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
대한민국
사건기간 : 1995년 4월 28일, 조회수 : 385, 등록일 : 2020-10-10
1995년 4월 28일 오전 7시 52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서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상인역 공사장에서 일어난 가스폭발 사고이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 들어설 예정으로 지반 공사 중이던 대구백화점 상인지점 신축공사 작업중 도사가스관이 파손되어 유출된 가스가 하수관을 통해 대구 지하철 1호선 상인역 공사장으로 유입되었고 한동안 괴어 있다가 원인불명으로 폭발한 사고이다.
이 폭발 사고로 사망 101명, 부상 202명의 인명피해와 건물 346개소 부분파손, 차량 150대 파손, 지하철공사장 및 현장주변시설물 파손 등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 들어설 예정으로 지반 공사 중이던 대구백화점 상인지점 신축공사 작업중 도사가스관이 파손되어 유출된 가스가 하수관을 통해 대구 지하철 1호선 상인역 공사장으로 유입되었고 한동안 괴어 있다가 원인불명으로 폭발한 사고이다.
이 폭발 사고로 사망 101명, 부상 202명의 인명피해와 건물 346개소 부분파손, 차량 150대 파손, 지하철공사장 및 현장주변시설물 파손 등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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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리온 내전(1991~2002)은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발생한 참혹한 무력 충돌로, 약 11년간 지속되며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과 인권 유린을 초래한 내전이다. 1991년 3월 23일 [2]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은 시에라리온 반군 조직인 [1]혁명연합전선이 시에라리온 동부 국경 지역을 점령하며 시작되었다.
[1]혁명연합전선의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는 시에라리온 정부의 부패와 불평등을 비판하며 무장 투쟁을 벌였지만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강제 징집, 성폭행, 어린 병사의 활용, 그리고 도끼로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특히 시에라리온의 풍부한 다이아몬드 자원을 이용해 무기와 자금을 확보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는 [4]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시에라리온 정부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양한 민병대 및 외국 용병들과 연합했으며,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한 [5]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전은 잦은 휴전과 협정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재개되었고 갈등은 점점 복잡해졌다.
1999년 7월 7일에 토고의 수도인 로메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지만 [1]혁명연합전선은 이 협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2000년 5월 [7]프리타운을 공격 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이후 [6]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었고, 영국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 단행하여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를 체포함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2년 1월 18일, 당시 대통령 [8]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가 공식적으로 전쟁 종식을 선언하며 종전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약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전후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전범 처벌이 이뤄졌고 국가 재건과 화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어졌다.
[1] 혁명연합전선(RUF, Revolutionary United Front) : 시에라리온 내전을 일으킨 반군 조직으로 부패한 정부 타도를 명분으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민간인 학살, 강제 노동, 아동 병사 징집 등 극단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다이아몬드 자원을 통해 무기를 조달하며 내전을 장기화시켰다. 현재는 해체되었다
[2]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 1989년 찰스 테일러가 주도해 결성한 무장 반군 조직으로 라이베리아 내전(1989~1997)의 주요 세력이었다. NPFL은 독재자 사무엘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대규모 민간인 학살, 강간, 강제 징집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전쟁 후 찰스 테일러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과 전쟁범죄로 국제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 포다이 사이바나 산코(Foday Saybana Sankoh, 1937년 10월 17일~2003년 7월 29일) :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아 시에라리온 반군 단체 혁명연합전선의 설립자. 시에라리온 내전 후 전쟁범죄로 기소되었으며, 2003년 재판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4] 블러드 다이아몬드(conflict diamonds, hot diamonds, war diamonds 또는 red diamonds) : 무력분쟁 지역(주로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수익금이 전쟁 수행을 위한 무기구매등 자금 조달에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5]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 :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가 설립한 군산 평화유지 기구로,주로 회원국 내 분쟁과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파병된다. 회원국은 가나, 감비아, 기니, 기니비사우, 나이지리아, 베냉, 라이베리아, 세네갈, 시에라리온, 카보베르데,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 12개 국가이다. 아프리카 연합 및 유엔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6] 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UNAMSIL, United Nations Mission in Sierra Leone) :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시에라리온에서 진행된 유엔 평화유지군. 1999년 10월 22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로메 평화협정을 이행하는 데 있어 정부와 다른 당사자들과 협력하고 군축, 동원 해제 및 재통합 계획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UNAMSIL을 설립했다. 2005년 12월 유엔 시에라리온 통합 사무소(UNIOSIL)가 뒤를 이었다. UNIOSIL의 임기는 두 번 연장되었고 2008년 9월에 끝났다
[7] 프리타운(Freetown) : 시에라리온의 수도
[8] 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Alhaji Ahmad Tejan Kabbah, 1932년 2월 16일 ~ 2014년 3월 13일) : 시에라리온의 정치인이다. 시에라리온의 제3대 대통령. 두차례 역임(1996년 3월 29일 ~1997년 5월 25일, 1998년 3월 10일~2007년 9월 17일)
[1]혁명연합전선의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는 시에라리온 정부의 부패와 불평등을 비판하며 무장 투쟁을 벌였지만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강제 징집, 성폭행, 어린 병사의 활용, 그리고 도끼로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특히 시에라리온의 풍부한 다이아몬드 자원을 이용해 무기와 자금을 확보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이는 [4]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개념이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시에라리온 정부군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양한 민병대 및 외국 용병들과 연합했으며,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한 [5]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의 도움을 받아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내전은 잦은 휴전과 협정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재개되었고 갈등은 점점 복잡해졌다.
