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滿洲侵略, 九一八事變, Mukden Incident)
일본
중국
사건기간 : 1931년 9월 18일, 조회수 : 225, 등록일 : 2020-11-22
만주사변은 일본이 중국 동북지역인 만주를 무력으로 점령하기 위해 조작한 군사적 충돌 사건으로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전초가 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 [10]관동군이 스스로 철도 폭파 사건을 일으킨 후 이를 구실로 중국군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으며 국제 질서를 교란시킨 침략행위로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 9·18 사변으로도 불린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요동반도의 조차지와 남만주 철도에 대한 이권을 확보하였고 [10]관동군이라는 군사력을 해당 지역에 주둔시켜 만주의 정치 및 경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내에서 만주의 자원을 완전히 확보하고 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친일 정권을 수립하려는 침략적 여론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밤에 일본 관동군은 중국군이 남만주 철도의 [1]류탸오후 구간을 폭파했다는 구실을 내세워 [6]장쉐량이 이끄는 중국 [4]동북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폭파는 일본군 스스로가 저지른 자작극이었다. 이 작전은 일본군 내부에서 독단적 행동으로 이뤄졌지만 일본 정부와 본국 군부는 이를 묵인하거나 추인함으로써 전면 침략을 사실상 승인하였다.
[6]장쉐량의 동북군은 전열이 정비되지 못하고 사기가 낮았으며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고 있었던 [3]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철군하였다. 또한 무력 충돌 대신 국제연맹이나 외교적 해결을 통해 일본의 부당함을 알리고 만주의 주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관동군은 랴오닝성의 중심 도시인 선양을 거의 무저항 상태로 점령하였고 이어서 장춘, 하얼빈, 길림 등 만주 전역으로 군을 확대 투입하였다. 그리하여 불과 수 개월 만에 만주 전역이 일본군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1932년 3월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7]푸이를 대표로 내세워 [8]만주국을 수립하고 이를 독립국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일본의 괴뢰정권에 지나지 않았으며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연맹은 만주사변을 조사하기 위해 [9]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1933년 보고서를 통해 일본의 무력 점령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만주국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 사건은 국제사회가 일본의 군사행동을 억제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로 훗날 독일, 이탈리아 등의 파시스트 세력이 유사한 방식으로 국제 규범을 무력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만주사변은 단기간의 군사작전으로 끝났으나 그 결과는 심각하였다. 일본은 만주를 병합함으로써 자원의 확보와 대륙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이 자작극을 일으켜 무력을 사용하고 영토를 침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군사 대응을 하지 않은 점은 많은 국민과 정치 세력으로부터 비겁함과 무능함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6]장쉐량의 [4]동북군이 전투 없이 철수한 사건은 국가적 치욕으로 받아들여졌고 대일 투쟁을 외면한 채 공산당 토벌에만 집중하는 정책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 사회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고 국민적 분노와 압력은 제2차 국공합작의 계기로 이어져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만주사변은 1930년대 국제질서를 위협한 첫 번째 본격적인 침략전쟁이자 동아시아 전체를 장기적인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인 전환점이었다.
[1] 류타오후 :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북쪽 교외에 위치한 지역. 오늘날의 행정구역상으로 선양시 위퉁구 또는 다둥구 부근에 해당하며 철도 교통의 요충지이자 사건 기념비와 박물관이 있는 역사적 유적지로 보존되어 있다
[2] 류탸오후 사건 :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으로 펑톈 북동쪽 류타오후 부근을 지나는 만철 선로에 폭약을 가설해 폭파한 뒤 중국군의 소행으로 가장하고 이를 명분으로 중국군을 기습 공격한 사건
[3]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1975년 4월 5일) : 장개석.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인. 중화민국 국민당 주석(1943년 8월 1일-1948년 5월 20일). 중화민국의 1·2·3·4·5대 총통(임기, 1950년 3월 1일-1975년 4월 5일)
[4] 동북군 : 동북변방군. 1920년대에 만주에 주둔하던 중화민국 정부의 군대이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 성립된 북양군벌의 한 파벌
[6] 장쉐량(張學良, 1901년 6월 4일~2001년 10월 14일) : 한자음 장학량. 장쭤린(장작림)의 아들로 부친사후 동북군을 물려받은 실질적인 지휘자. 장제스를 납치한 시안사건으로 유명하다. 100세로 장수
[7] 푸이(溥儀, 1906년 2월 7일 ~ 1967년 10월 17일) : 청나라 제12대 황제인 선통제(재위, 1908년 12월 2일 ~ 1912년 2월 12일, 복위, 1917년 7월 1일 ~ 1917년 7월 12일), 만주국 초대 황제이자 유일한 황제(재위, 1934년 3월 1일 ~ 1945년 8월 18일). 1967년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사망
[8] 만주국(滿洲國) : 일본이 만주사변 직후 동삼성을 강제로 점령하여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이자 식민지
[9] 리튼 조사단(Lytton Commission) : 국제연맹이 만주사변과 만주국을 조사하기 위하여 조직한 국제연맹 중일 분쟁 조사위원회. 영국의 제2대 리턴 백작인 빅터 불워리턴이 단장을 맡았다
[10] 관동군 :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인 만주국에 주둔한 육군소속 부대. 용어 자체는 산해관(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관문으로 군사 요충지)의 동쪽에 주둔한 일본군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요동반도의 조차지와 남만주 철도에 대한 이권을 확보하였고 [10]관동군이라는 군사력을 해당 지역에 주둔시켜 만주의 정치 및 경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내에서 만주의 자원을 완전히 확보하고 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친일 정권을 수립하려는 침략적 여론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밤에 일본 관동군은 중국군이 남만주 철도의 [1]류탸오후 구간을 폭파했다는 구실을 내세워 [6]장쉐량이 이끄는 중국 [4]동북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폭파는 일본군 스스로가 저지른 자작극이었다. 이 작전은 일본군 내부에서 독단적 행동으로 이뤄졌지만 일본 정부와 본국 군부는 이를 묵인하거나 추인함으로써 전면 침략을 사실상 승인하였다.
