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영국프랑스스페인사건기간 : 1754년 5월 28일~1763년 2월 15일, 조회수 : 646, 등록일 : 2020-05-20
유럽에서 7년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 전쟁이며 인디언들이 프랑스 편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 불린다. 식민지 쟁탈전에서 프랑스는 인디언과 타협정책을 썼고 영국은 탐욕스럽게 땅을 점령해 나갔으므로 대부분의 인디언들은 프랑스 편에 있었다. 스페인은 뒤늦게 프랑스편을 들어 전쟁에 참여를 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북미 식민지 전쟁의 참전국 중에서 사실상 북아메리카 신대륙의 지배자가 되었다.
스페인은 쿠바를 재획득하기 위해 플로리다를 영국과 교환했으며 플로리다를 상실한 대가로 프랑스로부터 뉴올리언스를 포함한 루이지애나를 얻었다.
프랑스는 캐나다를 할양했고, 따라서 프랑스의 식민지는 생피에르 미클롱(Saint Pierre and Miquelon, 캐나다의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섬 남쪽의 여러 섬)만 남게 되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 동쪽 절반을 식민지 세력의 지배를 하였으나, 전쟁에 투입한 재정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영국은 부족한 재정을 메꾸기 위하여 식민지인들에게 이주제한과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지나친 영국의 간섭으로 식민지 거주자들은 점점 영국에 반감을 갖게 되어 미국 독립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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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졌던 미국 백인 정착민과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사이의 정복 전쟁을 통틀어 일컫는 말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오스트리아 [1]합스부르크가는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2]슐레지엔 지역을 되찾기 위해 [4]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으로 유럽의 거의 모든 열강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참여하면서 유럽뿐 아니라 식민지 지역인 북아메리카와 인도까지 확장된 세계대전 규모의 전쟁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전쟁을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도 한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팽창에 대항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확보하여 패권의 교두보를 삼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프로이센과 동맹관계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년~1748년)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는 [3]선제후국인 프로이센에게 패하면서 [2]슐레지엔 지역을 넘겨주었다.
오스트리아의 [5]마리아 테레지아는 빼앗긴 [2]슐레지엔 지역을 되찾기 위해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공격하기로 한다. [5]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전쟁이 벌어지면 프랑스가 참전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영국은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면 [8]동군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노버 [3]선제후국의 지원이 어려울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영국은 러시아 군대를 이용하여 [4]프로이센을 견제하는 동시에 하노버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러시아는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북부의 발트해 연안으로 진출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프로이센을 넘어서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하여 하노이 [3]선제후국를 지킨다는 조건하에 영국과 동맹을 맺는다.
영국과 프로이센이 동맹을 맺자 [5]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에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프랑스를 끌어안게 된다.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스웨덴에 연합을 결성한다. 프랑스의 부르봉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가는 단순 적대관계를 넘어선 철천지 원수관계가 동맹을 맺은 것이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지가 된 셈이다. 스페인은 부르봉 왕조가 성립되면서 프랑스와 같은 왕조로 [8]동군연합으로 사실상 영구적인 동맹을 이루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영국동맹' 대 '프로이센-프랑스동맹' 구도가 '오스트리아-프랑스' 대 '프로이센-영국'로 바뀐것이다.
1756년 6월 2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자 위기감을 느낀 프로이센의 [6]프리드리히 2세는 예방차원으로 [10]작센 [3]선제후국을 침공하면서 7년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의 작센 기습침공으로 러시아의 여제 [7]옐리자베타는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스웨덴도 프로이센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프로이센을 공격하면서 참전하였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패배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1962년 [7]옐리자베타 여제가 갑자기 사망하여 뒤를 이어 [9]표드로 3세가 즉위하였다. [3]표드로 3세는 상호 조건없는 화친을 프로이센에 제안하여 프로이센의 [6]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탈한다. 스웨덴까지 이 전쟁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한 재원손실로 국고가 고갈되어 가는 상태였으며, 프랑스는 유럽밖의 식민지전쟁에서 패배한 상태였다. 동맹국 러시아까지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7년 전쟁은 종식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러시아는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의 소방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프로이센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2]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보했으며, 식민지 전쟁에서는 영국이 승리를 거두어 북아메리카의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었던 현재의 퀘벡주와 온타리오주를 차지하였다. 인도에서도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어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7년 전쟁은 참전한 모든 국가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남겼으며 유럽은 전쟁 이전과 거의 바뀐 것이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명목상으로는 패전국이 됐지만 내부 결속, 군제 개혁등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프로이센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국토가 초토화되는등 막대한 전쟁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전 유럽의 열강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군사적 강대함을 알렸다
러시아는 유럽의 국제정치에 참여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영국은 인도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전쟁에서 승리하여 이들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지나친 전비부담은 영국의 재정을 악화시켰다.
