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일본중국사건기간 : 1885년 4월 18일, 조회수 : 445, 등록일 : 2021-01-26
조선의 갑신정변을 진압한 청군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고자 청나라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1885년(고종 22)에 체결한 조약이다.
조선내 양국 주둔군 철수가 주 내용이며 다음과 같다.
1. 청과 일본 양 군 모두 조선에서 즉시 철수를 시작해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한다.
2. 청과 일본 양국은 조선에 대해 군사 고문을 파견하지 않는다. 조선은 청일 양국이 아닌 제3국에서 1명 이상 수 명의 군인을 초청한다.
3.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
톈진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충돌을 막을 수 있었으나 조약 내용이 애매했기 때문에(제3조) 양국은 10년 후 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실제로 제3조에 의거하여 1894년 동학 농민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이 파병되자 일본 역시 군대를 보냈으며, 이는 청일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 이홍장(1823~1901) : 중국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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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미국 백인 정착민과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사이의 정복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말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청나라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무기력하게 패하고 태평천국운동을 겪은 뒤 국제사회의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이 전쟁은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며 청불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의 하나로서 베트남 [3]응우옌 왕조의 카톨릭 탄압은 프랑스에게 베트남 침공 명분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는 베트남 공략을 적극화하여 1874년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내용은 청나라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국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청나라는 거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베트남에 들어와 있던 [1]흑기군은 프랑스 군대를 공격했으며 프랑스는 1883년에 이 세력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하노이를 점령했다.
1884년 8월 프랑스는 베트남으로부터 북상하여 타이완(대만)을 공격하고 청나라 [2]복건성의 함대를 대파했다. 청나라는 프랑스의 도발행위에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해전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육전에서는 청나라가 분전했지만 유리하지 못하였다.
전세가 청나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실권을 쥐고 있던 [4]서태후는 1885년 6월 22일 톈진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함으로써 청나라의 종주권은 상실되었다. 그리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전쟁으로로 인해 수천년동안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는 시초가 된다.
[1] 흑기군 : 유영복이 거느린 사병조직. 중국의 윈난성(운남성)과 베트남 사이의 국경지대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2] 푸젠성(복건성) : 중국 남동부의 성. 대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중국의 성
* 청나라 말기의 해군 :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 광동함대
[3] 응우옌 왕조(Nguyen Dynasty) :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함풍제의 후궁이자 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1876년 벨기에 국왕 [1]레오폴 2세는 미국의 유명한 탐험가 [2]헨리 모턴 스탠리에게 충분한 재정적 지원을 해주며 콩고 탐험을 의뢰했다. 헨리 스탠리의 탐험 결과 벨기에가 콩고 지역에 진출하게 되자, 아프리카 전역에 산재한 풍부한 지하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유럽 주요 국가들은 너나할것 없이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발벗고 나섰다.
당시 영국은 이집트 카이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및 인도 캘커타를 잇는 이른바 3C정책과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추구했다. 프랑스는 모로코, 알제리를 거점으로 해서 동쪽으로 점령해 나가는 아프리카 횡단정책을 추구했다. 독일은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를 잇는 3B정책으로 중부유럽과 발칸 지역을 넘어서서 서아시아와 아프리카로까지 세력범위를 확장시키려 했다. 여기에 벨기에, 포르투갈도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나섰다.
이리하여 중동에서는 독일의 3B정책과 영국의 3C정책이 대립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의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횡단정책이 부딪쳤다. 또 모로코에서는 독일과 프랑스가 부딪쳤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졌다.
벨기에의 [1]레오폴드 2세와 독일의 [3]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를 주도하여 콩고분지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분할 문제를 두고 유럽 각국은 협의를 하였다. 이 회의에서 콩고는 자유무역국(중립국)으로 선포하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개인자격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벨기에는 콩고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할 수 있었다.
유럽열강들의 식민지화로 1914년 무렵에는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아프리카 모든 지역이 유럽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이렇게 유럽열강들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원주민들의 문화적, 언어적 경계를 무시하고 만들어진 일직선에 가까운 국경선은 130년 지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1] 레오폴 2세(Leopold II of Belgium, 1835년~1909년) : 벨기에왕국의 2대 국왕(재외 1865년~1909년). 아프리카 콩고 식민지를 사유지처럼 사용하면서 수천만 명의 주민을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고 집단살해하였다
[2] 헨리 모턴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년~1904년) : 영국의 탐험가이자 언론인. 아프리카 탐험과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구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1877년부터 1884년까지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의 후원을 얻어 콩고 지방을 탐험하였다
[3]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년~1898년) : 프로이센 수상(재임 : 1862~1890년). 통일독일제국 수상(재임 :1871년~1890년)
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영국이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면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의 일환인 부동항 획득을 위하여 더 좋은 항만 조건을 지닌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이다.
영국은 거문도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고 불렀다.
청나라의 중재로 러시아, 영국 상호 조선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을 함으로써 영국 함대는 1887년(고종 24년)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주권국인 조선의 양해 없이 점령이 감행된 점과 처리 과정에서도 조선 정부를 배제하고 열강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교섭이 진행된 점에서, 조선의 허약한 국제적 지위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
거문도에는 당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영국해군수병들의 묘가 아직 3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 거문도 : 전라남도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섬으로서 고도·동도·서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전략적 경쟁을 뜻한다. 보통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러시아-페르시아 굴리스탄 조약)부터 1907년(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