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운동(洋務運動)

중국 사건기간 : 1861년~1894년, 조회수 : 487,   등록일 : 2021-04-09
청나라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무기력하게 패하고 태평천국운동을 겪은 뒤 국제사회의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Copyright 2020 TMSTOR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