1999년 7월 7일에 토고의 수도인 로메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지만 [1]혁명연합전선은 이 협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고 2000년 5월 [7]프리타운을 공격 하면서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이후 [6]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었고, 영국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 단행하여 [3]포다이 사이바나 산코를 체포함으로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2년 1월 18일, 당시 대통령 [8]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가 공식적으로 전쟁 종식을 선언하며 종전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약 5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전후 시에라리온 특별재판소가 설치되어 전범 처벌이 이뤄졌고 국가 재건과 화해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이어졌다.
[1] 혁명연합전선(RUF, Revolutionary United Front) : 시에라리온 내전을 일으킨 반군 조직으로 부패한 정부 타도를 명분으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민간인 학살, 강제 노동, 아동 병사 징집 등 극단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다이아몬드 자원을 통해 무기를 조달하며 내전을 장기화시켰다. 현재는 해체되었다
[2]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 1989년 찰스 테일러가 주도해 결성한 무장 반군 조직으로 라이베리아 내전(1989~1997)의 주요 세력이었다. NPFL은 독재자 사무엘 도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대규모 민간인 학살, 강간, 강제 징집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전쟁 후 찰스 테일러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시에라리온 내전 개입과 전쟁범죄로 국제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3] 포다이 사이바나 산코(Foday Saybana Sankoh, 1937년 10월 17일~2003년 7월 29일) :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라이베리아 애국전선의 지원을 받아 시에라리온 반군 단체 혁명연합전선의 설립자. 시에라리온 내전 후 전쟁범죄로 기소되었으며, 2003년 재판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사망했다
[4] 블러드 다이아몬드(conflict diamonds, hot diamonds, war diamonds 또는 red diamonds) : 무력분쟁 지역(주로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다이아몬드의 수익금이 전쟁 수행을 위한 무기구매등 자금 조달에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5]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 감시단(ECOMOG,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 :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WAS)가 설립한 군산 평화유지 기구로,주로 회원국 내 분쟁과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파병된다. 회원국은 가나, 감비아, 기니, 기니비사우, 나이지리아, 베냉, 라이베리아, 세네갈, 시에라리온, 카보베르데, 코트디부아르, 토고 등 12개 국가이다. 아프리카 연합 및 유엔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6] 시에라리온 유엔 임무단(UNAMSIL, United Nations Mission in Sierra Leone) :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시에라리온에서 진행된 유엔 평화유지군. 1999년 10월 22일, 안전보장이사회는 로메 평화협정을 이행하는 데 있어 정부와 다른 당사자들과 협력하고 군축, 동원 해제 및 재통합 계획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UNAMSIL을 설립했다. 2005년 12월 유엔 시에라리온 통합 사무소(UNIOSIL)가 뒤를 이었다. UNIOSIL의 임기는 두 번 연장되었고 2008년 9월에 끝났다
[7] 프리타운(Freetown) : 시에라리온의 수도
[8] 알하지 아마드 테잔 카바(Alhaji Ahmad Tejan Kabbah, 1932년 2월 16일 ~ 2014년 3월 13일) : 시에라리온의 정치인이다. 시에라리온의 제3대 대통령. 두차례 역임(1996년 3월 29일 ~1997년 5월 25일, 1998년 3월 10일~2007년 9월 17일)
1991년 민족과 지역 간 갈등으로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1990년대 내내 일련의 전쟁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어 7개 나라로 분리되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불렀지만 내전은 같은 나라 안에서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무력투쟁을 말하는데 1992년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해체되어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연방 분리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연방 유지를 주장한 세르비아간의 전투로 시작되었다.
