방시킨 영웅이자 아르헨티나 국민의 아버지 운동가
1521년에 [1]아즈텍 문명이 스페인의 정복자 [2]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정복당한후 300여 년의 기간 동안 멕시코는 스페인 식민지로 통치되었다.
멕시코는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여 1810년 9월 16일 [3]돌로레스에서 [4]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신부의 외침(일명 돌로레스의 외침, 울부짖음)으로 멕시코 인디오들과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인 [5]메스티조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한다. 1811년 [4]미겔 이달고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6]누에바에스파냐에 전해져 각지에서 항전이 이어졌다.
이달고 신부가 1811년 사망한 이후 [8]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4년간 독립운동은 계속하였으나 1815년 스페인군 소속 사령관인 [7]아구스틴 데이투르비데에게 패배당하고 만다.
독립군을 진압하던 [7]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스페인에 회의를 느끼고 무장투쟁을 하여 1821년 8월 24일 [6]누에바에스파냐의 부왕과 코르도바 조약(Treaty of Córdoba)을 체결하여 멕시코는 독립하였다.
이후 [7]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의회를 구성하고 입헌군주국 헌법을 제정한다. 1822년 5월 19일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스스로 아구스틴 1세(Agustin I)로 칭하면서 멕시코 제국을 성립했다.
[4]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신부의 외침은 멕시코 독립전쟁의 발단이 되어 9월 16일은 멕시코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1] 아즈텍 제국(Aztec Empire, 1248년~1521년): 라틴아메리카의 멕시코 중부 부근에 존재했던 아즈텍인들의 국가
[2]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 1485년~1547년) :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화의 첫 단계를 끊은 식민지 개척자로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3] 돌로레스 이달고(Dolores Hidalgo): 멕시코 중부 과나후아토(Guanajuato)주에 위치한 도시
[4] 미겔 이달고 코스티야(Miguel Hidalgo Costilla, 1753년~1811년) : 멕시코에서 태어난 토착민(크리오요)로서 카톨릭 신부. 멕시코 독립 초기 지도자.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5] 크리오요(스페인어: Crioll), 크리올(영어, Criole) : 본래 유럽인의 자손으로 식민지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보통 유럽계와 현지인의 혼혈을 부르는 말로 쓰인다. 그 무렵 멕시코에는 4개의 인종 집단이 있었다. 원주민인 인디오, 혼혈인 메스티조(Mestizo), 스페인 후손인 크리올, 스페인에서 건너온 백인 페닌슈랄(Peninsular) 등이다
[6] 누에바에스파냐(스페인어: Virreinato de Nueva España) : 북아메리카와 아시아-태평양에 위치한 스페인의 영토 행정 단위. 누에바에스파냐의 영토는 오늘날 미국 남서부, 멕시코, 중앙아메리카(파나마 제외), 카리브 해, 필리핀을 아울렀다.
[7]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 1783년~1824년) : 멕시코의 정치가로 당시 멕시코 독립 전쟁의 지도자이자 멕시코 제1제국의 초대 황제.
[8]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1765년~1815년) : 멕시코의 성직자이며 독립운동가
멕시코는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여 1810년 9월 16일 [3]돌로레스에서 [4]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신부의 외침(일명 돌로레스의 외침, 울부짖음)으로 멕시코 인디오들과 인디오와 백인의 혼혈인 [5]메스티조들은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한다. 1811년 [4]미겔 이달고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그의 정신은 [6]누에바에스파냐에 전해져 각지에서 항전이 이어졌다.
이달고 신부가 1811년 사망한 이후 [8]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4년간 독립운동은 계속하였으나 1815년 스페인군 소속 사령관인 [7]아구스틴 데이투르비데에게 패배당하고 만다.
독립군을 진압하던 [7]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스페인에 회의를 느끼고 무장투쟁을 하여 1821년 8월 24일 [6]누에바에스파냐의 부왕과 코르도바 조약(Treaty of Córdoba)을 체결하여 멕시코는 독립하였다.
이후 [7]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의회를 구성하고 입헌군주국 헌법을 제정한다. 1822년 5월 19일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스스로 아구스틴 1세(Agustin I)로 칭하면서 멕시코 제국을 성립했다.
