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고종 31) 7월에서 1896년 2월까지 추진되었던 일련의 개혁운동이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제1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한 뒤 조선 정부에 개혁을 강요하였다.
(1) 제1차 갑오개혁(1894년 7월 27일~1894년 12월 17일) - 제1차 김홍집 내각
개혁 추진을 위한 정책의결 기구인 군국기무처 설치하였으며 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과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현 12개조를 반영하여 자주적으로 추진하였다
- 중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원을 연호로 사용
- 왕실 사무를 전담하는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의 사무를 분리함 : 궁내부와 의정부로 나뉨
- 6조를 8아문(내무아문, 외무아문, 탁지아문, 법무아문, 학무아문, 공무아문, 군무아문, 농상아문)으로 개편함.
- 내무아문 예하에 경무청을 설치하여 근대적 경찰제도 시행 및 탁지아문으로 재정을 일원화 함
- 과거제 폐지
- 은 본위 화폐제도를 시행
- 도량형을 통일하고 조세의 금납화를 단행함
- 신분제(공,사노비제)를 폐지함
-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함
(2) 제2차 갑오개혁(1894년 12월 17일~1895년 7월 7일) : 제2차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개혁에 수구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흥선대원군의 거센반발에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였다. 대신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가 있었던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전격 임명하여 총 213건의 개혁안이 제정, 실시되었는데, 상당수는 앞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개혁안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다.
- 홍범14조를 반포
- 의정부는 내각으로 8아문은 아문이 부로 바뀌면서 7부(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로 개편함
- 재판소를 선치하고 사법권을 행정권으로부터 분리함 : 사법부 독립
- 상공업의 활성화를 위하여 육의전을 폐지함
- 군사제도는 훈련대와 시위대를 조직함
- 한성사범학교 및 부속 소학교가 설립되고 외국어 학교 관제가 반포됨
[제3차 김홍집 내각]
청일전쟁에서 승리와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랴오둥반도를 점령하였으나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으로 랴오등반도를 청에 반환하였다. 이 와중에 2차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지나친 독주로 인하여 박영효는 정변을 꾀했다는 혐의로 실각하여 재차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외 정세가 바뀌자 조선 왕실은 일본의 내정간섭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과 러시아에 우호적이던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3) 제3차 갑오개혁(을미개혁, 1895년 10월 8일~1896년 2월 11일) : 제4차 김홍집내각
조선정부의 친러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한 명성 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감행하였다. 친러내각이 붕괴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추진된 개혁을 을미개혁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
-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
- 단발령 시행
- 태양력을 채택하고 종두법을 시행함
-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우편 사무가 재개됨
-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소학교가 설립됨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도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하였다(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미국과 가깝게 지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세웠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나무위키등..
* 고종(1852~1919) :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 1864년~1897년).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1897년~1907년)
* 김홍집(1842~1896):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조선 최초의 내각총리대신
* 군국기무처 : 조선말기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던 최고 정책결정 기관. 6월 25일부터 같은 해 12월 17일까지 존속
* 을미사변 :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조선왕후(명성황후) 민씨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일본인 낭인등에게 살해된 사건
* 아관파천 : 을미사변으로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과 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간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
* 홍범14조 : 고종이 종묘에서 선포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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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의 목표를 강령으로 선언한 이 「홍범14조」는 비록 일본공사의 권고에서 비롯되긴 했으나, 당시 개화파 관료들의 개혁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정책백서이자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국왕이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처음으로 내외에 선포한 문서로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내정간섭을 더욱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를 활용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홍범14조(洪範十四條))]
[전문내용]
제1조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제2조 왕실 전범(王室典範)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
제3조 국왕(大君主)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비빈·종실 및 척신이 관여함을 용납치 않는다.
제4조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제5조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 권한의 한계를 명백히 규정한다.
제6조 부세(賦稅, 세금의 부과)는 모두 법령으로 정하고 명목을 더하여 거두지 못한다.
