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사건기간 : 1992년 4월 6일~1995년 12월 14일, 조회수 : 487, 등록일 : 2022-02-18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보슈냐크계(이슬람교), 크로아티아계(카톨릭), 세르비아계(정교회)등으로 구성된 3개의 언어와 민족, 종교가 공존하는 국가이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분열로 1990년에 연방 구성국인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을 하였다. 이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도 독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보스니아의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독립에 찬성하였으나 세르비아계는 연방 잔류를 원하면서 분란이 시작되었다.
1992년 2월 29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독립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분리 독립을 반대한 세르비아계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투표결과 독립찬성으로 나오자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선포하고 유고 연방으로 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세르비아계는 반발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세르비아계의 [1]라도반 카라지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내 [2]스릅스카 공화국을 세우고 유고연방의 [3]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지원으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세르비아계군에 의해 1992년 4월 6일부터 43~44개월간 봉쇄된 사라예보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으며 도시내에서 포격과 저격으로 무고한 시민 1만 6천여명이 사망했다. 사라예보로 들어가는 식량과 의약품 보급을 차단한 뒤 언덕마다 저격수를 배치해 민간인을 사살하고 박격포를 쏘는 등 테러행위를 자행했다. 또한 1896년에 개관하여 보스니아에 남은 오스만 제국 문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양한 문서가 보존된 국립도서관이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보스니아 전역에서 25~30만명이 숨지고 '나치의 대학살'에 비유될 만큼 참혹했다. 민족과 종교의 갈등으로 전쟁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전투가 아닌 인종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대량학살로 사망했다. 또한 보스니야계 주민들을 가둬두었던 사라예보 인근마을인 그르바비차에서는 계획적으로 2만명의 여성이 집단강간을 당했다.
내전이 격화하자 나토(NATO)가 인종 청소를 벌이는 등 만행을 자행하던 세르비아계 군대를 공습하는 등 국제사회가 개입했다.
결국 1995년 12월 14일 미국의 중재로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서 협정이 체결되어 세르비아계(스릅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계-보슈냐크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하나의 연방내에서 공존하는 1국가 2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관련영화] 그르바비차(Grbavica) : 2006년 공개. 2006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 내용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살고 있는 12세난 소녀 사라가 자신이 전쟁영웅의 딸이 아니라 세르비아군의 강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 장르 : 드라마, 90분
- 감독 : 야스밀라 즈바닉(Jasmila Zbanic)
- 주연 : 미르야나 카라노비치(Mirjana Karanovic 에스마 역), 루나 미조빅(Luna Mijovic, 사라 역), 레온 루체프(Leon Lucev, 펠다 역)
[1]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 1945년~) : 스릅스카 공화국의 제1대 대통령(1992년~1996년).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대학살을 주도한 전쟁범죄자로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이 종전되자 종적을 감추었다. 이후 전쟁 범죄자로 지명 수배중에 2008년 7월 체포되어 2016년 1심재판 징역 40년, 1019년 2심 재판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세르비아계 자치공화국
[3]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 1941년~2006년)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1997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3대 대통령(1997년~2000년). 세르비아인이 아닌 타 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갖은 만행을 주도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 행위로 유고연방 대통령에서 사임하고 2001년에 부정부패, 권력남용, 횡령혐의 및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중에 2006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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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군의 전차 운반 크레인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태우고 가던 자동차를 덮쳐서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장례식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군집하면서 반 이스라엘 투쟁으로 확산되어 [1]인티파다로 발전했다. 지역적으로도 [2]가자지구에서 [3]서안지구로 확대되어 내전상태가 되었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 알아타르는 시몬 이프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 이프라는 재미로 쏘아 죽였다. 이 후 시몬 이프라는 체포되었지만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리고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15세 전후의 청소년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차지하던 가자 지구와 요르단이 차지하던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세대였다.
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전체를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 [4]오슬로협정으로 인티파다는 끝을 맺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만명의 부상과 1,500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 역시 시민과 군인 270여명이 사망했다.
[1] 인티파다(Intifada) : 봉기, 반란, 각성 등을 뜻하는 아랍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이스라엘만 국가로 인정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 인티파다는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의미한다
[2]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3]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에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상호인준을 합의하였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전쟁은 두나라간의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독립을 둘러싸고 발생한 분쟁으로서 초기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내전 형태로 발발하였으나 이후 양국의 전면전으로 발전한 분쟁이다.