[4]미겔 이달고 코스티야 신부의 외침은 멕시코 독립전쟁의 발단이 되어 9월 16일은 멕시코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1] 아즈텍 제국(Aztec Empire, 1248년~1521년): 라틴아메리카의 멕시코 중부 부근에 존재했던 아즈텍인들의 국가
[2]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 1485년~1547년) :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화의 첫 단계를 끊은 식민지 개척자로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3] 돌로레스 이달고(Dolores Hidalgo): 멕시코 중부 과나후아토(Guanajuato)주에 위치한 도시
[4] 미겔 이달고 코스티야(Miguel Hidalgo Costilla, 1753년~1811년) : 멕시코에서 태어난 토착민(크리오요)로서 카톨릭 신부. 멕시코 독립 초기 지도자.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5] 크리오요(스페인어: Crioll), 크리올(영어, Criole) : 본래 유럽인의 자손으로 식민지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보통 유럽계와 현지인의 혼혈을 부르는 말로 쓰인다. 그 무렵 멕시코에는 4개의 인종 집단이 있었다. 원주민인 인디오, 혼혈인 메스티조(Mestizo), 스페인 후손인 크리올, 스페인에서 건너온 백인 페닌슈랄(Peninsular) 등이다
[6] 누에바에스파냐(스페인어: Virreinato de Nueva España) : 북아메리카와 아시아-태평양에 위치한 스페인의 영토 행정 단위. 누에바에스파냐의 영토는 오늘날 미국 남서부, 멕시코, 중앙아메리카(파나마 제외), 카리브 해, 필리핀을 아울렀다.
[7]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 1783년~1824년) : 멕시코의 정치가로 당시 멕시코 독립 전쟁의 지도자이자 멕시코 제1제국의 초대 황제.
[8]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1765년~1815년) : 멕시코의 성직자이며 독립운동가
러다이트 운동은 19세기 초 영국에서 발생한 노동자들의 저항 운동으로, 산업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기술 발전과 기계화의 확산으로 인해 직물 산업 노동자들이 직면한 생계 위협과 실업 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1811년부터 1816년까지 주로 노팅엄셔(Nottinghamshire), 요크셔(Yorkshire), 랭커셔(Lancashire) 등의 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방적기, 직조기와 같은 기계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수공업 기반의 생산 방식을 빠르게 대체했다. 이로 인해 숙련된 직물 노동자들이 노동 시장에서 밀려나거나 임금이 급감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특히 고용주들은 기계 도입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한편, 노동자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노동 조건을 악화시키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불만이 커졌다.
운동의 이름은 전설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네드 러드(Ned Ludd)에서 유래했으며,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며,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한 사건과 관련된 상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러다이트 운동의 주요 특징은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공장과 기계 설비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표시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주로 야간에 활동하며 공장에 침입하여 기계를 부수거나, 이를 제조하는 시설을 공격했다.
운동의 배경에는 단순히 기술 혁신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기술 도입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특히 숙련 노동자의 소외와 저임금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계가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믿었으며, 기계화의 영향을 최소화하거나 철폐하려는 목적으로 이러한 행동을 취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영국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했다. 1812년, 정부는 "기계 파괴법"을 제정하여 기계 파괴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로 규정했고, 군대를 동원하여 운동을 진압했다. 수백 명의 러다이트 운동 참가자들이 체포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당했다. 이러한 영국정부의 강경한 진압으로 인해 러다이트 운동은 1816년경 사실상 종식되었다. 많은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되면서 조직적인 저항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단순히 기술 발전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는, 산업화와 기술 혁신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사회적·경제적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와 기술 도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으며, 이후 노동조합 운동 및 사회적 안전망 강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현대에는 인공지능(AI)과 자동화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며 일자리 감소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러다이트 운동은 기술 혁신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는 기술 발전이 필연적이더라도,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적 공정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방적기, 직조기와 같은 기계의 도입으로 전통적인 수공업 기반의 생산 방식을 빠르게 대체했다. 이로 인해 숙련된 직물 노동자들이 노동 시장에서 밀려나거나 임금이 급감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특히 고용주들은 기계 도입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한편, 노동자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노동 조건을 악화시키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불만이 커졌다.
