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가미국이탈리아영국프랑스독일사건기간 : 1919년 6월 28일, 조회수 : 400, 등록일 : 2020-06-13
베르사유 조약은 제1차 세계 대전 종료 후 전후 처리를 위해 승전국인 연합국(32개국)과 패전국인 독일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에는 전쟁 책임 문제, 유럽의 영토 조정, 전후 평화를 위한 조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의 영토와 식민지는 재분할되었으며, 독일에 대한 군비 제한 및 배상액이 결정되었다. 또한 전쟁 방지와 사회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 연맹을 창설하기로 하였다.
프랑스 총리 [5]조르주 클레망소, 영국의 수상 [6]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이탈리아 총리 [7]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미국 대통령 [8]우드로 윌슨이 주도하여 결정을 내렸고, 이후 다른 연합국 대표들은 이를 승인하였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영토의 13퍼센트(2만 7,000평방마일 이상)와 인구의 10퍼센트(650만에서 700만명)를 잃었다.
조약의 서명장소는 [1]베르사유 궁전의 '[2]거울의 방'에서 서명이 이루어 졌다. 이 장소는 1871년 [3]프로이센이 프랑스를 패배시킨 후 독일 제국을 선포했던 곳이었다. 즉, 통일 독일 제국 건국과 프로이센 국왕인 [4]빌헬름 1세의 황제 등극이 이루어진 장소인 것이다. 프랑스는 1871년의 치욕을 되갚고 싶어 의도적으로 장소를 '거울의 방'으로 선택하였다.
1921년 4월 27일에 독일이 지불해야할 금액은 1,320억 마르크(320억 달러)로 확정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독일이 전쟁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제231조의 '전범조항'은 독일인들을 격분하게 했다. 이러한 독일인의 적개심은 결국 아돌프 히틀러를 등장시켰다. 결국 이 조약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1] 베르사유 궁전(Palace of Versailles) : 프랑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가량 떨어진 베르사유 시에 있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건설한 궁전.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루이 14세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2] 거울의 방 : 전체길이 73m, 너비 10.4m, 높이 13m로 정원을 향하여 17개의 창문이 있으며, 반대편 벽에는 17개의 거울이 배열되어 있다. 궁전 중앙 본관의 2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전쟁의 방, 남쪽으로는 평화의 방이 위치 하고 있으며 왕족의 결혼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 등을 행하는 중요한 의식장이 되었다
[3] 프로이센(Kingdom of Prussia) : 유럽 동북부와 중부지방 일대를 부르던 지명이자 해당 지역에 존재했던 나라로 독일 역사상 두 번째 통일 국가인 독일 제국의 건국을 주도한 중심지였다. 이로 인하여 흔히 프로이센을 독일의 전신이라고 한다
[4] 빌헬름 1세(William I, 1797년~1888년) : 프로이센의 국왕(재위 1861년 ~ 1888년). 독일 제국의 황제(재위 1871년 1월 18일~ 1888년)
[5]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년~1929년) : 프랑스 제3공화국의 총리(임기 1906년~1909년, 1917년~1920년). 파리강화회담에서 프랑스의 전권대표로 참석
[6]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년~1945년) : 영국의 제34대 총리(임기 1916년 12월 7일~1922년 10월 22일)
[7]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Vittorio Emanuele Orlando, 1860년~1952년) : 이탈리아의 총리(임기 1917년 10월 29일~1919년 6월 23일)
[8]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년~1924년) : 미국의 28대 대통령(임기 1913년 3월 4일~1921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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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승전국인 연합국(32개국)이 패전국인 동맹국(5개국) 관련하여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열렸다. 이 날짜는 1871년 1월 18일에 독일 황제였던 빌헬름 1세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황제 등극을 선포한 날이었다.
승전국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국제연맹 창립과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해 오던 미국 대통령 윌슨에 따라 식민지의 독립 문제가 다루어졌다. 그러나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한정되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해체 및 영토분할과 민족 경계를 반영한 국경 재수립등이 이 회담에서 논의되었다.
프랑스 총리 [1]조르주 클레망소, 영국의 수상 [2]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이탈리아 총리 [3]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미국 대통령 [4]우드로 윌슨이 주도하여 결정을 내렸고, 이후 다른 연합국 대표들은 이를 승인하였다. 이후 이탈리아가 빠지면서 프랑스, 영국, 미국 3개국이 이끌었다.
