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일본사건기간 : 1904년 8월 22일, 조회수 : 474, 등록일 : 2021-08-01
원래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이나 제1차 한일협약으로 더 알려져 있다.
러일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04년 8월 22일 외무대신 서리 윤치호와 일본 전권 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조인된 협정서다. 이 협약으로 고문통치가 시작되어 일본의 내정 간섭이 확대되었다.
[전문(全文) 3개항]
1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財政顧問)으로 삼아 대한 정부에 용빙(傭聘)하여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2 대한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한 외국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삼아 외부(外部)에 용빙하여 외교에 관한 중요한 사무는 일체 그의 의견을 물어서 시행해야 한다.
3 대한 정부는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거나 기타 중요한 외교 안건 즉 외국인에 대한 특권 양여와 계약 등의 문제 처리에 대해서는 미리 대일본 정부와 상의해야 한다.
이 협약에 따라 일제는 재정고문에 대장성 주세국장이었던 메카타 다네타로를, 외교고문에는 주미 일본 공사관에서 근무했던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Durham White Stevens)을 임명했다.
메카타 다네타로는 재정 고문으로 대한제국의 재정과 경제적 예속작업에 착수하였다. 1905년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기간산업이 모두 일본에 넘어가고 조선 상인들이 몰락했으며 나아가 대한제국의 경제권과 종국에는 주권이 일본 제국에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제1차 한일 협약은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들이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등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심각하게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내정 전반에 걸쳐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나무위키]
* 윤치호(1865년~1945년) :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정치가, 시민 운동가, 번역가, 기독교 운동가, 계몽 운동가,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 하야시 곤스케(1860년~1939년) : 일본의 외교관이며 남작.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어 8월 제1차 한일 협약, 1905년 을사늑약까지 모두 그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다
* 메가타 다네타로(1853년~1926년) : 일본의 정치가.
*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851년~1908년) : 미국의 외교관. 일본 외무성과 통감부에서 일했다. 1908년 3월 23일 장인환과 전명운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해당되는 데이터가 없습니다.
해당되는 데이터가 없습니다.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시행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개혁이다.
광무개혁은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 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부분적으로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려 하였다.
대한제국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자주성을 뒷받침하기 이해 국방력 강화와 재정 개혁,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먼저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고, 서울의 중앙군과 지방의 지방군을 대폭 증강하며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다.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함인 양무호를 구입하였다. 양무호는 매우 빈약했으며 이마저도 러일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겨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1896년 1월 11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폐지되고 대한제국이 건국 후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9년에 [1]양지아문을 설치하고 1899년부터 1903년까지 일부 지역에서 토지조사사업과 [2]지계발급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토지를 법률의 보호 아래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는 토지거래 질서가 확립 되었으며, 국가 재정을 개선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갑오개혁 때 23부로 개편한 행정을 아관파천 이후 13도로 재개편하였다,
적극적으로 추진된 분야는 상공업 진흥책이다. 정부 스스로 제조공장을 설립했으며, 민간의 제조회사 설립을 지원하여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했으며, 공업전습소 등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황실에서는 방직공장, 유리공장, 제지공장의 설립을 시도했고, 일반 민간인의 공장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지만 황실이 직영하는 업종 이외의 것은 쉽게 허가하였다.
정부는 근대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근대적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의학교를 설립하여 국민들의 위생과 보건에 노력했으며 중학교를 설립하여 중등교육의 근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한성도시개조상업을 통해 도로와 하수도를 정비하고 교통, 통신, 전기, 전차 등의 근대 시설을 도입하여 산업발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시기인 1899년에 전차개통과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그 밖에 도량형 제도와 호적제 실시, 순회 재판소 설치, 종합병원인 제중원(濟衆院),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등이 설립되었다.
광무개혁은 이처럼 전제군주제의 확립을 통해 근대 주권국가를 지향했고, 짧은 기간에 국방, 산업, 교육, 기술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과 함께 대한제국 정부의 개혁 사업은 중단되었다.
광무개혁은 황제권 강화라는 보수적인 색채와 지계발급, 상공업 진흥, 기술학교 설립, 교통.통신의 인프라 개선등 개혁적이고 새로운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갑신벙변, 갑오개혁, 을미개혁 같은 개혁들에 비해 자주적으로 추진했던 개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보수적인 인물들이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을 들어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부인하기도 한다.