제7조 조세 부과와 징수 및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한다.
제8조 왕실은 솔선하여 경비를 절약해서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제9조 왕실과 각 관부(官府)에서 사용하는 경비는 1년간의 예산을 세워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제10조 지방관 제도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관의 직권을 한정한다.
제11조 널리 자질이 있는 젊은이를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제12조 장교(將校)를 교육하고 징병제도를 정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립한다.
제13조 민법 및 형법을 엄정히 정하여 함부로 가두거나 벌하지 말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제14조 사람을 쓰는 데 문벌(門閥)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조선에 주둔할 병력에 관해 의논하는 장면
1984년 조선의 민영준(민영휘, 1852~1935), 청의 위안스카이(1859~1916), 일본의 오토리 게이스케(1833~1911) 공사가 조선 주둔 병력에 관해 의논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일본공사가 윽박지르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분위기를 한눈에 보여준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촬영일 :2020-11-30]
1984년 조선에 주둔할 병력에 관해 의논하는 장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러시아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벌인 갈등과 경쟁을 벌어졌다.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 한다.
인도를 차지함으로서 제국주의 경쟁의 선봉에 선 영국과 아시아로의 영토 확장을 꾀한 러시아 두 제국은 러시아와 인도 사이에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와 페르시아간 [1]굴리스탄 조약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2]영러 협상으로 끝을 맺는다.
조선의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 굴리스탄 조약(Gulistan) : 1813년 이란의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 페르시아)와 러시아가 전쟁후 아제르바이잔의 굴리스탄에서 체결한 조약.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란의 카프카스 지역(조지아ㆍ아제르바이잔ㆍ다게스탄등)을 할양받았다
[2] 영러 협상 : 1907년 영국과 러시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위구르, 티베트와 같은 중부 아시아에서의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한 협상이다
청나라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무기력하게 패하고 태평천국운동을 겪은 뒤 국제사회의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군수 공장과 조선소(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를 창설), 제철소, 방직 공장등을 만들었다. 근대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한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고, 서양의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근대적인 학교도 세웠다. 이렇게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는 데 힘썼다고 하여 [1]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태평천국운동, 신유정변을 거치면서 한족인 [2]증국번, [3]이홍장 등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 세력들이 주도하였다.
이시기의 권력 중심은 [4]서태후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5]공친왕이 양무정책 추진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무운동은 반대세력에 의해 비판과 견제를 받아왔다. 관리의 기업통제에서 야기되는 부패와 비능률, 전통적인 경제구조의 잔존, 운동 추진 주체가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점등으로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는 곧 청불전쟁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1] 양무(洋務) :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
[2] 증국번(장꿔판, 1811년~1872년) : 청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정치가,학자로서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운동에도 큰역할을 하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3] 이홍장(리훙장,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출신으로 중국번의 막료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북양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청나라 대외정책의 실질적인 결정권자가 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였으며 청나라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등을 주도하였다.
[4] 서태후(자희황태후,1836년~1908년) : 제9대 황제인 함풍제의 후궁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이며,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6세의 어린아들(동치제)이 황제에 오르면서 섭정정치로 집권을 하게된다. 이후 청나라 말기는 서태후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한다.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태후라 불린다
[5]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1876년 개항 뒤 외세의 경제 침탈과 지배층의 수탈 심화로 농민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1890년대 들어 농민항쟁이 빈번해졌다.
1860년 창건된 [1]동학은 이 무렵 남부 지방까지 교세가 확장되었으나 조선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었다. 1892~1893년 동학교도들은 대규모 [2]교조신원운동을 일으켰다.
농촌 지식인들은 동학조직을 활용하여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였다.
