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Soviet–Afghan War)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사건기간 : 1979년 12월 24일~1989년 2월 15일, 조회수 : 533, 등록일 : 2021-02-23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79년 12월부터 1989년 2월까지 10년간 지속된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1]무자헤딘(Mujahideen)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1978년 [2]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1]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3]하피줄라 아민은 1979년 4월에 [2]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집권하게 된다.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카불에 도착한 소련은 [3]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4]바브락 카르말을 후임으로 세우고 새로운 공산정권을 수립했다(폭풍333호 작전).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자 [4]바브락 카르말 정권은 소련에게 진압을 요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쉽게 진압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서기장으로 집권한 [5]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발표하였다.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가면서 종료되었다.
[1] 무자헤딘(Mujahideen) :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및 이슬람 세력. 성전(Jihad, 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2]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1917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1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4]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 1929년~1996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3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 [2]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세우고 여러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시도했다. 이에 저항하는 무슬림들이 반발하면서 [1]무자헤딘이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3]하피줄라 아민은 1979년 4월에 [2]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집권하게 된다.
1979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넘어 수도인 카불에 도착한 소련은 [3]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고 [4]바브락 카르말을 후임으로 세우고 새로운 공산정권을 수립했다(폭풍333호 작전).
이 사건의 여파로 소련에 반대하던 이슬람 세력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자 [4]바브락 카르말 정권은 소련에게 진압을 요청하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상대로 싸우던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전면전으로 치닫게 된다.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은 쉽게 진압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면서 소련 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영토 전역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나 소련이 부담해야 할 군사적 외교적 비용은 너무나 컸다.
1987년 소련의 서기장으로 집권한 [5]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발표하였다. 소련군은 1988년 5월 15일 철수를 시작하여 1989년 2월 15일 전원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를 빠져나가면서 종료되었다.
[1] 무자헤딘(Mujahideen) : 아프가니스탄의 반군 게릴라 단체 및 이슬람 세력. 성전(Jihad, 지하드)에서 싸우는 '전사'를 의미한다
[2]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Nur Muhammad Taraki, 1917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1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3] 하피줄라 아민(Hafizullah Amin, 1929년~197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4] 바브락 카르말(Babrak Karmal, 1929년~1996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의 3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5]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년~) : 소련의 정치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제6대 서기장과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최고회의 주석, 초대이자 마지막 소련 대통령을 역임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로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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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입헌 군주제인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가지는 이슬람 공화국으로 정부가 교체되었다. '이란 이슬람 혁명'이라고 불린다.
19세기부터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하에 있었던 이란은 반서방 감정이 커졌고, 이러한 서방세력(미국과 영국 등)의 지원을 받는 팔라비 왕조에 반대하는 다양한 좌파와 이슬람단체등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팔라비 왕조에 대한 시위는 1977년 10월에 시작되어 1978년 1월에 더욱 격화되었다. 1978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파업과 시위가 전국이 마비되었으며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퇴위한 후 망명길에 오른다.
이후 팔라비 왕조 정책에 반대하여 1963년 망명했던 이슬람 성직자 호메이니는 1979년 2월 1일에 귀국했고 2월 11일에 팔라비 왕조는 무너졌다.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죽을 때까지 이란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년 92월 24일~1989년 6월 3일) : 팔라비 왕조 정책에 반대하여 망명했다가팔라비 왕조에 반대하여 망명했다가 이란혁명으로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임기 : 1979년 12월 3일~1989년 6월 3일
* 팔라비 왕조(Pahlavi dynasty) : 1925년부터 1979년까지 거의 54년 동안 통치한 이란의 마지막 왕조. 1979년 2월 11일 이란 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19세기부터 영국과 러시아의 영향하에 있었던 이란은 반서방 감정이 커졌고, 이러한 서방세력(미국과 영국 등)의 지원을 받는 팔라비 왕조에 반대하는 다양한 좌파와 이슬람단체등이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팔라비 왕조에 대한 시위는 1977년 10월에 시작되어 1978년 1월에 더욱 격화되었다. 1978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파업과 시위가 전국이 마비되었으며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퇴위한 후 망명길에 오른다.
이후 팔라비 왕조 정책에 반대하여 1963년 망명했던 이슬람 성직자 호메이니는 1979년 2월 1일에 귀국했고 2월 11일에 팔라비 왕조는 무너졌다.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죽을 때까지 이란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년 92월 24일~1989년 6월 3일) : 팔라비 왕조 정책에 반대하여 망명했다가팔라비 왕조에 반대하여 망명했다가 이란혁명으로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임기 : 1979년 12월 3일~1989년 6월 3일
* 팔라비 왕조(Pahlavi dynasty) : 1925년부터 1979년까지 거의 54년 동안 통치한 이란의 마지막 왕조. 1979년 2월 11일 이란 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점령하여 흡수 통일했고, 캄보디아의 [2]크메르 루주는 [4]론 놀의 [5]크메르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수도 [8]프놈펜에 입성하였고, 1976년 1월에 국명을 [1]민주 캄푸차로 개칭했다.
당시 중-소 갈등이 심화되어, 베트남은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중국과 우호적인 캄보디아의 [6]폴 포트 정권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정치로 베트남과 대립하였다. [1]민주 캄푸차로 명명한 [6]폴 포트는 1978년 베트남에 대한 다른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6]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맞서 베트남에서 조직된 [7]캄프차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캄보디아에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베트남이 프놈펜을 공략하자 [2]크메르 루주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8일 캄보디아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히 숨은 폴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리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캄보디아는 [2]크메르 루주와 [3]시아누크 국왕파, [4]론 놀파의 세 계파는 연합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베트남군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1985년 1월에 대공세를 펼치며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의 거점을 공략하였고, 3월에는 [3]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자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베트남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군의 장기간 주둔은 베트남을 적대하던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캄보디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1986년 7월, 공산주의 베트남을 이끌던 [10]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11]쯔엉찐이 서기장을 맡으면서 베타남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2월에 [12]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개방과 국제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는 [3]노로돔 시아누크와 [9]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1]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민주 캄보디아. 1975~1980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배후에서 지배한 공산국가, 집권당은 캄푸치아 공산당(KCP)이었다. 킬링필드가 발생한 국가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68년에 결성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3]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4]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5]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캄프차 민족해방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KUFNS) : 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창립한 조직
[8] 프놈펜(Phnom Penh) : 캄보디아 수도
[9] 훈 센(Hun Sen, 1952년~) : 캄보디아의 제2대 총리(임기,1998년 11월 30일~2023년 8월 22일 ).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
[10]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11] 쯔엉찐(Truong Chinh, 1907년 ~ 1988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6년 7월 14일~1986년 12월 18일)
[12] 도이모이 정책 : '도이'는 베트남어로 '변한다'는 뜻이고 '모이'는 베트남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쯔엉찐의 주도로 시작되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당시 중-소 갈등이 심화되어, 베트남은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중국과 우호적인 캄보디아의 [6]폴 포트 정권과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폴 포트 정권은 킬링필드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정치로 베트남과 대립하였다. [1]민주 캄푸차로 명명한 [6]폴 포트는 1978년 베트남에 대한 다른 대규모 군사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6]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맞서 베트남에서 조직된 [7]캄프차 민족해방전선과 연합하여 캄보디아에 보복 공격을 단행했다. 베트남이 프놈펜을 공략하자 [2]크메르 루주 체제는 붕괴되었다.
베트남군은 폴 포트 일파를 태국 국경 근처의 산악 지역까지 쫓아냈다. 프놈펜을 점령한 베트남은 1979년 1월 8일 캄보디아내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베트남군은 밀림 깊숙히 숨은 폴포트파의 게릴라 활동에 시달리며, 내전의 수렁에 빠졌다. 캄보디아는 [2]크메르 루주와 [3]시아누크 국왕파, [4]론 놀파의 세 계파는 연합하여, 캄푸치아 인민공화국과 내전이 계속되었다. 캄보디아는 완전히 양분되었다.
베트남군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1985년 1월에 대공세를 펼치며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의 거점을 공략하였고, 3월에는 [3]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자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베트남은 내전에 계속 개입하며 군의 장기간 주둔은 베트남을 적대하던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베트남은 캄보디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과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1986년 7월, 공산주의 베트남을 이끌던 [10]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다. 뒤를 이어 [11]쯔엉찐이 서기장을 맡으면서 베타남 경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2월에 [12]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면서, 경제개방과 국제협력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철군하는 한편, 1989년에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의 자치 능력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남은 주둔군마저 철수하기 시작했고 그해 9월 26일에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은 1989년 완전히 철군했고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붕괴했다. 캄보디아는 [3]노로돔 시아누크와 [9]훈센을 주축으로 한 캄보디아국이 성립되었고 1993년 군주제로 복귀했다.
