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 서울수복
인천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향해 진군하였다.
미 해병 제1사단과 국군 해병대는 1950년 9월 18일 김포비행장을 탈환한 뒤 행주나루와 여의도, 서강방향에서 한강을 건너 일부는 서울 북쪽을 차단하고 중아청 방향으로 공격하였다. 한강 남쪽을 이동한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는 서빙고에서 강을 건너 남산과 서울 동쪽 지역을 점령하였다.
북한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국군은 항공기와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지원 덕분에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서울을 포위한 한미연합군은 9월 25일 오후부터 시간전에 돌입하였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9월 27일 오전 6시 국군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마침내 8월 28일 국군은 전쟁이 발발한지 석달만에 수도 서울을 되찾았고 다음날 정오 국회의사당에서 수도 탈환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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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독립전쟁, 프랑스-베트남 전쟁등으로 불린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베트민의 [2]호찌민은 바로 다음날인 8월 16일 전국 국민회의를 주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8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9월 2일 자신이 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1946년 11월 23일 프랑스가 [5]하이퐁 항구를 포격하여 6,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45년 12월 19일 [4]보응우옌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군은 하노이의 프랑스군을 공격하였다. [2]호찌민은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베트남 독립전쟁인 제1차 [1]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프랑스는 재정문제와 내부의 반발과 비판하는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54년 5월 7일 [6]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전하면서 베트민과 휴전 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56일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천명~3천명의 전사자를 냈고 8년간의 전쟁에서 총 7만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다.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양측은 휴전 협정을 통하여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프랑스의 남베트남(월남)과 베트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 월맹)으로 나눠졌으며 남북으로 2km씩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되었다.
[1] 인도차이나 :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또는 인도차이나 연방이라고 불렸다
[2] 호찌민(Ho Chi Minh, 1890년~1969년) : 본명은 응우옌 신 꿍(Nguyen Sinh Cung).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베트남의 초대 국가주석. 현대 베트남의 국부(國父)
[3] 베트민(Viet Minh) : 베트남 독립동맹회(越南獨立同盟會)의 약칭으로, 1941년 5월 19일 호찌민이 빡보에서 설립한 베트남 민족독립주의 단체이다. 대한민국 한자음으로 월맹(越盟)으로 알려져 있다.1941년에 호찌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의 민족주의 계열 정당의 동맹으로 결성되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독립의 주역이다
[4]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1911년~2013년) : 베트남의 장군이자 정치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 뒤이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까지 승리를 이끈 현대 베트남 최고의 명장
[5] 하이퐁(Hai Phong) : 베트남 동북부의 항구 도시
[6] 디엔비엔푸(Điện Biên Phủ) : 베트남 북부, 라오스와의 접경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당시 프랑스군이 베트민의 교통을 차단하고자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였으나 베트민의 포위공격에 항복함으로써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죄없는 민간인들이 무차별하게 희생당한 사건이 제주 4.3사건이다. 민간인 희생자는 약 3만명으로 추정된다.
학살 피해자들의 유족 및 제주 도민들은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하여 노력했으나 민주화 이후에도 4.3사건의 부정과 탄압이 계속되었다.
2000년에 이르러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1] 남조선노동당 : 1946년 11월 23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3당 합당으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 당수는 초대 여운형, 2대 허헌, 3대 박헌영이 맡았다
북한의 김일성은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남침하였다.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한의 기습으로 남한은 3일만에 수도 서을을 빼앗겼으며 북한군은 여세를 몰아 7월 3일에는 한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였다.
유엔결의에 의해 유엔군이 조직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7월 14일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갔다. 남으로 계속 밀린 남한군과 유엔군은 부산을 거점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확보하여 항쟁하였다.
9월 15일 새벽 유엔군의 총사령관인 맥아더의 지휘아래 인천 월미도에 기습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 26일에 서울에 진입하였고 9월 29일에는 빼앗겼던 서울을 되찾았다.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과 남한군은 여세를 몰아 계속 북상하였다. 유엔군은 11월 21일에 압록강 연안까지 북진하였으나 11월 25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북한군은 1951년 1월 4일에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고 남한은 다시 남쪽으로 밀려났다. 이른바 1.4후퇴가 시작되었다. 3월 14일 유엔군은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며 3월 24일에는 38선을 다시 돌파하였다.