프랑스도 국가재정이 악화된 건 물론이고, 캐나다와 미시시피 강 동쪽 전체를 영국에게 빼앗기고 인도 역시 영국에게 넘겨주어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도 넘겨받지 못했다.
스페인은 북아메리카의 플로리다를 영국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얻으며 중남미 일대에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1]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 : 152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있던 가문 중 하나 [2] 슐레지엔(Silesia) : 중세 유럽 최대 공업지대.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독일 제국 시기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폴란드의 남서부, 독일 작센 주의 일부, 체코 북동부 일부에 걸친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에 속해 있다 [3] 선제후 :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황제선거를 개최하여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는데 황제를 선출할 선거권을 가진 신성로마제국 내의 영주 [4] 프로이센 왕국(Kingdom of Prussia) : 신성로마제국 동북족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1701년 왕국을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왕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1701년 1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를 수도 로 삼아 그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제국의 선언을 이끌었으며, 1차대전의 패전과 함께 1918년 11월 9일에 종말을 맞이하였다 [5]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군주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 재위기간(1745년 9월 13일~1765년 8월 18일) [6]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 등으로 불리게 된다 [7]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1709년~1762년) : 제6대 러시아 제국 여황제. 재위(1741년 12월 6일-1762년 1월 5일) [8]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 : 군주 혹은 그 배우자가 되어, 결혼 관계를 매개로 둘 이상의 국가들을 하나로 병합하지 않고 연합하여 주권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통치하는 것 [9] 표트르 3세(Peter III of Russia, 1728년 2월 21일 - 1762년 7월 17일) : 제7대 러시아 황제. 재위(1762년 1월 5일-1762년 7월 9일). 로마노프 왕조의 7번째 군주 [10] 작센 왕국(Kingdom of Saxony) : 아스카니아 가문(Haus Askania)의 작센-비텐베르크 공국(Herzogtum Sachsen-Wittenberg)이 1356년 금인칙서(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군주가 수여한 문서)로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로 부터 선제후 작위를 부여받아 성립된 국가. 1422년 아스카이나 가문의 마지막 선제후가 후손없이 사망하자, 베틴 가문의 프리드리히 4세가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로 임명되었다. 1806년 제국이 해체된 후, 프리드리히 3세는 작센 선제후국을 작센왕국으로 승격시켰다. 작센왕국은 1806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중부에 있던 왕국이다
[1]7년 전쟁으로 영국-프랑스 전쟁은 인도에서도 연장되었다. 이 시기인 1757년 6월 23일 인도 [2]벵골 지역의 패권을 두고 영국 동인도 회사와 프랑스 동인도회사-벵골 토후국 연합군과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은 벵골 지역에서 주도권을 확실시하게 되었고, 이후 100년간 인도 전체를 지배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17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인도의 무굴제국의 중앙지배력이 약화되고 각지역 제후들이 사실상 독립적 정치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지방의 권력자들은 영국, 프랑스등 서양 세력과 연합해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이 틈을 타서 영국과 프랑스도 상호 이익을 위한 싸움에 제후국들을 활용했다.
