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일본사건기간 : 1945년 4월 1일~1945년 6월 23일, 조회수 : 260, 등록일 : 2021-11-14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이던 시기에 이오지마(이오섬)전투에 이어 일본 내에서 유일한 대규모 지상전이 있었던 곳이며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치른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다. 어아수스버그 작전(Operation Iceberg)으로도 불린다.
오키나와에 전쟁 준비를 시작한 것은 오키나와를 담당하는 일본군 제32군이 창설된 1944년 3월부터 시작하여 6~9월을 정점으로 부대배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미국은 1945년 3월 오키나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오키나와를 버리는 역할로 삼아 본토 방어의 시간을 확보하려고 했기때문에 일본군은 내륙으로 들어가 방어에 집중했다.
때문에 일본군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주민들까지 전원 옥쇄해 가족끼리 서로를 죽이거나 수류탄으로 자결하는 등의 비극이 일어났다. 오키나와 주민은 미국의 일본 본토 침공을 막는다는 명목하에 잔인하게 희생됐다.
전투의 결과로 5월 말 제32군 사령부는 달아나고 6월 23일 군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가 자결했다. 이로써 수많은 희생자를 낸 이 전투는 끝이 났다.
오키나와 주민 사망자 중에는 전투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집단자결로 내몰려 죽은 경우와 스파이 혐의로 살해된 경우 피난했던 참호에서 군대가 쫓아내 죽은 경우가 다수 포함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키나와를 희생하여 미군의 일본 본토 진격을 늦추고 패전 준비 시간을 확보하려던 일본군의 의도된 결과였다.
확인된 사망자 수는 오키나와인이 오키나와 징집병 28,000여 명과 일반 민간인 94,000명으로 총 사망자 122,000여 명, 타지역 출신 일본 군인 약 66,000명, 미군 사망자 12,500여 명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다. 민간인은 물론 일본군 관계자로 동원된 인력, 미군을 합하여 20만 명이상이 사망했다.
또한 지옥 같은 전투는 태평양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키나와에서 많은 희생으로 상처뿐인 승리를 얻은 미국은 일본 본토를 침략할 경우 더 큰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을 우려했다. 미국은 전쟁을 종결시킬 빠른 방법으로 원자폭탄을 선택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고 순식간에 수 만명의 희생으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 이오섬 : 일본 남동쪽에 있는 화산섬으로 도쿄에서 남쪽으로 1,200km 떨어져있다
* 오키나와 : 일본 최남단에 있는 현으로 오키나와섬을 포함한 류큐 제도를 관할한다. 본국인 일본보다 거리상 대만과 가까운 지역이라 중화민국과 거래나 왕래가 많은 지역이다. 과거 류큐 왕국이라 부르던 섬나라였다
[참고문헌]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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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은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중국)과 일본의 전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으로 이루어진 추축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간에 벌어진 전 세계적인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강한 제약을 받았으며,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 속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권이 등장했다. 독일은 조약을 무시하고 군비를 증강하며 유럽 내 영토 확장을 시도했고, 이탈리아와 일본도 각각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팽창 정책을 펼치면서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국제 연맹은 이를 효과적으로 제재하지 못하면서 전쟁을 방지하는 데 실패했다.
전쟁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40년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 본토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으며, 1941년에는 소련을 침공하며 전선을 더욱 확대했다. 같은 해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전세는 1942~1943년을 기점으로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퇴하며 동부 전선에서 반격을 시작했고,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며 서부 전선을 개방했고, 독일군은 연합군과 소련군의 압박 속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45년 5월,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 전쟁이 끝났다.
한편, 태평양 전쟁에서는 미국이 일본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고, 공식적인 종전은 9월 2일에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은 약 7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초래한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으며, 일본은 미국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전쟁 범죄에 대한 심판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고, 국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유엔(UN)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전쟁 후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 체제가 시작되면서 세계는 또 다른 긴장 상태로 접어들었다.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은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것은 독일과 소련이 중앙 유럽의 분할지배에 합의하고 상호안전보장조약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독소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선전포고없이 [1]바르바로사 작전이 펼쳐지면서 소련을 침공하였다. 이른바 제2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독일군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불과 30km 앞둔 [2]힘키까지 진격했다. 베를린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무려 1,500km에 달한다. 이렇듯이 개전 초기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이 전쟁의 흐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 전쟁은 1945년 5월 9일 소련이 베를린을 함락시킬 때까지 약 4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나치 독일과 소련사이에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의 한 전선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이 시작되었다.
[1]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한 작전명칭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었던 '바르바로사(붉은 수염)'에서 유래했다
[2] 힘키(Khimki) : 러시아 모스크바주에 있는 도시로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3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선 중 하나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과 국민혁명군이 주도한 중국 전선 및 영국군이 주도한 버마 전선,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주공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역이 해당된다.