1894년 1월 전형적인 탐관오리인 전라도 [3]고부 군수 [4]조병갑의 탐학과 부정부패로 인하여 전봉준을 위시한 고부군민은 봉기를 일으켰다. 조선 조정은 고부 민란을 수습하기위해 [5]안핵사 [6]이용태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오히려 농민들을 탄압하고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3월 20일 [7]전봉준, [8]김개남, [9]손화중을 중심으로 전북 [10]무장에서 [11]창의문을 발표하고 '[12]제폭구민 [13]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싸움에 나섰다. 제1차 농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3월25일 이어 고창과 정읍, 태인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지역마다 지도자를 달리하는 농민군들이 [3]고부의 백산에 모여들어 연합부대를 이루었다. 농민군은 황토재 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하고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여 전라도 전역은 완전히 동학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파병을 요청했다. 5월 5일 아산만에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였다. [17]텐진 조약을 명분으로 일본군도 제물포(인천)에 상륙한다.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하게 되자 전봉준과 전라감사 [15]김학진은 7월 6일 전주회담에서 [14]집강소 체제를 합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상황이 안정되자 조선조정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에게 철군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7월 25일에 청군과 일본군의 해전인 [16]풍도해전으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농민군들은 다시 결집하여 10월 하순~11월 중순까지 공주 외곽과 청주 일대에서 조선과 일본의 연합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2차 농민전쟁이었다.
농민군 부대는 패배를 거듭하여 흩어지고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및 관련자들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일본군, 친일 개화파 정권, 보수 유생 토호 세력에 의해 실패했지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한 투쟁이자 20세기 아시아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계기가 된 사건으로 청일전쟁의 결과로 청과 일본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후 동아시아는 일본,영국 연합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었다.
[1] 동학(東學) :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을 제창하여 1860년(철종 11) 최제우(1824~1864)가 창건한 신흥 종교이다.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1827~1898)이 1898년 순교한 뒤 3대 교주인 손병희(1861~1922)가 1905년에 천도교로 개편하였다
[2]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 1864년(고종 1) 동학 교조 최제우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이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을 풀어 줌으로써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운동. 제1차 교조신원운동(1871). 제2차 교조신원운동(1893년)
[3] 고부군 :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덕천면, 소성면, 영원면, 이평면, 정우면과 부안군 백산면 일대에 있었던 옛 고을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진원지로 유명하다
[4] 조병갑(1844년~1912년) : 조선 후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초기의 문신이고 부패한 탐관오리로 조병갑의 탐학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이후 조병갑은 파직당하고 유배당했으나 이후 복권되어 1898년 고등재판소 판사가 되어 동학 지도자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한다. 고종과 친일파 양쪽에게 총애받은 조병갑은 호의호식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다
[5] 안핵사(按覈使) : 조선 후기 지방에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에 이의 처리를 위하여 파견한 임시관직으로 사건의 전말과 상황에 대한 상세한 조사,보고 및 사건의 처리방안을 건의하고 아울러 조정의 지시에 따라 이를 수습하는 것이 임무였다
[6] 이용태(1854년~1922년) : 동학농민혁명을 수습하는 직책이었으나 도리어 확대되자 파직 및 유배되었으나 199년 사법기관인 평리원 재판장과 1901년 주미공사에 임명되었다. 이완용의 친일 내각에서는 학부대신을 지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7] 전봉준(1855년~1895년) :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유난히 키가 작아(약 152cm)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다
[8] 김개남(1853년~1894년) : 전북 태인(현 전북 정읍시 산외면)지역의 동학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9] 손화중(1861년~1894년) : 전북 고창(무장))에서 활동한 동학의 접주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10] 무장 :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
[11] 창의문 : 1894년 고창 무장 봉기 당시 전봉준등이 만천하에 봉기할 것을 포고한 글
[12] 제폭구민 :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뜻
[13] 보국안민 : 나라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 동학의 교리
