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Thirty Years War)
전국가
사건기간 : 1618년 5월 23일~1648년 10월 24일, 조회수 : 367, 등록일 : 2020-07-04
1517년에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신교인 개신교에 대하여 구교인 가톨릭 세력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는 30년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종교 갈등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정치, 경제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점점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30년 전쟁을 보통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전기를 종교 전쟁, 후기를 정치적 영토전쟁으로 분류한다.
유럽의 종교개혁 이후 유럽 북쪽의 개신교와 남쪽의 로마 카톨릭교로 양분되어 대립을 이어가던 무렵인 1617년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면서 개신교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1618년 보헤미아 프라하의 개신교 귀족들은 로마 가톨릭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가 보낸 특사 두 명을 약 17미터 높이의 건물에서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를 반란으로 판단한 페르디난트 2세는 군대를 일으켜 보헤미아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많은 요인들이 얽히며 유럽 각국으로 전선이 확대되어 무려 30년이나 지속했다.
1640년이 되자 30년 전쟁을 시작한 초기의 왕 및 장군, 병사들도 거의 다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주역들이 등장했지만 각 나라들은 대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조차 망각한 채 관성적으로 싸울 뿐이었다. 마침내 1648년 웨스트팔리아에서 유럽 각국은 조약을 맺고 30년 전쟁은 끝나게 된다.
30년 전쟁은 이후 유럽의 지도뿐만 아니라 종교, 문화 등을 크게 변화시켰다.
*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Holy Roman Emperor, 1578년~1637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독일의 왕, 보헤미아의 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 보헤미아 왕국 : 중앙유럽 보헤미아 지역에 있던 나라로, 영토 대부분은 오늘날 체코에 속한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유럽의 종교개혁 이후 유럽 북쪽의 개신교와 남쪽의 로마 카톨릭교로 양분되어 대립을 이어가던 무렵인 1617년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면서 개신교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1618년 보헤미아 프라하의 개신교 귀족들은 로마 가톨릭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가 보낸 특사 두 명을 약 17미터 높이의 건물에서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를 반란으로 판단한 페르디난트 2세는 군대를 일으켜 보헤미아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많은 요인들이 얽히며 유럽 각국으로 전선이 확대되어 무려 30년이나 지속했다.
1640년이 되자 30년 전쟁을 시작한 초기의 왕 및 장군, 병사들도 거의 다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주역들이 등장했지만 각 나라들은 대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조차 망각한 채 관성적으로 싸울 뿐이었다. 마침내 1648년 웨스트팔리아에서 유럽 각국은 조약을 맺고 30년 전쟁은 끝나게 된다.
30년 전쟁은 이후 유럽의 지도뿐만 아니라 종교, 문화 등을 크게 변화시켰다.
*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Holy Roman Emperor, 1578년~1637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독일의 왕, 보헤미아의 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오스트리아 대공
* 보헤미아 왕국 : 중앙유럽 보헤미아 지역에 있던 나라로, 영토 대부분은 오늘날 체코에 속한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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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교황과 함께 계속되었는데 교황은 마치 황제와 같은 인물이었고, 대주교와 주교들은 옛 로마마제국의 행정관들과 똑같으며, 그들 밑으로는 지역마다 사제들이 있었다. 이 신성한 단체는 그 자체의 법률, 형벌, 교도소 그리고 조세제도를 지니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가 당시 위와 같은 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한다.
죄 많고 타락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는 것이며, 믿음을 지닌다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는것을 주장(스스로 믿는 종교)하며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함으로써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던 개혁 운동이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 :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가 당시 위와 같은 사상을 비판한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출발한다.
죄 많고 타락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는 것이며, 믿음을 지닌다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다는것을 주장(스스로 믿는 종교)하며 오직 성경의 권위와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을 강조함으로써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와 제도를 새롭게 개혁시키고자 했던 개혁 운동이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1546년) : 독일의 신학자, 종교개혁가
네덜란드(혹은 저지대)는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즉 베네룩스 지역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있는 릴까지 포함하여 총 17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는 무적함대를 이끌며 유럽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합스부르크 왕국의 스페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네덜란드 17개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개신교의 교세가 확산되자 이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 1세는 반기를 들면서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라는 두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과 대립하여 1588년 무적함대를 구성하여 영국으로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대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로 해상권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1600년 스페인과 해전에서 승리를 하며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의 후반부에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종교개혁 이후 야기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30년간의 종교전쟁(1618~1648)에 휘말렸으나 1648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고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 Empire)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부르는 말이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전체와 루마니아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이탈리아, 폴란드의 남부 등이 포함된다.
*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1598년
* 오라녜 공(Prins van Oranje) : 네덜란드의 왕위 계승자의 칭호
* 빌럼 1세(William I, 1533년~1584년) :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스페인과 가톨릭에 저항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의 국부로 빌럼 1세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또한 침묵공(De Zwijger)이라고도 불린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네덜란드 17개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개신교의 교세가 확산되자 이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 1세는 반기를 들면서 스페인에 대항하였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라는 두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었다.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과 대립하여 1588년 무적함대를 구성하여 영국으로 원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대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로 해상권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 제국으로 부상하하는 계기가 된다.
