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회수 : 859   등록일 : 2021-06-15 ]
  6.25 한국전쟁과 거제도 포로수용소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기습남침을 개시하여 서울은 3일만에 함락되었다. 국군은 미군 및 유엔군의 지원을 얻어 낙동강 교두보를 확보하는 한편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100만여명의 중국군 개입으로 다시 38도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국지전이 전개되었다.

  전쟁중에 늘어난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1951년부터 거제도 고현, 수월지구를 중심으로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고, 인민군 포로 15만, 중국군 포로 2만 등 최대 17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는데 그 중에는 300여명의 여자포로도 있었다. 1951년 7월 10일 최초의 휴전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전쟁포로 문제에서 난항을 격었다.

  특히,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간에 유현살상이 자주 발생하였고,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사령관 돗드 준장이 포로에게 납치되는 등 냉전시대 이념갈등의 축소현장과 같은 모습이었다.

  1953년 6월 18일 한국정부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을 계기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전쟁은 끝났고, 수용소는 폐쇄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지금은 일부 잔존 건물과 당시포로들의 생활상, 막사, 사진, 의복 등 생생한 자료와 기록물들을 바탕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다시 태어나 전쟁역사의 산 교육장 및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조성되었다.

  [출처 : 거제해양관광개발공사 -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팜플렛]
[촬영일 : 2021-06-04]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입구
[촬영일 : 2021-06-04]
UN분수광장 : 6.25참전 16개의 국기와 UN기가 게앙되어 있다
[촬영일 : 2021-06-04]
UN분수광장 : 6.25참전 16개의 국기와 UN기가 게앙되어 있다
[촬영일 : 2021-06-04]
탱크전시관 : 북한군의 남침 선봉에 섰던 소련제 T-34탱크 모형 속에서 6.25한국 전쟁 및 포로수용소의 역사적 현장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촬영일 : 2021-06-04]
탱크전시관 : 북한군의 남침 선봉에 섰던 소련제 T-34탱크 모형 속에서 6.25한국 전쟁 및 포로수용소의 역사적 현장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 디오라마관 :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배치상황, 생활상, 폭동현장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 디오라마관 :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배치상황, 생활상, 폭동현장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 디오라마관 :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배치상황, 생활상, 폭동현장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촬영일 : 2021-06-04]
북한군 남침 :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를 기해 북한군은 38도 선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기습 공격을 개시하면서 남침을 감행했다
[촬영일 : 2021-06-04]
국군의 사수 :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북한군과 진퇴를 거듭하면서 전선을 사수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촬영일 : 2021-06-04]
6.25역사관 : 전쟁 발발에서 휴전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의 참전 16개군 현황, 피해현황, 전쟁속 삶의 모습등이 재현된 전쟁역사의 교육장이다
[촬영일 : 2021-06-04]
대동강 철교 :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이 다시 후퇴하게 되자 피란민들은 폭파된 평양의 대동강 철교를 타고 자유를 향해 처절하고 험난한 피란길에 올랐다
[촬영일 : 2021-06-04]
MP다리 : 헌병초소가 지켜선 다리는 포로 출입의 주요 관문이었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생활관 : 제네바 협약의 인도주의 원칙에 의거하여 수용소 생활을 영위했던 포로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당시의 사진과 모형, 영상 자료를 통해 엿볼수 있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생포관 :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반격과 공세에 밀려 많은 북한군이 투항하였으며 생포된 포로들은 이후 대부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생포관 :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반격과 공세에 투항하는 북한군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포로 생포상황의 긴박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송 : 포로들은 LST함정에 승선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해상 이송되었고 전쟁 포로의 신분으로 수용소 생활을 시작하였다
