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프랑스사건기간 : 1337년 5월 24일~1453년 10월 19일, 조회수 : 603, 등록일 : 2020-05-05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1337~1453년(116년)동안 싸운 전쟁이다. 양국이 계속 싸운것은 아니었으며 중간에 몇 차례 휴전과 종전등이 있었다.
프랑스 [4]카페왕조의 왕인 [5]샤를 4세가 후사없이 1328년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5]샤를 4세의 뒤를 이을 후보로 샤를 4세 여동생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왕인 [13]에드워드 3세, 사촌동생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있었다. 결국 필리프가 [7]필리프 6세로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여 [6]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잉글랜드는 1066년 [1]노르망디 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의 일부 영토를 소유하였는데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분쟁이 계속되었다.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국왕이 소유한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아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갖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13]에드워드 3세 시기에 [12]플랜태저넷가가 소유한 프랑스 내 [2]노르망디와 [3]아키텐 지역에 대한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등이 누적되면서 1337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백년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운 잉글랜드가 연승했지만 [23]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프랑스내 영토를 상실하였다.
100년 전쟁 결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국경선과 민족성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100년 전쟁 연표
- 1337년 : 잉글랜드 선전포고
- 1338년 : 잉글랜드의 프랑스 상륙. [13]에드워드 3세
- 1340년 : [20]슬로이스 해전(Battle of Sluys) 잉글랜드의 승리로 해상권 장악
- 1346년 : 크레시 전투. 잉글랜드 승리. 영국의 에드워드 3세 vs 프랑스 [7]필리프 6세
- 1347년~1350년 : 흑사병 창궐, 휴전
- 1350년 : 프랑스 필리프 6세가 죽고 뒤를 이어 [8]장 2세 즉위
- 1356년 :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 잉글랜드 승리.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아들 [14]흑태자 에드워드 vs 장 2세. 장 2세 포로로 잡혀 런던으로 이송
- 1360년 : 브레티니-칼레 조약. 프랑스 브레티니(Brétigny) 지방에서 초안이 작성되어 같은 해 10월 24일에 칼레에서 비준
- 1364년 : 프랑스 [8]장 2세가 죽고 [9]샤를 5세 즉위
- 1364년 : 오레 전투(Bataille d'Auray) 프랑스 승리. 프랑스 [9]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 1369년~1389년 : 개롤라인 전쟁(Caroline War). 프랑스 승리. 프랑스 샤를5세 vs 영국 에드워드 3세. 프랑스는 잃었던 영토들을 회복
- 1377년 :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죽고 [15]리처드 2세 즉위
- 1380년 : 프랑스 샤를 5세가 죽고 [10]샤를 6세 즉위
- 1399년 : 잉글랜드 리처드 2세는 폐위되고 [16]랭커스터 가의 [17]헨리 4세 즉위
- 1413년 : 잉글랜드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18]헨리 5세 즉위
- 1415년 :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 잉글랜드 승리. 잉글랜드의 헨리 5세 vs 샤를 6세
- 1422년 :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19]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 프랑스는 [11]샤를 7세가 왕위 선언
- 1428년 : 잉글랜드의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 포위
- 1429년 : 오를레앙 전투(Orléans) 프랑스 승리. [23]잔 다르크 출현
- 1429년 : 프랑스 [11]샤를 7세 정식으로 즉위
- 1431년 : 잔 다르크 루앙에서 화형
- 1435년 : 1407년부터 시작된 [21]부르고뉴 공국과 프랑스 왕가의 내전. 아라스 조약으로 [22]부르고뉴 공작과 샤를 7세와 평화협정. 이로써 프랑스내에 친 잉글랜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1436년 파리 수복
- 1441년~1453년 : 프랑스의 영토수복
- 백년전쟁의 끝(1475): 잉글랜드의 [2]노르망디와 [3]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 노르망디 공국(Duchy of Normandy ) : 프랑스 왕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의 영지였으나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월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영지가 되었다.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1066년~1135년)가 시작되었다
