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회수 : 553   등록일 : 2021-04-21 ]
  조선시대의 5대 궁궐로 꼽히는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되어 조선 후기 동안 중요한 궁궐로 자리매김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지만 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 동궐이라 부르는 데 이 말과 짝을 이루어 경희궁을 서궐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경희궁에는 정전인 승정전과 편전인 자정전 외에도, 임금의 침전으로 융복전과 회상전이라는 두 개의 침전이 있었으며 흥정당과 장락전을 비롯한 수 많은 전각들이 지형에 맞게 어우려져 있었다. 궁에는 정문인 흥화문이 있고 동쪽에는 흥원문, 서쪽에는 숭의문, 남쪽에는 개양문, 북쪽에는 무덕문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소유가 넘어가면서 전각들이 철거하여 이전되었고 궁역이 축소되어 궁궐로서의 웅장한 면모를 잃었다. 지금의 경희궁은 몇몇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대부분의 전각들이 사라지고 궁궐터도 많이 축소되어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출처 : 경희궁 안내판]

  경희궁에 살았던 왕은 인조에서 철종까지 10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 머물렀던 왕은 영조이다. 또한 13년간 경희궁에 머물렀던 숙종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1625년 경현당에서 행해진 소현세자 관례를 시작으로 경종과 정조가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숙종과 헌종의 가례가 치러졌고, 숙종을 비롯하여 영조와 순조등이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숙종부터 정조 즉위까지 경희궁은 최전성기였으며, 왕을 비롯해 왕비와 후궁 등이 생활한 일상공간이었다. 인현황우, 희빈장씨, 혜경궁 홍씨(현경왕후)도 경희궁에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 인현왕후(1667년~1701년) :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계비
* 희빈장씨(1659년~1701년) : 장희빈.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빈. 제20대 왕 경종의 어머니
* 헌경왕후(1735년~1816년) : 혜경궁 홍씨.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차남 장조(사도세자)의 비.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어머니
[촬영일 : 2021-04-21]
흥화문(興化門) : 경희궁의 정문.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떼어갔었다. 광복 이후 박문사가 폐지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그 정문으로 사용하였었다.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출처:서울역사박물관)
[촬영일 : 2021-04-21]
숭정문(崇政門) : 경희궁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
[촬영일 : 2021-04-21]
숭정전(崇政殿) : 경희궁의 정전.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이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숭정전은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건물을 일본인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촬영일 : 2021-04-21]
숭정전(崇政殿) 측면 :경희궁의 정전.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이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숭정전은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건물을 일본인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촬영일 : 2021-04-21]
숭정전(崇政殿)의 어전
[촬영일 : 2021-04-21]
숭정전(崇政殿)에서 내려다 본 봉황의 계단과 품계석
[촬영일 : 2021-04-21]
숭정전(崇政殿)의 좌측 전경
[촬영일 : 2021-04-21]
숭정전(崇政殿)의 좌측 전경
[촬영일 : 2021-04-21]
자정문(資政門) : 자정전의 정문. 숭정전뒷편에 위치해 있다
[촬영일 : 2021-04-21]
자정전(資政殿) : 경희궁의 편전.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현재건물은 복원한 것이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촬영일 : 2021-04-21]
자정전(資政殿) : 경희궁의 편전.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현재건물은 복원한 것이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촬영일 : 2021-04-21]
자정문(資政門) 우측벽 안쪽 전경
[촬영일 : 2021-04-21]
자정전(資政殿)의 뒷편 : 4월 따사한 봄날의 철쭉꽃과 날개짓하는 까치 한마리가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의 여유를 갖게한다
[촬영일 : 2021-04-21]
태령전(泰寧殿) : 본래는 특별한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았던 건물이다. 영조 어진이 완성되자 1744년(영조 20)에 태령전을 중수하여 보관하였다. 현재건물은 복원한 것이다
[촬영일 : 2021-04-21]
서암(瑞巖) :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이 바위는 임금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이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촬영일 : 2021-04-21]
서암(瑞巖) :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이 바위는 임금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이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촬영일 : 2021-04-21]
금천교(禁川橋) :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안에 흐르던 금천에 놓여 있던 다리로 1618년(광해군10)에 경희궁을 조성하면서 설치하였다. 금천교는 홍예교로 두 개의 아치로 구성되어 있다. 난간의 돌짐승이나 홍예 상이에 새겨진 도깨비 얼굴은 대궐바깥의 나쁜 기운이 궁궐 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금천교는 일제강점기 때 이곳에 경성중학교가 설립되면서 땅에 묻혔으나 서울역사박물관 건립과 함께 발견된 옛 석조물을 바탕으로 2001년에 복원되었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촬영일 : 2024-06-15]
숭정전(崇政殿) : 경희궁의 정전.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진 곳이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숭정전은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건물을 일본인 사찰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촬영일 : 2024-06-15]
자정문(資政門) : 자정전의 정문. 숭정전뒷편에 위치해 있다
[촬영일 : 2024-06-15]
자정전(資政殿) : 경희궁의 편전.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하였다. 현재건물은 복원한 것이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촬영일 : 2024-06-15]
서암(瑞巖) :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이다. 바위샘이라는 뜻을 갖는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샘이 그 속에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이 바위는 임금님 바위라는 뜻의 '왕암(王巖)'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이 곳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속설도 있다. 1708년(숙종 34)에 이름을 상서로운 바위라는 뜻의 '서암(瑞巖)'으로 고치고, 숙종이 직접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게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서암을 새겨두었던 사방석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이 옛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촬영일 : 2024-06-15]
경희궁의 정전 숭정전(崇政殿)에서 내려다 본 봉황의 계단과 품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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