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쟁(Seven Years War)
스웨덴
러시아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사건기간 : 1756년 5월 17일 – 1763년 2월 15일, 조회수 : 878, 등록일 : 2020-11-22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오스트리아 [1]합스부르크가는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2]슐레지엔 지역을 되찾기 위해 [4]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으로 유럽의 거의 모든 열강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참여하면서 유럽뿐 아니라 식민지 지역인 북아메리카와 인도까지 확장된 세계대전 규모의 전쟁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전쟁을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도 한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팽창에 대항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확보하여 패권의 교두보를 삼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프로이센과 동맹관계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년~1748년)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는 [3]선제후국인 프로이센에게 패하면서 [2]슐레지엔 지역을 넘겨주었다.
오스트리아의 [5]마리아 테레지아는 빼앗긴 [2]슐레지엔 지역을 되찾기 위해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공격하기로 한다. [5]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전쟁이 벌어지면 프랑스가 참전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영국은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면 [8]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노버 [3]선제후국의 지원이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영국은 러시아 군대를 이용하여 [4]프로이센을 견제하는 동시에 하노버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러시아는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북부의 발트해 연안으로 진출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프로이센을 넘어서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하여 하노이 [3]선제후국를 지킨다는 조건하에 영국과 동맹을 맺는다.
영국과 프로이센이 동맹을 맺자 [5]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에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프랑스를 끌어안게 된다.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스웨덴에 연합을 결성한다. 프랑스의 부르봉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는 단순 적대관계를 넘어선 철천지 원수관계가 동맹을 맺은 것이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지가 된 셈이다.
스페인은 부르봉 왕조가 성립되면서 프랑스와 같은 왕조로 [8]동군연합으로 사실상 영구적인 동맹을 이루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영국동맹' 대 '프로이센-프랑스동맹' 구도가 '오스트리아-프랑스' 대 '프로이센-영국'로 바뀐것이다.
1756년 6월 2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자 위기감을 느낀 프로이센의 [6]프리드리히 2세는 예방차원으로 [10]작센 [3]선제후국을 침공하면서 7년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의 작센 기습침공으로 러시아의 여제 [7]옐리자베타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스웨덴도 프로이센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프로이센을 공격하면서 참전하였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1962년 [7]옐리자베타 여제가 갑자기 사망하여 뒤를 이어 [9]표드로 3세가 즉위하였다.
[3]표드로 3세는 상호 조건없는 화친을 프로이센에 제안하여 프로이센의 [6]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탈한다. 스웨덴까지 이 전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한 재원손실로 국고가 고갈되어 가는 상태였으며, 프랑스는 유럽밖의 식민지전쟁에서 패배한 상태였다. 동맹국 러시아까지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7년 전쟁은 종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러시아는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의 소방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프로이센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2]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보했으며, 식민지 전쟁에서는 영국이 승리를 거두어 북아메리카의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던 현재의 퀘벡주와 온타리오주를 차지하였다. 인도에서도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어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7년 전쟁은 참전한 모든 국가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남겼으며 유럽은 전쟁 이전과 거의 바뀐 것이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명목상으로는 패전국이 됐지만 내부 결속, 군제 개혁등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프로이센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국토가 초토화되는등 막대한 전쟁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전 유럽의 열강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군사적 강대함을 알렸다
러시아는 유럽의 국제정치에 참여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영국은 인도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들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지나친 전비부담은 영국의 재정을 악화시켰다.
프랑스도 국가재정이 악화된 건 물론이고, 캐나다와 미시시피 강 동쪽 전체를 영국에게 빼앗기고 인도 역시 영국에게 넘겨주어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도 넘겨받지 못했다.
스페인은 북아메리카의 플로리다를 영국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얻으며 중남미 일대에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1]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있던 가문 중 하나
[2] 슐레지엔(Silesia) : 중세 유럽 최대 공업지대.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독일 제국 시기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폴란드의 남서부, 독일 작센 주의 일부, 체코 북동부 일부에 걸친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에 속해 있다
[3] 선제후 :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황제선거를 개최하여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황제를 선출할 선거권을 가진 신성로마제국 내의 영주
[4]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신성로마제국 동북족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1701년 왕국을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왕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1701년 1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를 수도 로 삼아 그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제국의 선언을 이끌었으며, 1차대전의 패전과 함께 1918년 11월 9일에 종말을 맞이하였다
[5]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군주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 재위기간(1745년 9월 13일~1765년 8월 18일)
[6]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 등으로 불리게 된다
[7]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1709년~1762년) : 제6대 러시아 제국 여황제. 재위(1741년 12월 6일-1762년 1월 5일)
[8]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 : 군주 혹은 그 배우자가 되어, 결혼 관계를 매개로 둘 이상의 국가들을 하나로 병합하지 않고 연합하여 주권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통치하는 것
[9] 표트르 3세(Peter III of Russia, 1728년 2월 21일 - 1762년 7월 17일) : 제7대 러시아 황제. 재위(1762년 1월 5일-1762년 7월 9일). 로마노프 왕조의 7번째 군주
[10] 작센 왕국(Kingdom of Saxony) : 아스카니아 가문(Haus Askania)의 작센-비텐베르크 공국(Herzogtum Sachsen-Wittenberg)이 1356년 금인칙서(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군주가 수여한 문서)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로 부터 선제후 작위를 부여받아 성립된 국가. 1422년 아스카이나 가문의 마지막 선제후가 후손없이 사망하자, 베틴 가문의 프리드리히 4세가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되었다. 1806년 제국이 해체된 후, 프리드리히 3세는 작센 선제후국을 작센왕국으로 승격시켰다. 작센왕국은 180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중부에 있던 왕국이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팽창에 대항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확보하여 패권의 교두보를 삼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프로이센과 동맹관계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년~1748년)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는 [3]선제후국인 프로이센에게 패하면서 [2]슐레지엔 지역을 넘겨주었다.
