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운동(洋務運動)
중국
사건기간 : 1861년~1894년, 조회수 : 487, 등록일 : 2021-04-09
청나라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무기력하게 패하고 태평천국운동을 겪은 뒤 국제사회의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 해당되는 데이터가 없습니다.
해당되는 데이터가 없습니다.
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미국 백인 정착민과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사이의 정복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말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태평천국운동 청나라 말기의 사회적·경제적 혼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중화제국의 질서가 붕괴되어 가는 동안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 반란이자 종교 혁명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운동의 지도자인 [1]홍수전은 [2]광시성 출신의 몰락한 유생으로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한 후 기독교 서적을 접하고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중국에서 태어난 메시아라는 교리를 세우고 전파하였다. 그는 서양 기독교의 사상과 중국 민간 신앙을 혼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 평등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851년, 홍수전은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 열망을 바탕으로 농민과 하층민,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아 태평천국이라는 국가를 선포하고 스스로 천왕에 올랐다. 그는 청조의 통치를 부정하며 새 질서를 세우고자 하였다. 태평천국은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1853년에는 중국의 중심 도시인 [3]난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재산의 공동 소유, 남녀평등, 신분제 폐지, 전족 금지 등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등 근대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많은 농민과 억압받는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권력 다툼, 통치 경험 부족, 과도한 종교 중심주의 등으로 인해 점차 혼란이 커졌고 외부적으로는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후 청나라군과 서양 열강(영국, 프랑스)에 패퇴하였다. 결국 [5]중국번의 [4]상군에 희하여 난징이 함락되고 홍수전이 사망하면서 14년간의 태평천국운동은 종결되었다.
이 운동은 청나라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이후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 신해혁명 등의 근대화에 영향을 주었다.
[1] 홍수전(1814년~1864) : 청나라 내에서 기독교에 기초한 종교국가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국하여 청나라 조정과 대립하였다
[2] 광시성 :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로 성도는 난닝시이다. 1958년 이전에는 광시성이었지만 1958년에 좡족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3] 난징(Nanjing) : 중화민국(대만, 지도자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의 명목상 수도이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쑤성의 성도
[4] 상군 : 청나라 말기 후난성 지방군의 호칭. 후난성의 상향출신의 증국번이 향용을 조직했으며 상군은 향용조식중 하나이다
[5] 증국번(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이 운동의 지도자인 [1]홍수전은 [2]광시성 출신의 몰락한 유생으로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한 후 기독교 서적을 접하고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중국에서 태어난 메시아라는 교리를 세우고 전파하였다. 그는 서양 기독교의 사상과 중국 민간 신앙을 혼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 평등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851년, 홍수전은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 열망을 바탕으로 농민과 하층민,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아 태평천국이라는 국가를 선포하고 스스로 천왕에 올랐다. 그는 청조의 통치를 부정하며 새 질서를 세우고자 하였다. 태평천국은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고 1853년에는 중국의 중심 도시인 [3]난징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태평천국은 재산의 공동 소유, 남녀평등, 신분제 폐지, 전족 금지 등의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등 근대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많은 농민과 억압받는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권력 다툼, 통치 경험 부족, 과도한 종교 중심주의 등으로 인해 점차 혼란이 커졌고 외부적으로는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후 청나라군과 서양 열강(영국, 프랑스)에 패퇴하였다. 결국 [5]중국번의 [4]상군에 희하여 난징이 함락되고 홍수전이 사망하면서 14년간의 태평천국운동은 종결되었다.
이 운동은 청나라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이후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 신해혁명 등의 근대화에 영향을 주었다.
[1] 홍수전(1814년~1864) : 청나라 내에서 기독교에 기초한 종교국가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을 건국하여 청나라 조정과 대립하였다
[2] 광시성 :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로 성도는 난닝시이다. 1958년 이전에는 광시성이었지만 1958년에 좡족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3] 난징(Nanjing) : 중화민국(대만, 지도자 쑨원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의 명목상 수도이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쑤성의 성도
[4] 상군 : 청나라 말기 후난성 지방군의 호칭. 후난성의 상향출신의 증국번이 향용을 조직했으며 상군은 향용조식중 하나이다
[5] 증국번(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피의 캔자스는 미국역사에서 '피로 물든 캔자스(Bloody Kansas) 혹은 경계지역의 전쟁(Border War)'라고 언급된다.
피의 캔자스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자유주 정착민과 노예제를 찬성하는 노예주 정착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련의 폭력적, 정치적 대립 사건을 말한다.
미국의 노예제 문제를 놓고 벌어진 폭력적인 사태는 미국 북부와 남부의 노예 제도를 둘러싼 대리 전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미국 남북전쟁의 사전 징후가 되었다.
이러한 폭력적인 사건들은 캔자스 준주와 인접한 미주리주 서쪽의 프런티어 타운에서 발생했다. 갈등의 주요 이슈는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할 것인가 아니면 노예주로 가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노예주로서 미주리주는 두 면이 자유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일리노이주, 북쪽으로는 아이오와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한다면 미주리는 삼면이 자유주들로 경계를 이루는 상황에 처한다.이는 미주리 노예 소유주들에게 위협이었다.
극심한 감정대결은 몇 년 동안 이어졌고 이후 진행된 주민투표에서 캔자스주에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법안은 주 의회의 인준을 받았고 1861년 1월 29일 노예제도를 거부하는 자유주로서 연방에 새로 편입되었다.
캔자스주의 연방가입 후 세 달 뒤에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 준주(準州) : 미합중국 자산의 일부로 병합되었거나 미국 연방 의회에서 제정된 조직법에 따라 입법, 행정, 사법 등의 조직을 갖춘 곳을 말한다. 1912년 애리조나가 주가 된 것을 마지막으로 미국 본토내의 준주는 없으며, 하와이와 알래스카가 1959년 준주에서 주가 되면서 현재 미국내 준주인 곳은 없다
* 노예주(slave state) : 미국 남북 전쟁 이전에 있었던 노예 제도가 합법적이었던 주
* 자유주(free state) : 노예 제도를 금지했거나 이미 폐지한 주
피의 캔자스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자유주 정착민과 노예제를 찬성하는 노예주 정착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련의 폭력적, 정치적 대립 사건을 말한다.
미국의 노예제 문제를 놓고 벌어진 폭력적인 사태는 미국 북부와 남부의 노예 제도를 둘러싼 대리 전쟁이라고 볼 수 있으며 미국 남북전쟁의 사전 징후가 되었다.
이러한 폭력적인 사건들은 캔자스 준주와 인접한 미주리주 서쪽의 프런티어 타운에서 발생했다. 갈등의 주요 이슈는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할 것인가 아니면 노예주로 가입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노예주로서 미주리주는 두 면이 자유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동쪽으로는 일리노이주, 북쪽으로는 아이오와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캔자스가 자유주로 연방에 가입한다면 미주리는 삼면이 자유주들로 경계를 이루는 상황에 처한다.이는 미주리 노예 소유주들에게 위협이었다.
극심한 감정대결은 몇 년 동안 이어졌고 이후 진행된 주민투표에서 캔자스주에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법안은 주 의회의 인준을 받았고 1861년 1월 29일 노예제도를 거부하는 자유주로서 연방에 새로 편입되었다.
캔자스주의 연방가입 후 세 달 뒤에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 준주(準州) : 미합중국 자산의 일부로 병합되었거나 미국 연방 의회에서 제정된 조직법에 따라 입법, 행정, 사법 등의 조직을 갖춘 곳을 말한다. 1912년 애리조나가 주가 된 것을 마지막으로 미국 본토내의 준주는 없으며, 하와이와 알래스카가 1959년 준주에서 주가 되면서 현재 미국내 준주인 곳은 없다
* 노예주(slave state) : 미국 남북 전쟁 이전에 있었던 노예 제도가 합법적이었던 주
* 자유주(free state) : 노예 제도를 금지했거나 이미 폐지한 주
미국 남북 전쟁(American Civil War)은 미국에서 아메리카 합중국과 아메리카 연합국 사이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후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 포격을 시작으로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결과 남부연합군이 패했고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후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 포격을 시작으로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결과 남부연합군이 패했고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 함풍제는 제2차 아편전쟁(애로호 전쟁) 이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베이징 북쪽에 위치한 열하에 있는 별궁(피서산장)으로 피신해 있었다.
아편전쟁은 이복동생인 공친왕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음으로써 종결되었지만 상심한 함풍제는 수도인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열하에 남아있었으며 1년 뒤인 1861년 11월 21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함풍제는 사망하기전에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 황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막기위하여 가까운 황족종친을 배제하고 황실의 먼 종친이거나 고명대신인 이친왕, 정친왕을 비롯하여 숙순, 경수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보정대신 8인을 구성하였다.
이 기미를 알아챈 서태후(함풍제의 후궁)는 소외되어 있던 황족 공친왕을 끌어들여 황제의 시신을 베이징의 자금성으로 운구하던 두 친왕과 숙순 및 그 일당을 체포한다. 두 친왕은 자결명령을 받았고 열하행궁 일체의 실무 책임자인 숙순등은 모두 처형당했다. 결국 함풍제가 지정한 보정대신 8인은 모두 숙청당한다.
이 궁정반란은 신유년에 일어났다하여 신유정변이라 한다. 함풍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서태후의 집권을 열어준 사건이 되었다.
이후 서태후의 어린 아들(당시 6세)은 함풍제에 이어 황제에 등극하는데, 그가 청나라 10대 황제 동치제이다. 서태후와 동태후(함풍제의 두번째 황후)는 태후로서 동치제의 공동섭정이 시작되면서 권력을 잡게 되었다.
특히, 서태후는 1861년부터 1908년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청나라를 통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가 죽은지 4년후에 대청제국은 종말을 고했으니 청나라 말기는 거의 서태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함풍제(1831년~1861년) : 중국 청나라 제9대 황제.혁저. 재위 : 1850년~1861년. 묘호는 문종.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4남
* 동치제(1856년~1875년) : 중국 청나라 제10대 황제. 재위 : 1861년~1874년). 묘호는 목종
*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림
* 동태후(자안황태후,1837년~1881년) : 함풍제의 두번째 황후. 처소가 자금성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태후라 불림
*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
* 열하 : 중국 허베이성에 위치한 현재의 청더시를 말하며 청나라 황제의 행궁(피서산장)이 있다.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230km 떨어져 있으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아편전쟁은 이복동생인 공친왕의 주도로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음으로써 종결되었지만 상심한 함풍제는 수도인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열하에 남아있었으며 1년 뒤인 1861년 11월 21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함풍제는 사망하기전에 권력의 균형을 이루고 황권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막기위하여 가까운 황족종친을 배제하고 황실의 먼 종친이거나 고명대신인 이친왕, 정친왕을 비롯하여 숙순, 경수등을 우두머리로 하는 보정대신 8인을 구성하였다.
이 기미를 알아챈 서태후(함풍제의 후궁)는 소외되어 있던 황족 공친왕을 끌어들여 황제의 시신을 베이징의 자금성으로 운구하던 두 친왕과 숙순 및 그 일당을 체포한다. 두 친왕은 자결명령을 받았고 열하행궁 일체의 실무 책임자인 숙순등은 모두 처형당했다. 결국 함풍제가 지정한 보정대신 8인은 모두 숙청당한다.
이 궁정반란은 신유년에 일어났다하여 신유정변이라 한다. 함풍제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서태후의 집권을 열어준 사건이 되었다.
이후 서태후의 어린 아들(당시 6세)은 함풍제에 이어 황제에 등극하는데, 그가 청나라 10대 황제 동치제이다. 서태후와 동태후(함풍제의 두번째 황후)는 태후로서 동치제의 공동섭정이 시작되면서 권력을 잡게 되었다.
특히, 서태후는 1861년부터 1908년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이 청나라를 통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가 죽은지 4년후에 대청제국은 종말을 고했으니 청나라 말기는 거의 서태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함풍제(1831년~1861년) : 중국 청나라 제9대 황제.혁저. 재위 : 1850년~1861년. 묘호는 문종.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4남
* 동치제(1856년~1875년) : 중국 청나라 제10대 황제. 재위 : 1861년~1874년). 묘호는 목종
*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림
* 동태후(자안황태후,1837년~1881년) : 함풍제의 두번째 황후. 처소가 자금성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태후라 불림
*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
* 열하 : 중국 허베이성에 위치한 현재의 청더시를 말하며 청나라 황제의 행궁(피서산장)이 있다.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230km 떨어져 있으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19세기 중반, 프랑스는 동남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 내 가톨릭 선교사 보호와 경제적 이익을 명분으로 개입하면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프랑스는 1858년 [3]다낭을 공격하며 베트남 [1]응우옌 왕조와 전쟁을 본격화하였고 1859년에는 [2]사이공을 점령하였다. 이후 몇 년간 베트남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 지속되었으며 프랑스는 남부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결국 베트남은 프랑스와 협상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1862년 6월 5일 제1차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에게 남부 [4]코친차이나 일부 지역을 할양하기로 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 영토를 직접적으로 첫 번재로 차지하였으며 이후 베트남 전역으로 식민지 지배가 확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약에 따라 베트남은 프랑스의 무역을 개방했으며 프랑스 상인들이 특정 항구에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이는 베트남의 경제적 주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프랑스가 점진적으로 경제적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가 개입한 중요한 명분 중 하나였던 가톨릭 신앙의 자유 보장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베트남은 가톨릭 선교사와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종교 활동을 보장해야 했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부에 지속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으며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베트남은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는 [1]응우옌 왕조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고 베트남의 국력이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에서 본격적으로 식민 통치를 시작하였다. 1867년에 프랑스는 [4]코친차이나 전체를 완전히 점령하며 영토 확장을 지속하였다. 한편, 조약에 반발하는 베트남 내부의 저항으로 반프랑스 운동이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향력은 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1884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면서 완전한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사이공 조약은 20세기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다낭(Da Nang) : 다낭은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이자 경제 및 관광 중심지이다. 1858년 프랑스가 다낭을 공격하면서 베트남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다낭은 프랑스의 주요 군사 거점이 되었다.
[4]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용한 지역이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 베트남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에게 남부 [4]코친차이나 일부 지역을 할양하기로 하였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 영토를 직접적으로 첫 번재로 차지하였으며 이후 베트남 전역으로 식민지 지배가 확대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약에 따라 베트남은 프랑스의 무역을 개방했으며 프랑스 상인들이 특정 항구에서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이는 베트남의 경제적 주권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프랑스가 점진적으로 경제적 지배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가 개입한 중요한 명분 중 하나였던 가톨릭 신앙의 자유 보장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베트남은 가톨릭 선교사와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종교 활동을 보장해야 했다. 이는 프랑스가 베트남 내부에 지속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으며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베트남은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는 [1]응우옌 왕조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고 베트남의 국력이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에서 본격적으로 식민 통치를 시작하였다. 1867년에 프랑스는 [4]코친차이나 전체를 완전히 점령하며 영토 확장을 지속하였다. 한편, 조약에 반발하는 베트남 내부의 저항으로 반프랑스 운동이 곳곳에서 발생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영향력은 베트남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1884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전락하면서 완전한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사이공 조약은 20세기까지 이어지는 프랑스 식민 통치의 기반을 마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다낭(Da Nang) : 다낭은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이자 경제 및 관광 중심지이다. 1858년 프랑스가 다낭을 공격하면서 베트남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다낭은 프랑스의 주요 군사 거점이 되었다.
[4]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용한 지역이다
미국 남북전쟁은 1861년 4월에 일어났다.
1862년 7월 22일 링컨 대통령은 그의 각료들에게 역사적인 노예 해방 선언의 초안을 낭독해 보였으며 9월22일 노예해방 선언의 제 2초안을 내각에게 낭독했다. 몇 가지 수정을 가하여 이 선언문은 예비선언으로 발표되었다.
정식 노예해방 선언문은 1863년 1월 1일에 발표되었다.
*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1865년) : 미국의 16대 대통령. 임기 :1861년 ~1865년
* 윌리엄 스워드(William Seward) : 미국 국무장관이며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62년 7월 22일 링컨 대통령은 그의 각료들에게 역사적인 노예 해방 선언의 초안을 낭독해 보였으며 9월22일 노예해방 선언의 제 2초안을 내각에게 낭독했다. 몇 가지 수정을 가하여 이 선언문은 예비선언으로 발표되었다.