[14] 집강소 : 1894년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뒤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와 일본군의 철병을 원한 조선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은 후 전라도 각 군현에 설치하여 중요한 재판이 있을 때 농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농민 자치 기구
[15] 김학진(1838년~1917년) : 동학농민전쟁을 수습하기 위하여 전라감사로 파견되어 농민군에 대한 적극적인 유화책을 통해 전라도지역을 안정시켰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정계에서 추방되어 있던 김학진은 1897년에 복귀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한국에 대한 침략을 강화해나가자 김학진은 최익현, 허위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였다. 이후 중추원에서 활동하면서 친일내각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김학진은 1905년의 상소에서 국망의 위기감을 표출하면서도 고종에게 마음을 다잡고 정치를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1907년 상소에서는 깊은 절망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김학진은 1908년 즈음부터 친일로 기울었고, 마침내 나라가 망하자 일본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아 조선귀족이 되었다 [참고 : 김학진의 삶과 현실인식, 정종원,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75호, 2019.05]
[16] 풍도해전 : 1894년 7월 25일 조선의 풍도(안산시 단원구)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한 해전으로 청일전쟁의 시발점이며 청나라가 패하였다
[17]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실패의 결과로 1885년(고종 22년) 청나라 이홍장(리훙장)과 일본 이토 히로부미가 맺은 조약으로 청과 일본은 서로 4개월 안에 철수를 완료하고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1894년 동학혁명 직후 어수선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고 일본과 청나라는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풍도해전은 7월 25일 조선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청나라 군대는 풍도 안쪽에 있는 충청도 아산만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해전은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첫번째 단추가 되었다.
풍도해전은 전투 개시 6시간 30여분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어 7월 28일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약 4천명의 일본군은 아산과 성환에서 주둔한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청나라는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이로써 일본과 청나라의 전면전은 피하기 어려워졌고 8월 1일 일본은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풍도해전은 중국과 일본 역사교과서 기재 및 기념관 건립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구전에 그치고 있다.
* 풍도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
* 성환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청나라는 서구 열강과의 대립이 시작되면서 2차례의 아편전쟁 패배와 자국내 태평천국의 난으로 극심한 혼란한 상황이었다.
청나라는 재기를 위하여 [3] 양무운동을 통해 동아시아 패권국의 위치를 되찾기 위해 서구화 및 사회개혁에 힘쓰고 있었다. 일본은 [5] 메이지 유신 이후로 급격한 근대화를 이루었고 조선 침략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때마침 [1]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자력으로 막지 못하게 된 조선은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도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였다.
청나라군은 충남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주둔하였고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하여 한양에 주둔하게 된다.
타국의 지원을 받아 동학농민운동이 마무리되어 조선은 철군을 요구하였으나 한반도내의 영향력을 지배하기 위하여 청나라군과 일본군은 계속주둔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 친일 내각을 구성하여 청나라의 조선개입을 막으려 했다.
7월 25일 일본은 아산 앞바다 풍도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 해군을 공격하면서 청나라 보급로를 차단하였다(풍도해전). 이는 청일전쟁의 서막이었다.
7월 28일 일본군은 아산에 주둔중이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하고 패한 청나라군은 평양으로 후퇴하였다(성환전투).
8월 1일 청나라와 일본은 선전포고하고 청일전쟁은 한반도 조선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벌어진 평양전투에서 패배하여 청나라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연승한 일본은 중국 요동반도까지 점령하였고 청나라가 자랑하는 [4]북양함대는 일분군에게 궤멸당했다(황해해전).
청나라는 연패하자 당시 실권자인 [2]공친왕 혁흔은 화친쪽으로 기울었고 마침내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청일강화조약(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진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으며 배상금으로 2억 3천냥을 일본에 지불하였다. 이 금액은 당시 일본 1년 예산의 4배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또한 랴우둥반도, 타이완섬, [6]펑후제도를 일본에 넘겨주었다. 추후 랴우둥 반도는 3국 간섭(독일, 프랑스, 러시아)으로 다시 청나라에 반환하게 된다.
