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건기간 : 1976년 3월 1일, 조회수 : 268, 등록일 : 2020-12-22
1976년 3월 1일 700여명의 신자들이 모인 명동성당에서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김승훈, 함석헌, 함세웅, 안병무 등 각계 인사들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이 발표된 사건을 3ㆍ1 민주구국선언사건 또는 3ㆍ1 명동사건이라고 한다.
선언문의 내용은 긴급조치 철폐, 민주인사들과 학생 석방, 언론·출판·집회 등의 자유, 의회정치 회복, 사법권의 독립, 민족통일 등을 요구하는 선언으로 유신체제하의 반정부 선언문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 선언사건을 수사하여 관련인사 20명의 명단을 발표하고 그 중 김대중 등 11명을 대통령긴급조치9호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윤보선·함석헌 등 9명을 불구속입건하였다.
해당되는 데이터가 없습니다.
해당되는 데이터가 없습니다.
중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사회·정치적 운동으로, [1]마오쩌둥이 주도하여 공산주의 이념을 강화하고 반혁명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1]마오쩌둥은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 혁명 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가치와 권력 구조를 타파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주로 청년들로 구성된 [2]홍위병은 전통 문화와 지식인을 공격하며 운동의 중심에 섰다. 전통 문화의 파괴, 고위 관료 숙청, 지식인의 박해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혼란이 발생했으며 정치적 숙청과 내부 권력 투쟁이 격화되며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기도 했다.
경제와 교육 시스템의 붕괴,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 문화유산의 대규모 파괴 등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문화대혁명은 [1]마오쩌둥의 사망과 [3]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인해 종결되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정치적·사회적 구조에 심각한 혼란과 상처를 남겼으며, 현대 중국 역사에서 실패한 정치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건은 중국 내 전통 문화와 지식층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렸고, 이후 중국 정부는 실용주의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이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2] 홍위병(紅衛兵, Red Guards) : 중국 문화대혁명 초기, 마오쩌둥의 지지를 받아 결성된 젊은 학생(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중심의 혁명 집단. 이들은 마오쩌둥 사상을 충실히 따르며,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하거나 "반혁명적"으로 간주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홍위병의 폭력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자, 1968년 마오쩌둥은 군대를 동원해 이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해산을 명령했다 [3]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 Deng Xiaoping,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지도자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는 영어와 아프리카 부족어로 교육하던 학교에 아프리칸스어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억압의 상징이자 백인들의 권위적인 언어였던 아프리칸스어는 남아프리카의 백인들 말고는 아무도 쓰지 않는 언어였다.
요하네스버그 소웨토지역에 있는 올랜도웨스트 학교의 흑인 학생들은 아프리칸스어 수업을 보이콧하기로 하고 등교 거부 운동을 펼쳤다. 등교 거부는 인근 학교로도 퍼져 나갔고 6월 16일에 올랜도웨스트를 선두로 한 1만여 명의 학생들은 항의하기 위해 춤과 노래로 이어지는 평화 행진을 시작했다.
이러한 평화행진에 경찰은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과 실탄 사격을 가했다. 방금 전까지 평화로웠던 거리는 비명과 신음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시위 도중 13살 소년 헥터 피터슨은 경찰이 무차별 발포한 기관총에 가슴을 맞고 사망하였다.
헥터 피터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소웨토의 흑인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요하네스버그의 백인 대학생들까지 정부에 항의하는 행진을 벌였다. 당시 존 포르스테르 수상은 소요를 용납하지 않겠다며 소웨토에 경찰력을 수천 명이나 추가로 투입하였다. 경찰은 이 사태로 176명이 죽고 1,139명이 부상했다고 집계했지만 실제로는 600~7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4,000명 이상 부상당했다.