네덜란드는 1600년 스페인과 해전에서 승리를 하며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는 전쟁의 후반부에 유럽의 여타 국가들이 종교개혁 이후 야기된 신교와 구교의 갈등으로 30년간의 종교전쟁(1618~1648)에 휘말렸으나 1648년 웨스트팔리아(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고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 합스부르크 왕국(Habsburg Empire)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부르는 말이다. 현재의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전체와 루마니아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북부, 이탈리아, 폴란드의 남부 등이 포함된다.
*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 재위 : 1556년~1598년
* 오라녜 공(Prins van Oranje) : 네덜란드의 왕위 계승자의 칭호
* 빌럼 1세(William I, 1533년~1584년) : 네덜란드 공화국의 초대 총독이자 스페인과 가톨릭에 저항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지도자. 본명은 빌헬름 폰 나사우딜렌부르크(Wilhelm von Nassau-Dillenburg). 네덜란드의 국부로 빌럼 1세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또한 침묵공(De Zwijger)이라고도 불린다
*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1603년) :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 여왕. 재위기간:1558년~1603년.주변 열강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유럽의 변방국이었던 잉글랜드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었다. 처녀여왕 혹은 해적여왕으로 알려져있다
* 웨스트팔리아 조약(Peace of Westphalia) :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독일의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1648년)과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끝났다
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미국 백인 정착민과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사이의 정복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말
인조반정(仁祖反正)은 1623년(광해군 15년) 4월 11일 서인 반정 세력이 광해군 및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인조)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이괄은 2등 공신으로 배정받자 불만이 컸다.
1624년 1월에 이괄(평양 병마절도사)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를 당하자 이괄은 항왜100여명과 휘하 병사 1만여명을 통솔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괄은 2월에 한양에 입성하였고 인조는 한양에서 충남 공주에 위치한 공산성으로 피란을 갔다.
이후 조선 관군의 반격으로 이괄의 군대는 대패하였고 경기도 광주로 달아난 이괄은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인조는 환도하였다.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이와 동시에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에 가담했던 평안도 구성부사인 한명련의 아들인 윤(潤)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괄의 난)]
* 인조반정 : 1623년 4월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왕(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으로 옹립한 사건
* 공산성 : 충남 공주시에 소재하고 있는 산성으로 백제의 두번째 도읍지이자 왕궁터
* 부사 : 고려·조선시대 지방의 장관직
* 병마절도사 : 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무관직
* 후금 : 1616년 여진족 누루하치가 건국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
* 정묘호란 :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입해 일어난 전쟁
1624년 1월에 이괄(평양 병마절도사)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를 당하자 이괄은 항왜100여명과 휘하 병사 1만여명을 통솔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괄은 2월에 한양에 입성하였고 인조는 한양에서 충남 공주에 위치한 공산성으로 피란을 갔다.
이후 조선 관군의 반격으로 이괄의 군대는 대패하였고 경기도 광주로 달아난 이괄은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평정되고, 인조는 환도하였다.
이괄의 난이 당시 국내외 정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안으로는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서울을 떠난 사태는 처음 있었던 일로 집권층·일반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이와 동시에 집권층의 사찰 강화 등으로 오랫동안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밖으로는 후금의 남침 야욕을 자극시키기도 하였다. 반란에 가담했던 평안도 구성부사인 한명련의 아들인 윤(潤)등이 후금으로 도망해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며 남침을 종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괄의 난)]
* 인조반정 : 1623년 4월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왕(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으로 옹립한 사건
* 공산성 : 충남 공주시에 소재하고 있는 산성으로 백제의 두번째 도읍지이자 왕궁터
* 부사 : 고려·조선시대 지방의 장관직
* 병마절도사 : 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무관직
* 후금 : 1616년 여진족 누루하치가 건국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
* 정묘호란 :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입해 일어난 전쟁
정묘호란(丁卯胡亂)은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3만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하고 정주성, 안주성으로 남하하였으며 조선군은 곳곳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3월에는 평양성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넘어갔다.
조선은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고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더라도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 인조(1595년~1649년) : 조선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1649년
* 후금 : 1616년 여진족 누루하치가 건국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
* 평산 : 황해북도에 위치한 군
* 명나라 :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하고 정주성, 안주성으로 남하하였으며 조선군은 곳곳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3월에는 평양성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넘어갔다.
조선은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고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더라도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 인조(1595년~1649년) : 조선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1649년
* 후금 : 1616년 여진족 누루하치가 건국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고쳤으며 중국의 마지막 통일왕조
* 평산 : 황해북도에 위치한 군
* 명나라 :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
[1]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2] 30년 전쟁중 가장 유명한 전투이다.
1631년 9월 17일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지휘관이었던 스웨덴 왕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라이프치히 근교 브라이텐펠트 평원에서 로마 가톨릭군의 지휘관인 틸리 백작인 [4]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30년 전쟁에서 처음으로 [5]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진영이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이 승리로 [3]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위대한 전술적 지도자로 면모를 확고히 다졌으며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영웅이 되었다.