정식 노예해방 선언문은 1863년 1월 1일에 발표되었다.
*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1865년) : 미국의 16대 대통령. 임기 :1861년 ~1865년
* 윌리엄 스워드(William Seward) : 미국 국무장관이며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 전투의 격전지였던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열린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링컨 대통령이 한 연설이다.
272 단어에 3분여의 짧은 연설이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이자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이 되었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지금으로부터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 자유의 정신으로 잉태되고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념이 바쳐진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나라가, 아니 이러한 정신과 신념으로 잉태되고 헌신하는 어느 나라이든지, 과연 오래도록 굳건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대인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전쟁의 거대한 싸움터인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 싸움터의 일부를, 이 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 바로 그 나라를 살리고자 한 영령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봉헌하기 위함입니다.
리의 이 헌정은 지극히 마땅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할 수도, 축성할 수도, 신성화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싸웠던 용맹한 전사자와 생존 용사들이 이미 이 곳을 신성한 땅으로
272 단어에 3분여의 짧은 연설이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이자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이 되었다.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지금으로부터 여든하고도 일곱 해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 자유의 정신으로 잉태되고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념이 바쳐진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나라가, 아니 이러한 정신과 신념으로 잉태되고 헌신하는 어느 나라이든지, 과연 오래도록 굳건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대인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전쟁의 거대한 싸움터인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 싸움터의 일부를, 이 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 바로 그 나라를 살리고자 한 영령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봉헌하기 위함입니다.
리의 이 헌정은 지극히 마땅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할 수도, 축성할 수도, 신성화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싸웠던 용맹한 전사자와 생존 용사들이 이미 이 곳을 신성한 땅으로
병인박해는 1866년(고종 3년) 흥선대원군의 대규모 천주교 탄압을 말하며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한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살아남은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청나라로 탈출해 천진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고 이는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천주교 탄압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1873년에 종료되었으며 1886년 프랑스와 조선이 국교를 맺고 병인박해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인정하며 추숭 조치로 박해는 마무리된다.
해방 이후인 1968년에는 순교자들을 복자로 추숭하였고 1984년에는 성인으로 추앙하였다.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 펠릭스 클레르 리델(1830년~1884) : 프랑스 낭트 출생의 가톨릭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한국이름은 이복명
*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병인양요 때 조선 공격을 지휘하였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살아남은 펠릭스 클레르 리델 신부는 청나라로 탈출해 천진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고 이는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천주교 탄압은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1873년에 종료되었으며 1886년 프랑스와 조선이 국교를 맺고 병인박해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인정하며 추숭 조치로 박해는 마무리된다.
해방 이후인 1968년에는 순교자들을 복자로 추숭하였고 1984년에는 성인으로 추앙하였다.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 펠릭스 클레르 리델(1830년~1884) : 프랑스 낭트 출생의 가톨릭 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한국이름은 이복명
*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병인양요 때 조선 공격을 지휘하였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6년(조선 고종 3년) 평양 군민들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에 태워 격침시킨 사건이다.
이 배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마을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였다. 이에 평양 감사 박규수의 지휘 아래 평양 관민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고 선원들은 처형하였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이 배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마을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하였다. 이에 평양 감사 박규수의 지휘 아래 평양 관민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고 선원들은 처형하였다.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1866년([1]고종 3년)에 [2]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가 사망하자, 이를 구실로 프랑스의 [3] 로즈 제독은 함대 7척을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수교를 요구했다.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무력으로 대항하며 강화도 곳곳에서 교전이 일어났다. 교전이 계속되자 프랑스군은 더 이상의 교전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철수를 결정했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점령했던 [4] 강화성을 파괴하고 관아에 불을 지르고 [5] 외규장각 의궤, 서적등 각종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후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졌고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병인양요는 병인년에 양이(洋夷 :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1]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2]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3]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4] 강화성 :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고려궁지이며 고려시대 몽골 침입 당시에 사용하던 고려 궁궐터
[5] 외규장각 : 조선 정조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무력으로 대항하며 강화도 곳곳에서 교전이 일어났다. 교전이 계속되자 프랑스군은 더 이상의 교전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철수를 결정했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점령했던 [4] 강화성을 파괴하고 관아에 불을 지르고 [5] 외규장각 의궤, 서적등 각종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후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졌고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병인양요는 병인년에 양이(洋夷 : 서양 오랑캐)가 일으킨 소요(騷擾)라는 뜻이다.
[1]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2] 흥선대원군(1821년~1898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친아버지. 본명은 이하응
[3]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1812년~1882년) : 프랑스의 해군 제독
[4] 강화성 :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위치한 고려궁지이며 고려시대 몽골 침입 당시에 사용하던 고려 궁궐터
[5] 외규장각 : 조선 정조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
1868년 9월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1]이사벨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폐위되었다. 1869년 스페인 혁명정부는 새로운 왕위 계승자를 물색하였다. 후보를 탐색하다가 1870년 프로이센 왕국의 [2]빌헬름 1세 국왕의 사촌인 레오폴트에게 왕위를 제안하였다.
레오폴트는 처음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프로이센 왕국의 [2]빌헬름 1세는 혁명후 내전상태인 스페인으로 가는 것에 반대했다. 또한 프랑스는 레오폴트가 스페인의 국왕이 되면 스페인과 독일에 둘러쌓이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대의 뜻을 강력히 전달하였다. 결국 1870년 7월 11일 레오폴트는 스페인 왕위 수락을 철회하였다.
프랑스 외교관이 스페인 왕위 포기의 재확인을 위하여 휴양중이던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게 요구한 사건을 [3]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전달했다. 전보를 받은 [3]비스마르크는 내용을 편집하여 언론에 흘렸다. 일명 [4]엠스전보사건으로 프로이센과 프랑스 양국은 서로 분노하였고 여론이 들끓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감정이 악화되자 프랑스의 [5]나폴레옹 3세는 1870년 7월 19일에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등 유럽 열강이 프랑스에 동조하지 않도록 외교정책에 주력했으며 그 결과로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상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제후 국가들은 프로이센편으로 참전하면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뭉친 독일과 프랑스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실전 경험까지 쌓은 프로이센군에게 연속적으로 패배하였고, 이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1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참전하여 진군했으나 [6]스당전투에서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의 패전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1870년 9월 4일 프랑스 제2제정은 붕괴되고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3세는 이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프로이센은 여세를 몰아 9월 15일 파리외곽에 당도하여 [9]알자스-로렌지역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리 방어사령관인 [7]루이 쥘 트로쉬는 이를 거부하고 저항했으나 9월 18일 파리가 포위당했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의 [10]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2]빌헬름 1세는 초대황제로 즉위하고 독일제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수상이자 독일제국의 수상이 되었다.
포위된 파리는 비참한 겨울을 보내고 1871년 1월 28일 항복했고, 휴전협상이 시작되어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프랑스는 50억 프랑을 배상해야 했으며, 알자스-로렌지역을 넘겨주었다. 또한 배상금 완납전까지 프랑스 북부지역에 독일군이 주둔했다.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굴욕, 분노, 상실감과 복수심으로 반독 감정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까지 적대적인 사이가 되었다. 독일은 통일이 완성되어 유럽내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1] 이사벨 2세(Isabel II of Spain, 1830년~1904년) :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유일한 여왕. 여왕이 쫓겨난 후 스페인은 왕위계승의 내분을 겪다가 결국은 이사벨 2세의 왕세자인 알폰소 12세가 즉위하여 스페인은 보르봉 왕조를 계승한다.
[2] 빌헬름 1세(William I,1797년~1888년) : 프로이센의 국왕(1861년~1888년). 독일 제국의 황제(1871년~1888년)
[3]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 프로이센 수상(1862~1890년). 통일독일제국 수상(1871년~1890년)
[4] 엠스전보사건(Ems Dispatch) :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독일 주재 프랑스 대사 사이에 있었던 일을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에게 알리는 내부 전보를 비스마르크가 의도적으로 편집하여 언론에 배포한 사건
[5]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년~1873년) :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초대 대통령(재임,1848년 12월 20일~1852년 12월 2일)이자 프랑스 제2제국의 유일한 황제(재위,1852년 12월 2일~1870년 9월 4일)
[6] 스당(Sedan) : 프랑스 아르덴주에 위치한 코뮌(프랑스 공화국의 최하위 행정구역)중 하나
[7] 루이 쥘 트로쉬(Louis Jules Trochu, 1815년~1896년) : 프랑스의 군 장교이자 정치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중 국민방위정부 수반
[8]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 1797년~1877년) : 프랑스 제3공화국 임시정부 수반. 제2대 대통령(1871년 8월 31일~1873년 5월 24일)
[9]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 : 프랑스와 독일사이에 위치한 프랑스 행정 구역. 프랑스와 독일사이의 주요한 분쟁지역
[10]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 : 프랑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가량 떨어진 베르사유 시에 있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건설한 궁전.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루이 14세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레오폴트는 처음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프로이센 왕국의 [2]빌헬름 1세는 혁명후 내전상태인 스페인으로 가는 것에 반대했다. 또한 프랑스는 레오폴트가 스페인의 국왕이 되면 스페인과 독일에 둘러쌓이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대의 뜻을 강력히 전달하였다. 결국 1870년 7월 11일 레오폴트는 스페인 왕위 수락을 철회하였다.
프랑스 외교관이 스페인 왕위 포기의 재확인을 위하여 휴양중이던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게 요구한 사건을 [3]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전달했다. 전보를 받은 [3]비스마르크는 내용을 편집하여 언론에 흘렸다. 일명 [4]엠스전보사건으로 프로이센과 프랑스 양국은 서로 분노하였고 여론이 들끓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감정이 악화되자 프랑스의 [5]나폴레옹 3세는 1870년 7월 19일에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 등 유럽 열강이 프랑스에 동조하지 않도록 외교정책에 주력했으며 그 결과로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상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제후 국가들은 프로이센편으로 참전하면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뭉친 독일과 프랑스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실전 경험까지 쌓은 프로이센군에게 연속적으로 패배하였고, 이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1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참전하여 진군했으나 [6]스당전투에서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의 패전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1870년 9월 4일 프랑스 제2제정은 붕괴되고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3세는 이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프로이센은 여세를 몰아 9월 15일 파리외곽에 당도하여 [9]알자스-로렌지역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리 방어사령관인 [7]루이 쥘 트로쉬는 이를 거부하고 저항했으나 9월 18일 파리가 포위당했다.
1871년 1월 18일 프랑스의 [10]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2]빌헬름 1세는 초대황제로 즉위하고 독일제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수상이자 독일제국의 수상이 되었다.
포위된 파리는 비참한 겨울을 보내고 1871년 1월 28일 항복했고, 휴전협상이 시작되어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서 프랑스는 50억 프랑을 배상해야 했으며, 알자스-로렌지역을 넘겨주었다. 또한 배상금 완납전까지 프랑스 북부지역에 독일군이 주둔했다.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굴욕, 분노, 상실감과 복수심으로 반독 감정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까지 적대적인 사이가 되었다. 독일은 통일이 완성되어 유럽내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1] 이사벨 2세(Isabel II of Spain, 1830년~1904년) :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유일한 여왕. 여왕이 쫓겨난 후 스페인은 왕위계승의 내분을 겪다가 결국은 이사벨 2세의 왕세자인 알폰소 12세가 즉위하여 스페인은 보르봉 왕조를 계승한다.
[2] 빌헬름 1세(William I,1797년~1888년) : 프로이센의 국왕(1861년~1888년). 독일 제국의 황제(1871년~1888년)
[3]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 프로이센 수상(1862~1890년). 통일독일제국 수상(1871년~1890년)
[4] 엠스전보사건(Ems Dispatch) :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와 독일 주재 프랑스 대사 사이에 있었던 일을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에게 알리는 내부 전보를 비스마르크가 의도적으로 편집하여 언론에 배포한 사건
[5]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 1808년~1873년) :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초대 대통령(재임,1848년 12월 20일~1852년 12월 2일)이자 프랑스 제2제국의 유일한 황제(재위,1852년 12월 2일~1870년 9월 4일)
[6] 스당(Sedan) : 프랑스 아르덴주에 위치한 코뮌(프랑스 공화국의 최하위 행정구역)중 하나
[7] 루이 쥘 트로쉬(Louis Jules Trochu, 1815년~1896년) : 프랑스의 군 장교이자 정치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중 국민방위정부 수반
[8]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 1797년~1877년) : 프랑스 제3공화국 임시정부 수반. 제2대 대통령(1871년 8월 31일~1873년 5월 24일)
[9]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 : 프랑스와 독일사이에 위치한 프랑스 행정 구역. 프랑스와 독일사이의 주요한 분쟁지역
[10]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 : 프랑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가량 떨어진 베르사유 시에 있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건설한 궁전.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루이 14세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신미양요는 미국이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기 위해 벌인 무력 침략 사건이다. '신미'는 간지 연도인 1871년을 의미하고, '양요'는 서양 오랑캐들이 일으킨 난리를 뜻한다.
사건의 발단은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었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 정부의 허가 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침입했으며, 통상을 강요하고 무력으로 대응하다 조선 관민의 저항으로 불에 타 침몰되었다. 이후 미국은 이를 빌미로 조선의 사과와 개항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이에 미국은 무력 시위를 통해 조선을 굴복시키려 했다.
1871년 5월 14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항한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1]존 로저스 제독은 대규모 병력과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인근 조선 해역에 나타났다. 그는 통상 요구 및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 규명을 위해 조선 정부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조선은 강경한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고 외국 선박의 접근을 금지한 상황이었다. 결국 미군은 6월 1일에 강화도에 접근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미군은 6월 10일 [6]초지진, [7]덕진진 등을 차례로 점령한 후 가장 강력한 방어선이던 [2]광성보에 도달했다. 광성보 전투는 신미양요의 최대 격전지로 [3]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결사항전을 펼쳤다. 그러나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화력 앞에 무너졌고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다수의 조선군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조선군 어재연 [5]장군기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는데 미국 [4]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다가 2007년부터 국내로 반환되어 강화전쟁박물관에 보관되었었다. 그러다 2024년 3월에 다시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반납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본격적인 개항 요구를 준비했지만 조선 정부는 끝까지 교섭을 거부하고 완강한 쇄국 정책으로 아무런 협상을 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신미양요는 조선이 서구 열강의 무력 개항 압력에 정면으로 저항했던 사건으로 당시 조선의 군사력 한계와 근대화의 필요성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국권 수호를 위한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한말 의병운동 등 근대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 되었다.
[1] 존 로저스(John Rodgers,1812년 8월 8일 ~ 1882년 5월 5일) : 남북 전쟁 당시 북군 해군으로 활약한 미국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해군 소장이었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 지휘관이었다
[2] 광성보(廣城堡)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효종 9년(1658)에 강화도 방비를 위해 해안가에 설치된 12진보중 하나
[3] 어재연(魚在淵, 1823년~1871년)은 조선 말기의 무신.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미군과 치열한 전투중에 전사하였다. 그해 5월 3일에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4] 아나폴리스(Annapolis) : 미국 메릴랜드주의 주도이다.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소재지
[5] 장군기 :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수비하던 진무영 중군 어재연이 사용한 군기로 일명 수자기(帥字旗)로도 알려져 있다. '수(帥)'는 '장수, '장군', '우두머리' 등을 상징하는 뜻을 갖고 있다
[6] 초지진(草芝鎭)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하고 1679년 조선 숙종때 성으로 지은 요새이다.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7] 덕진진(德津鎭)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조선시대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1866년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었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 정부의 허가 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침입했으며, 통상을 강요하고 무력으로 대응하다 조선 관민의 저항으로 불에 타 침몰되었다. 이후 미국은 이를 빌미로 조선의 사과와 개항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이에 미국은 무력 시위를 통해 조선을 굴복시키려 했다.
