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건기간 : 1970년 11월 13일, 조회수 : 284, 등록일 : 2020-11-19
하루 8시간 노동과 초과근무수당을 국가가 법으로 규정한 근로기준법이 최초로 제정된 해는 1953년이었다. 그로부터 17년이나 지났지만 1970년대 한국 사회는 경제 개발이란 미명 하에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정당한 대가마저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부인했다.
전태일은 서울시 종로구 평화시장 피복 공장의 재단사등으로 일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를 체험하였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침해에 관하여 노동청에 진정도하고 호소를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던 22살의 전태일은 이에 항거하여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쓰러진 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평화시장에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으며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베트남 전쟁은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연장선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Second Indochina war)이라고도 한다. 베트남은 항미전쟁이라고 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라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월남전으로 부른다.
이 전쟁은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의 내전으로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 전쟁 양상을 띠었다.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미국 등 외국 군대가 개입하고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전선이 확대되어 국제전으로 치러졌다.
미국은 [2]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남베트남을 수호하려던 미국은 결국 북베트남의 20여년동안 끈질긴 공세와 저항에 지치게 되고 미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1973년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미군이 철수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의 공세에 패배하였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호찌민까지 함락되면서 기나긴 전쟁은 종결된다. 그리하여 1976년 베트남은 통일을 선언하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 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 : 프랑스-베트남 전쟁. 베트남 독립전쟁 [2]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 1964년 8월 2일 통킹만 해상에서 북베트남 해군의 135편대 소속 어뢰정 3척이 미해군 구축함 USS 매독스함을 공격한 사건
1954년 제네바 협정이후, 베트남은 북위 17도를 경계로 일단 양분되었고, 17도 이북에는 [4]호치민이 이끄는 공산국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이 수립되고, 17도 이남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5]응오 딘 지엠 정권의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수립되었다.
미국은 세계적 냉전이 심화되던 시대에 '공산주의 봉쇄'라는 전략과 기치를 내걸고 인도차이나 분쟁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964년 8월 2일에 발생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본격화했다. 미국 [1]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1964년 8월 5일 북베트남 폭격을 지시했으며, 이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Pierce Arrow)작전의 시작으로 미국의 베트남전 전면전의 포문을 열었다.
미국은 풍부한 군대와 첨단 무기를 가지고도 [3]베트콩의 예측이 불가능한 게릴라 전술, 불규칙한 전투행동, 베트남의 자연환경등으로 고전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미국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세해지면서 1968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사이의 휴전협상을 시작하였다
1969년 6월, [2]리차드 닉슨은 베트남으로부터의 단계적인 미군 철수를 발표했고, 1973년 1월 27일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미국이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하였다.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의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으며 그해 3월 마지막 남은 미국의 전투부대가 남베트남에서 철수하였다.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패권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베트남에 개입하는 길을 선택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패퇴하였고 초강대국 미국의 위신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미국으로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년간 5만 명의 인명피해와 1,200억 달러가 소요된 대규모 전쟁이었으나 패배한 전쟁으로써 역사에 남게 되었다.
[1] 린든 존슨(Lyndon Baines Johnson, 1908년~1973년) : 미국 제36대 대통령(임기,1963년 11월 22일~1969년 1월 20일) [2]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1913년~1994년) :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임기, 1969년 1월 20일~1974년 8월 9일) [3] 베트콩(Viet Cong) : 남베트남 내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칭하는 용어 [4] 호찌민(Ho Chi Minh, 1890년~1969년) : 초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주석(임기, 1951년 2월 19일 - 1969년 9월 2일).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불린다. [5] 응오 딘 지엠(NNgo Dinh Diem, 1901년~1963년) : 남베트남의 제1대 총통(임기, 1955년 10월 26일~1963년 11월 2일)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또는 월남전 참전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쳐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전투부대를 파병하였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당시 남베트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1차 파병
- 1964년 9월 11일 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 22일 베트남의 수도 [1] 사이공에 상륙하였다.
-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10명을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요원 등 140명을 파병하였다.
2차 파병
-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출발하여 3월 16일 당시 베트남의 수도 [1] 이공에 도착하였으며, 사이공 동북방 22㎞ 지점의 디안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 및 자체 방어를 위한 경비대대, 수송, 공병임무 수행하였다.
