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서울(Seoul) 창덕궁 목록 슬라이드 보기
[ 조회수 : 385   등록일 : 2021-05-11 ]
  1405년(태종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광해군 때에 재건된 창덕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글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슬라이드 보기
[촬영일 :2021-05-05]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2층 목조건물이다. 왕이 행차를 하거나 국가행사를 치를 때 드나든 문이고 신하들은 서편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남쪽에 종묘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돈화문은 궁권의 남서쪽 끝에 세워졌다. 궁궐의 중심부가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돈화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금천교를 건너 정전인 인정전 구역과 연결된다. 1609년에 다시 세운 돈화문의 아래층은 출입용. 위층은 감시전망용으로 사용되었다(출처 : 창덕궁 안내판)
[촬영일 :2021-05-05]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敦化門) : 수문장
[촬영일 :2021-05-05]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금천교(錦川橋) :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촬영일 :2021-06-16]
창덕궁 금천교(錦川橋) :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촬영일 :2021-05-05]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 궁궐과 왕릉 등에서,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건너던 물길)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다
[촬영일 :2021-06-16]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 궁궐과 왕릉 등에서,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건너던 물길)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진선문(進善門) : 창덕궁의 중문이다. 진선문을 지나면 좌측으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정문인 인정문(仁政門)이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으로 보이는 문은 숙장문(肅章門) 이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인정문(仁政門) : 인정문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인 인정전(仁政殿)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의 인정전(仁政殿) : 인정문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인 인정전(仁政殿)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촬영일 :2021-06-16]
창덕궁 인정문(仁政門) : 인정문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인 인정전(仁政殿)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촬영일 :2021-06-16]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촬영일 :2021-05-05]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촬영일 :2021-06-16]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촬영일 :2021-06-16]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촬영일 :2023-12-31]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촬영일 :2021-06-16]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내려다 본 품계석과 인정문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숙장문(肅章門) : 인정문(仁政門) 바깥 동남쪽에 위치한 삼문(三門)이다. 숙장문을 지나면 좌측으로 선정문(宣政門)과 희정당(熙政堂)이 위치해 있다.
[촬영일 :2021-05-05]
창덕궁 숙장문(肅章門) : 인정문(仁政門) 바깥 동남쪽에 위치한 삼문(三門)이다. 숙장문을 지나면 좌측으로 선정문(宣政門)과 희정당(熙政堂)이 위치해 있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으로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궁궐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으로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궁궐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선평문(宣平門) : 대조전의 정문이다. 선평(宣平) 뜻은 [화평(平)을 세상에 펼친다(宣)]이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조선조 왕실이 생활하던 건물이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조선조 왕실이 생활하던 건물이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조선조 왕실이 생활하던 건물이다
[촬영일 :2021-05-05]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촬영일 :2021-05-26]
선정문(宣政門) :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선정전(宣政殿)의 정문이다
[촬영일 :2021-05-26]
선정문(宣政門) :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선정전(宣政殿)의 정문이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선정전(宣政殿) :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곳으로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선정전(宣政殿) :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곳으로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촬영일 :2021-05-26]
창덕궁 선정전(宣政殿) :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곳으로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촬영일 :2021-06-16]
선원전(璿源殿) :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태조 이하 영조, 정조등 여러 임금의 어진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새 선원전을 후원깊숙한 곳에 건립하여 제사 기능을 옮기면서 이곳 선원전을 빈 곳이 되었다
[촬영일 :2021-05-05]
낙선재(樂善齋) 입구앞 광장
[촬영일 :2021-05-26]
낙선재(樂善齋) :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청덕궁관리소)
[촬영일 :2021-05-26]