1871년 5월 14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항한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1]존 로저스 제독은 대규모 병력과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인근 조선 해역에 나타났다. 그는 통상 요구 및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 규명을 위해 조선 정부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조선은 강경한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고 외국 선박의 접근을 금지한 상황이었다. 결국 미군은 6월 1일에 강화도에 접근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미군은 6월 10일 [6]초지진, [7]덕진진 등을 차례로 점령한 후 가장 강력한 방어선이던 [2]광성보에 도달했다. 광성보 전투는 신미양요의 최대 격전지로 [3]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결사항전을 펼쳤다. 그러나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화력 앞에 무너졌고 어재연 장군을 포함해 다수의 조선군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조선군 어재연 [5]장군기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는데 미국 [4]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다가 2007년부터 국내로 반환되어 강화전쟁박물관에 보관되었었다. 그러다 2024년 3월에 다시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반납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본격적인 개항 요구를 준비했지만 조선 정부는 끝까지 교섭을 거부하고 완강한 쇄국 정책으로 아무런 협상을 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신미양요는 조선이 서구 열강의 무력 개항 압력에 정면으로 저항했던 사건으로 당시 조선의 군사력 한계와 근대화의 필요성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국권 수호를 위한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한말 의병운동 등 근대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 되었다.
[1] 존 로저스(John Rodgers,1812년 8월 8일 ~ 1882년 5월 5일) : 남북 전쟁 당시 북군 해군으로 활약한 미국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해군 소장이었다.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 지휘관이었다
[2] 광성보(廣城堡)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효종 9년(1658)에 강화도 방비를 위해 해안가에 설치된 12진보중 하나
[3] 어재연(魚在淵, 1823년~1871년)은 조선 말기의 무신.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미군과 치열한 전투중에 전사하였다. 그해 5월 3일에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4] 아나폴리스(Annapolis) : 미국 메릴랜드주의 주도이다.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소재지
[5] 장군기 :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수비하던 진무영 중군 어재연이 사용한 군기로 일명 수자기(帥字旗)로도 알려져 있다. '수(帥)'는 '장수, '장군', '우두머리' 등을 상징하는 뜻을 갖고 있다
[6] 초지진(草芝鎭)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는,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구축하고 1679년 조선 숙종때 성으로 지은 요새이다.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7] 덕진진(德津鎭)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조선시대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1971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19세기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 통치 아래 있었으며, 필리핀 원주민들은 심각한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었다. 특히 [2]포로스라는 강제 노동 제도와 과도한 세금 부과로 인해 민중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또한, 1868년 스페인 본국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며 필리핀에서도 개혁의 기대가 있었지만, 보수적인 스페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식민 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필리핀인 군인과 노동자들에게 주어졌던 세금 감면 등의 특혜가 철회되었다. 이는 군부와 노동 계층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72년 1월 20일 밤, [1]카비테 해군 조선소의 필리핀인 군인들과 노동자들이 스페인 식민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조선소와 일부 군사 시설을 점령하려 계획했지만 사전에 [3]마누엘 솔라노라는 스페인 장교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스페인 군대는 신속히 대응하여 반란군을 제압하였다. 이후 필리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스페인 정부는 반란에 가담한 군인과 노동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 또한 필리핀 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반란과 관련이 없던 필리핀 [4]고모부르자 사제인 마리아노 고메스(Mariano Gó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삼오라(Jacinto Zamora)를 반역죄로 몰아 1872년 2월 17일 마닐라의 바고움바얀(Bagumbayan)광장에서 공개 처형하였다. 이들은 필리핀의 독립운동에 깊은 영향을 준 인물들로 그들의 처형은 민족주의 감정을 더욱 고조시켰다.
카비테 반란과 [4]고모부르자 사제 처형은 필리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필리핀 지식인 계층과 개혁주의자들은 스페인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을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1896년 필리핀 혁명으로 이어졌다.
카비테 반란은 단순한 군사적 봉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스페인 당국의 강경 대응은 필리핀 민족주의자들의 저항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으며, 이후 필리핀의 독립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반란은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불만에서 비롯된 군사 반란이었지만, 스페인 정부가 이를 과장하고 가혹하게 진압하면서 필리핀 국민들에게 스페인 통치의 부당함을 각인시켰다. 결과적으로 카비테 반란은 필리핀 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1] 카비테(Cavite) : 필리핀 루손섬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
[2] 포로스(Polo y Servicios) : 스페인 식민지 시대 필리핀에서 16~60세의 남성이 일정 기간 강제 노동에 동원되던 의무 노동 제도
[3] 마누엘 솔라노(Manuel Solano) : 카비테 반란 당시 스페인 식민 정부에 반란 계획을 밀고하여 스페인군이 사전에 대비하고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스페인 장교
[4] 고모부르자(Gomburza) : 카비테 반란 이후 스페인 식민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된 필리핀의 세 명의 가톨릭 사제 마리아노 고메스(Mariano Gó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삼오라(Jacinto Zamora)를 지칭하며, 이들의 처형은 필리핀 독립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868년 스페인 본국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나며 필리핀에서도 개혁의 기대가 있었지만, 보수적인 스페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식민 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필리핀인 군인과 노동자들에게 주어졌던 세금 감면 등의 특혜가 철회되었다. 이는 군부와 노동 계층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72년 1월 20일 밤, [1]카비테 해군 조선소의 필리핀인 군인들과 노동자들이 스페인 식민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조선소와 일부 군사 시설을 점령하려 계획했지만 사전에 [3]마누엘 솔라노라는 스페인 장교의 밀고로 발각되었다. 스페인 군대는 신속히 대응하여 반란군을 제압하였다. 이후 필리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스페인 정부는 반란에 가담한 군인과 노동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거나 유배 보냈다. 또한 필리핀 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반란과 관련이 없던 필리핀 [4]고모부르자 사제인 마리아노 고메스(Mariano Gó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삼오라(Jacinto Zamora)를 반역죄로 몰아 1872년 2월 17일 마닐라의 바고움바얀(Bagumbayan)광장에서 공개 처형하였다. 이들은 필리핀의 독립운동에 깊은 영향을 준 인물들로 그들의 처형은 민족주의 감정을 더욱 고조시켰다.
카비테 반란과 [4]고모부르자 사제 처형은 필리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필리핀 지식인 계층과 개혁주의자들은 스페인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을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1896년 필리핀 혁명으로 이어졌다.
카비테 반란은 단순한 군사적 봉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필리핀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스페인 당국의 강경 대응은 필리핀 민족주의자들의 저항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으며, 이후 필리핀의 독립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반란은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독립운동이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불만에서 비롯된 군사 반란이었지만, 스페인 정부가 이를 과장하고 가혹하게 진압하면서 필리핀 국민들에게 스페인 통치의 부당함을 각인시켰다. 결과적으로 카비테 반란은 필리핀 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1] 카비테(Cavite) : 필리핀 루손섬에 위치한 주요 항구 도시
[2] 포로스(Polo y Servicios) : 스페인 식민지 시대 필리핀에서 16~60세의 남성이 일정 기간 강제 노동에 동원되던 의무 노동 제도
[3] 마누엘 솔라노(Manuel Solano) : 카비테 반란 당시 스페인 식민 정부에 반란 계획을 밀고하여 스페인군이 사전에 대비하고 반란을 신속히 진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스페인 장교
[4] 고모부르자(Gomburza) : 카비테 반란 이후 스페인 식민 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된 필리핀의 세 명의 가톨릭 사제 마리아노 고메스(Mariano Gómez), 호세 부르고스(José Burgos), 하신토 삼오라(Jacinto Zamora)를 지칭하며, 이들의 처형은 필리핀 독립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은 프랑스가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고 베트남 남부의 식민지 지배를 공식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베트남 북부에서도 프랑스의 상업적·정치적 개입을 허용하는 조치들이 포함되었으며 결국 베트남 전역이 프랑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1862년 제1차 사이공 조약을 통해 베트남이 [2]사이공과 남부 일부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넘어 [3]코친차이나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지속했다. 1867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여 [3]코친차이나 전체를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었고 이후 북부 베트남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러던 중 1873년, 프랑스 해군의 [4]프란시스 가르니에가 하노이를 침공하여 프랑스의 북부 진출이 현실화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1]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와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결국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코친차이나 전역에 대한 지배를 공식화하였다. 제1차 사이공 조약에서는 일부 지역만 프랑스에 할양되었지만 이번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의 통치권이 베트남 남부 전체로 확대되었다. 이로써 코친차이나는 프랑스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으며 베트남의 주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또한, 조약에서는 베트남의 독립을 명목상 인정하는 조항이 포함되었지만 이는 형식적인 선언에 불과했다. 기존의 속국 관계를 유지하던 당시 청나라의 조공 체계가 폐지되고 베트남이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된다고 명시되었지만 이는 베트남을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한 조치였다. 오히려 베트남이 청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프랑스의 간섭이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프랑스는 조약을 통해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의 경제적 이권을 확대하였다. 조약에 따라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베트남의 주요 항구가 프랑스 상인들에게 개방되었으며 프랑스는 이를 통해 베트남 내 무역을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은 하노이에서 철수하기로 했지만 이는 단기적인 조치에 불과했으며 이후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 북부를 통제하기 위한 전략을 추진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은 프랑스가 베트남의 식민 지배를 확고하게 다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베트남 남부를 완전히 통제하는 동시에 북부 지역에서도 경제적·정치적 개입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이후 베트남이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용한 지역이다.
[4] 프란시스 가르니에(Francis Garnier, 1839년 7월 25일~1873년 12월 21) : 19세기 프랑스의 해군 장교이자 탐험가로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과 식민지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메콩강 탐사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정복 과정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하노이에서 베트남군과 중국 용병(흑기군)으로 이루어진 전투에서 사망
1862년 제1차 사이공 조약을 통해 베트남이 [2]사이공과 남부 일부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넘어 [3]코친차이나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지속했다. 1867년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여 [3]코친차이나 전체를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었고 이후 북부 베트남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러던 중 1873년, 프랑스 해군의 [4]프란시스 가르니에가 하노이를 침공하여 프랑스의 북부 진출이 현실화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1]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와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결국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 코친차이나 전역에 대한 지배를 공식화하였다. 제1차 사이공 조약에서는 일부 지역만 프랑스에 할양되었지만 이번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의 통치권이 베트남 남부 전체로 확대되었다. 이로써 코친차이나는 프랑스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으며 베트남의 주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또한, 조약에서는 베트남의 독립을 명목상 인정하는 조항이 포함되었지만 이는 형식적인 선언에 불과했다. 기존의 속국 관계를 유지하던 당시 청나라의 조공 체계가 폐지되고 베트남이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된다고 명시되었지만 이는 베트남을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한 조치였다. 오히려 베트남이 청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프랑스의 간섭이 더욱 강화될 수 밖에 없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프랑스는 조약을 통해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의 경제적 이권을 확대하였다. 조약에 따라 하노이를 포함한 북부 베트남의 주요 항구가 프랑스 상인들에게 개방되었으며 프랑스는 이를 통해 베트남 내 무역을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은 하노이에서 철수하기로 했지만 이는 단기적인 조치에 불과했으며 이후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 북부를 통제하기 위한 전략을 추진했다.
제2차 사이공 조약은 프랑스가 베트남의 식민 지배를 확고하게 다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베트남 남부를 완전히 통제하는 동시에 북부 지역에서도 경제적·정치적 개입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이후 베트남이 완전히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1] 응우옌 왕조 (Nguyễn Dynasty) :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베트남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응우옌 왕조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2] 사이공(Saigon) : 베트남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며 현재는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로 불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수도였다.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1975년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고 이후 1976년 7월 2일을 기해 호찌민으로 변경하였다
[3] 코친차이나(Cochinchina) : 코친차이나는 프랑스 식민지 통치의 핵심 지역이었으며, 이후 베트남 독립운동과 전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는 베트남 남부 지역(호찌민시 및 메콩 델타)으로 발전하여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메콩 델타(Mekong Delta) : 베트남 남서부에 위치한 광대한 삼각주 지역으로 메콩강이 남중국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형성되었다. 베트남 최대의 쌀 생산지이자 풍부한 수자원으로 경제적으로 주용한 지역이다.
[4] 프란시스 가르니에(Francis Garnier, 1839년 7월 25일~1873년 12월 21) : 19세기 프랑스의 해군 장교이자 탐험가로 프랑스의 베트남 침략과 식민지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메콩강 탐사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정복 과정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하노이에서 베트남군과 중국 용병(흑기군)으로 이루어진 전투에서 사망
동중국해 남단의 류큐 제도를 영토로 하는 [1]류큐국은 일본과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독립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이 1609년 류큐 침공이후 [2]사쓰마번의 속국으로 전체 실효지배는 아니어도 명목상 지배를 하고 있었다.
1871년 10월 18일, [1]류큐왕국의 선원 66명이 태풍으로 타이완 남부에 표류하였다. 그리고 상륙한 곳은 [3]파이완족 원주민 지역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54명이 살해당했다. 남은 생존자들은 당시 청나라 정부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 일본은 청나라에 항의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중화문화권 밖의 민족이라 책임질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시 타이완은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청 정부는 대만의 남부 산악 지역의 원주민 사회는 중화문화권 밖이라 직접적인 지배를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이 일을 류큐인에 대한 외국인의 침해로 간주하고 이를 구실로 대만 원주민 지역에 무력 개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874년 5월 5일, 일본은 약 3,600명의 병력을 타이완 남부로 파병했다. 이는 일본이 [4]메이지 유신이후 해외에서 처음 벌인 군사 작전이었다. 일본군은 타이완 남부의 [5]모란사 지역을 중심으로 [3]파이완족과 충돌했다. 전투는 치열했으나 일본은 현대식 무기와 조직된 병력으로 일방적인 승리로 7월 1일 전투는 끝났다.
일본의 군사 행동에 대해 청나라는 군사 수천명을 타이완에 파병하였고, 영국의 중재로 일본과 협상햐였다. 협상결과 청나라는 일본이 대만에 출병한 사실이 자국민 보호 조치였음을 인정하여 보상금 50만을 지불하고, 대만 남부 원주민 지역을 좀 더 적극적으로 통치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전투를 통해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고, 청나라는 통치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타이완에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4]메이지유신 이후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대외 확장의 첫 사례였으며 류큐국을 일본에 합병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는 약점을 드러내어 이후 청일전쟁 결과로 타이완을 넘겨주는 흐름을 형성했다. 그리고 타이완 원주민 사회에 외부 세력의 강제적 통치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류큐국 : 1429s년부터 1879년까지 오키나와 제도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독립 왕국이다. 중국과 일본 모두에 조공을 바치며 해상 무역 중심지로 번영했다. 1879년 일본에 의해 병합되어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2] 사쓰마 번 : 일본 에도시대 규슈 남부의 사쓰마 국. 현재의 가고시마현 전역과 미야자키현의 남서부에 속해 있다
[3] 파이완족(排灣族, Paiwan people) : 타이완 남부에 거주하는 원주민으로 고산족의 한 종족
[4]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 1868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 개혁으로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로 전환하면서 정치, 사회, 경제, 군사 전반에 걸친 근대 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5] 모란사(牡丹社) : 현재의 대만의 핑둥현
1871년 10월 18일, [1]류큐왕국의 선원 66명이 태풍으로 타이완 남부에 표류하였다. 그리고 상륙한 곳은 [3]파이완족 원주민 지역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54명이 살해당했다. 남은 생존자들은 당시 청나라 정부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 일본은 청나라에 항의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중화문화권 밖의 민족이라 책임질 수 없다고 하였다.
당시 타이완은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청 정부는 대만의 남부 산악 지역의 원주민 사회는 중화문화권 밖이라 직접적인 지배를 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이 일을 류큐인에 대한 외국인의 침해로 간주하고 이를 구실로 대만 원주민 지역에 무력 개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874년 5월 5일, 일본은 약 3,600명의 병력을 타이완 남부로 파병했다. 이는 일본이 [4]메이지 유신이후 해외에서 처음 벌인 군사 작전이었다. 일본군은 타이완 남부의 [5]모란사 지역을 중심으로 [3]파이완족과 충돌했다. 전투는 치열했으나 일본은 현대식 무기와 조직된 병력으로 일방적인 승리로 7월 1일 전투는 끝났다.