[2] 노르망디(Normandy) : 프랑스 북서부 지방
[3] 아키텐(Aquitaine) :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심도시는 보르도이다. 서쪽으로 대서양과 접하며 남쪽으로 스페인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4] 카페왕조(Capetian dynasty) : 프랑스의 왕가. 987년~1328년 존속. 14대
[5] 샤를 4세(Charles IV of France, 1294년~1328년) : 프랑스 카페 왕가의 제14대 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22년 1월 3일~1328년 2월 1일)
[6] 발루아가(House of Valois) : 프랑스 왕국의 왕조. 1328년에서 1589년까지 지속. 발루아가(1328년~1498년, 7대), 발루아 오를레앙가(1498년~1515년, 1대), 발루아 앙굴렘가(1515년~1589년, 5대)로 계승
[7] 필리프 6세(Philip VI, 1293년~1350년) :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의 초대 왕(재위 1328년 4월 1일~1350년 8월 22일)
[8] 장 2세(Jean II, 1319년~1364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제2대 국왕(재위 1350년 8월 22일~1364년 4월 8일)
[9] 샤를 5세(Charles V, 1338년~1380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3대 국왕(재위: 1364년 ~ 1380년)
[10]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11] 샤를 7세(Charles Ⅶ, 1403년~1461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5대 국왕(재위 1422년 10월 21일~1461년 8월 16일). 샤를 6세의 5번째 아들
[12] 플랜태저넷가(House of Plantagenet) : 잉글랜드 노르망디 왕조 성립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윌리엄 1세)이었고, 노르망디 왕조의 뒤를 이어 헨리2세가 즉위하여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2세는 프랑스 앙주 백작의 직위를 계승하여 프랑스의 아키텐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13] 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년~1377년) : 잉글랜드의 국왕. 프랑스 필리프 4세의 외손자(1325년–1360년). 100년 전쟁을 일으켰다
[14]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1376년) : 에드워드 3세의 장남. 왕위 계승자였으나 아버지 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왕위는 그의 아들 리처드 2세에게 돌아갔다.
[15] 리처드 2세(Richard II, 1367년~1400년) : 잉글랜드 플랜태저넷가의 제8대 국왕이자 마지막 왕(재위 1377년 6월 21일-1399년 9월 30일)
[16] 랭커스터 가(House of Lancaster) : 플랜태저넷 왕가의 방계. 3명의 잉글랜드 국왕 배출
[17] 헨리 4세(Henry Ⅳ, 1366년~1413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초대 국왕이며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손자(재위 1399년 9월 30일-1413년 3월 20일)
[18]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19] 헨리 6세(Henry VI, 1421년~1471년) : 생후 9개월만에 즉위.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3대 국왕(재위 1422년 8월 31일~1461년 5월 4일). 외할아버지 샤를 6세가 갑자기 사망하여 트루아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의 왕까지 되었다.
[20] 슬로이스(Sluys) : 현재 네덜란드 도시
[21] 부르고뉴 공국(Duchy of Burgundy) : 중세 프랑스 동부의 공국. 1032년 ~ 1477년
[22] 부르고뉴 공작(Philip the Good, 1396년~1467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방계인 부르고뉴-발루아가의 공작으로 필리프 3세라고도 한다
[23]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년~14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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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에 있었던 교황청이 프랑스 [1]아비뇽으로 옮겨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머무르게 한 사건이다.
프랑스 국왕 [2]필리프 4세와 교황 [3]보니파시오 8세의 대립으로 1309년 9월 7일 아나니 사건이 발생하였다. 필리프 4세의 심복인 [4]기욤 드 노가레에게 치욕을 당한 후 심한 충격으로 한달만에 사망하였다. 뒤를 이어 베네딕토 11세가 교황이 되었으나, 그 역시 1년도 안 되어 사망했다.
1305년 새 교황에 프랑스 출신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는 로마가 아닌 프랑스 리옹에서 즉위식을 치러야 했다. 당시 로마는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교황에 선출된 배경에 필리프 4세의 지원이 있었다. 클레멘스 5세는 로마로 돌아가지 않는 대신 프로방스 백작의 소유였던 아비뇽에 머물기로 했다.아비뇽유수가 시작된 것이다.