벵골지역의 태수인 [3]시라즈 우드다울라는 영국 동인도회사에 요새 확장 작업을 중지하고 수비대를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회사는 이를 무시하고 오새를 계속 확장했다. 1756년 6월 16일 [3]시라즈 우드다울라는 군대를 동원해 [5]갤커타로 진격하여 공격하였다. 6월 20일 [5]캘거타의 윌리엄 요새 수비군 146명은 백기를 들었다.
포로가 된 영국인 146명은 지하감옥에 수용되어 하루만에 질식사하고 23명이 살아남았다.
이에 격분한 영국의 [4]로버트 클라이브는 10월 16일 구원군을 이끌고 [5]캘커타로 출발하였다. 1575년 1월 2일 캘커타를 탈환하고 벵골군의 요새들을 격파하였다.
수세에 몰린 [3]시라즈 우드다울라는 영국인들의 재산을 반환하고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2월 9일에 평화협정을 맺는다. 표면적으로 영국과 벵골 사이에 평화가 찾아온듯 했다.
[4]로버트 클라이브는 여세를 몰아 캘거타 북쪽의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거점인 찬데르나고르를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프랑스는 벵골 태수인 [3]시라지 웃 다울라와 동맹을 맺고 개전을 결심한다.
전투는 캘커타에서 북쪽으로 150km 떨어져 있고 벵골 수비국의 수도였던 [6]무르시다바드 남쪽에 위치한 [7]후글리 강변에 위치한 플라시에서 벌어졌다.
1757년 6월 23일 벵골군 5만명과 영국군 3천명이 대치하였다. 영국군은 2천명이 [10]세포이였다.
영국은 사전에 시라지 웃 다울라 군대의 사령관인 [8]미르 자파르를 매수하여 벵골의 태수 자리를 약속했다. 전투 개시와 함께 벵골군은 [8]미르 자파르의 배신으로 대혼란에 빠지면서 패배하였다. 결국 영국 동인도 회사는 캘커타를 점령했다.
플라시 전투 후 [3]시라지는 도주했으나 얼마 뒤 미르 자파르의 부하들에게 체포된 직후 처형되었다. [8]미르 자파르는 약속대로 벵골의 새 태수로 임명되었지만 영국인들의 간섭에 시달리다가 175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연합하여 영국을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하고 강제로 물러났다. 이리하여 영국은 벵골에서의 패권을 확고히 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삼아 인도 식민화 작업에 착수한다.
1758년 10월 29일 쿠달로르 해전에서 프랑스는 참패하여 재해권마저 영국이 완전 장악하게 되었고 [9]퐁디셰리등 프랑스의 주요 인도거점들이 고립된다.
결국 1761년 마지막 거점인 [9]퐁디셰리가 함락되면서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1] 7년 전쟁 : 1756년에서 1763년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일어난 전쟁
[2] 벵골(Bengal) : 방글라데시(동벵골)와 인도의 서벵골 주로 나뉘어 있는 지역을 말하며 서벵골은 힌두교, 동벵골은 이슬람을 많이 믿는다
[3] 시라지 웃 다울라(Siraj ud-Daulah) : 뱅골태수
[4]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1725~1774) : 인도의 식민화시키는 기초를 마련한 영국의 군인, 정치가, 귀족
[5] 캘커타(Kolkata) : 인도의 서벵골 주의 주도
[6] 무르시다바드(Murshidabad) : 인도 서벵골 주에 있는 구
[7] 후글리강(Hooghly River) : 갠지스강 지류. 갤커다는 후글리강에 접해 있다
[8] 미르 자파르(Mir Jafar, 1691~1765) : 시라즈 우드 다올라 휘하의 벵골군 사령관. 시라즈를 배신하고 영국의 승리이후 시라즈의 뒤를 이어 태수가 되었다
[9] 퐁디셰리(Puducherry) : 인도 동남부의 항구 도시
[10] 세포이(sepoy) : 영국 동인도 회사에 채용된 인도 현지 용병을 부르는 명칭
로스바흐 전투는 1757년 11월 5일, 7년 전쟁(1756~1763) 중에 벌어진 중요한 전투로, 프로이센 왕국과 프랑스-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이 격돌한 전투이다. 전투는 독일의 로스바흐 마을 인근에서 벌어졌으며, 프로이센의 [1]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군대가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사례로 유명하다.