[1] 양지아문(量地衙門) : 1898년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서
[2] 지계 : 토지 소유권 증명 문서
모로 전쟁은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 미국과 현지 무슬림 [1]모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2]필리핀-미국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이 필리핀 전역을 장악하려 하면서 발생한 저항운동의 일환이었다. [1]모로족은 오랜 기간 스페인의 지배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통치 시도에도 강한 반발을 보이며 무장 저항을 지속했다.
1898년,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필리핀 전역에서 미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에 따라 [2]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북부 루손 지역과 비사야스를 점령한 후에도 남부 지역의 모로족은 독립을 유지하며 미국의 지배를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모로족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모로족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며 미군에 저항했다. 미국은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모로족은 외세의 지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점점 더 강경한 군사 작전을 펼쳤고, 1906년에는 유명한 [3]바굼바얀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의 거점을 공격하여 6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필리핀 평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했다.
이후에도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었으나 1913년에 벌어진 [4]버드 바그삭 전투가 사실상 모로족의 마지막 대규모 저항이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 전사 500명 이상을 전멸시키며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미국은 필리핀 전역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지만 모로족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모로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필리핀 남부를 강제 통치하며 모로족의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계를 해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기독교화와 서구식 행정 제도를 도입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오히려 모로족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모로족의 독립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필리핀이 1946년 독립한 이후에도 남부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분쟁이 이어졌다.
결국 모로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필리핀 남부의 자치권과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모로족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인 미국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 전쟁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여전히 모로족 분리주의 운동과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모로 전쟁은 필리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자,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 모로족(Moro People) :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술루 군도, 팔라완 등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 민족이다. 필리핀 전체 인구의 약 5~10%를 차지하며 말레이계 혈통을 가진 이슬람 공동체 [2] 필리핀-미국 전쟁(1899년 2월 4일~1902년 7월 4일) :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의 새로운 식민 지배에 저항하면서 발생된 전쟁 [3] 바굼바얀 전투(Battle of Bud Dajo) : 1906년 3월 5일부터 3월 7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다호(Bud Dajo) 화산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 이 전투는 미국 식민 통치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었다. [4] 버드 바그삭 전투(Battle of Bud Bagsak) : 1913년 6월 11일부터 6월 15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바그삭(Bud Bagsak) 산 정상에서 발생한 전투로, 미국군과 모로족 간의 마지막 대규모 충돌이었다. 모로족은 거의 전멸하였다고 한다
20세기 초, 독일 제국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나미비아 지역에 해당하는 남서아프리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토착 부족인 헤레로족과 나마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독일의 식민 통치 하에서 강제 노동, 토지 몰수, 경제적 착취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독일 정착민들은 토착민들의 농경지를 빼앗고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그들을 법적으로 보호하지 않았으며 아프리카인들을 하등한 존재로 여겼다. 1903년까지 독일인 정착민의 수는 5,000명을 넘어섰으며 지속적으로 원주민들의 권리를 박탈했다. 이러한 억압적인 정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면서 1904년 1월 헤레로족이 독일 식민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헤레로족의 지도자 [1]사무엘 마하레로는 독립을 위한 항쟁을 하여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나마족도 지도자 [2]헨드릭 비트보이의 지휘 아래 반란에 합류했다. 그러나 독일은 이러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고 학살을 주도한 로타르 폰 트로타장군이 남서아프리카에 부임하면서 상황은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었다.
1904년 8월 독일군은 [4]워터베르크 전투에서 헤레로족을 패배시키고 생존한 헤레로족을 [5]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하였다. 독일군은 사막의 식수원을 차단하여 헤레로족 수천 명이 탈수와 굶주림으로 사망했으며 사막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사살했다.
나마족 또한 독일군의 표적이 되었으며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극심한 학대와 처형을 당했다. 독일은 [6]샤크섬에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며 포로들에게 가혹한 강제 노동을 시켰다. 수용소에서는 영양실조와 질병이 만연했으며 일부 포로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 실험까지 진행했다.