[1]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민주 캄보디아. 1975~1980년까지 크메르 루주가 배후에서 지배한 공산국가, 집권당은 캄푸치아 공산당(KCP)이었다. 킬링필드가 발생한 국가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68년에 결성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 군사조직.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
[3]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4]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5]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 1970년부터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공화국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캄프차 민족해방전선(Kampuchean United Front for National Salvation:KUFNS) : 폴 포트의 유혈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베트남에서 창립한 조직
[8] 프놈펜(Phnom Penh) : 캄보디아 수도
[9] 훈 센(Hun Sen, 1952년~) : 캄보디아의 제2대 총리(임기,1998년 11월 30일~2023년 8월 22일 ). 캄보디아인민당(CPP, Cambodian People's Party)
[10]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11] 쯔엉찐(Truong Chinh, 1907년 ~ 1988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86년 7월 14일~1986년 12월 18일)
[12] 도이모이 정책 : '도이'는 베트남어로 '변한다'는 뜻이고 '모이'는 베트남어로 '새롭다'는 뜻으로 쯔엉찐의 주도로 시작되 베트남의 개방개혁정책
1977년 집권한 중국의 [5] 덩샤오핑은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개혁·개방정책을 준비한다. 이에 따라 안보를 위하여 소련을 견제해야 하는데 베트남이 소련과 가까워지자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캄보디아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1978년 베트남이 소련과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자 중국은 베트남을 향해 군사행동을 준비를 한다. 베트남에 우호적인 소련을 묶어두기 위해 덩샤오핑은 1978년 10월부터 미국, 일본, 아시아등을 순방하기 시작하여 우방을 만든다. 베트남에 우호적이지 않은 미국에게는 베트남 침공을 위한 명분을 만들고 베트남 국경지역에 대군을 전진 배치한다.
베트남은 1976년 7월 통일을 이루며 베트남 시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한다. 초대 서기장으로 [7]레주언이 취임하면서 급속한 계획주의(사회주의) 경제체제로 바꾸면서 내부 반발이 일어났다.
베트남에는 화교가 120만 거주하고 있었으며 화교들은 장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개인 재산을 몰수하고 국가에서 관리하게 되면서 대립하게 된다. 또한 베트남으로 전향하지 않은 화교들을 베트남에서 추방했다.
화교들에 큰 관심이 없었던 중국은 [5]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맞물려 화교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이로 인해 베트남과의 관계는 더욱 더 안 좋아졌다.
중국과 베트남 국경에서의 분쟁이 1974년 100여건 발생되었고 1년뒤에는 400권, 그 이듬해에는 900여건으로 잦은 분쟁도 전쟁의 원인중 하나였다.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의 [4]폴 포트 정권은 친중 노선을 취했고, 라오스도 중국의 편에 섰다.
1978년 12월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1978년 10월 베트남 침공을 결정한 [5]덩샤오핑은 12월까지 베트남 국경으로 부대이동을 한다.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으로 나누어 전체 31개사단 33만 명이 동원되었고, 베트남은 8개사단 15만명이 투입되었다.
동원인력으로 베트남이 열세였으나 베트남은 미군이 남긴 무기와 소련의 지원으로 무기체계는 베트남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중국은 [1]랑선, [2]라오까이, [3]까오방의 점령을 목표로 서부, 북부, 동북부 세 방면을 통해 베트남을 침공했다.
2월 25일에 [3]까오방, 2월 26일에는 [2]라오까이를, 3월 5일에는 베트남 동북부의 요충지인 [1]랑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베트남은 퇴각하지 않고 적 후방에 잔류하여 기습작전과 지연전, 회피전을 펼치면서 대항하고 있었다. 중국군은 사방에서 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은 부사령관이 침공 8일반에 중병으로 베이징으로 후송되는등 지휘체계도 불안정하고 통신도 원할하지 않았다. 신형장비도 전무한 상태이며 베트남 북부지역의 엄청난 산악지대로 기동력도 부족했다.
중국은 랑선을 점령한 다음 날 3월 6일에 목표를 달성했다라는 선언과 함께 중국군 철수를 명령했다. 3월 16일에 베트남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중국은 국내외에 전쟁 승리를 선전했고, 베트남도 중국 인민해방군의 침략을 내쫓았다고 승리 선언을 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중국군의 사망자는 2만 6천명, 베트남군의 사망자는 3만여명이 발생했으며 부상자도 중국군은 3만 7천명, 베트남군은 3만 2천명이었다.
[1] 랑선(Lang Son, 諒山) : 베트남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130km 정도 떨어져 있다. 중국의 광시성과 국경을 접한다
[2] 라오까이(Lao Cai, 城舖老街) : 베트남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296km 정도 떨어져 있다. 윈난성과 국경을 접한다
[3] 까오방(Cao Bang, 城舖高平)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중국의 광시성과 국경을 접한다
[4]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5] 덩샤오핑(Deng Xiaoping, 鄧小平,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제5대 국가주석(임기,1978년 3월 8일~1983년 6월 22일)
[6]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친미정권
[7]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더군다나 1978년 베트남이 소련과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자 중국은 베트남을 향해 군사행동을 준비를 한다. 베트남에 우호적인 소련을 묶어두기 위해 덩샤오핑은 1978년 10월부터 미국, 일본, 아시아등을 순방하기 시작하여 우방을 만든다. 베트남에 우호적이지 않은 미국에게는 베트남 침공을 위한 명분을 만들고 베트남 국경지역에 대군을 전진 배치한다.
베트남은 1976년 7월 통일을 이루며 베트남 시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한다. 초대 서기장으로 [7]레주언이 취임하면서 급속한 계획주의(사회주의) 경제체제로 바꾸면서 내부 반발이 일어났다.
베트남에는 화교가 120만 거주하고 있었으며 화교들은 장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개인 재산을 몰수하고 국가에서 관리하게 되면서 대립하게 된다. 또한 베트남으로 전향하지 않은 화교들을 베트남에서 추방했다.
화교들에 큰 관심이 없었던 중국은 [5]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맞물려 화교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이로 인해 베트남과의 관계는 더욱 더 안 좋아졌다.
중국과 베트남 국경에서의 분쟁이 1974년 100여건 발생되었고 1년뒤에는 400권, 그 이듬해에는 900여건으로 잦은 분쟁도 전쟁의 원인중 하나였다.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의 [4]폴 포트 정권은 친중 노선을 취했고, 라오스도 중국의 편에 섰다.
1978년 12월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1978년 10월 베트남 침공을 결정한 [5]덩샤오핑은 12월까지 베트남 국경으로 부대이동을 한다.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으로 나누어 전체 31개사단 33만 명이 동원되었고, 베트남은 8개사단 15만명이 투입되었다.
동원인력으로 베트남이 열세였으나 베트남은 미군이 남긴 무기와 소련의 지원으로 무기체계는 베트남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중국은 [1]랑선, [2]라오까이, [3]까오방의 점령을 목표로 서부, 북부, 동북부 세 방면을 통해 베트남을 침공했다.
2월 25일에 [3]까오방, 2월 26일에는 [2]라오까이를, 3월 5일에는 베트남 동북부의 요충지인 [1]랑선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베트남은 퇴각하지 않고 적 후방에 잔류하여 기습작전과 지연전, 회피전을 펼치면서 대항하고 있었다. 중국군은 사방에서 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은 부사령관이 침공 8일반에 중병으로 베이징으로 후송되는등 지휘체계도 불안정하고 통신도 원할하지 않았다. 신형장비도 전무한 상태이며 베트남 북부지역의 엄청난 산악지대로 기동력도 부족했다.
중국은 랑선을 점령한 다음 날 3월 6일에 목표를 달성했다라는 선언과 함께 중국군 철수를 명령했다. 3월 16일에 베트남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중국은 국내외에 전쟁 승리를 선전했고, 베트남도 중국 인민해방군의 침략을 내쫓았다고 승리 선언을 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중국군의 사망자는 2만 6천명, 베트남군의 사망자는 3만여명이 발생했으며 부상자도 중국군은 3만 7천명, 베트남군은 3만 2천명이었다.
[1] 랑선(Lang Son, 諒山) : 베트남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130km 정도 떨어져 있다. 중국의 광시성과 국경을 접한다
[2] 라오까이(Lao Cai, 城舖老街) : 베트남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296km 정도 떨어져 있다. 윈난성과 국경을 접한다
[3] 까오방(Cao Bang, 城舖高平)베트남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중국의 광시성과 국경을 접한다
[4]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5] 덩샤오핑(Deng Xiaoping, 鄧小平,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제5대 국가주석(임기,1978년 3월 8일~1983년 6월 22일)
[6]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 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친미정권
[7] 레주언(Le Duan, 1907년 ~ 1986년) :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임기, 1960년 9월 10일 – 1986년 7월 10일)
YH 사건은 가발수출업체인 YH 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일방적 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8월 11일 새벽 2시 1,000여 명의 경찰이 '101작전'을 개시하고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여성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추락사하였다. 경찰은 투신 자살로 조작했으나 조사 결과 경찰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추락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했으며 이는 부마민주항쟁, 10.26 사건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 YH무역 : 1966년 10여명의 사원으로 출발한 가발회사로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창립 4년 만인 1970년대 초 종업원 이 4,000여명에 이르는 수출 순위 15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8월 11일 새벽 2시 1,000여 명의 경찰이 '101작전'을 개시하고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여성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하고 해산하는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추락사하였다. 경찰은 투신 자살로 조작했으나 조사 결과 경찰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추락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했으며 이는 부마민주항쟁, 10.26 사건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 YH무역 : 1966년 10여명의 사원으로 출발한 가발회사로 가발 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에 힘입어 창립 4년 만인 1970년대 초 종업원 이 4,000여명에 이르는 수출 순위 15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 마산시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 항쟁. 박정희의 제4공화국 유신 독재 체제에 대항한 사건이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 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유신 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부마민주항쟁(Bu-Ma Democratic Protests)으로도 불린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 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유신 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부마민주항쟁(Bu-Ma Democratic Protests)으로도 불린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대사건으로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한 사건이다.
