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일본사건기간 : 1932년 4월 29일, 조회수 : 413, 등록일 : 2021-04-15
1932년 4월 29일 일본은 중국 상하이시 훙커우 공원(현재 루신공원)에서 1차 상하이 사변의 승리 자축과 일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진다.
독립운동가 윤봉길은 폭탄을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하여 홍커우 공원에 입장한다. 11시 40분에 윤봉길은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리고 나서 묵념을 올리는 순간을 노려 기념식 단상으로 접근해 물통 폭탄을 투척하여 폭발했으나,도시락 폭탄은 불발되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물통 폭탄 폭발로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는 사망했으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를 절단했다. 특히 오른발이 잘려 절음발이가 된 주 중국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1945년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 외무대신 자격으로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항복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윤봉길의사는 현장에서 체포 당한후 엄청난 구타를 당했으며, 연행 후 고문을 받고 5월25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육군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 훙커우공원 : 현재는 루쉰공원이며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에 위치한 공원이다. 루쉰은 중국의 소설가로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충남 예산 출신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덕산 보통하교를 자퇴하고 농촌 계몽운동에 힘썼다. 1930년 망명길에 올라 만주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김구선생을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독립운동 대열에 나서게 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훙커우 공원 폭탄 의거로 일본의 군관수뇌들을 폭살, 중상을 입힌뒤 현장에서 체포되어 12월 19일 순국하였다.
출처 :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안내판
[촬영일 :2020-10-11]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는 윤봉길의사의 묘
[촬영일 :2020-10-11]
삼의사의 묘 : 조국 광복을 위해 몸 바친 이봉창,윤봉길, 백정기 의사를 모신 묘역이다. 삼의사는 1946년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서울 용산구 효창 공원내에 안장되었다. 왼쪽에서 3번째가 윤봉길의사의 묘이다
중국 제1차 국공내전은 1927년 4월 12일 [1]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 내전의 발단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1924년에 군벌 타도를 목표로 제1차 국공합작을 결성했으나, 이념적 갈등과 권력 다툼으로 인해 협력이 붕괴된 데 있다. 특히 국민당은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위협으로 간주하며 제거하려 했고,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를 기반으로 독립적 세력을 키우려 하면서 충돌이 심화되었다.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은 공산당원들을 대규모로 숙청하며 본격적인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내전 초기, 국민당은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쳐 공산당 세력을 도시와 주요 지역에서 축소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에 공산당은 도시에서의 저항을 포기하고 농촌으로 후퇴해 [4]홍군을 조직하고 게릴라 전술을 통해 저항했다.
국민당은 공산당 근거지를 파괴하기 위한 다섯 차례의 공세를 벌였으며, 특히 1933~1934년의 제5차 토벌 작전은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약 9,000km에 달하는 [3]대장정을 감행하며 국민당의 포위망을 벗어나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초래했지만, 공산당 내부에서 [2]마오쩌둥의 지도력이 부각되었고 당의 조직이 재정비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제2차 국공합작을 체결하며 내전은 종결되었다.
제1차 국공내전은 공산당에게는 농촌 기반을 강화하고[4] 홍군의 전술과 조직력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시기였으며, 이는 이후 제2차 국공내전에서의 승리로 이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국민당은 일시적으로 공산당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전쟁으로 인한 장기적인 내부 분열과 공산당의 생존 전략은 국민당의 궁극적인 패배를 예고하는 요인이 되었다.