1988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을 둘러싸고 러시아혁명 이후 잠잠했던 지역간 민족간 갈등이 표출되었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1923년 이래 자치주로 지정되어 왔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한창 불어 닥치던 80년대 후반에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살아온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키거나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인정해줄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로서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의 영역이라고 반박하며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1988년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자유화 물결에 편승해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합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있었고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통합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는 반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 운동을 부추기는 형태가 되어 대대적인 반아르메니아 운동과 나고르노ㆍ카라바흐의 합병 반대 시위를 초래하였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양 민족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양국 간의 전투는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이런 가운데 양국 간에는 1993년 7월초 전투로 분쟁의 양상은 다시 국제전화(이란, 터키, 러시아등 개입시사)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평화회담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고 동년 9월 25일 양국정상은 회담을 갖고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1994년 5월 끝이 보이지 않던 양국의 전쟁은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 :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1918년 4월부터 5월까지 현재 캅카스(Caucasus)산맥 일대에 존재했던 연맹국가. 1918년 5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할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아르차흐 공화국(Republic of Artsakh),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 :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casus)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 아르메니아)/한켄디(Khankendi, 아제르바이잔)이다.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공화국(Nagorno-Karabakh)'이였으나 2017년 2월 20일에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거쳐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다수의 지도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혹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영토 분쟁지로 표시된다.
*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 '재건', '개혁'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실시한 개혁정책. 고르바초프는 국내측면에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고, 대외측면에서는 긴장 완화와 군축정책을 실시하여 동구권의 체제 변혁과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냈다.
시에라리온 내전(1991~2002)은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발생한 참혹한 무력 충돌로, 약 11년간 지속되며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과 인권 유린을 초래한 내전이다. 1991년 3월 23일 [2]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은 시에라리온 반군 조직인 [1]혁명연합전선이 시에라리온 동부 국경 지역을 점령하며 시작되었다.
[1]혁명연합전선의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는 시에라리온 정부의 부패와 불평등을 비판하며 무장 투쟁을 벌였지만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강제 징집, 성폭행, 어린 병사의 활용, 그리고 도끼로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특히 시에라리온의 풍부한 다이아몬드 자원을 이용해 무기와 자금을 확보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는 [4]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시에라리온 정부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양한 민병대 및 외국 용병들과 연합했으며,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한 [5]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전은 잦은 휴전과 협정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재개되었고 갈등은 점점 복잡해졌다.
1999년 7월 7일에 토고의 수도인 로메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지만 [1]혁명연합전선은 이 협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2000년 5월 [7]프리타운을 공격 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이후 [6]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었고, 영국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 단행하여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를 체포함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2년 1월 18일, 당시 대통령 [8]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가 공식적으로 전쟁 종식을 선언하며 종전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약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전후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전범 처벌이 이뤄졌고 국가 재건과 화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어졌다.
[1] 혁명연합전선(RUF, Revolutionary United Front) : 시에라리온 내전을 일으킨 반군 조직으로 부패한 정부 타도를 명분으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민간인 학살, 강제 노동, 아동 병사 징집 등 극단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다이아몬드 자원을 통해 무기를 조달하며 내전을 장기화시켰다. 현재는 해체되었다 [2]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 1989년 찰스 테일러가 주도해 결성한 무장 반군 조직으로 라이베리아 내전(1989~1997)의 주요 세력이었다. NPFL은 독재자 사무엘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대규모 민간인 학살, 강간, 강제 징집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전쟁 후 찰스 테일러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과 전쟁범죄로 국제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 포다이 사이바나 산코(Foday Saybana Sankoh, 1937년 10월 17일~2003년 7월 29일) :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아 시에라리온 반군 단체 혁명연합전선의 설립자. 시에라리온 내전 후 전쟁범죄로 기소되었으며, 2003년 재판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4] 블러드 다이아몬드(conflict diamonds, hot diamonds, war diamonds 또는 red diamonds) : 무력분쟁 지역(주로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수익금이 전쟁 수행을 위한 무기구매등 자금 조달에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5]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 :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가 설립한 군산 평화유지 기구로,주로 회원국 내 분쟁과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파병된다. 회원국은 가나, 감비아, 기니, 기니비사우, 나이지리아, 베냉, 라이베리아, 세네갈, 시에라리온, 카보베르데,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 12개 국가이다. 아프리카 연합 및 유엔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6] 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UNAMSIL, United Nations Mission in Sierra Leone) :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시에라리온에서 진행된 유엔 평화유지군. 1999년 10월 22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로메 평화협정을 이행하는 데 있어 정부와 다른 당사자들과 협력하고 군축, 동원 해제 및 재통합 계획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UNAMSIL을 설립했다. 2005년 12월 유엔 시에라리온 통합 사무소(UNIOSIL)가 뒤를 이었다. UNIOSIL의 임기는 두 번 연장되었고 2008년 9월에 끝났다 [7] 프리타운(Freetown) : 시에라리온의 수도 [8] 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Alhaji Ahmad Tejan Kabbah, 1932년 2월 16일 ~ 2014년 3월 13일) : 시에라리온의 정치인이다. 시에라리온의 제3대 대통령. 두차례 역임(1996년 3월 29일 ~1997년 5월 25일, 1998년 3월 10일~2007년 9월 17일)
1991년 민족과 지역 간 갈등으로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1990년대 내내 일련의 전쟁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어 7개 나라로 분리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불렀지만 내전은 같은 나라 안에서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무력투쟁을 말하는데 1992년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해체되어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연방 분리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연방 유지를 주장한 세르비아간의 전투로 시작되었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사태(1992 Los Angeles Riots, Rodney King Riots, South Central Riots, 1992 Los Angeles Civil Disturbance, 1992 Los Angeles Civil Unrest)는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종차별에 격분한 흑인들에 의해 발생한 유혈사태였다.