당시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은 약 4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프로이센군은 약 2만 2천 명으로 크게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1]프리드리히 2세는 뛰어난 전략적 기동과 기습 전술을 통해 연합군의 허점을 노렸다.
전투의 서막은 연합군이 프로이센군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해 측면을 우회하려는 시도로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프로이센군이 정면 충돌을 피하고 퇴각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1]프리드리히 2세는 연합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기병과 포병을 빠르게 재배치하여 적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하는 기습 전술을 구사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프랑스-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퇴각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짧은 시간 안에 전열이 붕괴되었다. 프로이센군은 단 90분 만에 전투를 끝내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사상자는 약 500명에 불과했지만, 연합군은 약 10,000명의 병력을 잃고 대패했다. 또한 수많은 병사가 포로로 잡혔으며, 무기와 보급품이 대거 프로이센군의 손에 넘어갔다.
전투의 결과로 프로이센은 유럽에서 군사적 위상을 크게 높였으며, 프리드리히 2세는 천재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얻었다. 반면,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사기와 명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로스바흐 전투는 현대적 군사 전략과 기동전의 효율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이후 유럽 각국의 군사 전략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등으로 불리게 된다
[5]로이텐 전투는 7년 전쟁(1756~1763년)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벌어진 중요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1]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뛰어난 전술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4]슐레지엔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7년 전쟁이 한창이던 1757년,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러시아 등과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압박하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1]프리드리히 2세는 [2]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을 격파했지만, 동쪽에서 오스트리아군이 [4]슐레지엔 지역을 장악하고 중심지인 [6]브레슬라우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신속하게 군을 슐레지엔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오스트리아군은 [3]샤를 드 로렌이 지휘했으며, 병력은 약 66,000명에 달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약 36,000명으로 절반에 가까운 병력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뛰어난 전술을 활용하여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의 정면 공격을 예상하도록 유도한 뒤, 신속한 기동력을 통해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기습했다.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의 한쪽 측면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과 기병 돌격이 이어지면서 오스트리아군은 대열이 무너졌고 결국 패주했다.
프로이센군은 약 6,0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오스트리아군은 22,000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히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슐레지엔 지역은 다시 프로이센이 지배하게 되었다.
로이텐 전투로 프리드리히 2세는 유럽 역사에서 최고의 전략가로 자리매김하게 했으며 프로이센의 군사적 위상을 크게 강화했다.
[1]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년~1786년) :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프로이센 국왕(재위:1740년 5월 31일~1786년 8월 17일). 유럽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와 독일 통일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후세에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the Great), 영광의 프리드리히(honor of Frederick)등으로 불리게 된다 [2] 로스바흐 전투(Battle of Rossbach) : 1757년 11월 5일, 7년 전쟁(1756~1763) 중에 벌어진 중요한 전투로, 프로이센 왕국과 프랑스-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이 격돌한 전투 [3] 샤를 드 로렌(Charles Alexander of Lorraine, 1712년 12월 12일 ~ 1780년 7월 4일) : 로렌공국 출신의 오스트리아 장군이자 군인이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 [4] 슐레지엔(Silesia) : 중세 유럽 최대 공업지대. 프로이센 왕국 산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독일 제국 시기까지 존재했으나 현재는 폴란드의 남서부, 독일 작센 주의 일부, 체코 북동부 일부에 걸친 역사적 지역으로 대부분 폴란드에 속해 있다 [5] 로이텐(Leuthen) : 현재 폴란드 슐레지엔 지방에 위치한 마을 [6] 브레슬라우(독일어 Breslau) : 폴란드 남서부에 있는 도시. 역사적으로 슐레지엔 지방의 중심 도시. 프로츠와프(폴란드어: Wrocław)
1762년, 구교인 카톨릭과 신교인 개신교의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에 친 카톨릭 성향이 강한 프랑스 남부 [1]툴루즈 지방의 장 칼라스의 아들은 자신이 개신교라는 이유로 취업 제한과 도박 빚까지 짊어지자 삶을 비탄하여 목을 메어 자살하였다. 그 광경을 본 몇몇 가톨릭 교인들이 개신교도였던 장 칼라스와 그 가족들이 아들의 개종을 막기 위하여 살해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사건이 발생하기 200여년 전에는 4,000여명의 시민들이 이단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을 정도였고, 툴르즈인 지방은 이 날이 다가오면 축제를 벌일 정도로 카톨릭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가톨릭 교인들은 칼라스 가족들을 교수대에 세워야 한다고 외쳐댔다. 이에 고무된 툴루즈시의 관료는 살해 증거가 없는데도 군중의 심리에 따라 칼라스 가족을 체포하였다. 칼라스 가족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적법한 재판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여론에 밀려 장 칼라스(당시 63세)는 [2]거열형에 처형했고 가족들은 추방 당했다.