네덜란드 대기근은 1944년 1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극심한 식량 부족 사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가장 심각한 인도적 위기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 기근은 주로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서 연합군의 반격 작전과 독일군의 보복적 봉쇄 조치로 인해 발생했다.
1944년,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하고 네덜란드로 진격하면서 서부 네덜란드 일부 지역이 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군의 통치를 약화시키기 위해 철도 파업을 지시했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군은 철도망을 차단해 식량 및 연료 공급을 봉쇄했다. 특히 서부 네덜란드의 대도시(암스테르담, 로테르담, 헤이그 등)는 이 봉쇄로 인해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1944~1945년 겨울은 이례적으로 추웠고, 연료 부족으로 난방이 불가능했다. 이는 농작물 재배와 저장이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 전쟁 전부터 네덜란드는 인구가 조밀했으며, 전쟁 중 대도시로의 인구 이동이 가속화되어 식량 부족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기근으로 인해 약 20,000명 이상이 기아와 관련된 직접적 또는 간접적 원인으로 사망했다. 어린이와 노약자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주민들은 튤립 구근, 가축 사료, 심지어는 나무껍질까지 섭취하며 생존을 도모했다. 또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시골로 가서 물물교환을 시도하는 도시 주민들이 증가했다. 대기근을 겪은 세대는 신체 발달 문제, 면역 체계 약화, 그리고 정신적 외상과 같은 장기적 건강 문제를 경험했다.
1945년 5월, 네덜란드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면서 기근이 종식되었다. 연합군은 항공기를 통해 식량을 공수했으며, 점차 물자 공급망이 회복되었다.
네덜란드 대기근은 인류학적, 정치적, 사회적 연구에서 중요한 사례로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기근이 세대 간 건강 및 사회 정책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연구들이 많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은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점령의 고통을 상기시켰으며, 이후 국가 복구와 복지 시스템 구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임박한 시점이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크림 반도에 위치한 휴양도시 얄타의 리바디아 궁전(Livadia Palace)에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소련의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lin),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회담을 하였다.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으로 독일의 분할 및 비무장화와 나치 독일 잔재의 청산, 폴란드의 영토 문제 등이 결정되었다. 또한 소련의 대일본 전쟁 참전결정과 러일전쟁 당시 상실했던 영토인 사할린의 반환이 합의되었다.
여기서 일본 패전이후 한반도는 미·소 분할 신탁통치방안이 제시되었다. 구체적으로 논의된 사항은 아니었지만 불행하게도 한반도 남북분단의 시발점이 되었다.
얄타회담은 영국의 처칠이 참여했지만 실질적으로 영향력은 없었으며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의 담판 회담 성격이 짙었다. 이리하여 초강대국으로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을 풍미한 대영제국 몰락의 마지막 방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 얄타(Yalta) : 크림 반도 남부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러시아 크림 공화국(사실상) 또는 우크라이나 크림 자치 공화국(국제적인 승인)에 위치
* 크림반도(Crimean Peninsula) : 흑해(Black Sea)북부 연안에 위치한 반도이며 2014년 이후부터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러시아에 병합되었지만 국제사회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년~1965년) : 영국의 제42,44대 총리
*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년~1945년) : 미국 제32대 대통령
*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 1878년~1953년) :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 리바디아궁(Livadia Palace) : 크림반도 얄타의 리바디아에 위치한 궁전. 러시아 제국의 로마노프 왕조(니콜라이 2세는 마지막 황제)의 별장. 얄타 회담이 이곳에서 열렸다.
이오지마 전투는 일본 도쿄와 마리아나 제도의 중간쯤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인 [1]이오지마에서 벌어진 미 해군 및 해병대와 일본 육군 간의 전투이다. 미군의 작전명은 디태치먼트 작전(Operation Detachment)이었다.
미국은 공습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 본토까지 폭격기가 날아가야 했는데, 당시에 무장한 B-29 폭격기는 5,000km 정도만 비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최소한 일본 본토 2,000 km 이내의 섬들을 점령하여 발진기지로 만들어야 했다. 미국은 1944년 도쿄로부터 2,300km 남쪽의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하였다. 드디어 마리아나 제도의 괌이나 사이판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도쿄까지 날아갈 수 있게 되었다. 11월부터는 B-29 폭격기를 이용해 일본 본토 각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 중간의 이오지마에는 일본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가 있었다. 이오지마의 일본 전투기들이 마리아나 제도에서 이륙한 미군 폭격기들을 미군 폭격기의 이동을 미리 예측하고 저지했다. 심지어는 이오지마에서 발진한 일본 전투기들이 마리아나 제도의 미군 기지를 폭격해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미국은 전진 항공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1]이오지마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1945년 2월에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1945년 2월 19일 미군 해병대가 이오섬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곳곳에 요새와 지하터널을 만들어놓고 기관총과 박격포를 난사하며 미군에 저항했다. 일본군 포병의 사격으로 인해 해안선에 상륙한 해병대는 혼란에 빠졌고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부족한 보급으로 총알이 떨어진 일본군은 이내 미해병대의 필사적인 반격에 뚫리기 시작했다. 3월 17일에 미군은 섬을 장악했으며, 거의 모든 일본군 부대가 전멸했다. 3월 26일 구리바야시 대장 이하 남은 300명의 일본군이 마지막 항전을 했으나 전멸했다.