사건의 발단은 미국 LA 경찰청 4명의 경찰관들이 과속으로 운전한 흑인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으로 폭행을 가하였다. 이러한 경찰관들의 집단폭행으로 로드니 킹은 평생 청각장애인이 되었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관들의 무죄가 판결나면서 흑인사회에서 잠재되었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폭발되었다. 분노는 시위로 번졌고 급기야 6일동안 폭동으로 변해갔고 곳곳에 방화 및 약탈, 총격전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폭동이 일어난 지점과 그 인근에는 코리아타운이 있었으며 사건의 발생 과정에서 흑인들의 한인 반감이 더해지면서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되어 한인들은 정신적 충격과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LA한인 사회에서는 지금도 이 사건을 '사이구(4.29)'라고 불리고 있으며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었다.
이 폭동으로 재산 피해액이 약 10억 달러 이상, 총 50여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미국 인종차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역사와 전통, 민족이 다른 두 개의 국가였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항복으로 헝가리의 지배를 받아왔던 슬로바키아는 체코와 연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라는 하나의 나라로 독립되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약 1천여년간 서로 다른 역사속에서도 [2] 슬라브민족이라는 동질감과 언어적 유사성으로 교류와 연대를 유지해왔으며 두 민족이 가진 이해관계를 통해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 경제, 문화적 차이가 크다는 것을 느낀 두 민족은 갈라서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면서 다시 하나의 국가로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서서히 파고 들어온 공산주의와 친소련 정책으로 공산화되어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당의 독재가 지속된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1969년 정치개혁을 통하여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연방화를 시행하게 된다.
1989년 11월 40여년 동안 지속되어 온 공산정권과 소련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동유럽 국가들의 혁명이 일어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3] 벨벳혁명으로 민주주의 체제의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이 탄생한다. 그러나 벨벳혁명이후 급속한 개혁의 추진은 또 다시 민족 문제를 야기시킨다. 개혁의 부작용이 슬로바키아인들의 불만을 고조시킨다.
또한 노선과 방향이 판이하게 다른 두 정당이 연방의회를 이끌게 되면서 상호 알력과 반목은 점점 커지게 되었다. 결국 두 정당은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해체를 합의하게 되면서 1993년 1월1일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나뉜다.
비폭력 혁명으로 공산정권을 무너뜨린 벨벳혁명처럼 두 국가의 분리가 평화롭게 진행되어 '벨벳이혼'이라고도 불린다.
수십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두 국가는 매우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4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유로에 가입했다.
[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중앙유럽에 존재했던 입헌군주제 국가이며 합스부르크 왕조가 다스렸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해체되었다
[2] 슬라브(Slavs)족 : 동슬라브족(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서슬라브족(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남슬라브족(불가리아,보스니아,슬로베니아,세르비아,크로아티아)
[3] 벨벳혁명(1989년 11월 17일~1989년 12월 29일) : 1989년 평화적인 시위로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고 정권 교체를 이뤄낸 무혈혁명
오슬로 협정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갈등과 분쟁을 계속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분쟁을 종식키로 한 평화협정이다.
