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상하이 사변(January 28 incident)
일본
중국
사건기간 : 1932년 1월 28일~1932년 5월 5일, 조회수 : 507, 등록일 : 2020-11-22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며 만주 일대를 점령하자, 그러나 일본군은 서양열강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조계지를 가지고 있는 상하이 지역에 눈독을 들였다. 당시 상하이는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이 조계지를 설치하고 막대한 양의 자본을 투자한 곳이었다.
1월 18일에 일본인 승려 일행이 상하이 삼우실업사(三友實業社)근처에서 중국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그중 1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다(일본이 고용한 중국인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월 20일 이를 구실로 일본인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는 삼우실업사 공장을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중국 경찰과 일본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일본은 상하이 시 당국에 일본인 살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와 가해자 처벌,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 중국 측은 결국 이튿날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중국 측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즉각 군사적 공격을 시작했다.
1월 28일 상하이 조계(租界) 경비를 담당하던 일본의 해군육전대와 중국의 19로군(十九路軍) 사이에 전투가 발발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상하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은 3만여 19로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고, 영국과 미국 총영사의 중재로 일시 정전 협약이 성립했다.
중국은 국제 연맹에 일본의 침략을 제소했다. 그러나 일본은 2월 5일 육해군을 포함해 총 1만 7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전투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잘 방어해오던 중국 19로군운 갑자기 철수하였다.
3월 하순부터 중일 양국 및 중국에 많은 이권을 갖고 있던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4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정전 회담이 열렸다. 결국 5월 5일 국제 연맹의 협정안 채택을 거쳐 정전 협정이 성립했다. 일본군은 7월 17일 상하이에서 철수했다.
19로군의 철수로 인해 상하이는 자국의 군대를 상주시키지 못하는 지역이 되었다
[참조]
- 국사편찬위원회-우리역사넷
- 위키백과
* 조계(租界, concessions in China): 청나라에 있었던 외국인이 행정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한 조차지
1월 18일에 일본인 승려 일행이 상하이 삼우실업사(三友實業社)근처에서 중국인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그중 1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다(일본이 고용한 중국인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월 20일 이를 구실로 일본인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는 삼우실업사 공장을 불태웠다. 이 과정에서 중국 경찰과 일본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일본은 상하이 시 당국에 일본인 살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와 가해자 처벌,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 중국 측은 결국 이튿날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중국 측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즉각 군사적 공격을 시작했다.
1월 28일 상하이 조계(租界) 경비를 담당하던 일본의 해군육전대와 중국의 19로군(十九路軍) 사이에 전투가 발발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상하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은 3만여 19로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고, 영국과 미국 총영사의 중재로 일시 정전 협약이 성립했다.
중국은 국제 연맹에 일본의 침략을 제소했다. 그러나 일본은 2월 5일 육해군을 포함해 총 1만 7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전투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잘 방어해오던 중국 19로군운 갑자기 철수하였다.
3월 하순부터 중일 양국 및 중국에 많은 이권을 갖고 있던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4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정전 회담이 열렸다. 결국 5월 5일 국제 연맹의 협정안 채택을 거쳐 정전 협정이 성립했다. 일본군은 7월 17일 상하이에서 철수했다.
19로군의 철수로 인해 상하이는 자국의 군대를 상주시키지 못하는 지역이 되었다
[참조]
- 국사편찬위원회-우리역사넷
- 위키백과
* 조계(租界, concessions in China): 청나라에 있었던 외국인이 행정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한 조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