- 강원도 현리에 있는 국군 제6사단 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부대'로 명명하여 파병하였다.
3차 파병
- 1965년 10월 9일 제2해병여단(청룡부대)은 남베트남 [2] 캄란에 상륙하였고 11월 1일 수도사단(맹호부대)가 [3] 퀴논에 상륙을 하였다
4차 파병
- 1966년 4월 19일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제26연대가 꾸이년에 상륙을 하고, 이어서 10월 8일 제9사단(백마부대)가 [4] 닌호아에 상륙하였다
196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미국 내에서는 언론매체의 영향으로 반전 여론이 고조되어 1969년 1월 닉슥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 철군을 발표하고 1969년 7월부터 일부 병력을 철수시켰다.
대한민국 정부도 제1단계로 1971년 12월 4일 제2해병 여단의 철수를 시작으로 1972년 4월 1일까지 9천명의 병력을 철수 시켰다.
제2단계 철수는 1973년 1월 8일, 파리에서 체결된 휴전 협정의 규정 사항인 "모든 외국 군대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다."는 조항에 따라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1973년 1월 30일 125명의 선발대가 항공편으로 철수하였으며, 3월 14일까지 본대가 철수하고, 3월 23일 후발대 118명이 항공편으로 철수함으로써, 남베트남에 주둔하였던 모든 부대가 철수를 완료하였다.
한국군은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여 경제 발전에 필요한 외화수입이라는 많은 경제적 이익과 한국전쟁 이후의 값진 실전 경험을 얻었으나 파병자 중 5,000명의 사망자와 2만여 명의 참전용사가 고엽제 등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1] 사이공(Saigon) : 베트남 최대도시로 경제 중심지. 남베트남(1954년~1976년) 수도였으며 1975년에 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2] 캄란(Cam Ranh) : 베트남의 남동부에 있는 항구도시
[3] 퀴논(Quy Nhon) :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반도모양) 베트남 중부의 해안도시. 다낭과 나트랑의 중간지점에 위치. 베트남전쟁 당시 맹호부대의 주둔지
[4] 닌호아(Ninh Hòa) : 베트남의 해안마을. 베트남 전쟁당시 백마부대 사령부
중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사회·정치적 운동으로, [1]마오쩌둥이 주도하여 공산주의 이념을 강화하고 반혁명적 요소를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1]마오쩌둥은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 혁명 정신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가치와 권력 구조를 타파하고, 공산주의 사상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주로 청년들로 구성된 [2]홍위병은 전통 문화와 지식인을 공격하며 운동의 중심에 섰다. 전통 문화의 파괴, 고위 관료 숙청, 지식인의 박해 등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혼란이 발생했으며 정치적 숙청과 내부 권력 투쟁이 격화되며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기도 했다.
경제와 교육 시스템의 붕괴,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 문화유산의 대규모 파괴 등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문화대혁명은 [1]마오쩌둥의 사망과 [3]덩샤오핑의 실용주의 노선으로 인해 종결되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정치적·사회적 구조에 심각한 혼란과 상처를 남겼으며, 현대 중국 역사에서 실패한 정치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건은 중국 내 전통 문화와 지식층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렸고, 이후 중국 정부는 실용주의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이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1]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Mao Zedong, 1893년~1976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주석. [2] 홍위병(紅衛兵, Red Guards) : 중국 문화대혁명 초기, 마오쩌둥의 지지를 받아 결성된 젊은 학생(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중심의 혁명 집단. 이들은 마오쩌둥 사상을 충실히 따르며, 사회주의 체제에 반대하거나 "반혁명적"으로 간주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홍위병의 폭력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자, 1968년 마오쩌둥은 군대를 동원해 이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해산을 명령했다 [3]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 Deng Xiaoping, 1904년~199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지도자
1949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독립한 캄보디아는 국왕 [4]노로돔 시아누크에 의해 독재체제로 통치되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경제가 침체되면서 이를 반대하는 파벌간 분쟁으로 불안정 요소를 안고 있었다. 1965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4]시아누크 정부는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의 지원을 거부하고 중국을 지지했다. 베트남 전쟁이 더욱 치열해지자 북베트남은 캄보디아 영내의 [7]호치민 루트를 활용했고, 이에 미국은 캄보디아의 친미정권이 필요했다.