[1] 브라이텐펠트 :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4km 떨어져 있는 지역
[2] 30년 전쟁 :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과 중부유럽을 무대로 벌어진 개신교(신교)와 카톨릭교(구교)간의 종교전쟁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4]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Johann Tserclaes, Count of Tilly, 1559년~1632) : '갑옷을 입은 수도사' 혹은 '마그데부르크(독일 도시)의 도살자'로 유명한 30년 전쟁(1618~1648년)시 신성 로마 제국의 장수
[5]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 개신교.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자의 의미로 담고있다
1631년 9월 17일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지휘관이었던 스웨덴 왕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라이프치히 근교 브라이텐펠트 평원에서 로마 가톨릭군의 지휘관인 틸리 백작인 [4]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30년 전쟁에서 처음으로 [5]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진영이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이 승리로 [3]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위대한 전술적 지도자로 면모를 확고히 다졌으며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영웅이 되었다.
[1] 브라이텐펠트 :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4km 떨어져 있는 지역
[2] 30년 전쟁 :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과 중부유럽을 무대로 벌어진 개신교(신교)와 카톨릭교(구교)간의 종교전쟁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4]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Johann Tserclaes, Count of Tilly, 1559년~1632) : '갑옷을 입은 수도사' 혹은 '마그데부르크(독일 도시)의 도살자'로 유명한 30년 전쟁(1618~1648년)시 신성 로마 제국의 장수
[5]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 개신교.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자의 의미로 담고있다
[1]뤼첸 전투(Battle of Lützen)는 30년 전쟁 중기인 1632년 11월 16일에 독일 [2]라이프치히 남서쪽 [1]뤼첸 근교에서 벌어진 개신교(신교) 군대와 가톨릭(구교) 군대가 벌인 전투이다.
[3]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 및 독일 개신교 제후 연합군과 신성 로마 제국 [6]페르디난트 2세 휘하의 [4]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가톨릭 동맹 연합군이 교전하여 보병, 기병, 포병의 3병의 결합이 어우러진 전투였다. 스웨덴군이 전술적으로 완전히 승리하였으나 국왕 [3]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여 개신교 군대의 단결이 악화되었다.
뤼첸 근교에서 진지를 차린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개신교군은 11월 16일 오전 공격을 개시하였다. 개신교군은 전투초반의 팽팽함과는 달리 카톨릭군의 포격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구스타프 2세가 직접 전장에 나섰으나 카톨릭군과 정면으로 맞닺게 되어 치열하게 싸웠으나 총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호위병들과 함께 후퇴하였으나 카톨릭군의 연이은 총탄을 추가로 맞으면서 치명상을 입고 낙마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난전 상태에서 연속된 총탄으로 결국 사망했다.
양군은 구스타브 2세의 죽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교전을 계속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스타브의 전사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개신교군은 일시적으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전선 부대는 후퇴하려고 하였다. 패주 직전의 상태에서 지휘관인 크니프하우젠이 냉정을 찾아 전군을 결속시켜 붕괴를 막는 데 성공했다. 독일 신교도를 이끌었던 작센바이마르의 공작인 [5]베른하르트는 구스타브의 죽음을 알고 지휘권을 넘겨받은 후 총 공격을 감행했다.
스웨덴군을 포함한 개신교군은 구스타브 2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맹렬한 기세로 돌격을 시작했다. 카톨릭군도 이에 응전하면서 양군 모두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개신교군 세력이 승리하였다. 사기가 떨어진 카톨릭군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했다.
뤼첸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3]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으로 스웨덴군 및 개신 제후 연합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결국, 1934년 9월 6일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를 겪으면서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그 후 교착상태에 빠진 30년 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참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구스타프 2세가 착용했던 황색의 [7]버프코트는 전리품으로 신성로마 황제에게 보내졌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오스트리아에서 스웨덴으로 반환되었다.
[1] 뤼첸(Lützen) : 독일의 라이프치히 시 경계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도시
[2] 라이프치히(Leipzig) : 독일 작센 주의 가장 큰 도시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4]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 1583년~1634년) : 보헤미아(현재의 체코)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30년 전쟁 중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2세 황제 휘하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5]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Bernhard von Sachsen-Weimar, 1604년~1639년) : 30년 전쟁 당시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1632년 11월 16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사령관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군대를 무찔렀다
[6]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1578년~1637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재위, 1619년~1637년). 보헤미아의 국왕(재위, 1617년~1637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1617년~1637년)
[7] 버프코드(buff coat) : 16세기에 만든 유럽의 가죽 갑옷의 한 종류
[3]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 및 독일 개신교 제후 연합군과 신성 로마 제국 [6]페르디난트 2세 휘하의 [4]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가톨릭 동맹 연합군이 교전하여 보병, 기병, 포병의 3병의 결합이 어우러진 전투였다. 스웨덴군이 전술적으로 완전히 승리하였으나 국왕 [3]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여 개신교 군대의 단결이 악화되었다.