아비뇽에서 7명의 교황이 생활하였으며 다음과 같다
교황 클레멘스 5세(Papa Clemente V,1305년-1314년) : 제195대 교황(재위: 1305년 11월 14일~1314년 4월 20일) 교황 요한 22세 (Papa Giovanni XXII, 1316년-1334년) : 제196대 교황(재위: 1316년 8월 7일~1334년 12월 4일) 교황 베네딕토 12세 (Papa Benedetto XII, 1334년-1342년) : 제197대 교황(재위: 1334년 12월 30일~1342년 4월 25일) 교황 클레멘스 6세 (Papa Clemente VI, 1342년-1352년) : 제198대 교황(재위: 1342년 5월 7일~1352년 12월 6일) 교황 인노첸시오 6세 (Papa Innocenzo VI, 1352년-1362년) : 제199대 교황(재위: 1352년 12월 18일~1362년 9월 12일) 교황 우르바노 5세 (Papa Urbano V, 1362년-1370년) : 제200대 교황(재위: 1362년 9월 28일~1370년 12월 19일)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Papa Gregorio XI, 1370년-1378년) : 제201대 카톨릭 교황(재위: 1371년 1월 5일~1378년 3월 27일). 프랑스 출신의 마지막 교황
아비뇽 유수는 교황권이 크게 약화한 상징적 사건이다. 아비뇽 유수로 인해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이 정통성을 두고 대립하며 교회는 대분열 시대를 맞고 권위를 실추한다.
[1] 아비뇽(Avignon) :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의 보클뤼즈 데파르트망에 속한 도시 [2] 필리프 4세(Philippe IV, 1268년~1314년) : 프랑스 카페 왕조 제11대 국왕(재위 : 1285년~1314년) [3] 보니파시오 8세(Papa Bonifacio VIII, 1235년~1303년) : 제193대 교황(재위: 1294년 12월 24일 ~ 1303년 10월 11일) [4] 기욤 드 노가레(Guillaume de Nogaret, 1260년~1313년) : 프랑스 왕국의 정치가. 1303년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명을 받고 아나니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 모거경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얼어 붙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하였다. 고려의 의주·정주·인주·철주의 4주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까지 점령하였다.
1360년 음력 1월 고려군은 곧바로 반격하여 서경 탈환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고려군은 여세를 몰아 홍건적을 압록강까지 물리쳤다.
* 공민왕 : 고려 제31대 국왕, 재위:1351년~1374년 * 서경(西京) :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이며 고려시대의 행정구역중 3경(서경,개경,동경 혹은 서경,개경,남경)중 하나이다. 현재의 평양이다.
1361년 9월(공민왕 10년) 홍건적이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여 1개월만에 개경을 함락시켰다. 공민왕은 왕비인 노국 대장 공주와 함께 복주(안동)까지 피난을 떠났다. 이후 고려군은 반격을 준비하여 홍건적을 격파하는 전과가 이어지면서 1362년 1월 개경에서의 치열한 전투에서 홍건적의 절반은 전사하고 절반은 압록강을 건너 도망쳤다.
* 공민왕 : 거려 제31대 국왕, 재위:1351년~1374년
1378년부터 1417년까지 서방교회가 두 명, 나중에는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며 심각한 분열을 겪었던 혼란의 시기로, 중세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통일성을 크게 흔들었다.
서방교회 대분열은 [1]아비뇽 유수로 거슬러 올라간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청은 로마 대신 프랑스 아비뇽에 위치하며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1377년 교황 [2]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켰으나, 그의 사망 후 새 교황 선출 과정에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1378년, 로마 시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 교황 [3]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었지만, 그의 엄격한 개혁 정책과 독단적인 태도로 인해 일부 추기경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고 아비뇽에서 새로운 교황인 [4]클레멘스 7세를 선출했다. 이로 인해 교회는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진영을 형성했다. 서방교회는 두 교황이 서로를 정통성 없는 적으로 간주하며 대립하는 상황에 빠졌다.
유럽 각국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로마파와 아비뇽파로 나뉘어 교황을 지지했으며, 교회는 내부적으로 혼란에 휩싸였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409년 [6][7]피사 공의회에서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삼중 교황 체제가 등장했다.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6][8]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분열은 종식되었다. 공의회는 기존 모든 교황들을 퇴위시키거나 폐위하고, 1417년 [5]마르티노 5세를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하면서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했다.