이 사건에 분노한 [3]볼테르는 이 사건을 널리 알리며 칼라스 가족의 무죄를 입증하고 그를 복권시키기 위해 3년에 걸쳐 지대한 노력을 쏟은 끝에 재심 판결을 이끌어 냈고 장 칼라스의 아들은 자살한 것으로 판정이 번복되면서 무죄를 규명하였다. 1765년 3월9일 칼라스가 처형된 지 3년째 되던 날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이 선고됐다.
볼테르는 1763년에 '관용론'을 출간하였다. 종교적 맹신과 편견으로 법의 이름 아래 죄 없는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간 현실을 고발한 '관용론'은 프랑스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1] 툴루즈(Toulouse) : 프랑스의 남서쪽에 있는 도시. 오트가론(Haute-Garonne)주의 주도시
[2] 거열형 : 수레바퀴에 몸을 묶어 돌리며 죽이는 형벌
[3] 볼테르(Voltaire, 1694년~1778년) :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작가. 그 유명한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종교적 불관용의 희생자들을 변호하고 돕는 활동들을 적극적으로 벌여서 오늘날 관용의 상징적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볼테르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해 가혹하게 탄압하던 개신교도 종교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주장을 한 철학자였다.
1762년(영조 38년) 아버지 [1]영조가 대리청정중인 왕세자 [2]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둬 굶어죽게 만든 사건이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힌지 8일 뒤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영조는 세자의 자리를 회복시키며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를 직접 주관한 후, 그 아들인 세손(조선의 제22대 왕 [3]정조)에게 세자의 지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1] 영조(1694년~1776년) : 조선의 제21대 왕. 재위 1724년~1776년
[2] 사도세자(1735년~1762년) : 조선의 왕세자로 아버지인 21대 임금인 영조와 갈등으로 임오화변으로 뒤주에 갇혀 8일만에 굶어 사망했다. 사후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되었으며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에 장조로 추존되었다
[3]정조(1752년~1800년) : 조선의 제22대 임금, 재위 : 1776년~1800년
1763년 왕립 선언운 프랑스 인디언 전쟁, 7년 전쟁의 종결로 영국은 북미의 프랑스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영국의 국왕 조지 3세는 광대한 북미 영토를 조직화하고 추가전쟁을 피하고 북민 원주민(인디언)과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1763년 10월 7일에 선문문을 발표한다.
이 선언은 기본적으로 미국 식민지인에 대해서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서쪽으로 이주 및 토지 구입을 금지시켰다. 대서양 해안에 있는 영국 식민지와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인디언 소유의 땅과의 경계를 확정한 것이다.이 경계를 Proclamation Line of 1763 이라 한다.
미국 원주민에게 구입한 토지를 영국 왕실이 독점 거래할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이미 해당 지역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많은 식민지 정착민들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이 선언으로 식민지 주민들의 세금이 증가하게 되었고 식민지 정착민들의 불만은 결국 미국 독립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 조지 3세(George William Frederick, 1738년~1820년)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의 국왕.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국왕
*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 : 북아메리카의 산맥으로 일부는 캐나다에, 대부분은 미국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