박정희 암살 사건, 박정희 시해 사건, 박정희 피격 사건, 궁정동 사건으로도 불린다.
* 박정희(1917년~1979년) : 대한민국 5,6,7,8,9대 대통령
* 김재규(1926년~1980년) : 제11대 건설부 장관,제8대 중앙정보부장
* 박선호(1934년~1980년) :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 박흥주(1939년~1980년) :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육군 포병대령. 당시 정앙정보부장 수행비서
* 차지철(1934년~1979년) :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박정희 암살 사건, 박정희 시해 사건, 박정희 피격 사건, 궁정동 사건으로도 불린다.
* 박정희(1917년~1979년) : 대한민국 5,6,7,8,9대 대통령
* 김재규(1926년~1980년) : 제11대 건설부 장관,제8대 중앙정보부장
* 박선호(1934년~1980년) :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 박흥주(1939년~1980년) :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육군 포병대령. 당시 정앙정보부장 수행비서
* 차지철(1934년~1979년) : 제3대 대통령경호실장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뒤 최규하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전두환과 노태우등이 중심인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으로 전형적인 군사반란이다.
당시 대통령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할 수밖에 없었으며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함으로써 당시의 군부가 반란의 주도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결국 신군부세력은 1980년 5·17쿠데타까지 주도해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 최규하(1919년~2006년) :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전두환과 노태우등이 중심인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으로 전형적인 군사반란이다.
당시 대통령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할 수밖에 없었으며 13일 오전 9시 9사단장 노태우와 50사단장 정호용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전사령관에 취임함으로써 당시의 군부가 반란의 주도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결국 신군부세력은 1980년 5·17쿠데타까지 주도해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 최규하(1919년~2006년) :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랭커스터 협정 영국 런던의 [1]랭커스터 하우스에서 열린 회담에서 체결된 협정으로, 당시 [2]로디지아로 알려진 현재의 짐바브웨가 독립 국가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 협정은 로디지아 백인 소수 정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주적 독립 국가로 전환되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한 협정이었다.
[2]로디지아는 1890년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영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1965년, 백인 소수 정권이 이끄는 [3]이언 스미스는 영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며 로디지아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아프리카 다수 인구를 정치적으로 억압했으며, 인종차별적 법률을 통해 부와 권력을 독점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비반을 받았다.
[2]로디지아 내에서는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저항 운동이 성장했다. [7]조슈아 은코모가 이끄는 [4]ZAPU와 [6]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5]ZANU가 무장 투쟁을 전개하며 백인 정권에 저항하며 광범위한 내전을 초래했다. 이 내전은 1970년대 동안 격화되었으며,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국제적으로는 영국과 주변국, 특히 잠비아와 모잠비크가 로디지아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이러한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제적 중재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헌법 채택: 짐바브웨가 독립 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새로운 헌법이 마련되었다. 이 헌법은 다수결에 기반한 민주적 정부를 보장하면서도 백인 소수의 권익을 일정 기간 동안 보호하는 조항을 포함했다.
- 선거 실시: 독립 전환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약속했으며, 영국이 이를 관리하도록 했다. 선거는 1980년 2월에 시행되었고, 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ZANU-PF가 대승을 거두어 정부를 구성했다.
- 무장 해제: [4]ZAPU와 [5]ZANU 등 아프리카 민족주의 무장단체는 해체되고, 전쟁 당사자들이 평화적 해결책에 동의하도록 했다. 백인 정권의 군대도 해체되거나 통합되었다.
- 독립 승인: 영국은 로디지아를 다시 직접 통치하게 되었으며, 독립 과정이 완료된 뒤 로디지아는 짐바브웨라는 이름으로 독립 국가로 승인되었다.
1980년 4월 18일, 짐바브웨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는 아프리카 다수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반영하기 위해 과거의 식민지적 이름을 버리고 짐바브웨로 이름을 변경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짐바브웨 독립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탈식민화 과정을 촉진했다. 이후 선거에서 [6]로버트 무가베가 짐바브웨의 첫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이는 짐바브웨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협정이 백인 소수의 경제적 특권을 단기적으로 보장했기 때문에, 독립 후에도 토지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은 지속적인 갈등 요소로 남았다. 이는 이후 짐바브웨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의 종식을 위한 평화적 해결의 사례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며, 짐바브웨뿐만 아니라 전 세계 탈식민화 과정에서 의미 있는 협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1] 랭커스터 하우스 : 영국 런던에 위치한 역사적인 건물로, 회담을 통해 로디지아 내전의 종식과 새로운 헌법, 독립 절차를 확정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2]로디지아(Rhodesia) : 1965년 영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1979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이며 현재의 짐바브웨이다. 1979년에서 1980년까지 짐바브웨 로디지아로 변경되었다. 1980년 4월에 짐바브웨라는 이름의 독립국가가 되었다
[3] 이언 스미스(Ian Douglas Smith, 1919년~2007년) : 짐바브웨의 백인 정치인. 로디지아 백인 정권을 대표하여 총리(임기, 1964년 4월 13일 – 1979년 6월 1일)로 있다가 내외의 압력으로 흑인세력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4] ZAPU(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 :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
[5] ZANU(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6] 로버트 무가베(Robert Gabriel Mugabe, 1924년~2019년) : 짐바브웨의 제1대 총리(임기, 1980년 4월 18일~1987년 12월 31일), 짐바브웨의 제2대 대통령(임기, 1987년 12월 31일~2017년 11월 21일). 초기 백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주도해 짐바브웨를 백인들로부터 해방시킨 독립운동가였지만,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에는 잔혹한 학살과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 파탄과 최빈국으로 전락했으며, 부정부패와 사치 등으로 국가를 파탄내어 국제적인 지탄을 받는 독재자로 전락했다
[7] 조슈아 음카부코 은욘골로 은코모(Joshua Mqabuko Nyongolo Nkomo, 1917년~1999년) : 짐바브웨의 혁명가이자정치인으로, 1990년부터 1999년 사망 직전까지 짐바브웨의 부통령이었다. ZAPU를 1961년 창당하여 이끌어왔으나 1987년 로버트 무가베의 ZANU와 합당하여 현재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애국 전선 (ZANU-PF, 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Patriotic Front)을 구성하였다
[2]로디지아는 1890년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영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1965년, 백인 소수 정권이 이끄는 [3]이언 스미스는 영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며 로디지아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아프리카 다수 인구를 정치적으로 억압했으며, 인종차별적 법률을 통해 부와 권력을 독점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비반을 받았다.
[2]로디지아 내에서는 아프리카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이끄는 저항 운동이 성장했다. [7]조슈아 은코모가 이끄는 [4]ZAPU와 [6]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5]ZANU가 무장 투쟁을 전개하며 백인 정권에 저항하며 광범위한 내전을 초래했다. 이 내전은 1970년대 동안 격화되었으며,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국제적으로는 영국과 주변국, 특히 잠비아와 모잠비크가 로디지아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이러한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제적 중재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헌법 채택: 짐바브웨가 독립 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새로운 헌법이 마련되었다. 이 헌법은 다수결에 기반한 민주적 정부를 보장하면서도 백인 소수의 권익을 일정 기간 동안 보호하는 조항을 포함했다.
- 선거 실시: 독립 전환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약속했으며, 영국이 이를 관리하도록 했다. 선거는 1980년 2월에 시행되었고, 로버트 무가베가 이끄는 ZANU-PF가 대승을 거두어 정부를 구성했다.
- 무장 해제: [4]ZAPU와 [5]ZANU 등 아프리카 민족주의 무장단체는 해체되고, 전쟁 당사자들이 평화적 해결책에 동의하도록 했다. 백인 정권의 군대도 해체되거나 통합되었다.
- 독립 승인: 영국은 로디지아를 다시 직접 통치하게 되었으며, 독립 과정이 완료된 뒤 로디지아는 짐바브웨라는 이름으로 독립 국가로 승인되었다.