전쟁이 장기화할 조짐이 나타나면서 1951년 7월 10일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여러차례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간헐적인 사건 및 전투는 계속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비로소 휴전협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3년 1개월에 걸친 전쟁은 종료되고 휴전이 성립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김일성(1912년~1994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최고지도자
* 유엔군(United Nations Command, UNC)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로 한국전쟁을 계기로 선립된 다국적군 사령부. 현재 대한민국에 주둔 중인 다국적 연합군 부대를 가리킨다.
*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년~1964년) : 한국전쟁당시 UN군 총사령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미국군과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활동
* 한국전쟁 참전국 : 미국, 영국, 네덜란드, 캐나다,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터키,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에디오피아, 콜롬비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해군은 보유 함정 수는 105척이었지만 대부분 장비가 노후해 작전 가능한 배는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까지 무장을 갖춘 전투용 함정은 단 한 척도 없었다. 1949년 6월, 해군참모총장 [1]손원일 제독은 전투용 함정을 구입하기 위하여 장교부터 사병까지 모금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해군장병의 성금과 정부의 지원금 6만 달러를 모았다.
1949년 10월 7일,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킹스포인트에 있는 해양대학교에서 [2]화이트헤드 소위호라는 실습선을 1만 8천달러에 구입하였다.
뉴욕의 미 해안경비대의 부두로 옮겨진 화이트헤드소위호는 12월 26일 함미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백두산(PC-701)함으로 명명하였다.
당시 화이트헤드 소위호는 퇴역한지 오래되었고 몹시 낡아 운용하기에는 많은 과정이 필요했다. 승조원들은 배에서 숙식하며 손수 수리하여 1950년 1월 24일 중간기착지인 하와이에 도착한다. 3월에 3인치(76mm) 주포를 장착하고 포탄 100발과 기름을 구입하여 1950년 4월 10일 해군기지인 경남 진해항에 입항했다.
백두산(PC-701)함은 해군장병들과 국민들의 성금으로 미국에서 구매한 함정으로서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이자 당시 유일한 전투함이었다.
손원일 제독은 나머지 돈으로 백두산함과 동형함을 한 척당 1만 2천 달러에 세척을 더 구입하였으며 이것이 각각 PC-702 금강산함, PC-703 삼각산함, PC-704 지리산함이었다.
6월 25일 오후 8시 경 연기를 내며 오고 있는 미식별 선박이 발견되었다. 국기와 선명도 표시되지 않은 선박의 갑판 뒤쪽에는 중기관총 2정과 수병복을 착용한 수많은 무장 병력이 승선해 있었다.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북한 정규해군 및 육전대의 복장으로 인해 북한의 선박임을 확신한 백두산함장은 적선으로부터 이탈하여 "확인된 선박은 북한의 1,000톤급 수송함정이며, 약 600명의 북한군이 승선한 채 남하 중에 있음. 상륙을 기도하는 것으로 판단됨"이라고 해군본부에 타전 보고하였다.
해군본부는 백두산함에서 보고한 상황을 경무대에 있는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고 국방부의 지시를 기다렸다. 국방부 장관은 "백두산함이 접촉 중인 선박이 적 공산군 함정으로 판단되면 쏘라"고 지시했다.
백두산함은 명령에 따라 위협사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적선은 선수갑판의 주포와 중기관총으로 대응사격을 해왔다.백두산함은 적선을 향해 주포를 발사했다. 이때 백두산함의 뒤를 따라 진해를 출발한 [3]소해정 고성정(YMS-518)이 현장에 도착하며 후방에서 적선에 대해 포를 발사하였다. 드디어 오전 1시경 적수송선은 포를 맞고 침몰하였다. 북한군 약 600여 명 전원이 사망하였다(추정).
이 해전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김종식 소위(병기관장), 김춘배 [4]삼등병조(주포 전환수)가 부상당했고 전병익 일등병조(포탄 장전수, 1929년생), 김창학 이등병조(조타수, 1929년생)이 전사하였다.
백두산의 대한해협 전투승전은 거의 무방비상태로 놓여있던 부산항의 안전을 확보한 전략적인 사건이었다. 이 대한해협전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의를 갖는다.
첫째, 미군이 참전하기 이전 우리 해군이 단독으로 적 선박을 격침시켰다.