1993년 8월 20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비밀리에 만나 팔레스타인 자치안에 합의한 후, 곧이어 9월 13일 워싱턴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주재하에 이스라엘 [1]라빈 총리와 [3]아라파트 [4]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합의안에 서명함으로써 두 민족간 평화와 공존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3]아라파트 의장과 [1]라빈 총리, 그리고 협상에 참여한 이스라엘 외무장관 [2]시몬 페레스는 이 협정 체결로 19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이 협정은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등 점령지를 반환해 팔레스타인 자치국가를 설립을 허용하는 대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투쟁을 포기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6]예리코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어 1996년 1월 아라파트 PLO 의장이 [5]자치정부(PA) 초대수반으로 선출되었다. 서명 당사자인 이스라엘 [1]라빈 총리가 1995년 11월 4일에 협정을 반대하는 이스라엘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고, 팔레스타인도 1996년 강경파인 [7]하마스의 자살폭탄 테러가 계속되는 등 위기가 이어졌지만, 2000년 중반까지 서안의 40%, 가자지구의 65%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직접 또는 부분적인 관할로 이양되었다.
이처럼 오슬로 협정은 역사적 합의였음은 분명하지만 불행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는 이후 획기적으로 전환되지는 못했다. 자치정부의 최종성격인 동예루살렘의 지위, 유대인정착촌,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이스라엘군의 재배치와 철수등을 다루는 최종지위협상이 2000년 7월 결렬되고 9월에는 팔레스타인 제2차 인티파다가 발생하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는 요르단 강 서안지지구와 가자 지구의 자치를 하고 있을 뿐, 점령지로부터의 이스라엘군 철수, 점령지 반환, 자치권 확대 등 구체적인 이행은 아무런 진전이 없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은 물론 예루살렘, 서안, 가자지구에서는 양측의 유혈 충돌과 자살 폭탄·흉기 공격 사건이 지속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서안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촌은 계속 확장됐다. 현재 서안지구의 구분을 보면 팔레스타인이 온전히 행정과 보안을 관할하는 지역은 18%이며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공동지역)는 22%, 이스라엘이 완전히 통제하는 지역은 60%이다.
[1]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년~1995년): 이스라엘의 17대(재임 1974년 6월 3일~1977년 6월 20일), 25대 총리(1992년 7월 13일~1995년 11월 4일) [2]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3년~2016년) : 이스라엘의 제9대 대통령(재임 2007년 7월 15일~2014년 7월 24일), [3]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년~2004년) :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임기 1994년 7월 5일~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3대 의장(임기 1969년 2월 4일~2004년 10월 29일) [4]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 1964년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설립된 단체 [5]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PNA, Palestine National Authority) : PLO가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여 국제연합 옵서버 국가로 인정받으면서 2013년에 팔레스타인의 정부로 바꾸고 독립했다. [6] 예리코(Jericho) :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BC 9000년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 행정 구역상으로는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속하며 예리코주의 주도이다 [7] 하마스(Hamas) :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의 약자로 팔레스타인 정당으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이듬해 파타정권(PA)은 이에 반발하여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의 결과로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장악했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경에 서울특별시의 한강을 가로지르는 11번째 교량인 성수대교의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가 붕괴해 일어난 사고이며 17명이 다치고 32명이 사망하여 총 49명의 사상자를 냈다.
1995년 4월 26일에 현대건설이 재건설을 시작하였고 1997년 6월에 완공하여 1997년 7월 3일에 재개통되었다.
* 1977년 4월 착공하여 1979년 10월 16일 최초로 준공
1995년 4월 28일 오전 7시 52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서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상인역 공사장에서 일어난 가스폭발 사고이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 들어설 예정으로 지반 공사 중이던 대구백화점 상인지점 신축공사 작업중 도사가스관이 파손되어 유출된 가스가 하수관을 통해 대구 지하철 1호선 상인역 공사장으로 유입되었고 한동안 괴어 있다가 원인불명으로 폭발한 사고이다.
이 폭발 사고로 사망 101명, 부상 202명의 인명피해와 건물 346개소 부분파손, 차량 150대 파손, 지하철공사장 및 현장주변시설물 파손 등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경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사건으로 백화점 건물이 무너지면서 1,445명의 종업원과 고객들이 부상당하거나 사망하였다(사망자:502명, 부상자:937명, 실종:6명)
붕괴의 원인이 비리와 갑질로 얼룩진 부실공사로 밝혀지면서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함께 안전불감증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었고 전국적인 건축물 안전실태 조사와 건축법의 강화 계기가 되었다.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 착공하여 1989년 12월 1일 개장하였으며 당시 전국 2위 규모의 단일매장이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1991년 10월 15일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한 후 세르비아계는 연방 잔류를 원하면서 [2]스릅스카 공화국을 결성해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 민족은 각 종교에 따라 크게 보스니아 무슬림,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 가톨릭의 크로아티아인 등으로 나눠지는 데, 과거 역사 속에서 이들은 혼란이 대두될 때마다 서로 간의 인종 청소 및 종교 개종을 강요해 왔었다. 즉 과거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공포는 서로 간의 불신과 집단적 자위 의식을 낳았으며, 이러한 점이 바로 이 지역 내 내전이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간, 잔인하게 이어진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스레브레니차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의 스릅스카 공화국에 속하는 산악 마을로 보스니아 전쟁 종료 이전까지 이 지역의 주된 민족은 무슬림인이었다.
