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독립 전쟁(Dutch Revolt/80 Years War)
네덜란드
스페인
사건기간 : 1568년 3월 13일~1648년 10월 24일, 조회수 : 830, 등록일 : 2020-07-06
네덜란드(혹은 저지대)는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즉 베네룩스 지역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릴까지 포함하여 총 17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는 무적함대를 이끌며 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합스부르크 왕국의 스페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네덜란드 17개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개신교의 교세가 확산되자 이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 1세는 반기를 들면서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라는 두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과 대립하여 1588년 무적함대를 구성하여 영국으로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대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로 해상권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1600년 스페인과 해전에서 승리를 하며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의 후반부에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종교개혁 이후 야기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30년간의 종교전쟁(1618~1648)에 휘말렸으나 1648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고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 Empire)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부르는 말이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전체와 루마니아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이탈리아, 폴란드의 남부 등이 포함된다.
*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1598년
* 오라녜 공(Prins van Oranje) : 네덜란드의 왕위 계승자의 칭호
* 빌럼 1세(William I, 1533년~1584년) :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스페인과 가톨릭에 저항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의 국부로 빌럼 1세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또한 침묵공(De Zwijger)이라고도 불린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네덜란드 17개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개신교의 교세가 확산되자 이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 1세는 반기를 들면서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라는 두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과 대립하여 1588년 무적함대를 구성하여 영국으로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대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로 해상권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1600년 스페인과 해전에서 승리를 하며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의 후반부에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종교개혁 이후 야기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30년간의 종교전쟁(1618~1648)에 휘말렸으나 1648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고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 Empire)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부르는 말이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전체와 루마니아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이탈리아, 폴란드의 남부 등이 포함된다.
*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1598년
* 오라녜 공(Prins van Oranje) : 네덜란드의 왕위 계승자의 칭호
* 빌럼 1세(William I, 1533년~1584년) :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스페인과 가톨릭에 저항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의 국부로 빌럼 1세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또한 침묵공(De Zwijger)이라고도 불린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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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부터 1600년에 걸쳐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으로 파급된 문화, 예술 전반의 혁신 운동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중세의 기독교와 봉건 제도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의 자유, 개성의 존중을 강조한 인간 중심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였다.
영어: Renaissance
이탈리아어: Rinascimento
프랑스어: Renaissance
스페인어: Renacimiento
영어: Renaissance
이탈리아어: Rinascimento
프랑스어: Renaissance
스페인어: Renacimiento
교회는 교황과 함께 계속되었는데 교황은 마치 황제와 같은 인물이었고, 대주교와 주교들은 옛 로마마제국의 행정관들과 똑같으며, 그들 밑으로는 지역마다 사제들이 있었다. 이 신성한 단체는 그 자체의 법률, 형벌, 교도소 그리고 조세제도를 지니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가 당시 위와 같은 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한다.
죄 많고 타락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는 것이며, 믿음을 지닌다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는것을 주장(스스로 믿는 종교)하며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함으로써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던 개혁 운동이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 :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가 당시 위와 같은 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한다.
죄 많고 타락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는 것이며, 믿음을 지닌다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는것을 주장(스스로 믿는 종교)하며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함으로써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던 개혁 운동이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 :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1]위그노 전쟁은 프랑스에서 발생한 종교 전쟁이다. 1562년 3월 1일 로마 가톨릭 세력이 프랑스내 [2]칼뱅파 개신교도인 [1]위그노들에게 자행한 학살인 [3]바시학살로 인해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하층민은 물론 상업과 금융 계통의 부르주아에게 [2]칼뱅의 교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다른나라보다 잔혹하게 박해를 받았다.
1562년 4월 2일 파리의 모든 [1]위그노들에 대한 감금, 추방 및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에 각지의 개신교도들이 들고 일어나 양 종교 간의 피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백년전쟁 이후 한세기만에 프랑스 전 국토가 전장이 되었다.
이러한 위그노 전쟁은 1598년 [6]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개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함으로써 36년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개신교도의 예배는 불가하였고 구교와 신교의 재판도 공정하지 못하는 등.. 탄압과 충돌이 계속되었고, 급기야 1686년 [7]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지하였다.
결국 1787년 [8]루이 16세에 의하여 관용칙령이 발표됨으로써 프랑스 개신교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위그노 전쟁으로 백년전쟁이후 프랑스를 이끈 [4]발루아 왕조가 무너지고, [5]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1] 위그노(Les Huguenot) :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칼뱅의 개혁을 지지하던 개신교 신자
[2] 장 칼뱅(Jean Calvin, 1509년~1564년) : 종교개혁가. 프랑스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
[3] 바시학살(Massacre of Vassy) : 1562년 3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시(Vassy)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측의 군대가 창고에 모여서 예배중인 개신교인들을 습격하여 학살한 사건
[4] 발루아 왕조(House of Valois) : 1328년에서 1589년까지의 프랑스 왕국의 왕조. 필리프 6세부터 앙리 3세까지의 왕조
[5] 부르봉 왕조(House of Bourbon) : 1589년부터 1791년까지 그리고 1814년부터 1830년까지 프랑스왕국의 왕조. 앙리4세(재임, 1589년~1610년)부터 앙리 5세(재임, 1830년)까지의 왕조
[6] 앙리 4세(프Henri IV de France,1553년~1610년) : 프랑스 카페 왕조의 분가인 부르봉 왕가 최초의 왕(재위 : 1589년 8월 2일-1610년 5월 14일)
[7]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3대 국왕(재위,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태양왕으로 알려져 있다
[8]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프랑스는 하층민은 물론 상업과 금융 계통의 부르주아에게 [2]칼뱅의 교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다른나라보다 잔혹하게 박해를 받았다.
1562년 4월 2일 파리의 모든 [1]위그노들에 대한 감금, 추방 및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에 각지의 개신교도들이 들고 일어나 양 종교 간의 피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백년전쟁 이후 한세기만에 프랑스 전 국토가 전장이 되었다.
이러한 위그노 전쟁은 1598년 [6]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개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함으로써 36년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개신교도의 예배는 불가하였고 구교와 신교의 재판도 공정하지 못하는 등.. 탄압과 충돌이 계속되었고, 급기야 1686년 [7]루이 14세는 낭트칙령을 폐지하였다.
결국 1787년 [8]루이 16세에 의하여 관용칙령이 발표됨으로써 프랑스 개신교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위그노 전쟁으로 백년전쟁이후 프랑스를 이끈 [4]발루아 왕조가 무너지고, [5]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1] 위그노(Les Huguenot) :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칼뱅의 개혁을 지지하던 개신교 신자
[2] 장 칼뱅(Jean Calvin, 1509년~1564년) : 종교개혁가. 프랑스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
[3] 바시학살(Massacre of Vassy) : 1562년 3월 1일 프랑스 파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시(Vassy)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측의 군대가 창고에 모여서 예배중인 개신교인들을 습격하여 학살한 사건
[4] 발루아 왕조(House of Valois) : 1328년에서 1589년까지의 프랑스 왕국의 왕조. 필리프 6세부터 앙리 3세까지의 왕조
[5] 부르봉 왕조(House of Bourbon) : 1589년부터 1791년까지 그리고 1814년부터 1830년까지 프랑스왕국의 왕조. 앙리4세(재임, 1589년~1610년)부터 앙리 5세(재임, 1830년)까지의 왕조
[6] 앙리 4세(프Henri IV de France,1553년~1610년) : 프랑스 카페 왕조의 분가인 부르봉 왕가 최초의 왕(재위 : 1589년 8월 2일-1610년 5월 14일)
[7]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3대 국왕(재위,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태양왕으로 알려져 있다
[8]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년) : 프랑스 부르봉 왕조 제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레판토 해전은 16세기 후반, 지중해 패권을 둘러싸고 기독교 국가 연합군([2]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해군이 벌인 역사적인 해전이다.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해상 확장을 저지하고 유럽 기독교 세력이 단결하여 거둔 중요한 승리로 평가된다. 전투는 오늘날 그리스 서부의 [3]나프팍토스(Nafpaktos, 당시 레판토) 근해에서 벌어졌으며, 16세기 유럽과 이슬람 세계 간의 해양 전투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
16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유럽 기독교 국가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맞서기 위해 [5]교황 비오 5세는 [6]펠리페 2세가 통치하는 스페인, 베네치아 공화국, [1]교황령을 중심으로 한 신성 동맹을 조직하였다. 동맹군의 총사령관은 스페인의 [7]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맡았고, 오스만 해군은 [8]뮈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이끌었다.
전투는 기독교 연합군이 전열을 갖추고 오스만 해군과 직접 충돌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전투 초반 오스만군은 중앙에서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신성 동맹군은 전열을 유지하며 반격을 감행했다. 특히 기독교 연합군의 [9]갤리어스함선이 제공한 강력한 포격과, 베네치아 및 스페인 [10]갤리선들의 근접 전투가 승부를 가르는 요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2]신성 동맹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오스만 제국 해군의 200여 척이 파괴되거나 나포되었고, 수많은 병사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특히 오스만 해군의 총사령관 [8]뮈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전사하면서 전세는 더욱 기독교 연합군으로 기울었다. 이 전투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해군력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이후 몇 년 만에 빠르게 회복하여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레판토 해전은 16세기 후반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중요한 전투로, 기독교 연합군이 단결하여 오스만 제국의 해상 확장을 저지한 역사적 사건이다. 비록 이 승리가 오스만 제국의 해양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유럽 국가들에게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울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지중해의 해양 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전투는 이후 유럽 해군 전략과 전술 발전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서구와 이슬람 세계 간의 힘의 균형을 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 교황령(Papal States) : 중세 초기부터 근대까지 가톨릭 교황의 지배권이 미치는 영지로 교황국, 교회국, 교회령, 베드로 세습령이라고도 부른다. 동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여 성립되었고 이탈리아 통일로 멸망하였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로마시 안에 바티칸 시국을 건국함으로써 제한적으로나마 교황의 영토 주권이 회복되었다
[2] 신성동맹 : 지중해를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교황 비오 5세가 주동하여 지중해의 거의 모든 주요 카톨릭 국가들이 1571년 5월 25일에 결성한 군사동맹
[3] 나프팍토스(Nafpaktos) : 오늘날 그리스 서부의 도시. 코린토스 만의 접근을 통제하는 전략적으로 중용한 도시
[4] 코린토스 만 : 펠로폰네소스반도와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고 긴 만
[5] 교황 비오 5세(Pope Pius V, 1504년 1월 17일~1572년 5월 1일) : 제225대 교황, 재위: 1566년 1월 7일 ~ 1572년 5월 1일)
[6]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 5월 21일 ~ 1598년 9월 13일) :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 1월 16일~1598년 9월 13일
[7]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 1547년 2월 24일 ~ 1578년 10월 1일) :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으로 스페인의 장군. 레판토 해전의 신성 동맹 함대 총사령관
[8]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Müezzinzade Ali Pasha, ? ~1571년 10월 7일) :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으로,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을 지휘했으나 전투 중 전사한 총사령관
[9] 갤리어스(Galleass) : 갤리온(Galleon, 16~18세기에 주로 사용된 대형 범선으로 긴 선체, 높은 선수·선미, 여러 개의 돛대, 그리고 강력한 대포를 갖춘 것이 특징)의 돛과 무장과 노를 젓는 갤리의 기동성을 결합한 전함
[10] 갤리(Galley) : 노를 젓는 방식으로 추진되는 긴 선체의 군함 또는 선박을 의미하며, 고대부터 18세기까지 주로 지중해와 유럽 해역에서 군사 및 무역 용도로 사용되었다. 갤리는 한 개 이상의 돛과 다수의 노(rowers)를 갖춘 것이 특징으로, 특히 오스만 제국, 베네치아, 로마, 그리스 해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유럽 기독교 국가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맞서기 위해 [5]교황 비오 5세는 [6]펠리페 2세가 통치하는 스페인, 베네치아 공화국, [1]교황령을 중심으로 한 신성 동맹을 조직하였다. 동맹군의 총사령관은 스페인의 [7]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맡았고, 오스만 해군은 [8]뮈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이끌었다.