소웨토 항쟁을 경험한 학생들은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담하여 1980년대에 요하네스버그의 정유 공장이 폭파하는 테러와 대중들의 파업, 시위등으로 격화되자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하여 더 잔혹하게 탄압했지만 계속되는 흑인 운동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남아프리카공화국 클레르크 대통령은 최악의 상태를 막기 위해 28년이나 반역죄로 구금했던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를 1990년에 석방하였다. 넬슨 만델라는 협상 끝에 마침내 1994년 4월 민주적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치러졌다. 그리고 선거 결과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만델라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수백 년에 걸친 백인들의 지배와 최악의 인종 차별 정책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는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출처 : 위키백과, 위키나무]
* 아프리칸스어(Afrikaans) :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나미비아에서 주로 쓰이는 서게르만어군 언어
* 소웨토(Soweto) : 남아프리카 공화국 가우텡(Gauteng)주의 요하네스버그내에 있는 지역. 아파르트헤이트의 결과로 생긴 흑인 거주지역
*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권에 의하여 1948년에 법률로 공식화된 인종분리 즉,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정책. 아프리칸스어로 '분리'라는 뜻으로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수 백인과 다수 유색인종의 관계를 지배했던 정책
* 존 포르테르(John Vorster, 1915년~1983년) : 남아프리카 공화의 정치가. 1966년~1978년 남아프리카 총리
*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N, 1918년~2013년) :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선거 실시 후 당선된 최초의 흑인 대통령.임기 1994년~1999년. 1993년 노벨평화상 수상
*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Frederik Willem de Klerk, 1936년~)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인.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넬슨 만델라와 대타협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끝낸 인물
*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당. 원래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저항하기 위한 흑인 저항운동 단체였으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폐지되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민주화되자 합법정당이 되었다
엔테베 작전은 1976년 7월 4일, 이스라엘이 우간다의 엔테베 국제공항에서 인질을 구출한 군사 작전이다. 이 작전은 "썬더볼트 작전(Operation Thunderbolt)"으로도 불리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인질 구출 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76년 6월 27일, [1]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과 독일 테러 조직인 [3]혁명세포 소속 테러리스트 4명이 에어 프랑스 139편(텔아비브 → 아테네 → 파리)항공기를 납치했다. 비행기는 아테네를 출발 직후에 납치되었으며, 우간다의 엔테베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우간다 군대의 지원을 받아 엔테베공항에서 [2]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인원 3명이 추가 합류했다. 엔테베에서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이 아닌 258명의 승객은 풀어주었고, 나머지 인질들은 공항 터미널에 감금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 프랑스, 독일, 케냐 등 여러 나라에 수감된 팔레스타인 및 기타 테러 조직원 52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만약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7월 1일 인질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협상을 진행하는 척하며 비밀리에 군사 작전을 준비했다. 이스라엘군은 엔테베 공항의 구조와 테러리스트의 위치를 정밀 분석하고, 약 4,000km 떨어진 우간다까지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스라엘은 7월 3일 23시에 특수부대 정예군 100여명을 C-130 허큘리스 수송기 4대를 이용해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다. 협상과정에서 7월 4일로 미뤄져 있어 전격적으로 작전이 시작됐다. 테러리스트 7명 전원 사살하고 우간다 군 45여명 사망, 소련제 전투기 11대가 파괴되었다.
작전은 불과 90분 만에 종료되었으며, 에어프랑스 승무원을 포함한 총 106명 중 4명을 제외하고 구출했다. 인질중 3명은 이스라엘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했고, 건강 상태가 좋지않은 74세의 인질인 도라블록(Dora Bloch)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당시 우간다 대통령 [2]이디 아민은 우간다의 피해를 트집잡아 살해되었다.
이스라엘군 사망자는 작전 지휘관 [4]요나탄 네타냐후 1명이었다.
엔테베 작전은 이스라엘 군사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성공적인 인질 구출 작전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 작전은 영화와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으며, 특히 "Raid on Entebbe"(1977), "7 Days in Entebbe"(2018) 등이 유명하다.
[1]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PFLP) : 팔레스타인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정치조직이자 무장단체로, 1967년 에 설립되었다. 현재,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무장 활동과 정치적 활동을 지속하며, 하마스 및 기타 저항 조직과 협력 [2]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Idi Amin Dada Oumee, 1925년 ~ 2003년 8월 16일) : 우간다의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197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여 3대 대통령에 취임(재임, 1971년 1월 25일 ~ 1979년 4월 11일). 악명이 높은 독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3] 혁명세포(Revolutionäre Zellen, RZ) : 1973년에서 1995년까지 서독에서 활동한 테러 조직 [4] 요나탄 네타냐후(Yonatan Netanyahu, 1946년 3월 13일 ~ 1976년 7월 4일) : 이스라엘 군인.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의 형 [5]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1949년 10월 21일 ~ ) : 이스라엘의 제13대 총리(임기 : 1996년 6월 18일~1999년 7월 6일), 제17대 총리(2022년 12월 29일~)
판문점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맺었던 유엔·북한이 공동 경비지역(JSA)이라 명칭을 정하고 함께 관리한 장소이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 있는 25년이나 된 미루나무는 높이가 15m였기 때문에 서로의 감시에 있어 문제가 되었다. 유엔군은 북한측 초소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유엔사 경비병 4명이 미루나무를 베려고 했다. 북한측 경비병은 "나무를 자르지 말고 그대로 두고 가시오 아니면 응징하겠소" 이렇게 위협적으로 말했지만 유엔군은 말을 듣지 않고 가지치기를 계속 강행했고 북한군 책임자 박철은 "죽여"라고 소리치며 북한군들이 달려들어 도끼로 유엔 군인들을 내리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미군 2명 사망을 포함하여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미군 사병 4명 등 총 9명이 부상당했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판문점은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그동안 군사분계선 남쪽에 있었던 북한군 4개초소가 철거되었고, 북한군이 통로로 사용하던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지금까지 통행이 차단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유일하게 남북한이 공존하던 판문점에는 그 후 회의장 건물 구역에 너비 50cm, 높이 5cm의 시멘트포장 경계선이 만들어졌고, 그밖의 부분은 가로 세로 10cm, 높이 1m의 시멘트 기둥이 10m 간격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휴전선이 다시 그어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