운동의 이름은 전설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네드 러드(Ned Ludd)에서 유래했으며,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며,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한 사건과 관련된 상징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러다이트 운동의 주요 특징은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공장과 기계 설비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저항을 표시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주로 야간에 활동하며 공장에 침입하여 기계를 부수거나, 이를 제조하는 시설을 공격했다.
운동의 배경에는 단순히 기술 혁신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기술 도입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특히 숙련 노동자의 소외와 저임금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기계가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믿었으며, 기계화의 영향을 최소화하거나 철폐하려는 목적으로 이러한 행동을 취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영국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했다. 1812년, 정부는 "기계 파괴법"을 제정하여 기계 파괴를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로 규정했고, 군대를 동원하여 운동을 진압했다. 수백 명의 러다이트 운동 참가자들이 체포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당했다. 이러한 영국정부의 강경한 진압으로 인해 러다이트 운동은 1816년경 사실상 종식되었다. 많은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유배되면서 조직적인 저항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러다이트 운동은 단순히 기술 발전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는, 산업화와 기술 혁신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사회적·경제적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와 기술 도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으며, 이후 노동조합 운동 및 사회적 안전망 강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현대에는 인공지능(AI)과 자동화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며 일자리 감소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러다이트 운동은 기술 혁신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논의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는 기술 발전이 필연적이더라도,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적 공정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1]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인 1811년([2]순조 11년)부터 1812년까지 평안도 지역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으로, 홍경래, 우군칙, 김창시등이 중심으로 농민들의 저항 의식 성장과 [4]서북 지역의 특성이 결합하면서 일어났다. 이 난은 조선 사회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지역 차별, 그리고 지배층의 부패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다.
조선 후기 평안도는 청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중앙 정부로부터 지역적 차별을 받았다. 평안도 출신 사람들은 주요 관직에 오르기 어려웠고, 이는 지역 엘리트 계층과 농민들 사이에서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과도한 세금과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락 양반 출신인 홍경래는 부유한 상인들과 농민들을 규합해 봉기를 계획했다.
1811년 12월, 홍경래는 [3]정주성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켜 영세 농민, 상인, 그리고 소외된 양반 계층을 이끌었다. 그는 평안도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3]정주성을 본거지로 삼아 조선 정부에 대항했다.
봉기 세력은 순식간에 가산, 선천, 곽산 등 평안도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키웠지만, 조직력과 무기 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조선 정부는 중앙군과 관군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정주성에 고립되었고, 결국 1812년 초에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봉기는 진압되었다. 홍경래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처형되거나 사로잡혔으며, 반란에 가담했던 농민들도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홍경래의 난은 단순한 농민 봉기가 아니라, 지역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집단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평가되며, 이후 동학 농민 운동과 같은 다른 저항 운동의 선구적인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1] 홍경래(洪景來, 1780년~1812년 5월 29일) : 조선 후기 몰락 양반 출신으로, 평안도 지역의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하여 1811년 농민 봉기를 주도한 지도자
[2] 순조(純祖, 1790년~1834년) : 조선의 제23대 왕, 재위: 1800년 7월 4일 ~ 1834년 11월 13일 (음력)
[3] 정주성 :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에 있는 성곽
[4] 서북지역 : 평양직할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의 대부분, 량강도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
조선 후기 평안도는 청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중앙 정부로부터 지역적 차별을 받았다. 평안도 출신 사람들은 주요 관직에 오르기 어려웠고, 이는 지역 엘리트 계층과 농민들 사이에서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과도한 세금과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락 양반 출신인 홍경래는 부유한 상인들과 농민들을 규합해 봉기를 계획했다.
1811년 12월, 홍경래는 [3]정주성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켜 영세 농민, 상인, 그리고 소외된 양반 계층을 이끌었다. 그는 평안도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3]정주성을 본거지로 삼아 조선 정부에 대항했다.