낙선재(樂善齋) :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청덕궁관리소)
[촬영일 :2021-05-26]
수강재(壽康齋) :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청덕궁관리소)
[촬영일 :2021-05-05]
석복헌(錫福軒) :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청덕궁관리소)
[촬영일 :2021-05-26]
수강재(壽康齋) :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청덕궁관리소)
[촬영일 :2021-05-26]
수강재(壽康齋) :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청덕궁관리소)
[촬영일 :2021-05-05]
창덕궁 승화루(承華樓) : 창덕궁 내에 있는 누각이다. 높게 자리한 승화루에서는 창덕궁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촬영일 :2021-05-05]
세자의 거처인 중희당(重熙堂)은 고종 28년 사라지고 길이 났으며 길 오른쪽으로는 아무런 담도 없이 육각형의 정자인 삼삼와(三三窩)와 월랑인 칠분서(七分序)가 있고 작은 문이 하나 있다. 이곳은 중희당의 부속 건물이다(월랑:궁궐앞이나 좌우에 지은 줄행랑)
[촬영일 :2021-06-16]
창덕궁 향나무는 나이가 약 750년 된 것으로 추정되면 높이 5.6m, 뿌리부분 둘레 5.9m이다. 향나무의 목재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된다. 이곳에 향나무가 심어진 것은 동쪽에 있는 선원전이 역대 임금들을 위한 제례의 공간인 것과 관련이 있다. 1830년 무렵에 그려진 창덕궁 그림(동궐도)에서도 이 향나무를 찾아볼 수 있다.[출처 : 창걱궁 향나무 안내판]
[촬영일 :2021-06-16]
창덕궁 향나무는 나이가 약 750년 된 것으로 추정되면 높이 5.6m, 뿌리부분 둘레 5.9m이다. 향나무의 목재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된다. 이곳에 향나무가 심어진 것은 동쪽에 있는 선원전이 역대 임금들을 위한 제례의 공간인 것과 관련이 있다. 1830년 무렵에 그려진 창덕궁 그림(동궐도)에서도 이 향나무를 찾아볼 수 있다.[출처 : 창걱궁 향나무 안내판]
[촬영일 :2023-12-31]
설원속의 인정전
[촬영일 :2023-12-31]
희정당(熙政堂) : 희정당은 왕의 거처이며 집무실이다. 원래의 이름은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으로 바꾸었다.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집무실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에 불에 타 없어진 희정당을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전하여 건축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다르다. 앞쪽에는 자동차를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에는 유리창과 전등, 군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유럽풍의 가구를 갖추었다. -창덕궁 희정당 푯말-
[촬영일 :2023-12-31]
희정당(熙政堂) : 희정당은 왕의 거처이며 집무실이다. 원래의 이름은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으로 바꾸었다.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집무실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에 불에 타 없어진 희정당을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전하여 건축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다르다. 앞쪽에는 자동차를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에는 유리창과 전등, 군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유럽풍의 가구를 갖추었다. -창덕궁 희정당 푯말-
[촬영일 :2023-12-31]
희정당(熙政堂) : 희정당은 왕의 거처이며 집무실이다. 원래의 이름은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으로 바꾸었다.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집무실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에 불에 타 없어진 희정당을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전하여 건축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다르다. 앞쪽에는 자동차를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에는 유리창과 전등, 군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유럽풍의 가구를 갖추었다. -창덕궁 희정당 푯말-
[촬영일 :2023-12-31]
희정당(熙政堂) : 희정당은 왕의 거처이며 집무실이다. 원래의 이름은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으로 바꾸었다.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집무실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에 불에 타 없어진 희정당을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전하여 건축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다르다. 앞쪽에는 자동차를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에는 유리창과 전등, 군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유럽풍의 가구를 갖추었다. -창덕궁 희정당 푯말-
[촬영일 :2023-12-31]
희정당(熙政堂) : 희정당은 왕의 거처이며 집무실이다. 원래의 이름은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으로 바꾸었다.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집무실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에 불에 타 없어진 희정당을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전하여 건축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다르다. 앞쪽에는 자동차를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에는 유리창과 전등, 군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유럽풍의 가구를 갖추었다. -창덕궁 희정당 푯말-
[촬영일 :2023-12-31]
희정당(熙政堂) : 희정당은 왕의 거처이며 집무실이다. 원래의 이름은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대에 희정당으로 바꾸었다. 선정전이 종종 국장에 사용되면서 또 다른 집무실로 활용되었고, 왕의 침실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에 불에 타 없어진 희정당을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전하여 건축한 것으로, 원래의 모습과 다르다. 앞쪽에는 자동차를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현관이 마련되고, 내부에는 유리창과 전등, 군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유럽풍의 가구를 갖추었다. -창덕궁 희정당 푯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