서방교회의 대분열은 중세 교회의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크게 약화시키고, 신앙심 있는 일반인들에게 교회 지도부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켰다. 이는 이후 종교 개혁과 교회 구조 변화의 배경이 되었으며, 중세 말기 유럽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과 정통성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1]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 :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해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던 시기 [2] 그레고리오 11세(Pope Gregory XI, 1329년~1378년 3월 27일) : 제201대 교황(재위: 1371년 1월 5일 - 1378년 3월 27일) [3] 우르바노 6세(Pope Urban VI, 1318년~1389년 10월 15일)는 제202대 교황(재위: 1378년 4월 8일~1389년 10월 15일) [4]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VII, 1478년 5월 26일~1534년 9월 25일) : 제219대 교황(재위: 1523년 11월 26일~1534년 9월 25일) [5] 마르티노 5세(Pope Martin V, 1368년~1431년 2월 20일) : 제206대 교황(재위: 1417년 11월 11일~1431년 2월 20일) [6] 공의회 : 교회 내 주요 교리와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는 주교들의 공식 회의 [7] 피사 공의회(Council of Pisa, 1409년) : 서방교회 대분열 해결을 시도했으나,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며 오히려 삼중 교황 체제를 초래한 공의회 [8] 콘스탄츠 공의회(Council of Constance) : 1414년부터 1418년까지 열린 공의회로, 서방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선출하여 교회의 통일성을 회복한 회의
황산대첩은 1380년([1]우왕 6) 9월 이성계 등이 전라도 남원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왜구에게 대승을 거둔 전투이다
1350년대부터 왜구의 침략은 비번했다. 왜구는 적게는 20척에서 많게는 400여척의 배로 충청, 전라, 경상도를 포함한 전국을 노략질하였다. 당시의 왜구는 단순한 해적 집단이 아닌 일본의 토호가 직접 운영하는 정규 군대였다.
1380년([1]우왕 6년) 나세와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군은 [7]진포에 주둔하던 왜구의 함선 500여 척을 화포로 모두 불태워버리는 대승을 거두었다. 퇴로가 막혀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왜구는 [4]옥주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왜구와 합류하여 충북 영동·황간을 거쳐 경북 상주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약탈을 자행하여 막심한 피해를 주었다. 왜구들은 이어 경상남도가지 이동하여 함양군인 [8]사근내역을 거쳐 황산으로 모였다. 고려 조정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과 맞섰으나 엄청난 참패를 당했다.
왜구는 남원에 주둔하면서 개경으로 북상하겠다고 위협하자, 고려 조정은 [2]이성계를 [5]양광·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에 임명하여 토벌을 명하였다.
[2]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과 [6]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는 황산 북서쪽의 정산봉에서 전투를 벌였다. 왜구들이 먼저 산 위에 위치하여 공격을 하여 전투 초반 승기를 잡았으나, 지리적 열세를 극복하고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 벌인 고려군에 패배하게 된다.
이때 전사한 왜구가 흘린 피가 냇물로 흘러들어 인근 주민들이 일주일 가까이 물을 마시지 못했다고 한다. 고려군은 왜구로부터 말 1,600필을 포함하여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병기를 거두어들였다. 바위는 왜구의 피로 붉게 불들어 혈암(血巖)이라 했다.
이성계는 불리한 지형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왜구 70여 명만이 지리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황산대첩 이후 왜구의 세력은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약화되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이성계는 고려에서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성계의 군대가 개선하자 영접하러 나온 [3]최영은 눈물을 흘리며 이성계를 치하했다고 한다. [1] 우왕은 이성계와 변안열에게 각각 금 50냥을, 여러 장수들에게 은 50냥씩을 하사하여 전공을 치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였던 박계현의 건의로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금의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일제강점기때 파괴되었다가 1977년 새로 복원되었다.
[1] 우왕(禑王, 1365년~1389년) : 고려의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 10월 30일~1388년 7월 11일) [2] 이성계(李成桂), 1335년~1408년) :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가.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 1392년 8월 13일~1398년 10월 22일) [3]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 : 고려 말기의 장군 겸 정치가. 고려의 충신 [4] 옥주(沃州) :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5] 양광도(楊廣道) : 고려의 행정구역인 5도의 하나로, 양주(현재의 서울 강북지역)와 광주(현재의 서울 강남 지역과 성남시, 하남시, 광주시)의 앞글자를 따서 양광도라 하였다. 현재의 경기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및 강원도 일부 지역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 [6] 아지발도(阿只拔都, ? ~ 1380년) : 고려 우왕(禑王) 6년(1380년) 고려에 침입한 왜구를 지휘했던 일본의 무장으로 매우 수려한 용모와 뛰어난 무용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었는데, 백마를 타고 목과 얼굴을 감싼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채 창을 휘두르며 고려군을 쓰러뜨렸다고 한다. '아지'는 어린아이를 뜻하는 방언이며, '발도'는 몽골어로 용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아지발도는 사람의 이름이 아닌 용감한 소년을 의미한다 [7] 진포(鎭浦) : 금강 하류, 충청남도 서천군 남쪽에 있었던 해포(海浦) [8] 사근내역(沙近乃驛) :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
1383년과 1384년 동안 [3]구 스위스 연방이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해당 지역에서 추구하던 이익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한 스위스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이었으며 중세 말기 상업 도시들이 성장하면서 자치권과 경제적 독립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4]루체른을 비롯한 도시들은 [3]구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며 세력을 확장하자 합스부르크 왕가는 기존의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게 되었다.