일본의 군사 행동에 대해 청나라는 군사 수천명을 타이완에 파병하였고, 영국의 중재로 일본과 협상햐였다. 협상결과 청나라는 일본이 대만에 출병한 사실이 자국민 보호 조치였음을 인정하여 보상금 50만을 지불하고, 대만 남부 원주민 지역을 좀 더 적극적으로 통치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전투를 통해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고, 청나라는 통치권을 명확히 하기 위해 타이완에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4]메이지유신 이후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대외 확장의 첫 사례였으며 류큐국을 일본에 합병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나라는 약점을 드러내어 이후 청일전쟁 결과로 타이완을 넘겨주는 흐름을 형성했다. 그리고 타이완 원주민 사회에 외부 세력의 강제적 통치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류큐국 : 1429s년부터 1879년까지 오키나와 제도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독립 왕국이다. 중국과 일본 모두에 조공을 바치며 해상 무역 중심지로 번영했다. 1879년 일본에 의해 병합되어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2] 사쓰마 번 : 일본 에도시대 규슈 남부의 사쓰마 국. 현재의 가고시마현 전역과 미야자키현의 남서부에 속해 있다
[3] 파이완족(排灣族, Paiwan people) : 타이완 남부에 거주하는 원주민으로 고산족의 한 종족
[4]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 1868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근대화 개혁으로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로 전환하면서 정치, 사회, 경제, 군사 전반에 걸친 근대 국가 건설을 추진하였다
[5] 모란사(牡丹社) : 현재의 대만의 핑둥현
윤요호 사건은 일본이 조선의 문호를 강제로 열기 위해 계획적으로 일으킨 무력 충돌 사건르호 강화도 사건으로도 불린다. 이 사건은 이후 강화도 조약 체결로 이어지며 조선 근대사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외세와의 접촉을 꺼리고 있었고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며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개항을 유도했으나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무력 도발을 계획하게 된다.
1875년 5월 25일에 일본 해군의 [1]운요호가 부산에 도착했다. 뒤를 이어 6월 12일에 [2]다이니테이보호가 부산에 당도했다. 이 두 척의 함선은 영국제 함포가 장착된 목제 소형 범선으로 부산 앞에서 포격 연습을 하며 무력 시위를 벌였고, 심지어 운요호는 동해안을 측량하고 함경도 원상항 힙구인 영흥만까지 침투했으며 영일만 일대에 상륙하기도 했다. 이후 6월 29일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귀항했다.
1875년 9월 20일 윤요호는 강화도 초지진까지 접근했고, 이를 위협으로 간주한 조선 수비군이 포격을 가했다. 다음날 21일 일본군의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공격하여 포대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22일에는 [3]영종진을 기습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군 35명이 죽고 16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 등을 약탈당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피해는 단 두 명의 부상자에 불과했다.
이후 운요호는 나가사키로 귀환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조선의 선제공격으로 몰고 가며 강력하게 항의했고 배상과 개항을 요구하는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 조선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열세였기 때문에 강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1876년 2월,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하며 일본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에게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을 부여하고 항구를 개방하게 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윤요호 사건은 조선이 근대 국제 질서로 강제로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은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 사건 이후 서구 열강들도 조선에 유사한 방식으로 접근하게 되었으며 조선 내부에서는 개화와 수구의 대립, 민중 저항, 외세 간섭이 더욱 격화되는 근대 격동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1] 운요호 : 일본이 영국에서 구입한 묵제 범선으로 일본 해군에 편입된 군함
[2] 다이니테이보호: 일본이 영국에서 구입한 목제 범선으로 일본 해군에 편입된 군함
[3] 영종진 : 조선 시대에 강화도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영종도에 설치된 해안 요새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외세와의 접촉을 꺼리고 있었고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며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을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개항을 유도했으나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무력 도발을 계획하게 된다.
1875년 5월 25일에 일본 해군의 [1]운요호가 부산에 도착했다. 뒤를 이어 6월 12일에 [2]다이니테이보호가 부산에 당도했다. 이 두 척의 함선은 영국제 함포가 장착된 목제 소형 범선으로 부산 앞에서 포격 연습을 하며 무력 시위를 벌였고, 심지어 운요호는 동해안을 측량하고 함경도 원상항 힙구인 영흥만까지 침투했으며 영일만 일대에 상륙하기도 했다. 이후 6월 29일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귀항했다.
1875년 9월 20일 윤요호는 강화도 초지진까지 접근했고, 이를 위협으로 간주한 조선 수비군이 포격을 가했다. 다음날 21일 일본군의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공격하여 포대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22일에는 [3]영종진을 기습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군 35명이 죽고 16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 등을 약탈당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피해는 단 두 명의 부상자에 불과했다.
이후 운요호는 나가사키로 귀환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조선의 선제공격으로 몰고 가며 강력하게 항의했고 배상과 개항을 요구하는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 조선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열세였기 때문에 강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1876년 2월,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을 자주국으로 규정하며 일본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에게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을 부여하고 항구를 개방하게 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윤요호 사건은 조선이 근대 국제 질서로 강제로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은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 사건 이후 서구 열강들도 조선에 유사한 방식으로 접근하게 되었으며 조선 내부에서는 개화와 수구의 대립, 민중 저항, 외세 간섭이 더욱 격화되는 근대 격동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1] 운요호 : 일본이 영국에서 구입한 묵제 범선으로 일본 해군에 편입된 군함
[2] 다이니테이보호: 일본이 영국에서 구입한 목제 범선으로 일본 해군에 편입된 군함
[3] 영종진 : 조선 시대에 강화도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영종도에 설치된 해안 요새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1873년에 흥선대원이 하야하면서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완화되는 등 변화가 발생하였다.
일본내부에 조선을 정벌하야야 한다는 정한론이 대두되었고, 이에 일본은 1875년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도를 공격하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측 대표 신헌과 일본 측 대표 구로다 사이에 조약 관련 협의가 진행되었으며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평가
(제2조)양국은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교제 사무를 협의한다
(제5조)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하도록 허용한다
-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게 함으로써 통상 업무 이외에 정치적·군사적 침략 의도가 내포
(제7조)조선은 연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용한다
- 조선 연안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군사작전 시 상륙 지점을 정탐
(제10조)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 영사재판권(치외법권)을 인정한 불평등조약
(제11조)양국 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 장정을 체결한다
다른 명칭으로는 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이다.
조선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은 척사위정세력과 개화 세력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정책적 전환점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익현(1834년~1907년) : 철종부터 고종까지 조선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 항일운동가
일본내부에 조선을 정벌하야야 한다는 정한론이 대두되었고, 이에 일본은 1875년 강화도 초지진과 영종도를 공격하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측 대표 신헌과 일본 측 대표 구로다 사이에 조약 관련 협의가 진행되었으며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평가
(제2조)양국은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교제 사무를 협의한다
(제5조)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하도록 허용한다
-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게 함으로써 통상 업무 이외에 정치적·군사적 침략 의도가 내포
(제7조)조선은 연안 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용한다
- 조선 연안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군사작전 시 상륙 지점을 정탐
(제10조)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 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 영사재판권(치외법권)을 인정한 불평등조약
(제11조)양국 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 장정을 체결한다
다른 명칭으로는 한일수호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이다.
조선이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은 척사위정세력과 개화 세력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정책적 전환점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익현(1834년~1907년) : 철종부터 고종까지 조선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 항일운동가
미국 몬태나주의 리틀 빅혼 카운티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연합과 미국 육군 7기병연대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사건은 사우스다코다와 와이오밍 주 사이에 위치한 블랙 힐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서부개척사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금을 찾아 인디언 보호 구역을 침범했고, 이 과정에서 인디언과 미국 이주민들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원주민인 수족의 추장 '앉은황소(Sitting Bull)'과 샤이안족 '미친말(Crazy Horse)'과 연합하여 몬태나 남부의 리틀 빅혼 강 유역에 대규 캠프를 편성했고, 이에 맞서 미국정부도 테리, 기번, 크룩 등 세 명의 사령관이 부대를 이끌고 해당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카스타 중령은 657명의 부하를 이끄는 연대장으로 테리 장군 휘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1876년 6월 25일, 테리 준장은 카스타 중령의 제7기병 연대를 선봉으로 블랙 힐에 진입한다. 테리 준장은 카스타 중령에게 기병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예기치 않게 리틀 빅혼 강가에서 40여 명의 원주민 전사와 맞닥뜨리자 전략을 수정한다. 원주민 전체 부대에 미 기병대의 출진 사실이 전달되기 전에 공격을 개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수족의 전사 수가 2000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던 카스타 중령은 제7기병 연대를 3개 대대로 분산해 진격하였다. 하지만 곧 175명으로 이루어진 1개 대대는 강한 반격에 당황해 강을 건너 후퇴했고, 수족과 샤이엔족 연합군은 그들을 맹렬히 쫓았다. 그사이 카스타 중령이 이끌던 본대 210명도 미친말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 밀려 수천 명의 원주민에게 포위된 채 완전 고립되었다. 그들은 후방 지원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텨보려 했으나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당한다. 카스타 중령도 전사한다. 이날 전투에서 원주민은 27명이 전사한 데 반해 카스타 부대는 300명 이상 사망했다.
이 전투는 미국 원주민 전투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이며 미국정부의 가장 치명적인 패배였다.
이 장소는 1879년 1월 29일 전쟁 장관에 의해 국립 묘지로 지정되었고, 1881년에는 제7기병대의 병사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 윗편의 라스트 스탠드 힐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1991년 미국 의회는 땅을 지키려는 원주민들의 역할을 반영하여 이 장소의 이름을 바꿀 것을 요청했고, 1996년에는 원주민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을 짓는 공모전이 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병대 대원들이 사망한 자리에는 하얀 대리석 표석이 들어섰고, 현재는 붉은 화강암 표석이 원주민 전사들이 죽음을 맞이한 자리도 똑같이 알려 주고 있다.
리틀 빅혼 전투의 승리는 사실 향후 원주민들의 불행한 운명을 크게 바꿔 놓지는 못하였다. 이 전투 이후 대규모 군사 행동이 전개되었고 원주민들은 대부분 집단 학살되거나 캐나다로 쫓겨나게 되었다. 수장이었던 앉은황소는 5년 뒤인 1890년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기 위한 인디언들의 최후의 노력과 꺾이지 않는 강렬한 투지를 오늘날까지도 생생히 보여 주고 있다.
사건은 사우스다코다와 와이오밍 주 사이에 위치한 블랙 힐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서부개척사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금을 찾아 인디언 보호 구역을 침범했고, 이 과정에서 인디언과 미국 이주민들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원주민인 수족의 추장 '앉은황소(Sitting Bull)'과 샤이안족 '미친말(Crazy Horse)'과 연합하여 몬태나 남부의 리틀 빅혼 강 유역에 대규 캠프를 편성했고, 이에 맞서 미국정부도 테리, 기번, 크룩 등 세 명의 사령관이 부대를 이끌고 해당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카스타 중령은 657명의 부하를 이끄는 연대장으로 테리 장군 휘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1876년 6월 25일, 테리 준장은 카스타 중령의 제7기병 연대를 선봉으로 블랙 힐에 진입한다. 테리 준장은 카스타 중령에게 기병대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예기치 않게 리틀 빅혼 강가에서 40여 명의 원주민 전사와 맞닥뜨리자 전략을 수정한다. 원주민 전체 부대에 미 기병대의 출진 사실이 전달되기 전에 공격을 개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수족의 전사 수가 2000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던 카스타 중령은 제7기병 연대를 3개 대대로 분산해 진격하였다. 하지만 곧 175명으로 이루어진 1개 대대는 강한 반격에 당황해 강을 건너 후퇴했고, 수족과 샤이엔족 연합군은 그들을 맹렬히 쫓았다. 그사이 카스타 중령이 이끌던 본대 210명도 미친말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 밀려 수천 명의 원주민에게 포위된 채 완전 고립되었다. 그들은 후방 지원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텨보려 했으나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당한다. 카스타 중령도 전사한다. 이날 전투에서 원주민은 27명이 전사한 데 반해 카스타 부대는 300명 이상 사망했다.
이 전투는 미국 원주민 전투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이며 미국정부의 가장 치명적인 패배였다.
이 장소는 1879년 1월 29일 전쟁 장관에 의해 국립 묘지로 지정되었고, 1881년에는 제7기병대의 병사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 윗편의 라스트 스탠드 힐에 기념관이 세워졌다.
1991년 미국 의회는 땅을 지키려는 원주민들의 역할을 반영하여 이 장소의 이름을 바꿀 것을 요청했고, 1996년에는 원주민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을 짓는 공모전이 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병대 대원들이 사망한 자리에는 하얀 대리석 표석이 들어섰고, 현재는 붉은 화강암 표석이 원주민 전사들이 죽음을 맞이한 자리도 똑같이 알려 주고 있다.
리틀 빅혼 전투의 승리는 사실 향후 원주민들의 불행한 운명을 크게 바꿔 놓지는 못하였다. 이 전투 이후 대규모 군사 행동이 전개되었고 원주민들은 대부분 집단 학살되거나 캐나다로 쫓겨나게 되었다. 수장이었던 앉은황소는 5년 뒤인 1890년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자신들의 고향을 지키기 위한 인디언들의 최후의 노력과 꺾이지 않는 강렬한 투지를 오늘날까지도 생생히 보여 주고 있다.
[1]세이난 전쟁은 일본 [2]규슈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메이지 정부와 [4]사쓰마번 출신 무사들의 충돌이었다. 이 전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봉건적 무사 계급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가장 격렬한 무력 저항으로 일본의 마지막 무사 반란이었다.
전쟁의 중심 인물은 [5]사이고 다카모리로 그는 메이지 유신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으나 점점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메이지 정부의 개혁에 실망하고 정계를 떠난 뒤 고향 가고시마로 돌아가 사관학교를 설립하며 무사 출신 청년들을 교육했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무사 계급을 폐지하고 징병제를 도입하는 등 급속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무사들은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러한 무사들의 불만을 대변하며 반정부적인 분위기를 형성했고 정부가 이를 위협으로 간주해 견제하자 무장 봉기가 촉발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은 초반에 메이지 정부군의 [6]구마모토 성을 포위하며 수 차례 포화를 퍼부으며 맹공했다. 구마모토 성의 철벽 방어로 공성전은 57일이나 지속되었다. 마침내 정부는 징병제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와 서구식 무기를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군은 전국에서 병력을 집중시키며 반란군을 압박했고 [5]사이고 다카모리군은 병력과 보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점점 불리해졌다. 최후의 전투는 [7]시로야마에서 벌어졌고, 이곳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활복 자결하면서 전쟁은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1]세이난 전쟁의 결과로 무사 계급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메이지 정부는 중앙집권 체제를 확고히 하며 일본의 근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징병군의 전투력이 입증되었고 일본 군대는 본격적인 근대화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는 비록 반란군의 지도자였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의로움을 지닌 인물로 추앙받았으며 사후에는 명예가 회복되어 [8]가고시마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 전쟁은 영화 '마지막 사무라이'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모티브로 사용되며 일본 근대화 과정의 비극적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1] 세이난(西南) : 문자 그대로 서남쪽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일본 본토의 서남부에 위치한 규슈 지방에서 발생한 전쟁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나타낸 명칭으로 반란의 중심이었던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이 일본의 서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세이난 전쟁"이라 불린다.
