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박해(辛亥迫害)는 1791년(신해년, 정조 15년) 조선 최초의 가톨릭에 대한 박해 사건이다. 신해교난(辛亥敎難) 또는 신해사옥(辛亥邪獄),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부른다.
전라도 진산에 사는 독실한 천주교인이던 윤지충⋅권상연 두 양반은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운 일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당쟁으로 비화되었다. 천주교를 배척하는 공서파는 신서파를 공격하면서 정치 문제로 확대하였다.
결국 권상연과 윤지충은 무부무군의 사교(邪敎)를 신봉하고 이를 유포시켜 강상을 그르치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 정조(正祖, 1752년~1800년) : 조선의 제22대 왕, 재위: 1776년~1800년
* 공서파(攻西派) : 천주교를 배척하는 벽파세력
* 신서파(信西派) : 천주교에 호의적인 시파세력
* 무부무군(無父無君) : 임금도 아버지도 없다는 뜻으로 초기의 천주교는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부모를 없는 것으로 보며 하느님 아래 누구나 평등하다고 주장하여 임금의 존엄을 무시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 사교(邪敎) : 근본이 옳지 못하고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종교 또는 그 나라의 도덕이나 사회제도에 어긋나는 종교
* 강상(綱常) : 조선시대의 윤리인 삼강오상(三綱五常)을 뜻한다. 부자, 군신, 부부, 형제, 친구 간의 윤리를 뜻하며 삼강오륜과 같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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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미국 백인 정착민과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사이의 정복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말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치세 말기부터 시작된 국가 재정 악화는 루이 15세에서도 호전되지 못했고 [3]루이 16세가 즉위할 즈음에는 다른 나라로부터 빚을 내야 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을 견제하고 식민지 개척경쟁 차원에서 미국 독립 혁명을 지원했으나, 프랑스가 얻은 이익은 없었고 재정만 더욱 악화되었다.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1]앙시앵 레짐하에서 18세기에 나타난 일반적 특징처럼 부르주아 계급이 부상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독립 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되어 있었다.
프랑스는 만성화된 왕실 재정위기를 해결하고자 루이 16세의 재정총감 칼론은 1787년 2월, [4]명사회를 열어 귀족, 성직자 등의 특권 계층에게 임시로 과세하는 것을 재정 위기의 타개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면세혜택을 받는 특권 계층인 귀족, 성직자는 크게 반발하며 과세를 강력히 거부했다. 재정개혁에 실패한 칼론은 1787년 4월 8일에 해임되었다.
1789년 후임 재무총감인 자크 네케르(Jacques Necker)는 삼부회를 제안했다. 그동안 세금이 면제되어온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에 해당하는 귀족에게 세금을 추징하기 위해 1789년 5월 5일, 175년만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신분별 의회인 [2]삼부회가 개최되었다.
루이 16세는 한 신분당 같은 의석수였던 삼부회에서 평민대표의 요구를 수용하여 제3신분의 수를 두 배로 승인하였다. 따라서 삼부회는 제1신분인 성직자대표 294인, 제2신분인 귀족대표 270인, 그리고 제3신분인 평민대표 578인으로 구성되었다.
삼부회는 초반부터 제1,2신분인 성직자, 귀족대표와 제3신분인 평민대표는 표결 방식 채택을 두고 의견이 충돌하였다. 성직자, 귀족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주장한 데 비해 평민대표는 머릿수 표결 방식을 주장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결국 회의 장소가 폐쇄되자 평민대표는 왕궁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6월 17일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어떠한 세금도 자신들의 동의없이 징수할 수 없으며 해산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테니스 코트 선언을 하였다. 이 때 성립된 국민의회는 제1신분과 제2신분의 일부가 참가하게 되면서 대표성을 가지게 되었다.
루이 16세의 왕당파는 무력으로 '국민의회'를 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파리 민중은 격분하였다.ㅍ7월 13일 파리 민중은 스스로 자치를 선포하고 '국민방위대'를 조직했다. 그 다음날인 7월 14일 무기를 조달을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파리의 요새로 무기와 탄약을 저장하고 있었다. 바스티유 수비대와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으며 결국 사상자가 나오면서 민중에 의해 바스티유 감옥이 장악되었다. 이 혁명운동은 농촌까지 확산되어 농민들도 동참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국민의회는 8월 4일 봉건제 폐지선언하고 26일에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으로 혁명의 이념을 세워 민중의 지지와 혁명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의 '봉건제 폐지 선언'과 '인권선언'에 대한 재가를 계속 거부하였으나 1789년 10월 여성들이 주동이 되어 10월 폭동을 일으켰다. 결국 '봉건제 폐지 선언'과 '인권선언'에 대한 재가했다. 11월에는 교회 토지를 국유화하는등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의회는 1791년 새로운 프랑스의 헌법을 제정하고 해산되었다.