봉기 세력은 순식간에 가산, 선천, 곽산 등 평안도의 주요 지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키웠지만, 조직력과 무기 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조선 정부는 중앙군과 관군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정주성에 고립되었고, 결국 1812년 초에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봉기는 진압되었다. 홍경래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처형되거나 사로잡혔으며, 반란에 가담했던 농민들도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홍경래의 난은 단순한 농민 봉기가 아니라, 지역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집단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평가되며, 이후 동학 농민 운동과 같은 다른 저항 운동의 선구적인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1] 홍경래(洪景來, 1780년~1812년 5월 29일) : 조선 후기 몰락 양반 출신으로, 평안도 지역의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저항하여 1811년 농민 봉기를 주도한 지도자
[2] 순조(純祖, 1790년~1834년) : 조선의 제23대 왕, 재위: 1800년 7월 4일 ~ 1834년 11월 13일 (음력)
[3] 정주성 :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에 있는 성곽
[4] 서북지역 : 평양직할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의 대부분, 량강도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20여 년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하고 유럽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5]발하우스플라츠에서 모여 개최한 회의이다.
빈 회의의 기본목적은 세력균형과 정통주의라는 원칙이다.
세력균형의 원칙은 프랑스의 재침략을 예방할 수 있는 장치 마련과 나폴레옹에 의해 개편된 유럽의 국경선을 어떻게 다시 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정통주의 원칙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말미암아 퇴위한 과거 왕조들을 복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트리아는 회의 주재국으로 [1]메테르니히가, 영국은 [4]로버트 스튜어트, 러시아는 [13]알렉산드르 1세, [3]프로이센은 [14]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참석하였다
주요 현안은 러시아, [3]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등 승전 4대강국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패전국인 프랑스는 [2]탈레랑페리고르의 유능함과 능란한 책략으로 강대국의 일원으로 협상에 참여하였다.
빈 회의는 각국 대표단이 하나둘씩 도착하는 데만 한 달여를 소비한 끝에 11월에 들어서야 공식개회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더디고 느린 진행이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틈새마다 축제와 연회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참가국이 많이 크고 작은 90개 왕국과 52개 공국, 교황령등이 참가했으나 전체 회의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4대 강국과 패전국인 프랑스는 연일 머리를 맞댔지만 모두가 만족할 방안이 없었다. 각 국의 영토와 이권을 둘러싼 각국의 대립과 갈등으로 회의가 지속되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무너지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으나 민심을 얻지 못했다. 1815년 3월초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서 파리에 다시 입성했고 루이 18세는 벨기에로 도피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지지부진했던 각국들의 회의는 속도가 붙었다. 예상치 못한 나폴레옹의 재등장은 오히려 꼬여만 가던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타결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열강들을 비롯한 각국은 [12]워털루 전투를 열흘 남짓 앞두고 위기감에 한 마음 한 뜻으로 타협하여, 마침내 합의 사항들을 121개 조항과 17개 부속규정으로 이루어진 '최종의정서’, 이른바 '빈 조약'을 1815년 6월 9일에 공포했다.
빈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유럽의 체제를 빈 체제라 부른다.
최종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러시아는 바르샤바 대공국의 대부분과 핀란드 영토를 차지한다.
② 프로이센은 작센의 북부와 [6]바르샤바 공국의 일부인 [7]포젠지역과 라인란트, [8]베스트팔렌, 단치히를 차지한다.
③ 옛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인 38개의 공국으로 이루어진 독일연방을 구성한다. 연방의 의장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맡는다.
④ 네덜란드와 [9]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연합왕국으로 통합한다.
⑤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를 포기하는 대신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지역의 라구사를 차지한다.
⑥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8국위원회(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스웨덴, 포르투갈, 에스파냐)에 의해 인정받는다.
⑦ 하노버 왕국은 라우엔부르크 공국을 덴마크에 내주는 대신 뮌스터 주교령과 프로이센령 동프리지아를 얻는다.
⑧ 바이에른 왕국은 팔라티나 지방, 뷔르츠부르크 공작령의 일부, 프랑크푸르트 공국을 차지하며, [11]헤센 대공국은 [8]베스트팔렌을 [3]프로이센에 내주는 대신 라인-헤센 지역을 차지한다.
⑨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토바고, 모리셔스, 세인트루시아 등 대서양 식민지들을 차지하며, 네덜란드로부터 실론과 케이프 식민지를 얻는다.
⑩ 사르데냐 왕국은 피에몬테, 니스, 사부아, 제노아를 되찾는다.추가로 제노바 공화국을 왕국의 영토로 흡수한다.