[2] 규슈(Kyushu) :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대 섬 중 가장 서쪽과 남쪽에 있는 섬
[3] 번(藩) : 일본에서 다이묘(봉건영주)들이 통치하던 영지
[4] 사쓰마번(Satsuma) : 일본 에도시대 규슈 남부(현재의 가고시마현)에 위치한 번으로 시마즈 가문이 지배했다. 메이지 유신의 핵심 세력 중 하나로 서구식 근대화와 무사 계층 중심 정치의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
[5] 사이고 다카모리(Saigo Takamori, 1828년 1월 23일 ~ 1877년 9월 24일) : 일본 사쓰마의 번사, 군인, 정치인이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3명중 한 명으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였으나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할복하였다
[6] 구마모토 성(Kumamoto Castle) :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에 위치한 성. 일본 3대 성으로 알려져 있다
[7] 시로야마(城山) : 일본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에 위치한 산으로 가고시마 시내 중심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높이는 약 107미터로 비교적 낮지만, 가고시마만과 사쿠라지마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지로 유명하다. 이곳은 세이난 전쟁의 최후 전투지이며 사이고 다카모리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이기도 하다
[8] 가고시마(Kagoshima) : 일본 규슈 최남단에 위치한 가고시마현의 주 도시이다. 오키나와섬 북쪽의 류큐 열도도 관할한다
전쟁의 중심 인물은 [5]사이고 다카모리로 그는 메이지 유신의 주도자 중 한 명이었으나 점점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메이지 정부의 개혁에 실망하고 정계를 떠난 뒤 고향 가고시마로 돌아가 사관학교를 설립하며 무사 출신 청년들을 교육했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무사 계급을 폐지하고 징병제를 도입하는 등 급속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무사들은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러한 무사들의 불만을 대변하며 반정부적인 분위기를 형성했고 정부가 이를 위협으로 간주해 견제하자 무장 봉기가 촉발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은 초반에 메이지 정부군의 [6]구마모토 성을 포위하며 수 차례 포화를 퍼부으며 맹공했다. 구마모토 성의 철벽 방어로 공성전은 57일이나 지속되었다. 마침내 정부는 징병제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와 서구식 무기를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군은 전국에서 병력을 집중시키며 반란군을 압박했고 [5]사이고 다카모리군은 병력과 보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점점 불리해졌다. 최후의 전투는 [7]시로야마에서 벌어졌고, 이곳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활복 자결하면서 전쟁은 정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1]세이난 전쟁의 결과로 무사 계급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메이지 정부는 중앙집권 체제를 확고히 하며 일본의 근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징병군의 전투력이 입증되었고 일본 군대는 본격적인 근대화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는 비록 반란군의 지도자였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의로움을 지닌 인물로 추앙받았으며 사후에는 명예가 회복되어 [8]가고시마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 전쟁은 영화 '마지막 사무라이'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모티브로 사용되며 일본 근대화 과정의 비극적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1] 세이난(西南) : 문자 그대로 서남쪽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일본 본토의 서남부에 위치한 규슈 지방에서 발생한 전쟁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나타낸 명칭으로 반란의 중심이었던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이 일본의 서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세이난 전쟁"이라 불린다.
[2] 규슈(Kyushu) :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대 섬 중 가장 서쪽과 남쪽에 있는 섬
[3] 번(藩) : 일본에서 다이묘(봉건영주)들이 통치하던 영지
[4] 사쓰마번(Satsuma) : 일본 에도시대 규슈 남부(현재의 가고시마현)에 위치한 번으로 시마즈 가문이 지배했다. 메이지 유신의 핵심 세력 중 하나로 서구식 근대화와 무사 계층 중심 정치의 전환에 큰 영향을 미쳤다
[5] 사이고 다카모리(Saigo Takamori, 1828년 1월 23일 ~ 1877년 9월 24일) : 일본 사쓰마의 번사, 군인, 정치인이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유신 3명중 한 명으로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였으나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할복하였다
[6] 구마모토 성(Kumamoto Castle) :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에 위치한 성. 일본 3대 성으로 알려져 있다
[7] 시로야마(城山) : 일본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에 위치한 산으로 가고시마 시내 중심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높이는 약 107미터로 비교적 낮지만, 가고시마만과 사쿠라지마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지로 유명하다. 이곳은 세이난 전쟁의 최후 전투지이며 사이고 다카모리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이기도 하다
[8] 가고시마(Kagoshima) : 일본 규슈 최남단에 위치한 가고시마현의 주 도시이다. 오키나와섬 북쪽의 류큐 열도도 관할한다
1차 영국-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독립하여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던 도스트 무함마드가 사망하면서 이후 계승한 지도자는 영국에 적대적이라 영국에 많은 모욕을 주었다. 이에 분개한 영국은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이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은 패배하였으며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1919년에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게 된다.
* 도스트 모하마드(Dost Mohammad, 1793년~1863년) : 아프가니스탄 바라크자이 왕조(아프카니스탄 아미르국 - Emirate of Afghanistan, 1826 ~ 1919)의 창시자. 아미르국은 1919년 이후 아프카니스탄 왕국(1919년~1973년)이라 한다
이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은 패배하였으며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1919년에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게 된다.
* 도스트 모하마드(Dost Mohammad, 1793년~1863년) : 아프가니스탄 바라크자이 왕조(아프카니스탄 아미르국 - Emirate of Afghanistan, 1826 ~ 1919)의 창시자. 아미르국은 1919년 이후 아프카니스탄 왕국(1919년~1973년)이라 한다
태평양 전쟁은 1879년 4월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 세 나라가 아타카마 사막의 초석 광산 지대를 놓고 일어난 분쟁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다.
초석 전쟁(硝石戰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태평양 연안 지역인 안토파가스타는 원래 볼리비아의 영토였으며 볼리비아의 유일한 태평양 출구였다. 이 지역의 볼리비아내 칠레광업기업에게 과세 혜택등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조약을 파기하고 칠레의 기업에 과세를 강화하자 칠레군이 볼리비아를 공격하여 안토파가스타 주를 점령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때마침 세나라 모두 경제 공황에 빠져있었던 상태라서 이 광산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동맹을 체결하여 칠레군에게 맞섰으나 해상 및 지상군까지 칠레군에게 연패하여 볼리비아는 안데스 산맥 너머 본토로 쫓겨났으며 페루는 수도 리마가 함락되면서 항전불가상태가 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결과는 볼리비아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을 페루는 타라파카, 아리카, 타크나등이 칠레의 영토로 병합되면서 칠레의 영토는 확장되었다. 이 때문에 볼리비아는 바다로 이어지는 영토를 잃고 내륙국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광물 자원 수출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이루게 된다.
1929년 페루에게 타크나 지역을 돌려주었으나 볼리비아와는 아직도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영유권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 :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서쪽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사막. 황무지같지만 광물자원이 풍부한 노다지 땅이며 원래는 볼리비아령이었으나 위 전쟁으로 칠레로 넘어갔다.
* 초석 : 무색무취의 무기물 결정. 질산칼륨 분자 KNO3의 광물 형태. 구성물질인 질소와 칼륨이 모두 비료의 주 원료이나 역사적으로 초석은 흑색화약의 원료였다.
* 타라파카(Tarapacá) : 칠레의 북쪽에 있는 도시이며 볼리비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 안토파가스타(Antofagast) : 칠레 북쪽지방의 항구도시
* 아리카(Arica) : 칠레 북쪽지방에 있는 항구도시
* 타크나(Tacna) : 페루 남부 칠레 국경 근처에 있는 도시
초석 전쟁(硝石戰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태평양 연안 지역인 안토파가스타는 원래 볼리비아의 영토였으며 볼리비아의 유일한 태평양 출구였다. 이 지역의 볼리비아내 칠레광업기업에게 과세 혜택등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조약을 파기하고 칠레의 기업에 과세를 강화하자 칠레군이 볼리비아를 공격하여 안토파가스타 주를 점령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때마침 세나라 모두 경제 공황에 빠져있었던 상태라서 이 광산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볼리비아는 형제국인 페루와 동맹을 체결하여 칠레군에게 맞섰으나 해상 및 지상군까지 칠레군에게 연패하여 볼리비아는 안데스 산맥 너머 본토로 쫓겨났으며 페루는 수도 리마가 함락되면서 항전불가상태가 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결과는 볼리비아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을 페루는 타라파카, 아리카, 타크나등이 칠레의 영토로 병합되면서 칠레의 영토는 확장되었다. 이 때문에 볼리비아는 바다로 이어지는 영토를 잃고 내륙국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광물 자원 수출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이루게 된다.
1929년 페루에게 타크나 지역을 돌려주었으나 볼리비아와는 아직도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영유권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 :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서쪽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사막. 황무지같지만 광물자원이 풍부한 노다지 땅이며 원래는 볼리비아령이었으나 위 전쟁으로 칠레로 넘어갔다.
* 초석 : 무색무취의 무기물 결정. 질산칼륨 분자 KNO3의 광물 형태. 구성물질인 질소와 칼륨이 모두 비료의 주 원료이나 역사적으로 초석은 흑색화약의 원료였다.
* 타라파카(Tarapacá) : 칠레의 북쪽에 있는 도시이며 볼리비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 안토파가스타(Antofagast) : 칠레 북쪽지방의 항구도시
* 아리카(Arica) : 칠레 북쪽지방에 있는 항구도시
* 타크나(Tacna) : 페루 남부 칠레 국경 근처에 있는 도시
1880년에 제2차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이 청의 외교관 황준헌(황쭌셴)의 '조선책략'을 국내에 가지고 돌아왔으며 내용은 러시아의 서양 공략을 막기위하여 조선은 중국을 가까이하며 일본과 관계를 공고히 하고 미국과 연계하여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 이며 이는 곧 '친중국','결일본','연미국'으로 정리된다.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확인받고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주선하였다. 미국과 수교를 맺는데 '조선책략'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제물포에서 이홍장이 중재하는 가운데 조선 측에서는 신헌, 김홍집이 전권대사로, 미국 측은 전권위원 로버트 슈펠트가 참가한 가운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조약의 내용은 앞서 맺은 조일수호조규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등한 항목이 많았다. 그것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조약 초안 작성에 직접 개입했고, 미국이 동아시아에 개입이나 관심 정도가 아직까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은 최혜국 대우 조항으로 인해 후일 구미 국가와 같은 조건으로 조선에서의 제반 권리를 향유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구미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로버트 윌슨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 1822년~1895년) : 미국의 해군 제독이자 외교관
*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조정 말기의 한족계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청나라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 신헌(1810년~1884년) : 조선 말의 무신이자 외교관
* 김홍집(1842년~1896년) :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온건개화파
* 황준헌(1848년~1905년) : 중국 청나라의 외교관 겸 정치가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확인받고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주선하였다. 미국과 수교를 맺는데 '조선책략'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제물포에서 이홍장이 중재하는 가운데 조선 측에서는 신헌, 김홍집이 전권대사로, 미국 측은 전권위원 로버트 슈펠트가 참가한 가운데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 조약이다.
조약의 내용은 앞서 맺은 조일수호조규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등한 항목이 많았다. 그것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조약 초안 작성에 직접 개입했고, 미국이 동아시아에 개입이나 관심 정도가 아직까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미국은 최혜국 대우 조항으로 인해 후일 구미 국가와 같은 조건으로 조선에서의 제반 권리를 향유하게 된다.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구미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 로버트 윌슨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 1822년~1895년) : 미국의 해군 제독이자 외교관
*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조정 말기의 한족계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청나라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 신헌(1810년~1884년) : 조선 말의 무신이자 외교관
* 김홍집(1842년~1896년) :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온건개화파
* 황준헌(1848년~1905년) : 중국 청나라의 외교관 겸 정치가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이나 밀린 급료 중 1개월분을 지불하였는데 급료내역이 겨와 모래가 섞이고 분량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불량쌀을 지급해 일어난 군란이다.
조선이 멸망의 길을 걷는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사건이며 이 날을 기점으로 조선왕조는 회생불가의 상태가 되었다.
조선이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여 군인들이 백성들과 함께 손잡고 난을 일으켰을 정도로 조선의 국방력이 사실상 상실되었다.
이 난을 막기위하여 외국 군대(청나라)에게 지원요청을 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 임진왜란 발발시에도 외국군대(명나라)에게 지원요청했듯이 같은 역사가 반복이 되었다. 특히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주둔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이 멸망의 길을 걷는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사건이며 이 날을 기점으로 조선왕조는 회생불가의 상태가 되었다.
조선이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여 군인들이 백성들과 함께 손잡고 난을 일으켰을 정도로 조선의 국방력이 사실상 상실되었다.
이 난을 막기위하여 외국 군대(청나라)에게 지원요청을 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 임진왜란 발발시에도 외국군대(명나라)에게 지원요청했듯이 같은 역사가 반복이 되었다. 특히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주둔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러시아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부동항 획득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계속 남하하여 조선과 통상체결을 원했다.
러시아는 조선과 수교를 위해 청나라에 접근하지만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청나라는 이를 거절하자 청나라의 러시아공사인 베베르를 통하여 조선의 묄레도르프에게 접근하여 교섭하였다. 이에 조선은 러시아 베베르와 외무장관 김병시는 1884년 7월 7일에 한로 조약의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후 베베르는 조선의 러시아공사로 부임하게 된다.
* 묄렌도르프(Möllendorff, 1848년~1901년) : 독일(프로이센왕국)출신의 외교관 겸 언어학자로 조선에서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최초의 서양인.한국이름 목인덕
* 베베르(Weber, 1841년~1910년) :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2년에 청나라의 러시아공사로 부임하였으며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등을 역임
러시아는 조선과 수교를 위해 청나라에 접근하지만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청나라는 이를 거절하자 청나라의 러시아공사인 베베르를 통하여 조선의 묄레도르프에게 접근하여 교섭하였다. 이에 조선은 러시아 베베르와 외무장관 김병시는 1884년 7월 7일에 한로 조약의 비준을 교환하여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후 베베르는 조선의 러시아공사로 부임하게 된다.
* 묄렌도르프(Möllendorff, 1848년~1901년) : 독일(프로이센왕국)출신의 외교관 겸 언어학자로 조선에서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최초의 서양인.한국이름 목인덕
* 베베르(Weber, 1841년~1910년) :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2년에 청나라의 러시아공사로 부임하였으며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등을 역임
이 전쟁은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며 청불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의 하나로서 베트남 [3]응우옌 왕조의 카톨릭 탄압은 프랑스에게 베트남 침공 명분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는 베트남 공략을 적극화하여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내용은 청나라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국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청나라는 거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베트남에 들어와 있던 [1]흑기군은 프랑스 군대를 공격했으며 프랑스는 1883년에 이 세력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하노이를 점령했다.
1884년 8월 프랑스는 베트남으로부터 북상하여 타이완(대만)을 공격하고 청나라 [2]복건성의 함대를 대파했다. 청나라는 프랑스의 도발행위에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해전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육전에서는 청나라가 분전했지만 유리하지 못하였다.
전세가 청나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실권을 쥐고 있던 [4]서태후는 1885년 6월 22일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함으로써 청나라의 종주권은 상실되었다. 그리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전쟁으로로 인해 수천년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는 시초가 된다.
[1] 흑기군 : 유영복이 거느린 사병조직. 중국의 윈난성(운남성)과 베트남 사이의 국경지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2] 푸젠성(복건성) : 중국 남동부의 성. 대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중국의 성
* 청나라 말기의 해군 :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 광동함대
[3] 응우옌 왕조(Nguyen Dynasty) :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의 하나로서 베트남 [3]응우옌 왕조의 카톨릭 탄압은 프랑스에게 베트남 침공 명분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는 베트남 공략을 적극화하여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내용은 청나라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국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청나라는 거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베트남에 들어와 있던 [1]흑기군은 프랑스 군대를 공격했으며 프랑스는 1883년에 이 세력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하노이를 점령했다.
1884년 8월 프랑스는 베트남으로부터 북상하여 타이완(대만)을 공격하고 청나라 [2]복건성의 함대를 대파했다. 청나라는 프랑스의 도발행위에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해전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육전에서는 청나라가 분전했지만 유리하지 못하였다.
전세가 청나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실권을 쥐고 있던 [4]서태후는 1885년 6월 22일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함으로써 청나라의 종주권은 상실되었다. 그리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전쟁으로로 인해 수천년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는 시초가 된다.
[1] 흑기군 : 유영복이 거느린 사병조직. 중국의 윈난성(운남성)과 베트남 사이의 국경지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2] 푸젠성(복건성) : 중국 남동부의 성. 대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중국의 성
* 청나라 말기의 해군 :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 광동함대
[3] 응우옌 왕조(Nguyen Dynasty) :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1876년 벨기에 국왕 [1]레오폴 2세는 미국의 유명한 탐험가 [2]헨리 모턴 스탠리에게 충분한 재정적 지원을 해주며 콩고 탐험을 의뢰했다. 헨리 스탠리의 탐험 결과 벨기에가 콩고 지역에 진출하게 되자, 아프리카 전역에 산재한 풍부한 지하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유럽 주요 국가들은 너나할것 없이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발벗고 나섰다.