뤼첸 근교에서 진지를 차린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개신교군은 11월 16일 오전 공격을 개시하였다. 개신교군은 전투초반의 팽팽함과는 달리 카톨릭군의 포격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구스타프 2세가 직접 전장에 나섰으나 카톨릭군과 정면으로 맞닺게 되어 치열하게 싸웠으나 총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호위병들과 함께 후퇴하였으나 카톨릭군의 연이은 총탄을 추가로 맞으면서 치명상을 입고 낙마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난전 상태에서 연속된 총탄으로 결국 사망했다.
양군은 구스타브 2세의 죽음을 바로 알지 못하고 교전을 계속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구스타브의 전사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개신교군은 일시적으로 혼란 상태에 빠졌고, 전선 부대는 후퇴하려고 하였다. 패주 직전의 상태에서 지휘관인 크니프하우젠이 냉정을 찾아 전군을 결속시켜 붕괴를 막는 데 성공했다. 독일 신교도를 이끌었던 작센바이마르의 공작인 [5]베른하르트는 구스타브의 죽음을 알고 지휘권을 넘겨받은 후 총 공격을 감행했다.
스웨덴군을 포함한 개신교군은 구스타브 2세의 원수를 갚기 위해 맹렬한 기세로 돌격을 시작했다. 카톨릭군도 이에 응전하면서 양군 모두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개신교군 세력이 승리하였다. 사기가 떨어진 카톨릭군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했다.
뤼첸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3]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죽음으로 스웨덴군 및 개신 제후 연합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결국, 1934년 9월 6일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를 겪으면서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그 후 교착상태에 빠진 30년 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참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구스타프 2세가 착용했던 황색의 [7]버프코트는 전리품으로 신성로마 황제에게 보내졌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오스트리아에서 스웨덴으로 반환되었다.
[1] 뤼첸(Lützen) : 독일의 라이프치히 시 경계에서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도시
[2] 라이프치히(Leipzig) : 독일 작센 주의 가장 큰 도시
[3]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4]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 1583년~1634년) : 보헤미아(현재의 체코)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30년 전쟁 중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 2세 황제 휘하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5]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Bernhard von Sachsen-Weimar, 1604년~1639년) : 30년 전쟁 당시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1632년 11월 16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사령관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군대를 무찔렀다
[6]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1578년~1637년)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재위, 1619년~1637년). 보헤미아의 국왕(재위, 1617년~1637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1617년~1637년)
[7] 버프코드(buff coat) : 16세기에 만든 유럽의 가죽 갑옷의 한 종류
[1]뇌르틀링겐 전투는 30년 전쟁 중기인 1634년 9월 6일에 벌어진 가톨릭(구교) 군대와 개신교(신교) 군대가 벌인 전투이다.
신성로마제국은 [3]페르디난트 3세와 사촌인 [5]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하는 있었으며 개신교군은 [4]구스타브 호른이 지휘하는 스웨덴군과 [6]베르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가 지휘하고 있었다.
스웨덴군은 2년 전 뤼첸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당시 전투에서 스웨덴의 국왕 [2]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사망으로 스웨덴군 및 개신교군 연합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개신교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패배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동남부 독일을 지배하던 스웨덴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스페인의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여 라인강의 서부 지역을 확고히 장악했고, 이로 인해 위협받게 된 프랑스는 30년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1] 뇌르틀링겐(Nördlingen) : 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도시
[2]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3]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1608년~1657년) : 페르디난트 2세의 장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재위:1637년~1657년), 보헤미아 국왕(재위:1627년~1657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1625년~1657년). 30년 전쟁을 끝낸 황제
[4] 구스타브 호른(Gustav Horn, 1592년~1657년) : 스웨덴 제국의 군인, 정치인
[5]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Fernando de Austria, 1609년~1641년) : 합스부르크 가의 스페인 국왕의 펠리페 3세의 차남
[6]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Bernhard von Sachsen-Weimar, 1604년~1639년) : 30년 전쟁 당시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1632년 1632년 11월 16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사령관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군대를 무찔렀다
신성로마제국은 [3]페르디난트 3세와 사촌인 [5]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하는 있었으며 개신교군은 [4]구스타브 호른이 지휘하는 스웨덴군과 [6]베르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가 지휘하고 있었다.
스웨덴군은 2년 전 뤼첸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당시 전투에서 스웨덴의 국왕 [2]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사망으로 스웨덴군 및 개신교군 연합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개신교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패배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동남부 독일을 지배하던 스웨덴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스페인의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여 라인강의 서부 지역을 확고히 장악했고, 이로 인해 위협받게 된 프랑스는 30년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1] 뇌르틀링겐(Nördlingen) : 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도시
[2]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us Adolphus, 1594년~1632년) : 스웨덴의 국왕(재위: 1611년~1632년).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雪王)'이라 불렸다
[3] 페르디난트 3세(Ferdinand III, 1608년~1657년) : 페르디난트 2세의 장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재위:1637년~1657년), 보헤미아 국왕(재위:1627년~1657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1625년~1657년). 30년 전쟁을 끝낸 황제
[4] 구스타브 호른(Gustav Horn, 1592년~1657년) : 스웨덴 제국의 군인, 정치인
[5]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Fernando de Austria, 1609년~1641년) : 합스부르크 가의 스페인 국왕의 펠리페 3세의 차남
[6] 베른하르트 폰 작센 바이마르(Bernhard von Sachsen-Weimar, 1604년~1639년) : 30년 전쟁 당시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1632년 1632년 11월 16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사령관이 되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군대를 무찔렀다
임진왜란 여파로 명나라는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여진족은 후금을 세웠다.