* 유고연방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코소보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불렀지만 내전은 같은 나라 안에서 정치권력을 얻기 위한 무력투쟁을 말하는데 1992년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가 해체되어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연방 분리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연방 유지를 주장한 세르비아간의 전투로 시작되었다.
* 유고연방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코소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보슈냐크계(이슬람교), 크로아티아계(카톨릭), 세르비아계(정교회)등으로 구성된 3개의 언어와 민족, 종교가 공존하는 국가이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분열로 1990년에 연방 구성국인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을 하였다. 이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도 독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보스니아의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독립에 찬성하였으나 세르비아계는 연방 잔류를 원하면서 분란이 시작되었다.
1992년 2월 29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독립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분리 독립을 반대한 세르비아계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투표결과 독립찬성으로 나오자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선포하고 유고 연방으로 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세르비아계는 반발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세르비아계의 [1]라도반 카라지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내 [2]스릅스카 공화국을 세우고 유고연방의 [3]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지원으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세르비아계군에 의해 1992년 4월 6일부터 43~44개월간 봉쇄된 사라예보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으며 도시내에서 포격과 저격으로 무고한 시민 1만 6천여명이 사망했다. 사라예보로 들어가는 식량과 의약품 보급을 차단한 뒤 언덕마다 저격수를 배치해 민간인을 사살하고 박격포를 쏘는 등 테러행위를 자행했다. 또한 1896년에 개관하여 보스니아에 남은 오스만 제국 문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양한 문서가 보존된 국립도서관이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보스니아 전역에서 25~30만명이 숨지고 '나치의 대학살'에 비유될 만큼 참혹했다. 민족과 종교의 갈등으로 전쟁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전투가 아닌 인종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대량학살로 사망했다. 또한 보스니야계 주민들을 가둬두었던 사라예보 인근마을인 그르바비차에서는 계획적으로 2만명의 여성이 집단강간을 당했다.
내전이 격화하자 나토(NATO)가 인종 청소를 벌이는 등 만행을 자행하던 세르비아계 군대를 공습하는 등 국제사회가 개입했다.
결국 1995년 12월 14일 미국의 중재로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서 협정이 체결되어 세르비아계(스릅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계-보슈냐크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하나의 연방내에서 공존하는 1국가 2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관련영화] 그르바비차(Grbavica) : 2006년 공개. 2006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 내용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살고 있는 12세난 소녀 사라가 자신이 전쟁영웅의 딸이 아니라 세르비아군의 강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 장르 : 드라마, 90분
- 감독 : 야스밀라 즈바닉(Jasmila Zbanic)
- 주연 : 미르야나 카라노비치(Mirjana Karanovic 에스마 역), 루나 미조빅(Luna Mijovic, 사라 역), 레온 루체프(Leon Lucev, 펠다 역)
[1]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 1945년~) : 스릅스카 공화국의 제1대 대통령(1992년~1996년).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대학살을 주도한 전쟁범죄자로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이 종전되자 종적을 감추었다. 이후 전쟁 범죄자로 지명 수배중에 2008년 7월 체포되어 2016년 1심재판 징역 40년, 1019년 2심 재판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세르비아계 자치공화국
[3]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 1941년~2006년)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1997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3대 대통령(1997년~2000년). 세르비아인이 아닌 타 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갖은 만행을 주도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 행위로 유고연방 대통령에서 사임하고 2001년에 부정부패, 권력남용, 횡령혐의 및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중에 2006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분열로 1990년에 연방 구성국인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을 하였다. 이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도 독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보스니아의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독립에 찬성하였으나 세르비아계는 연방 잔류를 원하면서 분란이 시작되었다.
