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

영국 프랑스 사건기간 : 1415년 10월 25일, 조회수 : 566,   등록일 : 2020-05-05
아쟁쿠르 전투는 영국의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이 싸운 백년전쟁(Hundred Years' War)의 전투 중 하나이다. 잉글랜드는 불리한 전력으로 프랑스의 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1415년 10월 25일 프랑스 북부의 아쟁쿠르에서 벌어졌다.

잉글랜드의 [1]헨리 5세는 1415년 8월 13일 약 12,0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 프랑스에 상륙하여 항구도시인 아르플뢰르(Harfleur)의 공성전을 승리하였다. 잉글랜드는 공전전을 시작으로 계속되는 전투와 행군으로 병력 감소 및 사기저하, 전염병등으로 상황이 좋지 않아 잉글랜드 거점인 칼레로 이동하여 잉글랜드로 퇴각하려고 했다. 

칼레로 향하는 좁은 아쟁쿠르 지역에서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과 마주하였다. 프랑스군은 선봉대 보병부대와 그 뒤로 귀족들로 이루어진 기사단들이 버티고 있어 사기가 충만하였다. 전투가 시작되어 선봉대인 보병부대가 진격하였지만 잉글랜드군의 장궁의 세례를 받아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의 기사단이 돌격하였으나 불운하게도 들판에 널브러진 자국의 보병으로 방해를 받았고, 비로 인한 전장이 진흙으로 범벅이 되어 무거운 기사단의 무거운 갑옷이 방해가 되어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잉글랜드의 장궁의 표적이 되었다.

계속되는 프랑스군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귀족인 기사들도 많이 죽었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군의 피해는 미비했다. 결국 프랑스의 정권을 잡고 있었던 [3]부르고뉴파는 프랑스 왕 [2]샤를 6세의 딸 카트린 공주와 [1]헨리5세의 결혼과 이들의 2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이 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트루아 조약(Treaty of Troyes, 1420)을 맺었다. [1]헨리 5세는 승자가 되어 프랑스 공주를 데리고 잉글랜드로 귀환하였다.

영국 사료에 따르면 프랑스군이 수적으로 10배이상으로 우세하여 불리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료는 5배 혹은 비등한 상황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양한 사료 및 자료를 바탕으로 병력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들은 프랑스가 잉글랜드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은 병력이었다고 한다.

이 전쟁은 영국의 셰익스피어의 연극 헨리 5세의 유명한 [4]성 크리스핀의 날의 연설과 관련이 있다. 10월 25일은 카톨릭 성인중 한명인 성 크리스핀의 축일이다. 

[1] 헨리 5세(Henry V, 1386년~1422년) : 잉글랜드 랭커스터 가의 제2대 국왕(재위 1413년 3월 21일-1422년 8월 31일)
[2] 샤를 6세(Charles VI, 1368년~1422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4대 국왕(1380년 9월 16일 ~ 1422년 10월 21일)
[3] 부르고뉴파(Burgundian) : 프랑스 귀족의 한 당파. 부르고뉴 공을 중심으로 하여 잉글랜드의 후원을 받으며 아르마냐크파와 대립하였다.
[4] 성 크리스핀의 날의 연설(St Crispin's Day Speech) : 섹스피어의 작품 '헨리5세'에서 헨리5세가 남긴 연설이다. 이중 일부 구절인 "우리는 적고, 우리의 행복은 작으나, 우리는 형제입니다."이 유명한 구절이다. 실제 헨리5세가 연설한 것은 아니고 작품에서 존재한다.

Copyright 2020 TMSTOR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