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

미국 일본 사건기간 : 1945년 4월 1일~1945년 6월 23일, 조회수 : 260,   등록일 : 2021-11-14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이던 시기에 이오지마(이오섬)전투에 이어 일본 내에서 유일한 대규모 지상전이 있었던 곳이며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치른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다. 어아수스버그 작전(Operation Iceberg)으로도 불린다.

오키나와에 전쟁 준비를 시작한 것은 오키나와를 담당하는 일본군 제32군이 창설된 1944년 3월부터 시작하여 6~9월을 정점으로 부대배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미국은 1945년 3월 오키나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오키나와를 버리는 역할로 삼아 본토 방어의 시간을 확보하려고 했기때문에 일본군은 내륙으로 들어가 방어에 집중했다. 
때문에 일본군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주민들까지 전원 옥쇄해 가족끼리 서로를 죽이거나 수류탄으로 자결하는 등의 비극이 일어났다. 오키나와 주민은 미국의 일본 본토 침공을 막는다는 명목하에 잔인하게 희생됐다.
전투의 결과로 5월 말 제32군 사령부는 달아나고 6월 23일 군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가 자결했다. 이로써 수많은 희생자를 낸 이 전투는 끝이 났다.

오키나와 주민 사망자 중에는 전투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집단자결로 내몰려 죽은 경우와 스파이 혐의로 살해된 경우 피난했던 참호에서 군대가 쫓아내 죽은 경우가 다수 포함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키나와를 희생하여 미군의 일본 본토 진격을 늦추고 패전 준비 시간을 확보하려던 일본군의 의도된 결과였다.

확인된 사망자 수는 오키나와인이 오키나와 징집병 28,000여 명과 일반 민간인 94,000명으로 총 사망자 122,000여 명, 타지역 출신 일본 군인 약 66,000명, 미군 사망자 12,500여 명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다. 민간인은 물론 일본군 관계자로 동원된 인력, 미군을 합하여 20만 명이상이 사망했다.

또한 지옥 같은 전투는 태평양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키나와에서 많은 희생으로 상처뿐인 승리를 얻은 미국은 일본 본토를 침략할 경우 더 큰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을 우려했다. 미국은 전쟁을 종결시킬 빠른 방법으로 원자폭탄을 선택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고 순식간에 수 만명의 희생으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 이오섬 : 일본 남동쪽에 있는 화산섬으로 도쿄에서 남쪽으로 1,200km 떨어져있다
* 오키나와 : 일본 최남단에 있는 현으로 오키나와섬을 포함한 류큐 제도를 관할한다. 본국인 일본보다 거리상 대만과 가까운 지역이라 중화민국과 거래나 왕래가 많은 지역이다. 과거 류큐 왕국이라 부르던 섬나라였다

[참고문헌]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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