이 학살로 인해 헤레로족 인구 80,000명 중 80%에 해당하는 약 65,000명이 사망했으며 나마족 인구 20,000명 중 절반인 약 10,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또한 독일 식민지 내에서 극심한 차별과 강제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은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이었으며 이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유사한 방식의 인종말살 정책의 전조로 평가하고 있다. 독일은 이 사건을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100여 년이 지난 2021년에 이르러서야 독일 정부가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집단학살"로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피해자 후손들에게 직접적인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까지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1] 사무엘 마하레로(Samuel Maharero, 1856년 ~ 1923년 3월 14일) : 나미비아 헤레로족의 지도자로, 1904년 독일 식민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이끌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강력한 탄압으로 패배한 후 보츠와나로 망명하였으며 그의 저항은 독일군의 대규모 학살로 이어지며,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Genocide)로 기록되는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의 계기가 되었다. 나미비아의 국민 영웅 [2] 헨드릭 비트보이(Hendrik Witbooi, 1830~1905) : 나미비아 나마족의 지도자로 독일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1904년 나마족 반란을 이끌었다. 그는 독일군과의 전투 중 사망했으며 오늘날 나미비아의 독립운동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3] 로타르 폰 트로타(Lothar von Trotha, 1848년 7월 3일~1920년 3월 31일) : 독일 제국의 군인.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저지른 주범으로 악명이 높았다 [4] 워터베르크 전투(Battle of Waterberg, 1904년 8월 11일) : 독일 제국군과 헤레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패배한 헤레로족은 오마헤케 사막으로 추방당했으며 독일군의 식수원 봉쇄로 인해 수천 명이 굶주림과 탈수로 사망하면서 헤레로족 학살로 이어졌다. [5] 오마헤케 사막(Omaheke Desert) : 나미비아 동부에 위치한 사막으로 1904년 독일군이 헤레로족을 추방한 지역 [6] 샤크섬(Shark Island) : 나미비아 연안에 위치한 섬으로, 1905~1907년 독일이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수용한 강제 수용소가 운영된 곳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청나라로 부터 요동반도와 대만을 할양 받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측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야심에 대하여 러시아가 주동이 된 삼국간섭(러시아,프랑스 및 득일)으로 일본은 청나라에 [2]랴오둥반도를 반환하였다.
이에 대한 대가로 1896년 러시아는 러청 비밀협정을 맺고 일본이 중국, 한반도의 극동 러시아령을 침략할 경우 상호 원조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만주 복부를 관통하여 볼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3]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득일이 [4]자오저우만의 칭다오를,영국이 [5]구룡반도와 [6]웨이하이웨이를,프랑스가 광저우만을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1897년 12월 12일 청으로부터 [2]뤼순과 대련을 점령하고 뤼순을 군항으로 개발하였다. 뒤늦게 미국도 1899년에 문호개방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분할에 가담하였다[1].
이렇게 청나라에 대한 열강의 이권확보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의 이권을 둘러싸고 협상을 벌였으나 러시아의 강경한 태도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다. 1904년 2월 6일 양국은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 일본의 증원부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함정과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에 대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였으며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쟁기간중 일본은 1902년 2월에 체결된 영일동맹으로 영국과 미국의 지원과 1905년 5월 쓰시마해전에서 러시아의 [8]발틱함대를 격파하여 승리하였다.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재정지출이 너무 커서 결국 미국의 중재하에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러일전쟁을 종결되었다. 미국 대통령 [7]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만주에서 철수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였으며,[2]랴오둥반도와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게 양도하였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러시아는 남하정책이 좌절되었으며 패전의 후유증은 정치적 불안을 야기하여 러시아 혁명을 유발하는 간접적인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국제적인 지위확립과 더불어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조선침략을 본격화하고 대륙침략의 계기롤 마련하였다.
[1] 쓰시마 해전 승패에 대한 분석, 김태준, 國防部 軍史編纂硏究所, 2004.04.03 [2]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요동 반도) : 현재 중국의 랴오닝성 남부의 반도. 뤼순(여순), 다롄(대련)이 위치하고 있다 [3] 동청철도(東淸鐵道) : 중국 하얼빈을 중심으로 하여 서북으로 러시아의 치타()와 남동으로 블라디보스크로 연결된 철도 노선 [4] 자오저우만(膠州灣, 교주만) :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칭다오시에 위치한 만 [5] 구룡반도(九龍半島) : 홍콩 특별행정구에 속하는 중국 남부에 위치하는 반도 [6] 웨이하이웨이(威海衛) : 중국 산둥성 동부에 있는 항구도시로 산둥반도의 동쪽에 있다 [7]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년~1919년) :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임기는 1901년 9월 14일~1909년 3월 4일 [8] 발틱 함대(Baltic Fleet) : 러시아 해군의 4개 함대들 중 하나로 1703년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러시아 해군 함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운이 급박함을 알게 된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하며 양국간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와 갈등이 고조되자 1904년 2월 6일 국교를 단절하고, 2월 8일 여순항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공격하여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다음 날 2월 9일 인천 제물포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여 2척을 침몰시키고 제물포항에 병력을 상륙하여 그날로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 날인 2월 10일에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자 주한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Pavlov)는 2월 12일 러시아군의 보호를 받으며 피신하였다.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일본 공사 [6]하야시 곤스케는 전쟁의 불가피성과 협력할 것을 대한제국에 강요하면서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압했다. 반일·친러파였던 [2]탁지부 대신 겸 [3]내장원경 [4]이용익을 납치하여 일본으로 압송하고, 그 밖에 일본에 반대하던 보부상의 중심 인물 길영수 육군 참장 이학균, 육군 참령 현상건등을 감시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강압으로 대외 중립 유지가 어려움을 인식한 대한제국은 외부대신서리 [5]이지용과 일본 공사 [6]하야시 곤스케는 양국 간 협약을 체결하였다
[전문 6개조]
제1조 한·일 양제국은 항구불역(恒久不易)할 친교를 보지(保持)하고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를 확신하고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을 것.