5주 동안의 전투로 미군 전사자는 6,821명이지만 부상자는 21,865명으로 집계됐으며, 일본군은 20,933명의 수비 병력 중 20,129명이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태평양전쟁 중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일본보다 미군측 피해가 더 컸던 유일한 전투라고 한다. 당시 일본군 진지 구축에는 한국인 징용자들도 수백 명 동원됐다고 한다.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의 스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이오섬의 성조기 게양'은 퓰리처상을 받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1945년 2월23일 오전 10시35분 이오지마의 수리바치산 정상에 미국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이오섬의 성조기 게양'은 퓰리처상을 받았을 정도로 유명하다. 미 해병 5사단 28연대가 이 섬에 내려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지 나흘 만이다. 이 사진은 미 해병대원들의 투혼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오지마는 미국의 공군기지로 사용되다 1968년에 일본에 반환되었다. 현재는 일본 항공자위대의 기자가 이섬에 남아있으며 주민은 살지 않는다.
이오지마 전투는 태평양전쟁 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투 중 하나였다.
미국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오지마 전투를 일본군과 미군의 입장에서 바라본 두 편의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아버지의 깃발>을 2006년과 2007년 각각 선보였다.
[1] 이오지마 : 도쿄 남쪽으로 1,080km, 괌 북쪽 1,130km에 위치하고 있는 도쿄~괌·사이판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화산섬으로 섬의 표면이 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다고 한다. '이오'는 유황, '지마'는 섬을 말한다
[2] 마리아나 제도(Mariana Islands) : 행정상 괌과 미연방에 편입된 북마리아나 제도로 나뉘어 있다. 북마리아나 제도는 괌 북쪽으로 725km까지 펼쳐져 있다. 주요섬으로는 사이판·티니안·아그리한·로타 등이 있고 파간·아순시온·파라욘데파하로스는 활화산 섬이다
1945년 3월 9일 밤과 10일 새벽에 걸쳐 사이판과 [2]티니언 섬에서 344대의 [3]B-29 슈퍼 포트리스 폭격기가 출격했다.
B-29 폭격기 344대는 일본의 수도인 도쿄 상공을 뒤덮으며 도쿄 일대에 [1]네이팜탄 2400톤을 3시간동안 투하하였다. 도쿄시내의 건물은 목조건물로 이루어져 원통하나가 지붕에서 떨어지면 사방으로 액체가 튀었고 불이붙기 시작하여 불바다로 변했고, 불꽃은 사방에서 타오르면서 너울너울 춤추기 시작했다. 연기는 1.5km 상공까지 치솟았다.
이 공습으로 도쿄 중심부로부터 41 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이 불바다가 되어 파괴되었으며 당시 일본 경시청조사에서 사망자 83,793명, 부상자 40,918명, 이재민 1,008,005명, 피해주택 268,358명이 발생했다. 도쿄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1만여 명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 네이팜탄(Napalm bomb) : 연소재료인 나프타에 네이팜제로 불리는 증점제를 첨가하여 젤리 상태로 충전한 유지 소이탄이다. 매우 높은 온도(900~1300도)에서 연소하고 광범위한 지역을 불태워 파괴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2] 티니언 섬(Tinian) : 미국 자치령인 북마리아나 제도의 섬으로 괌 북쪽 160 km에, 사이판에서 약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3] B-29 슈퍼 포트리스(Boeing B-29 Superfortress) : 미군이 제 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에서 투입한 전략 폭격기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는 제2차 세계대전이 다 끝나갈 무렵 1945년 나치 독일의 항복(5월 7일 항복) 이후에도 전쟁 수행 의지를 꺾지 않는 일본에 8월 6일 히로시마시에 '리틀 보이(Little boy)'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3일 후인 8월 9일에 나가사키시에 '팻 맨(Fat man)'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6일 후인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했으며 9월 2일 항복 문서에 사인하면서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알렸다.