청일전쟁은 조선에 주둔한 청나라와 일본군은 조선을 위해 싸운다는 명목하에 보급품은 조선에서 공급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군수물자 대부분은 현지에서 조달하면서 조선 주민들의 피해는 엄청났다.
청일전쟁 결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 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으며 일본에게 동북아의 맹주 자리를 내주었다. 또한 일본은 대만과 중국 영토일부를 식민지로 확보하였으며 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제국주의 국가로 자리잡았으며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향하는 운명이 되었다.
[1] 동학농민운동 : 탐관오리의 부조리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
[2] 공친왕(1833년~1898년) :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3] 양무(洋務)운동 : 양무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교류 등을 일컫는 말. 청나라는 국제사회에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하는 운동
[4] 북양함대 : 청나라 말기 중국의 현대화된 해군으로 1871년 북양대신 이홍장의 지원으로 창설되었다. 북양함대는 청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극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 함대였다
[5] 메이지 유신 : 1868년 일본이 정치·경제·문화등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과정
[6] 펑후 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은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자력으로 막지 못하여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일본도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였다.
청나라군은 충남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주둔하였고 일본군은 인천으로 상륙하여 한양에 주둔하게 된다.
1984년 7월 25일 풍도 해전에 이어 일본군은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한양에서 충남 아산방향으로 내려왔다. 7월 28일 아산에서 약 15km 떨어진 성환에서 청나라군과 일본군간 전투가 일어났다. 결과는 청나라군이 패배하였다.
이 전투가 성환전투이며 아산전투라고도 불린다.
아산에 주둔한 3500명의 청나라군은 풍도 해전에서의 패배로 지원군이 차단되었고 성환전투에서도 승리한 일본군은 청나라군 주둔지까지 밀고 내려가 아산에서 승리를 자축했다.
청나라군은 평양으로 후퇴해 일본군과의 일전을 준비했고 8월 1일에 공식적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벌어진 평양 전투에서도 청나라군은 궤멸되어 한반도내에서 청군 세력은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 성환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이며 동학농민군이 벌인 전투 중 최대 규모였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동학농민전쟁의 전세를 결정할 수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결과는 동학농민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조선·일본 연합군에 패함으로써 1894년 3월 20일 전남 고창 [1] 무장기포 이후 이어진 동학농민전쟁이 사실상 종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전봉준이하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공주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논산에서 [3]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공주감영을 향해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조선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은 뛰어난 화력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동학농민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만을 남긴 채 패퇴하였다.
[1] 무장기포 : 무장은 전북 고창의 옛지명. 무장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 전봉준(1855년~1895년) : 농민 운동가이자 천도교(동학)의 지도자. 녹두장군
[3] 손병희(1861년~1922년) : 천도교(동학)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여순 대학살은 청일전쟁중에 일본군이 중국 여순을 점령하면서 패잔병 탐색과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대대적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여순내에서 발견된 거의 모든 시민이 학살되어 길거리는 실신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국제사회로부터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학살당한 중국인들은 2만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만충묘(万忠墓)를 세웠으며 현재는 만충묘 기념관이 있어 그 당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 뤼순(여순) : 중국의 옛 도시 이름으로 랴오동 반도의 남쪽끝에 위치. 현재는 랴오닝성 다롄(대련)시의 행정구역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청일전쟁을 벌였다.
청일전쟁 개전부터 일방적으로 연패하자 [8]공친왕이 미국에 화친 중재를 요청하여 미국이 응했으나 일본이 거절한다. 중재가 이루어지지 않자 1985년 3월 19일 [2]이홍장이 직접 [1]시모노세키로 건너가 3월 20일 굴욕적인 협상을 시작한다.