1386년, 합스부르크 공작 [2]레오폴드 3세는 루체른과 인근 연방 도시들을 진압하기 위해 약 4,000명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스위스 중부로 진격하였다. 이에 맞선 스위스 연방군은 약 1,500~2,000명 규모로 대부분이 평민 출신 민병대로 열세였으나 그 결속력과 지형 활용 능력은 뛰어났다.
[1]젬파흐는 루체른 호수 북서쪽에 자리한 평야 지대로, 구 스위스 연방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군이 충돌하였다. 지형은 주변에 숲과 언덕이 있어 기동력이 낮은 중무장 기사단에 불리하고 스위스 민병대에게 유리한 환경이었다.
전투는 한여름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 벌어졌으며 중무장을 한 합스부르크 기사단은 더위와 지형으로 인해 기동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반면 스위스군은 긴 창을 이용한 밀집 방어 대형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며, 험준한 지형을 유리하게 활용해 적진을 강하게 압박해 들어갔다. 특히 이 전투에는 [5]아놀드 폰 빙켈리트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스스로 적군의 창을 껴안으며 돌파구를 열어 스위스군이 그 틈을 통해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정확한 사료로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훗날 스위스의 민족 영웅담으로 자리잡게 된다.
결국 스위스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군의 진영을 돌파하여 격파하는 데 성공했고 [2]레오폴드 3세와 함께 수 많은 귀족과 기사들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는 이 지역에서 오스트리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루체른이 지역 수도로 자리 잡고 구스위스 연방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379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가 분할되면서 라인 강 유역에 대한 레오폴트 가문의 지배력은 이미 약화된 상태였다. 이후 몇 년 동안, 합스부르크에 충성을 바치던 지역 유력자들의 전사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이 지역의 지배 구조는 점차 붕괴되었다. 그 결과 [4]루체른, [8]베른, [9]졸로투른을 비롯한 연합 도시들은 방어가 허술해진 합스부르크 영토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389년까지 루체른은 젬파흐 호수, [6]빌리사우, [7]엔틀레부흐 주변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했으며, 이는 오늘날 루체른 주의 영토와 거의 맞먹는 규모였다.
젬파흐 전투는 스위스의 국방 정신과 시민들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자리잡았으며, 이후 스위스 국민들 사이에서 자유와 희생, 독립의 의미를 담은 역사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
[1] 젬파흐(Sempach): 스위스 루체른주의 주르제구에 있는 마을 [2] 레오폴드 3세(Leopold III, 1351년 11월 1일 ~ 1386년 7월 9일) : 오스트리아의 공작(재위 : 1365–1386년 7월 9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며 레오폴드 가문의 시조. 정의의 왕(der Gerechte)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젬파흐 전투에서 사망 [3] 구 스위스 연방(Old Swiss Confederacy) : 신성 로마 제국내에 스위스 중부 지역의 도시와 농촌 공동체들이 자치권과 상업 이익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연합. 오늘날 스위스의 전신 [4] 루체른(Luzern) : 스위스 중부 루체른주에 있는 도시로 루체른 주의 주도 [5] 아놀드 폰 빙켈리트(Arnold von Winkelried) : 스위스 역사의 전설적인 영웅. 16세기 스위스 사학에 따르면 빙켈리트의 희생 덕분에 구 스위스 연방은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공작 레오폴트 3세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6] 빌리사우(Willisau) : 스위스 루체른주 빌리사우구에 있는 자치구 [7] 엔틀레부흐(Entlebuch) : 스위스 루체른주에 있는 지자체 [8] 베른(Bern) : 스위스 수도이며 베른 주 주도 [9] 졸로투른(Entlebuch) : 스위스 졸로투른 주의 주도
14세기 말 고려는 권문세족들의 횡포로 사회 기강이 해이해지고 왕권이 약화되었다. 밖으로는 원에서 명으로 교체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명나라의 [1]홍무제는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원나라 영토였다는 이유로 반환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1387년(우왕 13) 12월에 [2]철령위 설치를 통고하는 한편,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는 등 강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고려는 국왕 [3]우왕과 [4]문하시중 [5]최영등 강경세력은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여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요동정벌이 단행될 때, [7]이성계는 첫째,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하며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침략할 것이며 넷재,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우왕과 문하시중 최영(崔瑩)이 강력하게 주장해 요동정벌이 실행되었다. 고려군의 총사령관은 팔도도통사 [5]최영, 좌군도통사 [8]조민수, 우군통도사 [7]이성계로 편제하여 우왕과 최영은 서경(평양)에 머물면서 독전하고, [7]이성계와 [8]조민수가 이끄는 좌·우군은 음력 4월 18일 서경(평양)을 출발하였다.