점점 국력이 강해진 후금은 조선에게 형제 관계에서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후금의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나라로 바꾸고 대군을 거느리고 1636년(인조14) 12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쳐들어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철수하여 후일을 기약하려 했으나 강화도로 가는 길이 청나라군에 의해 점령됨에 따라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거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강추위와 굶주림으로 오래 버티지 못하였다. 당시 조선 관료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청과 화의하자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로 나뉘어 논쟁을 계속했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당시 한강 나루터)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 인조 : 조선 제16대 임금(재위: 1623년 ~ 1649년)
* 홍타이지(1592년~1643년) : 청나라의 제2대 황제. 재위 : 1626년~1643년. '청태종' 혹은 '숭덕제'로 알려져 있다
점점 국력이 강해진 후금은 조선에게 형제 관계에서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후금의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나라로 바꾸고 대군을 거느리고 1636년(인조14) 12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쳐들어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철수하여 후일을 기약하려 했으나 강화도로 가는 길이 청나라군에 의해 점령됨에 따라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거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강추위와 굶주림으로 오래 버티지 못하였다. 당시 조선 관료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청과 화의하자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로 나뉘어 논쟁을 계속했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당시 한강 나루터)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 인조 : 조선 제16대 임금(재위: 1623년 ~ 1649년)
* 홍타이지(1592년~1643년) : 청나라의 제2대 황제. 재위 : 1626년~1643년. '청태종' 혹은 '숭덕제'로 알려져 있다
쌍령전투는 병자호란이 진행되던 중 1637년 1월 2일에 쌍령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청군의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청군에 대패하였으며 결국 남한산성에서 항전하고 있었던 인조가 청나라에게 항복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패전을 결정한 최종 전투였으며 한국 역사 3대 패전(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중 하나로 꼽힌다.
* 인조(1595~1649) : 조선의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 ~ 1649년
* 쌍령 : 경기도 광주부 쌍령(현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패전을 결정한 최종 전투였으며 한국 역사 3대 패전(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중 하나로 꼽힌다.
* 인조(1595~1649) : 조선의 제16대 임금. 재위: 1623년 ~ 1649년
* 쌍령 : 경기도 광주부 쌍령(현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포르투갈 독립전쟁은 포르투갈 왕국과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 왕국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포르투갈 왕정 복고전쟁이라고도 한다
포르투갈 [1]아비스 왕조의 [2]엔히크 1세 국왕이 후세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국와 [4]펠리페 2세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하여 1580년에 [5]이베리아 연합을 만들었다.
[4]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폭넓은 자치권을 인정했지만 ,뒤를 이은 펠리페 3세는 포르투갈을 스페인의 한 주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쳤고 이어 펠리페 4세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중과세를 부과하고 포르투갈 귀족들의 지위를 박탈하였으며 요직은 스페인 혹은 친 스페인 성향의 포르투갈 귀족들을 등용해 포르투갈내에서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다.
1640년 12월 7일 포르투갈 귀족들과 시민들이 리스본에서 봉기를 일으켜 [8]리베이라 궁전을 공격하여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이던 재상 [9]미겔 드 바스콘셀로스를 살해하고 포르투갈을 통치하던 스페인 총독을 추방하였다.
이 공격을 주도한 귀족들의 대표인 브라간사 공작이 포르투갈 새 국왕으로 추대되어 [6]주앙 4세로 등극하여 단절된 포르투갈 왕조는 [3]브라간사 왕조로 계승되었다.
주앙 4세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선언했고 이에 반발한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침공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668년까지 28년간 전쟁 상태가 지속되었다.
초기 포르투갈은 방어와 잉글랜드와 외교적 동맹을 통해 저항했다. 이후 스페인은 유럽 내 다른 전쟁들로 인해 포르투갈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고, 포르투갈은 방어를 강화하며 독립을 유지했다. 결국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제압하는데 실패했고 잉글랜드의 중재를 받아들여 리스본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독립과 [3]브라간사 왕조를 정식으로 승인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에게 [7]세우타를 할양했지만 그 밖의 국외 영토들은 모두 보존하였다.