1980년 4월 18일, 짐바브웨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는 아프리카 다수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반영하기 위해 과거의 식민지적 이름을 버리고 짐바브웨로 이름을 변경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짐바브웨 독립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탈식민화 과정을 촉진했다. 이후 선거에서 [6]로버트 무가베가 짐바브웨의 첫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이는 짐바브웨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협정이 백인 소수의 경제적 특권을 단기적으로 보장했기 때문에, 독립 후에도 토지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은 지속적인 갈등 요소로 남았다. 이는 이후 짐바브웨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랭커스터 협정은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의 종식을 위한 평화적 해결의 사례로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며, 짐바브웨뿐만 아니라 전 세계 탈식민화 과정에서 의미 있는 협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1] 랭커스터 하우스 : 영국 런던에 위치한 역사적인 건물로, 회담을 통해 로디지아 내전의 종식과 새로운 헌법, 독립 절차를 확정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2]로디지아(Rhodesia) : 1965년 영국으로 부터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여 1979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이며 현재의 짐바브웨이다. 1979년에서 1980년까지 짐바브웨 로디지아로 변경되었다. 1980년 4월에 짐바브웨라는 이름의 독립국가가 되었다
[3] 이언 스미스(Ian Douglas Smith, 1919년~2007년) : 짐바브웨의 백인 정치인. 로디지아 백인 정권을 대표하여 총리(임기, 1964년 4월 13일 – 1979년 6월 1일)로 있다가 내외의 압력으로 흑인세력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4] ZAPU(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 :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
[5] ZANU(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6] 로버트 무가베(Robert Gabriel Mugabe, 1924년~2019년) : 짐바브웨의 제1대 총리(임기, 1980년 4월 18일~1987년 12월 31일), 짐바브웨의 제2대 대통령(임기, 1987년 12월 31일~2017년 11월 21일). 초기 백인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주도해 짐바브웨를 백인들로부터 해방시킨 독립운동가였지만,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에는 잔혹한 학살과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 파탄과 최빈국으로 전락했으며, 부정부패와 사치 등으로 국가를 파탄내어 국제적인 지탄을 받는 독재자로 전락했다
[7] 조슈아 음카부코 은욘골로 은코모(Joshua Mqabuko Nyongolo Nkomo, 1917년~1999년) : 짐바브웨의 혁명가이자정치인으로, 1990년부터 1999년 사망 직전까지 짐바브웨의 부통령이었다. ZAPU를 1961년 창당하여 이끌어왔으나 1987년 로버트 무가베의 ZANU와 합당하여 현재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애국 전선 (ZANU-PF, 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 Patriotic Front)을 구성하였다
5·17 쿠데타는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육군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이후 신군부)가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권유린, 헌정파괴 행위를 자행하여 정권을 잡은 사건으로 '5.17내란'이라고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피살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는 10월 27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임기는 박정희의 잔여임기인 1984년 12월 6일까지였다.
그러나 6일 뒤인 12월 12일 신군부에 의해 12.12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국정의 실권이 대통령과 정부가 아닌 신군부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권에서는 계엄을 해제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유신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로 나아가는 길을 열고자 했고 학생과 시민들은 군부퇴진과 민주화를 거세게 요구했다.
5월 17일 신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발표했다. 이는 곧 신군부에게 모든 전권이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18일 부터 정치활동이 전면 중단되고 영장없이 학생,정치인,재야인사등을 구금하기 시작했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의 저항까지 유혈진압으로 마무리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8월 16일 최규하대통령이 사임하자 9월에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국보위는 10월 27일 정치규제법을 통과시켜 국회와 모든 제도권 정당을 강제해산하고 새로 만들어진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쿠데타는 반란세력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 통일주체국민회의 :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헌법에 따라 구성된 간접민주주의 기관이다
* 국보위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5.17 쿠데타세력이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행정 기구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피살되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는 10월 27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하여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임기는 박정희의 잔여임기인 1984년 12월 6일까지였다.
그러나 6일 뒤인 12월 12일 신군부에 의해 12.12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국정의 실권이 대통령과 정부가 아닌 신군부에게 넘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권에서는 계엄을 해제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유신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로 나아가는 길을 열고자 했고 학생과 시민들은 군부퇴진과 민주화를 거세게 요구했다.
5월 17일 신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최규하 대통령은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발표했다. 이는 곧 신군부에게 모든 전권이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18일 부터 정치활동이 전면 중단되고 영장없이 학생,정치인,재야인사등을 구금하기 시작했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의 저항까지 유혈진압으로 마무리한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8월 16일 최규하대통령이 사임하자 9월에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국보위는 10월 27일 정치규제법을 통과시켜 국회와 모든 제도권 정당을 강제해산하고 새로 만들어진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쿠데타는 반란세력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 통일주체국민회의 :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헌법에 따라 구성된 간접민주주의 기관이다
* 국보위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5.17 쿠데타세력이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행정 기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혹은 광주민중항쟁은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며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
이란은 1979년 팔레비왕조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슬람 공화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반미감정이 강한 루홀라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 1902~1989, 시아파)가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소위 '호메이니 혁명', '이란 이슬람 혁명'이라 불리며 자국내는 물론 주변국가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다.
친미성향의 팔레비왕조와 대조적인 루홀라 호메이니는 반미 정책으로 미국과 관계는 끊어졌고, 이러한 이란의 영향은 주변 중동국가내의 종파의 갈등으로 시아파의 폭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라크는 1979년 새 대통령으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 수니파)이 당선되었다. 후세인은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들에게 파급되는 것을 염려하여 이란 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 지역인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수로를 둘러싼 영유권문제(양국 간 분쟁의 근원)를 계기로 이란을 선제공격하여 8년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 및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양국은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비공식)가 발생했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측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채 종식되었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 이란은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도 부른다.
친미성향의 팔레비왕조와 대조적인 루홀라 호메이니는 반미 정책으로 미국과 관계는 끊어졌고, 이러한 이란의 영향은 주변 중동국가내의 종파의 갈등으로 시아파의 폭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라크는 1979년 새 대통령으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 수니파)이 당선되었다. 후세인은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들에게 파급되는 것을 염려하여 이란 혁명의 혼란기를 틈타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 지역인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수로를 둘러싼 영유권문제(양국 간 분쟁의 근원)를 계기로 이란을 선제공격하여 8년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 및 서방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양국은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비공식)가 발생했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측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채 종식되었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 이란은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도 부른다.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부가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고취하고 대학생들의 국학에 대한 관심 고취라는 명분 아래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주최한 문화축제이다
당시 청와대 정무제1비서관이었던 허문도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를 앞두고 군사정권에 대한 학원가의 저항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대학생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는 대규모 축제를 기획했다.
전국 194개 대학의 6,000여명의 학생들과 전통 민속인 및 연예인 등이 참여해 총 659회의 공연을 벌였고 주최측 통산 1,0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이 행사에 참여했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방송공사(KBS)가 주관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허문도(1940년~2016년) : 조선일보 출신의 정치인. 12·12 군사 반란의 주역들과 함께 하며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언론인 강제해직, 보도지침, 언론통폐합 등을 주도하였다
당시 청와대 정무제1비서관이었던 허문도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를 앞두고 군사정권에 대한 학원가의 저항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대학생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는 대규모 축제를 기획했다.
전국 194개 대학의 6,000여명의 학생들과 전통 민속인 및 연예인 등이 참여해 총 659회의 공연을 벌였고 주최측 통산 1,0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이 행사에 참여했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방송공사(KBS)가 주관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허문도(1940년~2016년) : 조선일보 출신의 정치인. 12·12 군사 반란의 주역들과 함께 하며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언론인 강제해직, 보도지침, 언론통폐합 등을 주도하였다
포클랜드 전쟁(Falklands War)은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자국과 가까운 영국령 포클랜드(말비나스)제도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침공한 전쟁이다.
포클랜드(말비나스)제도는 영국 본토에서 약 13,000km, 남미대륙 남단 혹은 아르헨티나 남대서양 마젤란 해협에서 480km떨어져 있고 200여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면적은 12,000평방미터 이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료되었으며,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군사독재정권은 실각하게 된다.
이에 반해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도발에 대하여 즉각 무력 대응을 결정하고 군대를 파견하는 결단을 내린 '철의여인' 마거릿 대처수상은 1983년에 다시 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 전쟁을 두고 말비나스(Malvinas) 전쟁이라고 부른다.
* 레오폴도 갈티에리(Leopoldo Fortunato Galtieri Castelli, 1926년~ 2003년) : 아르헨티나의 군인 출신 정치인
* 마거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1925년~2013년) : 1979~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낸 정치가
포클랜드(말비나스)제도는 영국 본토에서 약 13,000km, 남미대륙 남단 혹은 아르헨티나 남대서양 마젤란 해협에서 480km떨어져 있고 200여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면적은 12,000평방미터 이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료되었으며,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군사독재정권은 실각하게 된다.
이에 반해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도발에 대하여 즉각 무력 대응을 결정하고 군대를 파견하는 결단을 내린 '철의여인' 마거릿 대처수상은 1983년에 다시 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 전쟁을 두고 말비나스(Malvinas) 전쟁이라고 부른다.
* 레오폴도 갈티에리(Leopoldo Fortunato Galtieri Castelli, 1926년~ 2003년) : 아르헨티나의 군인 출신 정치인
* 마거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1925년~2013년) : 1979~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낸 정치가
1983년 9월 1일 오전 12시 05분(미국 뉴욕시간) 뉴욕 JFK국제공항을 출발하여 급유를 위하여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김포국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KAL) 007 여객기가 당시 소련의 영공인 [1]사할린에서 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인근바다에 추락하여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KAL 007 여객기는 오전 2시 5분(사할린 시간)경 규정된 항로보다 위쪽의 [3]캄차카반도 북동쪽으로 진입하여 3시 30분에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였다가 4시 28분 공해상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다시 [1]사할린 상공으로 진입하자 5시 25분경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 두발을 발사하였다. 공격을 받은 KAL 007기는 일정시간 나선형을 그리며 급강하하면서 [2]모네론섬 인근바다에 추락하였다.