1992년 2월 29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독립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분리 독립을 반대한 세르비아계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투표결과 독립찬성으로 나오자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선포하고 유고 연방으로 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세르비아계는 반발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세르비아계의 [1]라도반 카라지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내 [2]스릅스카 공화국을 세우고 유고연방의 [3]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지원으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세르비아계군에 의해 1992년 4월 6일부터 43~44개월간 봉쇄된 사라예보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으며 도시내에서 포격과 저격으로 무고한 시민 1만 6천여명이 사망했다. 사라예보로 들어가는 식량과 의약품 보급을 차단한 뒤 언덕마다 저격수를 배치해 민간인을 사살하고 박격포를 쏘는 등 테러행위를 자행했다. 또한 1896년에 개관하여 보스니아에 남은 오스만 제국 문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양한 문서가 보존된 국립도서관이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보스니아 전역에서 25~30만명이 숨지고 '나치의 대학살'에 비유될 만큼 참혹했다. 민족과 종교의 갈등으로 전쟁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전투가 아닌 인종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대량학살로 사망했다. 또한 보스니야계 주민들을 가둬두었던 사라예보 인근마을인 그르바비차에서는 계획적으로 2만명의 여성이 집단강간을 당했다.
내전이 격화하자 나토(NATO)가 인종 청소를 벌이는 등 만행을 자행하던 세르비아계 군대를 공습하는 등 국제사회가 개입했다.
결국 1995년 12월 14일 미국의 중재로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서 협정이 체결되어 세르비아계(스릅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계-보슈냐크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하나의 연방내에서 공존하는 1국가 2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관련영화] 그르바비차(Grbavica) : 2006년 공개. 2006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 내용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살고 있는 12세난 소녀 사라가 자신이 전쟁영웅의 딸이 아니라 세르비아군의 강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 장르 : 드라마, 90분
- 감독 : 야스밀라 즈바닉(Jasmila Zbanic)
- 주연 : 미르야나 카라노비치(Mirjana Karanovic 에스마 역), 루나 미조빅(Luna Mijovic, 사라 역), 레온 루체프(Leon Lucev, 펠다 역)
[1]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žić, 1945년~) : 스릅스카 공화국의 제1대 대통령(1992년~1996년).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대학살을 주도한 전쟁범죄자로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이 종전되자 종적을 감추었다. 이후 전쟁 범죄자로 지명 수배중에 2008년 7월 체포되어 2016년 1심재판 징역 40년, 1019년 2심 재판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세르비아계 자치공화국
[3]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 1941년~2006년)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1997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3대 대통령(1997년~2000년). 세르비아인이 아닌 타 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갖은 만행을 주도했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 행위로 유고연방 대통령에서 사임하고 2001년에 부정부패, 권력남용, 횡령혐의 및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중에 2006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경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사건으로 백화점 건물이 무너지면서 1,445명의 종업원과 고객들이 부상당하거나 사망하였다(사망자:502명, 부상자:937명, 실종:6명)
붕괴의 원인이 비리와 갑질로 얼룩진 부실공사로 밝혀지면서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함께 안전불감증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었고 전국적인 건축물 안전실태 조사와 건축법의 강화 계기가 되었다.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 착공하여 1989년 12월 1일 개장하였으며 당시 전국 2위 규모의 단일매장이었다.
붕괴의 원인이 비리와 갑질로 얼룩진 부실공사로 밝혀지면서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함께 안전불감증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었고 전국적인 건축물 안전실태 조사와 건축법의 강화 계기가 되었다.
삼풍백화점은 1987년 5월 착공하여 1989년 12월 1일 개장하였으며 당시 전국 2위 규모의 단일매장이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1991년 10월 15일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한 후 세르비아계는 연방 잔류를 원하면서 [2]스릅스카 공화국을 결성해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 민족은 각 종교에 따라 크게 보스니아 무슬림,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 가톨릭의 크로아티아인 등으로 나눠지는 데, 과거 역사 속에서 이들은 혼란이 대두될 때마다 서로 간의 인종 청소 및 종교 개종을 강요해 왔었다. 즉 과거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공포는 서로 간의 불신과 집단적 자위 의식을 낳았으며, 이러한 점이 바로 이 지역 내 내전이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간, 잔인하게 이어진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스레브레니차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의 스릅스카 공화국에 속하는 산악 마을로 보스니아 전쟁 종료 이전까지 이 지역의 주된 민족은 무슬림인이었다.