1970년 3월 18일 [4]시아누크 국왕이 소련과 중국의 방문을 틈타 캄보디아내 의회가 소집되어 시아누크의 하야를 만장일치로 가결하면서 축출했다. 대표적인 주동자 [5]론 놀은 수상이 되어, 10월에 [1]크메르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시아누크 국왕은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으며 라디오를 통해 [5]론 놀의 친미정권에 저항을 호소하였다. 시아누크를 도와 캄보디아로 귀국을 도운 것은 [6]폴 포트등이 지휘하는 [2]크메르 루주였디. 폴 포트는 시아누크를 옹립하여 [5]론 놀 정권과 내전이 발발했다.
1972년 1월, 미국은 [5]론 놀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일부를 캄보디아에 파견하였다. [7]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기 위하여 캄보디아 국경 곳곳에 공습이 이뤄지면서 수 십만명의 농민이 희생되었다. 국경에 살던 원주민들은 분노하여 [2]크메르 루주에 가담하면서 크메르 루즈 세력은 점점 커져갔다. 게다가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의 지지까지 크게 얻었다.
지속된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의 상황은 더욱 나빠지면서 대부분의 캄보디아 영토는 [2]크메르 루주, [8]베트콩에게 점령당했다. 미국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쳐가면서 자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973년에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를 했다. 베트남 전쟁은 1975년 [9]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종결되었다.
1975년 4월 1일 수도 프놈펜으로 크메르 루주가 진격하자 [5]론 놀은 인도네시아를 경유하여 미국의 하와이로 망명했다. 결국 1975년 4월 17일 크메르 루주의 [6]폴 포트가 론 놀정부를 무너뜨리고, 1976년 [3]민주 캄푸치아가 건국되었다. 이후 [3]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크메르 루주는 전국민을 집단농장으로 강제이주시키고 [10]킬링필드라는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다.
[1] 크메르공화국(Khmer Republic) : 캄보디아 의회에서 캄보디아 왕국의 국왕인 노로돔 시아누크를 폐위시키고 1970년 10월 1일 캄보디아에 세워진 공화국으로 1975년 4월 17일까지 존재하였다. 론 놀이 초대 총리를 맡았다 [2] 크메르 루주(Khmer Rouge) : 1951년에 조직된 캄푸치아 공산당의 무장조직 [3]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 크메르 루주가 주축이 되어 캄보디아 내전에서 승리하여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에 민주 캄푸치아라명명하고 지배하였다. 킬링필드로 알려진 대학살 정책을 저질렀다.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으로 붕괴되었다. [4]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2012년) : 캄보디아 국왕(제위 : 1941년 4월 24일 ~ 1955년 3월 2일), 캄보디아 국가원수(재위 : 1960년 6월 20일 ~ 1970년 3월 18일), 캄보디아 국왕 2차 복위(재위 : 1993년 10월 24일 ~ 2004년 10월 7일) [5] 론 놀(Lon Nol, 1913년~1985년) : 크메르공화국 제2대 대통령(재임 : 1972년 3월 10일 ~ 1975년 4월 1일). 1970년 3월 18일 쿠데타로 정권쟁취 [6] 폴 포트(Pol Pot, 1925년~1998년) : 민주 캄푸치아 공산당 총리를 지낸 캄보디아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본명은 살롯 사르. 킬링필드 학살을 주도한 인물 [7] 호찌민 루트(Ho Chi Minh trail) :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이 간첩과 군수 물자를 남베트남으로 보내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연결한 통로 [8] 베트콩(Viet Cong) : 일명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남 공화국과 미국을 상대로 싸운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을 펼쳐 북베트남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9] 사이공(Sài Gòn) : 현재의 호찌민시. 1975년 남베트남의 수도 [10] 킬링필드(Killing Fields) : 1975년에서 1979년 사이에 폴 포트가 이끄는 민주 캄푸치아 정권의 크메르 루주가 자행한 대학살 사건
와우아파트 준공 4개월 만인 1970년 4월 8일 오전 8시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전동 산 1번지에 위치한 와우지구 시민아파트의 한 개동(제15동,5층)이 부실공사로 무너진 사건이다. 그 결과로 사망 33명, 중상19명, 경상 21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