당시 영국은 이집트 카이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및 인도 캘커타를 잇는 이른바 3C정책과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추구했다. 프랑스는 모로코, 알제리를 거점으로 해서 동쪽으로 점령해 나가는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추구했다. 독일은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잇는 3B정책으로 중부유럽과 발칸 지역을 넘어서서 서아시아와 아프리카로까지 세력범위를 확장시키려 했다. 여기에 벨기에, 포르투갈도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나섰다.
이리하여 중동에서는 독일의 3B정책과 영국의 3C정책이 대립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부딪쳤다. 또 모로코에서는 독일과 프랑스가 부딪쳤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졌다.
벨기에의 [1]레오폴드 2세와 독일의 [3]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를 주도하여 콩고분지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분할 문제를 두고 유럽 각국은 협의를 하였다. 이 회의에서 콩고는 자유무역국(중립국)으로 선포하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개인자격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벨기에는 콩고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할 수 있었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화로 1914년 무렵에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모든 지역이 유럽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이렇게 유럽열강들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원주민들의 문화적, 언어적 경계를 무시하고 만들어진 일직선에 가까운 국경선은 130년 지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1] 레오폴 2세(Leopold II of Belgium, 1835년~1909년) : 벨기에왕국의 2대 국왕(재외 1865년~1909년). 아프리카 콩고 식민지를 사유지처럼 사용하면서 수천만 명의 주민을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고 집단살해하였다
[2] 헨리 모턴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년~1904년) : 영국의 탐험가이자 언론인. 아프리카 탐험과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구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1877년부터 1884년까지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후원을 얻어 콩고 지방을 탐험하였다
[3]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 프로이센 수상(재임 : 1862~1890년). 통일독일제국 수상(재임 :1871년~1890년)
당시 영국은 이집트 카이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및 인도 캘커타를 잇는 이른바 3C정책과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추구했다. 프랑스는 모로코, 알제리를 거점으로 해서 동쪽으로 점령해 나가는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추구했다. 독일은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잇는 3B정책으로 중부유럽과 발칸 지역을 넘어서서 서아시아와 아프리카로까지 세력범위를 확장시키려 했다. 여기에 벨기에, 포르투갈도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나섰다.
이리하여 중동에서는 독일의 3B정책과 영국의 3C정책이 대립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부딪쳤다. 또 모로코에서는 독일과 프랑스가 부딪쳤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졌다.
벨기에의 [1]레오폴드 2세와 독일의 [3]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를 주도하여 콩고분지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분할 문제를 두고 유럽 각국은 협의를 하였다. 이 회의에서 콩고는 자유무역국(중립국)으로 선포하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개인자격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벨기에는 콩고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할 수 있었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화로 1914년 무렵에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모든 지역이 유럽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이렇게 유럽열강들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원주민들의 문화적, 언어적 경계를 무시하고 만들어진 일직선에 가까운 국경선은 130년 지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1] 레오폴 2세(Leopold II of Belgium, 1835년~1909년) : 벨기에왕국의 2대 국왕(재외 1865년~1909년). 아프리카 콩고 식민지를 사유지처럼 사용하면서 수천만 명의 주민을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고 집단살해하였다
[2] 헨리 모턴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년~1904년) : 영국의 탐험가이자 언론인. 아프리카 탐험과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구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1877년부터 1884년까지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후원을 얻어 콩고 지방을 탐험하였다
[3]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 프로이센 수상(재임 : 1862~1890년). 통일독일제국 수상(재임 :1871년~1890년)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1]급진개화파 세력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2]온건개화파를 몰아내고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일으킨 정변이다.
1884년(고종 21), 청나라는 [4]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의 일부를 조선에서 철수시켰다. 이를 기회로 삼아 급진개화파는 일본공사의 협조를 얻어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우정국 낙성식이라 불린다)을 계기로 준비한 폭탄으로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폭탄이 불발되자 근처 민가에 불을 질러 축하연 연회장은 소란스러워 졌고, 이를 틈타 정변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 세력은 창덕궁에 있던 고종을 [3]경우궁으로 이동시켜 신병을 확보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들은 창덕궁으로 돌아와 개혁구상이 담긴 14개조 정강을 발표하는 등 개혁을 진행시켜 나갔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조선에 남아 있던 청나라군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12월 6일 청나라 병력이 창덕궁을 공격하자 불리함을 감지한 일본 공사는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급진개화파 군대는 청나라군과 응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흩어져 버렸다.
결국 급진 개화세력의 집권은 저녁 9시경에 시작되어 12월 6일 오후 7시경에 막을 내렸다. 정변이 진행된 시간은 46시간으로 만 이틀이 채 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 청나라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나라와 일본 두나라의 조선에 대한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어 청일전쟁의 불씨가 된다.
정변 주동자는 인천항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김옥균을 제외하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암살되었고 서광범은 병사했으며 박영효는 친일 개화파로 변신하게 된다.
[14개조 정강]
①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신분제 폐지).
③ 전국의 지조법(地組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히 한다(조세제도 개혁).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는 등용한다(내시 제도 폐지).
⑤ 국가에 해독을 끼친 부정한 관리 중에서 그 죄가 심한 자는 처벌한다.
⑥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환곡제 폐지).
⑦ 규장각을 폐지한다(규장각은 세도 정치의 기반으로 변질).
⑧ 순사제도를 시급히 설치하여 도둑을 방지한다(근대적 경잘체도 도입).
⑨ 혜상공국을 혁파한다(특정상인의 특권 폐지).
⑩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군사제도 개혁).
⑫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게 하며 그 밖의 재무 관청은 폐지한다(재정의 일원화).
⑬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입헌 군주제 실시).
⑭ 의정부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정부조직 개편).
[1] 급진개화파 : 일본의 메이지유신(문명개화론)을 모델로 삼아 급진적인 개혁 추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등
[2] 온건개화파 : 중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점진적인 개혁 주장. 김홍집, 김윤식등
[3] 경우궁 :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3대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사당
[4] 청불전쟁(1884년 8월 ~ 1885년 4월) : 베트남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
1884년(고종 21), 청나라는 [4]청불전쟁이 일어나자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의 일부를 조선에서 철수시켰다. 이를 기회로 삼아 급진개화파는 일본공사의 협조를 얻어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우정국 낙성식이라 불린다)을 계기로 준비한 폭탄으로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폭탄이 불발되자 근처 민가에 불을 질러 축하연 연회장은 소란스러워 졌고, 이를 틈타 정변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 세력은 창덕궁에 있던 고종을 [3]경우궁으로 이동시켜 신병을 확보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들은 창덕궁으로 돌아와 개혁구상이 담긴 14개조 정강을 발표하는 등 개혁을 진행시켜 나갔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조선에 남아 있던 청나라군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12월 6일 청나라 병력이 창덕궁을 공격하자 불리함을 감지한 일본 공사는 창덕궁에 주둔한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급진개화파 군대는 청나라군과 응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여 흩어져 버렸다.
결국 급진 개화세력의 집권은 저녁 9시경에 시작되어 12월 6일 오후 7시경에 막을 내렸다. 정변이 진행된 시간은 46시간으로 만 이틀이 채 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조선에서 청나라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나라와 일본 두나라의 조선에 대한 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어 청일전쟁의 불씨가 된다.
정변 주동자는 인천항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김옥균을 제외하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암살되었고 서광범은 병사했으며 박영효는 친일 개화파로 변신하게 된다.
[14개조 정강]
①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신분제 폐지).
③ 전국의 지조법(地組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히 한다(조세제도 개혁).
④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는 등용한다(내시 제도 폐지).
⑤ 국가에 해독을 끼친 부정한 관리 중에서 그 죄가 심한 자는 처벌한다.
⑥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환곡제 폐지).
⑦ 규장각을 폐지한다(규장각은 세도 정치의 기반으로 변질).
⑧ 순사제도를 시급히 설치하여 도둑을 방지한다(근대적 경잘체도 도입).
⑨ 혜상공국을 혁파한다(특정상인의 특권 폐지).
⑩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⑪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군사제도 개혁).
⑫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하게 하며 그 밖의 재무 관청은 폐지한다(재정의 일원화).
⑬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입헌 군주제 실시).
⑭ 의정부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정부조직 개편).
[1] 급진개화파 : 일본의 메이지유신(문명개화론)을 모델로 삼아 급진적인 개혁 추진.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등
[2] 온건개화파 : 중국의 양무운동을 본받아 점진적인 개혁 주장. 김홍집, 김윤식등
[3] 경우궁 :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후기 제23대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사당
[4] 청불전쟁(1884년 8월 ~ 1885년 4월) : 베트남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
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영국이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면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의 일환인 부동항 획득을 위하여 더 좋은 항만 조건을 지닌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이다.
영국은 거문도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고 불렀다.
청나라의 중재로 러시아, 영국 상호 조선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을 함으로써 영국 함대는 1887년(고종 24년)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주권국인 조선의 양해 없이 점령이 감행된 점과 처리 과정에서도 조선 정부를 배제하고 열강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교섭이 진행된 점에서, 조선의 허약한 국제적 지위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
거문도에는 당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영국해군수병들의 묘가 아직 3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 거문도 : 전라남도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섬으로서 고도·동도·서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략적 경쟁을 뜻한다. 보통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러시아-페르시아 굴리스탄 조약)부터 1907년(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영국은 거문도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고 불렀다.
청나라의 중재로 러시아, 영국 상호 조선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을 함으로써 영국 함대는 1887년(고종 24년)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주권국인 조선의 양해 없이 점령이 감행된 점과 처리 과정에서도 조선 정부를 배제하고 열강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교섭이 진행된 점에서, 조선의 허약한 국제적 지위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
거문도에는 당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영국해군수병들의 묘가 아직 3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 거문도 : 전라남도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섬으로서 고도·동도·서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략적 경쟁을 뜻한다. 보통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러시아-페르시아 굴리스탄 조약)부터 1907년(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갑신정변을 진압한 청군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고자 청나라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1885년(고종 22)에 체결한 조약이다.
조선내 양국 주둔군 철수가 주 내용이며 다음과 같다.
1. 청과 일본 양 군 모두 조선에서 즉시 철수를 시작해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한다.
2. 청과 일본 양국은 조선에 대해 군사 고문을 파견하지 않는다. 조선은 청일 양국이 아닌 제3국에서 1명 이상 수 명의 군인을 초청한다.
3.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
톈진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충돌을 막을 수 있었으나 조약 내용이 애매했기 때문에(제3조) 양국은 10년 후 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실제로 제3조에 의거하여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이 파병되자 일본 역시 군대를 보냈으며, 이는 청일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 이홍장(1823~1901) :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이에 따라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고자 청나라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1885년(고종 22)에 체결한 조약이다.
조선내 양국 주둔군 철수가 주 내용이며 다음과 같다.
1. 청과 일본 양 군 모두 조선에서 즉시 철수를 시작해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한다.
2. 청과 일본 양국은 조선에 대해 군사 고문을 파견하지 않는다. 조선은 청일 양국이 아닌 제3국에서 1명 이상 수 명의 군인을 초청한다.
3.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
톈진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충돌을 막을 수 있었으나 조약 내용이 애매했기 때문에(제3조) 양국은 10년 후 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실제로 제3조에 의거하여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이 파병되자 일본 역시 군대를 보냈으며, 이는 청일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 이홍장(1823~1901) :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미국의 서부개척 역사는 백인이 아메리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원주민을 몰아내고, 학살하는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1890년은 인디언 전쟁 막바지였고 소탕되지 않은 인디언들 대부분 보호구역에 수용되었다.
신의 땅을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1889년 유령춤(Ghost Dance)이라는 신앙 의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들은 부족의 죽음, 빼앗긴 영토, 파괴된 생활방식등으로 얼룩진 자신의 현재 삶을 애도하며 자유 세상과 함께 버팔로들이 초원에 돌아온다는 신앙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악마적 의식이면서 국가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했다.
미 육군은 [2]제7기병연대 500여 명을 원주민 [3]수족이 있던 [1]사우스다코타 주 인디언 보호구역내 운디드 니(wounded knee)로 보냈고, 원주민들은 바로 항복을 했다.
운디드 니(wounded knee)에서 원주민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다툼이 발생했으며 어느 쪽에선지 총탄이 발사됐다. 이에 제7기병연대는 원주민들에게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추장 큰발(Big Foot)을 비롯하여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수족 350명 중 300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미군은 25명이 죽고, 39명이 부상당했다.
미국 정부는 '운디드 니 전투(battle)'라고 했고, 원주민들은 '학살(massacre)'이라고 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제7기병대원에게 22개의 훈장이 수여됐다. 오늘날 원주민과 시민단체들이 이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지적하고 서훈 취소를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미군과 원주민들 사이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 학살이 벌어진 지역을 현재 국립역사지역으로 지정해 놓고 있다.
제7기병연대는 60년 후인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일으킨 부대이다
[1] 사우스다코타주(State of South Dakota) : 미국 중서부의 주. 미국의 4명의 위대한 대통령을 조각한 조각상이 있는 러시모어 산으로 유명하다
[2] 제7기병연대(7th Cavalry Regiment) : 미국 육군의 기병 연대로 1866년 창성되었다. 미국 남북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3] 수족(Sioux) : 북아메리카 원주민. 오늘날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미네소타, 몬태나의 여러 보호 구역과 지역 사회에 흩어져 있는 많은 별도의 부족 정부를 유지하고 있다
1890년은 인디언 전쟁 막바지였고 소탕되지 않은 인디언들 대부분 보호구역에 수용되었다.
신의 땅을 빼앗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1889년 유령춤(Ghost Dance)이라는 신앙 의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들은 부족의 죽음, 빼앗긴 영토, 파괴된 생활방식등으로 얼룩진 자신의 현재 삶을 애도하며 자유 세상과 함께 버팔로들이 초원에 돌아온다는 신앙이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를 악마적 의식이면서 국가에 대한 불복종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했다.
미 육군은 [2]제7기병연대 500여 명을 원주민 [3]수족이 있던 [1]사우스다코타 주 인디언 보호구역내 운디드 니(wounded knee)로 보냈고, 원주민들은 바로 항복을 했다.
운디드 니(wounded knee)에서 원주민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다툼이 발생했으며 어느 쪽에선지 총탄이 발사됐다. 이에 제7기병연대는 원주민들에게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추장 큰발(Big Foot)을 비롯하여 노인,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수족 350명 중 300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미군은 25명이 죽고, 39명이 부상당했다.
미국 정부는 '운디드 니 전투(battle)'라고 했고, 원주민들은 '학살(massacre)'이라고 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제7기병대원에게 22개의 훈장이 수여됐다. 오늘날 원주민과 시민단체들이 이에 대한 정당성 문제를 지적하고 서훈 취소를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미군과 원주민들 사이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 학살이 벌어진 지역을 현재 국립역사지역으로 지정해 놓고 있다.
제7기병연대는 60년 후인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일으킨 부대이다
[1] 사우스다코타주(State of South Dakota) : 미국 중서부의 주. 미국의 4명의 위대한 대통령을 조각한 조각상이 있는 러시모어 산으로 유명하다
[2] 제7기병연대(7th Cavalry Regiment) : 미국 육군의 기병 연대로 1866년 창성되었다. 미국 남북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3] 수족(Sioux) : 북아메리카 원주민. 오늘날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미네소타, 몬태나의 여러 보호 구역과 지역 사회에 흩어져 있는 많은 별도의 부족 정부를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가 [4]인도차이나에서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1]시암과 국경 분쟁이 격화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과 시암의 독립 유지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으로, 결국 시암이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세기 후반에 프랑스는 베트남을 점령하며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1887년,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포함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식민지화했으며 이 과정에서 라오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라오스는 [1]시암의 보호국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시암 정부는 메콩강을 자국의 동부 국경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라오스가 역사적으로 베트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따라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프랑스는 태국에 라오스 지역을 포기할 것을 압박했다.