이때 동원된 총 병력은 좌·우군 3만 8,830명과 겸군(傔軍) 1만 1,600명, 그리고 말 2만 1,682필이었으나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음력 5월 7일 [6]위화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했고, 마침 큰비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기가 어렵게 되자, [7]이성계는 이러한 실정을 보고하면서 요동정벌을 포기할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요동정벌을 독촉하자,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회군을 결정하였다.
5월 22일 출발하여 6월 1일 개경 근처에 도착하여 6월 3일 최영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위화도 병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최영과 우왕은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궁궐을 장악한 이성계 등은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했다.이를 바탕으로 조선건국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최영은 고봉현(高峰縣, 고양)으로 유배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개경(개성)으로 압송돼 처형되었고,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됐다가 역시 1년뒤 아들 창왕과 함께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 위키백과, 나무위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홍무제(1328년~1398년) : 명나라를 건국한 초대 황제(재위 : 1368년 ~ 1398년). 본명인 주원장(朱元璋)으로 유명하다
[2] 철령위(鐵嶺衛) : 고려 말인 1387년(우왕 13년), 중국 명(明)이 철령 이북의 고려 동북방 변경 지역을 직접 다스리기 위해 설치하려 했던 군사적 행정기구
[3] 우왕(1365년~1389년) : 고려의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1388년). 최영의 사위
[4]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최고 관리로 품계는 종1품이다. 조선의 영의정과 같고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와 비슷한 벼슬이다.
[5] 최영(1316년~1388년) :고려 말기의 장수이자 정치가
[6] 위화도 : 평안북도 신의주에 속해있는 압록강 한 가운데 있는 섬
[7] 이성계(1335년~1408년) : 고려 말 무신이자 정치가.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 1392년~1398년).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8] 조민수(미상 ~ 1391년) : 고려 말의 무신, 군인, 정치가
14세기 말 고려(高麗, 917-1392)는 내적으로는 권문세족들의 횡포로 사회 기강이 해이해지고 왕권이 약화되었고 외적으로는 원(元,1271~1368)에서 명(明, 1368~1644)으로 교체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1388년 신흥 무인세력인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 제32대 우왕과 최영장군등 반대파를 몰아 내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정권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정도전, 조준등)들은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새 나라 건설을 반대한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1392년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들어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을 건국하였다.
1393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정도전을 중심으로 기존 제도를 개혁하기 시작하였다
* 우왕(1365년~1389년) : 고려 제32대 국왕. 재위 1374년~1388년
* 공양왕(1345년~1394년) : 고려의 제34대 국왕이자 마지막 임금. 재위 1389년~1392년
* 최영(1316년~1388년) :고려 말기의 장수이자 정치가
* 위화도회군 : 명나라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등이 위화도(압록강의 하중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위하도는 광복 당시 행정 구역으로는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이며 현재 행정구역으로 신의주시에 속한다
* 하중도 : 강 한 가운데 있는 섬
고려의 온건 개혁파인 정몽주 등을 제거하며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훗날 조선 3대 임금 태종, 재위:1400년~1418년)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고, 막내 이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재상 중심의 정치를 구현하려 한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세자 방석을 보좌하며 이방원을 견제하고,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개국 공신과 종친 세력을 압박하였다.