전투는 기독교 연합군이 전열을 갖추고 오스만 해군과 직접 충돌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전투 초반 오스만군은 중앙에서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신성 동맹군은 전열을 유지하며 반격을 감행했다. 특히 기독교 연합군의 [9]갤리어스함선이 제공한 강력한 포격과, 베네치아 및 스페인 [10]갤리선들의 근접 전투가 승부를 가르는 요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2]신성 동맹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오스만 제국 해군의 200여 척이 파괴되거나 나포되었고, 수많은 병사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특히 오스만 해군의 총사령관 [8]뮈에진자데 알리 파샤가 전사하면서 전세는 더욱 기독교 연합군으로 기울었다. 이 전투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해군력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이후 몇 년 만에 빠르게 회복하여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레판토 해전은 16세기 후반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중요한 전투로, 기독교 연합군이 단결하여 오스만 제국의 해상 확장을 저지한 역사적 사건이다. 비록 이 승리가 오스만 제국의 해양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유럽 국가들에게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울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지중해의 해양 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전투는 이후 유럽 해군 전략과 전술 발전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서구와 이슬람 세계 간의 힘의 균형을 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 교황령(Papal States) : 중세 초기부터 근대까지 가톨릭 교황의 지배권이 미치는 영지로 교황국, 교회국, 교회령, 베드로 세습령이라고도 부른다. 동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여 성립되었고 이탈리아 통일로 멸망하였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로마시 안에 바티칸 시국을 건국함으로써 제한적으로나마 교황의 영토 주권이 회복되었다
[2] 신성동맹 : 지중해를 지배하는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교황 비오 5세가 주동하여 지중해의 거의 모든 주요 카톨릭 국가들이 1571년 5월 25일에 결성한 군사동맹
[3] 나프팍토스(Nafpaktos) : 오늘날 그리스 서부의 도시. 코린토스 만의 접근을 통제하는 전략적으로 중용한 도시
[4] 코린토스 만 : 펠로폰네소스반도와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고 긴 만
[5] 교황 비오 5세(Pope Pius V, 1504년 1월 17일~1572년 5월 1일) : 제225대 교황, 재위: 1566년 1월 7일 ~ 1572년 5월 1일)
[6]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 5월 21일 ~ 1598년 9월 13일) :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 1월 16일~1598년 9월 13일
[7]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 1547년 2월 24일 ~ 1578년 10월 1일) :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으로 스페인의 장군. 레판토 해전의 신성 동맹 함대 총사령관
[8] 뮈에진자데 알리 파샤(Müezzinzade Ali Pasha, ? ~1571년 10월 7일) : 오스만 제국의 해군 제독으로,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을 지휘했으나 전투 중 전사한 총사령관
[9] 갤리어스(Galleass) : 갤리온(Galleon, 16~18세기에 주로 사용된 대형 범선으로 긴 선체, 높은 선수·선미, 여러 개의 돛대, 그리고 강력한 대포를 갖춘 것이 특징)의 돛과 무장과 노를 젓는 갤리의 기동성을 결합한 전함
[10] 갤리(Galley) : 노를 젓는 방식으로 추진되는 긴 선체의 군함 또는 선박을 의미하며, 고대부터 18세기까지 주로 지중해와 유럽 해역에서 군사 및 무역 용도로 사용되었다. 갤리는 한 개 이상의 돛과 다수의 노(rowers)를 갖춘 것이 특징으로, 특히 오스만 제국, 베네치아, 로마, 그리스 해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과의 간헐적으로 벌어진 전쟁으로 공식적으로 선포된 전쟁이 아니었다.
[1]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등을 영유하고, 남미의 브라질과 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식민지를 개척하고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패자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스페인은 해외 식민지의 유지와 금과 은을 수송하는 상선을 보호하며, 동시에 지중해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세력을 막기 위해 그 유명한 무적함대를 건설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통치 아래 있던 네덜란드는 [1]펠리페 2세의 종교적인 탄압과 경제적 착취에 항거하여 1566년부터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당시 잉글랜드의 [4]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국의 안정과 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네덜란드에 잉글랜드 군사 원정으로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1587년 카디스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쳤지만, 이후 [5]드레이크-[6]호킨스의 원정(1595년), [7]에식스-롤리 원정(1597)에서 큰 실패를 겪었다. 1596년, 1597년, 1601년에 스페인 함대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상대로 추가로 파견되었으나, 이 역시 주로 악천후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전쟁은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네덜란드, 프랑스, 아일랜드 전역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1604년 스페인의 [2]펠리페 3세와 잉글랜드의 [3]제임스 1세가 맺은 런던 조약으로 종식되니다. 이 조약에서 영국과 스페인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군사 개입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무적함대가 잉글랜드에 대패하면서 스페인의 국위가 실추된 것은 물론 이 전쟁 이후로 스페인의 국력은 점차 내리막길을 걸어 이후 벌어진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사실상 몰락하게 된다. 또한 30년 전쟁 이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까지 완전히 독립하게 되면서 스페인은 유럽 최강국에서 유렵의 2등 국가로 내려앉게 된다. 반면에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후 대영제국까지 발전하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출처] : 리브레위키 - 영국-스페인전쟁(https://librewiki.net/wiki/%EC%98%81%EA%B5%AD-%EC%8A%A4%ED%8E%98%EC%9D%B8_%EC%A0%84%EC%9F%81)
[1] 펠리페 2세(Philip II, Felipe II, 1527년~1598년)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 1556년 1월 16일 ~ 1598년 9월 13일), 포르투갈 왕국의 왕(재위:1580년 9월 12일 ~ 1598년 9월 13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1554년 7월 25일 ~ 1558년 11월 17일).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을 건설한 왕
[2] 펠리페 3세(Felipe III, 1578년~1621년) :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제3대 국왕 겸 포르투갈의 국왕(재임 : 1598년 9월 13일~1621년 3월 31일)
[3] 제임스 1세(James I, 1566년~1625년) :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최초로 브리튼 제도 전체를 다스린 왕이자 최초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를 총괄해서 통치하게 된 영국의 국왕. 잉글랜드 국왕(재임 : 1603년 3월 24일 ~ 1625년 3월 27일), 스코틀랜드 국왕(재임 : 1567년 7월 24일~1625년 3월 27일)으로 '제임스 6세'라고 불리는데 제임스 1세로 유명하다.
[4]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5]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년~1596년) :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로 영국에서는 넬슨제독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6] 존 호킨스(John Hawkins,1532년~1595년) : 카비르해의 해적의 선구자. 영국의 노예상인이자 해군 사령관
[7] 에식스-롤리 원정(Essex-Raleigh, Islands Voyage) :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파견하고 네덜란드기 연합하여 지원하여 스페인 함대를 파괴하는 야심찬 작전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네덜란드 함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성공하지 못했다. 제독 겸 총사령관으로서 에식스 백작인 로버트 데버루 경, 중장으로서 서퍽 백작 토머스 하워드 경, 후방 제독으로서 월터 롤리 경이 이끌었다
[1]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등을 영유하고, 남미의 브라질과 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식민지를 개척하고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명실공히 유럽 최강의 패자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스페인은 해외 식민지의 유지와 금과 은을 수송하는 상선을 보호하며, 동시에 지중해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세력을 막기 위해 그 유명한 무적함대를 건설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통치 아래 있던 네덜란드는 [1]펠리페 2세의 종교적인 탄압과 경제적 착취에 항거하여 1566년부터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당시 잉글랜드의 [4]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국의 안정과 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네덜란드에 잉글랜드 군사 원정으로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1587년 카디스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쳤지만, 이후 [5]드레이크-[6]호킨스의 원정(1595년), [7]에식스-롤리 원정(1597)에서 큰 실패를 겪었다. 1596년, 1597년, 1601년에 스페인 함대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상대로 추가로 파견되었으나, 이 역시 주로 악천후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전쟁은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네덜란드, 프랑스, 아일랜드 전역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1604년 스페인의 [2]펠리페 3세와 잉글랜드의 [3]제임스 1세가 맺은 런던 조약으로 종식되니다. 이 조약에서 영국과 스페인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군사 개입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무적함대가 잉글랜드에 대패하면서 스페인의 국위가 실추된 것은 물론 이 전쟁 이후로 스페인의 국력은 점차 내리막길을 걸어 이후 벌어진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사실상 몰락하게 된다. 또한 30년 전쟁 이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까지 완전히 독립하게 되면서 스페인은 유럽 최강국에서 유렵의 2등 국가로 내려앉게 된다. 반면에 영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후 대영제국까지 발전하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출처] : 리브레위키 - 영국-스페인전쟁(https://librewiki.net/wiki/%EC%98%81%EA%B5%AD-%EC%8A%A4%ED%8E%98%EC%9D%B8_%EC%A0%84%EC%9F%81)
[1] 펠리페 2세(Philip II, Felipe II, 1527년~1598년)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 1556년 1월 16일 ~ 1598년 9월 13일), 포르투갈 왕국의 왕(재위:1580년 9월 12일 ~ 1598년 9월 13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1554년 7월 25일 ~ 1558년 11월 17일).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제국'을 건설한 왕
[2] 펠리페 3세(Felipe III, 1578년~1621년) :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제3대 국왕 겸 포르투갈의 국왕(재임 : 1598년 9월 13일~1621년 3월 31일)
[3] 제임스 1세(James I, 1566년~1625년) :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최초로 브리튼 제도 전체를 다스린 왕이자 최초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를 총괄해서 통치하게 된 영국의 국왕. 잉글랜드 국왕(재임 : 1603년 3월 24일 ~ 1625년 3월 27일), 스코틀랜드 국왕(재임 : 1567년 7월 24일~1625년 3월 27일)으로 '제임스 6세'라고 불리는데 제임스 1세로 유명하다.
[4]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5]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0년~1596년) :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로 영국에서는 넬슨제독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6] 존 호킨스(John Hawkins,1532년~1595년) : 카비르해의 해적의 선구자. 영국의 노예상인이자 해군 사령관
[7] 에식스-롤리 원정(Essex-Raleigh, Islands Voyage) : 영국 엘리자베스 1세가 파견하고 네덜란드기 연합하여 지원하여 스페인 함대를 파괴하는 야심찬 작전이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네덜란드 함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성공하지 못했다. 제독 겸 총사령관으로서 에식스 백작인 로버트 데버루 경, 중장으로서 서퍽 백작 토머스 하워드 경, 후방 제독으로서 월터 롤리 경이 이끌었다
칼레해전은 잉글랜드-스페인 전쟁(1585~1604)의 주요 전투이며 영국의 해적이자 제독인 [1]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약 100년동안 신대륙은 최고의 해양강국 스페인의 독무대였다. 여기에는 아르마다(Armada)라고 불리는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큰 역할을 하였다.
영국의 해적들은 신대륙으로부터 물자를 싣고오는 스페인의 상선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대표적인 영국 해적으로 [1]프랜시스 드레이크였다. 이에 스페인이 영국에 해적을 소탕하라고 압력을 가하지만 당시 [6]엘리자베스1세 잉글랜드 여왕은 오히려 해적활동을 통하여 국가재정에 기여한 드레이크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하고 영국 해군으로 발탁한다. 또한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펼치던 네덜란드를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과 종교문제 갈등이 더해져 영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1588년 5월 30일 스페인의 [7]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지휘하에 대규모의 무적함대가 리스본 항구에서 영국을 향해 출항한다. 스페인 함대는 네덜란드의 [5]알렉산드로 파르네세 파르마공의 지상군과 합류하기 위하여 [2]플랜더스 지방으로 향하였으나 심한 폭풍때문에 영국쪽으로 북상하였다. 7월 중순에 영국해협 서쪽에 도착한 스페인 함대는 [3]플리머스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와 처음으로 교전을 치른 후에 몇차례 더 교전을 하였다.
이 교전에서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스페인 함대의 함포를 소모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스페인 함대와 반대로 영국 함대는 탄약 및 마실 물, 음식등을 근처 항에서 계속 조달할 수 있었고, 이는 승리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8월 6~7일경에 스페인 함대는 네덜란드의 [5]알렉산드로 파르네세 파르마공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칼레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스페인 함대는 이곳 바다의 수위가 낮았고 배의 크기 때문에 포구에 정박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앞바다에서 정박한 후 파르마군을 작은 배로 실어 나르기로 한 것이다.
8월 8일이 되자 남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왔으며 이는 영국 함대에 큰 이점을 주었다. 스페인 함대가 영국 함대쪽으로 이 바람 때문에 나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정 즈음에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에 화공을 펼치자 스페인 함대는 불길이 치솟자 당황하여 군함의 닻줄을 급히 자르고 출항하였다.