시암은 이에 반대하며 국경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프랑스의 움직임을 저지하려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와 시암 사이의 긴장이 점점 고조되었으며, 결국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1893년 4월 25일, 프랑스군과 시암군은 메콩강을 둘러싼 지역에서 첫 번째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프랑스는 라오스 지역에서 시암군이 프랑스 소속 군인들을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보복 조치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해군은 캄보디아를 거점으로 시암을 압박하기 위해 군함을 동원해 [3]차오프라야강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시암군은 이를 막기 위해 해군력을 동원하여 차오프라야강 하구의 [2]팍남지역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1893년 7월 13일, 프랑스군은 방콕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시암군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5]팍남전투가 벌어졌다. 시암군은 포격을 가하며 저항했지만 프랑스군은 현대적인 군함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어 시암군을 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프랑스 함대는 방콕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시암 정부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는 외교적으로도 시암을 강하게 압박했다. 프랑스는 방콕을 봉쇄하고 시암이 요구를 거부할 경우 수도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팍남 전투 이후 시암은 프랑스와 전면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프랑스는 시암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내면서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 지역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할양할 것과 메콩강 서쪽 25km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설정하고 프랑스와 영국이 보장하는 태국의 중립 상태를 인정할 것등을 강요했다.
시암은 군사적 열세와 프랑스의 봉쇄 압박으로 인해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이었으며, 결국 1893년 10월 3일에 프랑스와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태국은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 지역을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넘겨야 했으며,이후 라오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시암 전쟁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의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시암이 서구 열강의 지배를 직접적으로 받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쟁 이후 시암은 균형 외교를 통해 완전한 식민지화를 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시암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했고 그 결과 동남아시아에서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유일한 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1] 시암(Siam) : 태국의 옛 명칭으로 1939년 공식적으로 국명을 시암에서 태국(Thailand)로 변경하였다.
[2] 팍남(Paknam) : 태국 차오프라야강하구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방콕 남쪽의 사뭇프라깐(Samut Prakan)지역에 속한다
[3] 차오프라야강(Chao Phraya River) : 태국의 수도인 방콕을 가로 질러 흐르는 강으로 태국에서 가장 큰 강
[4] 인도차이나(Indochina) : 동남아시아의 반도지역을 가리키며, 인도와 중국의 문화적·지리적 영향권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하며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등의 국가들이 포함된다
[5] 팍남전투(Battle of Paknam, 1893년 7월 13일) : 프랑스군이 시암의 차오프라야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방콕을 압박하며, 시암이 라오스를 프랑스에 할양하도록 강요한 결정적인 전투
19세기 후반에 프랑스는 베트남을 점령하며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1887년,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포함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식민지화했으며 이 과정에서 라오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라오스는 [1]시암의 보호국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시암 정부는 메콩강을 자국의 동부 국경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라오스가 역사적으로 베트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따라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프랑스는 태국에 라오스 지역을 포기할 것을 압박했다.
시암은 이에 반대하며 국경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프랑스의 움직임을 저지하려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와 시암 사이의 긴장이 점점 고조되었으며, 결국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1893년 4월 25일, 프랑스군과 시암군은 메콩강을 둘러싼 지역에서 첫 번째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프랑스는 라오스 지역에서 시암군이 프랑스 소속 군인들을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보복 조치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해군은 캄보디아를 거점으로 시암을 압박하기 위해 군함을 동원해 [3]차오프라야강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시암군은 이를 막기 위해 해군력을 동원하여 차오프라야강 하구의 [2]팍남지역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1893년 7월 13일, 프랑스군은 방콕으로 접근하는 과정에서 시암군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5]팍남전투가 벌어졌다. 시암군은 포격을 가하며 저항했지만 프랑스군은 현대적인 군함과 무기를 보유하고 있어 시암군을 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프랑스 함대는 방콕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시암 정부를 심각한 위기에 빠뜨렸다.
이와 동시에 프랑스는 외교적으로도 시암을 강하게 압박했다. 프랑스는 방콕을 봉쇄하고 시암이 요구를 거부할 경우 수도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팍남 전투 이후 시암은 프랑스와 전면전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프랑스는 시암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내면서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 지역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할양할 것과 메콩강 서쪽 25km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설정하고 프랑스와 영국이 보장하는 태국의 중립 상태를 인정할 것등을 강요했다.
시암은 군사적 열세와 프랑스의 봉쇄 압박으로 인해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이었으며, 결국 1893년 10월 3일에 프랑스와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태국은 메콩강 동쪽의 라오스 지역을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넘겨야 했으며,이후 라오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시암 전쟁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의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시암이 서구 열강의 지배를 직접적으로 받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쟁 이후 시암은 균형 외교를 통해 완전한 식민지화를 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시암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근대화를 추진했고 그 결과 동남아시아에서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은 유일한 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1] 시암(Siam) : 태국의 옛 명칭으로 1939년 공식적으로 국명을 시암에서 태국(Thailand)로 변경하였다.
[2] 팍남(Paknam) : 태국 차오프라야강하구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방콕 남쪽의 사뭇프라깐(Samut Prakan)지역에 속한다
[3] 차오프라야강(Chao Phraya River) : 태국의 수도인 방콕을 가로 질러 흐르는 강으로 태국에서 가장 큰 강
[4] 인도차이나(Indochina) : 동남아시아의 반도지역을 가리키며, 인도와 중국의 문화적·지리적 영향권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의미하며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등의 국가들이 포함된다
[5] 팍남전투(Battle of Paknam, 1893년 7월 13일) : 프랑스군이 시암의 차오프라야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방콕을 압박하며, 시암이 라오스를 프랑스에 할양하도록 강요한 결정적인 전투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1876년 개항 뒤 외세의 경제 침탈과 지배층의 수탈 심화로 농민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1890년대 들어 농민항쟁이 빈번해졌다.
1860년 창건된 [1]동학은 이 무렵 남부 지방까지 교세가 확장되었으나 조선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었다. 1892~1893년 동학교도들은 대규모 [2]교조신원운동을 일으켰다.
농촌 지식인들은 동학조직을 활용하여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였다.
1894년 1월 전형적인 탐관오리인 전라도 [3]고부 군수 [4]조병갑의 탐학과 부정부패로 인하여 전봉준을 위시한 고부군민은 봉기를 일으켰다. 조선 조정은 고부 민란을 수습하기위해 [5]안핵사 [6]이용태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오히려 농민들을 탄압하고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3월 20일 [7]전봉준, [8]김개남, [9]손화중을 중심으로 전북 [10]무장에서 [11]창의문을 발표하고 '[12]제폭구민 [13]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싸움에 나섰다. 제1차 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월25일 이어 고창과 정읍, 태인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지역마다 지도자를 달리하는 농민군들이 [3]고부의 백산에 모여들어 연합부대를 이루었다. 농민군은 황토재 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하고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여 전라도 전역은 완전히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병을 요청했다. 5월 5일 아산만에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였다. [17]텐진 조약을 명분으로 일본군도 제물포(인천)에 상륙한다.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게 되자 전봉준과 전라감사 [15]김학진은 7월 6일 전주회담에서 [14]집강소 체제를 합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상황이 안정되자 조선조정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에게 철군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7월 25일에 청군과 일본군의 해전인 [16]풍도해전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농민군들은 다시 결집하여 10월 하순~11월 중순까지 공주 외곽과 청주 일대에서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2차 농민전쟁이었다.
농민군 부대는 패배를 거듭하여 흩어지고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및 관련자들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일본군, 친일 개화파 정권, 보수 유생 토호 세력에 의해 실패했지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한 투쟁이자 20세기 아시아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계기가 된 사건으로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과 일본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후 동아시아는 일본,영국 연합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었다.
[출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202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동학(東學) :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을 제창하여 1860년(철종 11) 최제우(1824~1864)가 창건한 신흥 종교이다.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1827~1898)이 1898년 순교한 뒤 3대 교주인 손병희(1861~1922)가 1905년에 천도교로 개편하였다
[2]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 1864년(고종 1) 동학 교조 최제우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이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을 풀어 줌으로써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운동. 제1차 교조신원운동(1871). 제2차 교조신원운동(1893년)
[3] 고부군 :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덕천면, 소성면, 영원면, 이평면, 정우면과 부안군 백산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로 유명하다
[4] 조병갑(1844년~1912년) : 조선 후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초기의 문신이고 부패한 탐관오리로 조병갑의 탐학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이후 조병갑은 파직당하고 유배당했으나 이후 복권되어 1898년 고등재판소 판사가 되어 동학 지도자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한다. 고종과 친일파 양쪽에게 총애받은 조병갑은 호의호식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다
[5] 안핵사(按覈使) : 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에 이의 처리를 위하여 파견한 임시관직으로 사건의 전말과 상황에 대한 상세한 조사,보고 및 사건의 처리방안을 건의하고 아울러 조정의 지시에 따라 이를 수습하는 것이 임무였다
[6] 이용태(1854년~1922년) : 동학농민혁명을 수습하는 직책이었으나 도리어 확대되자 파직 및 유배되었으나 199년 사법기관인 평리원 재판장과 1901년 주미공사에 임명되었다.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서는 학부대신을 지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7] 전봉준(1855년~1895년) :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유난히 키가 작아(약 152cm)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다
[8] 김개남(1853년~1894년) : 전북 태인(현 전북 정읍시 산외면)지역의 동학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9] 손화중(1861년~1894년) : 전북 고창(무장))에서 활동한 동학의 접주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10] 무장 :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
[11] 창의문 : 1894년 고창 무장 봉기 당시 전봉준등이 만천하에 봉기할 것을 포고한 글
[12] 제폭구민 :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뜻
[13] 보국안민 : 나라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 동학의 교리
[14] 집강소 : 1894년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뒤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와 일본군의 철병을 원한 조선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은 후 전라도 각 군현에 설치하여 중요한 재판이 있을 때 농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농민 자치 기구
[15] 김학진(1838년~1917년) : 동학농민전쟁을 수습하기 위하여 전라감사로 파견되어 농민군에 대한 적극적인 유화책을 통해 전라도지역을 안정시켰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정계에서 추방되어 있던 김학진은 1897년에 복귀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한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해나가자 김학진은 최익현, 허위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이후 중추원에서 활동하면서 친일내각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김학진은 1905년의 상소에서 국망의 위기감을 표출하면서도 고종에게 마음을 다잡고 정치를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1907년 상소에서는 깊은 절망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김학진은 1908년 즈음부터 친일로 기울었고, 마침내 나라가 망하자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다 [참고 : 김학진의 삶과 현실인식, 정종원,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75호, 2019.05]
[16] 풍도해전 : 1894년 7월 25일 조선의 풍도(안산시 단원구)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한 해전으로 청일전쟁의 시발점이며 청나라가 패하였다
[17]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실패의 결과로 1885년(고종 22년) 청나라 이홍장(리훙장)과 일본 이토 히로부미가 맺은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서로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하고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조선은 1876년 개항 뒤 외세의 경제 침탈과 지배층의 수탈 심화로 농민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1890년대 들어 농민항쟁이 빈번해졌다.
1860년 창건된 [1]동학은 이 무렵 남부 지방까지 교세가 확장되었으나 조선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었다. 1892~1893년 동학교도들은 대규모 [2]교조신원운동을 일으켰다.
농촌 지식인들은 동학조직을 활용하여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였다.
1894년 1월 전형적인 탐관오리인 전라도 [3]고부 군수 [4]조병갑의 탐학과 부정부패로 인하여 전봉준을 위시한 고부군민은 봉기를 일으켰다. 조선 조정은 고부 민란을 수습하기위해 [5]안핵사 [6]이용태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오히려 농민들을 탄압하고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3월 20일 [7]전봉준, [8]김개남, [9]손화중을 중심으로 전북 [10]무장에서 [11]창의문을 발표하고 '[12]제폭구민 [13]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싸움에 나섰다. 제1차 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월25일 이어 고창과 정읍, 태인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지역마다 지도자를 달리하는 농민군들이 [3]고부의 백산에 모여들어 연합부대를 이루었다. 농민군은 황토재 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하고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여 전라도 전역은 완전히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병을 요청했다. 5월 5일 아산만에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였다. [17]텐진 조약을 명분으로 일본군도 제물포(인천)에 상륙한다.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게 되자 전봉준과 전라감사 [15]김학진은 7월 6일 전주회담에서 [14]집강소 체제를 합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상황이 안정되자 조선조정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에게 철군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7월 25일에 청군과 일본군의 해전인 [16]풍도해전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농민군들은 다시 결집하여 10월 하순~11월 중순까지 공주 외곽과 청주 일대에서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2차 농민전쟁이었다.
농민군 부대는 패배를 거듭하여 흩어지고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및 관련자들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일본군, 친일 개화파 정권, 보수 유생 토호 세력에 의해 실패했지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한 투쟁이자 20세기 아시아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계기가 된 사건으로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과 일본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후 동아시아는 일본,영국 연합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었다.
[출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202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동학(東學) :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을 제창하여 1860년(철종 11) 최제우(1824~1864)가 창건한 신흥 종교이다.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1827~1898)이 1898년 순교한 뒤 3대 교주인 손병희(1861~1922)가 1905년에 천도교로 개편하였다
[2]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 1864년(고종 1) 동학 교조 최제우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이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을 풀어 줌으로써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운동. 제1차 교조신원운동(1871). 제2차 교조신원운동(1893년)
[3] 고부군 :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덕천면, 소성면, 영원면, 이평면, 정우면과 부안군 백산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로 유명하다
[4] 조병갑(1844년~1912년) : 조선 후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초기의 문신이고 부패한 탐관오리로 조병갑의 탐학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이후 조병갑은 파직당하고 유배당했으나 이후 복권되어 1898년 고등재판소 판사가 되어 동학 지도자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한다. 고종과 친일파 양쪽에게 총애받은 조병갑은 호의호식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다
[5] 안핵사(按覈使) : 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에 이의 처리를 위하여 파견한 임시관직으로 사건의 전말과 상황에 대한 상세한 조사,보고 및 사건의 처리방안을 건의하고 아울러 조정의 지시에 따라 이를 수습하는 것이 임무였다
[6] 이용태(1854년~1922년) : 동학농민혁명을 수습하는 직책이었으나 도리어 확대되자 파직 및 유배되었으나 199년 사법기관인 평리원 재판장과 1901년 주미공사에 임명되었다.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서는 학부대신을 지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7] 전봉준(1855년~1895년) :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유난히 키가 작아(약 152cm)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다
[8] 김개남(1853년~1894년) : 전북 태인(현 전북 정읍시 산외면)지역의 동학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9] 손화중(1861년~1894년) : 전북 고창(무장))에서 활동한 동학의 접주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10] 무장 :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
[11] 창의문 : 1894년 고창 무장 봉기 당시 전봉준등이 만천하에 봉기할 것을 포고한 글
[12] 제폭구민 :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뜻
[13] 보국안민 : 나라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 동학의 교리
[14] 집강소 : 1894년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뒤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와 일본군의 철병을 원한 조선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은 후 전라도 각 군현에 설치하여 중요한 재판이 있을 때 농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농민 자치 기구
[15] 김학진(1838년~1917년) : 동학농민전쟁을 수습하기 위하여 전라감사로 파견되어 농민군에 대한 적극적인 유화책을 통해 전라도지역을 안정시켰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정계에서 추방되어 있던 김학진은 1897년에 복귀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한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해나가자 김학진은 최익현, 허위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이후 중추원에서 활동하면서 친일내각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김학진은 1905년의 상소에서 국망의 위기감을 표출하면서도 고종에게 마음을 다잡고 정치를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1907년 상소에서는 깊은 절망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김학진은 1908년 즈음부터 친일로 기울었고, 마침내 나라가 망하자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다 [참고 : 김학진의 삶과 현실인식, 정종원,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75호, 2019.05]
[16] 풍도해전 : 1894년 7월 25일 조선의 풍도(안산시 단원구)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한 해전으로 청일전쟁의 시발점이며 청나라가 패하였다
[17]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실패의 결과로 1885년(고종 22년) 청나라 이홍장(리훙장)과 일본 이토 히로부미가 맺은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서로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하고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1894년 동학혁명 직후 어수선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고 일본과 청나라는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풍도해전은 7월 25일 조선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청나라 군대는 풍도 안쪽에 있는 충청도 아산만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해전은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첫번째 단추가 되었다.
풍도해전은 전투 개시 6시간 30여분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어 7월 28일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약 4천명의 일본군은 아산과 성환에서 주둔한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청나라는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이로써 일본과 청나라의 전면전은 피하기 어려워졌고 8월 1일 일본은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풍도해전은 중국과 일본 역사교과서 기재 및 기념관 건립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구전에 그치고 있다.