정도전의 요동 정벌과 사병 혁파로 위기를 느낀 이방원은 정도전일파와 세자인 이방석을 무력으로 제거하였다. 이 난의 결과로 태조 이성계(재위:1392년~1398)가 둘째 이방과에게 양위하여 정종(조선 2대 국왕, 재위: 1398년~1400년)이 즉위하였고 이방원이 왕세자로 책봉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무인년(1398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하며 이방원이 주도하여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성계의 가계]
- 신의왕후 한씨(정비) : 방우(진안대군), 방과(조선 제2대 임금 정종, 영안대군), 방의(익안대군), 방간(회안대군), 방원(조선 제3대 임금 태종, 정안대군), 방연(덕안대군)
- 신덕왕후 강씨(계비) : 방번(무안대군), 방석(의안대군)
* 정몽주(1337~1392) : 고려의 충신(忠臣)으로 정치가·교육자·유학자이다.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 정도전(1342~1398)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유학자, 혁명가이다.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1400년부터 1600년에 걸쳐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으로 파급된 문화, 예술 전반의 혁신 운동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중세의 기독교와 봉건 제도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의 자유, 개성의 존중을 강조한 인간 중심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였다.
영어: Renaissance
이탈리아어: Rinascimento
프랑스어: Renaissance
스페인어: Renacimiento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과 이방간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간의 싸음으로 방간의 난, 박포의 난 등으로도 불린다.
1차 왕자의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던 박포는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하여 불만이 많았다. 이에 왕위 계승에 야심이 있었던 이방간이 인격, 위세등이 이방원에 미치지 못하여 불만이 많자 박포는 이방원이 장차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했다. 이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을 동원하였다. 이방원도 곧 사병을 동원해 개성 한복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국 이방원이 승리하고 이방간은 토산현(황해도 금천)으로 유배되었고, 박포는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이 난의 승리로 이방원은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으며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성계의 가계]
- 신의왕후 한씨(정비) : 방우(진안대군), 방과(조선 제2대 임금 정종, 영안대군), 방의(익안대군), 방간(회안대군), 방원(조선 제3대 임금 태종, 정안대군), 방연(덕안대군)
- 신덕왕후 강씨(계비) : 방번(무안대군), 방석(의안대군)
* 박포 :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1392년 조선을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지중추부사(조선의 정2품 관직)가 되었다. 2등 관직에 불만을 품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아쟁쿠르 전투는 영국의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싸운 백년전쟁(Hundred Years' War)의 전투 중 하나이다. 잉글랜드는 불리한 전력으로 프랑스의 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1415년 10월 25일 프랑스 북부의 아쟁쿠르에서 벌어졌다.
잉글랜드의 [1]헨리 5세는 1415년 8월 13일 약 12,0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 프랑스에 상륙하여 항구도시인 아르플뢰르(Harfleur)의 공성전을 승리하였다. 잉글랜드는 공전전을 시작으로 계속되는 전투와 행군으로 병력 감소 및 사기저하, 전염병등으로 상황이 좋지 않아 잉글랜드 거점인 칼레로 이동하여 잉글랜드로 퇴각하려고 했다.
칼레로 향하는 좁은 아쟁쿠르 지역에서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과 마주하였다. 프랑스군은 선봉대 보병부대와 그 뒤로 귀족들로 이루어진 기사단들이 버티고 있어 사기가 충만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어 선봉대인 보병부대가 진격하였지만 잉글랜드군의 장궁의 세례를 받아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의 기사단이 돌격하였으나 불운하게도 들판에 널브러진 자국의 보병으로 방해를 받았고, 비로 인한 전장이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무거운 기사단의 무거운 갑옷이 방해가 되어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잉글랜드의 장궁의 표적이 되었다.
계속되는 프랑스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귀족인 기사들도 많이 죽었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군의 피해는 미비했다. 결국 프랑스의 정권을 잡고 있었던 [3]부르고뉴파는 프랑스 왕 [2]샤를 6세의 딸 카트린 공주와 [1]헨리5세의 결혼과 이들의 2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이 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트루아 조약(Treaty of Troyes, 1420)을 맺었다. [1]헨리 5세는 승자가 되어 프랑스 공주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영국 사료에 따르면 프랑스군이 수적으로 10배이상으로 우세하여 불리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료는 5배 혹은 비등한 상황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양한 사료 및 자료를 바탕으로 병력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들은 프랑스가 잉글랜드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은 병력이었다고 한다.
이 전쟁은 영국의 셰익스피어의 연극 헨리 5세의 유명한 [4]성 크리스핀의 날의 연설과 관련이 있다. 10월 25일은 카톨릭 성인중 한명인 성 크리스핀의 축일이다.