협상은 진행되었으나,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2]이홍장은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몇 차례 협상이 진행되던중 3월 24일 이홍장이 회견장에서 숙소로 돌아가던 도중에 고야마 도요타로라는 일본인이 쏜 총탄이 왼쪽 뺨에 맞으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일본은 정전을 부탁하려고 온 이홍장에게 오히려 사과를 표해야 했고, 이에 영향을 받아 [9]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은 1895년 4월 17일 전문 11개 조항의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주요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청나라는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인정한다. 이는 청나라의 조선간섭을 배제함을 의미한다. 2. 청나라는 [7]랴오둥 반도, [6]타이완 섬, [3]펑후 제도 등 부속 여러 섬의 주권 및 그 지방에 있는 성루, 병기제조소 등을 일본에 양도한다. 3. 청나라는 일본에 배상금 2억 3천냥을 지불한다. 당시 일본 화폐로 환산하면 3억 6천만 엔으로 일본 정부 4년치 세입이다. 4. 청나라는 사스(沙市), 충칭(重慶),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를 개방하고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승인한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배제되었고 일본은 조선에서 만주까지 지배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패배한 청나라는 조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고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는 일본의 [5]메이지 유신 이후의 근대화와 청나라의 [4]양무운동 이후의 근대화를 비교해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의 엄청난 이득이 알려지자 일본의 세력 확대를 염려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는 청나라에 반환하였다.
[1] 시모노세키 : 일본의 야마구치현에 있는 항구도시로 도쿄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으로 조선통신사도 이곳을 통해 일본을 왕복했다 [2] 이홍장(리훙장,李鴻章, 1823년~1901년) :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정치가로 중국 부국강병을 위하여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3] 펑후 제도 : 중화민국 타이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타이완 해협 상의 군도. 총 연장은 약 300km에 이르며 크고 작은 9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4] 양무(洋務)운동 : 양무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교류 등을 일컫는 말. 청나라는 국제사회에 변화에 눈을 뜨면서 서구 열강에 대응하기 위하여 황폐한 산업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나아가서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자하는 운동 [5] 메이지 유신 : 1868년 일본이 정치·경제·문화등 전 분야에 걸쳐 근대화를 성공시킨 과정 [6] 타이완 : 현 중화민국.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동안 일본 식민지배로 있었다 [7] 랴오둥반도(遼東半島) : 요동반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에 할양했으나, 삼국간섭으로 반환받았다. 이후 러시아가 지배했다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다시 지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국공내전을 거친 중화인민공화국의 랴오닝성에 남아 현재에 이른다 [8] 공친왕(1833년~1898년) : 청나라 함풍제(청나라 제9대 황제)의 이복 동생.혁흔. 청나라 제8대 황제인 도광제의 6남이며 신유정변으로 권력의 중심에 서게된다. [9] 이토 히로부미(1841년~1909년) : 일본의 1,5,7,10대 내각총리대신.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인물들 중의 한 명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조선왕후(명성황후) 민씨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일본 자객에 의해 경복궁의 건청궁 옥호루에서 시해 당했다. 명성황후 암살사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16세 때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사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을미개혁은 제1·2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김홍집 내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보아 제3차 갑오개혁이라고도 한다.
조선정부의 친러 정책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친러 정책을 주도한 명성 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감행하였다. 친러내각이 붕괴되고 친일적 성격이 강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추진된 개혁을 을미개혁으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
- 군제를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
- 단발령 시행
- 태양력을 채택하고 종두법을 시행함
-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우편 사무가 재개됨
-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소학교가 설립됨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시행하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대규모 항일의병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는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신하게 하였다(아관파천).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러시아, 미국과 가깝게 지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새 내각을 세웠다.
이로 인해 김홍집내각은 전복되고 일본의 입지가 추락되었고 강제에 의한 개혁이 중단되었으며, 구내각의 김홍집·정병하·어윤중 등 정부의 몇몇 개화파인사들은 서울과 지방에서 각기 성난 군중에 의해 피살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미개혁)]
고종은 1895년 [1]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공포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은 이후 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약 1년 동안 이곳에서 생활했다.