중국 제2차 국공내전은 1945년 8월 14일, 제2차 세계대전 종료와 함께 일본이 패망하여 중국에서 철수한 뒤 시작되었다. 전쟁의 발단은 중일전쟁 기간 동안 유지되었던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제2차 국공합작이 전쟁 종료 후 이념적 갈등과 권력 다툼으로 붕괴된 데 있다.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중국 대륙의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지만, 공산당은 일본 점령지였던 동북부(만주)를 신속히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소련이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 무기를 공산당에 제공하며 공산당의 군사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내전 초기(1945~1946년), 국민당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우위를 점하며 주요 도시와 철도망을 확보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내부의 부패, 비효율적인 행정, 경제난으로 인해 민중의 지지를 잃어갔다. 반면,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게릴라 전술을 통해 국민당군을 점차 약화시켰고, 홍군은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되어 더욱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1946년, 미국이 중재한 평화회담이 결렬되면서 내전은 본격적인 전면전으로 확산되었다.
1947년부터 공산당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동북 지역에서의 전투를 통해 전략적 주도권을 확보했으며,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토지 개혁 정책으로 민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는 "삼대전역(三大战役)"이라 불리는 세 가지 주요 전투가 내전의 판도를 결정지었다. - 랴오선 전역(1948년 9~11월): 동북 지역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고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 - 화이하이 전역(1948년 11월~1949년 1월): 중원 지역에서 국민당군의 주력을 괴멸. - 핑진 전역(1948년 12월~1949년 1월): 북경(베이징)을 포함한 화북 지역을 공산당이 점령. 이 승리들로 국민당군은 전력을 상실했고, 국민당 정부는 대규모로 후퇴를 거듭했다. 1949년 4월, 공산당은 국민당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며 사실상 전쟁에서 승리했다.
1949년 10월 1일, [1]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식 선포하며 제2차 국공내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공산당 [3]인민해방군은 같은 해 10월 14일에는 광저우를 접수하고, 11월 30일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마저 함락시켰다. 12월 10일 [2]장제스는 대륙 최후 거점인 충칭에서 타이완으로 탈출하여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12월 27일 중국 [3]인민해방군이 충칭에 입성함으로써 대륙에서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공산당이 통치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재편되었다.
제2차 국공내전은 중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공산당의 승리는 민중 기반을 강화하고 군사적 전략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반면 국민당은 외세 의존, 행정 부패, 민중의 신뢰 상실 등 내부적인 요인으로 패배의 길을 걷게 되었다.
[1]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중앙위원회 주석(임기, 1945년 6월 19일~1976년 9월 9일). 일본 패망 이후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 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2]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3] 인민해방군 :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 또는 단순히 홍군(紅軍)은 1927-1946 사이의 중국 공산당의 무장조직으로 1927년 8월 1일 중국공농혁명군(中國工農革命軍)을 시작으로, 1928년 5월 25일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으로 개칭하였다. 제2차 국공합작(1937.9)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으로 개편되었다. 일본패망 이후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 사이에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대표 번스(James F. Byrnes)국무장관, 소련대표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외무장관, 영국대표 베빈(Ernest Bevin)외무장관이 모여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문제들과 관련한 7개 의제에 대해 논의하여 발표하였다.
1.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그리고 핀란드에 대한 평화조약 준비(I. PREPARATION OF PEACE TREATIES WITH ITALY, ROMANIA, BULGARIA, HUNGARY AND FINLAND,(파리 조약 참고)
2.일본에 대한 극동 지역 위원회와 연합회의(II. FAR EASTERN COMMISSION AND ALLIED COUNCIL FOR JAPAN)
3.한국(III. KOREA)
4.중국(IV. CHINA)
5.루마니아 (V. RUMANIA)
6.불가리아 (VI. BULGARIA)
7.원자력 에너지의 통제를 위한 미국에 의한 위원회 설립 (VII. THE ESTABLISHMENT BY THE UNITED NATIONS OF A COMMISSION FOR THE CONTROL OF ATOMIC ENERGY)
회담에서는 전후 유럽의 처리 문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며, 3번째 의제인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기간의 신탁통치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사안이 결정되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인들을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든다.
둘째, 이러한 조직을 도와주기 위해 미군과 소련군의 대표로 구성된 공동위원회를 수립한다.
셋째, 열강들과 한국인들의 대표로 만든 조직이 협의해서 최대 5년을 기한으로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넷째, 분할 점령으로 인한 심각한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과 소련군이 협의한다.
'신탁통치'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내용을 살펴보면 길어야 5년 이내의 한시조건이었지만 또 다른 외세 개입이 이루어진다는 역풍으로 대한민국은 찬탁(김규식, 여운형등)과 반탁(김구,이승만등)의 극심한 분열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되어 오늘날 분단의 아픔으로 이어져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