이 회담으로 패전국가 5개국과 주요 조약이 체결되었다.
-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1919년 6월 28일) : 독일제국. 국제 연맹의 탄생과 독일 제재에 관한 규정을 포함. 독일은 영토의 13%, 인구의 10% 상실
- 생제르맹 조약(Treaty of Saint-Germain-en-Laye, 1919년 9월 10일) :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선언
- 뇌이 조약(Treaty of Neuilly-sur-Seine, 1919년 11월 27일) : 불가리아 왕국.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인정
- 트리아농 조약(Treaty of Trianon,1920년 6월 4일) : 헝가리 왕국. 헝가리의 국경을 확정하는 조약. 헝가리는 72%, 인구의 64%상실. 이 조약으로 영토를 얻은 주요 국가는 루마니아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왕국이다.
- 세브르 조약(Treaty of Sèvres, 1920년 8월 10일) :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을 해체 선언. 이후 터키는 독립전쟁 승리로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Treaty of Lausanne) 체결로 현재의 터키 국경을 확보.
트리아농 조약과 세브로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1920년 1월 16일 국제 연맹이 공식출범하고 21일 총회 개회로 파리 강화 회담은 종료되었다.
[1]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년~1929년) : 프랑스 제3공화국의 총리(임기 1906년~1909년, 1917년~1920년). 파리강화회담에서 프랑스의 전권대표로 참석
[2]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년~1945년) : 영국의 제34대 총리(임기 1916년 12월 7일~1922년 10월 22일)
[3]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Vittorio Emanuele Orlando, 1860년~1952년) : 이탈리아의 총리(임기 1917년 10월 29일~1919년 6월 23일)
[4]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년~1924년) : 미국의 28대 대통령(임기 1913년 3월 4일~1921년 3월 4일)
12세기 무렵부터 끊임없이 영국의 침략을 받았던 아일랜드는 1800년 연합법에 의해 영국에 합병된다. 이후 아일랜드는 감자 대기근과 같은 사태를 거치면서 아일랜드 내의 반영 감정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 갔고 독립을 위한 움직임은 1916년 4월 24일 부활절 기간에 [1]더블린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 당시 최신무기로 무장한 16,000명의 영국군을 투입하여 잔인하고 무차별적인 탄압으로 진압되었으며 봉기 지도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었다.
부활절 봉기의 영향으로 아일랜드의 민심은 제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8년 12월에 실시된 총선거의 결과로 나타났다. [2]신 페인당은 아이랜드 의석 104석중 73석을 확보했다. 총선거의 결과가 발표된 직후 [2]신 페인당은 영국의회 등원을 거부하고 자체 [3]아일랜드 의회(Dail Eireann)를 구성하고 아일랜드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919년 4월의 두 번째 회의에서 부활절 봉기에서 살아남은 지도자 [4]에이먼 데 발레라(Eamon de Valera)가 내각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임시헌법이 선포되었고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아일랜드 공화국 승인을 요구했다. 공화국 수립 선언과 함께 아일랜드공화국형제단을 주축으로 한 [5]아일랜드공화국군(Ireland Republican Army)이 창설되었다.
1919년 1월 21일 [5]아일랜드공화국군이 [6]왕립 아일랜드 경찰대의 무기수송대열을 습격해 교전중에 두 명의 영국 경찰이 사망했다. 아일랜드 독립전쟁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1921년 7월 휴전에 이르기까지 2년 6개월간 지속되었다.