보스니아 내전 중인 1995년 7월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가 UN 안전지역으로 지정된 스레브레니차 마을에서 8,000여명의 보스니아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으로서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구 유고전범재판소에서 처형장면이 재판과정에서 공개되면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UN 평화유지군으로서 400명의 네덜란드군 중 150여명의 병력이 약 4만명의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집단 난민 지역이자 UN이 안전지역으로 설정한 스레브레니차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델란드군은 학살이 일어나기 직전 이미 30여명이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에 의해 포로로 잡히는 등 난민들을 보호하고 안전지대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어 1995년 7월부터 세르비아 민병대의 본격적인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자, 스레브레니차 주둔 네덜란드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UN군 소속 네덜란드 공군을 통해 공습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7월 11일 네덜란드군 소속 F-16기 두 대의 공습 이후, 추가 공습시 30명의 네덜란드군 포로들을 사살하겠다는 세르비아 측의 경고에 따라 이 공습 또한 중단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결국 네덜란드군은 규모상 스릅스카 반군과 저항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난민들을 보호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 결과 UN이 정한 안전지내에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한 보스니아 무슬림의 대량 학살이 자행되는 참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는 인종 청소의 일환으로 곳곳에서 무슬림 난민의 남성과 소년들을 골라 처형했다. 불도저로 흙을 파낸 뒤 수천명의 시신을 암매장했다. 여성들과 소녀들은 인종 정화를 명분으로 강간 피해를 당한 뒤 사살당했다.
비공식적 통계에 따르면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 당시 희생자 수는 25,000명~30,000명에 달한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유럽의 킬링필드라고 불리며 '인종청소'라는 명목하에 세브비아인들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학살로 비난받고어 있다.
보스니아 실종자 관련 연방위원회가 발표한 학살 피해자로 집계된 공식 실종자 및 사망자는 총 8,372명이 확인되어 있으며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계속 추가될 예정이다.
참고문헌 :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 대학살, 그 배경과 교훈, 김철민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학대학 교수), 작성일: 2013년 8월 19일
[1] 스레브레니차(Srebrenic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
[2]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르비아계 자치 공화국 공화국.국명인 스릅스카(Српска)는 세르비아인에 접미사 '-ска'가 붙은 형태의 단어로 '세르비아인의 땅'을 의미한다. 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이 반발하여 스릅스카 공화국을 결성해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3] 라트코 믈라디치(Ratko Mladić, 1943년 ~) : 유고슬라비아 및 스릅스카 공화국의 군인이으로 보스니아 내전 당시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주도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보스니아 내전의 최고위 전범 3명 중 한 명이다. 2011년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보스니아 민족은 각 종교에 따라 크게 보스니아 무슬림,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 가톨릭의 크로아티아인 등으로 나눠지는 데, 과거 역사 속에서 이들은 혼란이 대두될 때마다 서로 간의 인종 청소 및 종교 개종을 강요해 왔었다. 즉 과거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공포는 서로 간의 불신과 집단적 자위 의식을 낳았으며, 이러한 점이 바로 이 지역 내 내전이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간, 잔인하게 이어진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스레브레니차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의 스릅스카 공화국에 속하는 산악 마을로 보스니아 전쟁 종료 이전까지 이 지역의 주된 민족은 무슬림인이었다.
보스니아 내전 중인 1995년 7월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가 UN 안전지역으로 지정된 스레브레니차 마을에서 8,000여명의 보스니아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으로서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구 유고전범재판소에서 처형장면이 재판과정에서 공개되면서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UN 평화유지군으로서 400명의 네덜란드군 중 150여명의 병력이 약 4만명의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집단 난민 지역이자 UN이 안전지역으로 설정한 스레브레니차 인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델란드군은 학살이 일어나기 직전 이미 30여명이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에 의해 포로로 잡히는 등 난민들을 보호하고 안전지대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어 1995년 7월부터 세르비아 민병대의 본격적인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자, 스레브레니차 주둔 네덜란드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UN군 소속 네덜란드 공군을 통해 공습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7월 11일 네덜란드군 소속 F-16기 두 대의 공습 이후, 추가 공습시 30명의 네덜란드군 포로들을 사살하겠다는 세르비아 측의 경고에 따라 이 공습 또한 중단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결국 네덜란드군은 규모상 스릅스카 반군과 저항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난민들을 보호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 결과 UN이 정한 안전지내에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한 보스니아 무슬림의 대량 학살이 자행되는 참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세르비아 스릅스카 민병대는 인종 청소의 일환으로 곳곳에서 무슬림 난민의 남성과 소년들을 골라 처형했다. 불도저로 흙을 파낸 뒤 수천명의 시신을 암매장했다. 여성들과 소녀들은 인종 정화를 명분으로 강간 피해를 당한 뒤 사살당했다.