여객기의 연료절감 및 경제적인 비행때문에 고도를 올리는데, 이 당시 조종사는 주변이 너무 어두워 소련 영공상으로 침범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소련은 사건발생 일주일이 지나서야 격추사실을 밝혔으며 수거한 유해와 잔해들을 은폐하였다. 특히 블랙박스를 수거한 사실조차 숨겼다가 소련붕괴이후 10년이 지난 1992년에 관련자료를 공개하였다. 이 자료를 토대로 [5]국제민간항공기구의 정식 보고서에서 KAL 007기는 조종사의 항법 실수로 소련 영공에 진입했고, 이를 미국 정찰기로 혼동한 소련 전투기의 실수가 겹쳐 발생한 사건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군용기라도 위협적이지 않다면 무기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하고있다고 한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민간항공기의 격추는 정찰기로 의심한 소련이 매우 민감하게 대응한 매우 이례적인 상황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또한 당시는 미국 정찰기인 [4]RC-135기가 수도 없이 출몰하던 때였고, 냉전시대 소련의 분위기도 날카로웠던 시기였다. 또한 RC-135는 보잉747와 비슷하여 식별이 불가능한 캄캄한 영공상에서 충분히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KAL 007기 격추사건은 당시 미소냉전의 시대적, 국제적인 배경으로 강대국의 냉전이 제3세계인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사건으로 남은 사람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GPS정보가 민간에 개방되었으며 사건 전까지만 해도 항공기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6]관성항법시스템을 사용해 위치를 가늠했다고 한다. 이후 GPS를 사용하면서 위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1] 사할린(Sakhalin) : 북태평양에 있는 러시아의 섬으로 타타르 해협과 오호츠크 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섬
[2] 모네론섬(Moneron Island) : 러시아의 사할린 섬에서 떨어진 작은 섬
[3] 캄차카 반도(Kamchatka Peninsula) : 동쪽의 태평양과 서쪽의 오호츠크해 사이에 있는 러시아 극동지역의 반도
[4] 보잉 RC-135(Boeing RC-135) : 미국 공군의 대형 정찰기. 1961년부터 32대가 생산되어 현재도 사용중이다
[5] 국제민간항공기구(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ICAO) : 유엔 산하 전문기구로, 국제 항공 운송에 필요한 원칙과 기술 및 안전에 대해 모든 회원국이 준수해야 할 표준과 권고를 제정한다
[6] 관성항법시스템(INS : Inertial Navigation System) : 운반체의 운동을 감지하는 관성센서(자이로 및 가속도계)출력으로부터 운반체의 속도, 위치 및 자세 등의 항법정보를 계산해 내는 장치
KAL 007 여객기는 오전 2시 5분(사할린 시간)경 규정된 항로보다 위쪽의 [3]캄차카반도 북동쪽으로 진입하여 3시 30분에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였다가 4시 28분 공해상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다시 [1]사할린 상공으로 진입하자 5시 25분경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 두발을 발사하였다. 공격을 받은 KAL 007기는 일정시간 나선형을 그리며 급강하하면서 [2]모네론섬 인근바다에 추락하였다.
여객기의 연료절감 및 경제적인 비행때문에 고도를 올리는데, 이 당시 조종사는 주변이 너무 어두워 소련 영공상으로 침범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다.
소련은 사건발생 일주일이 지나서야 격추사실을 밝혔으며 수거한 유해와 잔해들을 은폐하였다. 특히 블랙박스를 수거한 사실조차 숨겼다가 소련붕괴이후 10년이 지난 1992년에 관련자료를 공개하였다. 이 자료를 토대로 [5]국제민간항공기구의 정식 보고서에서 KAL 007기는 조종사의 항법 실수로 소련 영공에 진입했고, 이를 미국 정찰기로 혼동한 소련 전투기의 실수가 겹쳐 발생한 사건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군용기라도 위협적이지 않다면 무기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하고있다고 한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민간항공기의 격추는 정찰기로 의심한 소련이 매우 민감하게 대응한 매우 이례적인 상황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또한 당시는 미국 정찰기인 [4]RC-135기가 수도 없이 출몰하던 때였고, 냉전시대 소련의 분위기도 날카로웠던 시기였다. 또한 RC-135는 보잉747와 비슷하여 식별이 불가능한 캄캄한 영공상에서 충분히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KAL 007기 격추사건은 당시 미소냉전의 시대적, 국제적인 배경으로 강대국의 냉전이 제3세계인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사건으로 남은 사람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GPS정보가 민간에 개방되었으며 사건 전까지만 해도 항공기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6]관성항법시스템을 사용해 위치를 가늠했다고 한다. 이후 GPS를 사용하면서 위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1] 사할린(Sakhalin) : 북태평양에 있는 러시아의 섬으로 타타르 해협과 오호츠크 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섬
[2] 모네론섬(Moneron Island) : 러시아의 사할린 섬에서 떨어진 작은 섬
[3] 캄차카 반도(Kamchatka Peninsula) : 동쪽의 태평양과 서쪽의 오호츠크해 사이에 있는 러시아 극동지역의 반도
[4] 보잉 RC-135(Boeing RC-135) : 미국 공군의 대형 정찰기. 1961년부터 32대가 생산되어 현재도 사용중이다
[5] 국제민간항공기구(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ICAO) : 유엔 산하 전문기구로, 국제 항공 운송에 필요한 원칙과 기술 및 안전에 대해 모든 회원국이 준수해야 할 표준과 권고를 제정한다
[6] 관성항법시스템(INS : Inertial Navigation System) : 운반체의 운동을 감지하는 관성센서(자이로 및 가속도계)출력으로부터 운반체의 속도, 위치 및 자세 등의 항법정보를 계산해 내는 장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은 1983년 10월 9일에 버마(현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 양곤)에 위치한 아웅 산 묘소에서 대한민국의 외교사절 다수가 폭탄테러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당시 버마를 친선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묘역을 참배하기로 하였고, 이 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정부요인, 취재기자 등 17명이 폭탄테러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사건직후 공식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일정이었으며 첫 방문국가가 버마였다고 한다.
* 아웅산(Aung San, 1915년~1947년) : 미얀마(버마)의 독립운동 혁명가, 정치인, 군인이며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1991년 수상)한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의 아버지이다.
* 양곤(Yangon) : 미얀마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랭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랭군의 명칭도 양곤으로 바꾸었다.
* 미얀마(Myanmar)는 1989년 이전에는 버마(Burma)라는 국명이 사용되었다. 미얀마의 군부 정권은 '버마'라는 호칭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잔재인데다가 버마족 외에 다른 소수 민족(135개)을 아우르는 명칭인 미얀마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당시 버마를 친선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묘역을 참배하기로 하였고, 이 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한민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정부요인, 취재기자 등 17명이 폭탄테러로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사건직후 공식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일정이었으며 첫 방문국가가 버마였다고 한다.
* 아웅산(Aung San, 1915년~1947년) : 미얀마(버마)의 독립운동 혁명가, 정치인, 군인이며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1991년 수상)한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의 아버지이다.
* 양곤(Yangon) : 미얀마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옛 수도. 원래의 이름은 랭군이었으나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면서 랭군의 명칭도 양곤으로 바꾸었다.
* 미얀마(Myanmar)는 1989년 이전에는 버마(Burma)라는 국명이 사용되었다. 미얀마의 군부 정권은 '버마'라는 호칭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잔재인데다가 버마족 외에 다른 소수 민족(135개)을 아우르는 명칭인 미얀마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힌두교와 무슬림교는 각각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어 1947년에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였다. 이 와중에 [1]시크교는 힌두교 중심의 인도에 편입되었다.
이렇게 편입된 시크교도들은 힌두교도 중심의 인도 공화국에 편입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1980년에 들어서면서 집권당인 인도 국민회의당은 경제계획 실패, 언론탄압등으로 독점적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디. 이 시점에 일부 시크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인 [3]칼리스탄 건설을 요구하면서 [2]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당 정부를 테러 등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압박했다.
이에 국민회의당 정부는 시크교도의 성지이자 테러의 본거지인 [4]펀자브주의 [5]암리차르의 황금사원에서 시위를 하는 시크교도들을 무력으로 유혈 진압했다. 이후 [2]인디라 간디는 1984년 10월 31일 자신의 경호원인 두 명의 시크교도들에게 암살당했다. 시크교에서는 이 날을 순교자의 날로 기리며 이 2명을 성자로 찬양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여파로 인도 수도 델리 전역에서 사흘간 국민회의당 소속 정치인이 조직적으로 사주한 군중에 의해 시크교도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4,000여 명이 피살되었고, 6만여 명이 집과 재산을 잃었으며 델리의 13개 시크 사원이 불에 타 버렸다.