이후 프랑스 제1공화정인 국민공회(1792년~1795년), 프랑스 제1공화국 총재정부(1795 ~ 1799)를 거쳐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프랑스 제1공화국의 통령정부(1799 ~ 1804)가 수립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종료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1]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린 후 공화정, 제정, 왕정으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불안한 정치상황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역사적으로 정치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지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다.
프랑스는 10년이라는 짧은 혁명기간 동안에 무수한 체제변화를 겪었다. 절대왕정이 입헌군주제로 바뀌고 다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공화정 안에서도 처음에는 비교적 온건한 자유주의의 특징을 보이다가 급진적인 인민민주주의로 탈바꿈하고 다시 부르주아지 주도의 공화정이 들어섰는가 하면, 그 속에서 공산주의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다가 끝내는 쿠데타로 제정이 등장하는 엄청난 격변의 과정을 거쳤다.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이상을 인민주권에 입각한 근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치적으로 발전시켜 나갔고 전 유럽에 그 이상을 전파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여기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근대 유럽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 1789년 프랑스 혁명 전의 절대 군주 정치체제를 통칭하는 말. 프랑스어로 ‘옛 체제’를 뜻한다.현재는 프랑스 혁명 의미보다 낡은 기존의 제도나 무능력했던 이전 정권을 일컫는 단어로도 사용한다 [2] 삼부회(Estates General) : 국왕의 주도로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의 신분별 대표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 사안에 관해 토론하며 협력·자문하는 의회이다. 1302년 4월 10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분쟁시에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시킨 것이 시초가 되고 있다. 실제로 1614년 이래 거의 소집되지 않다가 1789년 루이 16세에 의해 소집되었다. 그러나 신분별 대표 간의 표결방식을 두고 대립하여 결렬되고 제3신분은 삼부회에서 벗어나 국민의회를 조직했다 [3] 루이 16세(Louis XVI, 1754년 8월 23일~1793년 1월 21일) :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5대 국왕(재위, 1774년 5월 10일~1792년 9월 21일) [4] 명사회 : 국왕의 자문에 의해 중요 의제를 논의하는 자리로, 발루아 왕조에서 부르봉 왕조까지 프랑스 왕국에 존재한 자문 기구이다. 명사회 위원은 귀족과 로마 가톨릭교회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되었다. 마지막으로 명사회가 개최되었던 시기는 루이 16세에 의해 소집었던 1787년 및 1788년이다. 이 두차례의 명사회에서 논의된 주요 의제는 극도로 악화된 경제난 회복과 세제개혁이었다.
[참고문헌] - 윤혜영, 이혜령 외 7인 공저 『세계의 역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pp. 45-66, 203-215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https://www.kdemo.or.kr/) : 프랑스 시민혁명과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 - 위키백과, 나무위키
1791년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혁명의 결과로 식민지의 아프리카인 노예들이 해방되었으며, 아프리카인들이 지배하는 최초의 공화국인 아이티가 세워졌다.
스페인은 히스파니올라 섬의 생도맹그에 식민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1697년 이 섬의 서쪽을 프랑스에 내주게 된다.
생도맹그는 전 세계 설탕의 40%를 아이티 원주민과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생산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과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내용을 기초로한 인권선언은 생도맹그의 식민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생도맹그 시민들은 프랑스 혁명 정신을 환영하였다. 흑인노예들과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열)들은 '자유, 평등, 우애'의 원칙을 생도맹그에도 적용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식민지 총독이 이를 거부하자 반발하는 물라토들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이는 아이티 혁명에 불을 지폈다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산토도밍고를 공격하여 그곳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1801년 생도맹그에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혁명군은 1803년 마지막 전투인 베르티에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1804년 1월 1일 아이티 공화국을 세웠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어 큰 타격을 입었으며 나폴레옹은 북아메리카 재식민화 계획을 포기하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게 되었다.
* 생도맹그(Saint-Domingue) : 1697년부터 1804년까지 카리브해의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1/3을 차지했던 프랑스의 식민지. 현재의 아이티
* 히스파니올라 섬(Hispaniola) : 카리브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서쪽 1/3은 아이티의 영토이고, 동쪽 2/3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영토이다, 히스파니올라는 '작은 스페인'을 뜻한다
*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년~1803년) : 아이티의 혁명가, 독립 투사이다. 아이티의 독립의 아버지
* 물라토(mulatto) : 백인과 흑인의 혼혈
* 산토도밍고(Santo Domingo) :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