비공식적 통계에 따르면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 당시 희생자 수는 25,000명~30,000명에 달한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유럽의 킬링필드라고 불리며 '인종청소'라는 명목하에 세브비아인들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학살로 비난받고어 있다.
보스니아 실종자 관련 연방위원회가 발표한 학살 피해자로 집계된 공식 실종자 및 사망자는 총 8,372명이 확인되어 있으며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계속 추가될 예정이다.
참고문헌 : 보스니아 스레브레니차 대학살, 그 배경과 교훈, 김철민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학대학 교수), 작성일: 2013년 8월 19일
[1] 스레브레니차(Srebrenic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
[2]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르비아계 자치 공화국 공화국.국명인 스릅스카(Српска)는 세르비아인에 접미사 '-ска'가 붙은 형태의 단어로 '세르비아인의 땅'을 의미한다. 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이 반발하여 스릅스카 공화국을 결성해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3] 라트코 믈라디치(Ratko Mladić, 1943년 ~) : 유고슬라비아 및 스릅스카 공화국의 군인이으로 보스니아 내전 당시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주도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보스니아 내전의 최고위 전범 3명 중 한 명이다. 2011년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1995년 10월 28일 아제르바이잔 바쿠(Baku)에서 운행되고 있던 바쿠 지하철의 울두즈(Ulduz)역과 나리만 나리마노프(Neriman Nerimanov)역 사이에서 발생한 화재이다. 이 화재로 289명이 사망하고 270명이 부상을 입었다.
* 바쿠(Baku) : 아제르바이잔 수도. 카스피 해의 최대 항구 도시
* 바쿠(Baku) : 아제르바이잔 수도. 카스피 해의 최대 항구 도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평화를 위한 기본협정으로 도시의 이름을 따서 [1]데이턴 협정으로 부르며 이 협정을 체결하면서 보스니아 전쟁이 종결되었다.
1995년 11월 21일, 미국이 주도한 데이턴 협정이 타결되고 12월 14일 파리에서 협정이 공식 조인됨으로써 발칸 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보스니아 전쟁이 끝났다. 협정 당사자이면서 참석자는 [2]슬로보단 밀로셰비치, [3]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4]프라뇨 투지만이었다.
이 협정으로 세르비아인을 중심으로 한 스르프스카 공화국과 보스니아 이슬람교도와 크라아티아인으로 구성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으로 구성된 1국가 2체제 형태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 의거해서 이슬람인 보스니아계와 카톨릭인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 정교인 세르비아계에서 선출된 세 명의 대통령이 8개월마다 번갈아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는 특이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1] 데이턴(Dayton) : 미국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도시
[2]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 1941년~2006년)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1997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3대 대통령(1997년~2000년)
[3]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egovic, 1925년~2003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초대 대통령
[4]프라뇨 투지만(Franjo Tudjman, 1922년~1999년) :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독립한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
1995년 11월 21일, 미국이 주도한 데이턴 협정이 타결되고 12월 14일 파리에서 협정이 공식 조인됨으로써 발칸 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보스니아 전쟁이 끝났다. 협정 당사자이면서 참석자는 [2]슬로보단 밀로셰비치, [3]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4]프라뇨 투지만이었다.
이 협정으로 세르비아인을 중심으로 한 스르프스카 공화국과 보스니아 이슬람교도와 크라아티아인으로 구성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으로 구성된 1국가 2체제 형태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 의거해서 이슬람인 보스니아계와 카톨릭인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 정교인 세르비아계에서 선출된 세 명의 대통령이 8개월마다 번갈아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는 특이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1] 데이턴(Dayton) : 미국 오하이오주에 위치한 도시
[2]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 1941년~2006년)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한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1997년). 유고슬라비아 연방(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3대 대통령(1997년~2000년)
[3]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egovic, 1925년~2003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초대 대통령
[4]프라뇨 투지만(Franjo Tudjman, 1922년~1999년) :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독립한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