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 Boxer Rebe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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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기간 : 1899년 11월 2일~1901년 9월 7일, 조회수 : 491, 등록일 : 2021-05-15
제1·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증국번, [2]이홍장등은 강력한 중국을 위하여 양무운동을 전개했으나 내부혼란으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고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다시 몰락의 길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서 서구의 경제적 침탈과 중국내 자유로운 포교활동으로 교회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중국 민중들의 전통적인 삶과 문화에 크게 위협받자 반기독교운동과 반외세·반제국주의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원래 [3]의화단은 산동 지방의 무술을 수련하던 권법조직으로 '권법을 익히고 몸을 수련하여 의를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무술과 주문을 통해 몸에 총알이 통하지 않는다는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단결했고 주로 농민층과 하층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의화단은 [4]부청멸양을 내세우며 서구 세력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사 및 기독교로 개종한 중국인도 외세의 앞잡이로 간주하고 이들에 대한 공격과 살해를 포함한 격렬한 저항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철도, 전신, 교회 등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시설에 대한 파괴 활동이 집중되었다. 의화단은 외세의 물질문명이 중국의 전통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하여 이를 배격하고자 하였다.
의화단은 1900년 베이징으로 진입하여 서구 외교 공관들을 포위하였으며 일부 서양인들을 살해하는 등 무력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감행하였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외세를 견제할 수단으로 의화단을 공식적으로 지원하였다.
서구 열강들은 자국민이 의화단에 의해 학살당하고 이권이 침탈당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8개국 [5]연합군을 조직해 베이징으로 진입하면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선진화된 전술과 신식 무기를 상대한 청군과 의화단은 연합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1901년,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함으로써 의화단은 진압되었으며, 운동은 종결되었다.
이에 대한 결과로 청나라는 열강과 굴욕적인 베이징 의정서(신축조약)를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외국군의 주둔을 허용했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청 정부는 내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6]변법자강운동과 [7]신정이라는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내부 대립으로 효과를 내지못하고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1]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2]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실질적인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3] 의화단(義和團) : 중국 청나라 말기에 반외세·반기독교·반제국주의 성격을 지닌 무장단체로 무장단체이며 농민과 도시 하층민을 주축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외세의 침략과 기독교 세력의 팽창,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 혼란과 경제적 고통에 분노한 민중의 감정을 대변하였다
[4] 부청멸양(扶清滅洋) : 청을 돕고 서양을 멸하자
[5] 연합군 : 영국, 미국, 호주, 인도(영국군 소속),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헝가리, 이탈리아, 일본
[6] 변법장강운동(變法自彊運動, 1898년 6월 11일~1898년 9월 21일) :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을 포함한 서구식 제도 개혁운동. 변법은 '낡은법을 변화시킴'을 의미. 내부 갈등으로 실패함
[7] 신정(新政, 1901년~1911년) : 서태후 주도하의 행정, 교육, 군사, 재정등의 서구식 개혁과 입헌군주제 실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멸망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서 서구의 경제적 침탈과 중국내 자유로운 포교활동으로 교회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중국 민중들의 전통적인 삶과 문화에 크게 위협받자 반기독교운동과 반외세·반제국주의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원래 [3]의화단은 산동 지방의 무술을 수련하던 권법조직으로 '권법을 익히고 몸을 수련하여 의를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무술과 주문을 통해 몸에 총알이 통하지 않는다는 신비주의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단결했고 주로 농민층과 하층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의화단은 [4]부청멸양을 내세우며 서구 세력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사 및 기독교로 개종한 중국인도 외세의 앞잡이로 간주하고 이들에 대한 공격과 살해를 포함한 격렬한 저항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철도, 전신, 교회 등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시설에 대한 파괴 활동이 집중되었다. 의화단은 외세의 물질문명이 중국의 전통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하여 이를 배격하고자 하였다.
의화단은 1900년 베이징으로 진입하여 서구 외교 공관들을 포위하였으며 일부 서양인들을 살해하는 등 무력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감행하였다. 이에 청나라 조정은 외세를 견제할 수단으로 의화단을 공식적으로 지원하였다.
서구 열강들은 자국민이 의화단에 의해 학살당하고 이권이 침탈당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8개국 [5]연합군을 조직해 베이징으로 진입하면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였다. 선진화된 전술과 신식 무기를 상대한 청군과 의화단은 연합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결국 1901년,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함으로써 의화단은 진압되었으며, 운동은 종결되었다.
이에 대한 결과로 청나라는 열강과 굴욕적인 베이징 의정서(신축조약)를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외국군의 주둔을 허용했으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청 정부는 내부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6]변법자강운동과 [7]신정이라는 일련의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내부 대립으로 효과를 내지못하고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1]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2]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실질적인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3] 의화단(義和團) : 중국 청나라 말기에 반외세·반기독교·반제국주의 성격을 지닌 무장단체로 무장단체이며 농민과 도시 하층민을 주축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외세의 침략과 기독교 세력의 팽창,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 혼란과 경제적 고통에 분노한 민중의 감정을 대변하였다
[4] 부청멸양(扶清滅洋) : 청을 돕고 서양을 멸하자
[5] 연합군 : 영국, 미국, 호주, 인도(영국군 소속),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헝가리, 이탈리아, 일본
[6] 변법장강운동(變法自彊運動, 1898년 6월 11일~1898년 9월 21일) : 상공업 진흥과 신식학교 개설을 포함한 서구식 제도 개혁운동. 변법은 '낡은법을 변화시킴'을 의미. 내부 갈등으로 실패함
[7] 신정(新政, 1901년~1911년) : 서태후 주도하의 행정, 교육, 군사, 재정등의 서구식 개혁과 입헌군주제 실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