아일랜드공화국군은 부활절 봉기에서 살아남은 [7]마이클 콜린스가 지휘했다. 영국군에 비하여 열세인 아일랜드공화국군은 주요인물에 대한 선택적 암살과 매복공격, 경찰습격, 무기고 약탈, 주요 정보건물습격등 전형적인 게릴라 전술을 택했다. 독립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경찰은 아일랜드공화국군의 주된 표적이 되었으며, 독립전쟁동안 모두 404명의 [6]왕립 아일랜드 경찰이 피살되었고, 6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사기가 저하되고 수세에 몰린 왕립 아일랜드 경찰이 아일랜드공화국군의 게릴라전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자 영국정부는 제대로 규율을 갖추지 못한 제대병사들을 모집해 아일랜드로 보냈다. 이들은 3개월 훈련을 받고 1920년 3월에 처음 아일랜드에 도착한 이들은 짙은 녹색의 아일랜드 경찰제복과는 달리 카키색 군복을 혼용해 입었기 때문에 "블랜 앤 탄스(back & Tans)"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악명을 떨쳤다. 이들의 무자비한 군사 작전과 잔혹한 행위는 아일랜드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에 대응해 아일랜드공화국군은 영국 본토에서 복수의 유혈극을 시작했다. 리버풀과 런던에서 15곳이 동시에 공격을 받아 5명이 죽었고 많은 주택이 불탔다. 140차례의 방화와 91건의 전신선 절단, 그리고 총격으로 8명의 경찰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
결국 영국은 아일랜드에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한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제안했다. 아일랜드 의회는 논란 끝에 65:57표의 7표차로 1922년 1월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인준한다. 이로써 아일랜드자유국(Irish Free State)이 성립되었고, 아일랜드는 완전한 독립은 아니지만 영국의 오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독립은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이후 아일랜드는 두 진영으로 갈라졌다. 독립을 위해 함께 피를 흘렸던 동지들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으며 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북아일랜드와 분리되면서 아일랜드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1] 더블린(Dublin) : 아일랜드 수도
[2] 신 페인(Sinn Féin) : 아일랜드 독립을 이끌어왔던 정당
[3] 아일랜드 의회(Dail Eireann) : 아일랜드 공화국의 독립선언이 있었던 1919년 창설된 아일랜드 의회
[4] 에이먼 데 벌레라(Éamon de Valera, 1882년~1975년) : 아일랜드의 정치인. 아일랜드공화국 대통령(1921~1922),아일랜드 총리(1951~1954, 1957~1959), 아일랜드의 3대 대통령(1959~1973)
[5] 아일랜드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 IRA) : 1916년 부활절 봉기 이후 마이클 콜린스등 아일랜드 독립군 세력이 결성하였다. 현 아일랜드 국방군의 전신
[6]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Royal Irish Constabulary, RIC) : 영국이 아일랜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파견한 경찰조직으로 아일랜드 전역에 총 9,700여 명의 인원과 1,500여개의 병영이 있었다
[7] 마이클 존 콜린스(Michael John Collins, 1890년~1922년) : 아일랜드의 혁명지도자, 정치인.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에서 부관감, 방첩대장, 군사조직 및 무기조달 담당자 등의 중책을 맡았고, 1920년부터 죽을 때까지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 단장이었다. 영국-아일랜드 조약 당시 조약 찬성파에 섰으며, 임시정부 주석이자 아일랜드 국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아일랜드 내전중인 1922년 8월 아일랜드 공화국군 조약 반대파(ATIRA)에게 습격당해 사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있던 조선은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이며 전국적으로 일어난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이 덕수궁에서 사망했다. 조선의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 재일 유학생의 [2]2·8독립선언,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3]인산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대표인 [1]손병희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천도교인, 기독교인, 불교도인이 모두 함께 대표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 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으나 탑골공원에서 거사를 할 경우 폭력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결론하에 [4]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중 29명(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이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배를 들었다.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열고 있다고 통고하였고, 이 전화를 받고 일본 경찰 80여명이 태화관으로 들이닥쳤다.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삼창 후에 이들은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다.
오후 2시에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학생 4,000∼5,000명이 모였으나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자 [6]경신학교 출신 [7]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에 고무된 학생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종로쪽으로 뛰쳐나와 시위행진을 하였다. 수만의 군중이 호응하여 함께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시위 대열이 [8]대한문앞에 이르렀을 때는 온 서울 시내가 흥분된 군중과 만세소리로 들끓었으며 고종황제의 [10]빈전을 향해 삼례를 올린 후 계속 행진하였다. 그리고 대열을 나누어 한 대열은 정동의 미국영사관쪽으로 향하고, 다른 한 대열은 남대문을 지나 [9]왜성대의 총독부로 향하였다.