⑪ 나폴리 왕국은 부르봉나폴리 왕가의 페르디난도 4세가 복위하며, 시칠리아 왕국을 합병한다.
⑫ 파르마, 모데나, 투스카니아 공국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복귀한다.
[1]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1773년 ~ 1859년) : 합스부르크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교관, 정치가
[2]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1754년~1838년) : 프랑스의 정치가,
[3] 프로이센(Prussia) : 170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한 독일 제국 내의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동북쪽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출발하여 독일 제국 수립의 주역으로 성장한 국가
[4] 로버트 스튜어트(Robert Stewart, 1769년~1822년) : 영국의 정치가·외교관. 흔히 캐슬레이 경(Lord Castlereagh) 혹은 캐슬레이 자작(Viscount Castlereagh)으로 림, 외무상으로 재임(1812년~1822년)하는 동안, 빈 체제 성립에 기여했다
[5] 발하우스플라츠(Ballhausplatz) : 오스트리아의 정치1번지. 현재 현재 오스트리아의 총리 관저
[6] 바르샤바 공국(Duchy of Warsaw) : 1807년부터 1815년까지 지금의 폴란드 지역에 존속했던 국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이 폴란드 지역에 만든 국가
[7] 포젠(Posen) : 독일과 폴란드 두 국가의 역사가 겹치는 지역. 나폴레옹 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로 편입. 현재는 폴란드 지역
[8] 베스트팔렌(Westfalen) : 독일의 서부 지역 중 하나.
[9]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Austrian Netherlands) : 합스부르크 제국의 남네덜란드로 현재의 벨기에
[10] 라구사 공화국(Respublica Ragusina) : 현재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역에 14세기부터 1808년까지 이어졌던 공화국. 수도 라구사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 해당. 나폴레옹전쟁으로 1808년에 멸망
[11] 헤센 대공국(Grand Duchy of Hesse) : 1806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서부의 대공국. 오늘날 독일의 헤센 주 지역을 구성
[12]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 1815년 6월 18일 오늘날의 벨기에 워털루 인근에서 벌어진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의 대프랑스 연합군 간의 벌어진 전투. 이 전투로 나폴레옹은 완전히 종결되고,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은 종식되었다
[13]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 of Russia, 1777년~1825년) : 러시아 제국의 황제(재위 1801년 3월 23일 ~ 1825년 12월 1일). 로마노프 왕조의 10대 황제
[14]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ederick William III of Prussia, 1770년~1840년) : 프로이센의 제5대 국왕(재위 1797년 11월 16일~1840년 6월 7일)
빈 회의의 기본목적은 세력균형과 정통주의라는 원칙이다.
세력균형의 원칙은 프랑스의 재침략을 예방할 수 있는 장치 마련과 나폴레옹에 의해 개편된 유럽의 국경선을 어떻게 다시 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정통주의 원칙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말미암아 퇴위한 과거 왕조들을 복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트리아는 회의 주재국으로 [1]메테르니히가, 영국은 [4]로버트 스튜어트, 러시아는 [13]알렉산드르 1세, [3]프로이센은 [14]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참석하였다
주요 현안은 러시아, [3]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영국 등 승전 4대강국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패전국인 프랑스는 [2]탈레랑페리고르의 유능함과 능란한 책략으로 강대국의 일원으로 협상에 참여하였다.
빈 회의는 각국 대표단이 하나둘씩 도착하는 데만 한 달여를 소비한 끝에 11월에 들어서야 공식개회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더디고 느린 진행이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틈새마다 축제와 연회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참가국이 많이 크고 작은 90개 왕국과 52개 공국, 교황령등이 참가했으나 전체 회의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4대 강국과 패전국인 프랑스는 연일 머리를 맞댔지만 모두가 만족할 방안이 없었다. 각 국의 영토와 이권을 둘러싼 각국의 대립과 갈등으로 회의가 지속되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무너지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으나 민심을 얻지 못했다. 1815년 3월초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서 파리에 다시 입성했고 루이 18세는 벨기에로 도피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지지부진했던 각국들의 회의는 속도가 붙었다. 예상치 못한 나폴레옹의 재등장은 오히려 꼬여만 가던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타결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열강들을 비롯한 각국은 [12]워털루 전투를 열흘 남짓 앞두고 위기감에 한 마음 한 뜻으로 타협하여, 마침내 합의 사항들을 121개 조항과 17개 부속규정으로 이루어진 '최종의정서’, 이른바 '빈 조약'을 1815년 6월 9일에 공포했다.