[6]장쉐량의 동북군은 전열이 정비되지 못하고 사기가 낮았으며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하고 있었던 [3]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철군하였다. 또한 무력 충돌 대신 국제연맹이나 외교적 해결을 통해 일본의 부당함을 알리고 만주의 주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관동군은 랴오닝성의 중심 도시인 선양을 거의 무저항 상태로 점령하였고 이어서 장춘, 하얼빈, 길림 등 만주 전역으로 군을 확대 투입하였다. 그리하여 불과 수 개월 만에 만주 전역이 일본군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1932년 3월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7]푸이를 대표로 내세워 [8]만주국을 수립하고 이를 독립국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일본의 괴뢰정권에 지나지 않았으며 국제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연맹은 만주사변을 조사하기 위해 [9]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였고 1933년 보고서를 통해 일본의 무력 점령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만주국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이 사건은 국제사회가 일본의 군사행동을 억제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로 훗날 독일, 이탈리아 등의 파시스트 세력이 유사한 방식으로 국제 규범을 무력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만주사변은 단기간의 군사작전으로 끝났으나 그 결과는 심각하였다. 일본은 만주를 병합함으로써 자원의 확보와 대륙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이 자작극을 일으켜 무력을 사용하고 영토를 침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군사 대응을 하지 않은 점은 많은 국민과 정치 세력으로부터 비겁함과 무능함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6]장쉐량의 [4]동북군이 전투 없이 철수한 사건은 국가적 치욕으로 받아들여졌고 대일 투쟁을 외면한 채 공산당 토벌에만 집중하는 정책에 대한 비판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 사회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고 국민적 분노와 압력은 제2차 국공합작의 계기로 이어져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만주사변은 1930년대 국제질서를 위협한 첫 번째 본격적인 침략전쟁이자 동아시아 전체를 장기적인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인 전환점이었다.
[1] 류타오후 :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북쪽 교외에 위치한 지역. 오늘날의 행정구역상으로 선양시 위퉁구 또는 다둥구 부근에 해당하며 철도 교통의 요충지이자 사건 기념비와 박물관이 있는 역사적 유적지로 보존되어 있다
[2] 류탸오후 사건 :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으로 펑톈 북동쪽 류타오후 부근을 지나는 만철 선로에 폭약을 가설해 폭파한 뒤 중국군의 소행으로 가장하고 이를 명분으로 중국군을 기습 공격한 사건
[3] 장제스(蔣介石, 1887년 10월 31일~1975년 4월 5일) : 장개석.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인. 중화민국 국민당 주석(1943년 8월 1일-1948년 5월 20일). 중화민국의 1·2·3·4·5대 총통(임기, 1950년 3월 1일-1975년 4월 5일)
[4] 동북군 : 동북변방군. 1920년대에 만주에 주둔하던 중화민국 정부의 군대이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 성립된 북양군벌의 한 파벌
[6] 장쉐량(張學良, 1901년 6월 4일~2001년 10월 14일) : 한자음 장학량. 장쭤린(장작림)의 아들로 부친사후 동북군을 물려받은 실질적인 지휘자. 장제스를 납치한 시안사건으로 유명하다. 100세로 장수
[7] 푸이(溥儀, 1906년 2월 7일 ~ 1967년 10월 17일) : 청나라 제12대 황제인 선통제(재위, 1908년 12월 2일 ~ 1912년 2월 12일, 복위, 1917년 7월 1일 ~ 1917년 7월 12일), 만주국 초대 황제이자 유일한 황제(재위, 1934년 3월 1일 ~ 1945년 8월 18일). 1967년 베이징에서 지병으로 사망
[8] 만주국(滿洲國) : 일본이 만주사변 직후 동삼성을 강제로 점령하여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이자 식민지
[9] 리튼 조사단(Lytton Commission) : 국제연맹이 만주사변과 만주국을 조사하기 위하여 조직한 국제연맹 중일 분쟁 조사위원회. 영국의 제2대 리턴 백작인 빅터 불워리턴이 단장을 맡았다
[10] 관동군 :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인 만주국에 주둔한 육군소속 부대. 용어 자체는 산해관(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관문으로 군사 요충지)의 동쪽에 주둔한 일본군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