[촬영일 : 2021-06-04]
여자포로관 : 남자위주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일부 여자포로들도 생포되어 수송되었으며 그들도 남자포로와 동일한 수용소생활을 하였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사상대립관 : 포로수용소내의 포로들은 점차 조직화되어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갈라진채 사상대립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갈등과 증오가 시작되었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폭동체험관 : 국로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친공포로들의 폭동과 친공, 반공 포로들간의 격돌장면이 최첨단 복합연출기법으로 재현되어 긴박감과 위기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폭동체험관 : 국로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친공포로들의 폭동과 친공, 반공 포로들간의 격돌장면이 최첨단 복합연출기법으로 재현되어 긴박감과 위기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설득관 : 판문점에서 송환희망 포로의 교환이 신속히 이루어졌지만 본국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집요한 귀환압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포로설득관은 포로교환에 앞서 진행되었던 송환심사 과정과 결과등 다양하게 연출된 영상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만날 수 있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귀환 및 송환 : 휴전과 함께 송환희망 포로의 북송이 마무리 되었으며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드디어 석방되어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촬영일 : 2021-06-04]
위령탑 : 거제도 포로수용소내에서는 포로들간의 친공, 반공 이념대립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이 위령탑은 당시 친공, 반공간의 이념대립에서 희생된 2,000여명 전쟁포로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막사 : 포로를 수용하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천막 막사로 포로들을 수용하고 내부에는 가마니 등을 깔아 추위를 막았다. 포로의 수가 급증하자 포로 자체인력으로 흙벽돌 막사를 건립하였으며, 포로막사의 변천과정을 재현하였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막사 : 포로를 수용하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천막 막사로 포로들을 수용하고 내부에는 가마니 등을 깔아 추위를 막았다. 포로의 수가 급증하자 포로 자체인력으로 흙벽돌 막사를 건립하였으며, 포로막사의 변천과정을 재현하였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막사 : 포로를 수용하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천막 막사로 포로들을 수용하고 내부에는 가마니 등을 깔아 추위를 막았다. 포로의 수가 급증하자 포로 자체인력으로 흙벽돌 막사를 건립하였으며, 포로막사의 변천과정을 재현하였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의 대변기와 소변기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의 대변기와 소변기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 취사장 : 당시 17만 3천여 명의 포로들의 취사를 담당했던 곳으로 포로들 중에서 취사병을 선발하여 운영하였다. 특히 취사장에서는 친공, 반공 포로들이 각각 비밀 연락을 주고받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 취사장 : 당시 17만 3천여 명의 포로들의 취사를 담당했던 곳으로 포로들 중에서 취사병을 선발하여 운영하였다. 특히 취사장에서는 친공, 반공 포로들이 각각 비밀 연락을 주고받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 취사장 : 당시 17만 3천여 명의 포로들의 취사를 담당했던 곳으로 포로들 중에서 취사병을 선발하여 운영하였다. 특히 취사장에서는 친공, 반공 포로들이 각각 비밀 연락을 주고받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 경비초소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 경비대본부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 경비대본부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 남아있는 유적지 : 미군 경비병들이 사용하던 PX의 자리이며 바닥이 둥글게 콘크리트로 포장된 부분이 무도장의 흔적으로 자연석과 시멘트로 만들었다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 경비대본부
[촬영일 : 2021-06-04]
포로수용소 남아있는 유적지 : 당시 포로들의 경비를 담당했던 병사들의 막사
[촬영일 : 2021-06-04]
78수용소 게이트 및 위병소 : 78수용소는 인접한 친공수용소인 76,77수용소와 함께 1951년 9월 17일 대대적인 반동숙청을 실시한 9.17폭동의 주동 수용소이다. 이 폭동으로 무려 400여 명의 반공 청년들이 인민재판으로 처형되었으며 이곳은 78수용소의 정문을 당시 산진에 의해 재현하였다
[촬영일 : 2021-06-04]
78수용소 게이트 및 위병소 : 78수용소는 인접한 친공수용소인 76,77수용소와 함께 1951년 9월 17일 대대적인 반동숙청을 실시한 9.17폭동의 주동 수용소이다. 이 폭동으로 무려 400여 명의 반공 청년들이 인민재판으로 처형되었으며 이곳은 78수용소의 정문을 당시 산진에 의해 재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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