둘째, 부산으로 향하는 군수물자와 증원 병력을 위한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했다.
셋째, 남해안 상륙을 기도한 적의 게릴라 부대를 격멸하여 후방교란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즉 한국전쟁의 발발 초기 후방으로 침투하는 북한군을 격퇴함으로써 부산 및 남해안의 안전을 확보한 의미있는 전투였다.
1959년 7월 1일 백두산함은 함체의 부식과 노후화로 인하여 퇴역하였다. 함체는 폐선 처리되어 해체되었으나 중앙의 마스트(돛대)만이 1965년 해군사관학교에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으며 2010년 6월 25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463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무위키
[1] 손원일(1909년~1980년) : 대한민국 해군 초대 참모총장, 제5대 국방부 장관, 초대 서독 주재 대한민국 대사등을 역임
[2] 화이트헤드 소위(Ensign Whitehead)호 : 미국의 PC-461급 구잠함(잠수함을 탐지하고 공격할 능력을 갖춘 대잠 함정)으로 원래 함명은 USS PC-823이다. 서대서양에 투입되어 해상 공중의 구조임무에 사용되었으며 미국 해군에서 퇴역한 후 화이트헤드 소위(Ensign Whitehead)라는 이름으로 실습선으로 사용되었다
[3] 소해정 : 1947년부터 1948년부터 미군정으로부터 18척을 인수 한 YMS-1급 목제 소해정. 인수후 함의 주무장 자체가 없었던 함정에 대해 37mm 대전차포와 20mm 기관포가 탑재되었다. 원래 소해정이란 기뢰를 제거하여 해상 안전을 도모하는 작은 군함을 말한다
[4] 병조 :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는 1962년까지는 병조장(상사), 일등병조(상사와 중사 사이), 이등병조(중사와 하사 사이), 삼등병조(하사)란 호칭을 썼다
1950년 한국전쟁중 미군의 [1]소개령에 따라 1950년 7월 25일 충청남도 영동읍 임계리로 모인 피난민중 500~600명을 미군이 남쪽(후방)으로 피난을 유도하였다. 이에 따라 7월 26일 정오경 4번 국도를 통해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들은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경부선 철로로 행로를 변경해 피난을 계속하던 중 미군은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숨어있다고 주장하며 미 공군의 폭격과 기관총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됐다.
피난민은 미군의 공격을 피해 황간면 노근리에 있는 [2]개근철교(쌍굴다리)밑으로 피신했고, 미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예하 부대는 26일 오후부터 29일 오전까지 쌍굴다리 밑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하여 다수의 피난민이 사망했다.
이후 몇 년 동안 생존자와 목격자들이 증언했으나 묻혀있다가 1999년 9월 30일 [3]AP통신이 노근리 사건을 특종 보도하며 그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2001년 1월 한미 양국 정부의 진상 조사결과가 공동 발표되었으며, 당시 미국 대통령인 [5]빌 클린턴이 유감을 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년간 조사가 이뤄졌으나 사실관계와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지는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2001년 한국 정부는 노근리 학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노근리 [2]개근철교(쌍굴다리) 2003년 6월 25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 2월 9일 노근리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같은 해 3월 5일 노근리사건특별법이 공포되었다.