1896년 6월 고종의 명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특명전권공사 자격으로 파견된 [2]민영환은 러시아 외무장관 로바노프를 만나 러시아 군대파견, 군사교관단 파견, 차관제공, 재정고문초빙, 전신선 가설 등의 요청을 하였다. [2]민영환의 절박함과 진정성으로 1896년 10월 러시아는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을 파견한다. 교관단들은 조선군 1600여 명을 선발해 군사훈련을 시키게 된다.
안전신변이 확보된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덕수궁(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빼았겼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1] 을미사변 : 1895년 일본에 의하여 조선왕후인 명성왕후가 살해된 사건
[2] 민영환(1861년~1905년) :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11월 30일 자결하였다.
* 아관 : 러시아제국을 한문으로 '아라사'라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였다. 따라서 아라사 공관을 줄여서 아관이라고 불렀으며 러시아 공관을 의미한다
* 파천 : 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가는 것
*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1841년~1910년) : 러시아 제국의 외교관으로 1885년부터 1897년까지 주(駐)조선 러시아 공사로 활동하면서 고종과 친분을 쌓았으며 아관파천을 주도하였다
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시행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개혁이다.
광무개혁은 '옛 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 것을 참고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부분적으로 서양의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의 발전을 이룩하려 하였다.
대한제국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자주성을 뒷받침하기 이해 국방력 강화와 재정 개혁,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먼저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고, 서울의 중앙군과 지방의 지방군을 대폭 증강하며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다. 해군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함인 양무호를 구입하였다. 양무호는 매우 빈약했으며 이마저도 러일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겨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1896년 1월 11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였으나 아관파천 이후 폐지되고 대한제국이 건국 후 1898년에 육군무관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9년에 [1]양지아문을 설치하고 1899년부터 1903년까지 일부 지역에서 토지조사사업과 [2]지계발급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토지를 법률의 보호 아래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는 토지거래 질서가 확립 되었으며, 국가 재정을 개선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갑오개혁 때 23부로 개편한 행정을 아관파천 이후 13도로 재개편하였다,
적극적으로 추진된 분야는 상공업 진흥책이다. 정부 스스로 제조공장을 설립했으며, 민간의 제조회사 설립을 지원하여 섬유, 철도, 운수, 광업, 금융 분야에서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했으며, 공업전습소 등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황실에서는 방직공장, 유리공장, 제지공장의 설립을 시도했고, 일반 민간인의 공장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지만 황실이 직영하는 업종 이외의 것은 쉽게 허가하였다.
정부는 근대 과학기술을 수용하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근대적 관립·사립학교와 각종 외국어·실업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의학교를 설립하여 국민들의 위생과 보건에 노력했으며 중학교를 설립하여 중등교육의 근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한성도시개조상업을 통해 도로와 하수도를 정비하고 교통, 통신, 전기, 전차 등의 근대 시설을 도입하여 산업발전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시기인 1899년에 전차개통과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그 밖에 도량형 제도와 호적제 실시, 순회 재판소 설치, 종합병원인 제중원(濟衆院), 구휼기관인 혜민원(惠民院)등이 설립되었다.
광무개혁은 이처럼 전제군주제의 확립을 통해 근대 주권국가를 지향했고, 짧은 기간에 국방, 산업, 교육, 기술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러일전쟁과 함께 대한제국 정부의 개혁 사업은 중단되었다.
광무개혁은 황제권 강화라는 보수적인 색채와 지계발급, 상공업 진흥, 기술학교 설립, 교통.통신의 인프라 개선등 개혁적이고 새로운 특징을 볼 수 있다. 또한 갑신벙변, 갑오개혁, 을미개혁 같은 개혁들에 비해 자주적으로 추진했던 개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보수적인 인물들이 광무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을 들어 광무개혁의 개혁성을 부인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