빈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유럽의 체제를 빈 체제라 부른다.
최종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러시아는 바르샤바 대공국의 대부분과 핀란드 영토를 차지한다.
② 프로이센은 작센의 북부와 [6]바르샤바 공국의 일부인 [7]포젠지역과 라인란트, [8]베스트팔렌, 단치히를 차지한다.
③ 옛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인 38개의 공국으로 이루어진 독일연방을 구성한다. 연방의 의장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맡는다.
④ 네덜란드와 [9]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연합왕국으로 통합한다.
⑤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를 포기하는 대신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와 달마티아 지역의 라구사를 차지한다.
⑥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의 지위를 8국위원회(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스웨덴, 포르투갈, 에스파냐)에 의해 인정받는다.
⑦ 하노버 왕국은 라우엔부르크 공국을 덴마크에 내주는 대신 뮌스터 주교령과 프로이센령 동프리지아를 얻는다.
⑧ 바이에른 왕국은 팔라티나 지방, 뷔르츠부르크 공작령의 일부, 프랑크푸르트 공국을 차지하며, [11]헤센 대공국은 [8]베스트팔렌을 [3]프로이센에 내주는 대신 라인-헤센 지역을 차지한다.
⑨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토바고, 모리셔스, 세인트루시아 등 대서양 식민지들을 차지하며, 네덜란드로부터 실론과 케이프 식민지를 얻는다.
⑩ 사르데냐 왕국은 피에몬테, 니스, 사부아, 제노아를 되찾는다.추가로 제노바 공화국을 왕국의 영토로 흡수한다.
⑪ 나폴리 왕국은 부르봉나폴리 왕가의 페르디난도 4세가 복위하며, 시칠리아 왕국을 합병한다.
⑫ 파르마, 모데나, 투스카니아 공국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복귀한다.
[1]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1773년 ~ 1859년) : 합스부르크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교관, 정치가
[2]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1754년~1838년) : 프랑스의 정치가,
[3] 프로이센(Prussia) : 170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한 독일 제국 내의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동북쪽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출발하여 독일 제국 수립의 주역으로 성장한 국가
[4] 로버트 스튜어트(Robert Stewart, 1769년~1822년) : 영국의 정치가·외교관. 흔히 캐슬레이 경(Lord Castlereagh) 혹은 캐슬레이 자작(Viscount Castlereagh)으로 림, 외무상으로 재임(1812년~1822년)하는 동안, 빈 체제 성립에 기여했다
[5] 발하우스플라츠(Ballhausplatz) : 오스트리아의 정치1번지. 현재 현재 오스트리아의 총리 관저
[6] 바르샤바 공국(Duchy of Warsaw) : 1807년부터 1815년까지 지금의 폴란드 지역에 존속했던 국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이 폴란드 지역에 만든 국가
[7] 포젠(Posen) : 독일과 폴란드 두 국가의 역사가 겹치는 지역. 나폴레옹 전쟁시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로 편입. 현재는 폴란드 지역
[8] 베스트팔렌(Westfalen) : 독일의 서부 지역 중 하나.
[9]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Austrian Netherlands) : 합스부르크 제국의 남네덜란드로 현재의 벨기에
[10] 라구사 공화국(Respublica Ragusina) : 현재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역에 14세기부터 1808년까지 이어졌던 공화국. 수도 라구사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 해당. 나폴레옹전쟁으로 1808년에 멸망
[11] 헤센 대공국(Grand Duchy of Hesse) : 1806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했던 독일 서부의 대공국. 오늘날 독일의 헤센 주 지역을 구성
[12]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 : 1815년 6월 18일 오늘날의 벨기에 워털루 인근에서 벌어진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의 대프랑스 연합군 간의 벌어진 전투. 이 전투로 나폴레옹은 완전히 종결되고,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은 종식되었다
[13]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 of Russia, 1777년~1825년) : 러시아 제국의 황제(재위 1801년 3월 23일 ~ 1825년 12월 1일). 로마노프 왕조의 10대 황제
[14]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ederick William III of Prussia, 1770년~1840년) : 프로이센의 제5대 국왕(재위 1797년 11월 16일~1840년 6월 7일)
알제리 전쟁(Algerian war)이라고도 한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 이후 바르바리의 해적들의 미국과 유럽의 상선에 대한 해적 행위는 멈췄다. 통행료를 납부하던 관습을 끝내고 원할하게 이 지역을 통과했다.