[1] 장제스(Chiang Kai-shek, 蔣介石, 1887년~1975년) : 한자음 장개석. 중국 국민당의 총통. 중화민국 1,2,3,4,5대 총통(재임 1948년 5월 20일~1975년 4월 5일). 본명은 중정(中正), 자는 제스(介石). 본명보다는 자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2]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 : 중국 공산당의 제1대 중앙위원회 주석(임기, 1945년 6월 19일~1976년 9월 9일). 일본 패망 이후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제스와 2차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 대륙을 장악했다 [3] 대장정(大長征) : 1934년 10월, 국민혁명군의 제5차 초공작전을 견디지 못한 중국공산당이 기존의 근거지였던 중국 동남부의 장시성을 떠나 약 1년에 걸쳐 중국 서북부 산시성으로 근거지를 이동한 사건. 10만에 육박했던 출발 인원 중 산시성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인원은 6,000명에 불과했다 [4] 홍군 :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 또는 단순히 홍군(紅軍)은 1927-1946 사이의 중국공산당의 무장조직다. 1927년 8월 1일 중국공농혁명군(中國工農革命軍)을 시작으로, 1928년 5월 25일 중국공농홍군(中國工農紅軍)으로 개칭하였다. 제2차 국공합작(1937.9)무렵, 편제상 국민당군에 편입되어 국민혁명군 제8로군(1937.8)과 신사군(1939.10)으로 개편되었다. 일본패망 이후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1947년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공항(Depression)은 높은 실업률, 임금삭감, 물가하락, 기업 활동의 위축을 동반하는 대규모 경제 공황을 뜻하며 일반적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공황을 말한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전세계 경제 침체 현상으로 금융 시장의 대혼란과 대규모 실직 사태가 일어나 당시 서구 자본주의 사회 체계를 뒤흔들어 버렸고 미국은 1929년 10월 24일(검은 목요일)월스트리트의 주가가 급작스럽게 폭락하면서 경기침체의 시작을 알렸다.
대공황의 영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봉창(1901~1932) 의사는 서울 용산 출신으로 용산 문창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과 함께 히로히토 일왕 폭살계획을 세워 1932년 1월 8일 일왕의 거처로 통하는 문들 중 하나인 동경 사쿠라다 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히로히토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비록 거사는 실패했지만 이봉창 의거가 기폭제가 되어 임시정부는 더욱 활발히 의열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 이치가야 형무소 : 이봉창 의사를 비롯해 박열 의사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형되고 돌아가신 도쿄에 있는 형무소이다.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지고 그 터에는 주택들과 놀이터로 바뀌었지만 한자로'형사자위령탑'이라고 적혀있는 비석이 남아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며 만주 일대를 점령하자, 그러나 일본군은 서양열강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조계지를 가지고 있는 상하이 지역에 눈독을 들였다. 당시 상하이는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이 조계지를 설치하고 막대한 양의 자본을 투자한 곳이었다.
1월 18일에 일본인 승려 일행이 상하이 삼우실업사(三友實業社)근처에서 중국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그중 1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다(일본이 고용한 중국인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월 20일 이를 구실로 일본인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는 삼우실업사 공장을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중국 경찰과 일본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일본은 상하이 시 당국에 일본인 살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와 가해자 처벌,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 중국 측은 결국 이튿날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중국 측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즉각 군사적 공격을 시작했다.
1월 28일 상하이 조계(租界) 경비를 담당하던 일본의 해군육전대와 중국의 19로군(十九路軍) 사이에 전투가 발발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상하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은 3만여 19로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고, 영국과 미국 총영사의 중재로 일시 정전 협약이 성립했다.
중국은 국제 연맹에 일본의 침략을 제소했다. 그러나 일본은 2월 5일 육해군을 포함해 총 1만 7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전투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잘 방어해오던 중국 19로군운 갑자기 철수하였다.
3월 하순부터 중일 양국 및 중국에 많은 이권을 갖고 있던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4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정전 회담이 열렸다. 결국 5월 5일 국제 연맹의 협정안 채택을 거쳐 정전 협정이 성립했다. 일본군은 7월 17일 상하이에서 철수했다.
19로군의 철수로 인해 상하이는 자국의 군대를 상주시키지 못하는 지역이 되었다
[참조]
- 국사편찬위원회-우리역사넷
- 위키백과
* 조계(租界, concessions in China): 청나라에 있었던 외국인이 행정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한 조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