이 때문에 스페인 함대의 전형은 흐트러졌고 이 틈을 타서 영국 함대는 집중적으로 함포사격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스페인 전함들은 속수무책으로 침몰되었다. 이 때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서 스페인 함대는 북쪽으로 북상할 수 있게 되어서 도망하게 되었다.
스페인 함대는 영국 해협으로 다시 남하하려 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계속 북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스페인은 침략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무기와 음식도 바닥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퇴각하여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거쳐 스페인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스코틀랜드에 정박할 것을 간파한 [6]엘리자베스1세의 계략으로 스페인군은 스코틀랜드항구에 입항조차 못하였다. 때문에 스페인으로 향하는 길에 스페인 군인들은 심각한 음식 및 물 부족에 시달렸으며 태풍 또한 그들을 괴롭혔다. 굶주린 스페인군은 아일랜드에 정박하여 먹을 것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미리 예상한 영국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스페인은 9월 13일이 되어서야 반절 남은 함대를 이끌고 귀환하였다.
스페인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수 많은 함선과 병사들을 잃으면서 해양 패권 자리에서 점점 밀려나게 되었고,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로 영국에서는 넬슨제독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2] 플랜더스(Flanders) : 현재의 벨기에의 서부, 프랑스의 북부, 네덜란의 서부를 포함한 북해 연안지방
[3] 플리머스(Plymouth) : 영국 잉글랜드 데번주의 영국 해협에 면한 항구 도시로서 영국 해군의 근거지
[4] 도버 해협(Strait of Dover) : 영국 도버와 프랑스 칼레를 잇는 잉글랜드 해협의 일부로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는 최단 루트이기도 하다. 도버 해협을 기준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거리는 대략 34km 정도에 불과하다. 달리 영불해협이라고 하기도 한다
[5]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 북해 연안의 네덜란드, 벨기에 같은 연안 저지대의 행정을 담당하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 보통 본명보다는 작위인 '파르마 공'으로 더 많이 불린다
[6]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7] 메디나 시도니아(Medina Sidonia) : 1380년이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작령을 보유한 메디나-시도니아에 있는 스페인의 대작 칭호. 무적함대를 지위했던 제7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약 100년동안 신대륙은 최고의 해양강국 스페인의 독무대였다. 여기에는 아르마다(Armada)라고 불리는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큰 역할을 하였다.
영국의 해적들은 신대륙으로부터 물자를 싣고오는 스페인의 상선을 공격하여 약탈하였다. 대표적인 영국 해적으로 [1]프랜시스 드레이크였다. 이에 스페인이 영국에 해적을 소탕하라고 압력을 가하지만 당시 [6]엘리자베스1세 잉글랜드 여왕은 오히려 해적활동을 통하여 국가재정에 기여한 드레이크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하고 영국 해군으로 발탁한다. 또한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펼치던 네덜란드를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과 종교문제 갈등이 더해져 영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1588년 5월 30일 스페인의 [7]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지휘하에 대규모의 무적함대가 리스본 항구에서 영국을 향해 출항한다. 스페인 함대는 네덜란드의 [5]알렉산드로 파르네세 파르마공의 지상군과 합류하기 위하여 [2]플랜더스 지방으로 향하였으나 심한 폭풍때문에 영국쪽으로 북상하였다. 7월 중순에 영국해협 서쪽에 도착한 스페인 함대는 [3]플리머스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와 처음으로 교전을 치른 후에 몇차례 더 교전을 하였다.
이 교전에서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스페인 함대의 함포를 소모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스페인 함대와 반대로 영국 함대는 탄약 및 마실 물, 음식등을 근처 항에서 계속 조달할 수 있었고, 이는 승리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8월 6~7일경에 스페인 함대는 네덜란드의 [5]알렉산드로 파르네세 파르마공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하여 칼레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스페인 함대는 이곳 바다의 수위가 낮았고 배의 크기 때문에 포구에 정박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앞바다에서 정박한 후 파르마군을 작은 배로 실어 나르기로 한 것이다.
8월 8일이 되자 남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왔으며 이는 영국 함대에 큰 이점을 주었다. 스페인 함대가 영국 함대쪽으로 이 바람 때문에 나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정 즈음에 영국함대가 스페인 함대에 화공을 펼치자 스페인 함대는 불길이 치솟자 당황하여 군함의 닻줄을 급히 자르고 출항하였다.
이 때문에 스페인 함대의 전형은 흐트러졌고 이 틈을 타서 영국 함대는 집중적으로 함포사격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스페인 전함들은 속수무책으로 침몰되었다. 이 때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서 스페인 함대는 북쪽으로 북상할 수 있게 되어서 도망하게 되었다.
스페인 함대는 영국 해협으로 다시 남하하려 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계속 북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스페인은 침략 계획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무기와 음식도 바닥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퇴각하여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거쳐 스페인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스코틀랜드에 정박할 것을 간파한 [6]엘리자베스1세의 계략으로 스페인군은 스코틀랜드항구에 입항조차 못하였다. 때문에 스페인으로 향하는 길에 스페인 군인들은 심각한 음식 및 물 부족에 시달렸으며 태풍 또한 그들을 괴롭혔다. 굶주린 스페인군은 아일랜드에 정박하여 먹을 것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미리 예상한 영국 군대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스페인은 9월 13일이 되어서야 반절 남은 함대를 이끌고 귀환하였다.
스페인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수 많은 함선과 병사들을 잃으면서 해양 패권 자리에서 점점 밀려나게 되었고,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로 영국에서는 넬슨제독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2] 플랜더스(Flanders) : 현재의 벨기에의 서부, 프랑스의 북부, 네덜란의 서부를 포함한 북해 연안지방
[3] 플리머스(Plymouth) : 영국 잉글랜드 데번주의 영국 해협에 면한 항구 도시로서 영국 해군의 근거지
[4] 도버 해협(Strait of Dover) : 영국 도버와 프랑스 칼레를 잇는 잉글랜드 해협의 일부로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는 최단 루트이기도 하다. 도버 해협을 기준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거리는 대략 34km 정도에 불과하다. 달리 영불해협이라고 하기도 한다
[5]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 북해 연안의 네덜란드, 벨기에 같은 연안 저지대의 행정을 담당하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 보통 본명보다는 작위인 '파르마 공'으로 더 많이 불린다
[6]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7] 메디나 시도니아(Medina Sidonia) : 1380년이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작령을 보유한 메디나-시도니아에 있는 스페인의 대작 칭호. 무적함대를 지위했던 제7대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다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3년여에 걸쳐 그와 관련된 약1,000여명의 동인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정여립은 관직을 단념하고 낙향(호남)하여 학문 연구와 대동계를 결성해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으나 서인세력에 의해 역모 준비를 위한 조직으로 간주되었고 급기야 정여립역모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 역모로 인하여 정여립은 피신하던 중 자결하였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 그 당시에 사실로 단정되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에 따르면 조작설등 여러가지 주장이 공존하고 있으나 정설은 없다고 한다.
이후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지면서 3년여간 정여립과 연루되어 희생된 동인은 약1,000여 명에 이른다.
특히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의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그의 형제·노모·자식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하면서 멸문했다
정여립(1546년~1589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이발(1544년~1589년) :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의 수장
동인 :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당파
대동계(大同契) : 조선시대 정여립의 역모사건의 증거로 거론된 계
정여립은 관직을 단념하고 낙향(호남)하여 학문 연구와 대동계를 결성해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으나 서인세력에 의해 역모 준비를 위한 조직으로 간주되었고 급기야 정여립역모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 역모로 인하여 정여립은 피신하던 중 자결하였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 그 당시에 사실로 단정되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에 따르면 조작설등 여러가지 주장이 공존하고 있으나 정설은 없다고 한다.
이후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지면서 3년여간 정여립과 연루되어 희생된 동인은 약1,000여 명에 이른다.
특히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의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그의 형제·노모·자식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하면서 멸문했다
정여립(1546년~1589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이발(1544년~1589년) : 조선 중기의 문신. 동인의 수장
동인 :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당파
대동계(大同契) : 조선시대 정여립의 역모사건의 증거로 거론된 계
1592년(선조 25) 4월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그리고 명나라가 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동아시아는 7년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591년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려 하는 데 조선이 길을 인도하라는 문서를 조선에 보내면서 조선침략의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상황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으며 거절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1592년 4월 13일 약 20만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병하여 침략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 점령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북상하면서 17일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성이 함락시켰다. 이후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여 7월 9일 개성까지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이에 7월 19일 평양으로 피신했던 조선 왕인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신하였고 평양성은 60일만에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의주로 도망친 선조는 명나라에 계속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자국의 영토까지 전쟁이 번지는 형편을 막으려면 조선에서 적을 방어해야 상책이라는 판단하여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1593년 명나라가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가 대패하면서 주춤하기 시작하였다. 연속되는 전투에서 명나라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후 명나라는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일본과 협상을 하였다.
협상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고 결국은 1596년 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은 정유재란으로 재침하였다. 1년후인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기나긴 전쟁은 1598년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임진왜란은 7년전쟁으로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많은 문화재가 파손되었으며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또한 명나라군, 일본군이 조선땅에 주둔하면서 일반 백성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 전쟁을 한국은 임진왜란/정유재란, 일본은 풍신수길정벌, 중국은 항왜원조라 부른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년~1598년) :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시키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 선조(1552년~1608년) : 조선의 제14대 국왕. 재위 : 1567년~1608년
* 의주군 : 평안북도 북서쪽의 압록강에 접한 군. 임진왜란당시 선조의 피신처
* 명나라 :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이며 중국 최후의 한족 왕조
1591년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려 하는 데 조선이 길을 인도하라는 문서를 조선에 보내면서 조선침략의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상황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으며 거절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1592년 4월 13일 약 20만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병하여 침략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 점령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북상하면서 17일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성이 함락시켰다. 이후 맹렬한 속도로 진격하여 7월 9일 개성까지 함락시키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이에 7월 19일 평양으로 피신했던 조선 왕인 선조는 다시 의주로 피신하였고 평양성은 60일만에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의주로 도망친 선조는 명나라에 계속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자국의 영토까지 전쟁이 번지는 형편을 막으려면 조선에서 적을 방어해야 상책이라는 판단하여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1593년 명나라가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가 대패하면서 주춤하기 시작하였다. 연속되는 전투에서 명나라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후 명나라는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일본과 협상을 하였다.
협상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고 결국은 1596년 협상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은 정유재란으로 재침하였다. 1년후인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기나긴 전쟁은 1598년에 이르러서야 끝났다.
임진왜란은 7년전쟁으로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많은 문화재가 파손되었으며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또한 명나라군, 일본군이 조선땅에 주둔하면서 일반 백성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 전쟁을 한국은 임진왜란/정유재란, 일본은 풍신수길정벌, 중국은 항왜원조라 부른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년~1598년) :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시키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 선조(1552년~1608년) : 조선의 제14대 국왕. 재위 : 1567년~1608년
* 의주군 : 평안북도 북서쪽의 압록강에 접한 군. 임진왜란당시 선조의 피신처
* 명나라 :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이며 중국 최후의 한족 왕조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정발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하루만에 동래성에 도달했다.
부산진 전투에 이어 일어난 임진왜란 두 번째 전투로 동래 부사 송상현이 2시간을 버티며 일본군을 끝까지 막아냈으나 결국 전사하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임진왜란의 서막을 알리는 전투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자 전투를 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서 송상현에게 보여주었다.
"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이에 송상현은
"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라는 답을 했다. 이후 일본은 공격을 시작했다.
동래성의 조선군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성이 뚫리고 동래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이 비록 적장이긴 하나 그의 용기와 충절에 감탄했고,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송상현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했다.
전투 당시 동래성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다. 전투 중에도 일본군의 무차별 살육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며, 전투가 끝난 후에도 동래성의 백성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일본군한테 참혹하게 처형된 뒤 해자에 파묻혔다.
이는 2005년 5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동래성 외곽 해자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면서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 약 80여 구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 송상현(1551년~1592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의 장수. 부산 동래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에 맞서 성을 지키며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 정발(1553년~1592년) : 조선 중기의 무신. 부산진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부사 : 조선시대 지방의 장관직.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은 부, 목, 군, 현의 체제였다
* 고니시 유키나가 :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의 선봉장중의 한명
* 해자 : 적의 접근,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의 둘레에 땅을 파 놓고 물을 채워 놓은 것
부산진 전투에 이어 일어난 임진왜란 두 번째 전투로 동래 부사 송상현이 2시간을 버티며 일본군을 끝까지 막아냈으나 결국 전사하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임진왜란의 서막을 알리는 전투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자 전투를 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서 송상현에게 보여주었다.