이로써 약 60년간의 이베리아 연합이 종식되고, 포르투갈은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1] 아비스 왕조(House of Aviz) : 조아니나가로 알려진 포르투갈의 두 번째 왕가
[2] 엔히크 1세(Henrique I, 1512년 1월 31일~1580년 1월 31일) :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10대 국왕(재위, 1578년 8월 4일 ~ 1580년 1월 31일)
[3] 브라간사 왕조(House of Braganza) : 아비스 가에서 갈라진 가문으로서 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을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추대하여 왕가의 지위를 얻었으며 이후 제4왕조 브라간사 왕조를 열게 된다. 이 왕조는 1910년 포르투갈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270년간 16대를 이어갔다
[4]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제2대 국왕(스페인 재위 : 1556~1598). 포르투갈 왕으로 필리프(Filipe) 1세로 불린다
[5] 이베리아 연합(Iberian Union) : 포르투갈 왕국과 스페인 왕국의 동군연합으로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약 60년간 존속되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의 시기이다
[6] 주앙 4세(John IV of Portugal, 1604년~1656년) : 포르투갈 왕국을 다스린 브라간사 왕가 최초의 국왕(재위: 1640년~1656년)
[7] 세우타(Ceuta) : 이베리아 반도가 아닌 북아프리카 본토에 위치해 모로코와 육상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 스페인의 자치도시
[8] 리베이라 궁전(Ribeira Palace) :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에서 위치한 포르투갈 왕들이 약 250년 동안 거주하였던 궁전. 이 궁전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현재는 코레르시우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9] 미겔 드 바스콘셀로스(Miguel de Vasconcelos e Brito, 약 1590년 ~ 1640년 12월 1일) : 포르투갈의 정치인으로 이베리아 연합 말기인 1635년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 왕국의 국무장관(사실상 총리)을 역임했다. 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서 포르투갈의 자치권을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국민들의 강한 반감을 샀으며 1640년 포르투갈 독립 혁명 당시 암살되었다
포르투갈 [1]아비스 왕조의 [2]엔히크 1세 국왕이 후세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국와 [4]펠리페 2세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하여 1580년에 [5]이베리아 연합을 만들었다.
[4]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폭넓은 자치권을 인정했지만 ,뒤를 이은 펠리페 3세는 포르투갈을 스페인의 한 주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쳤고 이어 펠리페 4세는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중과세를 부과하고 포르투갈 귀족들의 지위를 박탈하였으며 요직은 스페인 혹은 친 스페인 성향의 포르투갈 귀족들을 등용해 포르투갈내에서 스페인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다.
1640년 12월 7일 포르투갈 귀족들과 시민들이 리스본에서 봉기를 일으켜 [8]리베이라 궁전을 공격하여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이던 재상 [9]미겔 드 바스콘셀로스를 살해하고 포르투갈을 통치하던 스페인 총독을 추방하였다.
이 공격을 주도한 귀족들의 대표인 브라간사 공작이 포르투갈 새 국왕으로 추대되어 [6]주앙 4세로 등극하여 단절된 포르투갈 왕조는 [3]브라간사 왕조로 계승되었다.
주앙 4세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선언했고 이에 반발한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침공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1668년까지 28년간 전쟁 상태가 지속되었다.
초기 포르투갈은 방어와 잉글랜드와 외교적 동맹을 통해 저항했다. 이후 스페인은 유럽 내 다른 전쟁들로 인해 포르투갈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고, 포르투갈은 방어를 강화하며 독립을 유지했다. 결국 스페인은 포르투갈을 제압하는데 실패했고 잉글랜드의 중재를 받아들여 리스본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독립과 [3]브라간사 왕조를 정식으로 승인했고 포르투갈은 스페인에게 [7]세우타를 할양했지만 그 밖의 국외 영토들은 모두 보존하였다.
이로써 약 60년간의 이베리아 연합이 종식되고, 포르투갈은 주권 국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1] 아비스 왕조(House of Aviz) : 조아니나가로 알려진 포르투갈의 두 번째 왕가
[2] 엔히크 1세(Henrique I, 1512년 1월 31일~1580년 1월 31일) :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10대 국왕(재위, 1578년 8월 4일 ~ 1580년 1월 31일)
[3] 브라간사 왕조(House of Braganza) : 아비스 가에서 갈라진 가문으로서 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을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추대하여 왕가의 지위를 얻었으며 이후 제4왕조 브라간사 왕조를 열게 된다. 이 왕조는 1910년 포르투갈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270년간 16대를 이어갔다
[4] 펠리페 2세(Philip II of Spain, 1527년~1598년) :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제2대 국왕(스페인 재위 : 1556~1598). 포르투갈 왕으로 필리프(Filipe) 1세로 불린다
[5] 이베리아 연합(Iberian Union) : 포르투갈 왕국과 스페인 왕국의 동군연합으로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약 60년간 존속되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의 시기이다
[6] 주앙 4세(John IV of Portugal, 1604년~1656년) : 포르투갈 왕국을 다스린 브라간사 왕가 최초의 국왕(재위: 1640년~1656년)
[7] 세우타(Ceuta) : 이베리아 반도가 아닌 북아프리카 본토에 위치해 모로코와 육상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 스페인의 자치도시
[8] 리베이라 궁전(Ribeira Palace) :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에서 위치한 포르투갈 왕들이 약 250년 동안 거주하였던 궁전. 이 궁전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으며, 현재는 코레르시우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9] 미겔 드 바스콘셀로스(Miguel de Vasconcelos e Brito, 약 1590년 ~ 1640년 12월 1일) : 포르투갈의 정치인으로 이베리아 연합 말기인 1635년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 왕국의 국무장관(사실상 총리)을 역임했다. 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하에서 포르투갈의 자치권을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국민들의 강한 반감을 샀으며 1640년 포르투갈 독립 혁명 당시 암살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1642년부터 1651년까지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포함한 영국 전역에서 발생하다. 왕권을 주장하는 왕당파와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의회파의 충돌로 발생하였다. 이 내전은 잉글랜드의 정치 체제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7]입헌군주제와 의회 중심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전의 배경에는 왕권과 의회의 갈등, 종교적 대립,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 [1]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 부과와 종교 정책 강행을 시도했으며, 이에 의회는 반발했다. 특히 찰스가 1629년부터 1940년까지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의회를 없애려고 한다는 의구심을 일으켰다. 잉글랜드는 성공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 체계에 대해 청교도들은 비판적이었으며, 찰스 1세는 이를 억압했다.