제2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황실을 확실한 친의(親誼)로써 안전·강녕(康寧)하게 할 것.
제3조 대일본제국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
제4조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황실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정부는 속히 임기 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하며, 대한제국정부는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前項)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수용할 수 있을 것.
제5조 대한제국정부와 대일본제국정부는 상호의 승인을 경유하지 않고 훗날 본 협정의 취지에 위반할 협약을 제3국간에 정립(訂立)할 수 없을 것.
제6조 본 협약에 관련된 미비한 세조(細條)는 대한제국외부대신과 대일본제국대표자 사이에 임기 협정할 것.
이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대한제국을 중립이 아닌 지정학적인 우위를 점하는 전략과 한반도를 점령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의정서 1조에 근거하여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은 서서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일의정서)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여순(뤼순)항 : 중국 랴오둥 반도에 위치한 항구. 현재는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의 구 중 하나이며 명칭은 뤼순구
[2] 탁지부 : 대한제국의 재무를 담당하던 부서. 현재의 기획재정부
[3] 내장원경(內藏院卿) : 황실 재정의 총책임자인 내장사의 장
[4] 이용익(1854년~1907년) :대한제국의 정치인·관료·외교관이며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교의 설립자. 러일전쟁당시 일본으로 압송되어 온갖 회유정책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5] 이지용(1870년~1928년) : 대한제국의 왕족이자 관료. 을사오적의 일원(체결당시 내부대신)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당시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엔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서명했다
[6] 하야시 곤스케(1860년~1939년) : 일본의 외교관이며 남작.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어 8월 제1차 한일 협약, 1905년 을사늑약까지 모두 그의 주도 하에 체결되었다
덕수궁 대화재는 1904년 4월 14일에 발생한 대형 화재로, 대한제국 시기 덕수궁의 주요 건물들이 소실된 사건이다.
화재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1]함녕전 아궁이에 밤 10시경에 발화된 불이 [2]중화전·[3]즉조당·[4]석어당의 중심곽 건물뿐만 아니라 [5]관명전과 신주를 모셨던 [7]경효전, 어진·예진을 봉안한 [6]흠문각 등 중요 전각들이 순식간에 소실되면서 사서, 기밀서류, 의례서, 외국서적등 각종 중요한 문서와 귀중품등도 소실되었다.
화재 이후 경운궁을 다시 짓는 동안 고종은 자신의 거처를 수옥헌으로 옮겼다. 1906년에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다.
오늘날 덕수궁은 일부 복원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대한제국의 역사를 간직한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1] 함녕전(咸寧殿) : 고종이 머물렀던 침전으로 1904년 화재로 다시 지은 건물이며 고종이 1919년 1월 22일 승하하신 곳이다 [2] 중화전(中和殿) :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했으나, 너무 좁아 1920년 새로 지은 건물. 그러나 2년만에 화재로 소실된후 1906년에 중건하였으나 이전과 달리 단층이었다. [3] 즉조당(卽阼堂) :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즉위한 곳 [4] 석어당(昔御堂) :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로 삼았던 건물 [5] 관명전(觀明殿) : 1902년 6월 28일에 덕경당(德慶堂)을 헐고 확장하여 건립하여 관명전이라 하였다. 내진연(조선시대 왕실의 기념이이나 경사에 벌이는 잔치)의 장소로 사용 [6] 흠문각(欽文閣) : 어진·예진을 봉안한 건물 [7] 경효전(景孝殿) : 명성왕후의 신주를 봉안한 건물 [8] 수옥헌(漱玉軒) : 황실도서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 1906년 중명전(重明殿)으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