"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이에 송상현은
"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라는 답을 했다. 이후 일본은 공격을 시작했다.
동래성의 조선군과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성이 뚫리고 동래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이 비록 적장이긴 하나 그의 용기와 충절에 감탄했고,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송상현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했다.
전투 당시 동래성의 병사들과 백성들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다. 전투 중에도 일본군의 무차별 살육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며, 전투가 끝난 후에도 동래성의 백성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일본군한테 참혹하게 처형된 뒤 해자에 파묻혔다.
이는 2005년 5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동래성 외곽 해자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면서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 약 80여 구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 송상현(1551년~1592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의 장수. 부산 동래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에 맞서 성을 지키며 방어하다가 전사했다.
* 정발(1553년~1592년) : 조선 중기의 무신. 부산진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부사 : 조선시대 지방의 장관직.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은 부, 목, 군, 현의 체제였다
* 고니시 유키나가 :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의 선봉장중의 한명
* 해자 : 적의 접근,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의 둘레에 땅을 파 놓고 물을 채워 놓은 것
1592년(선조 25년) 5월 부산 앞바다를 뒤덮었던 일본군은 불과 20일만에 무방비상태의 조선 국토의 절반을 휩쓸었다.
옥포 해전(玉浦海戰)은 거제시 동쪽에 위치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며 조선군의 최초승전이다
* 옥포 :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 도도 다카토라(1556년~1630년) : 센고쿠 시대 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활약한 다이묘(일본 지방의 영주)
* 센고쿠 시대 : 일본에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계속된 내란의 시기. 일본 전국 시대이라고 한다
* 에도 시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막부가 일본을 통치한 1603년부터 1868년까지의 시기
옥포 해전(玉浦海戰)은 거제시 동쪽에 위치한 옥포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이룬 전승신화의 첫 승전이며 조선군의 최초승전이다
* 옥포 :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 도도 다카토라(1556년~1630년) : 센고쿠 시대 부터 에도 시대 전기에 활약한 다이묘(일본 지방의 영주)
* 센고쿠 시대 : 일본에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사회적, 정치적 변동이 계속된 내란의 시기. 일본 전국 시대이라고 한다
* 에도 시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막부가 일본을 통치한 1603년부터 1868년까지의 시기
[1]사천해전은 일본수군 13척이 격침되었고 거북선이 최초로 실전에 투입되었던 해전이다.
일본 수군은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하는 등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을 기도하였다. 이순신은 7월 6일 거제를 출발하여 7월 8일 노량에 도착하여 경상우수사 [4]원균과 합류하여 사천으로 이동중 왜선 1척을 발견하여 격침시킨 뒤 사천 포구에 이르렀다.
해안가 선창에는 왜선 12척이 진을 치고 있었고,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으로 일본 수군이 먼 바다까지 좇아오자 조선 수군 함대는 뱃머리를 돌려 반격하였다.
최전방 돌격선으로 [2]이언량, [3]이기남이 지휘를 한 거북선이 맡았으며, 그 뒤를 이은 판옥선들이 화포공격을 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군 함대는 사천 포구쪽으로 도주하였고 10척이 격침되었다. 일본군이 내륙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기위하여 왜선 2척은 남겨 놓았다.
나머지 2척으로 도주하려던 일본군 패잔병은 조선군에 의해 격침되어 왜선 13척 모두 격침되었다.
이 전투에서 거북선은 최전방 돌격선으로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후 [5]한산도대첩을 비롯한 각종 해전에서 위용을 떨치게 된다.
[1] 사천시 : 경상남도 서남부에 있는 도시이 1995년 5월 10일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통합되었다
[2] 이언량(李彦良, ? ~ 1598년) :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의 군관으로서 최초의 거북선 돌격장. 1592년 6월 16일(5월 7일) 옥포해전에서 돌격장으로 참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당항포해전에서 거북선 우귀선 돌격장으로 출전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3] 이기남(李奇男) : 이순신 휘하의 군관으로 당포(唐浦)해전에 거북선 돌격장, 한산해전에선 좌귀선 돌격장으로 출전하였다. 우귀선 돌격장은 박이량이었다
[4] 원균(元均, 1540년~1597년) :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수
[5] 한산도대첩 :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일본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학익진 전술로 유명하다. 진주성대첩,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
일본 수군은 1592년 6월 16일(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조선 수군과의 해전에서 42척의 전선을 격침당하는 등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서해안으로 북상을 기도하였다. 이순신은 7월 6일 거제를 출발하여 7월 8일 노량에 도착하여 경상우수사 [4]원균과 합류하여 사천으로 이동중 왜선 1척을 발견하여 격침시킨 뒤 사천 포구에 이르렀다.
해안가 선창에는 왜선 12척이 진을 치고 있었고, 조선 수군의 유인작전으로 일본 수군이 먼 바다까지 좇아오자 조선 수군 함대는 뱃머리를 돌려 반격하였다.
최전방 돌격선으로 [2]이언량, [3]이기남이 지휘를 한 거북선이 맡았으며, 그 뒤를 이은 판옥선들이 화포공격을 하였다. 이에 놀란 일본군 함대는 사천 포구쪽으로 도주하였고 10척이 격침되었다. 일본군이 내륙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기위하여 왜선 2척은 남겨 놓았다.
나머지 2척으로 도주하려던 일본군 패잔병은 조선군에 의해 격침되어 왜선 13척 모두 격침되었다.
이 전투에서 거북선은 최전방 돌격선으로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이후 [5]한산도대첩을 비롯한 각종 해전에서 위용을 떨치게 된다.
[1] 사천시 : 경상남도 서남부에 있는 도시이 1995년 5월 10일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통합되었다
[2] 이언량(李彦良, ? ~ 1598년) :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의 군관으로서 최초의 거북선 돌격장. 1592년 6월 16일(5월 7일) 옥포해전에서 돌격장으로 참전하여 대승을 거두고, 당항포해전에서 거북선 우귀선 돌격장으로 출전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3] 이기남(李奇男) : 이순신 휘하의 군관으로 당포(唐浦)해전에 거북선 돌격장, 한산해전에선 좌귀선 돌격장으로 출전하였다. 우귀선 돌격장은 박이량이었다
[4] 원균(元均, 1540년~1597년) : 조선 중기의 무신, 군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장수
[5] 한산도대첩 :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일본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학익진 전술로 유명하다. 진주성대첩,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
임진왜란당시 이순신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가 출전하여 사천·당포 해전에 이어 왜군과 세 번째로 치른 해전이다.
1592년 7월 12일 조선수군은 앞서 승리로 이끌었던 당포해전 때 도주한 왜선이 당항포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그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여 총 51척의 연합함대를 구성하였다.
다음날 조선 연합함대는 당항포로 진격하여 왜선 26척을 격파하고 적수 50여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출처 : 힌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무위키]
* 당항포 :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1592년 7월 12일 조선수군은 앞서 승리로 이끌었던 당포해전 때 도주한 왜선이 당항포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그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여 총 51척의 연합함대를 구성하였다.
다음날 조선 연합함대는 당항포로 진격하여 왜선 26척을 격파하고 적수 50여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출처 : 힌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무위키]
* 당항포 :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시 진주성에서 진주[2]목사 [1]김시민과 의병, 백성이 힘을 합쳐 왜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진주대첩으로 불린다.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을 침범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1592년 4월 14일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왜군은 연승을 거듭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의 의병들이 봉기하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에 의해 7월 이후로 해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히면서 기세가 꺾인 왜군은 병력을 집결시켜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고 의병들의 봉기를 막기 위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왜군은 경상도 진해, 고성을 점령하고 진주에 도착했다. 당시 진주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현재는 내성만 남아있다), 성의 앞에는 남강이 흐르고 후방에는 넓고 깊은 [4]해자가 있었다.
11월 7일, 3만의 왜군본대가 도착하면서 진주성을 쉽게 점령할 것이라 생각한 왜군은 진주성을 포위하면서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성내는 김시민을 위시한 관군 3천 8백여 명과 백성이 합세하면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성외로는 홍의장군 [3]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이 왜군의 배후에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고 피리를 불면서 위협하고 있었다.
이윽고 11월 9일 왜군은 진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왜군의 조총에 대항하여 조선군은 [5]승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써, 백성은 돌과 뜨거운 물을 성위에서 쏟아부으면서 항전하였다. 또한 의병 2천여 명은 왜군의 후방을 기습공격했고, 홍의장군 [3]곽재우도 유격전을 전개하여 혼란에 빠뜨렸다.
왜군은 공격 6일째 되는날 총공세에 들어갔고 양측은 사력을 다해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이 때 앞장서서 전투를 지휘하던 [1]김시민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계속되는 공방전끝에 조선군은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고 왜군은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부상당한 김시민은 며칠동안 사경을 헤매다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전투에서 왜군 사망자는 1만명에 달했으며 패배의 충격이 너무 커서 [1]김시민의 이름을 모쿠소(목사의 일본식 발음)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키 못했으나 계속되는 북진으로 평양성까지 점령하였으나 1593년 명나라의 참전으로 휴전기로 접어들었다. 왜군은 명나라와 강화회담을 통하여 남쪽으로 물러나는 과정에서 보복으로 진주성을 공격하는 데, 이를 2차 진주성 전투라 한다.
진주대첩은 한산대첩과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이며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만든 중요한 승리였다.
[1] 김시민(1554년~1592년) : 조선중기 무신, 임진왜란 때의 진주목사
[2] 목 :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부, 목, 군, 현의 체제)직으로 정3품에 해당하며 경상도에는 상주, 진주, 성주가 목체제였다.
[3] 곽재우(1552년~1617년) :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의 장군이라는 뜻의 '천강홍의장군'으로 유명하다
[4] 해자 : 적의 접근,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의 둘레에 땅을 파 놓고 물을 채워 놓은 것
[5] 승자총통 : 조선 선조 8년부터 선조 11년까지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지낸 김지가 개발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휴대용 화기
1592년 4월 왜군이 조선을 침범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1592년 4월 14일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왜군은 연승을 거듭하면서 파죽지세로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의 의병들이 봉기하고 이순신이 지휘하는 수군에 의해 7월 이후로 해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히면서 기세가 꺾인 왜군은 병력을 집결시켜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고 의병들의 봉기를 막기 위하여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왜군은 경상도 진해, 고성을 점령하고 진주에 도착했다. 당시 진주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현재는 내성만 남아있다), 성의 앞에는 남강이 흐르고 후방에는 넓고 깊은 [4]해자가 있었다.
11월 7일, 3만의 왜군본대가 도착하면서 진주성을 쉽게 점령할 것이라 생각한 왜군은 진주성을 포위하면서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성내는 김시민을 위시한 관군 3천 8백여 명과 백성이 합세하면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성외로는 홍의장군 [3]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들이 왜군의 배후에서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고 피리를 불면서 위협하고 있었다.
이윽고 11월 9일 왜군은 진주성 공격을 개시했다. 왜군의 조총에 대항하여 조선군은 [5]승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써, 백성은 돌과 뜨거운 물을 성위에서 쏟아부으면서 항전하였다. 또한 의병 2천여 명은 왜군의 후방을 기습공격했고, 홍의장군 [3]곽재우도 유격전을 전개하여 혼란에 빠뜨렸다.
왜군은 공격 6일째 되는날 총공세에 들어갔고 양측은 사력을 다해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이 때 앞장서서 전투를 지휘하던 [1]김시민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계속되는 공방전끝에 조선군은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고 왜군은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부상당한 김시민은 며칠동안 사경을 헤매다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전투에서 왜군 사망자는 1만명에 달했으며 패배의 충격이 너무 커서 [1]김시민의 이름을 모쿠소(목사의 일본식 발음)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왜군은 진주성을 함락시키 못했으나 계속되는 북진으로 평양성까지 점령하였으나 1593년 명나라의 참전으로 휴전기로 접어들었다. 왜군은 명나라와 강화회담을 통하여 남쪽으로 물러나는 과정에서 보복으로 진주성을 공격하는 데, 이를 2차 진주성 전투라 한다.
진주대첩은 한산대첩과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이며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만든 중요한 승리였다.
[1] 김시민(1554년~1592년) : 조선중기 무신, 임진왜란 때의 진주목사
[2] 목 :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부, 목, 군, 현의 체제)직으로 정3품에 해당하며 경상도에는 상주, 진주, 성주가 목체제였다.