노근리사건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개근철교(쌍굴다리) 건너편에는 희생자 추념을 위한 노근리평화공원이 건립되었다. 4만여 평에 이르는 공원 내에는 학살사건의 전모와,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 과정이 전시되어 있는 평화기념관이 세워져 있으며 평화와 인권에 대해 교육할 수 있는 교육관, 위령탑 등이 있다. 이곳에는 해마다 노근리 희생자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1999년 이 사건을 보도한 [3]AP통신 취재팀은 2000년에 탐사 보도 부문 [4]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소개령 : 비전투 인력의 대피. 미국 시민과 미국 국무부에 의거한 한국 구적의 인원들이 대피하는 것
[2]노근리 쌍굴다리 : 충청북도 영동군 경부선 철도에 1934년 건설되었다. 황간면 노근리와 영동읍 주곡리를 연결하기 위해 개근천(愷勤川)위에 놓인 철도교각이다. 미군의 총탄과 파편 흔적(○, △ 표시)이 아직도 남아있다. 노근리 쌍굴다리는 2003년 6월 30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다
[3] AP(Associated Press, AP)통신 :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 규모의 다국적 비영리 뉴스통신사. 미국에서 가장 오랜된 최대의 통신사. 1846년 5월에 신문사와 방송국의 협동조합 형태로 설립되었다
[4] 퓰리처상(Pulitzer Prize) : 미국의 신문 저널리즘, 문학적 업적과 명예, 음악적 구성에서 가장 높은 기여자로 선정되는 사람에게 주는 상. 1917년 미국의 언론인인 조지프 퓰리처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었으며, 미국 뉴욕 시에 위치한 컬럼비아 대학교 언론대학원 퓰리처상 선정위원회에 의해 관리한다. 매년 21개 부문으로 수여되며 권위와 신뢰도가 높아 기자들의 노벨상이라 불린다. 수상자는 인증서와 함께 미화 1만 달러를 받는다
[5]빌 클린턴(Bill Clinton, 1946년~) : 미국 제42대 대통령(재임, 1993년 1월 20일 ~ 2001년 1월 20일)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며 대한민국과 유엔군은 밀리는 상황이었다. 전세를 뒤집기 위해 당시 유엔군 사령관인 [2]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기획한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데 중대한 의미를 가진 작전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방어를 분산시키고 작전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추가적인 작전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장사 상륙작전이 기획되었다.
장사 상륙작전은[1] LST 문산호 1척을 이용해 이루어졌다. 상륙함은 목선으로 위장되었고, 9월 14일 부산항을 출발한 이후, 9월 15일 06:00에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대원들은 해변에 상륙하자마자 북한군의 후방 교란을 목표로 주요 도로와 철도 시설을 파괴하고 북한군의 병참선을 끊는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 심리전을 수행하며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작전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기상 악화로 인해 LST가 암초에 좌초되었고, 장비와 물자가 충분히 상륙하지 못했다. 또한 북한군의 예상보다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많은 대원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들은 끝까지 작전을 수행하며 북한군의 혼란을 유발했다.
장사 상륙작전은 작전 자체로는 제한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나, 북한군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하여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에게 유리하게 전환되었다.
장사 상륙작전에 참여한 많은 대원들은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그 희생은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LST 문산호는 좌초된 뒤 그대로 잊혀졌다가, 시간이 지나 1997년 3월 6일에 발견되어 인양되었다. 1997년, 작전에 대한 공로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이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상북도 영덕군 장사리에는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작전 당시 대원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추모비와 전시물이 마련되어 있다.
장사 상륙작전은 전투의 성공 여부를 떠나,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젊은이들의 용기와 애국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오늘날 이 작전은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저항과 생존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1] LST 문산 : LST-120(Landing Ship, Tank 120)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 해군 USS LST-120, 한국 전쟁 당시 대한민국 해군에서 LST 문산으로서 활동했던 전차상륙함이었다
[2]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년 1월 26일~1964년 4월 5일)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합중국군과 연합군의 지휘관
코드네임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으로 보안 유지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작전 후에는 인천전투(Battle of Inchon)로 불리고 있다.
인천 상륙 작전은 6·25 전쟁 당시 수세에 몰린 국군과 연합군이 전세를 역전 시킬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년~1964년) : 한국전쟁당시 UN군 총사령관.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미국군과 연합군의 지휘관으로 활동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불리한 전세를 뒤집었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전쟁의 확실한 승기를 잡기 위해 중공군의 한반도 개입을 무시하고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하면서 북으로 진격한다. 이에 미국 제10군단장인 [2]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의 예하부대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로 진격했다. 당시 제1해병사단장은 [3]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었다.
미 해병대가 장진호 북쪽까지 진격했을 때에는 중공군 제9병단 예하 사단 병력은 이미 장진호 일대를 포위하고 있었다. 11월 27일 중공군이 장신호 서북쪽 지역인 [4] 유담리의 미 제1해병대를 공격하며 전투가 개시되었다.
장진호 남쪽의 하갈우리의 공격은 중공군 제58사단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전투는 지옥과 다름없었다. 장진호 전투 초반인 11월29일 하갈우리와 남쪽의 [5] 고토리 사이의 해병대 부대들은 고립되고 통신조차 두절됐다. 중공군이 일본식 소총과 방망이 수류탄으로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온통 불바다였다. 전투가 어찌나 치열했던지 훗날 '지옥의 계곡'이라 불렀다.