스코틀랜드에 성공회를 강제로 도입하려 하며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벌어졌고 이는 재정난으로 이어졌다. 찰스 1세는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고 이에 찰스 1세는 의회를 통제하려다가 실패하면서가 갈등이 폭발하였다. 왕당파와 의회파의 긴장이 심화되면서 전쟁으로 이어졌다.
1642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왕당파(국왕 지지 세력)와 의회파(청교도와 개혁 지지 세력)가 충돌했다. 전쟁 초기에는 왕당파가 우세했으나, 1645년 [3]네이즈비 전투에서 [5]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하며 전세가 뒤집혔다. 1646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항복하였지만, 스코틀랜드는 의회파에 신변을 넘기면서 감금되었다.
찰스 1세는 비밀리에 왕권 회복을 위해 1657년에 스코틀랜드와 협상하여 왕당파는 2차 내전(1648~1649)을 일으켰다. 그러나 1년여 만에 패배하면서 결국 찰스 1세는 1649년 1월 30일에, 공개 재판 후 처형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는 국왕이 없는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왕당파는 찰스 1세의 아들인 [2]찰스 2세의 복위를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저항하면서 3차 내전(1649~1651)이 발발했다. 결국 1651년 울스터 전투에서 [5]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하며 내전은 마무리되었다.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5]올리버 크롬웰은 1653년 의회를 해산하고 구준와 유사한 [6]호국경에 취임하여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화정은 붕괴되었다. 1660년 [2]찰스 2세가 왕으로 복귀하면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내전을 거치면서 왕권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았고,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결국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의 기틀이 확립되면서 잉글랜드는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왕권 제한, 의회 권력 강화, 종교 개혁, 군사 혁신 등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 내전으로 인해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와 [7]입헌군주제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정치발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1] 찰스 1세(Charles I,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재위, 1625년 3월 27일~1649년 1월 30일)
[2] 찰스 2세(Charles II, 1630년 5월 29일~1685년 2월 6일) : 잉글랜드,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국왕(재위, 1660년 5월 29일 ~ 1685년 2월 6일)
[3] 네이즈비 전투(Battle of Naseby) : 잉글랜드 내전 시기인 1645년 6월 14일 노샘프턴셔의 네이즈비에서 찰스 1세가 이끄는 국왕군과 토머스 페어팩스 경과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하는 의회군이 맞붙은 전투. 의회군이 이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1차 잉글랜드 내전은 이 전투 이후 1년 만에 의회파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4] 우스터 전투(Battle of Worcester, 1651년 9월 3일) : 잉글랜드 우스터에서 치뤄진 잉글랜드 내전의 마지막 전투였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왕당파와 의회파와의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의회파가 승리하였다
[5]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 : 영국 내전에서 의회군을 이끌어 왕당파에 승리하여 잉글랜드 공화국을 세웠다. 1653년부터는 국가원수인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서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군사 정권을 유지했다. 그의 사후 왕정이 복귀했지만, 영국 정치에서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6] 호국경(Lord Protector) : 잉글랜드의 왕권이 미약하였을 때, 왕을 섭정하던 귀족에게 붙이던 호칭
[7] 입헌군주제 : 헌법 체계 아래서 세습되거나 선임된 군주를 인정하는 정부 형태. 즉 정치적 군주의 권력이 헌법에 의하여 제한을 받는 군주제
내전의 배경에는 왕권과 의회의 갈등, 종교적 대립,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 [1]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 부과와 종교 정책 강행을 시도했으며, 이에 의회는 반발했다. 특히 찰스가 1629년부터 1940년까지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의회를 없애려고 한다는 의구심을 일으켰다. 잉글랜드는 성공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 체계에 대해 청교도들은 비판적이었으며, 찰스 1세는 이를 억압했다.
스코틀랜드에 성공회를 강제로 도입하려 하며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벌어졌고 이는 재정난으로 이어졌다. 찰스 1세는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고 이에 찰스 1세는 의회를 통제하려다가 실패하면서가 갈등이 폭발하였다. 왕당파와 의회파의 긴장이 심화되면서 전쟁으로 이어졌다.
1642년 전쟁이 시작되면서 왕당파(국왕 지지 세력)와 의회파(청교도와 개혁 지지 세력)가 충돌했다. 전쟁 초기에는 왕당파가 우세했으나, 1645년 [3]네이즈비 전투에서 [5]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하며 전세가 뒤집혔다. 1646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항복하였지만, 스코틀랜드는 의회파에 신변을 넘기면서 감금되었다.