시크교도들은 대부분이 인도-파키스탄 분단이후 델리로 이주해 온 후 자수성가한 사업가들로서 델리가 도시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집단이었다. 이후 많은 시크들이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독립국 칼리스탄 건국을 지원하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참조]
- 세계의 도시와 건축 - 델리, 역사성과 신민성이 만나는 곳, 류연택, 이광수외 12,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 시크교(Sikhism) : 15세기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영향으로 창시된 종교. 시크교도들은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차별을, 무슬림들에게는 박해를 받아왔다
[2] 인디라 간디(Indira Priyadarśinī Gāndhī, 1917년~1984년) : 인도의 제3대총리로 두 차례에 걸쳐 역임(1966년 1월 19일~1977년 3월 24일, 1980년 1월 14일~1984년 10월 31일). 인도의 첫 여성 총리. 인도 독립후 초대 종리를 지낸 자와할란 네루의 딸
[3] 칼리스탄(Khalistan) : 시크교도들이 자신들이 건설할 독립국가를 부르는 명칭. 현재에도 급진파들 사이에서 분리 독립 주장이 나오고 있다
[4] 펀자브(Punjab) : 인도 북서부에 위치한 주로 파키스탄 국경과 접해있다
[5] 암리차르(Amritsar) : 인도 펀자브주의 도시로 시크교의 성지 황금사원이 유명하다
이렇게 편입된 시크교도들은 힌두교도 중심의 인도 공화국에 편입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1980년에 들어서면서 집권당인 인도 국민회의당은 경제계획 실패, 언론탄압등으로 독점적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디. 이 시점에 일부 시크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인 [3]칼리스탄 건설을 요구하면서 [2]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당 정부를 테러 등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압박했다.
이에 국민회의당 정부는 시크교도의 성지이자 테러의 본거지인 [4]펀자브주의 [5]암리차르의 황금사원에서 시위를 하는 시크교도들을 무력으로 유혈 진압했다. 이후 [2]인디라 간디는 1984년 10월 31일 자신의 경호원인 두 명의 시크교도들에게 암살당했다. 시크교에서는 이 날을 순교자의 날로 기리며 이 2명을 성자로 찬양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여파로 인도 수도 델리 전역에서 사흘간 국민회의당 소속 정치인이 조직적으로 사주한 군중에 의해 시크교도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4,000여 명이 피살되었고, 6만여 명이 집과 재산을 잃었으며 델리의 13개 시크 사원이 불에 타 버렸다.
시크교도들은 대부분이 인도-파키스탄 분단이후 델리로 이주해 온 후 자수성가한 사업가들로서 델리가 도시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집단이었다. 이후 많은 시크들이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독립국 칼리스탄 건국을 지원하는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참조]
- 세계의 도시와 건축 - 델리, 역사성과 신민성이 만나는 곳, 류연택, 이광수외 12,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1] 시크교(Sikhism) : 15세기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영향으로 창시된 종교. 시크교도들은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들에게는 차별을, 무슬림들에게는 박해를 받아왔다
[2] 인디라 간디(Indira Priyadarśinī Gāndhī, 1917년~1984년) : 인도의 제3대총리로 두 차례에 걸쳐 역임(1966년 1월 19일~1977년 3월 24일, 1980년 1월 14일~1984년 10월 31일). 인도의 첫 여성 총리. 인도 독립후 초대 종리를 지낸 자와할란 네루의 딸
[3] 칼리스탄(Khalistan) : 시크교도들이 자신들이 건설할 독립국가를 부르는 명칭. 현재에도 급진파들 사이에서 분리 독립 주장이 나오고 있다
[4] 펀자브(Punjab) : 인도 북서부에 위치한 주로 파키스탄 국경과 접해있다
[5] 암리차르(Amritsar) : 인도 펀자브주의 도시로 시크교의 성지 황금사원이 유명하다
러시아 모스크바 기준 시간으로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4분에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SSR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여 엄청난 방사능이 유출된 사고이다.
이 폭발은 2차대전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400배에 달하는 방사능이 유출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진행중이다.
이 사고로 발전소에서 유출된 방사성 물질이 우크라니아 SSR은 물론 체르노빌 주변국인 벨라루스 SSR, 러시아 SFSR에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초래했다.
사고 직후 당시 실무책임자의 거짓보고와 후에 폭발사고에 대한 소련 정부의 거짓말과 은폐로 피해는 더욱 광범위하여 최악의 사태가 되었다.
체르노빌 사고는 소련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져왔고, 이것은 소련의 붕괴 및 해체에 상당 부분 영향을 끼치게 된다.
* SSR(Soviet Socialist Republic)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SFSR(Soviet Federative Socialist Republic) :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체르노빌(Chernobyl) : 우크라이나 북부의 도시로서 키예프주에 속하며 벨라루스 국경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체르노는 '검은' 빌은 '잎사귀'로 '검은 잎사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폭발은 2차대전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400배에 달하는 방사능이 유출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진행중이다.
이 사고로 발전소에서 유출된 방사성 물질이 우크라니아 SSR은 물론 체르노빌 주변국인 벨라루스 SSR, 러시아 SFSR에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초래했다.
사고 직후 당시 실무책임자의 거짓보고와 후에 폭발사고에 대한 소련 정부의 거짓말과 은폐로 피해는 더욱 광범위하여 최악의 사태가 되었다.
체르노빌 사고는 소련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져왔고, 이것은 소련의 붕괴 및 해체에 상당 부분 영향을 끼치게 된다.
* SSR(Soviet Socialist Republic)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SFSR(Soviet Federative Socialist Republic) :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체르노빌(Chernobyl) : 우크라이나 북부의 도시로서 키예프주에 속하며 벨라루스 국경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체르노는 '검은' 빌은 '잎사귀'로 '검은 잎사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군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다.
경찰은 이 사건을 우발적 사건이라 발표하면서 축소조작하였으나 당시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 중이던 민주화운동가이자 동아일보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은 이러한 왜곡 사실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은폐 조작을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은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거짓 해명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우발적 사건이라 발표하면서 축소조작하였으나 당시 영등포교도소에서 수감 중이던 민주화운동가이자 동아일보 해직 기자였던 이부영은 이러한 왜곡 사실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하여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은폐 조작을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은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거짓 해명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6월 항쟁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6월 29일까지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6월 민주항쟁, 6·10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월 민중항쟁 등으로 불린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에 6월 29일 당시 노태우대통령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이 이루어졌고, 1987년 12월 16일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사회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참고 : 6.10민주항쟁(https://www.610.or.kr)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에 6월 29일 당시 노태우대통령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이 이루어졌고, 1987년 12월 16일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사회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참고 : 6.10민주항쟁(https://www.610.or.kr)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한반도와 국제 사회를 뒤흔든 비극적이고 충격적인 항공기 테러 사건이다.
사건 당시 대한항공 858편은 이라크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와 태국 방콕을 경유하여 대한민국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폭탄이 설치되어, 태국을 떠난 후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했고, 탑승자 115명(승객 104명, 승무원 11명)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를 낳았다.
폭탄은 북한 공작원 [3]김현희와 김승일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들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권을 사용하여 탑승한 뒤, 기내에 폭탄이 숨겨진 라디오와 술병을 남겨놓고 태국 방콕에서 하차했다. 이후 폭탄은 예정된 시간에 폭발하였으며, 기체는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하여 인근 해역에 추락했다.
1987년 12월 1일 바레인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청산가리 성분이 들어간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자살 시도에 실패한 김현희는 재갈이 물린 채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대한민국으로 송환된 뒤 북한 정권의 지시에 따라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며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1987년 12월 직선제 도입으로 [4]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북한은 이를 방해하며 정치적 혼란을 조성하고 대한민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테러를 기획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2]국가안전기획부는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 오후 공작범 김현희를 김포공항으로 압송하고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중계하는 등의 안보 선전을 했는데, 이는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무산과 함께 야권의 대선 패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북한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부인했지만, 김현희의 진술과 사건의 여러 증거들은 북한 정권의 개입을 명백히 드러냈다.
[3]김현희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그녀가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자 북한 정권의 체제 하에서 세뇌당한 점을 감안했으며, 무엇보다도 북한관련 정보를 더 캐내야 하는 차원에서 사면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반공주의 정서가 한층 강화되었으며, 민간 항공 보안 체계의 필요성과 테러 방지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동시에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과 경계가 강화되었고, 북한의 고립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단순한 테러 사건을 넘어 한반도 분단의 현실, 남북 간의 갈등, 그리고 국제 정치적 긴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극적으로 희생된 115명의 생명은 오늘날에도 항공 보안과 평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1] 안다만해(Andaman Sea) : 미얀마의 남쪽,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서쪽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수중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2] 국가안전기획부 : 대한민국 정보기관. 1981년 4월 8일 설립되어 1999년 1월 21일 해산. 중앙정보부의 후신이자 국가정보원의 전신으로, 약칭은 안기부다.
[3] 김현희(1962년 ~ ) : 북한의 전 공작원.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이며 사건 이후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였다. 1997년 12월 28일 사면 이후 자신을 경호했던 전직 안기부 직원과 결혼하였고, 현재 국가정보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
[4] 제13대 대통령 선거 :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불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대선 후보였다. 이른바 1노 3김의 대선.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지지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지만, 결국은 무산되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사건 당시 대한항공 858편은 이라크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와 태국 방콕을 경유하여 대한민국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 비행기는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폭탄이 설치되어, 태국을 떠난 후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했고, 탑승자 115명(승객 104명, 승무원 11명)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를 낳았다.