오스트리아의 [5]마리아 테레지아는 빼앗긴 [2]슐레지엔 지역을 되찾기 위해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공격하기로 한다. [5]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전쟁이 벌어지면 프랑스가 참전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영국은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면 [8]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노버 [3]선제후국의 지원이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영국은 러시아 군대를 이용하여 [4]프로이센을 견제하는 동시에 하노버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러시아는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북부의 발트해 연안으로 진출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프로이센을 넘어서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하여 하노이 [3]선제후국를 지킨다는 조건하에 영국과 동맹을 맺는다.
영국과 프로이센이 동맹을 맺자 [5]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에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프랑스를 끌어안게 된다.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스웨덴에 연합을 결성한다. 프랑스의 부르봉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는 단순 적대관계를 넘어선 철천지 원수관계가 동맹을 맺은 것이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지가 된 셈이다.
스페인은 부르봉 왕조가 성립되면서 프랑스와 같은 왕조로 [8]동군연합으로 사실상 영구적인 동맹을 이루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영국동맹' 대 '프로이센-프랑스동맹' 구도가 '오스트리아-프랑스' 대 '프로이센-영국'로 바뀐것이다.
1756년 6월 2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자 위기감을 느낀 프로이센의 [6]프리드리히 2세는 예방차원으로 [10]작센 [3]선제후국을 침공하면서 7년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의 작센 기습침공으로 러시아의 여제 [7]옐리자베타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스웨덴도 프로이센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프로이센을 공격하면서 참전하였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1962년 [7]옐리자베타 여제가 갑자기 사망하여 뒤를 이어 [9]표드로 3세가 즉위하였다.
[3]표드로 3세는 상호 조건없는 화친을 프로이센에 제안하여 프로이센의 [6]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탈한다. 스웨덴까지 이 전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한 재원손실로 국고가 고갈되어 가는 상태였으며, 프랑스는 유럽밖의 식민지전쟁에서 패배한 상태였다. 동맹국 러시아까지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7년 전쟁은 종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러시아는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의 소방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프로이센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2]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보했으며, 식민지 전쟁에서는 영국이 승리를 거두어 북아메리카의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던 현재의 퀘벡주와 온타리오주를 차지하였다. 인도에서도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어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7년 전쟁은 참전한 모든 국가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남겼으며 유럽은 전쟁 이전과 거의 바뀐 것이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명목상으로는 패전국이 됐지만 내부 결속, 군제 개혁등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프로이센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국토가 초토화되는등 막대한 전쟁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전 유럽의 열강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군사적 강대함을 알렸다
러시아는 유럽의 국제정치에 참여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영국은 인도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들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지나친 전비부담은 영국의 재정을 악화시켰다.
프랑스도 국가재정이 악화된 건 물론이고, 캐나다와 미시시피 강 동쪽 전체를 영국에게 빼앗기고 인도 역시 영국에게 넘겨주어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도 넘겨받지 못했다.
스페인은 북아메리카의 플로리다를 영국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얻으며 중남미 일대에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1]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있던 가문 중 하나
[2] 슐레지엔(Silesia) : 중세 유럽 최대 공업지대.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독일 제국 시기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폴란드의 남서부, 독일 작센 주의 일부, 체코 북동부 일부에 걸친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에 속해 있다
[3] 선제후 :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황제선거를 개최하여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황제를 선출할 선거권을 가진 신성로마제국 내의 영주
[4]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신성로마제국 동북족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1701년 왕국을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왕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1701년 1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를 수도 로 삼아 그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제국의 선언을 이끌었으며, 1차대전의 패전과 함께 1918년 11월 9일에 종말을 맞이하였다
[5]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군주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 재위기간(1745년 9월 13일~1765년 8월 18일)
[6]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 등으로 불리게 된다
[7]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1709년~1762년) : 제6대 러시아 제국 여황제. 재위(1741년 12월 6일-1762년 1월 5일)
[8]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 : 군주 혹은 그 배우자가 되어, 결혼 관계를 매개로 둘 이상의 국가들을 하나로 병합하지 않고 연합하여 주권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통치하는 것
[9] 표트르 3세(Peter III of Russia, 1728년 2월 21일 - 1762년 7월 17일) : 제7대 러시아 황제. 재위(1762년 1월 5일-1762년 7월 9일). 로마노프 왕조의 7번째 군주
[10] 작센 왕국(Kingdom of Saxony) : 아스카니아 가문(Haus Askania)의 작센-비텐베르크 공국(Herzogtum Sachsen-Wittenberg)이 1356년 금인칙서(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군주가 수여한 문서)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로 부터 선제후 작위를 부여받아 성립된 국가. 1422년 아스카이나 가문의 마지막 선제후가 후손없이 사망하자, 베틴 가문의 프리드리히 4세가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되었다. 1806년 제국이 해체된 후, 프리드리히 3세는 작센 선제후국을 작센왕국으로 승격시켰다. 작센왕국은 180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중부에 있던 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