보스니아 내전 중인 1995년 7월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가 UN 안전지역으로 지정된 스레브레니차 마을에서 8,000여명의 보스니아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으로서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구 유고전범재판소에서 처형장면이 재판과정에서 공개되면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UN 평화유지군으로서 400명의 네덜란드군 중 150여명의 병력이 약 4만명의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집단 난민 지역이자 UN이 안전지역으로 설정한 스레브레니차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델란드군은 학살이 일어나기 직전 이미 30여명이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에 의해 포로로 잡히는 등 난민들을 보호하고 안전지대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어 1995년 7월부터 세르비아 민병대의 본격적인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자, 스레브레니차 주둔 네덜란드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UN군 소속 네덜란드 공군을 통해 공습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7월 11일 네덜란드군 소속 F-16기 두 대의 공습 이후, 추가 공습시 30명의 네덜란드군 포로들을 사살하겠다는 세르비아 측의 경고에 따라 이 공습 또한 중단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결국 네덜란드군은 규모상 스릅스카 반군과 저항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난민들을 보호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 결과 UN이 정한 안전지내에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한 보스니아 무슬림의 대량 학살이 자행되는 참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는 인종 청소의 일환으로 곳곳에서 무슬림 난민의 남성과 소년들을 골라 처형했다. 불도저로 흙을 파낸 뒤 수천명의 시신을 암매장했다. 여성들과 소녀들은 인종 정화를 명분으로 강간 피해를 당한 뒤 사살당했다.
비공식적 통계에 따르면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 당시 희생자 수는 25,000명~30,000명에 달한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유럽의 킬링필드라고 불리며 '인종청소'라는 명목하에 세브비아인들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학살로 비난받고어 있다.
보스니아 실종자 관련 연방위원회가 발표한 학살 피해자로 집계된 공식 실종자 및 사망자는 총 8,372명이 확인되어 있으며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계속 추가될 예정이다.
참고문헌 :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 대학살, 그 배경과 교훈, 김철민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학대학 교수), 작성일: 2013년 8월 19일
[1] 스레브레니차(Srebrenic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
[2]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르비아계 자치 공화국 공화국.국명인 스릅스카(Српска)는 세르비아인에 접미사 '-ска'가 붙은 형태의 단어로 '세르비아인의 땅'을 의미한다. 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이 반발하여 스릅스카 공화국을 결성해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3] 라트코 믈라디치(Ratko Mladić, 1943년 ~) : 유고슬라비아 및 스릅스카 공화국의 군인이으로 보스니아 내전 당시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주도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보스니아 내전의 최고위 전범 3명 중 한 명이다. 2011년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1995년 10월 28일 아제르바이잔 바쿠(Baku)에서 운행되고 있던 바쿠 지하철의 울두즈(Ulduz)역과 나리만 나리마노프(Neriman Nerimanov)역 사이에서 발생한 화재이다. 이 화재로 289명이 사망하고 270명이 부상을 입었다.
* 바쿠(Baku) : 아제르바이잔 수도. 카스피 해의 최대 항구 도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평화를 위한 기본협정으로 도시의 이름을 따서 [1]데이턴 협정으로 부르며 이 협정을 체결하면서 보스니아 전쟁이 종결되었다.
1995년 11월 21일, 미국이 주도한 데이턴 협정이 타결되고 12월 14일 파리에서 협정이 공식 조인됨으로써 발칸 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보스니아 전쟁이 끝났다. 협정 당사자이면서 참석자는 [2]슬로보단 밀로셰비치, [3]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4]프라뇨 투지만이었다.
이 협정으로 세르비아인을 중심으로 한 스르프스카 공화국과 보스니아 이슬람교도와 크라아티아인으로 구성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으로 구성된 1국가 2체제 형태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 의거해서 이슬람인 보스니아계와 카톨릭인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 정교인 세르비아계에서 선출된 세 명의 대통령이 8개월마다 번갈아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는 특이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1] 데이턴(Dayton) : 미국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도시
[2]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 1941년~2006년)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1997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3대 대통령(1997년~2000년)
[3]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egovic, 1925년~2003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초대 대통령
[4]프라뇨 투지만(Franjo Tudjman, 1922년~1999년) :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독립한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