폭탄은 북한 공작원 [3]김현희와 김승일에 의해 설치되었다. 이들은 일본인으로 위장한 여권을 사용하여 탑승한 뒤, 기내에 폭탄이 숨겨진 라디오와 술병을 남겨놓고 태국 방콕에서 하차했다. 이후 폭탄은 예정된 시간에 폭발하였으며, 기체는 [1]안다만해 상공에서 폭발하여 인근 해역에 추락했다.
1987년 12월 1일 바레인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청산가리 성분이 들어간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자살 시도에 실패한 김현희는 재갈이 물린 채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대한민국으로 송환된 뒤 북한 정권의 지시에 따라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며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중요한 증인이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1987년 12월 직선제 도입으로 [4]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북한은 이를 방해하며 정치적 혼란을 조성하고 대한민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테러를 기획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2]국가안전기획부는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 오후 공작범 김현희를 김포공항으로 압송하고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중계하는 등의 안보 선전을 했는데, 이는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무산과 함께 야권의 대선 패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북한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부인했지만, 김현희의 진술과 사건의 여러 증거들은 북한 정권의 개입을 명백히 드러냈다.
[3]김현희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그녀가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자 북한 정권의 체제 하에서 세뇌당한 점을 감안했으며, 무엇보다도 북한관련 정보를 더 캐내야 하는 차원에서 사면되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반공주의 정서가 한층 강화되었으며, 민간 항공 보안 체계의 필요성과 테러 방지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동시에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비판과 경계가 강화되었고, 북한의 고립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단순한 테러 사건을 넘어 한반도 분단의 현실, 남북 간의 갈등, 그리고 국제 정치적 긴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극적으로 희생된 115명의 생명은 오늘날에도 항공 보안과 평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1] 안다만해(Andaman Sea) : 미얀마의 남쪽,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서쪽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수중 생태계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2] 국가안전기획부 : 대한민국 정보기관. 1981년 4월 8일 설립되어 1999년 1월 21일 해산. 중앙정보부의 후신이자 국가정보원의 전신으로, 약칭은 안기부다.
[3] 김현희(1962년 ~ ) : 북한의 전 공작원.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범인이며 사건 이후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였다. 1997년 12월 28일 사면 이후 자신을 경호했던 전직 안기부 직원과 결혼하였고, 현재 국가정보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
[4] 제13대 대통령 선거 :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불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대선 후보였다. 이른바 1노 3김의 대선.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지지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지만, 결국은 무산되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군의 전차 운반 크레인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태우고 가던 자동차를 덮쳐서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장례식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군집하면서 반 이스라엘 투쟁으로 확산되어 [1]인티파다로 발전했다. 지역적으로도 [2]가자지구에서 [3]서안지구로 확대되어 내전상태가 되었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 알아타르는 시몬 이프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 이프라는 재미로 쏘아 죽였다. 이 후 시몬 이프라는 체포되었지만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리고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15세 전후의 청소년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차지하던 가자 지구와 요르단이 차지하던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세대였다.
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전체를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 [4]오슬로협정으로 인티파다는 끝을 맺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만명의 부상과 1,500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 역시 시민과 군인 270여명이 사망했다.
[1] 인티파다(Intifada) : 봉기, 반란, 각성 등을 뜻하는 아랍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이스라엘만 국가로 인정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 인티파다는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의미한다
[2]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3]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에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상호인준을 합의하였다
특히 이 투쟁을 더 확대시킨 것은 같은 달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소녀 살해 사건이었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녀 인티사르 알아타르가 학교에서 근처에 사는 유대인 정착민 시몬 이프라가 쏜 총에 살해된 것이다. 인티사르 알아타르는 시몬 이프라를 공격하지도 않았고 그저 놀고만 있었는데도 시몬 이프라는 재미로 쏘아 죽였다. 이 후 시몬 이프라는 체포되었지만 이스라엘 법원이 그를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사법의 불공정성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그리고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는 소년과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인티파다가 쉽게 불이 붙고, 확대되었던 것에는 이 운동의 주축 연령대에 이유가 있다. 이 시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15세 전후의 청소년층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가 차지하던 가자 지구와 요르단이 차지하던 서안 지구를 점령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 줄곧 이스라엘의 탄압에 시달려 왔던 세대였다.
이들의 투쟁은 점령지 전체를 자극하여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전체를 투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 [4]오슬로협정으로 인티파다는 끝을 맺었다.
이 기간동안 팔레스타인은 수만명의 부상과 1,500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 역시 시민과 군인 270여명이 사망했다.
[1] 인티파다(Intifada) : 봉기, 반란, 각성 등을 뜻하는 아랍어.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이 이스라엘만 국가로 인정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통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것. 인티파다는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의미한다
[2] 가자지구(Gaza Strip) :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의 통치 지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접해 있다
[3] 서안지구(West Bank)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 가자 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 국가의 영토. 18%인 A지역은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22%인 B지역은 치안을 제외한 파레스타인 자치지역, 60%인 C지역은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다
[4] 오슬로협정(Oslo Accords) : 1993년 9월에 팔레스타인 자치에 대한 원칙적인 합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상호인준을 합의하였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전쟁은 두나라간의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독립을 둘러싸고 발생한 분쟁으로서 초기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내전 형태로 발발하였으나 이후 양국의 전면전으로 발전한 분쟁이다.
1988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을 둘러싸고 러시아혁명 이후 잠잠했던 지역간 민족간 갈등이 표출되었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1923년 이래 자치주로 지정되어 왔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한창 불어 닥치던 80년대 후반에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살아온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키거나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인정해줄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로서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의 영역이라고 반박하며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1988년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자유화 물결에 편승해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합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있었고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통합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는 반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 운동을 부추기는 형태가 되어 대대적인 반아르메니아 운동과 나고르노ㆍ카라바흐의 합병 반대 시위를 초래하였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양 민족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양국 간의 전투는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이런 가운데 양국 간에는 1993년 7월초 전투로 분쟁의 양상은 다시 국제전화(이란, 터키, 러시아등 개입시사)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평화회담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고 동년 9월 25일 양국정상은 회담을 갖고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1994년 5월 끝이 보이지 않던 양국의 전쟁은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 :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1918년 4월부터 5월까지 현재 캅카스(Caucasus)산맥 일대에 존재했던 연맹국가. 1918년 5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할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아르차흐 공화국(Republic of Artsakh),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 :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casus)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 아르메니아)/한켄디(Khankendi, 아제르바이잔)이다.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공화국(Nagorno-Karabakh)'이였으나 2017년 2월 20일에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거쳐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다수의 지도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혹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영토 분쟁지로 표시된다.
*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 '재건', '개혁'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실시한 개혁정책. 고르바초프는 국내측면에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고, 대외측면에서는 긴장 완화와 군축정책을 실시하여 동구권의 체제 변혁과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냈다.
1988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을 둘러싸고 러시아혁명 이후 잠잠했던 지역간 민족간 갈등이 표출되었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1923년 이래 자치주로 지정되어 왔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한창 불어 닥치던 80년대 후반에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살아온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키거나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인정해줄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부로서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의 영역이라고 반박하며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1988년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의 페레스트로이카 자유화 물결에 편승해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합병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있었고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와 통합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는 반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 운동을 부추기는 형태가 되어 대대적인 반아르메니아 운동과 나고르노ㆍ카라바흐의 합병 반대 시위를 초래하였다.
나고르노ㆍ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양 민족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양국 간의 전투는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이런 가운데 양국 간에는 1993년 7월초 전투로 분쟁의 양상은 다시 국제전화(이란, 터키, 러시아등 개입시사)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이에 아르메니아는 평화회담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고 동년 9월 25일 양국정상은 회담을 갖고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1994년 5월 끝이 보이지 않던 양국의 전쟁은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 :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1918년 4월부터 5월까지 현재 캅카스(Caucasus)산맥 일대에 존재했던 연맹국가. 1918년 5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할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아르차흐 공화국(Republic of Artsakh), 나고르노ㆍ카라바흐(Nagorno-Karabakh)지역 :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캅카스(Caucasus)지역의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 아르메니아)/한켄디(Khankendi, 아제르바이잔)이다. 1991년 독립 선언 이후 대내외적인 공식 명칭은 '나고르노ㆍ카라바흐 공화국(Nagorno-Karabakh)'이였으나 2017년 2월 20일에 헌법개정 국민투표를 거쳐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대다수의 지도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혹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영토 분쟁지로 표시된다.
*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 '재건', '개혁'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실시한 개혁정책. 고르바초프는 국내측면에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고, 대외측면에서는 긴장 완화와 군축정책을 실시하여 동구권의 체제 변혁과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냈다.
1988년 하계 올림픽(1988 Summer Olympics, Games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의 16일 동안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2번째 하계 올림픽이며 12년 만에 IOC 회원국 대부분인 160개국이 참가한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2번째 하계 올림픽이며 12년 만에 IOC 회원국 대부분인 160개국이 참가한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다.
힐스버러 참사는 잉글랜드 셰필드의 힐스버러 스타디움(Hillsborough Stadium)에서 발생한 대형 군중 압사 사고로 총 97명이 사망하고 766명이 부상을 입은 최악의 축구 경기 참사다. 이 참사는 [1]FA컵 준결승 경기인 리버풀 FC와 노팅엄 포레스트 FC의 경기 도중 발생했다.