[3] 곽재우(1552년~1617년) :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의 장군이라는 뜻의 '천강홍의장군'으로 유명하다
[4] 해자 : 적의 접근,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성의 둘레에 땅을 파 놓고 물을 채워 놓은 것
[5] 승자총통 : 조선 선조 8년부터 선조 11년까지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지낸 김지가 개발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휴대용 화기
[1]벽제관 전투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서 벌어진 일본군과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전투이다.
평안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에서 [4]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원군과 조선군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후퇴하여 개성과 황해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한성 부근에 집결시켰다. 집결된 총 병력은 5만에 이르렀으며, 전력을 정비한 일본군은 반격을 시도하였다.
명나라군은 평양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한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남진하였다. 일본군은 북상중에 명군의 진출 사실을 알고 선봉부대를 보내 [2]여석령 일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1월 26일 명군 선봉부대는 [2]여석령에서 일본군과 격돌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으로 명군은 패배하였다. 이여송은 전공의 욕심에 자신의 기병만 이끌고 [1]벽제관으로 진군하였다.
그런데 벽제관은 비가 온 뒤라 땅이 진창이 되어 기동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명군은 맹렬하게 싸웠으나 [7]고바야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나타나 기병만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사방에서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백병전에 강한 일본군 3개 부대에 포위되었고, [4]이여송은 심복인 [5]이유승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벽제관 전투는 명나라 부총병 [6]양원이 화기로 무장한 포병을 이끌고 도착하자 일본군은 [3]혜음령을 넘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끝난다.
이 패배로 인해 명나라군의 한성 탈환 시 공조를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중인 권율장군 휘하의 3천의 조선군 병력은 고립된 신세가 되고 만다. 일본군은 벽제군 전투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요충지인 행주산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한성에서 철수하게 된다.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명나라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고, 그 뒤 명나라군의 적극성이 줄어들고 일본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또한 명나라가 일본에 휴전을 제안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벽제관(碧蹄館) :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하루전 날 머물던 역관.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
[2] 여석령(礪石嶺) : 벽제관에서 3km가량 떨어져 있는 고개. 숯돌고개라고도 하며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에 위치해 있다
[3] 혜음령(惠蔭嶺) :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개
[4] 이여송(李如松, 1549년~1598년) :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수로 임진왜란 때 파견된 명나라 장군. 요동에서 출생했으며 조선계이며 본관은 성주 이씨라고 전한다
[5] 이유승(李有昇, 생년 미상~1593년) : 명나라 말기의 장수. 이여송의 심복 부장으로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을 보호하였으나 일본군이 쏜 조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6] 양원(楊元, 생년 미상~1598년) : 명나라의 무장. 1592년 임진왜란 시기에 직위는 명군 부총병이었다
[7]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1533년~1597년) : 일본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한 센고쿠 무장이며 다이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운다
평안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에서 [4]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원군과 조선군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후퇴하여 개성과 황해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한성 부근에 집결시켰다. 집결된 총 병력은 5만에 이르렀으며, 전력을 정비한 일본군은 반격을 시도하였다.
명나라군은 평양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한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남진하였다. 일본군은 북상중에 명군의 진출 사실을 알고 선봉부대를 보내 [2]여석령 일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1월 26일 명군 선봉부대는 [2]여석령에서 일본군과 격돌하였으나 일본군의 유인으로 명군은 패배하였다. 이여송은 전공의 욕심에 자신의 기병만 이끌고 [1]벽제관으로 진군하였다.
그런데 벽제관은 비가 온 뒤라 땅이 진창이 되어 기동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명군은 맹렬하게 싸웠으나 [7]고바야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나타나 기병만으로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사방에서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백병전에 강한 일본군 3개 부대에 포위되었고, [4]이여송은 심복인 [5]이유승의 희생으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벽제관 전투는 명나라 부총병 [6]양원이 화기로 무장한 포병을 이끌고 도착하자 일본군은 [3]혜음령을 넘지 못하고 철수하면서 끝난다.
이 패배로 인해 명나라군의 한성 탈환 시 공조를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중인 권율장군 휘하의 3천의 조선군 병력은 고립된 신세가 되고 만다. 일본군은 벽제군 전투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요충지인 행주산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대패하고 한성에서 철수하게 된다.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한 명나라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고, 그 뒤 명나라군의 적극성이 줄어들고 일본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또한 명나라가 일본에 휴전을 제안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 벽제관(碧蹄館) :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하루전 날 머물던 역관.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
[2] 여석령(礪石嶺) : 벽제관에서 3km가량 떨어져 있는 고개. 숯돌고개라고도 하며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에 위치해 있다
[3] 혜음령(惠蔭嶺) :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개
[4] 이여송(李如松, 1549년~1598년) : 중국 명나라 말기의 장수로 임진왜란 때 파견된 명나라 장군. 요동에서 출생했으며 조선계이며 본관은 성주 이씨라고 전한다
[5] 이유승(李有昇, 생년 미상~1593년) : 명나라 말기의 장수. 이여송의 심복 부장으로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을 보호하였으나 일본군이 쏜 조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6] 양원(楊元, 생년 미상~1598년) : 명나라의 무장. 1592년 임진왜란 시기에 직위는 명군 부총병이었다
[7]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1533년~1597년) : 일본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한 센고쿠 무장이며 다이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운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권율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며 하루동안 벌어졌다.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에게 계속 밀리던 조선은 중국 명나라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가 조선을 지원하자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한 일본군은 밀리기 시작하면서 일제히 남하를 시작했다.
평안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에서 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원군과 조선군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남진하여 일본군은 후퇴하여 개성과 황해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한성 부근에 집결시켰다.
평양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남진하던 명나라군과 전력을 가다듬은 일본군은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벽제관에서 격돌하였다. 그러나 전투결과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명나라가 패함에 따라 한양 탈환 시 합동작전을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중이었던 권율 휘하의 3천여명의 조선군은 고립에 처하게 되었다.
명군과의 전투에 승리한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의 흐름을 타고 보름 만에 10배에 이르는 3만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화기를 이용하여 총탄과 화살, 돌 파편 등을 쏘아 날리며 방어를 펼쳤다. 일본 1군은 궤멸당했고 2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어 3군은 조선의 포 사격으로 파괴되었다.
4군도 대패한 뒤 5군은 화공 전술을 택해 공격하려 했으나 되려 조선군 반격으로 후퇴하였다. 이어 6군도 승병들의 전술로 패퇴되었고, 마지막 7군이 성 내부로 들어오면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게 된다.
일본군은 조선군을 인해전술로 몰아붙였고 조선군도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쉽게 밀리지 않았다. 이때 조선군은 화살이 다 소모되어 투석으로 맞서 싸웠는데 여기서 민간인들, 특히 부녀자들이 돌을 날라 도왔다는 야사가 전해지기도 한다.
화살이 떨어져 패색이 짙어질 때 한강변으로 조선지원군과 화살이 도착하자 일본군은 당황하여 물러나기 시작했으며 조선군이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이렇게 길게 이어지던 전투는 저녁 5시~7시 경이 되어 어둠이 내리자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행주 대첩의 승리를 듣고서야 평양으로 회군하던 명나라의 군대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파주 공격을 계획했으나 출진 중도에 되돌아갔다.
이 전투로 인해서 벽제관 등지에서의 승리로 다시 조명연합군에 대한 반격을 꾀하고 있던 일본군을 완전히 몰락시키게 된다.
결국 4월 18일 한성에서 패퇴하며 일년만에 조명연합군이 수도인 한성을 수복했다. 후에 권율은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었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 행주산성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의 7, 8부 능선에 쌓은 테뫼식(山頂式)성으로 흙을 이용한 토축산성으로 현재 극히 일부 성벽만 보전되어 있다.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었다
* 권율(1537년~1599년) : 조선시대 의주목사, 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장수
* 화차(火車) : '화약(무기)을 실은 수레'로, 하나 또는 다수의 화약무기를 설치하여 적에게 발사할 수 있게끔 만든 장비
* 신기전(神機箭) : 조선 1448년(세종 30년) 제작되어 17세기 이후까지 널리 생산된 고체 로켓으로 화약 추진식 화살 무기
* 비격진천뢰 (飛擊震天雷) : 도화선 방식의 지연 신관 폭탄으로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중에 화포장 이장손이 개발하였다
* 목사 : 지방행정구역인 부-목-군-현의 순서대로 두번째 높은 등급의 직책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에게 계속 밀리던 조선은 중국 명나라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가 조선을 지원하자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한 일본군은 밀리기 시작하면서 일제히 남하를 시작했다.
평안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1593년 1월 평양에서 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원군과 조선군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이후 남진하여 일본군은 후퇴하여 개성과 황해도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까지 한성 부근에 집결시켰다.
평양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남진하던 명나라군과 전력을 가다듬은 일본군은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벽제관에서 격돌하였다. 그러나 전투결과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명나라가 패함에 따라 한양 탈환 시 합동작전을 위해 행주산성에 주둔중이었던 권율 휘하의 3천여명의 조선군은 고립에 처하게 되었다.
명군과의 전투에 승리한 일본군은 벽제관 전투의 흐름을 타고 보름 만에 10배에 이르는 3만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군은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등 화기를 이용하여 총탄과 화살, 돌 파편 등을 쏘아 날리며 방어를 펼쳤다. 일본 1군은 궤멸당했고 2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어 3군은 조선의 포 사격으로 파괴되었다.
4군도 대패한 뒤 5군은 화공 전술을 택해 공격하려 했으나 되려 조선군 반격으로 후퇴하였다. 이어 6군도 승병들의 전술로 패퇴되었고, 마지막 7군이 성 내부로 들어오면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게 된다.
일본군은 조선군을 인해전술로 몰아붙였고 조선군도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쉽게 밀리지 않았다. 이때 조선군은 화살이 다 소모되어 투석으로 맞서 싸웠는데 여기서 민간인들, 특히 부녀자들이 돌을 날라 도왔다는 야사가 전해지기도 한다.
화살이 떨어져 패색이 짙어질 때 한강변으로 조선지원군과 화살이 도착하자 일본군은 당황하여 물러나기 시작했으며 조선군이 이를 추격하여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이렇게 길게 이어지던 전투는 저녁 5시~7시 경이 되어 어둠이 내리자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행주 대첩의 승리를 듣고서야 평양으로 회군하던 명나라의 군대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은 파주 공격을 계획했으나 출진 중도에 되돌아갔다.
이 전투로 인해서 벽제관 등지에서의 승리로 다시 조명연합군에 대한 반격을 꾀하고 있던 일본군을 완전히 몰락시키게 된다.
결국 4월 18일 한성에서 패퇴하며 일년만에 조명연합군이 수도인 한성을 수복했다. 후에 권율은 이 공으로 도원수가 되었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진주대첩, 연안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한민족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 행주산성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의 7, 8부 능선에 쌓은 테뫼식(山頂式)성으로 흙을 이용한 토축산성으로 현재 극히 일부 성벽만 보전되어 있다.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었다
* 권율(1537년~1599년) : 조선시대 의주목사, 도원수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장수
* 화차(火車) : '화약(무기)을 실은 수레'로, 하나 또는 다수의 화약무기를 설치하여 적에게 발사할 수 있게끔 만든 장비
* 신기전(神機箭) : 조선 1448년(세종 30년) 제작되어 17세기 이후까지 널리 생산된 고체 로켓으로 화약 추진식 화살 무기
* 비격진천뢰 (飛擊震天雷) : 도화선 방식의 지연 신관 폭탄으로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중에 화포장 이장손이 개발하였다
* 목사 : 지방행정구역인 부-목-군-현의 순서대로 두번째 높은 등급의 직책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왜적의 동향을 살피던 중 왜선 31척이 당항포로 이동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이에 삼도수군을 먼저 견내량 근해에 배치, 왜선의 퇴로를 막고 조방장 어영담에게 군사 31인을 주어 왜선을 치게 하여 당항포 근해의 왜선 10척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전군이 일제히 공격하여 포구에 정박한 나머지 21척을 모두 불태웠다. 동일한 지역에서 두 번이나 왜선을 크게 무찌른 당항포해전은 이순신의 주도치밀한 작전계획에 의한 것이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 한산도(閑山島) :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에 있는 섬
* 견내량(見乃梁) :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잇는 거제대교의 아래 쪽에 위치한 좁은 해협
* 조방장(助防將) : 주장(主將)을 도와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 주로 관할 지역 내에 있는 무술을 갖춘 수령이 이 임무를 맡는다
* 어영담(1532년~1594년) : 조선 경상도 사천현감 등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이순신 장군 휘하의 장수
이에 삼도수군을 먼저 견내량 근해에 배치, 왜선의 퇴로를 막고 조방장 어영담에게 군사 31인을 주어 왜선을 치게 하여 당항포 근해의 왜선 10척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전군이 일제히 공격하여 포구에 정박한 나머지 21척을 모두 불태웠다. 동일한 지역에서 두 번이나 왜선을 크게 무찌른 당항포해전은 이순신의 주도치밀한 작전계획에 의한 것이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 한산도(閑山島) :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에 있는 섬
* 견내량(見乃梁) :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를 잇는 거제대교의 아래 쪽에 위치한 좁은 해협
* 조방장(助防將) : 주장(主將)을 도와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 주로 관할 지역 내에 있는 무술을 갖춘 수령이 이 임무를 맡는다
* 어영담(1532년~1594년) : 조선 경상도 사천현감 등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이순신 장군 휘하의 장수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은 정유재란 시기인 1597년(선조 30년)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인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협에서 일본 수군과 벌어진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원균 등이 도주 중 전사한다.