* 풍도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
* 성환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풍도해전은 7월 25일 조선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청나라 군대는 풍도 안쪽에 있는 충청도 아산만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해전은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첫번째 단추가 되었다.
풍도해전은 전투 개시 6시간 30여분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어 7월 28일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약 4천명의 일본군은 아산과 성환에서 주둔한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청나라는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이로써 일본과 청나라의 전면전은 피하기 어려워졌고 8월 1일 일본은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풍도해전은 중국과 일본 역사교과서 기재 및 기념관 건립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구전에 그치고 있다.
* 풍도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
* 성환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청나라는 서구 열강과의 대립이 시작되면서 2차례의 아편전쟁 패배와 자국내 태평천국의 난으로 극심한 혼란한 상황이었다.
청나라는 재기를 위하여 [3] 양무운동을 통해 동아시아 패권국의 위치를 되찾기 위해 서구화 및 사회개혁에 힘쓰고 있었다. 일본은 [5] 메이지 유신 이후로 급격한 근대화를 이루었고 조선 침략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때마침 [1]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자력으로 막지 못하게 된 조선은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도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였다.
청나라군은 충남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주둔하였고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하여 한양에 주둔하게 된다.
타국의 지원을 받아 동학농민운동이 마무리되어 조선은 철군을 요구하였으나 한반도내의 영향력을 지배하기 위하여 청나라군과 일본군은 계속주둔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 친일 내각을 구성하여 청나라의 조선개입을 막으려 했다.
7월 25일 일본은 아산 앞바다 풍도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 해군을 공격하면서 청나라 보급로를 차단하였다(풍도해전). 이는 청일전쟁의 서막이었다.
7월 28일 일본군은 아산에 주둔중이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하고 패한 청나라군은 평양으로 후퇴하였다(성환전투).
8월 1일 청나라와 일본은 선전포고하고 청일전쟁은 한반도 조선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패배하여 청나라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연승한 일본은 중국 요동반도까지 점령하였고 청나라가 자랑하는 [4]북양함대는 일분군에게 궤멸당했다(황해해전).
청나라는 연패하자 당시 실권자인 [2]공친왕 혁흔은 화친쪽으로 기울었고 마침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청일강화조약(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진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으며 배상금으로 2억 3천냥을 일본에 지불하였다. 이 금액은 당시 일본 1년 예산의 4배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또한 랴우둥반도, 타이완섬, [6]펑후제도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추후 랴우둥 반도는 3국 간섭(독일, 프랑스, 러시아)으로 다시 청나라에 반환하게 된다.
청일전쟁은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와 일본군은 조선을 위해 싸운다는 명목하에 보급품은 조선에서 공급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군수물자 대부분은 현지에서 조달하면서 조선 주민들의 피해는 엄청났다.
청일전쟁 결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 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으며 일본에게 동북아의 맹주 자리를 내주었다. 또한 일본은 대만과 중국 영토일부를 식민지로 확보하였으며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제국주의 국가로 자리잡았으며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향하는 운명이 되었다.
[1] 동학농민운동 : 탐관오리의 부조리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
[2]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3] 양무(洋務)운동 : 양무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교류 등을 일컫는 말. 청나라는 국제사회에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하는 운동
[4] 북양함대 : 청나라 말기 중국의 현대화된 해군으로 1871년 북양대신 이홍장의 지원으로 창설되었다. 북양함대는 청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극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 함대였다
[5] 메이지 유신 : 1868년 일본이 정치·경제·문화등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과정
[6] 펑후 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청나라는 재기를 위하여 [3] 양무운동을 통해 동아시아 패권국의 위치를 되찾기 위해 서구화 및 사회개혁에 힘쓰고 있었다. 일본은 [5] 메이지 유신 이후로 급격한 근대화를 이루었고 조선 침략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때마침 [1]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자력으로 막지 못하게 된 조선은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도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였다.
청나라군은 충남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주둔하였고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하여 한양에 주둔하게 된다.
타국의 지원을 받아 동학농민운동이 마무리되어 조선은 철군을 요구하였으나 한반도내의 영향력을 지배하기 위하여 청나라군과 일본군은 계속주둔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 친일 내각을 구성하여 청나라의 조선개입을 막으려 했다.
7월 25일 일본은 아산 앞바다 풍도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 해군을 공격하면서 청나라 보급로를 차단하였다(풍도해전). 이는 청일전쟁의 서막이었다.
7월 28일 일본군은 아산에 주둔중이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하고 패한 청나라군은 평양으로 후퇴하였다(성환전투).
8월 1일 청나라와 일본은 선전포고하고 청일전쟁은 한반도 조선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패배하여 청나라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연승한 일본은 중국 요동반도까지 점령하였고 청나라가 자랑하는 [4]북양함대는 일분군에게 궤멸당했다(황해해전).
청나라는 연패하자 당시 실권자인 [2]공친왕 혁흔은 화친쪽으로 기울었고 마침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청일강화조약(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진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으며 배상금으로 2억 3천냥을 일본에 지불하였다. 이 금액은 당시 일본 1년 예산의 4배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또한 랴우둥반도, 타이완섬, [6]펑후제도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추후 랴우둥 반도는 3국 간섭(독일, 프랑스, 러시아)으로 다시 청나라에 반환하게 된다.
청일전쟁은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와 일본군은 조선을 위해 싸운다는 명목하에 보급품은 조선에서 공급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군수물자 대부분은 현지에서 조달하면서 조선 주민들의 피해는 엄청났다.
청일전쟁 결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 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으며 일본에게 동북아의 맹주 자리를 내주었다. 또한 일본은 대만과 중국 영토일부를 식민지로 확보하였으며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제국주의 국가로 자리잡았으며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향하는 운명이 되었다.
[1] 동학농민운동 : 탐관오리의 부조리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
[2]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3] 양무(洋務)운동 : 양무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교류 등을 일컫는 말. 청나라는 국제사회에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하는 운동
[4] 북양함대 : 청나라 말기 중국의 현대화된 해군으로 1871년 북양대신 이홍장의 지원으로 창설되었다. 북양함대는 청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극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 함대였다
[5] 메이지 유신 : 1868년 일본이 정치·경제·문화등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과정
[6] 펑후 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1894년(고종 31) 7월에서 1896년 2월까지 추진되었던 일련의 개혁운동이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제1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한 뒤 조선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였다.
(1) 제1차 갑오개혁(1894년 7월 27일~1894년 12월 17일) - 제1차 김홍집 내각
개혁 추진을 위한 정책의결 기구인 군국기무처 설치하였으며 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과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현 12개조를 반영하여 자주적으로 추진하였다
-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원을 연호로 사용
- 왕실 사무를 전담하는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의 사무를 분리함 :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뉨
- 6조를 8아문(내무아문, 외무아문, 탁지아문, 법무아문, 학무아문, 공무아문, 군무아문, 농상아문)으로 개편함.
- 내무아문 예하에 경무청을 설치하여 근대적 경찰제도 시행 및 탁지아문으로 재정을 일원화 함
- 과거제 폐지
- 은 본위 화폐제도를 시행
- 도량형을 통일하고 조세의 금납화를 단행함
- 신분제(공,사노비제)를 폐지함
-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함
(2) 제2차 갑오개혁(1894년 12월 17일~1895년 7월 7일) :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개혁에 수구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흥선대원군의 거센반발에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였다. 대신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가 있었던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전격 임명하여 총 213건의 개혁안이 제정, 실시되었는데, 상당수는 앞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개혁안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다.
- 홍범14조를 반포
- 의정부는 내각으로 8아문은 아문이 부로 바뀌면서 7부(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로 개편함
- 재판소를 선치하고 사법권을 행정권으로부터 분리함 : 사법부 독립
- 상공업의 활성화를 위하여 육의전을 폐지함
- 군사제도는 훈련대와 시위대를 조직함
- 한성사범학교 및 부속 소학교가 설립되고 외국어 학교 관제가 반포됨
[제3차 김홍집 내각]
청일전쟁에서 승리와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랴오둥반도를 점령하였으나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으로 랴오등반도를 청에 반환하였다. 이 와중에 2차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지나친 독주로 인하여 박영효는 정변을 꾀했다는 혐의로 실각하여 재차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외 정세가 바뀌자 조선 왕실은 일본의 내정간섭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과 러시아에 우호적이던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3)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 1895년 10월 8일~1896년 2월 11일) : 제4차 김홍집내각
조선정부의 친러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한 명성 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감행하였다. 친러내각이 붕괴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추진된 개혁을 을미개혁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
-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
- 단발령 시행
- 태양력을 채택하고 종두법을 시행함
-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우편 사무가 재개됨
-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소학교가 설립됨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도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하였다(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미국과 가깝게 지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세웠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나무위키등..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김홍집(1842~1896):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 군국기무처 : 조선말기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던 최고 정책결정 기관. 6월 25일부터 같은 해 12월 17일까지 존속
* 을미사변 :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조선왕후(명성황후) 민씨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일본인 낭인등에게 살해된 사건
* 아관파천 : 을미사변으로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과 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간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
* 홍범14조 : 고종이 종묘에서 선포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헌법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제1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한 뒤 조선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였다.
(1) 제1차 갑오개혁(1894년 7월 27일~1894년 12월 17일) - 제1차 김홍집 내각
개혁 추진을 위한 정책의결 기구인 군국기무처 설치하였으며 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과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현 12개조를 반영하여 자주적으로 추진하였다
-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원을 연호로 사용
- 왕실 사무를 전담하는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의 사무를 분리함 :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뉨
- 6조를 8아문(내무아문, 외무아문, 탁지아문, 법무아문, 학무아문, 공무아문, 군무아문, 농상아문)으로 개편함.
- 내무아문 예하에 경무청을 설치하여 근대적 경찰제도 시행 및 탁지아문으로 재정을 일원화 함
- 과거제 폐지
- 은 본위 화폐제도를 시행
- 도량형을 통일하고 조세의 금납화를 단행함
- 신분제(공,사노비제)를 폐지함
-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함
(2) 제2차 갑오개혁(1894년 12월 17일~1895년 7월 7일) :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개혁에 수구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흥선대원군의 거센반발에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였다. 대신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가 있었던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전격 임명하여 총 213건의 개혁안이 제정, 실시되었는데, 상당수는 앞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개혁안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다.
- 홍범14조를 반포
- 의정부는 내각으로 8아문은 아문이 부로 바뀌면서 7부(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로 개편함
- 재판소를 선치하고 사법권을 행정권으로부터 분리함 : 사법부 독립
- 상공업의 활성화를 위하여 육의전을 폐지함
- 군사제도는 훈련대와 시위대를 조직함
- 한성사범학교 및 부속 소학교가 설립되고 외국어 학교 관제가 반포됨
[제3차 김홍집 내각]
청일전쟁에서 승리와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랴오둥반도를 점령하였으나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으로 랴오등반도를 청에 반환하였다. 이 와중에 2차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지나친 독주로 인하여 박영효는 정변을 꾀했다는 혐의로 실각하여 재차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외 정세가 바뀌자 조선 왕실은 일본의 내정간섭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과 러시아에 우호적이던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3)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 1895년 10월 8일~1896년 2월 11일) : 제4차 김홍집내각
조선정부의 친러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한 명성 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감행하였다. 친러내각이 붕괴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추진된 개혁을 을미개혁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
-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
- 단발령 시행
- 태양력을 채택하고 종두법을 시행함
-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우편 사무가 재개됨
-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소학교가 설립됨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도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하였다(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미국과 가깝게 지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세웠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나무위키등..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김홍집(1842~1896):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 군국기무처 : 조선말기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던 최고 정책결정 기관. 6월 25일부터 같은 해 12월 17일까지 존속
* 을미사변 :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조선왕후(명성황후) 민씨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일본인 낭인등에게 살해된 사건
* 아관파천 : 을미사변으로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과 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간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
* 홍범14조 : 고종이 종묘에서 선포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헌법
조선은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자력으로 막지 못하여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도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였다.
청나라군은 충남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주둔하였고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하여 한양에 주둔하였다.
일본은 아산만의 청나라 군대를 봉쇄하고자 한양에서 충남 아산방향으로 내려왔다.
7월 28일 아산에서 약 15km 떨어진 [2]성환지역에서 청나라군과 일본군간 전투가 일어났다. 결과는 청나라군이 패배하였다.
이 전투가 성환전투이며 아산전투라고도 불린다.
아산에 주둔한 3,500명의 청나라군은 [1]풍도 해전에서 패배로 지원군이 차단되어 성환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승리한 일본군은 청나라군 주둔지까지 밀고 내려가 아산에서 승리를 자축했다.
청나라군은 평양으로 후퇴해 일본군과의 일전을 준비했고 8월 1일에 공식적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벌어진 평양 전투에서도 청나라군은 패배하여 한반도내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1] 풍도 해전 : 1894년 7월 25일 조선 충청도 아산만 입구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면서 일어나 해전
[2] 성환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청나라군은 충남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주둔하였고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하여 한양에 주둔하였다.
일본은 아산만의 청나라 군대를 봉쇄하고자 한양에서 충남 아산방향으로 내려왔다.
7월 28일 아산에서 약 15km 떨어진 [2]성환지역에서 청나라군과 일본군간 전투가 일어났다. 결과는 청나라군이 패배하였다.
이 전투가 성환전투이며 아산전투라고도 불린다.
아산에 주둔한 3,500명의 청나라군은 [1]풍도 해전에서 패배로 지원군이 차단되어 성환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승리한 일본군은 청나라군 주둔지까지 밀고 내려가 아산에서 승리를 자축했다.
청나라군은 평양으로 후퇴해 일본군과의 일전을 준비했고 8월 1일에 공식적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벌어진 평양 전투에서도 청나라군은 패배하여 한반도내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1] 풍도 해전 : 1894년 7월 25일 조선 충청도 아산만 입구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면서 일어나 해전
[2] 성환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이며 동학농민군이 벌인 전투 중 최대 규모였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의 전세를 결정할 수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결과는 동학농민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조선·일본 연합군에 패함으로써 1894년 3월 20일 전남 고창 [1] 무장기포 이후 이어진 동학농민전쟁이 사실상 종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전봉준이하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공주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논산에서 [3]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공주감영을 향해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조선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은 뛰어난 화력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동학농민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만을 남긴 채 패퇴하였다.
[1] 무장기포 : 무장은 전북 고창의 옛지명. 무장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 전봉준(1855년~1895년) : 농민 운동가이자 천도교(동학)의 지도자. 녹두장군
[3] 손병희(1861년~1922년) : 천도교(동학)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결과는 동학농민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조선·일본 연합군에 패함으로써 1894년 3월 20일 전남 고창 [1] 무장기포 이후 이어진 동학농민전쟁이 사실상 종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전봉준이하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공주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논산에서 [3]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공주감영을 향해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조선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은 뛰어난 화력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동학농민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만을 남긴 채 패퇴하였다.
[1] 무장기포 : 무장은 전북 고창의 옛지명. 무장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 전봉준(1855년~1895년) : 농민 운동가이자 천도교(동학)의 지도자. 녹두장군
[3] 손병희(1861년~1922년) : 천도교(동학)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여순 대학살은 청일전쟁중에 일본군이 중국 여순을 점령하면서 패잔병 탐색과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대대적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여순내에서 발견된 거의 모든 시민이 학살되어 길거리는 실신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국제사회로부터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학살당한 중국인들은 2만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만충묘(万忠墓)를 세웠으며 현재는 만충묘 기념관이 있어 그 당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 뤼순(여순) : 중국의 옛 도시 이름으로 랴오동 반도의 남쪽끝에 위치. 현재는 랴오닝성 다롄(대련)시의 행정구역
여순내에서 발견된 거의 모든 시민이 학살되어 길거리는 실신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국제사회로부터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학살당한 중국인들은 2만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만충묘(万忠墓)를 세웠으며 현재는 만충묘 기념관이 있어 그 당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 뤼순(여순) : 중국의 옛 도시 이름으로 랴오동 반도의 남쪽끝에 위치. 현재는 랴오닝성 다롄(대련)시의 행정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