당시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한랭전선의 영향으로 유래없는 영하 30도이하의 혹독한 강추위는 제3의 적이었다. 총의 쇠붙이에 손가락이 얼어붙었고 밤에는 병사가 참호를 지키다 그자리에서 동사하기도 했다. 수 많은 부상자를 차량에 몇겹씩 포개서 후송하는 것은 예사였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장진호 지역의 전황이 급변하자 미 제10군단은 11월 30일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으로 이동한다는 결정을하였다.
[4] 유담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미 제1해병사단은 이를 격파하고 12월 4일 [6] 하갈우리에 진입함으로써 유담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장진호 동쪽에서 고립된 미 제7사단은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하갈우리로 이동하였다.
계속되는 미 제1해병사단의 분전으로 12월 7일 [5] 고토리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해병사단은 12월 11일 함흥지역에 모두 집결함으로써 장진호전투를 마무리하였다.
이 전투는 "장진호 서쪽 지역(유담리)→장진호 동쪽 지역(신흥리)→장진호 남쪽 지역(하갈우리)→죽음의 계곡→고토리→[7]황초령→진흥리" 로 이어졌다. 장진호와 흥남까지의 거리는 126km라고 한다. 이후 피난민 10만명을 거제도로 탈출시킨 흥남철수작전으로 이어진다.
장진호 전투는 세계 3대 동계 동계전투로 모스크바전투, 스탈리그라드전투와 더불어 가장 치열한 동계전투중 하나이다. 또한 한국전쟁의 당사자인 남한군과 북한군이 아닌 미군과 중공군이 한국에서 수 만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희생해가면서 싸운 전투이다. 이들의 희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1] 장진호 : 함경남도 장진군에 있는 인공호수(저수지)
[2]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Almond, 1892년~1979년) : 한국전쟁당시 미국 육군 10군단 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상륙작전을 지휘하였으며 흥남철수에서 작전 계획에 없던 민간인수송을 명령하여 피난민 10만명을 거제도로 탈출시켰다
[3] 올리버 스미스(Oliver Prince Smith, 1893년~1977년) :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최종 계급은 미합중국 해병대 대장. 6.25전쟁당시 미해병대 1사단장으로 계급은 소장이었다. 장진호 전투 당시 상부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진군속도를 늦추고 하갈우리에 활주로를 건설하는 등의 탁월한 판단을 통해 사상자를 최소화하였다. 장진호에서 후퇴할 당시에 "우리는 후퇴가 아니라 다른방향으로 진격 중이다"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4] 유담리 : 장진호 서북쪽에 있는 지역
[5] 고토리 : 하갈우리와 함흥으로 가는 중간 지역
[6] 하갈우리 : 장진호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 하갈우리를 지나야 흥남 항구로 갈 수 있다.
[7] 황초령 : 함경남도 함주군(지금의 영광군)과 장진군 경계에 있는 고개
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원산이 적중에 넘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흥남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전투를 피하여 함흥지역에서 피난길에 오른 피난민들 약 10만여명이 흥남부두에 운집하였다.
김백일 제1군단장과 미국 제10군단 소속의 민간인 고문관(통역관)인 현봉학의 설득으로 미국 10군단 사령관인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레너드 라루 선장은 운반하려던 무기를 포기하고 피난민을 수송하는 결단을 내렸다. 피난민 승선으로 버려진 무기들은 적군에게 포획되는 것을 염려하여 승선이 끝난 후 폭파시켰다.
이틀 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2박 3일 동안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한 명의 희생자없이 배는 경남 거제도에 도착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의 기적(Miracle of Christmas)이라고도 불린다.
흥남부두에서 안전지대로 수송된 피난민의 총수는 공식 기록 9만 1천명(또는 9만 8천명)으로 나타나 있다.
* 장진호 전투 : 한국 전쟁의 결정적 전투 중 하나로 미국 해병대와 중국군이 장진호(함경남도 장진군에 있는 장진강에 댐을 설치하여 만든 인공호)에서 벌인 전투
* 현봉학(1922년~2007년) : 대한민국의 의사이자 교수이다. 해방후 미국 버지니아주립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1950년 3월 귀국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다 한국전쟁을 맞았다.
*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Almond, 1892년~1979년) : 미국 육군 10군단 사령관
*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1914년~2001년) :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