찰스 1세는 비밀리에 왕권 회복을 위해 1657년에 스코틀랜드와 협상하여 왕당파는 2차 내전(1648~1649)을 일으켰다. 그러나 1년여 만에 패배하면서 결국 찰스 1세는 1649년 1월 30일에, 공개 재판 후 처형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는 국왕이 없는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왕당파는 찰스 1세의 아들인 [2]찰스 2세의 복위를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저항하면서 3차 내전(1649~1651)이 발발했다. 결국 1651년 울스터 전투에서 [5]올리버 크롬웰의 의회파가 승리하며 내전은 마무리되었다.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5]올리버 크롬웰은 1653년 의회를 해산하고 구준와 유사한 [6]호국경에 취임하여 독재 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화정은 붕괴되었다. 1660년 [2]찰스 2세가 왕으로 복귀하면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내전을 거치면서 왕권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았고,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결국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입헌군주제의 기틀이 확립되면서 잉글랜드는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라, 왕권 제한, 의회 권력 강화, 종교 개혁, 군사 혁신 등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 내전으로 인해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와 [7]입헌군주제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정치발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1] 찰스 1세(Charles I, 1600년 11월 19일 ~ 1649년 1월 30일)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재위, 1625년 3월 27일~1649년 1월 30일)
[2] 찰스 2세(Charles II, 1630년 5월 29일~1685년 2월 6일) : 잉글랜드, 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국왕(재위, 1660년 5월 29일 ~ 1685년 2월 6일)
[3] 네이즈비 전투(Battle of Naseby) : 잉글랜드 내전 시기인 1645년 6월 14일 노샘프턴셔의 네이즈비에서 찰스 1세가 이끄는 국왕군과 토머스 페어팩스 경과 올리버 크롬웰이 지휘하는 의회군이 맞붙은 전투. 의회군이 이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1차 잉글랜드 내전은 이 전투 이후 1년 만에 의회파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4] 우스터 전투(Battle of Worcester, 1651년 9월 3일) : 잉글랜드 우스터에서 치뤄진 잉글랜드 내전의 마지막 전투였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왕당파와 의회파와의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의회파가 승리하였다
[5]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 : 영국 내전에서 의회군을 이끌어 왕당파에 승리하여 잉글랜드 공화국을 세웠다. 1653년부터는 국가원수인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서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군사 정권을 유지했다. 그의 사후 왕정이 복귀했지만, 영국 정치에서 의회의 권한이 강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6] 호국경(Lord Protector) : 잉글랜드의 왕권이 미약하였을 때, 왕을 섭정하던 귀족에게 붙이던 호칭
[7] 입헌군주제 : 헌법 체계 아래서 세습되거나 선임된 군주를 인정하는 정부 형태. 즉 정치적 군주의 권력이 헌법에 의하여 제한을 받는 군주제
웨스트팔렌 조약은 1648년 신성 로마 제국령 베스트팔렌 지방이었던 현재 독일의 두 도시인 [1]오스나브뤼크(Osnabrück, 5월 15일)와 [2]뮌스터(Münster, 10월 24일)에서 체결된 평화조약이다. 이는 최초의 근대적 국제협약으로 평가되며 국제법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30년 전쟁은 로마 가톨릭세력과 개신교세력간의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종교갈등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한 양상을 흐르게 된다. 30년 전쟁은 유럽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료되었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개신교 국가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에서 벗어나 생존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중세에서 근대국가체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근대 국제법의 시초로 평가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 첫째, 조약 체결 방식을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강제적 형식이 아닌 참전했던 유럽 왕국들과 제후국들의 대표들이 모여 협상을 통해 체결되었다.
- 둘째,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종교의 자유란 구교와 신교 중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각 국가들에게 위임했음을 의미한다.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종교가 강요되었던 과거 중세와 비교했을 때 종교의 자유는 각 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신성로마제국은 약화되어 멸망하게 된다. 각 국가들의 '주권' 의식의 탄생과 함께 영토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국가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1]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 독일 북서쪽 니더작센주에 있는 도시
[2] 뮌스터(Münster) : 독일 북서쪽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있는 도시
30년 전쟁은 로마 가톨릭세력과 개신교세력간의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종교갈등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한 양상을 흐르게 된다. 30년 전쟁은 유럽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료되었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개신교 국가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에서 벗어나 생존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중세에서 근대국가체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근대 국제법의 시초로 평가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 첫째, 조약 체결 방식을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강제적 형식이 아닌 참전했던 유럽 왕국들과 제후국들의 대표들이 모여 협상을 통해 체결되었다.
- 둘째,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종교의 자유란 구교와 신교 중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각 국가들에게 위임했음을 의미한다.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종교가 강요되었던 과거 중세와 비교했을 때 종교의 자유는 각 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신성로마제국은 약화되어 멸망하게 된다. 각 국가들의 '주권' 의식의 탄생과 함께 영토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국가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1]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 독일 북서쪽 니더작센주에 있는 도시
[2] 뮌스터(Münster) : 독일 북서쪽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있는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