조선 조정은 7월 21일 패전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 한국 역사 3대 패전 (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 중 하나이다.
* 칠천량(漆川梁) 해협 : 경상남도 거제시의 섬인 칠천도(七川島)사이의 해협
조선 조정은 7월 21일 패전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 한국 역사 3대 패전 (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 중 하나이다.
* 칠천량(漆川梁) 해협 : 경상남도 거제시의 섬인 칠천도(七川島)사이의 해협
임진왜란 중에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이 대규모 침입을 재차 시도해 1597년(선조 30)에 대규모의 전투 병력이 경상도 해안지대에 집결하여 해상과 육상에서 전면적인 총공세를 취했다.
1598년(선조 31) 8월에 풍신수길(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이 사망하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한 노량(露梁)해전을 마지막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1598년(선조 31) 8월에 풍신수길(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이 사망하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은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한 노량(露梁)해전을 마지막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1517년에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신교인 개신교에 대하여 구교인 가톨릭 세력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는 30년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종교 갈등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정치, 경제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점점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30년 전쟁을 보통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전기를 종교 전쟁, 후기를 정치적 영토전쟁으로 분류한다.
유럽의 종교개혁 이후 유럽 북쪽의 개신교와 남쪽의 로마 카톨릭교로 양분되어 대립을 이어가던 무렵인 1617년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면서 개신교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1618년 보헤미아 프라하의 개신교 귀족들은 로마 가톨릭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가 보낸 특사 두 명을 약 17미터 높이의 건물에서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를 반란으로 판단한 페르디난트 2세는 군대를 일으켜 보헤미아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많은 요인들이 얽히며 유럽 각국으로 전선이 확대되어 무려 30년이나 지속했다.
1640년이 되자 30년 전쟁을 시작한 초기의 왕 및 장군, 병사들도 거의 다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주역들이 등장했지만 각 나라들은 대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조차 망각한 채 관성적으로 싸울 뿐이었다. 마침내 1648년 웨스트팔리아에서 유럽 각국은 조약을 맺고 30년 전쟁은 끝나게 된다.
30년 전쟁은 이후 유럽의 지도뿐만 아니라 종교, 문화 등을 크게 변화시켰다.
*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Holy Roman Emperor, 1578년~1637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독일의 왕, 보헤미아의 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 보헤미아 왕국 : 중앙유럽 보헤미아 지역에 있던 나라로, 영토 대부분은 오늘날 체코에 속한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유럽의 종교개혁 이후 유럽 북쪽의 개신교와 남쪽의 로마 카톨릭교로 양분되어 대립을 이어가던 무렵인 1617년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면서 개신교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1618년 보헤미아 프라하의 개신교 귀족들은 로마 가톨릭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가 보낸 특사 두 명을 약 17미터 높이의 건물에서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를 반란으로 판단한 페르디난트 2세는 군대를 일으켜 보헤미아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많은 요인들이 얽히며 유럽 각국으로 전선이 확대되어 무려 30년이나 지속했다.
1640년이 되자 30년 전쟁을 시작한 초기의 왕 및 장군, 병사들도 거의 다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주역들이 등장했지만 각 나라들은 대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조차 망각한 채 관성적으로 싸울 뿐이었다. 마침내 1648년 웨스트팔리아에서 유럽 각국은 조약을 맺고 30년 전쟁은 끝나게 된다.
30년 전쟁은 이후 유럽의 지도뿐만 아니라 종교, 문화 등을 크게 변화시켰다.
*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Holy Roman Emperor, 1578년~1637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독일의 왕, 보헤미아의 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 보헤미아 왕국 : 중앙유럽 보헤미아 지역에 있던 나라로, 영토 대부분은 오늘날 체코에 속한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미국 백인 정착민과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사이의 정복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말
인조반정(仁祖反正)은 1623년(광해군 15년) 4월 11일 서인 반정 세력이 광해군 및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인조)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이괄은 2등 공신으로 배정받자 불만이 컸다.
1624년 1월에 이괄(평양 병마절도사)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를 당하자 이괄은 항왜100여명과 휘하 병사 1만여명을 통솔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괄은 2월에 한양에 입성하였고 인조는 한양에서 충남 공주에 위치한 공산성으로 피란을 갔다.
이후 조선 관군의 반격으로 이괄의 군대는 대패하였고 경기도 광주로 달아난 이괄은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인조는 환도하였다.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이와 동시에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에 가담했던 평안도 구성부사인 한명련의 아들인 윤(潤)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괄의 난)]
* 인조반정 : 1623년 4월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왕(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으로 옹립한 사건
* 공산성 : 충남 공주시에 소재하고 있는 산성으로 백제의 두번째 도읍지이자 왕궁터
* 부사 : 고려·조선시대 지방의 장관직
* 병마절도사 : 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무관직
* 후금 : 1616년 여진족 누루하치가 건국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
* 정묘호란 :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입해 일어난 전쟁
1624년 1월에 이괄(평양 병마절도사)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를 당하자 이괄은 항왜100여명과 휘하 병사 1만여명을 통솔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괄은 2월에 한양에 입성하였고 인조는 한양에서 충남 공주에 위치한 공산성으로 피란을 갔다.
이후 조선 관군의 반격으로 이괄의 군대는 대패하였고 경기도 광주로 달아난 이괄은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인조는 환도하였다.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이와 동시에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에 가담했던 평안도 구성부사인 한명련의 아들인 윤(潤)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괄의 난)]
* 인조반정 : 1623년 4월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왕(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으로 옹립한 사건
* 공산성 : 충남 공주시에 소재하고 있는 산성으로 백제의 두번째 도읍지이자 왕궁터
* 부사 : 고려·조선시대 지방의 장관직
* 병마절도사 : 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무관직
* 후금 : 1616년 여진족 누루하치가 건국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
* 정묘호란 :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입해 일어난 전쟁
정묘호란(丁卯胡亂)은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3만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하고 정주성, 안주성으로 남하하였으며 조선군은 곳곳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3월에는 평양성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넘어갔다.
조선은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고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더라도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 인조(1595년~1649년) : 조선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1649년
* 후금 : 1616년 여진족 누루하치가 건국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
* 평산 : 황해북도에 위치한 군
* 명나라 :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하고 정주성, 안주성으로 남하하였으며 조선군은 곳곳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3월에는 평양성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넘어갔다.
조선은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고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더라도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 인조(1595년~1649년) : 조선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1649년
* 후금 : 1616년 여진족 누루하치가 건국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
* 평산 : 황해북도에 위치한 군
* 명나라 :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
[1]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2] 30년 전쟁중 가장 유명한 전투이다.
1631년 9월 17일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지휘관이었던 스웨덴 왕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라이프치히 근교 브라이텐펠트 평원에서 로마 가톨릭군의 지휘관인 틸리 백작인 [4]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30년 전쟁에서 처음으로 [5]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진영이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이 승리로 [3]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위대한 전술적 지도자로 면모를 확고히 다졌으며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영웅이 되었다.
[1] 브라이텐펠트 :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4km 떨어져 있는 지역
[2] 30년 전쟁 :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과 중부유럽을 무대로 벌어진 개신교(신교)와 카톨릭교(구교)간의 종교전쟁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4]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Johann Tserclaes, Count of Tilly, 1559년~1632) : '갑옷을 입은 수도사' 혹은 '마그데부르크(독일 도시)의 도살자'로 유명한 30년 전쟁(1618~1648년)시 신성 로마 제국의 장수
[5]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 개신교.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자의 의미로 담고있다
1631년 9월 17일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지휘관이었던 스웨덴 왕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라이프치히 근교 브라이텐펠트 평원에서 로마 가톨릭군의 지휘관인 틸리 백작인 [4]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30년 전쟁에서 처음으로 [5]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진영이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이 승리로 [3]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위대한 전술적 지도자로 면모를 확고히 다졌으며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영웅이 되었다.
[1] 브라이텐펠트 :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4km 떨어져 있는 지역
[2] 30년 전쟁 :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과 중부유럽을 무대로 벌어진 개신교(신교)와 카톨릭교(구교)간의 종교전쟁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4]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Johann Tserclaes, Count of Tilly, 1559년~1632) : '갑옷을 입은 수도사' 혹은 '마그데부르크(독일 도시)의 도살자'로 유명한 30년 전쟁(1618~1648년)시 신성 로마 제국의 장수
[5]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 개신교.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자의 의미로 담고있다
[1]뤼첸 전투(Battle of Lützen)는 30년 전쟁 중기인 1632년 11월 16일에 독일 [2]라이프치히 남서쪽 [1]뤼첸 근교에서 벌어진 개신교(신교) 군대와 가톨릭(구교) 군대가 벌인 전투이다.
[3]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 및 독일 개신교 제후 연합군과 신성 로마 제국 [6]페르디난트 2세 휘하의 [4]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가톨릭 동맹 연합군이 교전하여 보병, 기병, 포병의 3병의 결합이 어우러진 전투였다. 스웨덴군이 전술적으로 완전히 승리하였으나 국왕 [3]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여 개신교 군대의 단결이 악화되었다.
뤼첸 근교에서 진지를 차린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개신교군은 11월 16일 오전 공격을 개시하였다. 개신교군은 전투초반의 팽팽함과는 달리 카톨릭군의 포격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구스타프 2세가 직접 전장에 나섰으나 카톨릭군과 정면으로 맞닺게 되어 치열하게 싸웠으나 총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호위병들과 함께 후퇴하였으나 카톨릭군의 연이은 총탄을 추가로 맞으면서 치명상을 입고 낙마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난전 상태에서 연속된 총탄으로 결국 사망했다.
양군은 구스타브 2세의 죽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교전을 계속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스타브의 전사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개신교군은 일시적으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전선 부대는 후퇴하려고 하였다. 패주 직전의 상태에서 지휘관인 크니프하우젠이 냉정을 찾아 전군을 결속시켜 붕괴를 막는 데 성공했다. 독일 신교도를 이끌었던 작센바이마르의 공작인 [5]베른하르트는 구스타브의 죽음을 알고 지휘권을 넘겨받은 후 총 공격을 감행했다.
스웨덴군을 포함한 개신교군은 구스타브 2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맹렬한 기세로 돌격을 시작했다. 카톨릭군도 이에 응전하면서 양군 모두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개신교군 세력이 승리하였다. 사기가 떨어진 카톨릭군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했다.
뤼첸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3]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으로 스웨덴군 및 개신 제후 연합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결국, 1934년 9월 6일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를 겪으면서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그 후 교착상태에 빠진 30년 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참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구스타프 2세가 착용했던 황색의 [7]버프코트는 전리품으로 신성로마 황제에게 보내졌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오스트리아에서 스웨덴으로 반환되었다.