거의 같은 시각에 평양, 의주, 선천군, 안주, 원산, 진남포에서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이렇게 하여 3월 1일에 점화된 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은 날이 갈수록 전국 각지로 번져갔다. 서울,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의 시위에 이어 2일에 경기도의 개성, 3일에 충청남도의 예산 등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3월 21일에는 제주와 조천리(朝天里) 시위로 바다를 격한 제주도에까지 파급되어,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월부터 4월 사이에 전국적으로 수천 회의 만세 시위 운동이 벌어졌고 일본은 이를 강압적으로 진압으로 이 만세운동을 종식시키려 하였다. 평화적 시위를 하는 군중에게 대량 학살을 감행하여 곳곳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만세운동이 끝난 뒤에도 그 열기는 꺼지지 않고 각종 후원회 및 시민단체가 결성되었고, 민족 교육기관,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 등의 여성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 독립군이 탄생했으며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1 만세 운동','3.1 독립만세운동','3.1 독립선언' 혹은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나무위키
[1] 손병희(1861년~1922년) : 천도교(동학) 3대 교주(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2] 2.8독립선언 :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사건
[3] 인산일(因山日) :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왕이나 황제 직계 가족의 장례일.
[4] 태화관(泰和館) : 일제강점기에 유명한 요리집이던 명월관의 별관. 명월관은 191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했으며 현재는 태화빌딩이 서있다
[5] 안순환(1871년~1942년) : 대한제국의 궁중잔치 음식을 도맡았던 전선사(典膳司)의 책임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요릿집인 명월관(明月館)을 설립한 조선음식 전문
[6] 경신학교 : 1886년에 서울에 설립되었던 중등과정의 사립학교
[7] 정재용(1886년~1976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8] 대한문 : 덕수궁(경운궁)의 정문. 원래 이름은 대안문
[9] 왜성대(倭城臺) : 1907년 르네상스 양식의 2층 목조건물로 통감부 청사로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1926년 경복궁내 신청사가 완공되기 전까지 조선총독부 청사였다
[10] 빈전 : 왕이나 왕후가 승하하고 5개월 뒤 발인할 때까지 왕 또는 후의 관(棺)인 재궁(梓宮)을 두는 전각
일본은 1914년 8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뒤 1915년 1월 중국에 있던 독일의 [1]조차지 칭다오를 비롯한 산둥 반도를 점령하고 [2]위안스카이 베이징 정부에 이른바 '21개조 요구'를 제기했다. 요구의 핵심은 산둥에 있는 독일의 권리를 일본이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무기력한 위안스카이 중국정부는 1915년 5월 9일 일본의 최후통첩에 굴복하여 이를 수락했다.
이듬해인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3]돤치루이가 정권을 장악한다.
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후 [4]파리강화회담에서 연합국의 일원인 중국은 산둥지역의 주권을 회복하고 21개조 불평등 조약 철회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회담의 4월 21일 회의에서 일본의 주장이 승인되어 패전국인 된 독일의 권리를 일본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한 학생들은 5월 4일 약 3천여 명이 테안먼 광장에 모여 베이징학생선언을 배포하고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 시위를 시작으로 톈진, 상하이, 난징, 우한등 으로 확대되면서 전국적인 시위로 전개되었다.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던 중국 정부는 전 중국 민중 운동으로 확대되자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하고 친일파 매국노를 파면시키고 6월 28일 파리강화회담의 베르사유조약 승인서명을 거부하였다. 이 조약 거부로 5월 4일이래 2개월간의 투쟁과 항쟁은 중국 정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후 칭다오는 1922년 워싱턴 조약으로 중국에게 반환되었다.
[1] 초차지 : 한 나라가 다른 나라로부터 빌려 통치하는 영토. 영토권은 빌려준 나라에 속하지만, 통치권은 빌린 나라에 속한다[표준국어대사전]. 독일 제국이 1898년부터 1914년까지 청나라로부터 산둥 반도 이남을 임차받아 통치하고 있었다.
[2] 위안스카이(원세개, 1859년~1916년) : 중국 청나라 말기의 무관(武官), 군인이며 중화민국의 2대 임시대총통이며, 중화제국 초대이자 마지막 황제.
[3] 돤치루이(단기서, 1865년~1936년) :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총리가 되어 정권을 장악(북양정권)
[4] 파리강화회담 :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전후 국제 질서 및 전쟁 관련 각종 사후 처리를 위해 승전국인 협상국과 패전국인 동맹국 사이에 이루어진 국제 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