하지만 1812년 미국-영국 전쟁으로 국력이 내부에 쏠리면서 북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졌다.
바르바리 국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과 유럽 상선에 대한 해적 행위를 다시 시작하여 선원들을 나포하여 몸값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내 1815년 2월 미국-영국 전쟁이 끝나고 미국 의회는 3월에 미 해군 파견을 승인했다. 2개의 전투대대를 구성하여 전쟁준비에 나섰다.
윌리엄 베인브리지 함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보스텅 항구로, 스티븐 디케이터 함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뉴욕 항으로 집결했다. 디케이터의 전대가 먼저 준비를 마치고 5월 20일에 출항하여 6월 15일 지브롤터를 지났다.
6월 17일 스티븐 디케이터 함대는 지중해로 이동중에 알제리 전함인 메슈다(Meshuda)호를 만나 바로 공격하였고 나포하였다. 이어 이틀후에 파로스 곶 해안에서 알제리의 에스테디호(Estedio)호도 전투 끝에 나포했다.
6월말 알제리 항구에 도착한 미국은 당시 알제리 파샤인 데이 오마르(Omar Agha)와 협상에 들어갔다.
도시를 파괴하겠다는 위협으로 인질석방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미국의 조건에 알제리의 파샤는 받아들였다. 7월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나포한 '메슈다(Meshuda)호와 에스테디호(Estedio)호는 돌려주었으며 미국의 인질은 돌아왔고 미국의 상선은 더 이상 통행료를 납부하지 않아도 됐다.
* 오스만 제국 :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고대 그리스에서 아시아라고 불렸던 지방으로서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하는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 터키제국, 오스만튀르크라고도 불린다
* 바르바리국가 :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는 트리폴리, 알제리, 튀니스의 3개 나라를 합쳐 부르는 명칭
* 바르바리(Barbary) : 유럽에서 베르베르인(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이 살던 지역을 부르던 말. 특히 아프리카의 북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국가인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해안 지역을 말한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 파로스 곳(Cape Palos) : 스페인의 남부 지중해와 접한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있는 곳
* 트리폴리(Tripoli) : 리비아의 수도
* 튀니스(Tunis) : 튀니지의 수도
* 스티븐 디케이터(Stephen Decatur, 1779년~1820년) : 미국의 군인으로 해군 준장. 바르바리 전쟁과 미영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미국 해군 사상 가장 어린 나이인 25세에 대령(Captain)의 계급으로 승진하였으며 국가적 영웅으로 기리고 있다
* 파샤 : 오스만 제국의 최고위층 귀족에게 주어진 호칭. 주로 장군이나 지방 총독에게 주어졌다. 영국의 경(lord)과 비슷하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 이후 바르바리의 해적들의 미국과 유럽의 상선에 대한 해적 행위는 멈췄다. 통행료를 납부하던 관습을 끝내고 원할하게 이 지역을 통과했다.
하지만 1812년 미국-영국 전쟁으로 국력이 내부에 쏠리면서 북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졌다.
바르바리 국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과 유럽 상선에 대한 해적 행위를 다시 시작하여 선원들을 나포하여 몸값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내 1815년 2월 미국-영국 전쟁이 끝나고 미국 의회는 3월에 미 해군 파견을 승인했다. 2개의 전투대대를 구성하여 전쟁준비에 나섰다.
윌리엄 베인브리지 함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보스텅 항구로, 스티븐 디케이터 함장이 지휘하는 전대는 뉴욕 항으로 집결했다. 디케이터의 전대가 먼저 준비를 마치고 5월 20일에 출항하여 6월 15일 지브롤터를 지났다.
6월 17일 스티븐 디케이터 함대는 지중해로 이동중에 알제리 전함인 메슈다(Meshuda)호를 만나 바로 공격하였고 나포하였다. 이어 이틀후에 파로스 곶 해안에서 알제리의 에스테디호(Estedio)호도 전투 끝에 나포했다.