[1] 뤼첸(Lützen) : 독일의 라이프치히 시 경계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도시
[2] 라이프치히(Leipzig) : 독일 작센 주의 가장 큰 도시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4]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 1583년~1634년) : 보헤미아(현재의 체코)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30년 전쟁 중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2세 황제 휘하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5]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Bernhard von Sachsen-Weimar, 1604년~1639년) : 30년 전쟁 당시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1632년 11월 16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사령관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군대를 무찔렀다
[6]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1578년~1637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재위, 1619년~1637년). 보헤미아의 국왕(재위, 1617년~1637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1617년~1637년)
[7] 버프코드(buff coat) : 16세기에 만든 유럽의 가죽 갑옷의 한 종류
[3]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 및 독일 개신교 제후 연합군과 신성 로마 제국 [6]페르디난트 2세 휘하의 [4]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가톨릭 동맹 연합군이 교전하여 보병, 기병, 포병의 3병의 결합이 어우러진 전투였다. 스웨덴군이 전술적으로 완전히 승리하였으나 국왕 [3]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여 개신교 군대의 단결이 악화되었다.
뤼첸 근교에서 진지를 차린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개신교군은 11월 16일 오전 공격을 개시하였다. 개신교군은 전투초반의 팽팽함과는 달리 카톨릭군의 포격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구스타프 2세가 직접 전장에 나섰으나 카톨릭군과 정면으로 맞닺게 되어 치열하게 싸웠으나 총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호위병들과 함께 후퇴하였으나 카톨릭군의 연이은 총탄을 추가로 맞으면서 치명상을 입고 낙마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난전 상태에서 연속된 총탄으로 결국 사망했다.
양군은 구스타브 2세의 죽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교전을 계속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스타브의 전사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개신교군은 일시적으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전선 부대는 후퇴하려고 하였다. 패주 직전의 상태에서 지휘관인 크니프하우젠이 냉정을 찾아 전군을 결속시켜 붕괴를 막는 데 성공했다. 독일 신교도를 이끌었던 작센바이마르의 공작인 [5]베른하르트는 구스타브의 죽음을 알고 지휘권을 넘겨받은 후 총 공격을 감행했다.
스웨덴군을 포함한 개신교군은 구스타브 2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맹렬한 기세로 돌격을 시작했다. 카톨릭군도 이에 응전하면서 양군 모두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개신교군 세력이 승리하였다. 사기가 떨어진 카톨릭군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했다.
뤼첸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3]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으로 스웨덴군 및 개신 제후 연합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결국, 1934년 9월 6일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를 겪으면서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그 후 교착상태에 빠진 30년 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참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구스타프 2세가 착용했던 황색의 [7]버프코트는 전리품으로 신성로마 황제에게 보내졌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오스트리아에서 스웨덴으로 반환되었다.
[1] 뤼첸(Lützen) : 독일의 라이프치히 시 경계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도시
[2] 라이프치히(Leipzig) : 독일 작센 주의 가장 큰 도시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4]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 1583년~1634년) : 보헤미아(현재의 체코)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30년 전쟁 중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2세 황제 휘하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5]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Bernhard von Sachsen-Weimar, 1604년~1639년) : 30년 전쟁 당시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1632년 11월 16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사령관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군대를 무찔렀다
[6]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1578년~1637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재위, 1619년~1637년). 보헤미아의 국왕(재위, 1617년~1637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1617년~1637년)
[7] 버프코드(buff coat) : 16세기에 만든 유럽의 가죽 갑옷의 한 종류
[1]뇌르틀링겐 전투는 30년 전쟁 중기인 1634년 9월 6일에 벌어진 가톨릭(구교) 군대와 개신교(신교) 군대가 벌인 전투이다.
신성로마제국은 [3]페르디난트 3세와 사촌인 [5]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하는 있었으며 개신교군은 [4]구스타브 호른이 지휘하는 스웨덴군과 [6]베르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가 지휘하고 있었다.
스웨덴군은 2년 전 뤼첸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당시 전투에서 스웨덴의 국왕 [2]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사망으로 스웨덴군 및 개신교군 연합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개신교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패배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동남부 독일을 지배하던 스웨덴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스페인의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여 라인강의 서부 지역을 확고히 장악했고, 이로 인해 위협받게 된 프랑스는 30년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1] 뇌르틀링겐(Nördlingen) : 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도시
[2]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3]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1608년~1657년) : 페르디난트 2세의 장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재위:1637년~1657년), 보헤미아 국왕(재위:1627년~1657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1625년~1657년). 30년 전쟁을 끝낸 황제
[4] 구스타브 호른(Gustav Horn, 1592년~1657년) : 스웨덴 제국의 군인, 정치인
[5]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Fernando de Austria, 1609년~1641년) : 합스부르크 가의 스페인 국왕의 펠리페 3세의 차남
[6]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Bernhard von Sachsen-Weimar, 1604년~1639년) : 30년 전쟁 당시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1632년 1632년 11월 16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사령관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군대를 무찔렀다
신성로마제국은 [3]페르디난트 3세와 사촌인 [5]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하는 있었으며 개신교군은 [4]구스타브 호른이 지휘하는 스웨덴군과 [6]베르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가 지휘하고 있었다.
스웨덴군은 2년 전 뤼첸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당시 전투에서 스웨덴의 국왕 [2]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사망으로 스웨덴군 및 개신교군 연합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개신교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패배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동남부 독일을 지배하던 스웨덴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스페인의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여 라인강의 서부 지역을 확고히 장악했고, 이로 인해 위협받게 된 프랑스는 30년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1] 뇌르틀링겐(Nördlingen) : 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도시
[2]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3]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1608년~1657년) : 페르디난트 2세의 장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재위:1637년~1657년), 보헤미아 국왕(재위:1627년~1657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1625년~1657년). 30년 전쟁을 끝낸 황제
[4] 구스타브 호른(Gustav Horn, 1592년~1657년) : 스웨덴 제국의 군인, 정치인
[5]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Fernando de Austria, 1609년~1641년) : 합스부르크 가의 스페인 국왕의 펠리페 3세의 차남
[6]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Bernhard von Sachsen-Weimar, 1604년~1639년) : 30년 전쟁 당시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1632년 1632년 11월 16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사령관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군대를 무찔렀다
임진왜란 여파로 명나라는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여진족은 후금을 세웠다.
점점 국력이 강해진 후금은 조선에게 형제 관계에서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후금의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나라로 바꾸고 대군을 거느리고 1636년(인조14) 12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쳐들어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철수하여 후일을 기약하려 했으나 강화도로 가는 길이 청나라군에 의해 점령됨에 따라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거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강추위와 굶주림으로 오래 버티지 못하였다. 당시 조선 관료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청과 화의하자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로 나뉘어 논쟁을 계속했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당시 한강 나루터)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 인조 : 조선 제16대 임금(재위: 1623년 ~ 1649년)
* 홍타이지(1592년~1643년) : 청나라의 제2대 황제. 재위 : 1626년~1643년. '청태종' 혹은 '숭덕제'로 알려져 있다
점점 국력이 강해진 후금은 조선에게 형제 관계에서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후금의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나라로 바꾸고 대군을 거느리고 1636년(인조14) 12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쳐들어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철수하여 후일을 기약하려 했으나 강화도로 가는 길이 청나라군에 의해 점령됨에 따라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거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강추위와 굶주림으로 오래 버티지 못하였다. 당시 조선 관료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청과 화의하자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로 나뉘어 논쟁을 계속했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당시 한강 나루터)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 인조 : 조선 제16대 임금(재위: 1623년 ~ 1649년)
* 홍타이지(1592년~1643년) : 청나라의 제2대 황제. 재위 : 1626년~1643년. '청태종' 혹은 '숭덕제'로 알려져 있다
쌍령전투는 병자호란이 진행되던 중 1637년 1월 2일에 쌍령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청군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청군에 대패하였으며 결국 남한산성에서 항전하고 있었던 인조가 청나라에게 항복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패전을 결정한 최종 전투였으며 한국 역사 3대 패전(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중 하나로 꼽힌다.
* 인조(1595~1649) : 조선의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 ~ 1649년
* 쌍령 : 경기도 광주부 쌍령(현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패전을 결정한 최종 전투였으며 한국 역사 3대 패전(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중 하나로 꼽힌다.
* 인조(1595~1649) : 조선의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 ~ 1649년
* 쌍령 : 경기도 광주부 쌍령(현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포르투갈 독립전쟁은 포르투갈 왕국과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 왕국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포르투갈 왕정 복고전쟁이라고도 한다
포르투갈 [1]아비스 왕조의 [2]엔히크 1세 국왕이 후세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국와 [4]펠리페 2세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하여 1580년에 [5]이베리아 연합을 만들었다.
[4]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폭넓은 자치권을 인정했지만 ,뒤를 이은 펠리페 3세는 포르투갈을 스페인의 한 주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쳤고 이어 펠리페 4세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중과세를 부과하고 포르투갈 귀족들의 지위를 박탈하였으며 요직은 스페인 혹은 친 스페인 성향의 포르투갈 귀족들을 등용해 포르투갈내에서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다.
1640년 12월 7일 포르투갈 귀족들과 시민들이 리스본에서 봉기를 일으켜 [8]리베이라 궁전을 공격하여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이던 재상 [9]미겔 드 바스콘셀로스를 살해하고 포르투갈을 통치하던 스페인 총독을 추방하였다.
이 공격을 주도한 귀족들의 대표인 브라간사 공작이 포르투갈 새 국왕으로 추대되어 [6]주앙 4세로 등극하여 단절된 포르투갈 왕조는 [3]브라간사 왕조로 계승되었다.
주앙 4세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선언했고 이에 반발한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침공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668년까지 28년간 전쟁 상태가 지속되었다.
초기 포르투갈은 방어와 잉글랜드와 외교적 동맹을 통해 저항했다. 이후 스페인은 유럽 내 다른 전쟁들로 인해 포르투갈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고, 포르투갈은 방어를 강화하며 독립을 유지했다. 결국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제압하는데 실패했고 잉글랜드의 중재를 받아들여 리스본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독립과 [3]브라간사 왕조를 정식으로 승인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에게 [7]세우타를 할양했지만 그 밖의 국외 영토들은 모두 보존하였다.
이로써 약 60년간의 이베리아 연합이 종식되고, 포르투갈은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1] 아비스 왕조(House of Aviz) : 조아니나가로 알려진 포르투갈의 두 번째 왕가
[2] 엔히크 1세(Henrique I, 1512년 1월 31일~1580년 1월 31일) :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10대 국왕(재위, 1578년 8월 4일 ~ 1580년 1월 31일)
[3] 브라간사 왕조(House of Braganza) : 아비스 가에서 갈라진 가문으로서 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을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추대하여 왕가의 지위를 얻었으며 이후 제4왕조 브라간사 왕조를 열게 된다. 이 왕조는 1910년 포르투갈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270년간 16대를 이어갔다
[4]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제2대 국왕(스페인 재위 : 1556~1598). 포르투갈 왕으로 필리프(Filipe) 1세로 불린다
[5] 이베리아 연합(Iberian Union) : 포르투갈 왕국과 스페인 왕국의 동군연합으로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약 60년간 존속되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의 시기이다
[6] 주앙 4세(John IV of Portugal, 1604년~1656년) : 포르투갈 왕국을 다스린 브라간사 왕가 최초의 국왕(재위: 1640년~1656년)
[7] 세우타(Ceuta) : 이베리아 반도가 아닌 북아프리카 본토에 위치해 모로코와 육상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 스페인의 자치도시
[8] 리베이라 궁전(Ribeira Palace) :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에서 위치한 포르투갈 왕들이 약 250년 동안 거주하였던 궁전. 이 궁전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현재는 코레르시우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9] 미겔 드 바스콘셀로스(Miguel de Vasconcelos e Brito, 약 1590년 ~ 1640년 12월 1일) : 포르투갈의 정치인으로 이베리아 연합 말기인 1635년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 왕국의 국무장관(사실상 총리)을 역임했다. 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서 포르투갈의 자치권을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국민들의 강한 반감을 샀으며 1640년 포르투갈 독립 혁명 당시 암살되었다
포르투갈 [1]아비스 왕조의 [2]엔히크 1세 국왕이 후세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국와 [4]펠리페 2세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하여 1580년에 [5]이베리아 연합을 만들었다.
[4]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폭넓은 자치권을 인정했지만 ,뒤를 이은 펠리페 3세는 포르투갈을 스페인의 한 주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쳤고 이어 펠리페 4세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중과세를 부과하고 포르투갈 귀족들의 지위를 박탈하였으며 요직은 스페인 혹은 친 스페인 성향의 포르투갈 귀족들을 등용해 포르투갈내에서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다.
1640년 12월 7일 포르투갈 귀족들과 시민들이 리스본에서 봉기를 일으켜 [8]리베이라 궁전을 공격하여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이던 재상 [9]미겔 드 바스콘셀로스를 살해하고 포르투갈을 통치하던 스페인 총독을 추방하였다.