[1]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2]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3] 부르고뉴파(Burgundian) : 프랑스 귀족의 한 당파. 부르고뉴 공을 중심으로 하여 잉글랜드의 후원을 받으며 아르마냐크파와 대립하였다.
[4] 성 크리스핀의 날의 연설(St Crispin's Day Speech) : 섹스피어의 작품 '헨리5세'에서 헨리5세가 남긴 연설이다. 이중 일부 구절인 "우리는 적고, 우리의 행복은 작으나, 우리는 형제입니다."이 유명한 구절이다. 실제 헨리5세가 연설한 것은 아니고 작품에서 존재한다.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4월 2일 10만여 대군을 이끌고 도시 서쪽 외곽에 자리잡았으며 4월 5일 동로마제국(비잔틴제곡)의 수도인 노스탄티노플 성문앞에 도착했다.
동로마제국의 군사는 대략 7천명으로 그 중 2천명은 용병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천년요새로 불렸던 만큼 단단한 삼중구조의 성벽과 바다로 둘러쌓여 있었다. 육지로 이어지는 서쪽 성벽은 해자를 갖추고 있었다. 해자는 20m넓이와 5~10m 깊이로 되어 있으며, 해자 뒤의 흉벽, 넓이 2m와 높이 5m인 외성벽, 넓이 5m와 높이 12m인 내성벽의 구조로 성벽간의 총 거리가 60m에 달해 있었다.
남쪽성벽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수심 80m의 바마르마라 해협이 감싸고 있어 배한척 댈 수가 없었다. 북서쪽 성벽의 골든혼 입구는 두께 20cm의 굵은 쇠사슬로 연결되어 적군의 배가 진입할 수 없었다.
마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뚫기 위하여 8m가 넘는 청동으로 만든 대포를 배치시켰다. 대포는 헝가리인인 우르반이 제작하였으며 대포를 옮기는데 60마리의 황소와 200명의 군인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1.6km의 사정거리와 포탄의 무게만도 0.5톤에 달했다.
오스만군은 대포로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격의 효과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포는 열에 약해서 한번 발사하면 열이 식을 때까지 최소 3시간을 기다려 다시 발사해야 했다. 급한 마음에 열이 식기전에 발사하여 자체 폭발하여 오스만군의 피해도 있었다. 그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군은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였다.
대포의 공격으로 콘스탄티노플 시민의 심리적 공포는 대단했으며 초반에는 오스만군이 우위를 이어갔다.
대포공격에 이어 성안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오스만군에 고용되었던 용병인 바슈보주크군을 선봉으로 공략하였다. 뒤 이어 최정예 부대인 예니체리군까지 진격하였으나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진두지휘와 강한 결속력에 막혀 성벽을 뚫는데 실패하였다.
계속되는 공격에도 성벽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원정에 나선 오스만제국의 병사들도 지쳐갔다. 메흐메트2세는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뚫기 위해 최후의 묘수를 생각해 낸다.
서북쪽 성벽의 골든혼으로 배를 이동시키기로 하였다. 굵은 쇠사슬에 가로막혀 진입하지 못하자 산으로 배를 이동시켰는데 통나무에 기름을 발라 오스만 병사들이 72척의 배를 끌고 골든혼 해안으로 진입하였다. 단 하루만에 72척의 배를 이동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7일이 걸렸다고 하는 문헌도 있다.
골든혼에 오스만의 배가 진입하자 콘스탄티노플의 서쪽성벽만을 방어하던 병력이 골든혼으로 분산되어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취약해진 서쪽 성벽으로 총공격을 감행하여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였다. 2천년의 명맥을 이어오던 로마제국이 역사속에 사라지는 순간이다. 공략한지 53일만이었으며 마흐메트2세는 비잔틴제국의 상징인 성소피아 사원에서 이슬람의식을 거행했고 파티(Fatih, 정복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메흐메트 2세는 노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뒤 다문화, 다민족 전제군주국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무너지자 적진으로 뛰어들어 전사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은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대격전이었으며 중세가 종식되고 근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역사학계에서는 말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으르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리상의 대발견이라 불리는 유럽인의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단종 1) 11월 10일 (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세종의 차남)이 고명 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의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던 사건이다.
수양대군은 1455년 조카 단종에게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세조(조선 7대 임금, 재위 1455~1468)이다.
수양대군은 반대파 조정 중신들을 살해 계획을 세우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그 유명한 한명회(수양대군의 최측근이자 책사)의 살생부이다. 이 살생부의 첫번째는 좌의정 김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