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9년(선조 22)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3년여에 걸쳐 그와 관련된 약1,000여명의 동인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정여립은 관직을 단념하고 낙향(호남)하여 학문 연구와 대동계를 결성해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으나 서인세력에 의해 역모 준비를 위한 조직으로 간주되었고 급기야 정여립역모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 역모로 인하여 정여립은 피신하던 중 자결하였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 그 당시에 사실로 단정되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에 따르면 조작설등 여러가지 주장이 공존하고 있으나 정설은 없다고 한다.
이후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지면서 3년여간 정여립과 연루되어 희생된 동인은 약1,000여 명에 이른다.
특히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의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그의 형제·노모·자식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하면서 멸문했다
정여립(1546년~1589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이발(1544년~1589년) :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의 수장
동인 :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당파
대동계(大同契) : 조선시대 정여립의 역모사건의 증거로 거론된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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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부터 1600년에 걸쳐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으로 파급된 문화, 예술 전반의 혁신 운동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중세의 기독교와 봉건 제도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의 자유, 개성의 존중을 강조한 인간 중심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였다.
영어: Renaissance
이탈리아어: Rinascimento
프랑스어: Renaissance
스페인어: Renacimiento
교회는 교황과 함께 계속되었는데 교황은 마치 황제와 같은 인물이었고, 대주교와 주교들은 옛 로마마제국의 행정관들과 똑같으며, 그들 밑으로는 지역마다 사제들이 있었다. 이 신성한 단체는 그 자체의 법률, 형벌, 교도소 그리고 조세제도를 지니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가 당시 위와 같은 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한다.
죄 많고 타락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는 것이며, 믿음을 지닌다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는것을 주장(스스로 믿는 종교)하며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함으로써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던 개혁 운동이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 :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1]위그노 전쟁은 프랑스에서 발생한 종교 전쟁이다. 1562년 3월 1일 로마 가톨릭 세력이 프랑스내 [2]칼뱅파 개신교도인 [1]위그노들에게 자행한 학살인 [3]바시학살로 인해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하층민은 물론 상업과 금융 계통의 부르주아에게 [2]칼뱅의 교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다른나라보다 잔혹하게 박해를 받았다. 1562년 4월 2일 파리의 모든 [1]위그노들에 대한 감금, 추방 및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에 각지의 개신교도들이 들고 일어나 양 종교 간의 피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백년전쟁 이후 한세기만에 프랑스 전 국토가 전장이 되었다.
이러한 위그노 전쟁은 1598년 [6]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개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함으로써 36년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개신교도의 예배는 불가하였고 구교와 신교의 재판도 공정하지 못하는 등.. 탄압과 충돌이 계속되었고, 급기야 1686년 [7]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지하였다. 결국 1787년 [8]루이 16세에 의하여 관용칙령이 발표됨으로써 프랑스 개신교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위그노 전쟁으로 백년전쟁이후 프랑스를 이끈 [4]발루아 왕조가 무너지고, [5]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1] 위그노(Les Huguenot) :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칼뱅의 개혁을 지지하던 개신교 신자 [2] 장 칼뱅(Jean Calvin, 1509년~1564년) : 종교개혁가. 프랑스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 [3] 바시학살(Massacre of Vassy) : 1562년 3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시(Vassy)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측의 군대가 창고에 모여서 예배중인 개신교인들을 습격하여 학살한 사건 [4] 발루아 왕조(House of Valois) : 1328년에서 1589년까지의 프랑스 왕국의 왕조. 필리프 6세부터 앙리 3세까지의 왕조 [5] 부르봉 왕조(House of Bourbon) : 1589년부터 1791년까지 그리고 1814년부터 1830년까지 프랑스왕국의 왕조. 앙리4세(재임, 1589년~1610년)부터 앙리 5세(재임, 1830년)까지의 왕조 [6] 앙리 4세(프Henri IV de France,1553년~1610년) : 프랑스 카페 왕조의 분가인 부르봉 왕가 최초의 왕(재위 : 1589년 8월 2일-1610년 5월 14일) [7]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3대 국왕(재위,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태양왕으로 알려져 있다 [8]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네덜란드(혹은 저지대)는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즉 베네룩스 지역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릴까지 포함하여 총 17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는 무적함대를 이끌며 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합스부르크 왕국의 스페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네덜란드 17개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개신교의 교세가 확산되자 이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 1세는 반기를 들면서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라는 두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과 대립하여 1588년 무적함대를 구성하여 영국으로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대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로 해상권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1600년 스페인과 해전에서 승리를 하며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의 후반부에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종교개혁 이후 야기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30년간의 종교전쟁(1618~1648)에 휘말렸으나 1648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고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 Empire)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부르는 말이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전체와 루마니아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이탈리아, 폴란드의 남부 등이 포함된다.