6월말 알제리 항구에 도착한 미국은 당시 알제리 파샤인 데이 오마르(Omar Agha)와 협상에 들어갔다.
도시를 파괴하겠다는 위협으로 인질석방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미국의 조건에 알제리의 파샤는 받아들였다. 7월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나포한 '메슈다(Meshuda)호와 에스테디호(Estedio)호는 돌려주었으며 미국의 인질은 돌아왔고 미국의 상선은 더 이상 통행료를 납부하지 않아도 됐다.
* 오스만 제국 : 14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고대 그리스에서 아시아라고 불렸던 지방으로서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하는 반도)를 중심으로 유럽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 터키제국, 오스만튀르크라고도 불린다
* 바르바리국가 :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는 트리폴리, 알제리, 튀니스의 3개 나라를 합쳐 부르는 명칭
* 바르바리(Barbary) : 유럽에서 베르베르인(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이 살던 지역을 부르던 말. 특히 아프리카의 북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국가인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해안 지역을 말한다.
* 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 Barbary corsairs) :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모로코등 북아프리카 서부지역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하던 해적
* 파로스 곳(Cape Palos) : 스페인의 남부 지중해와 접한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있는 곳
* 트리폴리(Tripoli) : 리비아의 수도
* 튀니스(Tunis) : 튀니지의 수도
* 스티븐 디케이터(Stephen Decatur, 1779년~1820년) : 미국의 군인으로 해군 준장. 바르바리 전쟁과 미영 전쟁에서 활약하였다. 미국 해군 사상 가장 어린 나이인 25세에 대령(Captain)의 계급으로 승진하였으며 국가적 영웅으로 기리고 있다
* 파샤 : 오스만 제국의 최고위층 귀족에게 주어진 호칭. 주로 장군이나 지방 총독에게 주어졌다. 영국의 경(lord)과 비슷하다
워털루 전투는 1803년부터 시작된 나폴레옹 전쟁 최후의 전투이며, 이전투에서 프랑스가 패하면서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은 끝나게 된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네덜란드(당시 브뤼셀은 네덜란드 소속이었다)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싸운 전투이며, 이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추방되었던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복귀하였으나)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프랑스 제1제국 또한 붕괴되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년~1821년) :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다
* 프로이센(Kingdom of Prussia) : 유럽 동북부와 중부(중앙유럽)지방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자 해당 지역에 존재했던 나라의 국호.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한 국가
* 워털루(Waterloo) : 벨기에 동남부의 지명. 수도 브뤼셀에서 동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지역에 위치
* 웰링턴 공작(Duke of Wellington) : 영국의 귀족 작위. 초대 공작(1814년)의 자손들이 상속받으며 현재는 제9대(2014년~) 공작으로 아서 찰스 발레리언 웰즐리이다
*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 1769년~1852년) : 제1대 웰링턴 공작. 군인출신으로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치가로 활동하여 총리를 역임했으며, 이후 영국 육군 총사령관이 되기도 하였다.
*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1742년~1819년) :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육군원수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 네덜란드(당시 브뤼셀은 네덜란드 소속이었다)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싸운 전투이며, 이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추방되었던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복귀하였으나)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프랑스 제1제국 또한 붕괴되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년~1821년) : 프랑스 제1공화국의 군인이자 1804년부터 1814년, 1815년까지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였다
* 프로이센(Kingdom of Prussia) : 유럽 동북부와 중부(중앙유럽)지방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자 해당 지역에 존재했던 나라의 국호.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한 국가
* 워털루(Waterloo) : 벨기에 동남부의 지명. 수도 브뤼셀에서 동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지역에 위치
* 웰링턴 공작(Duke of Wellington) : 영국의 귀족 작위. 초대 공작(1814년)의 자손들이 상속받으며 현재는 제9대(2014년~) 공작으로 아서 찰스 발레리언 웰즐리이다
*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 1769년~1852년) : 제1대 웰링턴 공작. 군인출신으로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치가로 활동하여 총리를 역임했으며, 이후 영국 육군 총사령관이 되기도 하였다.
*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1742년~1819년) :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육군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