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영국프랑스스페인독일사건기간 : 1911년 4월~1911년 7월 1일, 조회수 : 343, 등록일 : 2021-06-21
1차 모로코 사건(위기)이 끝난뒤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시켜나간다. 이런 상황에서 모로코에서 지역주민의 반란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하였다. 독일도 자국민 보호라는 명목으로 모로코의 [1]아가디르(Agadir) 항에 군함을 파견하여 프랑스와 대립하였다.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면서 국제협상으로 전쟁의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이 협상으로 모로코는 프랑스령이 되었으며 독일에게 프랑스령 콩고의 북부 지방을 할양해 주었다. 이러한 협상에 스페인이 반대하며 불만을 표시하자 영국은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서 협상을 중재하여 모로코내의 프랑스와 스페인 경계를 수정하면서 해결하였다. 결국 이듬해인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를 자국의 보호령으로 삼게 된다.
사건이 발발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아가디르 위기(Agadir Crisis)라고 부르기도 한다.
[1] 아가디르(Agadir) : 모로코 남서부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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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전쟁은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와 술루 제도에서 미국과 현지 무슬림 [1]모로족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2]필리핀-미국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이 필리핀 전역을 장악하려 하면서 발생한 저항운동의 일환이었다. [1]모로족은 오랜 기간 스페인의 지배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통치 시도에도 강한 반발을 보이며 무장 저항을 지속했다.
1898년, 미국은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러나 필리핀 전역에서 미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에 따라 [2]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이 북부 루손 지역과 비사야스를 점령한 후에도 남부 지역의 모로족은 독립을 유지하며 미국의 지배를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모로족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모로족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며 미군에 저항했다. 미국은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지만, 모로족은 외세의 지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점점 더 강경한 군사 작전을 펼쳤고, 1906년에는 유명한 [3]바굼바얀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의 거점을 공격하여 6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희생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당시 미국 정부는 이를 필리핀 평정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정당화했다.
이후에도 소규모 전투가 지속되었으나 1913년에 벌어진 [4]버드 바그삭 전투가 사실상 모로족의 마지막 대규모 저항이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모로족 전사 500명 이상을 전멸시키며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써 미국은 필리핀 전역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지만 모로족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았다.
모로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필리핀 남부를 강제 통치하며 모로족의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계를 해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기독교화와 서구식 행정 제도를 도입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오히려 모로족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 모로족의 독립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필리핀이 1946년 독립한 이후에도 남부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분쟁이 이어졌다.
결국 모로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필리핀 남부의 자치권과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려는 모로족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인 미국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 전쟁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필리핀 남부에서는 여전히 모로족 분리주의 운동과 분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모로 전쟁은 필리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자,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 모로족(Moro People) :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술루 군도, 팔라완 등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 민족이다. 필리핀 전체 인구의 약 5~10%를 차지하며 말레이계 혈통을 가진 이슬람 공동체 [2] 필리핀-미국 전쟁(1899년 2월 4일~1902년 7월 4일) :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미국의 새로운 식민 지배에 저항하면서 발생된 전쟁 [3] 바굼바얀 전투(Battle of Bud Dajo) : 1906년 3월 5일부터 3월 7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다호(Bud Dajo) 화산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 이 전투는 미국 식민 통치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었다. [4] 버드 바그삭 전투(Battle of Bud Bagsak) : 1913년 6월 11일부터 6월 15일까지 필리핀 술루 군도의 버드 바그삭(Bud Bagsak) 산 정상에서 발생한 전투로, 미국군과 모로족 간의 마지막 대규모 충돌이었다. 모로족은 거의 전멸하였다고 한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은 진시황 이래 2,200년 이상 중국을 다스린 군주제가 멸망하고(마지막 군주제는 청나라)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수립한 혁명이다.
혁명이 임박해 있던 1911년 당시 청나라는 서구 열강이 시시각각 침투해 들어오는 상황에서 극도의 혼란에 휩싸인 상태였다.
청나라 정부로 부터 독립을 선포하면서 12월 쑨원(미국에서 귀국)은 임시대총통으로 추대되어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청나라 정부는 전 내각총리대신이자 북양군벌 위안스카이에게 중화민국 정부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위안스카이의 청나라 군대와 중화민국 혁명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중화민국 정부가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 처하자 1912년 2월 쑨원은 황제의 퇴위와 공화정 실시등을 조건으로 위안스카이에게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의 직위를 넘겨주는 협상(남북의화)에 합의하였다.
그 결과 2월 12일 청나라 황제인 선통제가 퇴위를 선언함으로써 중국에는 황제 지배 체제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고 아시아 최초로 공화제 국가가 수립되었다. 3월 10일 베이징에서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에 취임하여 중화민국 베이징정부가 탄생했다.
* 쑨원(손문, 1866년~1925년) : 중국의 외과 의사이자 정치가이며 신해혁명을 이끈 혁명가.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 대총통. 중국국민당의 창립자
* 위안스카이(원세개, 1859년~1916년) : 중국 청나라 말기의 무관(武官), 군인이며 중화민국의 2대 임시대총통이며, 중화제국 초대이자 마지막 황제.
* 선통제(푸이, 1906년~1967년) : 청나라의 1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재위 : 1908년~1912년
* 북양군벌 :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에서 나온 이름이며 청 왕조 멸망 이후 중국 북부 지역에서 실권을 휘둘러온 군벌 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