이 공격을 주도한 귀족들의 대표인 브라간사 공작이 포르투갈 새 국왕으로 추대되어 [6]주앙 4세로 등극하여 단절된 포르투갈 왕조는 [3]브라간사 왕조로 계승되었다.
주앙 4세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선언했고 이에 반발한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침공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668년까지 28년간 전쟁 상태가 지속되었다.
초기 포르투갈은 방어와 잉글랜드와 외교적 동맹을 통해 저항했다. 이후 스페인은 유럽 내 다른 전쟁들로 인해 포르투갈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고, 포르투갈은 방어를 강화하며 독립을 유지했다. 결국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제압하는데 실패했고 잉글랜드의 중재를 받아들여 리스본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독립과 [3]브라간사 왕조를 정식으로 승인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에게 [7]세우타를 할양했지만 그 밖의 국외 영토들은 모두 보존하였다.
이로써 약 60년간의 이베리아 연합이 종식되고, 포르투갈은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1] 아비스 왕조(House of Aviz) : 조아니나가로 알려진 포르투갈의 두 번째 왕가
[2] 엔히크 1세(Henrique I, 1512년 1월 31일~1580년 1월 31일) :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10대 국왕(재위, 1578년 8월 4일 ~ 1580년 1월 31일)
[3] 브라간사 왕조(House of Braganza) : 아비스 가에서 갈라진 가문으로서 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을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추대하여 왕가의 지위를 얻었으며 이후 제4왕조 브라간사 왕조를 열게 된다. 이 왕조는 1910년 포르투갈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270년간 16대를 이어갔다
[4]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제2대 국왕(스페인 재위 : 1556~1598). 포르투갈 왕으로 필리프(Filipe) 1세로 불린다
[5] 이베리아 연합(Iberian Union) : 포르투갈 왕국과 스페인 왕국의 동군연합으로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약 60년간 존속되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의 시기이다
[6] 주앙 4세(John IV of Portugal, 1604년~1656년) : 포르투갈 왕국을 다스린 브라간사 왕가 최초의 국왕(재위: 1640년~1656년)
[7] 세우타(Ceuta) : 이베리아 반도가 아닌 북아프리카 본토에 위치해 모로코와 육상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 스페인의 자치도시
[8] 리베이라 궁전(Ribeira Palace) :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에서 위치한 포르투갈 왕들이 약 250년 동안 거주하였던 궁전. 이 궁전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현재는 코레르시우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9] 미겔 드 바스콘셀로스(Miguel de Vasconcelos e Brito, 약 1590년 ~ 1640년 12월 1일) : 포르투갈의 정치인으로 이베리아 연합 말기인 1635년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 왕국의 국무장관(사실상 총리)을 역임했다. 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서 포르투갈의 자치권을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국민들의 강한 반감을 샀으며 1640년 포르투갈 독립 혁명 당시 암살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1642년부터 1651년까지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포함한 영국 전역에서 발생하다. 왕권을 주장하는 왕당파와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의회파의 충돌로 발생하였다. 이 내전은 잉글랜드의 정치 체제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7]입헌군주제와 의회 중심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전의 배경에는 왕권과 의회의 갈등, 종교적 대립,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 [1]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 부과와 종교 정책 강행을 시도했으며, 이에 의회는 반발했다. 특히 찰스가 1629년부터 1940년까지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의회를 없애려고 한다는 의구심을 일으켰다. 잉글랜드는 성공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 체계에 대해 청교도들은 비판적이었으며, 찰스 1세는 이를 억압했다.
스코틀랜드에 성공회를 강제로 도입하려 하며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벌어졌고 이는 재정난으로 이어졌다. 찰스 1세는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고 이에 찰스 1세는 의회를 통제하려다가 실패하면서가 갈등이 폭발하였다. 왕당파와 의회파의 긴장이 심화되면서 전쟁으로 이어졌다.
1642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왕당파(국왕 지지 세력)와 의회파(청교도와 개혁 지지 세력)가 충돌했다. 전쟁 초기에는 왕당파가 우세했으나, 1645년 [3]네이즈비 전투에서 [5]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하며 전세가 뒤집혔다. 1646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항복하였지만, 스코틀랜드는 의회파에 신변을 넘기면서 감금되었다.
찰스 1세는 비밀리에 왕권 회복을 위해 1657년에 스코틀랜드와 협상하여 왕당파는 2차 내전(1648~1649)을 일으켰다. 그러나 1년여 만에 패배하면서 결국 찰스 1세는 1649년 1월 30일에, 공개 재판 후 처형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는 국왕이 없는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왕당파는 찰스 1세의 아들인 [2]찰스 2세의 복위를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저항하면서 3차 내전(1649~1651)이 발발했다. 결국 1651년 울스터 전투에서 [5]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하며 내전은 마무리되었다.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5]올리버 크롬웰은 1653년 의회를 해산하고 구준와 유사한 [6]호국경에 취임하여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화정은 붕괴되었다. 1660년 [2]찰스 2세가 왕으로 복귀하면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내전을 거치면서 왕권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았고,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결국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의 기틀이 확립되면서 잉글랜드는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왕권 제한, 의회 권력 강화, 종교 개혁, 군사 혁신 등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 내전으로 인해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와 [7]입헌군주제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정치발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1] 찰스 1세(Charles I,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재위, 1625년 3월 27일~1649년 1월 30일)
[2] 찰스 2세(Charles II, 1630년 5월 29일~1685년 2월 6일) : 잉글랜드,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국왕(재위, 1660년 5월 29일 ~ 1685년 2월 6일)
[3] 네이즈비 전투(Battle of Naseby) : 잉글랜드 내전 시기인 1645년 6월 14일 노샘프턴셔의 네이즈비에서 찰스 1세가 이끄는 국왕군과 토머스 페어팩스 경과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하는 의회군이 맞붙은 전투. 의회군이 이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1차 잉글랜드 내전은 이 전투 이후 1년 만에 의회파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4] 우스터 전투(Battle of Worcester, 1651년 9월 3일) : 잉글랜드 우스터에서 치뤄진 잉글랜드 내전의 마지막 전투였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왕당파와 의회파와의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의회파가 승리하였다
[5]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 : 영국 내전에서 의회군을 이끌어 왕당파에 승리하여 잉글랜드 공화국을 세웠다. 1653년부터는 국가원수인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서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군사 정권을 유지했다. 그의 사후 왕정이 복귀했지만, 영국 정치에서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6] 호국경(Lord Protector) : 잉글랜드의 왕권이 미약하였을 때, 왕을 섭정하던 귀족에게 붙이던 호칭
[7] 입헌군주제 : 헌법 체계 아래서 세습되거나 선임된 군주를 인정하는 정부 형태. 즉 정치적 군주의 권력이 헌법에 의하여 제한을 받는 군주제
내전의 배경에는 왕권과 의회의 갈등, 종교적 대립,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 [1]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 부과와 종교 정책 강행을 시도했으며, 이에 의회는 반발했다. 특히 찰스가 1629년부터 1940년까지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의회를 없애려고 한다는 의구심을 일으켰다. 잉글랜드는 성공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 체계에 대해 청교도들은 비판적이었으며, 찰스 1세는 이를 억압했다.
스코틀랜드에 성공회를 강제로 도입하려 하며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벌어졌고 이는 재정난으로 이어졌다. 찰스 1세는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고 이에 찰스 1세는 의회를 통제하려다가 실패하면서가 갈등이 폭발하였다. 왕당파와 의회파의 긴장이 심화되면서 전쟁으로 이어졌다.
1642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왕당파(국왕 지지 세력)와 의회파(청교도와 개혁 지지 세력)가 충돌했다. 전쟁 초기에는 왕당파가 우세했으나, 1645년 [3]네이즈비 전투에서 [5]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하며 전세가 뒤집혔다. 1646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항복하였지만, 스코틀랜드는 의회파에 신변을 넘기면서 감금되었다.
찰스 1세는 비밀리에 왕권 회복을 위해 1657년에 스코틀랜드와 협상하여 왕당파는 2차 내전(1648~1649)을 일으켰다. 그러나 1년여 만에 패배하면서 결국 찰스 1세는 1649년 1월 30일에, 공개 재판 후 처형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는 국왕이 없는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왕당파는 찰스 1세의 아들인 [2]찰스 2세의 복위를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저항하면서 3차 내전(1649~1651)이 발발했다. 결국 1651년 울스터 전투에서 [5]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하며 내전은 마무리되었다.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5]올리버 크롬웰은 1653년 의회를 해산하고 구준와 유사한 [6]호국경에 취임하여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화정은 붕괴되었다. 1660년 [2]찰스 2세가 왕으로 복귀하면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내전을 거치면서 왕권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았고,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결국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의 기틀이 확립되면서 잉글랜드는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왕권 제한, 의회 권력 강화, 종교 개혁, 군사 혁신 등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 내전으로 인해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와 [7]입헌군주제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정치발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1] 찰스 1세(Charles I,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재위, 1625년 3월 27일~1649년 1월 30일)
[2] 찰스 2세(Charles II, 1630년 5월 29일~1685년 2월 6일) : 잉글랜드,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국왕(재위, 1660년 5월 29일 ~ 1685년 2월 6일)
[3] 네이즈비 전투(Battle of Naseby) : 잉글랜드 내전 시기인 1645년 6월 14일 노샘프턴셔의 네이즈비에서 찰스 1세가 이끄는 국왕군과 토머스 페어팩스 경과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하는 의회군이 맞붙은 전투. 의회군이 이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1차 잉글랜드 내전은 이 전투 이후 1년 만에 의회파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4] 우스터 전투(Battle of Worcester, 1651년 9월 3일) : 잉글랜드 우스터에서 치뤄진 잉글랜드 내전의 마지막 전투였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왕당파와 의회파와의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의회파가 승리하였다
[5]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 : 영국 내전에서 의회군을 이끌어 왕당파에 승리하여 잉글랜드 공화국을 세웠다. 1653년부터는 국가원수인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서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군사 정권을 유지했다. 그의 사후 왕정이 복귀했지만, 영국 정치에서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6] 호국경(Lord Protector) : 잉글랜드의 왕권이 미약하였을 때, 왕을 섭정하던 귀족에게 붙이던 호칭
[7] 입헌군주제 : 헌법 체계 아래서 세습되거나 선임된 군주를 인정하는 정부 형태. 즉 정치적 군주의 권력이 헌법에 의하여 제한을 받는 군주제
웨스트팔렌 조약은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현재 독일의 두 도시인 [1]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2]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이다.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30년 전쟁은 로마 가톨릭세력과 개신교세력간의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종교갈등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한 양상을 흐르게 된다. 30년 전쟁은 유럽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료되었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개신교 국가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에서 벗어나 생존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중세에서 근대국가체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근대 국제법의 시초로 평가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 첫째, 조약 체결 방식을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강제적 형식이 아닌 참전했던 유럽 왕국들과 제후국들의 대표들이 모여 협상을 통해 체결되었다.
- 둘째,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종교의 자유란 구교와 신교 중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각 국가들에게 위임했음을 의미한다.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종교가 강요되었던 과거 중세와 비교했을 때 종교의 자유는 각 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신성로마제국은 약화되어 멸망하게 된다. 각 국가들의 '주권' 의식의 탄생과 함께 영토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국가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1]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 독일 북서쪽 니더작센주에 있는 도시
[2] 뮌스터(Münster) : 독일 북서쪽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있는 도시
30년 전쟁은 로마 가톨릭세력과 개신교세력간의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종교갈등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한 양상을 흐르게 된다. 30년 전쟁은 유럽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료되었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개신교 국가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에서 벗어나 생존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중세에서 근대국가체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근대 국제법의 시초로 평가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 첫째, 조약 체결 방식을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강제적 형식이 아닌 참전했던 유럽 왕국들과 제후국들의 대표들이 모여 협상을 통해 체결되었다.
- 둘째,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종교의 자유란 구교와 신교 중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각 국가들에게 위임했음을 의미한다.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종교가 강요되었던 과거 중세와 비교했을 때 종교의 자유는 각 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신성로마제국은 약화되어 멸망하게 된다. 각 국가들의 '주권' 의식의 탄생과 함께 영토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국가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1]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 독일 북서쪽 니더작센주에 있는 도시
[2] 뮌스터(Münster) : 독일 북서쪽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있는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