*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1598년
* 오라녜 공(Prins van Oranje) : 네덜란드의 왕위 계승자의 칭호
* 빌럼 1세(William I, 1533년~1584년) :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스페인과 가톨릭에 저항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의 국부로 빌럼 1세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또한 침묵공(De Zwijger)이라고도 불린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과의 간헐적으로 벌어진 전쟁으로 공식적으로 선포된 전쟁이 아니었다.
[1]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등을 영유하고, 남미의 브라질과 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식민지를 개척하고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패자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스페인은 해외 식민지의 유지와 금과 은을 수송하는 상선을 보호하며, 동시에 지중해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세력을 막기 위해 그 유명한 무적함대를 건설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통치 아래 있던 네덜란드는 [1]펠리페 2세의 종교적인 탄압과 경제적 착취에 항거하여 1566년부터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당시 잉글랜드의 [4]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국의 안정과 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네덜란드에 잉글랜드 군사 원정으로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1587년 카디스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쳤지만, 이후 [5]드레이크-[6]호킨스의 원정(1595년), [7]에식스-롤리 원정(1597)에서 큰 실패를 겪었다. 1596년, 1597년, 1601년에 스페인 함대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상대로 추가로 파견되었으나, 이 역시 주로 악천후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전쟁은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네덜란드, 프랑스, 아일랜드 전역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1604년 스페인의 [2]펠리페 3세와 잉글랜드의 [3]제임스 1세가 맺은 런던 조약으로 종식되니다. 이 조약에서 영국과 스페인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군사 개입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무적함대가 잉글랜드에 대패하면서 스페인의 국위가 실추된 것은 물론 이 전쟁 이후로 스페인의 국력은 점차 내리막길을 걸어 이후 벌어진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사실상 몰락하게 된다. 또한 30년 전쟁 이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까지 완전히 독립하게 되면서 스페인은 유럽 최강국에서 유렵의 2등 국가로 내려앉게 된다. 반면에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후 대영제국까지 발전하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 펠리페 2세(Philip II, Felipe II, 1527년~1598년)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 1556년 1월 16일 ~ 1598년 9월 13일), 포르투갈 왕국의 왕(재위:1580년 9월 12일 ~ 1598년 9월 13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1554년 7월 25일 ~ 1558년 11월 17일).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을 건설한 왕
[2] 펠리페 3세(Felipe III, 1578년~1621년) :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제3대 국왕 겸 포르투갈의 국왕(재임 : 1598년 9월 13일~1621년 3월 31일)
[3] 제임스 1세(James I, 1566년~1625년) :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최초로 브리튼 제도 전체를 다스린 왕이자 최초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를 총괄해서 통치하게 된 영국의 국왕. 잉글랜드 국왕(재임 : 1603년 3월 24일 ~ 1625년 3월 27일), 스코틀랜드 국왕(재임 : 1567년 7월 24일~1625년 3월 27일)으로 '제임스 6세'라고 불리는데 제임스 1세로 유명하다.
[4]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5]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년~1596년) :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로 영국에서는 넬슨제독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6] 존 호킨스(John Hawkins,1532년~1595년) : 카비르해의 해적의 선구자. 영국의 노예상인이자 해군 사령관
[7] 에식스-롤리 원정(Essex-Raleigh, Islands Voyage) :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파견하고 네덜란드기 연합하여 지원하여 스페인 함대를 파괴하는 야심찬 작전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네덜란드 함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성공하지 못했다. 제독 겸 총사령관으로서 에식스 백작인 로버트 데버루 경, 중장으로서 서퍽 백작 토머스 하워드 경, 후방 제독으로서 월터 롤리 경이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