당시 힐스버러 스타디움은 리그가 아닌 중립 구장에서 열린 경기였으며, 양 팀의 팬들이 각각 다른 스탠드에 배정되었다. 리버풀 팬들이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곳의 출입문은 회전식이라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었다. 경찰은 빠르게 입장시키기 위해 출구로 사용하던 출입문(게이트 C)을 개방하였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인파가 한꺼번에 좁은 입구와 터널을 통해 밀려 들어갔고, 중앙 앞쪽에 위치한 스탠드에서 극심한 압박이 발생했다. 앞쪽 구역의 관중들은 난간과 철제 울타리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고 구조나 퇴장도 불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관중이 압사하거나 압박으로 인한 질식사로 숨졌다.
경기 시작 6분 만에 상황이 심각했지, 경기장 내부에서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경찰과 경기 관계자들은 경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경기 중단과 구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참사가 이미 발생한 이후였다.
사고 직후 영국 언론은 리버풀 팬들의 난동과 술에 취한 행동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보도했으며, 특히 더 선(The Sun)의 보도는 "팬들이 죽은 사람의 지갑을 훔쳤다"는 등의 허위 주장으로 리버풀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는 리버풀 지역에서 수십 년간 더 선 신문이 불매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와 독립적 진상조사 보고서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참사의 주된 원인은 경찰과 경기 운영 측의 잘못된 군중 관리, 비효율적인 경기장 구조, 늦은 응급 대응이었다. 팬들은 오히려 참사의 피해자였으며, 초동 대처의 실패와 경찰의 은폐 시도가 추가 피해를 키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2016년 4월 26일 법원 배심원단이 "사망자 97명은 경찰의 과실과 조직적 실패에 의해 불법적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판결하였다. 이후 경찰과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어졌지만 많은 이들이 실질적인 처벌을 피하면서 피해자 가족과 시민사회는 여전히 정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 힐스버러 추모비를 세워 구단 차원에서 매년 4월 15일 추모제를 열고있다.
힐스버러 참사는 영국 내 스포츠 경기장 안전 기준과 군중 통제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기장 좌석화 정책(standing 구역 폐지)과 안전 설계 기준의 개정을 이끌어냈고, 이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전체 구조와 팬 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 FA컵(Football Association Challenge Cup) : 잉글랜드 축구 협회 챌리지 컵.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속한 모든 구단들이 우승팀을 가리는 대회
당시 힐스버러 스타디움은 리그가 아닌 중립 구장에서 열린 경기였으며, 양 팀의 팬들이 각각 다른 스탠드에 배정되었다. 리버풀 팬들이 들어가기로 되어 있던 곳의 출입문은 회전식이라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기 힘들었다. 경찰은 빠르게 입장시키기 위해 출구로 사용하던 출입문(게이트 C)을 개방하였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인파가 한꺼번에 좁은 입구와 터널을 통해 밀려 들어갔고, 중앙 앞쪽에 위치한 스탠드에서 극심한 압박이 발생했다. 앞쪽 구역의 관중들은 난간과 철제 울타리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고 구조나 퇴장도 불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관중이 압사하거나 압박으로 인한 질식사로 숨졌다.
경기 시작 6분 만에 상황이 심각했지, 경기장 내부에서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경찰과 경기 관계자들은 경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경기 중단과 구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참사가 이미 발생한 이후였다.
사고 직후 영국 언론은 리버풀 팬들의 난동과 술에 취한 행동이 사고의 원인이라고 보도했으며, 특히 더 선(The Sun)의 보도는 "팬들이 죽은 사람의 지갑을 훔쳤다"는 등의 허위 주장으로 리버풀 시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는 리버풀 지역에서 수십 년간 더 선 신문이 불매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와 독립적 진상조사 보고서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참사의 주된 원인은 경찰과 경기 운영 측의 잘못된 군중 관리, 비효율적인 경기장 구조, 늦은 응급 대응이었다. 팬들은 오히려 참사의 피해자였으며, 초동 대처의 실패와 경찰의 은폐 시도가 추가 피해를 키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2016년 4월 26일 법원 배심원단이 "사망자 97명은 경찰의 과실과 조직적 실패에 의해 불법적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판결하였다. 이후 경찰과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어졌지만 많은 이들이 실질적인 처벌을 피하면서 피해자 가족과 시민사회는 여전히 정의 실현을 요구하고 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 힐스버러 추모비를 세워 구단 차원에서 매년 4월 15일 추모제를 열고있다.
힐스버러 참사는 영국 내 스포츠 경기장 안전 기준과 군중 통제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경기장 좌석화 정책(standing 구역 폐지)과 안전 설계 기준의 개정을 이끌어냈고, 이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전체 구조와 팬 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 FA컵(Football Association Challenge Cup) : 잉글랜드 축구 협회 챌리지 컵. 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속한 모든 구단들이 우승팀을 가리는 대회
천안문 민주화운동은 1989년 6월 3일부터 6월 4일까지 중국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베이징 천안문에 운집한 학생과 지식인은 물로 이들을 돕던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유혈 사건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래 가장 대규모로 민주화를 향한 시민사회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운동에 참여한 인민들은 개혁개방 이후 심각한 관료 부패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비판하며 정치 민주화를 요구했다. 5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6월 3일 밤, 덩샤오핑의 중국공산당은 군대를 동원하여 천안문 내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인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때 발생한 사망자는 약 2,500으로 발표되었다.
강제 진압후 6월4일에 중국공산당은 시위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협상하여 참여한 학생과 지식인들은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이 약속을 저버렸고, 이후에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배되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래 가장 대규모로 민주화를 향한 시민사회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운동에 참여한 인민들은 개혁개방 이후 심각한 관료 부패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비판하며 정치 민주화를 요구했다. 5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6월 3일 밤, 덩샤오핑의 중국공산당은 군대를 동원하여 천안문 내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인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때 발생한 사망자는 약 2,500으로 발표되었다.
강제 진압후 6월4일에 중국공산당은 시위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협상하여 참여한 학생과 지식인들은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이 약속을 저버렸고, 이후에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배되어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1]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비폭력 혁명으로 공산당 정권이 무너졌다. 벨벳 혁명은 중앙유럽 민주화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벨벳혁명은 체코를 비롯, 공산통치 종식과 자유화를 요구하는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 시위로 정권 교체를 이뤄낸 무혈혁명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68년 소련군에 점령당하며 공산화되었다. 프라하의 봄은 좌절되었으며 이때 권력을 장악한 [3] 구스타프 후삭의 감시와 통제가 지속됐다.
소련군의 프라하침공을 항의하는 시위를 계기로 반체제운동이 전개되었고 [4] 바츨라프광장으로 평화롭게 행진하던 학생들을 전경이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당시 시민운동을 이끌던 [2] 바츨라프 하벨은 긴급하게 '차터 77'이라는 회의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탄생한 시민사회연대체 '시민포럼(OF)'은 슬로바키아의 '대중폭력반대(VPN)'와 함께 비폭력을 표방하며 대규모 집회, 총파업, 가두행진 등 반체제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이른바 벨벳혁명을 통해 1989년 12월 29일 공산주의 연방 의회는 바츨라프 하벨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체코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수십만의 시민들이 열쇠를 흔들며 사회주의의 종말을 고했던 드라마틱한 퍼포먼스는 세계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1]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
[2]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1936년~2011년) : 체코의 극작가. 19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이끌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3] 구스타프 후삭(Gustav Husak, 1913년~1991년)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1975~1989), 공산당 서기장(1969~1987)을 지닌 인물
[4] 바츨라프광장(Wenceslas Square) : 현 체코의 프라하 신시가지에 있는 광장
벨벳혁명은 체코를 비롯, 공산통치 종식과 자유화를 요구하는 피를 흘리지 않고 평화적 시위로 정권 교체를 이뤄낸 무혈혁명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68년 소련군에 점령당하며 공산화되었다. 프라하의 봄은 좌절되었으며 이때 권력을 장악한 [3] 구스타프 후삭의 감시와 통제가 지속됐다.
소련군의 프라하침공을 항의하는 시위를 계기로 반체제운동이 전개되었고 [4] 바츨라프광장으로 평화롭게 행진하던 학생들을 전경이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당시 시민운동을 이끌던 [2] 바츨라프 하벨은 긴급하게 '차터 77'이라는 회의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탄생한 시민사회연대체 '시민포럼(OF)'은 슬로바키아의 '대중폭력반대(VPN)'와 함께 비폭력을 표방하며 대규모 집회, 총파업, 가두행진 등 반체제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이른바 벨벳혁명을 통해 1989년 12월 29일 공산주의 연방 의회는 바츨라프 하벨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체코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수십만의 시민들이 열쇠를 흔들며 사회주의의 종말을 고했던 드라마틱한 퍼포먼스는 세계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1] 체코슬로바키아는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
[2]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1936년~2011년) : 체코의 극작가. 19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를 이끌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3] 구스타프 후삭(Gustav Husak, 1913년~1991년)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1975~1989), 공산당 서기장(1969~1987)을 지닌 인물
[4] 바츨라프광장(Wenceslas Square) : 현 체코의 프라하 신시가지에 있는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